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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현빈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현빈을 잊지 못했다. 그는 누구를 향한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군대로 떠나갔다. 현빈이 떠나간 지 반년이 다 되가지만 아직도 내 책꽂이에는 그가 넘겨보던 책들이 얌전히 꽂혀져있다. TV 에선 아직도 그 반년이 다 지나가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적잖은 현빈이 광고로 등장한다. 듣자하니 현빈을 앞세운 해병이야기를 담은 책도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한다. 이 책을 빌미로 새삼스럽게 현빈의 브랜드 파워를 논하고 싶진 않다. 현빈은 떠났지만 다시 올 날을 기다리는 아줌마들의 심리를 고백하고 싶어서다. 아니 현빈 입대 후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있는 그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현빈은 갔지만 김주원 사장은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재벌회장의 아들과 그 회사 말단 여직원의 로맨스는 미니시리즈의 진부한 흥행공식이다. 현빈은 여기서 배출된 수많은 실장과 본부장의 2010년 계보에 위치한다. 실장의 마음을 뺏은 여주인공이 고졸이건, 시한부 인생이건, 스턴트맨이건 그따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현빈이 떠나도 실장은 무한히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유학파와 스포츠카, 호텔 바와 사교파티로 설명되는 그들 모든 실장은 바로 저자가 지적하는 ‘도시 중간계급 여성’의 판타지를 상징하는 욕망의 로맨티스트다. 이 직장 내의 변함없는 수사학이 연예계로 변형, 이식된 드라마가 ‘최고의 사랑’이었다. 현빈 떠나간 가슴을 독고진으로 달래면 그만인 사안이었다. 엊그제 ‘여인의 향기’라는 드라마를 보니 이 공식은 그대로 복제되었고 우리는 다시 독고진 떠나간 서운함을 조금 더 젊은 실장의 눈망울로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여성으로서 이런 이야기는 내게 상당히 흥미롭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임성한식의 연속극을 넘겨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는데(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보다 확실한 타겟은 남성은 아니지 싶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컨텐츠를 주도하는 형식의 통속성에 굴복당하는 느낌. 그러나 그러한 불쾌를 알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은 쾌락의 범주에 속하였다. 우리가 김수현 드라마를 통해 ‘불륜이라는 금지의 명령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쾌락을 재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택광의 문화비평을 통해 ‘우월이라는 불편한 비평 뒤에 숨어 있는 독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환기’하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재미나면서도 불쾌했던 건 반복되는 (재계몽의 대상으로서) 우월감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럼에도 지속시키고 싶은 호기심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은 정확하게 저자가 말하는 주이상스의 영역에 편입된다. 피할 수 없는 가독성의 주이상스, 물론 그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저자가 할 일이겠지만(중이 제 머리 깎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능력부족으로 그냥 그 앞면에 대에서만 말하겠다. 간만에 글을 좀 끄적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잉여(?) 재미를 설명하고 싶게 하는지.



문화비평은 미완성이다

   평가단의 지위(?)와 역할을 이용해 나쁜 점부터 말하겠다. 이 책은 크게 ‘철학과 비평사이’, ‘사회와 정치 사이’, ‘문화와 인물 사이’라는 대 구분으로 나뉘어 약 구십여 개의 꼭지가 기사모음처럼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 이와 비슷한 글들을 읽은 것 까지 합치면 백 여 개 이상은 될 듯하다. 문제는 바로 백번이나 같은 방식의 글을 읽었다는 것인데 이 반복성이 주입하는 효과가 딱 반반이다. 저자가 분석하는 해석툴이 어느 순간 단순하게 느껴져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정치와 사회현상, 이슈가 된 사건, 방송 이야기등 저자가 해부하는 매스와 칼질의 방향은 언제나 똑같다. 저자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이상하게도 고급한 문장으로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그 반복과 방식의 강요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반복효과로 그가 말하는 문화비평의 방법론을 하나 학습한 것 같다는 보람은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배운게 있다면 그 부분이다.

   또 하나, 책의 구성상 맨 앞에 제시된 ‘철학과 비평사이’의 단락이 어쩐지 앞으로 전개될 모든 비평의 배경, 혹은 기둥으로 제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어색했다) 특히 나같이 저자가 언급하는 철학자의 책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모두 성급한 논리의 비약으로 느껴질 소지가 많다. 시대를 넘나드는 맥락의 전개가 다소 무리있어 보였다. 이러이러한 철학적 지식과 고민한 과정이 있었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타당성의 논리로 보여 약간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달까. 저자는 이 책을 처음부터 서론, 본론, 결론의 방향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모아진 글들을 대주제 하에 엮어서 편집하였을 터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은 없다. 어찌 보면 (백여 개의 글을 덮고 난 생각인데)발전이 없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책의 제목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인데 내 생각에 이 책의 보다 정확한 제목은 ’이것은 문화비평의 한 부분이다‘, 혹은 ’단계이다‘ 정도가 맞을 듯하다. 저자의 말대로 문화비평이 사회 현상에 대한 발본과 그 사유를 통해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라면 이 책에서 밝혀낸 사회구조는 아직 공동의 질문인 채 인 듯하기 때문이다. 어쩐지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분석된 단편적인 징후들을 모아 다시 총체적으로 통합된 사회구조의 평면도를, 그 3D를 그려내어야 할 듯하다. 분석된 퍼즐들을 알아서 맞추는 것이 혹 우리들 독자의 몫이라면 그는 아직 문화비평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뚜렷한 결론이 없다하더라도 그 없는 이유라도 결론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단락이 에필로그처럼 부연되었다면 자극의 쾌락을 자의적으로 중단할 동기부여는 충분했을 듯하다.(<인지자본주의>의 경우 방대한 본론에 비해 확실한 결론은 없었지만 현재 상태에서의 기대나 바람을 조심스런 결론으로 언급하였다) 지금 아직 비평을 하고 있는 단계였고 아쉽게도 우리는 그 과정을 저자와 함께 체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조교, 학생이 아니고 독자이므로 이 책은 강의 교재가 아니고 인문서적이므로 나는 그 부분이 아쉽고 모자랐다고 생각한다. 특히 앞부분에 철학과 비평의 관계를 서론처럼 언급했다면 더욱 사회현상과 인물을 지나쳐온 마지막 결론부는 이러한 결과를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에두를 방향이었어도 언급은 되었어야 한다고 본다. 향후 공통의 과제쯤은 정리해 주었어야 한다. 결론이 부재한 이 책은 자칫 허무적인 냉소의 분위기로 모든 비평이 마감될 여지가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도 이 현상은 반복된다. 이는 유치하더라도 결론을 내고 다음의 발전을 기약하는 일부 정치인의 서적만 못하다고 할수 있다. 혼자만 저 높은 혹은 저 낮은 곳에서 초탈한 시선으로 세상을 견지한 후 세상의 변혁 가능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로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탈정치적인 결과다. 저자는 문화비평이 정치적인 것이라 정의하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대로 그를 해석하자면 그는 ’정치주의자이면서도 선명하게 정치주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교수님이라는 생각이다. 문화비평이라는 장르가 원래 미완성을 그 완성으로 한다는 주석을 달아주셨다면 모를까.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다

   이 책에서 언급된 한국 사회의 문화현상은 한국이라는 대극장에서 상영된 억압 장르의 스펙타클 영상이었고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저자가 이러한 현상들을 분석하는 방법은 ‘동전 뒤집기’와 ‘뫼비우스의 띠’ 를 살펴보는 관찰기법이다. 전복과 입체화. 동전의 나머지 한 면의 실상을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드러난 이데올로기 이면의 은폐된 진실을 포착하는 것. 진실의 배면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 예를 들어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맹렬히 비난하는 대중을 말할 땐 ‘유영철을 논하면서 유영철은 없다’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이미 갖고 있던 희대의 살인마 법칙에 부합하는 유영철을 재차 발견하여 한껏 사연을 추억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길태 사건 이면에는 파렴치한 악인에 가려진 재개발 지역의 피해자, 여중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시선이다. 유영철이라는 동전 뒷면엔 ‘살인의 추억’이라는 집단 심리가 있고 김길태라는 뫼비우스의 띠에는 ‘재개발 도시정책, 한국식 자본주의’가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식으로 세계는 없어도 세계화는 있다, 민족은 없고 민족주의는 있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사실 동전 뒷면이 추잡하든 뜻밖이든 그것도 동전이긴 하므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비쳐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뫼비우스의 띠는 끝이 없는 블랙홀이므로 결과가 미궁으로 빠지는 국면도 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자칫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다, 문화비평에만 모든 게 있다,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동전의 뒷면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국 하나로 이어진 징후에 숨어있는 정치경제적 측면을 말한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가 가장 많이 주장했던 것은 그러한 증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에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가시적 효과 때문에 저자로부터 지적당한 불쾌감이 결국 이 책을 향한 불만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에 의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증상의 주체는 (여성이건 남성이건)한국의 도시 중간계급이다.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계급으로서 이들은 ‘쾌락의 평등주의’에 길들여져 있으며 그들에게서 한국적 자아의 도착증 상태를 발견한다 주장한다. 저자가 투시하는 렌즈는 중간계급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세금 올리는 건 반대하면서 복지정책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분열 증세이다.

   
 


아무리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부자나 연예인에 대한 신비화), 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법에 대한 반발(인터넷 댓글에서 드러나는 우상 파괴), 그리고 절대 악이나 권력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강력한 권에 대한 갈망) 이런 악과 권력에 자신이 귀속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미국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이런 모순이 바로 도착증의 구조다.       -117p

 
   

    
   이 책에서 이들 중간계급은 사회구조적으로 금지된 억압을 방어하는 기제로, 기존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주이상스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주인공으로 근거한다. 유영철도 이순신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신세경도 소녀시대도 이들에 의해 그때그때 호출된 유령이자 판타지라 말한다. 월드컵은 기적이라는 유토피아 충동을 한데 모아 논리로 끌어낸 문화형식이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며 촛불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다시 신자유주의에 더욱 충실한 논리로 해결하고자 하는 역설이라 설명한다. <쩐의 전쟁>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한국 중간계급’의 판타지며, 반지성주의는 ‘먹고사니즘’이라는 대한민국 유일의 이데올로기와 섭동하는 판타지며, 부자 신드롬은 ‘계급적 대립의 리얼리티를 은폐’하는 판타지라 부연한다. 저자는 이들의 판타지를 다양한 종류로 구분짓고 저자의 법칙대로 뫼비우스의 프레임 속으로 도식화, 정형화한다. 문화비평은 우리 사회 각종 판타지를 발본하여 판타지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이들은 북핵의 공포보다는 파산의 공포를 더 두려워하며, 아파트에서의 삶이 아닌 아파트 가격의 즐거움에 중독된 존재들이다. 지속적인 경쟁을 통한 즐거움을 원하며 소말리아 해적소탕 같은 군사행동은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협받는 전쟁은 거부한다. 월드컵 응원녀는 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한국사회가 나눠 갖는 절대적 대상’이며 소녀시대 역시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실상이 아니고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인형으로서 비굴한 오빠들의 판타지를 의미한다. 미드는 미혼여성의 자기계발 욕망 판타지며 막장 드라마는 중산층에서 누락된 아줌마들의 판타지다. 중간계급의 불안과 분노를 섹슈얼 판타지로 극장화 한 것이 김수현 드라마이다. 소주 마시는 여성은 ‘몰락해가는 중간계급에 바쳐지는 조시’이며 그랜저는 수입세단까지는 힘들어도 한국세단까지는 가능한 중간계급의 욕망을 대리한다. 타블로 논란은 중간계급이 주체가 되어 도착적 퍼포먼스의 의미를 실행한 근대적 마녀사냥이었다. <워낭소리>를 보고 흘린 눈물은 농촌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지금은 잊어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독설이 신해철을 진보로 보이게 했다면 그것은 폭로가 자본주의의 상품화를 작동시키는 논리와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괴담과 소문의 출처로 기능하는 인터넷 공간은 ‘사실상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담합하는 장소’인 것이다. 이렇듯 저자가 나열하는 문화비평의 조각들은 대부분 중간계급의 현재증상을 통한 성격규명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니 중간계급의 세분화를 통한 성격통합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주입‘의 과정을 거쳐 주체로 스며드는 것이라고 할 때 중간계급의 주체에 해당되는 나는 이 책이 뜻하지 않게 모종의 패배감, 열등감, 죄의식을 안겨주었다 말하고 싶다.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었지만 그 문화를 만들어온 사람은 가득했던 것. 사실 문화는 잘못이 없지만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잘못해온 시간들이 문화를 창출하는 것 일테니까. 이 역시 문화비평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우연하게 생겨버린 동전의 뒷면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던 문화이해 방식을 한번 뒤집고 비틀어 새로운 층위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는 하나 발견한 것 같다. 늘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주는 대로 인식하던 습관에 경고등 하나는 달아놓은 느낌이다. 재밌고 유익했다. 한가지 분명한건 뒤집는 재미를 위해 동전의 뒷면을 애써 뒤집어 보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모든 진실이 그 배후에, 그 이면에 있는 건 아닐 터이다. 그리고 뒤집어 폭로했다면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기 보다는 그 후의 대안이나 효과도 고려를 해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논리가 진실을 이기고 분석이 진실을 규정지어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인터넷 공간에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이면을 색다르게 보았다는 주장을 하며 사실상 비밀을 폭로하는 사람들을 본다. 은폐된 진실을 나누어 구경하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쾌락 평등주의에 해당된다. 이는 다같이 공유하는 진실이라면 개인의 상처나 희생쯤은 감수해도 된다는 공동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셈이다. 이 책이 모아지는 결론이 없었기 때문에 궁극엔 문화비평이 진실폭로나 진리발표의 방법론을 말하는 장르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재미나게 넘어가는 수준인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언제나 설레인다. 그것이 정말로 진실이든 거짓이든 들추어보는 전 과정은 금지된 쾌락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진리를 향한 주이상스다. 독서 중간계급의 지적허영을 채워줄 문화판타지다.

 

<덧붙임> 

며칠 지나 다시 읽어보니 나는 이 책의 좋은 점은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은 ..... 한마디로 비웃는 재미이다. 씁쓸한 안주, 그러나 알코올을 당기는 매력.  
서두에 언급했지만
시청률 높지만 시나리오는 황당한 막장 드라마를 습관적으로 보는 이유와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막장식의 비평이라는 뜻은 아니다.(신을 모두 모아 상영하니 막장드라마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계속하여 책을 넘기게 하는 그 기분도 중요하다.
학식과 교양이 뭐 별건가. 

그래서인지 많이 안다는 게 요즘은 크게 부럽지가 않다.
세상을 깨치고 통달하는 그 '앎'이 앎을 넘어 '선'이나 '행'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암튼, 이 책을 덮고나면 나름대로 서로 다른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문교양서적 덮고나서 재미봤다는데 부채감을 느끼는 분만 아니라면
색다른 재미를 위해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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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0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한사람님의 저번 소개로 관심이 생긴 책이었는데 '여인의 향기'를 언급하시니 좀더 솔깃. ㅎㅎ 김선아 연기 볼라고 드라마 보니, 남주가 누구인지는 별 관심없긴 하지만 그래도..쩜쩜..ㅎㅎㅎ

햐아..거진 백 번이나 반복되믄 지겹지요. 반복효과의 장단점이라..와우. 한사람님 분석 짱!!
덧붙임..도 의미심장합니닷.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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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을 견디기

    이 작품은 손바닥에 말굽이 자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자라 마침내 말굽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된 말굽이 다음 생의 부활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유독 몸과 마음에 힘을 주며 읽었는지 책 덮고 몇 시간이나 누워있기까지 했다. 이번 글은 <은교>와 <비즈니스>에 비해 상당히 폭력적이다. 실제로 글에도 마치 말굽이 달려있어 어떤 페이지에선 무자비하게 내 정수리를 찍어 누르는 듯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발에 힘도 주고 우습지도 않은 경직된 자세를 취하곤 했다. 책 앞에 두고 이삼 일 간 누가 때리지 않을까 불안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 책은 때마침 찾아온 폭염이라도 되는 듯 한여름 오후의 낮잠이 꼭 필요할 만큼의 피로도를 지녔달까.

    올해 들어 나를 좀 편하게 하는 소설들을 영 구경할 수가 없다. 뭐 맘 편하자고 재미 보자고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나 작년하고 양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실감한다.(최근에 읽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정도가 가장 밝다고 해야 할 형국이다.)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처한 사회정치 분위기, 나아가서는 지구적 현상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올 초 터진 일본발 원전폭발과 쓰나미같은 연쇄적 아프리카, 중동 혁명은 이제 자본주의의 세기말적 경종을 울리는 지구적 현상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문학은 스펀지 같이 이러한 위기와 불안의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했고 독자는 그런 소설을 자기부정하듯 외면하고 있다. 내 주변에만 봐도 요즘 소설 읽는다는 지인들은 눈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아예(?) 시집을 읽었으면 읽었지 한국 소설은 어렵고 화나고 우울하다 증언한다.(가져가라 해도 싫다고 한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한권 겨우 집어 들더라는) 세상이 이토록 불편한데 문학에서의 불편을 더 이상 원치 않는 것이다. 이십대는 아프니까 청춘을 위로받고 삼십대는 성공에의 생각을 버리려하고 사십대는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순수문학은 나같이 한때 작가되기를 꿈꾸었거나, 혹은 더 이상은 작가되기 어려워 보이는 문학 향수주의자들만이 근근이 집어 드는 비현실적 독서현상으로 전락했다. 책도 (드라마처럼)주변에 읽은 사람들이 많으면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지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는 생활의 일탈 에너지를 갖고 있다.(현빈 이후 문학은 더 이상 대화소재로 실종되었다) 그런데 오프라인에선 도통 소설 읽었다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나는 무슨 홀로 저항하는 심정으로 이런(?) 소설을 읽게 된다.(그래서 더 외롭다) 학습지 선생님이 거실에 쌓인 소설들을 보고 어머니 예전에 문학도이셨냐고 묻길래 답하기 귀찮아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아니라하면 자꾸 물어볼 것 같아서) 다른 집에 가면 방학을 맞아 아이들 자기주도 학습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에 대한 책들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나도 모르게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맘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살면서 소설을 읽는 것이 단 일초라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며칠 전 나는 그랬다. 소설같은 비현실보다는 아이들 교육같은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책은 그날만 쌓여있던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가고 나서 더욱 기분이 나빠졌고 그래서 더욱 내가 소설 읽는 것은 시대적 저항이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일종의 오기같은 것이기도 한데 책 한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를 생각하면서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그 책 읽었다고 그 책 읽어보라고 이렇게 글로 떠드는 것. 이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또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다. 그렇게 여름을, 소설을 견디고 있다.


심장을 견디기

    견디는 게 좀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번 소설은 유난히 외롭다. 작가들은 쓰면서 더 그랬을까. 작가는 이 글을 쓰고 나니 손바닥 한가운데 말굽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생겼다고 했는데 나는 손바닥이 전보다 현저하게 얇아진 느낌이다. 자세히 보니 거짓말처럼 손가락도 짧아진 것 같고 전체적으로 외양상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원래 내가 알던 내 손보다 축소되고 못나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읽고 새삼 내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손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이상하게도 손끝의 예민한 감각이 피가 돌듯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어렴풋하게 발도) 머리로 에너지를 쏟으니 신체기관 중 맨 끝에 매달린 것들이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햇빛에 반사되어 빗금처럼 새겨진 손금들이 순간 어떤 (예술적)스크래치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면 면도날에서부터 커터칼, 조각도, 과도, 식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흔적이 아닐까 싶도록. 공교롭게도 (주로)왼손은 수평 오른손은 수직으로 기묘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인류가 처음으로 삶의 형태를 새김으로써 패턴을 만든 것은 빗살무늬였다. 고미술가들은 빗살무늬의 직선이 생선뼈를 상징하고 생선뼈는 정복의 의미로서 사냥과 주식의 풍요로움을 소원하는 의미라 말한다. 그런데 그 심플해 보이는 빗살무늬 하나만 해도 약 삼 천 년 정도 변하지 않았던 양식으로 상상할 수 없도록 오랜 세월의 결과물이었다. 미술사가들은 '삶은 형태이고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겹도록 반복되어온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결국 훗날 빗살같은 무늬 하나로 남게 되는 것이다. 기껏해야 백년도 살지 못하는 내 삶의 무늬는 무엇일까. 고생을 많이 하면 잔주름이 많아진다는데 내가 만들 수 있는 무늬는 혹시 내가 새겨온 손금의 총합인 것은 아닐까. 스크래치난 그것들이 결국 지금까지 내 모든 인생의 결과인 것만 같아 울컥 주먹을 쥐게 되더라. 주먹을 쥐고 손에 힘을 주게 되면 자연 가운데 손가락이 손바닥의 가장 중앙을 자극하게 되는데 작가는 그 ‘노궁혈’이라는 곳이 ‘말굽이 들어와 집을 짓고 제방으로 삼은 곳’이라 하였다. 그곳은 심장을 향하는 촛점, 심장과 연결되는 마음의 자리였다. 즉, 우리가 주먹을 손에 쥐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심장을 겨냥하는 일이며 그것은 심장을 무언가에 장전하는 행위인 것이다.

    신기한건 얼마 있다가 손바닥을 펴보면 그곳에 또 하나의 손금(표식)이 추가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다시 주먹을 쥐지 않는 한 그때까지 그 손금은 서서히 사라지는 운명이 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주먹을 쥘 때만 선명한 일시적 손금은 유효하다는 것. 살면서 어떨 때 주먹을 쥐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주먹 쥔 손을 펴게 되는가. 작가는 왜 그곳에 말굽이라는 영구손금을 박아 넣은 것일까. 손금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도 누구를 따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만이 만들어온 독창적 무늬가 아닌가. 그렇지만 자신조차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다른 곳에 잊혀지지 않을 무늬로 새겨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왜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손바닥에 말굽의 흉인을 새기고 그것을 입체화하였는가. 그것은 손금의 진화인가 운명의 퇴화인가. 우리네 한 점 한 줄의 삶이 말굽으로 조각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숨가쁘게 달리게 하는 것이라면 그 인생은 누가 멈출 수 있는 것인가. 멈출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만약 멈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혹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살아가는 일은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향해 심장을 달리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멈춰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심장을 견녀낸 만큼이 곧 그 사람의 일생인 것이기에.


슬픔을 견디기

   
 
생명선이 사라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다.
    -18p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 때 나는 슬프다는 말로 대신할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꼭 그 대답이 어울리는 경우인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치욕과 복수심, 두려움과 유사희망, 공황과 불안 등의 모든 감정들은 결국 슬픔의 감정들이라 말한다. 단순분류일지 모르지만 기쁨과 슬픔에 일가견이 있었던 철학자이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여본다. 그리곤 그 분류안에 폭력이라는 감정도 추가해본다. 내 생각에 슬픔은 슬픈 결말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죽음같은 것도 처음부터 슬픈 것은 아니지만 그를 향해 다가가다 보면 나도 모를 슬픔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되고 그 역에 대한 기억은 나중에 새로운 슬픔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손에 피어난 말굽을 통해 인간 폭력의 근원적 모태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폭력이 그리움이면서 노스탤지어면서 희망이나 종교가 될 수 있는 건 결국 폭력이 인간의 가장 슬픈 감정을 자극하는 막강한 호소력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폭력은 누구로부터 어디를 향하든 그 종착역은 언제나 미치도록 슬픈 역사(驛舍)가 되는 건 아닐까. 은폐된 욕망이나 거짓된 본능을 자극하는 박범신 작품들은 하나같이 슬픔의 결론을 촉발한다. 서사가 비극으로 종결되어서가 아니라 원래 비극의 시원지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손바닥안에 성공이나 건강, 행복, 기쁨의 감정을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숨겨온)폭력이라는 말굽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그건 불행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슬픈 일임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말굽이라는 폭력의 표식을 통해 인간의 슬픔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소설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선) 무엇보다 아름답게 체화된다. 가만 보면 문학에서 더러운 기쁨은 있어도 더러운 슬픔은 드물지 않은가. 이때 폭력은 비인간적 미화로 체화되기에 가장 안전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인간적인 것은 추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아름답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군가를 때리고 또 누군가에게 맞았던 인간적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성장시켜온 비인간적 존재들이니까. 그건 설사 한평생 누구를 때리거나 맞은 사실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탄생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오래된 기억인데 작가가 전하는 ‘탄생 이전으로부터 온 슬픔’에 해당하는 기억이기도 할 터이다. 이 책에서 폭력의 주체로 폭력을 행사하던 말굽은 작품 후반부에 스스로 쟁취한 인격을 통해 아무리 사람이 죽거나 마음이 변해도 그가 지니고 있던 폭력만은 변종바이러스처럼 타자와 세상에 끈질기게 전이되어 불사조의 운명을 살아갈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며 그 깨달음을 우리에게 유언처럼 설파하고 있다. 말굽의 유언이 섬뜩했던 건 서글픈 말굽의 운명때문이 아니다. 말굽이 누군가에게 들러붙어 그를 좌지우지하게 될 우리네 불특정 다수의 연약한 운명인 것이다. 두려움은 곧 슬픔이요 불안은 두려움의 예감에 불과하다.

    흡사 말굽의 유언은 죽지 않음으로 전승되는 영혼의 선언이자 작가의 예언같다. 비슷한 의미로 모리스 메를로 퐁티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 2008, 문학과 지성사)


    우리는 이미 폭력자이기 때문에 비폭력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폭력의 유무,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출발선이 된 폭력의 체제하에서의 폭력의 종류 즉, 폭력의 미래라 주장한다. 이를 성찰하고 쉽게 풀이해준 강신주 교수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2011>을 통해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말한다. 임재범의 노래에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 상호폭력에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인 것이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타자를 죽이고 타자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폭력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겐 누구나 생존전략이자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존재한다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은 이 소설의 슬픈 고통을 더욱 슬프게 기정 사실화한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뿐이었다
.  -341p
 
   

    인간은 폭력을 피할 순 없지만 그나마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최후의 희망이라고 본다면 슬픔이 줄어들 수 있을까. 외려 슬픔이 더 구체화, 시각화되는 일은 아닐까. 이 책에서 말굽을 자기 폭력의 종류로 선택한 남자는 개장수 아버지를 둔 개백정의 새끼로서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을 살다나온 전과범이자 노숙자로 등장한다. 이 사람의 이력은 자신에게 말굽이라는 생명체를 전이해준 이사장 운영집단의 경비원이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사장은 말굽이 된 이 남자와 조우하기 위해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말굽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말굽남자가 통과한 생의 이력은 곧 폭력의 이력과 동일해 보였다. 말굽남자의 기억속에 가장 폭력적인 그리움으로 자리잡은 이력은 열네 살 여린과의 추억이다. 암수 은행나무로 상징되던 이들 소년 소녀의 집터는 권력과 개발이라는 폭력에 의해 전소되고 그 결과 각자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폭력을 잃게 된다. 소년과 소녀에겐 실명증과 화상이라는 치명적 상처가 남겨지고 이들은 ‘죽을 때까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은행나무의 운명처럼 그리움이라는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게 된다. 소녀가 유전으로 자신이 실명할 것을 알게 된 날 이들은 마침내 그 폭력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409p
 
   

    각자의 죽음을 소유하는 경험을 서로 공유함으로서 사랑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폭력을 이기는 사람들일까, 폭력에 지는 사람들일까. 책에서 만난 이들을 보며 사람은 자기가 겪은 폭력의 기억을 지우고 실현하는데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기든 지든 폭력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극복하는 것이 인생의 전 과정 아닐까 싶었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의 집터를 불태워버리고 불멸의 성소가 된 샹그리라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한명은 프랑켄슈타인이 되어 한명은 맹인 안마사가 되어 여전히 폭력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눈먼 그녀의 말(言語)과 들려줄 수 없는 자신의 말(馬)이 하나가 되려면 자신의 말굽으로 그녀의 말을 막는 것 밖에는 없었을 터이다. 이들의 비극은 박범신 소설에서 어느 정도 예정된 서사이기도 한데 이 통속이 자극하는 슬픔은 대개 폭력의 명백한 주체인 말굽보다는 그것을 전이토록 한 이사장 혹은 이사장을 권력자로 받드는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 폭력으로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회 메카니즘을 향한 진한 원망으로 남게 된다. 폭력보다 더할 수 없이 폭력적인 원망이 되어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곤 한다. 이 책에서 말굽이 된 자신과 자신을 만든 말굽이 서로 내면의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폭력을 지지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우리로선 자신들의 폭력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변론에 뚜렷한 반기를 들 수는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든 가해자든 더 이상 원망해야할 대상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린 근원적인 질문에 가닿게 된다.


욕망을 견디기

    작가는 인간사 오욕칠정을 나른한 봄날 잠결에 다가온 아지랑이와 같다고 말한다. 그건 ‘세 번째 갈빗대와 네 번째 갈빗대 사이에서 모락모락’ 솟아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때의 ‘아지랑이는 기쁘고喜, 노엽고努, 애달프고哀, 즐겁고樂, 뜨겁고愛, 어둡고惡, 욕심도 많았다’고 증언한다. 그때의 ‘봄철의 숲에서 솟아나는 힘은 사람에게 도덕상의 악과 선에 대하여 어떤 현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읊조린다. 작가는 오욕칠정을 거세하는 것이 아름다운 봄날을 아름답게만 느끼는 전제라 말하는 듯했다. 어찌 보면 문맥상으로는 틀린 말이라 생각되지 않았던 이중적 악의 화신, 특수부대 훈련장 부대장 출신, 명안진종의 창시자 이사장의 논리를 통해 작가는 ‘몸과 영혼을 합치는 것’, ‘자연의식 치유법’등의 허상을 일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인간사의 폭력이라는 메카니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시스템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인간 내면의 근원적 욕망을 성찰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를 폭력과 중첩되게 하는 시적수사를 연출했다. 배경이 되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리하여 폭력이 발생, 유지, 전이되는 운영체계를 다채롭게 제시하기도 했다. ‘샹그리라’는 모두가 폭력을 은폐하고 협동으로 그것을 지켜낸 결과 일상으로서의 쾌락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장소로서 관음적, 쾌락적 아지트로 그려졌다. ‘명안진사’는 폭력을 종교처럼 떠받들고 강제적으로 전도, 강화되는 장소로서 ‘제석궁’은 폭력이라는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죽음을 대기하는 장소로서 ‘문화궁’은 같은 종류의 폭력이 복제되어 안착하게 될 새로운 영토로서 모두 우리 사회의 연계된 폭력을 수행하는 장소의 표상들로 느껴졌다. 좀 낭만적인 곳이 있었다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만 기어 올라가 샹그리라의 모든 방안을 파노라마 영상처럼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암벽이었는데 그곳이 가장 고독하게 보여졌던 건 어쩐지 문학하는 작가들의 최종 번뇌장소로 느껴져서 였달까. 그곳은 실컷 구경하고 난후 반드시 폭력이 돌아가는 운영체제를 꿰뚫어보고 그것의 대책을 세워야 할 장소가 아니었을까. 대책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고민하자고 손내밀어야할 장소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에서 폭력이라는 욕망이 다소 위로와 용서의 기운으로 전복되던 희망의 인물은 예상했듯이 애기보살이었다. 애기보살은 이 책에서의 유일한 생존자였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행자였다. 애기보살이 살아남은 것은 그녀가 단순히 누군가의 애기를 잉태한 상태였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의 논리대로라면 애기보살이 잉태한 것은 결국 폭력의 유전자를 지닌 이차적 폭력의 생명체임이 자명한데 그렇게 보자면 애기보살이 낳게 될 애기는 누군가로부터 전이된 말굽의 새로운 주인공이 될 운명적 객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러한 폭력의 생명을 지닌 채로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그건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의 공감능력이 더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라 믿는다. 남성이 태어날 때부터 폭력적 장치로서의 성적 무기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여성은 자기 안에 타자라는 생명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자궁이라는 비폭력 장소를 지니고 태어난다.

    내가 임신한 열 달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바로 내 몸속에 내가 아닌 이물질 같은 생명체가 계속하여 자라나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이 비록 내 자식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버젓이 숨을 쉬고 커가고 있다는 동물적 느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기쁘거나 만족스럽지가 않다. 말하자면 여성들은 열 달 동안은 꼼짝없이 그 생명체를 키워내면서 꼬박 그 불쾌한 시간을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은 산모에게 폭력적인 경험이 된다. 이물질과의 싸움, (태아라는)타자의 성장, 불쾌감으로 유발되는 죄책감들이 믹스되어 여성은 타자를 견디고 용서하며 공감하는 감수성이 진화되온 것은 아닐까. 출산이 태아에게 폭력이라고 보았을 때 이는 (여성이)폭력을 거부행사할 수는 없으나 폭력의 종류는 택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성은 출산이라는 폭력을 택함으로써 폭력의 미래를 구원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좀처럼 밝은 성격을 가졌던 애기보살은 미소보살의 남편이 제발 구출해달라던 평범한 소녀였다. 서사속에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실질적인 폭력의 기억을 잉태하지 않은 소녀이기도 했다. 폭력의 에너지를 가장 적게 발휘하면서 폭력을 행사할 가장 대안적 인물인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구원하겠다는 막연한 희망이라기 보다는 폭력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선의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폭력을 (제거하지 않고)견디는 여성들의 몫인 것이다. 사람이 생명을 가진 것은 특별한 능력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결국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결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복제물로서의 생명은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타자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욕망을 견딤으로써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가장 폭력적인 존재인 것이다.


기억을 견디기

    이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에 남자가 말굽을 사용할수록 차츰 기억이 회복되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남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가해하려는 악마의 힘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때 그 방어기제로 말굽이 방패막처럼 솟아오르곤 했다. 남자의 말굽이 입체화되는 순간은 곧 남자의 기억이 한 곳에 집결되는 순간이기도 했는데 말굽의 입체정도는 폭력의 체화정도와 비례하는 것으로 보였다.

   
 
몸의 반절은 멧돼지나 말인 것 같고 나머지 반절은 사람인 것 같았다. 발버둥치는 개를 은행나무에 목매다는 특수부대 장교들의 얼굴이 갑자기 보였다. 무표정하게 개의 배를 가르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였고, 삿대질을 하는 소녀의 눈먼 아버지, 야구 방망이로 내 갈비뼈들을 부러뜨리는 어린 학생, 마구 발길질을 하는 횟집 남자, 생니를 아예 뽑겠다며 펜치를 들고 설치던 간수장, 그리고 칼을 든 이사장의 얼굴도 보였다.
      -104p
 
   

    남자는 기억이 총집결된 마지막 순간 가해자를 멧돼지 때려잡듯 처리하곤 하는데 폭력에 대한 기억이 말굽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느껴져 내심 섬뜻하게 느껴졌다. 저 정도 맞아온 사람이라면 이 정도 폭력쯤이야 당연하다는 보상심리를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복수를 부르는 폭력은 결코 희망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또 다른 희망의 기회를 짓밟는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말굽의 처사에 남몰래 응원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폭력에 투사되는 내 심리 이면에 다른 것은 없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만의 은밀한 상처를 타자에게 투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만히 있다가도 누군가 유명인이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마치 이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그 사람에게 집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우리가 은폐해온 개인 폭력의 한 종류가 아닐까. 사람이 때리고 맞은 기억을 평생 극복하기 위해 인격을 성장시키는 존재라면 모두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괴감에 다다른다. 폭력이 두려운 기억인 것은 그것이 꼭 순성장을 유도하지 않고 폭력의 중독자가 된 이사장처럼 역성장의 길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폭력은 순성장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작년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이었는데 광복 전후에 태어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작가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최근에 비슷한 시기에 작품을 내놓게 된 작가들을 보면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사람의 욕망은 죽는 날까지 바람직한 소멸이 아닌 바람직하지 않은 파멸이라는 지속적 성장을 향한다 말씀하신다. 이들은 이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욕망의 뿌리를 어떻게든 발본하여 살아있는 한 그것들과 대치하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쓸 것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이렇듯 세상과 인간에 대치하여 자본주의의 폐허를 말하는 방식은 우리네 근원적 욕망이 모두 쓰레기라는 잿더미였음을 말하거나(『낯익은 세상』, 황석영) 오랜 세월 인간을 지배해온 자본의 가치는 배역과 역할에 충실한 로버트 인간을 생산했다고 말한다.(『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박범신 작가는 이번 작품으로 자본주의의 생체시스템이 폭력의 진화구조와 같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들은 모두 현실의 균열 속에서도 자신을 찾고 쓰레기 더미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폭력의 낭떠러지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가해해 가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이들이 우리사회와 자기 인생을 투쟁적으로 기억하고 고통스런 문학으로 기록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문학은 기억매체라고 하는데 우리가 외면해온 것은 어쩌면 문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 우리 사회와 타자에 대한 기억, 그리하여 탄생 이전부터 시작된 무수한 생의 폭력에 대한 엄연한 기억들은 아니었을까. 폭력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런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를 이겨내는 시간임을 가만히 깨닫는다. 기억을 견디는 것이 자기 생을 견디는 것임을, 그리하여 자신이라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 것 같다. 이 책은 말한다. 폭력은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라고. 그것은 어쩌면 폭력보다 훨씬 폭력적이어서 필히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모두가 같이 견디고 말함으로써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래야 이겨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덧붙임> 

이 책을 넘기는 재미중에 하나가 김영진님의 삽화도 한몫을 했다.
중앙일보에 연재할 땐 120회 매회마다 삽화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책에는 약 1/3가량 추려서 실은 듯하다.  

그들중 기억에 남는 그림을 덧붙여본다.  

 

 

이런식의 충격적인 삽화가 더 대중일 것 같아도 이상하게 이번엔 
관념상의 폭력을 더 구체화 시켜주는 역할을 한 듯하다. 

썩 괜찮은 전략이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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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2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처음 나왔을 때 정말 사고 싶었는데 안 샀어요.
읽어야 할 책이 한 두 권이라야 말이죠.
김애란 소설에 실망하고 문득 읽고 싶었던 게 이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한사람님 리뷰 읽으니 또 읽고 싶네요.
전 박범신을 알고 나서 오히려 김훈 소설 보다 더 낫다 싶어었요.

정말 소설 읽는 사람이 그리도 없던가요?
소설 쓰겠다는 사람은 어찌 살라구요...쩝.
요즘 소설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게 별로 없긴하죠?
그래도 낯익은 세상 정도면 괜찮은 것도 같은데 그것도 결말이 쓸쓸하긴 해요.ㅠ
 
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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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풀꽃’되다


    냄새에 관한 기억은 이토록 선명하다. 그건 살면서 다른 곳에선 맡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아는 종류의 모든 동물의 분뇨와 내가 먹어본 온갖 음식들이 썩어가는 냄새를 합치고도 모자랄만한 강도였다. 지난 시절 내가 출퇴근하던 고속화도로 일정구간엔 도저히 자동차 창문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도 그곳만 지나치면 상상할 수 없는 악취로 정신이 버쩍 들었고 재빨리 외부공기 차단버튼을 눌러야했다. 어쩌다 잊어버린 날엔 뒤늦게 조치를 취해 봐도 소용없었다. 이미 차량으로 유입된 냄새는 그 구간을 완전히 빠져 나온 후라야 해결될 사안이었다. 혼자인 경운 인상만 찌푸리면 되었지만 가족, 지인들과 동승한 경우엔 코를 막고 서로 누가 범인인지 짓궂은 분위기가 되기 일쑤였다. 신도시로 이사가서 근 십년간 나는 그 냄새를 맡아왔고 또 부지런히 막아왔다. 희한한건 (서울로)출근할 땐 같은 구간에서 전혀 나지 않던 냄새였지만 퇴근할 땐 예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꼭 한번은 가스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겪으면서도 매번 낯설었다.

    악몽의 구간은 바로 쓰레기처리장이 위치해 있던 지역이었고 내가 살고 있던 시에 같이 속한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 같은 시였지만 누가 사는 동네를 물어보면 우린 절대 ‘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기도 했는데 우린 ‘**시’민이 아닌 ‘**구’민이기로 암묵적 합의를 본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쓰레기처리장을 비롯해 하수처리장, 납골당 등의 혐오시설이 이쪽으로 이전되어 새롭게 건립된다는 소식에 흥분했고 주민반대 서명, 단상점거같은 저항도 주저하지 않았다. 아침시간이면 옆 동네에서 건너오던 토끼굴이나 샛길도 우리만 이용해야 한다며 막아버리던 사람들이었다. 어이없게도 자기 아파트 출근차량을 큰길로 먼저 내보내려는 경비 아저씨들끼리의 신경전도 볼만했던 동네이다. 당시기억으로 엘리베이터엔 무슨 건인지도 모를 결사반대 서명 종이가 게시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옆 단지 아파트 신규분양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도로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금새 그 구간의 기억을 쓰레기 처리하듯 망각의 수거함에 투척해 버렸다. 신규 시설이 운영중인지도 모르게 쓰레기는 잘 처리되고 있었고 우린 그 다음과제에 열정을 쏟았다. 요즘 우리 지역의 아파트 벽면엔 ‘지하철 **역사 개통’의 대형 현수막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지하철 역이 아파트 단지 앞에 개통되어야 집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늘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강렬히 반대하고 또 무언가를 급격히 추진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 돌아서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 없지만 같이 연대하는 순간 결코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적고나서도 참 낯익은 모습이다.

    이렇듯 내 세대, 내 이웃 대부분은 거대 메트로폴리스 계획아래 잘 설계된 중산층을 꿈꾸며 오늘도 부동산의 호재와 악재 소식에 울고 웃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70년대 이후에 태어나 속물정신과 위선이 유일한 경쟁력이 된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라는 악덕에 길들여진 그 결과 대략 하우스푸어로 요약되는 삶에 도착해있다. IMF 사태와 금융위기, 조기은퇴에 내몰린 우리 윗 세대가 자녀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노후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는 실정을 보면서 우리 아랫 세대가 반값등록금 투쟁의 힘없는 주체가 되는 걸 보면서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졸업이라는 사람구실의 자격증을 위해 속절없이 자녀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희생과 역할이라는 유산을 마지막으로 물려받은 우리들이지만 바로 다음 세대에 여성의 결혼과 육아, 교육의 문제를 처절하게 푸념하며 결혼과 출산의 부정적 견해를 매일같이 전수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선배로 두었지만 그들이 앞장선 민주화에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고 현 유권자로서도 뚜렷한 이념을 내세우는 쪽은 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서점을 통해 정의관련 서적만 들춰보는 침묵의 세대가 되어버렸다. 기성세대, 기득권층을 늘 비난하던 우리 세대는 사실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지만 이대로라면 그들만도 못하지 싶은 열패감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우리 자신도 낯설은 형국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리와는 상관없이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의 젠트리피케이션(도심재개발)에 관한 계획발표가 미래청사진처럼 전시된다. 자고나면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이 앞 다투어 우리의 공공기관을 문화적, 예술적, 미학적으로 리노베이션한다고 홍보한다. 국토는 언제나 공사중이고 젊은 작가들은 (우리도 답답한 심정인데) 재개발로 밀려난 빈곤층이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집요하게 묻고 있다. 금방이라도 잡지에서 튀어 나올듯한 화려하고 첨단적인 파사드는 곧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고 이는 모든 도시인의 욕망을 자극하며 이미 예정된 부동산과 연계하여 돈있는 자본가가 추가적 자본을 취득하는 메트로폴리스적 불문율이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예술은 상업성을 상쇄하기 위해 공공화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시 상업적인 가치를 창출한다. 자본주의가 세계의 운명처럼 보인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이제 지구전체의 도시화, 자본화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결정으로 부동산 투기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터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가 활황하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한 낯익은 이 풍경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의 궁극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아니 우리는 진정 우리가 원한 것들을 향해서 개발도 성장도 다 함께 이루어 온 것이긴 한 걸까.

    이 책은 지난 삼십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자본주의를 달려온 우리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대체 무엇을 만들어왔는지 고개 들어 묻고 있다. 우리가 지난 시절 만들고 키워온 것은 다양한 인간 욕망의 현란한 그림들에 지나지 않는다 답하고 있다. 쓰레기는 우리 욕망의 나머지 배설물이 아니라 사실은 욕망의 근원적 실현물이었다 말씀한다. 우리가 불철주야 만들어 온 것이 시간이 지나 버림받았다고 해서 우리 욕망도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태우고 소독하고 묻고 은폐해도 욕망은 대를 이어 질량보존되는 가장 명징한 진화물이었다. 쓰레기가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노랗고 알록달록 반짝이기도’ 하는 것은 우리 욕망이 그토록 다채롭고 아스라한 ‘무지개’ 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 ‘푸른’ 빛만이 도깨비로 승천한 것은 우리의 하늘과 바다가 아직까진 의심없이 푸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땅에서 수없이 태워버린 욕망의 잿더미는 어디로 날아서 어디로 돌아오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유독 불편했던 건 특이하게도 심리적 호흡과 영안의 시야였다. 목에 시커먼 매연이 넘어가듯 온 시간이 매캐했고 눈앞은 뿌옇고 따가왔다. 우린 우리가 버젓이 만들어 온 것들,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한참이나 무지했고 무례했고 오만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사법은 낯선 감정들로부터 기인하는 낯익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메타포를 함의해 왔던 황석영 소설의 힘인 것이다. 그는 (늘 그래왔듯) 작품의 출간시기 역시 마치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매 시기 무엇보다 간절한 사회, 정치적 요구를 수용해왔다. 한마디로 지금 이시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소설을 현자처럼 제시해 온 것이다. 한국분단 60주년, 경부고속도로 40주년을 맞은 작년의 시점에 한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지역, 부와 명예를 단적으로 제시하는 강남땅의 형성사를 통해 개발논리에 짓밟힌 국민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하지 않았던가. ‘황석영 가는 곳에 가지마라’는 세간의 소리는 어딜가든 그가 투철한 시대의식을 잊지 않고 역사의 현장을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의 방증일 터이다. 이번에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지나칠 수 없었던 현장에선 무엇이 그의 불꽃을 태우게 하였을까. 혹시 붉은 불꽃보다 더 뜨겁다는 푸른 불꽃에 몸과 마음이 한껏 데인 것은 아닐까. 저 멀리 우주 별에서나 볼 수 있다는 ‘낯설은’ 푸른 불꽃이 그의 헛헛한 가슴에 기어이 ‘낯익은’ 풀꽃을 피우게 한 것은 아닐까.



인연의 진실, 이름의 상실


   소설은 열네 살 소년이 엄마와 쓰레기트럭을 타고 꽃섬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부로서 일주일중 가장 싫어하는 날이 바로 재활용 쓰레기 분리 수거날이다. 그날만은 남편이 내편으로 보이는 날이기도 하다. 지난 설 명절 때 집집마다 택배로 도착한 박스들이 대거 방출된 그날은 흡사 또 다른 아파트 건설현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인가 깜빡 잊고 쓰레기를 다음날 새벽에 긴급히 배출하던 중 나는 말로만 듣던 쓰레기트럭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온다는 스티로폴, 플라스틱 수거차량은 쓰레기라기 보다는 건설자재를 실은 공사용 트럭같았다. 대부분 먹거리 포장용인지라 나는 저 많은 분량을 누가 다 먹었을까만 생각했지 그 차량이 어디로 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소년과 엄마가 올라 탄 트럭은 이처럼 잘 분리된 쓰레기가 아닌 음식물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가 혼합된 차량일 터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부엌 한 켠에 쓰레기를 일률적으로 투입하는 배출구가 달린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다. 아파트 뒤편에 가면 그렇게 통로를 타고 내려온 온갖 쓰레기가 집결되는 장소가 있었고 트럭은 그것들을 원형그대로 수거해갔다. 내 기억으로 그땐 지금처럼 쓰레기가 많지도 않았고 음식물을 버리는 사람도 적었기 때문에 (아무리 섞여 있었다지만) 총체적인 냄새도 덜했다.(견딜만했다) 같은 단지 친구들과 그곳에서 트럼프 카드를 발견하곤 우리끼리 환호성을 지른 적도 있다. 딱부리 모자는 그 시절의 종합트럭 한 켠에 몸을 실은 게 아닐까. 처음 나는 어린 시절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마을 소독차량을 신나게 뒤 쫓아가는 심정이 되었다. 차량 꽁무니를 따라가는 어린아이마냥 소설의 도입은 흥미를 자극했고 기대감을 드높였다. 어쩐지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낱낱이 구경이라도 할 것 같았달까.

    아마도 쓰레기에 함께 실린 모자의 서글픈 처지보다는 쓰레기 세상을 확인하려는 설레던 마음이 많았던 듯하다. 그건 남들은 뭘 먹고 어떻게 사나 알고 싶은 속세의 심정이었다. 쓰레기를 보면 그 사람의 생활수준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수증을 보면 경제능력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참으로 잘 배워온 속물근성에 다름없었다. 그런 심보가 사라지기 시작한건 그들 모자가 아수라반장을 만나고 부터였는데 어린 시절 마징가 제트, 로버트 태권브이, 마루치 아라치에 열광했던 나로선 그의 얼굴이 두말없이 불안과 불행의 캐릭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서야 그가 낯익은 세상과 낯선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 시대 자본에 훼손된 보통시민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작품엔 아수라반장처럼 인물의 실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두어 번 등장하는 딱부리의 본명 최정호와 땜통의 본명 영길은 이 작품과 상관없는 서류상의 실명처럼 낯설기만 하다. 어른들은 주로 헬맷, 장갑, 마스크, 각목등으로 도구화된(산업화 도구들로) 인상착의로 대신하고 아이들은 개성이 강조된 재미난 별명으로 일관한다. 딱부리, 땜통, 두더지, 깨비, 메뚜기, 헌데같은 별명은 아직 도시화, 디지털화되지 않은 아나로그적 낭만성, 순수함, 서정성을 자극했다. 아직 예능이 르네상스를 맞기 전 정극 코미디 상태라고 할까. 김서방네 식구들은 서울가서 찾는다는 그 김서방의 불특정 다수가 지닌 보편성을 상징하고 그들 식구와 교신하는 빼빼엄마는 무당의 혼령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동화적 캐릭터로 느껴졌다. ‘샛강말, 여울목, 버드나무, 땅콩밭’등의 전원적 배경은 오염되지 않은 꽃섬의 원형적 언어로 이해되었고 ‘부대, 본부, 소세지, 초코볼, 벽돌게임, 슈퍼마리오’등은 군대문화, 미국과 일본문화에 대책없이 노출, 포섭되던 내 80년대 초등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후리가리, 시라이꾼, 야코, 씨레이션’등의 관용된 구어체로서의 외래어는 시대상을 환기하는 황석영 소설의 중요한 수사법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렇듯 등장한 모든 인물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저씨, 엄마, 아줌마, 형, 동생, 꼬마라는 세대적 구분만 있을 뿐 역할 및 관계의 구분은 경계가 흐릿했다. 이들은 원래 꽃섬에서 삼대가 모여 살았다는 김서방네 식구 스무 명처럼 (거울처럼 반사되어) 결국엔 동질성을 가진 공동체로 보였달까. 작가는 인물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름을 짓지 않았다 말했지만 쓰레기 마을에 기거한 그들은 외려 이름하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와 주관적 인연을 맺은(맺어온) (뗄래야 뗄 수 없는)친근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언젠가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의 작품은 불교의 연기론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연기론(緣起論)은 세상 모든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불교철학이다. ‘연기’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이라는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김서방 네와 딱부리 네와의 관계, 그들 모두와 쓰레기 모두와의 관계, 그 쓰레기 세상과 지금 우리 세상과의 관계, 그것은 막연한 인연의 소설적, 우발적인 그물망이 아니라 필연적인 자본주의 그물망 내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황석영식 세계관의 반영인 것이다.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207p


    하지만 책을 덮고 시간이 좀 지나자 나는 그들이 개별적 존재로 기억되지 않았고 먼 훗날 쓰레기섬에 다시 피게 될 풀꽃들의 미래만 어렴풋한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역시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그림만 기억하는 이기적인 독자였다. 불꽃도 풀꽃도 모두 내 탓은 아닌 듯했는데 이 부채감, 죄책감은 무엇이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김서방네와 딱부리네, 빼빼네에게 미안했던 건 역시 그들이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다시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면서 이번엔 내가 아수라백작이 되어 버린 듯했다. 이 작품은 물질적 쓰레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거울을 자각하게 하는 서사였기에 지난 시절 쓰레기와 난지도를 우리사회의 거울로 삼은 시인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른바 난지도 문학의 대표시인 신현봉은 쓰레기처럼 난지도에 도착해 “일찍이 내 석자 이름을 묻고 잘 썩어진 나는 새보다 가볍게 가스처럼 소리없이 날아오르길 바랬다”(쓰레기, <난지도>, 1994)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쓰레기와 함께 썩고 있는 난지도가 “쇳덩이도 녹일 지독한 눈물을 흘리며 화려하게 다시 태어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간절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난지도는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쓰레기같은 정신상태가 된 사람과 동일시되었다. <난지도 가는 길, 1998>로 유명한 정태준 시인은 “검은 욕망이 불길로 솟아 오르는 곳”인 난지도로 가는 사람들은 “도야지가 달려드는 주택복권 꿈을 안고 난지도로 떠”난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무지개가 떠있는 난지도로 가는 길에 “모두 이름을 잃어 버린다”고 익명이 된 주체의 슬픔을 강조했다. 딱부리가 꽃섬에 도착해 가장먼저 의문을 가진 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드는 이곳에서 과연 내 이름이 쓸모있는 것일까, 였다. 이름이 곧 인생과 동격화되는 것은 이름의 필요성, 실효성, 대표성에 기인하지 않을까. 쓸모없는 곳 천지에서 이름은 자기기능을 상실한다. 이름은 정상적인 가정과 학교, 조직사회에서 필요한 표식이지 쓰레기 섬에선 버려진 쓰레기보다 못하거나 겨우 쓰레기만한 장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딱부리는 여러 별명 중 쓰레기 줍듯 취사선택해 자신의 이름을 쟁취한 케이스니 꽤 진취적, 합리적, 능동적인 소년은 아닐까. 어짜피 우리네 인생은 최고로 바르게 살아서 호례호식(본명 최정호답게) 하며 살기는 어렵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별명이 부끄럽거나 맘에 들지 않아도 자기속성에서 근거한 별명을 인정하는 정직성을 보여준다. 최정호를 거부하고 딱부리를 택한 주인공은 나라에서 새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곳에 들어갔다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새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어른들의 허울좋은 위선을 향한 역설적 은유는 아니었을지.



송신자와 수신자들


    작가는 이렇듯 시종일관 (자신처럼)세상이치를 일찍 깨달아 열 여섯 살로 보여야 했던 열 네 살 딱부리의 시선으로 꽃섬의 일상을 나열하고 사건을 주시하며 현상을 사유한다. 때문에 화자가 딱부리는 아니지만 열네 살 딱부리의 시점과 육순이 넘은 작가의 관점은 동일시된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논리적으로 나와 동세대인 딱부리의 행보가 더욱 와닿아야 했지만 종종 그는 나보다 어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어쩐지 동생격의 땜통의 시선이 가장 인상깊었고 마음에 끌렸다.(그 때문에 가슴이 많이 아팠다) 말하자면 땜통은 쓰레기 마을의 어린왕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땜통은 딱부리가 아버지의 폐품수집을 대물림하듯 아수라 백작의 ‘왼쪽 뺨을 거의 덮을 정도로 푸르고 큰 점’이라는 치명적 외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였다. 땜통은 왼쪽 뒷머리의 흉측한 화상때문에 허름한 야구모자를 쓰고 다닌 아이였다. 땜통은 딱부리에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알고 자기만 볼 수 있는 ‘파란 불’을 기쁘게 자랑한다. 땜통은 딱부리형도 ‘쓰레기차에서 뚝딱하고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꽃섬을 금은보화가 가득한 도깨비나라쯤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이 책에서 김서방네 식구와 접신하는 빼빼엄마와의 인연도 흥미로왔지만 가장 눈길이 가던 관계는 바로 땜통과 김서방네 막내 꼬마와의 우정이었다. 땜통은 유일하게 그들 도깨비 나라에서 송신하는 푸른 불빛을 수신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인간계의 드문 메신져로 보였달까. 우주나 다른 차원에서 전해오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번역해주는 채널러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가장 어린 친구들이 주고 받는 메시지가 곧 이 소설의 핵심이라 생각되었고 그들의 소통으로 전해지는 에너지야말로 이시대의 황석영 소설이 구현하는 문학적 구원이라 믿었다.

    땜통은 아프다고 말하는 김서방네 꼬마에게 ‘쓰레기장에선 온갖 것이 다 나오므로 뭐든 구해올수 있다’고 말한다. 가슴저리도록 순수한 그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통찰이 아니던가. 쓰레기는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버린 바 있다. 그러므로 쓰레기는 인류의 모든 노력의 총체인 것이다. 신현봉 시인은 ‘쓰레기는 못쓰는 것의 대표이지만 쓰레기는 처음부터 쓰레기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고마움을 느낀 꼬마는 여러 번 ‘너희들 곁에 늘 같이 살고 있다’고 답을 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입장은 세상사는 외로움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에서도 저런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인물들은 쓰레기라는 절망의 산앞에서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땜통은 힘들고 외로울때 꼬마를 떠올리며 김서방네가 살고 있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작가는 김서방네 식구가 살았던 원래 꽃섬의 생태와 환경, 농촌모습을 전하며 그곳이 곧 우리가 거쳐온 고향이자 앞으로 돌아가야 할 이상향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지금의 지옥도 예전엔 천국이었으니 그러므로 지금 지옥도 다시 천국이 될 수 있다고.

    김서방네 식구가 메밀묵을 좋아했다는 것은 자연에서 채취되는 식물로 가공하지 않고 손수 만들어 온 식구가 나누어 먹는 소박한 온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어렵게 메밀가루를 구해와 빼빼엄마와 함께 전통적인 방식으로 메밀묵을 만들고 백년 묵은 버드나무아래서 감사의 눈발과 하늘과 강물을 벗삼아 김서방네에 제의를 올린다. 메밀묵을 만든 할아버지는 말했다. ‘요즘 세상에 안 하게 된 짓이 어디 한 두가지냐’고. 할아버지는 ‘안하게 된 짓’을 부러 시범보여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이 ‘안해도 되는 것’, ‘안해야 될 것’은 아니라 증명하시는 듯했다. 김서방네 식구들은 말한다. 우리는 꽃섬에서 ‘오래오래 살았다’고. 그 사실을 알고 계신 할아버지는 거든다. 저들이 원래 ‘꽃섬의 임자’였다고. 그 말씀은 꽃섬은 꽃섬을 가장 꽃섬답게 하는 사람들이 주인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땜통과 딱부리는 김서방네 꼬마손에 이끌려 꽃섬이 원래 꽃섬답게 아름다웠던 풍경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구경하고 돌아온다. 샛강이 흐르고 버드나무 우거진 그 곳에선 돛을 단 조각배가 떠다니고 어미 소가 풀을 뜯으며 풀꽃이 피어난 강가에 오리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한가롭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연상되던 이 장면은 어쩐지 조금 슬펐다. 이제 우린 그 시대로 돌아갈순 없는 것일까. 착찹함을 추스르기도 전에 사계절 그곳의 자연에 순응하며 농사짓던 그들은 가을 내내 일해서 씨앗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여기 씨앗이 자랑이 되는 이유를 보라. 꼬마의 전언은 곧 작가의 예언이자 우리 모두의 희망이 아니었던가. 우린 왜 봄이 오면 싹이 튼다는 사실을 봄에만 깨닫는가. 왜 봄이 아닐 때만 봄을 기다리는가. 봄은 확실히 좋은 것이 분명한데 왜 그 좋은 것을 좋아졌을 때만 기억하는가. 아니 나빠졌을때만 그리워 하는가. 그렇게 좋았다면 더 좋도록, 늘 좋도록 우리 다음 세대도 같이 좋아지게 노력할 순 없었는가. 


         저건 풀꽃들 씨앗이야. 우리 식구들이 모두 거두었어. 봄이 오면 꽃섬의 흙이 있는 어디에나 뿌릴 거다. -137p


    슬프게도 이 작품에서 땜통은 쓰레기 폭발로 인한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유일하게 죽어지는 인물이었다. 지난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는 포이동 판자촌에서의 화재소식을 접했다. 그들의 주거지 몇 십 채가 전소되었는데 재산피해는 일억도 되지 않았다. 강제철거를 당할까봐 인근 학교로 피신하지도 못한 채로 최근 이어지는 장마까지 견디고 있었다. 범인은 어이없게도 자전거타고 놀러온 어느 초등생이었고 소년은 재미삼아 스티로폼에 불을 한번 붙여본 후 자전거 타고 돌아갔을 뿐이었다. 소년이 판자촌에 살고 있는 아이였을까. 쓰레기 구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쓰레기가 돈이라는 걸 안다. 땜통이나 딱부리를 보면 쓰레기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로 터득하게 되는 그 세계 법칙쯤으로 이해되는데 말이다.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 꼭 그 책에 어떤 내용과 거의 유사한 사건이 신문이나 방송에 등장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예를 들어 소설에서 주인공이 거리를 돌면서 자판기의 동전을 훔쳤다 하면 바로 다음날 같은 사건이 뉴스에 뜨는 식으로) 판자촌 화재는 꽃섬의 화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불장난을 일으킨 그 소년 때문에 땜통이 죽은 듯이 느껴졌고 결국 초등생과 같은 자식을 둔 나 때문에 땜통이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최소한 무관하단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판자촌 화재 때문인지 땜통의 때묻지 않은 소년성 때문인지 부모에게 버림받고 교육의 사각지대에서 쓰레기로 성장해온 짧은 인생이 쓰레기 더미에 묻혀 쓰레기처럼 소각되는 운명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나를 죄스럽게 했고 그렇게 당하는 죽음이 많이도 서러웠다. 쓰레기더미 속 돈뭉치는 일찌감치 땜통의 운명을 예감한 그들이 선사하는 마지막 선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땜통이 죽음으로 해서 더 이상 김서방네 꼬마와의 교신은 끊긴 것일까? 이제 꽃섬의 원형은 어디서도 추억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움의 인연은 전승되고 그리워 하는 방법은 복제되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도 우리에겐 딱부리가 있었고 딱부리에겐 죽은 땜통이 예전 꼬마의 역할을 해주리라 믿어본다. 딱부리가 죽으면 딱부리가 누군가에게 김서방이 되는 것이라 믿고 싶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땜통처럼 꼬마처럼 이 세계의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꽃섬의 원형을 송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땜통이 꽃섬 아이와 우정을 나누었다면 빼빼엄마는 먼저 간 혼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종의 무녀였다. 이를테면 김서방네 식구들이 병이 났을때 제수음식을 마련해 굿거리를 해주는 역할이랄까. 그녀는 자주 선조들의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고 노랫가락을 읊으면서 인생의 깨달음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녀의 헛소리는 만물상 할아버지의 충언과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생생한 목소리로 남았다. 특히 ‘여기 니들만 사는 줄’ 아느냐며 ‘니덜 새끼 다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루’라는 외침은 물신에 지배당한 우리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꾸짖는 작가의 간곡함으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작품 후반부에 딱부리의 환상으로 전개된 슈퍼 마리오 게임의 한 장면 역시 작가의 시점을 대리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환상 속에 깜짝 등장한 김서방네 할아버지 또한 작가의 마지막 당부를 의미한다고 여겨졌다. 딱부리는 게임 속에서 자본주의가 ‘이것은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전자게임과 같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김서방네 할아버지는 점수를 따기 위해 더 이상 성문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유언처럼 조언한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거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어 서로 의존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므로 그렇더라도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감동으로 내려앉았다. 작가는 관계와 인연, 그리고 절망속에서도 그로 비롯된 소통을 망각하지 말라는 당부를 재차 강조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쓰레기다운 쓰레기, 사람다운 사람


    요즘 공교롭게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육십대 이상 문단의 대가들의 작품을 번갈아가며 동시에 만나게 된다. 젊은 작가들이 제공하는 상상의 에너지가 있고 노년의 작가들이 선사하는 웅숭깊은 메시지가 있다. 황석영 작가를 앞세워 그 비교대상으로 젊은 작가들을 폄하하거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들추어 새삼 황석영 작가의 대단함을 주장하고 싶진 않다. 그건 독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고 이미 황석영 작가는 그런 평가가 의미 없는 분이다. 다만 이번 작품으로 만년문학의 시작을 공표하고 기존의 성과를 다 불태워버린 폐허의 장소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그 잿더미와 함께 다음 세상의 풀꽃의 씨앗을 발견한 작가의 짙은 연민에 고개는 숙이고 싶다. 문학은 기록이면서 기억매체라 하였다. 문학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니라는 걸 이번 독서를 통해 깨닫는다. 엊그제 즉각적인 인터넷 검색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보았다. 새로운 매체가 기억의 방법, 기억의 과정 및 질량마저 바꾸어 버린 것이다. 결국 자본이 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주입한 건 기억의 매립이요, 가치의 소각이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마치 새해 첫날 검푸른 동해의 수면위로 붉게 타는 태양이 서서히 깨어나듯 한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을 경험했다.

   
 
새마을 모자를 쓴 아버지와 머릿수건에 몸빼 입은 어머니와, 흰 수염의 할아버지며 할머니, 낡은 양복차림의 큰 아버지, 예비군복 입은 외삼촌,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이모부부, 고모부부, 사촌형제들, 형들과 누이들, 그리고 식구들 중의 막내꼬마가 나타났다.    -133p
 
   

    오래전부터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그분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위로 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빙긋 미소짓게 되는 또 하나의 장면이 겹쳐졌다.

   
 
나뭇결이 갈라지고 터진 절굿공이, 끝이 모두 닳아버린 수숫대 빗자루, 뒤축이 떨어져나간 남녀 고무신 한 짝씩,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 쪼개진 물소뿔 마고자 단추, 부러진 곰방대, 이 빠진 참빗, 실 밥터진 골무,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참나무 도끼자루, 옻칠 벗겨진 실패,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귀퉁이 떨어진 밥주걱, 앙증맞은 나무 팽이 따위의 물건들 가운데 불에 그을렸거나 반쯤 타버린 것도 있었고 말짱한 것들도 있었다.    -224p
 
   

     
    저들은 누구보다 사람다웠고 이것들은 무엇보다 쓰레기 답지 않았다. 그래, 저들같지 않은 우리는 사람다운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한번도 쓰레기 다운 것을 쓰레기로 버려온 것이 아니라는 뜻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 많은 시간들, 더 많은 추억들, 더 아픈 물건들이 모두 쓸려 가버리고 폐허가 된 내 가슴에 그들이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새겨지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중에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는 오래전 내 할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던 물건이었다) 쓰레기 이야기였지만 내게 남겨진 건 ‘서루간에 정들어서’ 버릴 수 없었던 아니 내가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된 그래서 결국 사라진 모든 쓰레기 아닌 것들이었다. 작가는 사람이고, 시간이고, 공간이고, 물건이고 이 모든 사라진 것들의 영혼을 달래주려 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 살과 뼈를 관통하는 무형의 에너지를 촉발해준 것이었다. 문학에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구원이고 치유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 생의 기운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글로써 상기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작가의 기억 저 너머의 세계는 얼마나 소중한 문학유산인가.

    황석영 작가는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그래서 당연히 잊혀진 것들, 그 실용적 가치가 소멸된 것들, 사소해보여 남루한 것들을 문학으로 복원해 이렇듯 무형의 위엄을 보여준 것이다. 그가 환기해준 쓰레기의 기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온 것은 쓰레기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쓰레기를 생산하려고 무언가를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우리는 버려야 할 것을 키우고 버리지 말 것을 버려오지 않았을까. 그렇담 여지껏 쓰레기가 된 것들은 다시 주워들고 쓰레기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들을 버리면 되는 걸까. 그러니까, 중요한건 버리고 안 버리고가 아니라 무엇이 쓰레기인지 똑바로 아는 것이 우선일 터이다. 이제 우린 어떤 쓰레기를 버릴 것인가.

    메트로폴리스라는 초대형 우주선에서 배출한 쓰레기가 가장 많은 나라가 어디였던가. 미국이다. 전 세계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는 어디인가. 중국이 되었다. 지난 삼십년간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를 지진처럼 뒤흔들고 있는 중국 때문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실패와 교착만 반복하는 다자간 협력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다시 연대하자며 세기말적 자본주의의 위기와 불안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이 지는 제로섬이 아닌 모두 다 이기는(것으로 보였던) 윈-윈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는 계속 끝간데 없이 성장과 발전만 우선가치로 두자는 국수적, 퇴행적인 시각으로써 반문화적, 반환경적, 반평화적 결론임이 불을 보듯 자명하다. 슬프게도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화, 근대화를 최단시간에 이룩한 우리는 적어도 저들간의 싸움에서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에 속한다. 올 초에 터진 원전폭발과 방사능 오염위기도 일본을 안전모델로 삼은 우리로선 뜻밖의 악재였다. 오년 전 원자력 홍보관을 설계할 당시 우리는 아오모리의 원전과 홍보관까지 돌며 샅샅이 벤치마킹했다. 일본은 안전을 신앙처럼 학습해온 나라였고 그들의 안전 홍보 및 체험 교육의 수준은 지금도 세계 제일이다. 쓰레기에 누구보다 강박적인 나라 일본이 배출한 원자력의 쓰레기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대로 우리가 공들여 만든 것들이 더없이 낯설게 돌아오는 그러나 그 역시 우리가 추구한 것이기에 알고 보면 낯익은 세상의 가장 소름끼치는 실례일 것이다. 인간은 자본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산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것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원적으로 통제해야 할 것은 미래에너지의 시스템이 아니고 원래 쓰레기의 모태가된 욕망의 발전소가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와 소설이라는 순수문학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의 욕망의 찌꺼기, 쓰레기 같던 탐욕, 시기, 질투, 그리고 나를 옥죄고 목조르던 성과위주의 도전의식, 비교와 원망에서 허우적거리던 오래된 열패감 같은 기억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듯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오래된 컴퓨터를 리폼하듯 바이러스 먹은 모든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운영체제를 다시 셋팅해야 할 시점처럼 한순간 정화된 희열감을 맛보았다. 내 기억의 쓰레기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우리가 세계를 바꿀 순 없겠지만 세계가 주입하는 욕망만은 세계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욕망을 모두 버리고 도인처럼 살아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오늘처럼 우리가 버려온 것들을 확인하며 앞으로 우리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버려야 할 것들은 서로 묻고 답하며 나누고 싶다. 그래서 잊지 않고 싶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 쓰레기로 마땅한 것들만 쓰레기로 배출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쓰레기가 쓰레기 다워야 세상이, 나라가,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걸 통감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번 책을 덮고서야 내가 알던 난지도가 난지(亂地)의 섬이 아닌 난지(蘭芝)의 향기를 상징하는 섬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꽃섬’이 쓰레기섬의 역설적 은유가 아닌 원래 자신을 함축하는 실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 이름은 꽃피고 새우는 초지(草芝)와 난지(蘭芝)의 풀꽃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딱부리의 바람과 예언대로 그곳은 질기고 푸른 생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나 역시 불모의 난지에서도 희망의 불씨가 풀꽃으로 피워 오른 것처럼 모질게 흔들리는 바람앞에서도 질기게 살랑이는 풀씨가 되고 싶다. 아니 풀씨로 살고 싶다. 혹시 언젠가 풀꽃이 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가을 내내 열심히 씨앗을 거두어 다음의 봄에 뿌릴 준비를 하는 인간이고 싶다. 그렇게 부지런히 거두고 거두어 내가 만들어 놓고도 정작 낯설은 내 인생의 꽃섬 하나 만나는 그날을 가만히 기다린다. 그 꽃섬에서 내가 힘겹게 버리고 태우고 묻어온 내 인생의 모든 쓰레기들에 애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제 한류가 낯익은 풍경이 된 이 시점에 출판 7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의 역량에 가장 근접해있는 황석영 작가의 수상소식도 함께 조용히 기다려본다. 부디 그 소식이 전 세계에 낯설은 뉴스가 되지 않을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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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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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최상의 질문

   소설집은 대개 나로 하여금 다시 현실로 복귀하도록 하는 유용한 장치가 되어주었다. 특히 장편은 좀 더 비현실에 오래 머물게 하는 반면 단편은 분절음을 통해 약속된 시간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한명의 작가가 아닌 여러 명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은 더 그렇다. 도무지 앞선 작가에 대한 적응시간을 허락하지 않고서 다음 작가로 이어지는 무례함 속에서 너그러움, 유연함, 편안함을 유지시키긴 어려운 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문학상 수상집은 좀 더 피곤하고 그런 와중에 수상의 기준이 ‘젊음’이나 ‘가능성’일 경우엔 상당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 나이에) 나이든 어르신보다 젊은이를 만나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 것과 같은 이치다. 확실히 나보다 젊은 사람의 글은 힘들다.(그렇다고 나이 많은 사람이 더 쉽다는 뜻은 아니다) 어렵고 쉽고를 떠나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두 달 전 읽은 소설집 <깊은 밤, 기린의 말>의 작가는 한명 빼고 모두 나와 같거나 나보다 한참 위였다. 그들의 소설은 살아온 시간만큼 무겁고 견뎌온 세월만큼 깊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이 자연스레 나를 위로하고 내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는 것을 독서하면서도 실감한다.

   한 달 전 웹진문학상과 성격이 비슷한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읽었을 땐 작년의 같은 소설집보다 힘들었다. 그들의 에너지가 내게로 전해와 내 몸으로 흡수되기엔 거리가 있어 보였고 문제는 (그들이 아닌)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이 피부로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성과 내가 받은 감동의 수준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번 <웹진 문지 문학상 수상작품집>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집은 단편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의 작품을 어떤 순서로 엮었는지에 따라 개별하는 각 단편의 의미가 다르게 전달된다고 느껴왔다. 이번 수상집에 수록된 5월 선정작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나는 이 작품을 각기 다른 소설집을 통해 세 번째 만나게 되었다. 작가와 작품이 똑같았지만 그때마다 느낌은 조금, 혹은 많이 달랐다. 결과적으로 매번 새로웠다. 단편들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소설집에선 유기적인 에너지를 생성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같이 엮어진 작가들과의 공동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들이 ‘한국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의 최대치’를 발산하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독서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수 밖에 없고 그런 만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문단에서 말하는 가능성의 최대치라는 기준이 일반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란 퍽이나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최대치는 곧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 최상의 질문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축제의 장이 곧 이번 수상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과 연륜이 많은 작가들이 주로 대답형, 깨달음의 단편을 송신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젊은 작가는 아직 더 질문해야 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부지런히 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끔 휴대폰에 MMS수신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뜰 때 나는 송신자측의 에러라기 보다는 수신자측의 과부하가 원인이라 생각한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질문이 힘든 것은 질문을 받는 자의 역량인 것이지 보내는 자의 결함이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질문은 아마 스스로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그것은 앞으로 자신과 독자들이 같이 찾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의미가 아닐까. 질문이 훌륭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답이 얼마나 적확하느냐와는 다르다. 좋은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또 문학에서 질문은 대답할 수 없어야, 아니 어쩌면 평생 그것에 답하기 위해 더 살아보아야 할지도 모를, 그러고도 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를, 그런 것이 질기도록 우리 생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질문이 아닐까. 책을 덮고 결국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내가 쏟은 에너지가 살면서 다양한 질문의 무늬로 각인될 듯 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독특한 질문들의 전시장이었고 시너지는 다시 일상을 시작할, 그러면서 답을 발견하고자 두리번거릴 동력이 되는 관람이었다. 물론 질문이 다소 난해해 그 반발심리로 오용과 오독이 얼마간 두렵지 않은 운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지만.

  이 책에 실린 열 한편의 작품은 웹진( http://webzine.moonji.com/ )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독자와 소통의 기회를 가지면서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력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편집상의 재치를 언급하고 싶다.





 

 

 

 

 

 


<인터뷰 QR 코드를 스캔하면 작가와의 인터뷰 동영상을 확인가능>

   각 단편은 앞머리에 평론가와 인터뷰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QR코드를 스캔하면 바로 해당글의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똑같은 내용을 작가의 육성을 통해 전달 받는 것이 흥미로왔고 답으로 언급하는 내용들을 더 가깝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 보는 것과 전혀 달랐다) 종이매체를 통해서 다시 원래 순간이 재생되는 편집방식은 ‘<웹진문지문학상>이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웹진이라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1년 동안 심사의 과정이 중계되고 결과가 발표되는 문학상’이라는 취지와 특성에 잘 부합하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3D와 스마트폰 시대에 걸맞는 문학상의 재현이었다. 최종적으로 몰아서 이들 인터뷰를 들어보았고 글이 아닌 목소리를 통해 나는 그들이 질문하고자 하는 화두에 조금은 더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답하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 본 것인지 자신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의 핵심을 답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공교롭게도 살면서 우리가 묻어 온 것, 우연찮게 파묻혀 버린 진실, 혹은 기를 쓰고 진실의 부재를 메울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들이 물어 온 것은 지난 시절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묻어 온 것이 아니었나 싶도록. 그들이 묻고(問) 묻은(埋)것, 그것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구경만 하기엔 난감한 사안이었다. 서로가 얼굴만 맞대고 한참동안 말이 없을 확률이 많은 차원인 것이다. 그들은 왜. 우리는 왜. 나는 왜.



말할 수 없는 것을 ‘묻다’(問)

   열 한 편 중 대상으로 선정된 이장욱의 <곡란>은 이들 질문 중 가장 정곡을 찌르는 한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도 가장 듣고 싶은 그래서 누구나 하고 싶지만 선뜻 주저하는 질문일 터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의 문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문 닫고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가장 크다고 느껴진다. 물론 대상의 아우라, 이장욱 소설의 노련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소재와 주제가 죽음을 말하는 소설가, 즉 작가로서 자신의 고뇌를 고통스럽게 전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장욱은 진실과 허위가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을 최대한 길게 포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자에게 은밀한 힌트와 함정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진실찾기 게임을 진행하는 유머와 재치는 이장욱 소설의 결말이 누구보다 궁금하도록 만드는 보기드문 특장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가 <고백의 제왕, 2009>, <변희봉, 2010>,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2011>등에서 보여준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장치가 작가가 조성한 어느 깊은 골짜기에서 결국 타협하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오만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소설가가 죽음을 선택한 주인공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패배감, 섣부른 희망 같은 것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죽음자체의 풍경을 진짜 죽음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퇴락한 지방 소도시에 사는 여관주인 김상태는 ‘귀신잡는 해병대 출신’이다. 동네가 목란동이라 그곳은 ‘목란장’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김상태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귀신을 잡지는 못하는, 살다 별 꼴을 다보는 변변치 못한 중년남자로 등장한다. 목란장 202호에 자살의 모임을 제안한 소설가 고희성과 닉네임이 스몰, 코끼리인 그들이 모여든다. 이 작품에서 목란장은 전구하나가 나가는 바람에 곡란장이 되는데 곡란의 ‘곡’을 죽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골짜기(곡,谷)로 볼 것인지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 나오는 만곡(곡, 曲)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곡, 曲)로 들을 것인지는 사람마다 틀릴 듯하다. 그 어떤 의미의 곡이 되든 그것은 인생 최대의 환란(난, 亂)의 시간이 되는 것에 공감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가장 의미심장했던 대목은 그러한 곡란의 현실에서 소설가로서 고희성이 평소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는 사람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죽음은 삶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 아닐까. 죽음은 죽음자체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만 충만한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의문은 고희성의 머리에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   -29P

나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을. 죽음을 대면하는 소설을 씁니다.  -45P
 
   


   자연, 문장에서 고희성을 이장욱으로 읽게 된다. 이들을 마치 연극무대 대하듯 몰래 지켜보는 김상태는 삶과 죽음에 초연했다기 보다 그것들을 무시하면서 일상을 버티는데 익숙한 오늘을 사는 대다수 소시민의 표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왕년에 귀신을 잡는 해병대 출신이었더라도 막상 자기 생에 들이닥친 죽음의 현장에선 의미없는 과거인 것이다. 죽음은 그것이 처해지는 입장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한 사안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김상태의 시선으로 전달되는 죽음의 풍경은 다소 우습고 지루하고 어이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가 고희성의 시선으로 관통되는 죽음의 풍경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자살로서)누구나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는 타당하지만 타자가 선택하는 것엔 상대만큼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보기에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는 곧 살아야 할 이유와 동일했다.

   나는 평소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 여겨왔다.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좌절의 아픔이 클 것이고 그것을 해결해야한다는 의지또한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소설이 웃기면서 슬펐던 건 바로 죽고 싶은 욕망 끝에 그동안 버티고 있던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림에 있었다. 그들이 연출하는 죽음의 풍경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에 다름없었다. 작가는 누가 죽거나 사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그동안 죽는 것으로 삶을 택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등장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상을 지속하는 여관주인 김상태의 일상을 제시한다. 이들이 경험한 건 죽음의 허상일까, 삶의 실상일까. 각자가 견뎌내야 하는 고유한 자기 죽음의 무게, 낯선 자기 죽음의 풍경들만 남겨지고 우리는 무력감에 도취되어 죽음의 감각을 상실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는 2010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민규의 <아침의 문>을 떠올렸다. 물론 여관방에 같이 투숙했다가 다음 날 아침 유서를 남기고 함께 투숙한 사람이 죽어버린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작품도 중첩되었다. <아침의 문>에선 인터넷 동반자살이라는 소재와 죽음을 택한 자의 시선, 죽음으로 달려가는 과정상의 불가항력적 에너지, 추상을 구체화한 스타일적 유머들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박민규 작가는 죽음의 끄트머리에 또 따른 생명의 탄생을 기묘하게 중첩시켰고 이장욱 작가는 그들의 선택에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친절한 결말이었다. 그는 왜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내밀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죽음이 두렵다고 느껴질 때 내가 외우는 문장이 있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이미 2천 년 전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정면에서 극복하려 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죽음은 죽음과 동시에 어떤 고통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든 죽음을 바라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 철학자의 가르침대로라면 어떤 소설가도 죽음을 대면한 다음 죽음이나 삶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장욱은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고희성은 여전히 묻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소설가로서 죽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이냐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냐고. 독자인 우리는 태연스럽게 대답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려고 소설가가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세상에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있었다면 아마 작가는 존재치 않았을 것 같다고. 우리끼리 말하고 나면 그만일거라고. 죽음 역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닐 것이며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말할수 없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을 ‘묻다’(埋)


1. 매몰埋沒의 현장

   아마도 묻히는 쪽이 피해자가 된다면 그건 매몰당하는 일일 터이다. 한국 현대사에 매몰의 현장으로 선명하게 각인된 장소는 아마도 삼풍백화점일 것이다. 거리감은 있지만 칠레의 광부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 책에서 생이 매몰된 장소는 이국 만리 바닷가에서부터 시장터 붕괴되는 주택, 잠실 메인스타디움, 엄마의 자궁등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실체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보다 심층적인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매몰된 사람모두 각자 생을 부여잡았던 신념들이 누구보다 오롯했음을 알 수 있다. 어부의 노동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사이비 신교도는 교주가 죽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고집이, 학교 대표로 뽑힌 꼬마는 자기가 아는 모두에게 내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포부가, 뱃속에서 살아남은 쌍둥이 소녀는 소중한 생명으로 존중받고 싶다는 본능이 강렬했다. 이들 모두는 누구보다 강했던 자신의 신념이 서서히 매몰되면서 육체적, 심리적 죽음을 맞이한다. 대개 동료 혹은 경쟁자의 매몰되는 순간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매몰되는 순간마저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정용준의 <가나>는 이미 익사하여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 직전의 시간을 복원해 내는 아련한 문체를 통해 생의 슬픔을 심연의 바닷속으로 침몰시킨다. 익명의 익사자가 숨지면서 죽음으로 가져가는 이별의 고통은 그대로 우리가 익사자를 관망하는 죄책감으로 이어지며 바닷바람을 동반한 서러움을 남김없이 주입한다. 바람과 함께 죽어가는 순간을 중계하듯 아름답게 그려내는 장면 구성이 인상깊었다. 정용준은 <떠떠떠, 떠>를 통해 익숙한 서사를 극적으로 몰아부치는 추진력을 확인한 바 있다.

   김성중의 <게발선인장>은 사이비 종교를 삶의 유일한 끈으로 여겨온 어느 할머니의 생의 애착을 그렸다. 외현으로 드러난 것은 할머니를 주인으로 둔 세입자 대학생과 할머니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노인을 통해 인간이 보여주는 맹목성의 긍정과 부정을 질문하는 형식이다. 할머니는 노인과 이웃의 배신, 재개발 시행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 처연한 매몰자의 운명이 된다. 살면서 할머니가 잘못한 것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 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게 매몰이 색다른 구원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은 80년대 대규모 국가적 축제에 동원된 어린 소녀의 심리변화를 통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손해를 입지 않고선 거대 메트로폴리스를 탈출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성을 반추하고 있다. 외국인을 향한 가식적인 친절, 눈에 보이는 성과,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조건들을 추억으로 매몰당하며 빠르게 지나쳐온 오늘에 당신과 내가 마주한다는 이야기는 올림픽 정신을 강요받고 자란 내 세대에게 익숙한 서사였다. 그렇게 보자면 내 세대는 단 한번도 교육현장에서 육체적, 심리적 매몰을 경험하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엄마의 뱃속에서의 최초 모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스런 현실을 반복한다는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은 흡사 성장소설의 언어를 한껏 과시하는 듯했다. 뱃속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나머지 소녀는 사람들이 형제의 피와 살을 통해 살아난 독한 가해자로 인식하지만 정작 생존한 당사자는 엄마의 자궁속에서 매몰된 것은 자신이 누려야 했을 당연한 생의 안온, 그 보금자리로서의 요람이었다 말한다.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과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의 경우 주인공은 죽지 않고 계속 매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앞날을 살아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한번 사정없이 매몰되었다고 기억이 지워지거나 긍정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는 것. 사람에게 매몰의 추억은 곧 성장의 기억은 아닐까.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새삼스레 환기하는 것은 생의 어느 시기에 예고없이 닥쳐오는 실체로서의 고립감이다. 사람이 어딘가 무엇으로부터 파묻힌다는 것은 필히 타의적인 외로움을 동반한다. 이것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우리가 눈감는 날까지 누구에게나 동일한 생체반응이 아닐까 싶어서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듯 수많은 매몰된 현장을 털고 일어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매몰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생의 끈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남은 생을 보장하는 일인 것이다.


2. 매장埋葬하는 사람들

   누군가에 의해 파묻히지 않고 직접 매몰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묻거나 혹은 우연에 의해, 때론 실수로 인해 그들은 시간을, 공간을, 사람을, 기억을 매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유의 <커트>는 '가위'가 제공하는 폭력의 기억에 천착한다. 이 작품에서 ‘가위’는 미용사가 최초로 획득한 자기방어의 도구였으며 최후까지 잡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공격의 장치이다. 예상했듯이 가위를 손에 쥔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면서 하나같이 빈곤층에 속하는 경우였다. 손끝의 고통을 잃어버린 딸아이와 그 딸아이를 버린 미용사, 그 아이를 받아 기른 미용사. 이들은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 가위로 커트함으로써 생을 지켜내온 공통의 이력이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 쓰레기로 처리하듯 그렇게 상처도 매장시켜 온 것이다. 상처를 매장하는 것은 이들 여성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이자 삶의 수동적 전략이었다. 황정은의 <옹기전>에선 특이하게도, 실제로 항아리가 매장당한다. <커트>에서 ‘가위’처럼 <옹기전>은 ‘항아리’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항아리가 실마리고 항아리가 함정이다. 어린 소년이 항아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무법자처럼 자기식대로 밀고 나가는 모습은 꼭 작가 황정은의 소설작법과 닮았다. 철거가 한창인 옆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항아리가 매일 밤 서쪽으로 가면 다섯 개가 더 있다는 소식을 전해줌으로써 소설은 속도감을 더해간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착한 서쪽 끝에서 그들 항아리는 늘 반복되 오던 전몰의 광경을 선사하고 우리는 (원래부터)구경꾼인 채 그 무엇도 그곳에서 건져오지 못한다. 공사꾼들이 쉬지 않고 매장하는 항아리는 문학이 환유할 수 있는 공사판 한국사회의 뒷모습일 터이다. 이 작품은 보다 본질적으로 확실히 매장하는 서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수상집이 전언하는 장소에 가장 근접한 작품일 수 있을 것 같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과 자신의 인생마저도 매장하는 과정을 우발적 서사의 메타포로 그러나 무덤덤하게 연출한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은 역으로 우리가 그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해온 이력을 묻고 있다. 누군가 그들의 행복과 희망을 처절하게 외면하고 깊숙이 묻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과 세상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냐 반문하는 것이다. 정소현은 단편의 서사에서 장편의 호흡과 드라마틱한 전개및 결말을 선호하는 작법이 감지된다. 이 작가의 장편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묻어버린 아픔’이라는 가요가 유행한 시절이 있었다. 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안타까와하던 청춘이 자신의 욕심을 가슴에 묻고 그 애절함으로 부르짖는 노래였다. 가사중반에 ‘변한 게 세상이라지만 우리 사랑 이대로 간직하며 먼 훗날 함께 마주 앉아 둘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아’라는 아픈 구절이 있다. 묻어버린 아픔이 먼훗날 행복으로 승화하는데는 오래 간직만 하고 사랑했던 순간의 기쁨만을 추억으로 새겨두는 자세가 필수적인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상처를 묻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가슴에 묻는 방법을 배운 적 없기 때문에 남의 가슴에, 혹은 남의 장소에, 심지어는 남의 삶까지도 잔인하게 묻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매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사랑, 그 하나가 죽을만큼 절실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은 남들의 가슴에 못을 박지는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묻고 살아야 할 것이 나의 실수나 과오, 내가 저지른 탐욕, 복수의 결과뿐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매장하는 생을 중단할 확률은 없어 보인다. 나는 그 사실이 제일 슬프고도 쓸쓸했다.

3. 매립埋立의 꿈

   그렇다면 매몰되고 매장하는 이 고독한 세계에서 구멍난 그곳은 영원히 방치된 채 외면당해야 하는가. 누군가 파헤치고 깨끗이 묻어버렸다면 겉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다. 소중한 실체가 사라졌다 해도 시각적으로 무언가 사라졌다는 느낌은 받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 화려하고 거대한 자본주의에선 하나둘 사라지는 모든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듯이. 이 책에서 젊은 작가들은 하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된 하나, 그 나머지 하나의 구멍을 메우는 방법으로 매립을 선택한 듯 했다. 언뜻 보기에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중요한건 나름대로 메우는 행위를 통해 조심스레 복원되는 우리네 현실일 것이다. 그 현실은 거의 진실에 육박하는 무게감을 조성한다. 어떤 책에서보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현실을 메우는 방법이 독특했는데 나는 그것이 작가들의 내부 자아들간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가적으로 동등한 대립항들이 그대로 소설로 노출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옛날 이야기를 메우고, 자신이 잃어버린 놓쳐버린 관계를 메우고, 혼란스런 자아를 메우는 듯 보였다. 열심히 메워서 이루어진 것은 어느 한쪽의 완성이 아니라 여전히 완성되지 않는 같은 비율의 양쪽 동등함이었다. 저울로 잰듯 그들은 중립과 균형만이 서사의 목적이라 여기는 듯 했다. 그들이 전해준 저울위 팽팽한 에너지야 말로 다른 작품들이 허물어 놓은 거대한 구멍을 다시 채울수 있을 만큼.

   나는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을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과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작품에서 만났으니 이번에 세 번째이다.『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에선 단연 가장 참신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외려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얌전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원래 이야기를 자기 스타일로 매립하는 솜씨좋은 기술자로 보였달까. 작가는 메리 셰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서사로 이끌어 가면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 인식되기까지의 그 변질된 진실을 허구로 구성해낸다. 무언가 최초 원작에서 감지한 허점에 자신만의 논리를 덧대고 그 자리를 능숙하게 봉합해 완전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최제훈이 말하는 괴물에 대한 변명은 궁극에는 누가 괴물인지 질문하는 섬뜻함으로 남겨진다. 작가는 이야기 전승과정에서 진실의 누락 및 수정 여부를 허구로 추적, 심문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는 괴물이라는 환상에 대한 개념 사용여부와 목적 및 이용 행태는 모두 우리 인간의 몫이었음을 주장한다. 가장 극적인 논리는 박사의 괴물적 자아가 곧 괴물 프랑케슈타인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슬몃 그동안 우리가 보고 떠들어온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은 우리안의 온갖 추악한 욕망과 허영, 광기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 놓은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을 세 번 읽으면서 얻은 깨달음은 누구나 자신속에 자기가 만든 괴물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최제훈 작가에 괴물조각이 소설이라는 문학으로 바느질되어 탄생한 것이라면 우리들에게도 내재된 괴물조각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완성되리라 하는 타당한 변명을 내밀수 있었다. 결국 그는 자기속의 괴물, 또 다른 자신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 괴물을 깨끗하게 매립했고 그것의 결과는 꿈처럼 이루어졌다. 이제 그가 창조한 괴물을 우리에게 비추어 볼 때가 아닐까.

   김유진은 배경이 되는 공간과 인물간 관계를 암시하는 정황을 글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이다. 캐릭터나 사건이 분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희미한 빛>을 의지삼아 안개처럼 시공간을 장악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대단한 일 하나 없이도 시종일관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에너지를 지녔다. 나는 회화적, 감각적, 미학적이라는 수식과 더불어 연극적이라는 작법을 덧붙이고 싶다. 이번 작품에서 감지되는 연극적 기운은 나와 나의 옛날 남자친구 B, 지금 내가 동거하는 L, 그리고 L의 여자친구라는 우연한 사각관계이다. 나는 한마디로 그 누구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며 고립된 존재로서 그저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만 긴장을 발휘하는 경우였다. 그녀가 소통의 부재, 관계의 상실을 메우는 방법은 일상의 습관이면서 그것의 관찰 혹은 묘사의 디테일로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이면서 마치 자신은 연출자나 관람객처럼 카메라에서 빠져나와있는 듯한 무심함이 고독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핵심이었다. 김선재의 <독서의 취향>은 이 책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느껴졌으며 가장 관념적인 주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고 나가는 작가의 의뭉스러움이 놀라웠다. 이 작가가 자신을, 소설을, 이야기를 메우는 방식은 자기해체였는데 그 환상은 지독히도 현실적이어서 반전스러울 정도였다.

  이 작품에서 나와 안나, 그리고 안네의 관계를 의심할 수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시는 시인이 쓰고 나는 책이나 팔고 나와 살지 않는 안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와 사는 안네는 나를 지상에 단단이 묶었다.  
-363P

 
   


   이 소설은 ‘나’라는 인간을 ‘안나’와 ‘안네’로 분리하는 그 곳의 분열과 혼란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안나’가 나의 가장 안쪽(內)에 있는 나도 알 수 없는 나, 즉 내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라면 ‘안네’는 그 안쪽에서 ‘안나’와 대치하는 입장의 상대적 개념(네)으로서의 2인칭 나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원래 ‘나’와 ‘안나’와 ‘안네’의 총합인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전제인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조건을 받아들이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그것은 세 명의 자아가 서사를 통해 각기 주장하는 바가 상이하고 그것들이 상충되는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더듬이면서 시인이면서, 독서가이면서 서적외판원인 나는 나를 감상하기 위해 취향을 분리하고 현실 오작동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기 현실을 메워버린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작품 말미에 늘 그렇듯 모든 것이 ‘개인적 감상이 만들어낸 형식적 오류’라는 것을 인정하고 분리된 현실을 제자리로 복원시킨다. 이것이 나가 말하는 자신의 ‘독서의 취향’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은 취향이나 감상의 문제가 아니고 진심이나 비밀과 별 상관없는 종류의 텍스트였으며 그곳은 나의 분리가 필요치 않은 여기, 이곳인 것이다. 잔인한 건 언제나 현실이라는 사실만 믿을만한 사실이었다.



   먼저 출발한 <젊은 작가상 수상집>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웹진 문지 문학상 수상집>은 조금 더 중립적이다. 물론 중립의 기준은 순전 독자인 내 기준일 터이다. 질문하는 영역이 간접적, 내재적이며 답하는 방식이 관념적이다. (작가의 인터뷰를 육성으로 꼭 듣기를 권한다) 젊음이 이런 것이라면 젊은 작가는 지금 한국문단에서 가장 치열하게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우면서도 또 가장 괴로울 때가 소설가의 질문이 곧 내 인생의 질문과 일치할 때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장욱의 <곡란>은 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 가장 많이 겹쳐진다. 나는 언젠가부터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오늘을 살았구나 보다는 오늘도 죽었구나,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하루하루가 살아내었다는 생각보다 이로써 오늘은 다 소진했고 내 인생에서 죽어진 날이 되었구나 싶은 것이다. 하루 죽었다... 산다는 것을 죽는 그날까지의 마이너스 여행이라 보았을 때 오늘 하루는 그 전체 일정에서 다 써버린 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같은 실상임을 나는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일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고 모르는 것이 무서운 것이므로 죽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알면서 그것을 알았다고 말하거나 글을 쓸 수는 없겠구나를 가슴치며 땅을 치며 마침내 실감하게 되었달까.

   하지만 나는 답이 없어도 자꾸 묻다보면 어느새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거나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 이 작가들이 내게 던져준 질문들은 모두 소중한 계기가 되어 오늘도 죽어가는 내 자신을 한편 살아가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삶은 그렇게 죽음을 번복하며, 자신을 전복함으로써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반복일 것이다.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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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7-1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제 겨우 절반 읽었는데 말입니다. 문학상 수상집이 좀더 피곤하다는 말씀, 적극 공감입니다. 히
그래서 좀더 쉬었다가 나머지 절반 읽으려고요. 아..근데 웹진문학상..그것도 문지..이라니까 자꾸 읽고 싶어집니다요. 중립적이라는 말씀도 좀 궁금하구요. 아..qr코드를 배워서 저 동영상, 꼭 볼겁니닷. 아이폰도 있는데 말입니다. 써먹지를 못하네요..ㅠ.ㅠ

저는 <게발선인장>이 제일 눈이 가네요. 주위에서 좀 보는 할머니들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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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 어제의 불만


   이 책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바깥에 있다. 물론 그렇게 예상했기 때문에 이 책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바깥에 있는 그들이 말하는 ‘불안’은 안에 있는 우리의 거울이 되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불안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작금의 시대에 범 세계적으로 거시적인 불안을 관찰하고 함께 미래를 성찰하고자 하는 소박한 독자의 심정이었다. 바로 그런 뉘앙스의 제목 덕분에 다른 객관적인 정보들을 간과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언짢은 것은 원제를 왜곡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기디온 래치먼(Gideon Rachman)이 집필한 책의 원제는 <Zero-Sum Future: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이다. ‘제로섬 미래’이면서 부제가 ‘불안의 시대에 놓인 미국의 파워’인 것이다. 문법상으로만 보아도 중요한건 미국의 힘인 것이지 세계의 불안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출판사는 떡하니 <불안의 시대: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라는 인문교양학적인 제목으로 바꾸어 제로섬의 경제학적인 이미지와 아메리칸의 부정적 뉘앙스를 덮어버린 것이다.(허긴 제목이 ‘미국의 힘’이면 역학적 결과에 관심있는 독자들만 이 책을 사볼 것이 자명하지만)

  나는 책을 덮고서 표지에 그려진 다섯 개의 커다란 돌멩이 위에서 불안하게 서있는 코끼리를 확 밀어 버리고 싶었다. 이 책은 결국 다섯 개의 돌멩이를 흔들림 없이 균형을 맞추어 잘 쌓아보자는 것인데(그래야 코끼리가 제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코끼리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선 원래 능력자인 코끼리의 문제이기 보다 그런 식으로 돌 쌓는 자, 혹은 그렇게 쌓여진 돌의 문제라는 의미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코끼리더러 불안한 돌 위에 서라고 한 적이 있단 말인가. 번역만 사실대로 정직(?)하게 했어도 이 최종적인 불쾌감은 줄었을 듯 하다. 책덮고 난 후 코끼리에 가려 원제목을 확인하지 못한 실수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조금만 더 찾아보았으면 저자가 최근에(2010-2011) 이 책 말고도 제로섬을 타이틀로 한 책을 두 권 더 출간했고 제목엔 모두 제로섬이 저자의 법칙처럼 네이밍되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원서의)책 소개만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로섬의 법칙을 벗어나려면 그 대안으로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자는 식의 결론은 접할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이 인문학보다는 비즈니스, 경제학 분야에 속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 Zero-sum World :                                                  < Zero-sum Future :
    Politics, Power and Prosperity After the Crash, 2011>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 2011>


  경제학에 속한다는 것이 잘못되었고 그럴 줄 알았으면 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 인문학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페이지를 넘겨간 것이 얼마간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저자는 오랜 기간 경제기자로서 여러 지역의 특파원 생활을 하였고 현재 영국에서 발행하는 국제 경제신문의 칼럼을 맡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오늘 아침(2011. 7.9) KBS 2 라디오의 <박경철의 경제포커스>에서도 번역자와 함께 소개되었고 경제 전문 케이블 TV SBS CNBC 채널에서도 이미 상세하게 브리핑 된 책이다.(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152729) 아마존에 등록된 이 책의 원서엔 대부분 긍정적인 서평이 올라와 있으며 이 책이 21세기라는 불안의 시대를 깊고 넓게 알게 하면서 앞으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 무척 유용하다는 식의 ‘Essential Reading’이나 ‘The perfect guide’라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의 결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보다 불안한 상황이니 기왕이면 오래 반장 해먹은 친구를 중심으로 의기투합해 다시 똘똘 뭉치자는 굉장히 동양적 사고방식을 투영한다.(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식민지 분단국가의 오래된 대 국민 정체성 아니었던가) 각자 흩어져 하던 대로 자기 목소리를 높이자, 보다는 낫겠지만 문제는 이 책이 주장하는 불안 및 불안해소의 주체로 보인다. 누가 더 불안하고 그리하여 누가 불안을 해소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누가 덜 불안해지나 하는. 이 책에서 세계는 미국이고 이 책에서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는 오로지 미국의 경쟁국가로만 의미를 획득한다. 조금만 더 부풀리면 미국이 아주 유례없이 불안하므로 세계가 멸망하는 꼴 보기 싫으면 다시 미국을 불안하게 하지 말자는 뜻으로도 들린다. 첨부되는 자료와 기사는 더없이 세계적이나 그로인한 통찰은 누구보다 미국적임을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피부로 체감할 터이다. 허나, 이 책의 피상적이고 오만한 결론과 상관없이 서구 강대국의 서구적 시각은 2011년 현재 지금 이와 같다는 것이 우리로선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급작스럽고 황당스런 결론을 가지고 우리가 옳고 그름을, 혹은 장점 단점을 논하는 것은 이 책을 대하는 자세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거의 신문 칼럼의 연장선상에 있는 외교 및 경제 리포트의 성격이 강한데 오늘자 런던 발, 뉴역 발, 도쿄 발 경제 사설을 보고 그 결론이 한국의 국민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하여 당신네들은 틀렸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의미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저자가 그토록 부르짖는 2008년 금융위기 같은 범 세계적 사태만 하나 터져준다면 또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바뀔 수 있는 성질의 텍스트가 아닐까. (물론 텍스트만 바뀌고 기본적인 믿음은 거의 종교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긴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해온 대로 평소 분석위주의 기사들로만 마무리 짓고 나머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기사가 아니라 책이니만큼) 마무리만 지었어도 별 문제는 없었을 듯하다. (우리 언론에서도 저자의 결론은 무시(?) 하고 그저 시대를 나누어 잘 정리한 것에만 언급하지 않는가) 문제는 저자가 자기수준에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 결론을 우리 수준에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음이다. 결론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직업적으로)결론을 내는 것이 저자의 역할이었고 그것은 이 책에서도 유효할 수 밖에 없는 습관이자 패턴, 업무라고 여겨진다.

  미국위주의 초국수적 결론만 제외하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가 지난 30년을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 의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각기 그 시대를 정의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역할이자 사회가 동의한 능력이 아닐까. 저자는 구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기자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를 규정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낱낱이 풀어놓았다. 이 책의 성과는 바로 국제 정치관계에 있어 지난 삼십년간의 역학구조와 그 변화를 자신의 발품을 팔아 조사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손으로 기록한 결과들로 재건축 했다는 것이 아닐까. 저자의 결론을 우습게 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사실 그 삼십년의 세월에 있다는 생각도 한다. 저자는 늘 현장에 있었고 인물의 곁에 있었고 사건과 추이를 몸으로 겪은 사람이었다. 물론 많이 알고 그래서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이 꼭 훌륭한 정답을 내라는 법은 없다. 나 역시도 밤을 새워서 고민해 놓고 다음날 아침에 내리는 결정은 그 전날 전혀 밤을 새우지 않았어도 좋을 만한 결론일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많이 고민한 사람은 말할 수 있다. 보따리 풀듯 고민한 내용들을 풀어 놓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 고민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전혀 다른 해결책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같이 강대국이 아닌 변방의 나라의 국민이 보기엔 퍽이나 자존심 상하는 결론이겠지만 지난 세월 우리라고 옳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대통령으로 뽑아주진 않지 않았던가. 이 책은 논리로 구축된 오늘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에는 공감하고 그 흐름을 우리의 필요성에 따라 잘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또 내가 보기에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써온 고민들이 중요한 것이지 대안이나 결론은 스스로도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결론을 설파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2. 오늘의 불안

  이 책의 시대 구분은 1978년, 1991년, 2008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각기 전환, 낙관, 불안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중국의 개방, 소련의 해체, 미국의 금융위기가 변화를 이끈 주체로 규정된다. 시작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며 마지막은 G2로서 중국의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삼십년간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를 뒤흔들고 있는 주체는 바로 중국이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미국입장에서)중국으로 시작해 중국으로 끝난다는 인상을 주는데 70년대 말 이후 덩 샤오핑의 개방정책 추진을 기점으로 세계화, 자유화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삼십년의 시기를 구분하는 잣대로 근거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아마도 중국의 변화흐름을 훑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도 소련도 다 극복해온 미국이니 거대 중국도 헤쳐나갈 수 있다(니들이 도와준다면)는 메시지가 우리로선 참 재미난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가 북한과 화해하여 행여나 통일이라도 할까봐 불안한 나라이다. 일본은 행여나 우리가 자신들을 앞지르며 아시아의 일인자가 될까봐 노심초사 좌불안석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군을 보험삼아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선 복잡한 역학관계로 인해 어느 하나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순간이 없는 실정이니 그들간의 리그는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미국은 북한의 행동을 억제하는 데는 공동으로 협력한다. 하지만 두 나라 간에는 이러한 협력을 제한하는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가 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 국경 바로 앞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는 것을 중국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355P
 
   


  일례로 오늘아침 신문엔 지난 4일 열린 故 로널드 레이건(1911~2004)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동상 제막식을 기사화하면서 바로 레이건의 길을 갈 것이냐 카터의 길을 갈 것이냐를 여론화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0/2011071001267.html

  이 책에서도 전환의 시대를 이끈 레이건은 중요한 ‘냉전시기의 정치가’로 상징화 되고 있었다. 저자는 대처총리와 레이건의 파트너쉽을 자세히 언급하면서 같은 세계관을 가진 두 사람이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과 소련에 대한 강경 노선을 펼쳤고 결국 소련을 해체하고 탈냉전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친구였던 레이건을 기리는 대처의 축사에 "다음 세대들이 이 동상을 보며 그가 우리에게 베푼 것을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라는 구절의 '다음 세대(future generations)'와 '되새긴다(remind)'란 표현을 특히 강조하며 바로 한반도 역사의 ‘동어반복(同語反復)적’ 속성을 이어 붙여 그것에 설득력을 실으려는 논설위원을 볼 수 있었다. 레이건은 평화를 주장하기 보다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소련을 압박하는 정책’을 씀으로 해서 냉전체제를 종식시켰는데 이를 교훈삼아 한반도는 평화를 어떤 식으로 지켜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공산주의와 공존하며 평화를 외쳤던 카터 대통령을 빗대며 인권과 평화를 앞세운 패배주의를 지향할 것인지도 비교화법으로 질문한다. 우리의 대북관계 노선 및 정책은 이렇듯 이미 고인이 된 레이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대처의 생각, 영국자 신문의 사설과 무관하지가 않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낙관의 시대를 부활시키자는 저자의 생각은 오늘자 신문의 논평과 중첩되면서, 그것이 바로 한반도의 평화논리와 결부되는 것을 목격하곤 이 책이 꽤 영향력있는 책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반부로 갈수록 미국의 힘이 막강했던 ‘낙관의 시대’의 정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시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개인적인 뉘앙스로도 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낙관의 시대에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부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내가 이 잡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던 때인 1991년,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부수는 매주 30만부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이코노미스트>를 떠날 때인 2006년에는 100만부가 넘게 팔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이코노미스트>가 시사주간지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낙관의 시대를 특징짓는 경제사상, 특히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활기차게 전파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한 예로, 미국의 국제 관계 권위자인 마이클 만델바움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화를 알리는 주보”라는 말까지 했다. -155p
 
   


  저자가 규정지은 낙관의 시대는 정확히 자신이 이코노미스트에 근무한 세월과 일치한다. 즉, 전 세계에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전파하는 선봉장으로서 앞장서온 저자는 그 시절 언론계의 클린턴, 빌게이츠에 다름 아닌 것이다. 클린턴 정부와 빌 게이츠 그리고 우리의 김대중 정부를 떠올려 보면 그 시절 IT 혁명으로 미국의 낙관주의를 적극 수용, 개발한 발빠른 이력이 겹쳐지고 한국은 미국이 선도하는 세계적 정책의 영향하에 위치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 하나 아쉬운 건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은 유독 작고 볼품없는 나라로 생각된다는 것. 그것은 저자가 분석하는 국제정치의 역학적 논리에 있어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난 시절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처럼 자신들을 위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미있는 나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늘 자기들 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방증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저자는 한국과 북한을 말할 땐 마치 저 위에서 한참 아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거의 반복되는 형용으로 일관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한국과 태국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휴전선 너머 북한을 바라보면서 경제적 고립은 훨씬 더 나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11p

세계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아시의 떠오르는 중산층은 과거보다 영양상태가 더 좋아지고 있다. 따라서 식량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267p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중 하나인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 276p 

국제적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과 문제를 진정으로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같다고 볼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도 고립된 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이 확실히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핵에 관한 국제적 합의의 맹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297p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에 대한 그 어떤 평가를 하진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개최된 정상회의는 잘도 언급하면서 작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이 책이 올해 출간되었고 정상회의가 작년 말이니 저자의 성격상(?) 서울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이 환율문제 등과 관련해 신경전을 벌인 정도의 에피소드는 첨언할 만도 한데 어쩐 일인지 서울 정상회의는 논외에서 제외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그런 건 우리만 중요해보였다고 할까. 당시 파이낸셜 타임즈는 “새로운 조직이 리더쉽을 장악했다”고 까지 보도했다는데 저자의 눈엔 우리의 리더쉽 같은 건(대세에 지장이 없으므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자가 지목하는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세계화와 밀접한 기후변화와 관련한 문제도 대립을 이루는 건 중국이었고 미국을 제치고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1위를 달성한 중국을 걸고 넘어지는 식이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중국 간의 직접적인 협상은 두 나라가 중요하게 판단하는 국익이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계속 교착 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많다. 기후 변화에서 글로벌 경제 불균형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중국은 점점 더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실이 되는 제로섬 관계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291P

 
   


  결국 이 책의 원제인 제로섬의 문제는 곧 중국과의 대결에서 손실이 발생할지 모르는 미국의 심리적 불안을 상징하는 키워드였던 것이다. 저자는 효과적인 다자간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실패와 교착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은 낙관의 시대에 막강했던 미국의 파워라 주장한다. 문서상의 합의는 실질적인 도움, 수행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제로섬의 도래로 더 이상 오바마 정부의 ‘글로벌 문제에 관한 글로벌 해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 저자가 내리는 삼십년간의 처방인 것이다.


   
 


중국은 위안화의 가치와 외환 시장에서 자유롭게 변동하지 못하도록 해 그 가치를 고의적으로 평가절하함 으로써 미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은 이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내 자산을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미국에서 재순환하도록 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이자율은 떨어졌고, 결국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신용 붐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 함으로써 중국산 제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하락시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국과 유럽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341P

 
   

  저자는 미국 내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의 시각을 타전하며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을 은근히 중국으로 돌리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여지를 독재국가라는 개념으로 더 굳건히 하려는 논리의 발판으로 삼는 듯 했다. 금융위기로 바탕을 다지고 기후변화로 역량을 만들어 독재국가로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들 중 두 나라가(인구는 두 나라를 합쳐 15억이 넘으며, 군사력은 세계 2위와 3위를 차지한다) 독재국가이며, 이들은 가까운 미래에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3. 어제 오늘의 대안 

  독재국가의 지배를 받게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저자는 삼십년 동안 세계화, 자유시장, 민주주의 사상을 언론을 통해 전파하는데 앞장서온 사람이었다. 라이벌을 두려워하고 과대평가하지 말 것이며 EU는 더 확대되어야 제로섬 논리를 해체하는 역학적 힘을 키울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며 미국국민은 세계화가 윈윈 세계를 창출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발전은 결국 다시 시작될 것이다’, 는 것이 불안의 시대에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었다. 속된 말로 중국은 80년대 일본보다 위협적이지 않고  생각보다 자기들을 앞서는 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세월의 통찰에 비해 오늘 내리는 처방은 참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예전에도 그래왔던 거 처럼 앞으로도 잘 될거라고 믿는것이 최선이라니. 돌려 말하면 사실 대안이 없으니 우리의 저력과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해온 시간들만 믿자는 것으로 들리는데 이쯤되면 웃기다기 보다 슬퍼해야 할 자조적 답안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자본주의는 명목상 미국의 보호아래 지난 삼십년간 80년대 맥도날드가 2000년대 스타벅스라는 서구 다국적 기업으로 교체되면서 동반 성장해왔다. 1950년 전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반세기 이상 이만큼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온 나라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성과지향적인 삶 자체가 국가와 개인의 성공을 앞당기는 우선된 가치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핵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었고 미국이 도와주었고 미국이 우릴 자극했고 우리도 미국에 기여했다. 세계적으로 소련과 중국과 일본과 미국사이에서 그 국제적 정세를 좌우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만큼 한반도의 미래가 세계적 변화와 맞물려 있으며 세계적 평화와 상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조금은 더 흥미롭고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다시 제로섬의 법칙을 환기하자. 내가 이기면 당신이 지는 게임. 나의 성공은 타자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최근 성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내가 탈락되지 않으려면 누군가 탈락해야 하는 것이 서바이벌 시장의 법칙인 것이다. 오늘날 잔인한 경쟁의 원칙은 윈윈이 아니고 제로섬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제로섬의 게임규칙을 대체할 대안이 협력이나 양보가 아니고 한 명의 영웅을 믿고 따르는 방식인 것은 그 길고긴 분석에 비해(분석이 아쉬울 정도로)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고 헐리우드 적인 것이 아닐까. 내 목소리만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아니 더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일단 돈 먼저 벌고 나서 파이를 나누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세계는 효과와 이득이 배려와 이해보다 중요한 것인가.

  다시 윈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운하다. 낙관의 시대로 돌아가 대처와 레이건의 리더쉽으로 민주주의 복음을 전파하던 그들만의 행복은 우리의 그것과 상이하다. 우리는 다 같이 이기는 것도 소중하지만 다 같이 져도 서로를 안아주는 민족이 더 절실하다.

  다 이길 수 없다면, 누군가는 패배해야 한다면 모두 지는 것은 어떠한가. 조금씩 이윤을 포기하고 나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쌀 한 줌을 나눌 수 있는 진심과 정이 아쉽다. 우리가 (그들이 말하길)중국 중심의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운명으로서 현재 서구의 시각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일인가. 협력의 시대가 아니라 경쟁과 분열의 시대라는 저들의 분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꼭 이겨야 한다고 말해왔던가. 이기는 것만이 발전이라 누가 주장했던가. 어짜피 어느 시대건 늘 이겨왔던 패권자는 말한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국가들로부터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이렇듯 서구세계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슬로건과 함께 미국과 끈질기게도 연대하며 미래의 파트너쉽을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너무나 좋은 말이기에 이 책을 덮은 나 역시 그 말만은 잊지 않고 싶어진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중국, 일본의 속내를 아는 것은 우리로선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의미있는 결론에도 절대 상처받거나 흥분하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얼마간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보다 많은 독자들이 서구중심의 이런 결론을 같이 알고서 부디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결연함을 소원하는 바이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힘겹게 읽으면서 얻은 유일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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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말머리에 하시는 말씀, 무엇인지 알아요.
요즘 책 소개에 많이 속아넘어갔거든요. 또는 제가 잘못 안 경우도 많죠.
최근에 <괴짜 생태학>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어요.
저자의 관점과 의도가 저랑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의도 파악 중이예요.

음..... '평정심 유지', 진정 제가 원하는 일이네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승질날거 같은데요. ㅎㅎ

참, 한사람님.. 아마존 링크에 줄그은 부분부터해서, 아래 모든 페이퍼에 밑줄 긋기가 되어있어요.
수정하셔야 할거 같아요. 아니면 서재지기에게 문의하시던가요.

가연 2011-07-1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저도 원제를 보고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요.. 저는 처음에 저 말은 봤지만 저게 원제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에휴

윈터 2011-07-2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제, 표지 이미지에 대한 코멘트에 공감합니다. 이 책 읽고, 오랜만에 황당한 독서를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