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워드 Onward -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의 혁신과 도전
하워드 슐츠 & 조앤 고든 지음, 안진환.장세현 옮김 / 8.0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가치 ‘달성’자   보다  가치 ‘수호’자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어제도 마셨고 내일도 마실 것이다. 어쩌다가 내가 커피와 일상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건 지금 이순간도 커피와 함께 글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역시 커피를 찾을 것이라는 것이다. 서머셋 모옴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고 했다. 이를 본 하루키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고 있으면, 거기에 뭔가 관조와 같은 것이 우러난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며 부연했다. 두 명의 소설가가 커피를 매일 마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덮고 두 사람이 말하는 내가 ‘매일’ 하는 것의 ‘철학’을 떠올리게 된다. 어제와 같이 별 고민없이 습관적으로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시작하는 내 삶의 방식과 그것의 의미를 새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릎을 탁치며 한마디를 읊조리곤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온워드’... 전진, 앞으로...?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단정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한 이미지가 연상되지도 않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매력적인 단어, 이 책의 제목은 어쩐지 커피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모금이 목으로 넘어가며 입안에 그윽한 향이 퍼지는 느낌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에 천천히 시동을 거는 일과 같았다. 그랬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커피를 마셔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자 ‘온워드’는 한 잔의 커피처럼 천천히, 하지만 꽤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다지 행복한 시간이라는 생각은 자주 하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자 신문에선 ‘커피 값이 오르고 있다’는 통계와 함께 미국의 스타벅스에선 7월부터 커피값을 인상할 것이라는 기사(5.26, 매일경제)가 눈에 띈다. 대체로 이상기후로 인한 커피 생산량 감소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데 오늘따라 이 소식은 나를 슬프게 한다.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온 주거 이력은 얼추 카페인 축적의 이력과 같지 않은가. 문명의 발달로 파생한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바로 이 도시의 급격한 발달이 커피의 생산을 줄어들게 하는 원인이라면 이토록 엄청난 아이러니도 없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도시에 살면서 도시를 원하고 도시를 포기하지 않을수록 커피가 줄어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원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기에 커피는 점점 비싸질 것이고 시작과 달리 커피는 우리 생을 옥죄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도시와 커피를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혹 커피는 도시 삶에 대한 따뜻한 보상이 아니라 도시를 선택한 자가 감당해야 할 차디찬 댓가는 아닐까. 도시에 살면서 누리는 커피 한 잔의 여유, 그로인한 행복이 아니고 도시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할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세금같은 것. 자동차를 굴리기 위해서는 점점 비싸지는 휘발유를 끌어안는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이런 저런 생각을 하자 ‘온워드’는 휘발유처럼 언젠가 다가올지 모르는 커피전쟁의 시대, ‘on war(전시상태)’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온한 일상을 의미하는 온정어린 키워드 ‘온穩 word’라 여기기에 우리의 오늘은 어두워 보였다.

  이처럼 커피의 중독성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스타벅스라는 대형 글로벌 기업의 상업적 이미지 때문에 처음부터 이 책이 긍정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저 여느 대기업의 성공전략이나 CEO의 성공법칙을 말하는 서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처음 접한 ‘온워드’도 보이지 않는 특수 전략의 암호 정도로 느껴졌달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만이 가지는 독특한 브랜드의 매력처럼 ‘온워드’라는 단어의 창의적인 느낌만은 의문을 가질 만했다. 대단한 비밀같지는 않지만 무언가 의미있는 개념이라 주장하는 듯해 결국 스타벅스의 전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온워드’의 컨셉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책을 덮고 난 지금의 ‘온워드’는 다행히도 내가 가진 여러 편견을 전복시킬만한 내재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은 성공이나 신화, 인물이나 법칙을 말하는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스타벅스 신화의 주인공이 맞았지만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세간에 유행하는 특별한 전략들과는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자기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을 무던히도 설파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이 지난 남다른 가치이자 유일한 의미였다. 다만 평생 품어온 가치가 커피라는 꿈에 담긴 사람일 뿐이었다. 만약 그가 커피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면 마찬가지로 평생 그 일을 같은 방식으로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커피를 말하는 책이 아니고 커피를 통해 발견한 자기 생의 가치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사수한 노력, 그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을 말하는 책이었다. ‘가치 달성이라는 목표’를 자신있게 말하기보다 ‘가치 수호에의 과정’을 담담히 전하는 그의 모습이 나는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일등의 목표를 가지고 일등을 이루는 것 보다 일등을 소원하던 처음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알게 된 까닭이다. 일등을 하고 난 후에도 변하지 않는 일등가치, 그것이야말로 일등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일등에서 내려온 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스타벅스가 커피 업계의 일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일등이 되려고 몸부림 친 것이 아니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무엇보다 최고로 여기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그 최고의 가치가 실현되는 현장의 진행형 이야기, 그것은 일등이라는 성과를 낸 후 작성하는 결과 보고서와는 다른 문제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감동받은 한 가지 분명한 가치는 바로 하워드 슐츠라는 가치수호자의 수호정신이었던 것 같다.

’개방’형 폐쇄공간   또는  ’소음’적 묵음공간

 
이 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의 성장가도를 달리던 스타벅스가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시기에 전격 CEO 복귀 결정을 한 후 어떻게 스타벅스를 다시 1인자의 위치로 올려놓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보는 하워드 슐츠의 자전 기록집이다. 글로벌 기업의 창업자나 CEO가 말하는 기업이념과 경영철학, 특화전략들은 사실 CEO가 아닌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괴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기업가로서 너무 인간적인 개인 경험만을 강조하거나 보편적인 인류애에 호소한다고 느껴질 경우 저자가 주장하는 가치는 자칫 비현실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 전문성과 대중성의 사이를 자신들이 전파하는 제품, 바로 커피 한 잔의 가치로 공감을 유도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리드하는 전략이 미덕이 되는 에세이의 특성도 묻어났다. 딱딱하고 어렵고 생소한 용어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최신의 신조어들도 커피라는 향기를 얹어내면 이상하게도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되는 친화력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경영자의 지나친 겸손도 과장된 칭찬도 부담스런 강요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가진 전부의 기술로 최선을 다해 내린 한 잔의 커피처럼 정직해 보이는 문체와 식기전에 신속히 전달하려는 결단력의 문장들은 번역체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안정감과 신뢰를 제공하고 있었다. 분량상 2년 여 기간 동안의 일을 밀도높게 정리하면서 슐츠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점까지 넘나드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끝내 독서의 저울을 수평으로 유지하는 절제된 균형미를 보여주었다. 꼭 담아야 할 컵에 적정 최고치를 넘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상의 맛과 온도를 오래 유지하는 기술자로 보였달까. 하워드 슐츠는 분명 커피 한잔이 차지하는 영혼의 질량과 그 무게감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책은 슐츠만이 우려 낼 수 있는 최상의 커피 한잔이 아니었을까. 

  나는 여지껏 그토록 커피를 마셔왔으면서 흙에서 시작해 컵으로 도착하는 커피 한 잔의 여정이나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사회적 책임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커피가 사람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았어도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식품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슐츠는 밀라노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바리스타와 사람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며 저마다 낭만을 간직하는 풍경을 보고 커피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어떤 강렬한 기억은 평생의 희망이 되기도 하는 법. 그가 커피를 말할 때 ‘꿀처럼 떨어지는 에스프레소’ 한 잔의 마법을 빚어 내는 바리스타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우아하게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한편의 공연을 연출하는 예술가라 말한다. 밀라노같은 공연이 상연되는 극장이 바로 스타벅스이며 감성적인 사람들이 경험하는 벅찬 인생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아도 흥분되는 꿈의 공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커피가 내 인생으로 흘러 들어온 일련의 과정을 추억해 보는 것은 이상하게도 삶의 생기를 자극하는 효과가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지난 시절 커피앞에 앉은 나는 사랑도, 우정도, 공부도, 이별도 함께였었다. 슐츠처럼 강렬한 커피 경험은 아니었지만 커피는 내 인생의 그림자라도 되는 듯 늘 묵묵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커피의 행보를 따라간 것인지도 모르지만. 누가 먼저였건 언젠가부터 우리네 인생은 커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한 번도 커피와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따라가는 나는 자주 그 사실을 확인해야했다. 나는 왜 그동안 커피와 함께 커피속에서조차 사람, 인생,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혹시 그가 말하는 커피와 내가 만나본 스타벅스는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스타벅스를 처음 경험한 시절은 대학원시기였다. 그때 학교앞에 생긴 스타벅스는 우리나라 1호점이면서 된장녀의 아지트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이제 커피도 다양화, 전문화, 고급화되는구나, 하는 놀라움과 그 밑에 잠재된 외국 자본주의, 그 침입을 통한 약간은 두렵고도 쿨cool한 이미지 정도였다. 이제까지 먹어온 커피보다는 비싸지만 지금까지 다녀본 커피전문점 보다는 쿨cool한 곳. 약속을 위해 누구를 기다리는 대기 및 전이 공간 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알차게 수행하는 개인적 여가 및 휴식 공간. 예전엔 (같은 자리의)패스트 푸드점에서 시간에 쫓겨 리포트 숙제를 하던 것이 근사한 스타벅스에서는 노트북이나 여유롭게 책을 넘기는 모습으로 바뀌면서 그 장면은 밀레니엄을 코앞에 둔 여학생이 지녀야 할 (트렌드로서)품위로 생각될 정도였다. 속으로는 각자 어떤 뜨거운 사유를 시도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스타벅스에 출입하는 친구들이 쿨cool하고 있어 보인다는 이미지는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했다.(당시 스타벅스 커피값은 학교앞 라면값의 두배였다)

  그 후로 10여 년이 지난 지금 스타벅스는 누가 뭐래도 쿨cool한 이미지를 대량복제하며 폭풍 성장했다. 소설 속에서 마저도 쿨cool한 기운은 특별한 시공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오늘의 커피’로 제공되는 브루드 커피가 한결같은 맛이길 바란다는 고객의 바램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슐츠의 경험을 만날 수 있다. 퍼뜩 작년에 출간된 김영하 소설집에 수록된 <오늘의 커피>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대한민국에서 무릇 쿨cool한 작가로 대변되는 김영하를 관통한 스타벅스는 얼마나 쿨cool했을까. 소설속의 스타벅스는 소란스럽고도 조용했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얼음’을 만져보는 것 같았달까.


“광화문 스타벅스는 소란스러웠다. 계산대 앞에는 여섯 명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여자는 빨간 털모자를 쓴 친구와,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과 달콤한 티라미수 케이크중에서 어떤 것이 맛있는지 토론하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한 여자 가수의 배꼽과 그녀가 그것으로 버는 돈, 새로운 다이어트요법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웅웅거리는 소리들은 원두분쇄기의 요란한 소음에 묻혔다. 캐논볼 애덜리의 색소폰 소리는 스피커를 나오자마자 바람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람들의 발길에 차였다.”  
                                                       - 오늘의 커피 中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2010>


 
배경이 된 광화문 스타벅스는 국내 스타벅스 매장중에서 매출 1위를 달리는 점포이다. 김영하 작가는 하루에 일 천명 이상의 고객이 드나드는 그곳에서 ‘오늘의 커피’를 주문한 남자와 ‘카페라테’를 주문한 남자가 우연히 재회하도록 만들었다. ‘오늘의 커피’의 친구는 작년에 췌장암으로 죽었고 자신은 얼마 전 직장에서 잘린 신세로 며칠째 스타벅스에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재수없게 그 죽은 친구와 술 한잔하며 시비가 붙어 코뼈를 부러뜨린 남자, ‘카페라테’를 주문한 그 놈을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친 것이다. 하지만 매장 내 사람들은 ‘오늘의 커피’가 ‘카페라테’로부터 어떤 형태의 보복성의 폭력을 당하고 다시 매장에 들어 섰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작가는 도심 한복판의 커피 전문점이 서로 적당한 거리의 무관심과 다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되는 일회성의 특성을 지닌 장소라 말하는 듯했다. 당신도 바쁘고 나도 당신만큼 피곤하니 혹시 실연이나 실직으로 며칠 그곳에 죽치는 신세가 되더라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 같은 연대감이 서로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는 곳. 내 사정을 알아줄 사람도 지켜볼 사람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는 장소, 스타벅스는 개방형의 폐쇄공간, 사회적인 독립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열려 있으면서 닫혀있고 소란스러우면서 조용한 곳이 그곳이 아닐까.

 
’핫’hot한 전략이  ’쿨’cool한 고객을

 
 그런데 슐츠는 스타벅스의 감성, 스타벅스의 경험과 문화는 바로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스타벅스만의 고유한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끈질기게도 설파하고 있었다. 고객들과의 지속적 교감, 정서적인 유대감이 없는 스타벅스는 존재이유와 가치가 없다고 반복, 주장하는 것이다. 나로선 이 책에서 가장 핫한 소식이었고 고개를 흔들고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놀라울 뉴스였다. 슐츠가 말하는, 고객 한명에게 내려주는 한 잔의 뜨거운 커피를 가슴으로 느끼며 마시고 싶을 때 나는 스타벅스를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려 스타벅스를 가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외려 정반대의 이유로 스타벅스를 찾으면 찾았지 말이다. 그동안 스타벅스를 가는 이유는 대용량 커피를 테이크 아웃할 수 있다는 효용성과 규격화된 (에스프레소)커피 맛에 대한 기호변화, 생활 동선상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패턴 및 습관 등이라 믿어왔다. 다시 말해 내 주변에 스타벅스 커피가 특별히 맛있어서 혹은 스타벅스의 바리스타가 특별히 친절해서 굳이 스타벅스를 찾아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대체적으로 스타벅스가 제공하는 고유한 커피맛을 충성 구매한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라는 브랜드의 우월한 이미지를 랜덤하게 소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근엔 커피 빈, 앤제리너스, 탐 앤 탐스등 커피 맛에 큰 변별력을 느낄 수 없는 경쟁 브랜드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감에 따라 그동안 스타벅스를 택해왔던 이유들마저 점점 미약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마디로 내 인생에서 스타벅스 경험은 결코 인간적인 유대감이 아닌 비인간적인 소비행태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는 스타벅스야말로 인간적인 교류를 추구하는 곳이며 커피향 만큼 진한 사람냄새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라 확신하다니!

  실제로 고객입장에서는 커피 전문점에서 바리스타가 따라주는 한 잔의 커피에 영혼이 담겨져 있다는 느낌을 전달받기는 쉽지가 않다. 바리스타 역시 매순간 어떤 손님에게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최고의 정성으로 예외없이 대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슐츠는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일이 실현되었을 때 얼마나한 행복을 전달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자신 역시 그 행복을 체험했기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첫 번째 가치라 역설하는 듯했다. 가만 기억해보니 스타벅스에는 다른 경쟁사에 다 있는 흔한 진동벨이 없었다. 내 경우 바쁜 점심시간에는 부러 커피전문점을 피하는 편이라 스타벅스에서 줄을 서 본 기억도 없었고 그래서 진동벨의 유무가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진동벨이 없기에 고객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고 바리스타는 커피를 만들어 바로 주문자를 찾게 된다. 바로 슐츠가 강조하는 한명의 고객과 눈을 맞추며 유대감을 나누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의 경험을)다시 생각해 보아도 진동벨을 받았을 때 커피가 나오면 진동벨과 커피를 맞교환 하고는 특별한 이유없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바리스타 입장에서 보자면 고객과의 짧은 눈빛 교환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무릎을 탁 치게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슐츠가 말하는 커피 한잔에 담긴 영혼을 판매한다는 것은 이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감사와 보람을 말하는 것일까?  진동벨의 장점을 포기하고 영혼의 목소리를 택한 슐츠가 처음으로 커피와 고객, 바리스타 모두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슐츠가 고객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우선가치로 두고 파트너 역시 같은 가치를 자신처럼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 믿어주는 태도는 확신을 너머 거의 신앙에 가까워 보였다. CEO로서 파트너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는 직원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질 터이다. 직장생활 할 때 회사가 상사가 나를 믿어준다면 스스로 부여하는 책임감은 최상의 상태가 된다. 바로 자기 가치관에 대한 확신에서 파트너에 대한 신뢰, 공동체로서 가치관의 고수로 이어지는 슐츠의 가치추진력은 흔히들 일컫는 리더의 차별화된 능력으로 생각된다. 결국 정서적 유대감에 대한 상호신뢰가 직원들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자부심이 스타벅스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고 지속적으로 강화해 온 것이었다. 브랜드 이미지가 타사보다 우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 그들이 그토록 핫hot했기 때문에 우리는 쿨cool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 쿨cool했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적, 개인적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스타벅스라는 무의미한 공간을 재소비할 이유는 없었을 터이다. 또 그들이 말하는 정서적 유대는 바리스타와 한 명의 고객간의 밀착이지 매장 내 고객 간의 교류를 유도하는 건 아니었다. 커피 한잔을 마시는 한 명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개방된 공간에서도 보호막으로서 독립적인 경험이 가능했던 것이고 그 한 명의 고객은 자신처럼 다른 고객을 존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스타벅스에 대한 편견을 한 번도 바꾸어 본적이 없는 내가 미안해지도록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한 적이 없어 보였다. 위기상황일수록 언제나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았고 사람을 신뢰하는 모습은 이 책을 이루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살면서 꿈을 잃어버려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만은 잃어버리지 않음으로써 다시 꿈을 찾고 이룰 수 있었던 그의 가치 경영방식은 결국 최고의 커피 회사에서 최고의 커피를 제공한다는 공동의 사명감을 창출했다. 최고 경영자가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이토록 최고로 중요한 것이었다.

커피 ‘권위자’  그리고  커피 ‘메신져’

 
스타벅스가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이 경제불황을 겪으며 세계적 위기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던 시기와 정확히도 겹쳐졌다. 그렇다면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세계 5대 CEO 중 한사람으로서 그가 혼란을 기회로 재창조하는 과정은 전 세계의 기업인과 고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줄곧 그 해답은 사람이라 말하는 그의 답안지에 사인처럼 적혀있는 ‘온워드’가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만 힘을 발휘하는 어떤 암호만 같다. 이 마법의 키워드야 말로 세상 뭐라해도 꿈쩍않던 슐츠의 고집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런 슐츠는 ‘온워드’로 환기되는 자신의 고집을 내심 자랑스러워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에서 유독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접할 땐 슬몃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스타벅스의 사회활동은 뉴올리언스 리더쉽 컨퍼런스 였는데 슐츠는 ‘커피를 미국에 들여온 최초의 항구 뉴올리언스’ 지역에서 발생한 카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해 총 5만 시간의 봉사를 한 경험을 회상하며 자신들의 결정과 행동에 상징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 도시복구를 위한 자원봉사활동은 뉴올리언스 지역의 공동체의 힘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바로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미국이 스스로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뉴올리언스와 스타벅스의 회복을 동일시하고 스타벅스와 미국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슐츠의 결연한 의지는 당시 많은 미국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커피 생산자로서 르완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성 농부와의 공식적 일화도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젖소를 사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의 소원은 젖소 살 돈을 기부하겠다는 파트너의 선행을 불러오고 끝내 전 세계 빈민에게 가축을 지원하는 단체와 협력해 젖소기금을 마련하는 온정의 프로그램을 시행하게 된다. 스타벅스의 바리스타가 자신의 고객에게 신장을 제공한 미담은 슐츠조차도 믿기 어려운 기적에 가까웠다. 이렇듯 슐츠가 유난히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의 거친 손에 감동받고 그들의 고달픈 노동을 소중히 여기는 심성은 단순히 그가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슐츠는 가장 영광스런 순간에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 모든 것은 아버지 덕이라는 고백을 한다. 참전 용사로서 가족부양을 위해 거친 육체노동을 마다않은 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한 번의 부상으로 해고를 당하고 이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난한 소규모 생산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은 어쩐지 커피라는 가장 도시적인 식품을 파는 기업의 총수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커피가 탄생되는 가장 원초적 과정의 숭고함으로 커피가 주는 마지막 행복한 시간을 창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 잔의 커피를 이루는 노동에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성실성이 담겨있었고 아버지의 고생에 공감하는 가족의 연민이 아버지의 고통을 위로하는 아들의 눈물이 배어 있었을 터이다. 슐츠는 힘없이 스러져 간 아버지가 한 평생 믿었던 노동에의 가치가 부질없고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실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슐츠가 커피 판매의 ‘권위자’가 아니라 커피가치의 ‘메신져’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비로소 그의 전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CEO복귀 후 새롭게 시도한 전략들 중 인상깊었던 것은 ‘비틀즈 브레인 스토밍 회의’와 ‘인스턴트 커피 개발’, ‘선거 켐페인을 활용한 마케팅’등이었다. 이들 모두 아이디어에서부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참신하고도 좋았는데 고민의 출발은 한 가지였다는 생각이다. 바로 스타벅스라는 커피 대표 회사, 스타벅스라는 최고의 커피 브랜드가 이끄는 커피 문화, 커피 철학이었다. 슐츠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커피 한잔의 철학을 통해 리딩기업으로서 지역사회 커피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에 프런티어가 되고자 했다. 한 시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비틀즈를 예로 들며 스타벅스가 단순한 커피 브랜드를 너머 시대를 리드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비틀즈와 스타벅스의 공통점이 사람들의 삶에서 기억의 표지 역할을 해주는 아이콘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시대의 커피의 권위자가 그 시대의 문화의 권위자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진 것은 별스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슐츠가 발견한 진리는 비틀즈가 대규모 공연을 가지면서부터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인데 그는 이 시점이 꼭 스타벅스의 영혼이 부식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매장 수, 매출 규모등 고속 성장에만 집중한 전략은 스타벅스를 조용히 무너뜨리는 발암물질이었던 것이다. 1위 브랜드가 1위를 지키지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자신의 목소리를 변함없이 유지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성을 고객에게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비틀즈로부터 자기 영혼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한 스타벅스를 보면서 내가 가진 목소리, 나만이 가진 장점들을 조용히 돌아보게 되었다. 내 장점중에서도 남들이 아닌 내가 마음에 들어 자랑하고 싶고 잃고 싶지 않았던 능력이 있었음을 새롭게 상기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목소리가 훌륭해도 (남들이 좋다는 목소리를)자기 스스로 들을 수 없다면 다음의 발전도 없는 게 아닌가. 반면에 슐츠는 자신의 열정과 능력은 오로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 발휘되는 것이 단점이라며 수월하게 해 낼 수 없거나 원래 흥미가 없던 비즈니스 영역은 충분히 파고 들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뼈아픈 자기진단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슐츠뿐만 아니라 한 가지라도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과하는 열정의 사각지대에 다름아니었다. 이 책은 대부분 기업의 전략을 설명하는 책임에도 이렇듯 개인의 역량을 냉철하게 점검하게 하는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분말커피 비아가 상륙하지 않았지만 아시아인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커피 믹스를 즐긴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스타벅스에서 개발한 수용성 분말커피의 탄생과정도 놀랍고 반가웠다. 자가면역 질환 진단을 전공한 세포 생물학자 돈 발렌시아가 혈액검사의 생물학적 지식을 적용해 시도된 커피추출기술이 스타벅스 인스턴트 커피 개발의 시초였다는 것도 흥미로왔고, 성공적인 개발 후 마케팅을 앞두고 발명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안타까웠다. 한 생물학자의 우연한 실험처럼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 녹아든 커피를 편리하게 마시면서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가 길이나 거리를, 경유하고, 관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존재라면 ’Via비아’라는 이름의 네이밍은 가히 철학적인 듯하다. 슐츠는 이렇듯 새로운 기술에 대한 잠재력을 특유의 직관으로 투시하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마케팅은 언제나 리스크를 부담하게 되는데 선거캠페인 같이 민감한 행사도 기업의 윤리성, 공정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눈치보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이 나는 좋았다. 나만해도 선거가 있는 날 투표를 마치고 삼삼오오 커피전문점에 들러 즉흥적인 모임을 가진 적이 꽤 있었다. 지역사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개인적 유대감 형성에 기여하겠다는 슐츠의 기본 원칙이 더 부각되어 보였던 건 위험을 기꺼이 수긍할 수 있는 일관성과 그동안의 고객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과였다. 

’마지막’ 인사가  ’시작’의 인사로

 
이 책에는 슐츠의 지인을 비롯해 수많은 스타벅스 파트너, 전략가, 고객들이 등장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인재를 적재에 등용하고 장인을 존경하듯 한 분야에서의 전문가를 깍듯이 대접했다. 슐츠는 감사의 인사에서부터 그들의 업무수행까지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성의를 표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 책이 한편의 영화라 했을 때 그들의 이름은 마지막 엔딩에 올라가는 크레딧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이 책이 자신을 포함한 스타벅스 파트너들에게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라는 느낌이 든 것은 그가 26년간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의심없이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그는 편지를 누구보다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인식했기에 내부 ‘이메일 유출사건’에서도 유독 상처를 많이 받은 것 아닐까. 이 책에는 스타벅스의 위기신호탄이 된 이메일에서부터 슐츠가 보내고 받은 여러 편지가 등장한다. 최고 경영자의 한번이 아닌 지속적인 인사는 곧 그 기업의 이념이자 사명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편지 끝머리 인사인 ‘Regards(존경심으로)’나, ‘Sincerely(진실함을 다해)’를 택하지 않고 이미 존경과 진실을 담아 ’Onward(전진, 앞으로)‘라는 구령을 붙인 것은 언제나 바로 지금부터 우리만의 여정을 시작하자는 크랭크 인의 암호는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온워드‘는 헤어질 때 주고받는 인사이면서 동시에 시작할 때 나누는 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처음부터 갸우뚱했던  ’온워드‘의 메시지를 이제서야 가슴에 새겨본다. ’온워드‘는 언제나 그들에게 현재진행형의 메시지였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에 (40년 만에 최고 매출을 달성 한 후에도) 이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믿는다는 확신이 아니라 ‘성장을 이루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이 기쁘다는 설레임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했다. 무엇보다 끝까지 결과가 아닌 과정에 더 집중하는 자세는 한결같았던 것이다. 지금도 성장하고 있음이 기쁘고 벅찬 것이지 성장했다는 수치가 자랑스럽다는 것이 아니었다. 성장으로 인한 보상이 아니라 생존에서 성장으로 목표전환을 이루어낸 그 자체가, 그리하여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미래의 가시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했기에 결국 계속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에 방한한 그는 한국의 커피전문점인 ’카페베네’가 스타벅스를 앞지른 것에 대한 질문에 바로 매장수나 매출규모가 1등 기업을 말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대답한 바 있다.  스타벅스는 고객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답변이었다.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이란  혹시 원두가 로스팅되면서 공장에 서서히 퍼져가는 커피향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순간, 바로 스타벅스의 뜨거운 심장을 확인하는 순간의 환희가 아닐까. 그가 말했듯이 커피로 꿈을 꾸었던 자신의 과거와 그 꿈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스타벅스의 오늘,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파할 미래를 확인시켜주는 순간이 아닐까. ‘온워드’는 그 극적이고도 벅찬 순간에 서로의 가슴뛰는 심장을 확인하며 모두의 내일을 기다리는 가장 현재진행형인 오늘의 단어가 아닐까. 나 역시 한 번의 과거 실패로 성장이 뚝 멈춰진 오늘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나이들수록 실패의 경험은 후유증이 길고 또 다른 시작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통감한다.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이 잔인한 현실앞에서 더욱 더 진한 커피만을 벗삼아 내일의 두려움을 피하려던 내 자신을 분명하게 깨우치게 된다. 또 실패할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고 다시 시작하는 것, 다시 뛰어드는 그 순간이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온워드’가 사람이라는 행복을 커피라는 문화로 이루고자 하는 하워드 슐츠의 자기선언이었다면 나 역시 꼭 내게 어울리는 온전한 키워드, 나만의 ‘온워드’로 새로운 인생선언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거린다. 

  문득 ‘손이 진흙으로 더러워지더라도 결국은 깨끗한 순백의 결말을 맞는 것’이 ‘온워드’의 정신이라는 그의 한마디가 자꾸 떠오른다. 이것은 어쩐지 흙에서 시작해 한잔의 행복으로 귀결되는 커피의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커피는 진하디 진한 제 색에서 출발해 사람들의 하얀 영혼에 이르러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왕에 습관적으로 커피를 즐겨온 거 이제는 커피같은 인생을 출발하고 싶다. 최근에 바닷속 은어의 소리를 듣는 눈먼 어부의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수류탄으로 눈을 잃은 어부는 생존이 절박해지자 신비한 청력이 생겼지만 그 능력이 세상에 알려지고 외부의 지원금이 몰려들자 은어의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조금 앞길이 보이는 성 싶으면 초심보단 변심이 더 수월한 법이다. 까짓것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내가 가진 가치관이라고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어쩌면 미련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슐츠는 말한다. 가장 위기의 순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도 오랫동안 믿었던 신념만큼 더 확실한 해답은 없다고. 그 신념이 옳다고 믿으며 그 신념 때문에 보람을 느낀 적이 있었다면 더 큰 도전이 필요한 그 순간에도 절대 그 핵심가치를 잊지 말라고. 당신이 믿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믿음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나는 한번의 크나큰 실패 이후 그 결과로 내 꿈이 사라진 것에만 슬퍼하였지 꿈을 좇던 나만의 핵심가치를 놓아 버린 것은 아쉬워 하지 않았다. 내가 꿈을 가졌던 이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가치, 그 가치가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만이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처음 내 꿈을 꾸었던 순간으로 가만히 돌아가본다. 다시 꿈꾸어야 하는 건 지금 꿈을 꿀 수 있어서가 아니다. 앞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 꿈을 꾸던 내가 그 꿈으로 행복해질 것을 의심없이 믿었던 나를 찾기 위해서다. 다시는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꿈, 그 꿈을 다시 꾸고 나를 움직이게 할 인생선언서를 처음으로 작성해본다. 그리고 그 마지막 줄에 조용히 끓어 오르는 커피향처럼 내 심장을 뛰게 할, 지금부터 계속하여 변함없을 뜨거운 단어 하나를 적어본다. 이 사인이 내 인생을 약속하는 사인이면서 마지막까지 변치 않을 사인이길 바래본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사인이 되어도 후회없지 않을까.


Onword!, 
영원한 믿음, 변함없는 전진, 
존경과 진심을 다해 당신도 나와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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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지폐
정문후 지음 / 세니오(GENIO)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돈으로 안 되는 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나는 돈이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돈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이 누구에게도 창피하지 않았다. 책을 덮고는 내가 현재 돈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자각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내게 중요했다. 돈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돈이 있었던 나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의 돈을 통과하는 일은 꼭 가질 수 없는 돈다발로 이루어진 숲을 빠져나오는 것 같았달까. 그 지독한 돈 냄새가 나를 관통한 후 떠오르는 상념들, 돈 나무들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는 공간. 폐향(弊香)에 취해 폐목림(弊木林)을 걸어 나오는 시간. 여지껏 살면서 돈을 좇아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돈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돈만큼 귀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때 남부럽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돈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땐 내가 돈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고 살진 않았다. 그저 여기서 조금만 더 벌면, 조금만 더 모이면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그 행복의 테두리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와 빛깔들로만 세속의 소원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을 터이다. 역시, 사람은 돈이 없어 봐야 돈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가 보다. 돈이 있을 땐 마음의 여유가 많을 것 같아도 이상하게도 돈이 지닌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게 질문도 답도 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돈이 보여서 돈을 좇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쉬지 않고 좇아야지만 돈이 보일 것 같은 착각에서 절대 자유롭지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보니 그제서야 지난 시절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누리고 살 땐 몰랐던 돈의 실체와 위력을 절절히 실감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돈이 있다가 거짓말처럼 없어지는 동안 내게 발생했던 일. 돈이 가진 능력과 위안의 실체가 소멸되기까지 내가 머물렀던 장소. 돈이 지탱해주던 나라는 존재가 돈이라는 지지대를 잃고서 허물어지던 시간. 그 지난 시절은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동안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이 리와인드되어 플레이되는 상영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돈의)有에서 (돈의)無로 삶이 전환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기운들이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떤 의미였는지 돈없고 보니 알아지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특별히 내가 물욕에 눈이 멀었거나 과시욕에 집착하는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살다보면 스무 평의 다세대주택 보다는 서른 세평의 아파트가 간절해지고 뒷좌석에서도 열선으로 엉덩이를 데울 수 있는 중형차를 타고 싶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다보면 정원과 테라스가 딸린 타운하우스나 그에 걸맞는 분위기의 외제차라도 얼마든지 곧 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문제는 무자각 상태로 이들 욕망이 확장하는 시간과 내 소득이 증가하는 시간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크기의 차를 견디는 일은 바로 기나긴 生의 질병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들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게 되는 지병처럼 익숙하고도 만성적인 고통으로.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비현실과 또 언젠가는 탈피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의 안타까운 간극 차, 여간해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는 속세를 사는 우리에겐 늘 공동의 상처이고 시련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커피를 손에 들고 도시 한복판의 다리를 건너면서 돈에 관심이 없다, 돈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 돈만 아는 자들이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웃기고도 우스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는 돈을 밝히는 태도가 부끄러운 행위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 뿐 스스로 돈이 싫어서 필요하지 않아서 도인같이 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돈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머쥔 사람들이 부럽고 샘난다는 자기방어적 표현에 불과하므로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못난 사람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말은 그만큼 ‘돈으로 되는 일이 많다’는 뜻의 부연이라 느껴진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의 종류를 따져볼까. 가만 보면 돈이 제 아무리 많아도 얻기 힘든 것- 예를 들면 사랑, 우정, 추억, 희망 등등 -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돈으로 구할 수 없기에 더 귀한 것이 아닐까) 억지로 돈으로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돈 때문에 얻어진 것은 다시 돈이 아니면 사라질 운명이므로 그 절대성과 진실성, 영원성에서는 가치를 비할 바가 아닐 터이다. 사람들이 그나마 비현실과 현실의 간극을 참고 이겨보려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아직은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인지 모른다. ‘돈으로 다 된다’는 주장 역시 돈으로 다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반론일 것이니까. 다만 이 믿음의 연대는 돈보다 느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다같이 믿어 주는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간혹 이 믿음의 연대에서 이탈해 비현실과 현실의 편차에서 탄생한 블랙홀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정작 남는 것은 돈이 아니고 황폐해진 육체의 잔재와 돈에 굴복한 영혼의 쓰레기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돈이라는 우주가 생성한 블랙홀에 빠져든 사람들의 거침없는 아우성을 노래한다. 고백하건대 무엇보다 작가가 마련한 돈의 향연, 거짓의 나락에 같이 추락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신난다지만 이번에 돈구경도 그에 못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돈으로 안 되는 일중 가장 힘든 일은 돈 만드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돈이 인간이라는 이 책의 화두를 떠올리면 인간이 되는 길 역시도 돈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돈으로 최고가 되는 일

소설의 시작은 다분히 자극적이었다. 돈을 똑같이 만들어 내겠다는 한 남자와 취미로 돈을 수집하는 한 여자가 훗날 자신들의 운명적 만남을 위해 돈을 좇아 달려갈 것을 나란히 예고하는 것이었기에. 특이했던 것은 이 두 사람이 후반부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공범자가 되기까지 작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였다는 것인데 작가의 시점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두 남녀가 공평하게 자기 속도로 달려가는 형식이 흥미로왔다. 이 과정은 흡사 (작가의 의도대로)추리소설의 밀도와 긴장을 유발하는 성격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두 사람을 통해 전해진 돈의 유래, 지폐의 제조공정, 위폐의 감별기준 등의 풍부한 텍스트는 이 소설의 구성을 더욱 탄탄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소설 초반부터 시종일관 제시된 돈의 가치와 의미를 질문하는 데 차용된 고시, 중국의 고사성어, 고대 그리스 시인 및 삼국지등의 문헌은 소설을 읽는 동안 피할 수 없이 한번쯤은 진지하게 돈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요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늘 생각하고 살지만 꺼내들고 말해봤자 뚜렷한 해결책은 없어보였던 돈이라는 애증의 대상에 대해 극도로 개인적인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일 테다. 돈의 사유가 나의 자유가 되는 시간, 나만 하여도 내게 있어 돈의 부재가 의미하는 존재가치를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밖으로 ‘넓다’기 보다는 안으로 ‘깊다’고 느껴진다. 황망한 돈의 바다가 아니라 심오한 돈의 수렁이었다고 할까. 인물도 많이 등장하지 않고 상황도 단순하다. 그러나 돈에 대한 깊이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정밀하다. 마치 초정밀 위조지폐를 만드는 매 단계의 복잡한 기술처럼. 인물의 묘사도 주인공이 돈에 집착하게 된 경위에 보다 집중되었고 돈에 다가가는 여정자체가 소설의 주를 이루는 핵심으로 느껴진다. 사실 우리네 인생도 우여곡절 끝에 돈이 생기는 과정은 대개 돈을 쓰는 과정보다 극적이고 그런 만큼 길고 질척할 터이다. 문득 주인공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무한한 열정과 엄청난 노력을 다른 일에 투사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작가의 스쳐 지나가는 말이 생각난다. 무릇 한 사람이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상징하는 ‘인간되기’, ‘인생살기’의 환유이자 알레고리라 할 것이다. 이처럼 결말보다는 전개과정에 완성도가 집중되었기에 이 소설은 자칫 결론없이 장렬하게 막을 내리는 허무한 전투로 보일 수도 있었다. 희망의 완전무결함이 상징하는 절망의 완성유결. 그러나 돈이 완성되어 펼쳐지는 그 절정의 순간을 소설의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바로 돈이라는 블랙홀에 빠지고 난 이후부터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라는 작가의 준엄한 경고라는 생각이다. 돈의 광활한 우주에서 내심 빅뱅같은 폭발이라도 기대했다면 그것은 바위로 계란치기 식의 상투적 유혈혁명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작가가 보여준 무혈혁명은 돈이 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이 돈이 되는 세상은 오지 말아야 한다는, 일인 문학시위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작가가 연출한 시위에 연루된 주인공은 소설적 희생양이 아니었을지.

가난한 시골출신이며 정보 처리학 전공이라는 미모의 컴퓨터 학원 강사 정은서는 소위말해 돈맛은 좀 아는 세련된 싱글족이다. 혼자서 도시생활을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돈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돈의 마력에 대한 존경심’ 이 남달라 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미혼여성이었다. 이에 반해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와 형제를 잃고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해 중학교시절부터 인쇄업에 발을 들여놓은 김준성은 돈을 존경했다기 보다는 자신에게 패배만을 안겨준 돈을 이겨 보려한 경우였다. 김준성은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예술 ‘창작’이라는 최초의 꿈을 포기하고 진품 ‘흉내’라는 대안적 꿈을 실현하려 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장 고난이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돈을 만드는 것이 곧 최고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돈만을 모으기 원하는 ‘수집광’으로서 남자는 진짜와 똑같은 가짜를 만들기 원하는 ‘기술광’으로서 각자 돈에 대한 욕망을 현실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모으고 복제하는 collect & copy 행위가 다름아닌 돈이었다는 것은 행위자체에 진정성을 의심받기 충분하다. 과연 실물화폐를 쓰지 않고 모으기만 베끼기만 가능한 것일까. 불행히도 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돈을 쓸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이 희생양으로서 안타깝게 느껴졌던 건 두 사람이 보여준 행위에의 열정과 그 행위의 목적에 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솔직히 돈 만드는 과정에 간접 참여한 참관인처럼 점점 설레고 흥분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돈을 이렇게 만드는 구나, 돈도 짝퉁으로 유통될 수 있구나 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을 엿보는 심정이었달까. 특히, 은서가 미리 빠져나간 일련번호를 아쉬워하며 번호를 조작해 맨 처음으로 집에서 위폐를 만들어보던 장면은 어쩐지 함께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은서가 취미삼아 재미삼아 위폐를 만드는 시행착오적 과정, 준성이 지폐 인쇄기술을 터득하는 단계별 노력들은 독자로 하여금 관음증적인 쾌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돈을 직접 만들 수는 없지만 그들이 대신해 만들어줌으로써 마치 내가 돈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대리만족을 주었다는 것, 그것은 만의 하나 복권이 당첨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하룻밤 상상의 시나리오를 펼쳐보는 기분과 유사했다. 어떻든 (돈좋아하는 같은 인간으로서)이들로 재미를 톡톡히 본 입장에서 그들의 희생을 목격하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위조지폐를 제작해 사회에 불법 유통시키고 그로인해 국민의 불안과 위기를 조장하는 국가단위의 범죄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은서는 고교시절 소도둑을 잡아 경찰표창까지 받은 모범생이었고 준성은 어렸을 적 돈이 안 되는 무명화가였던 아버지를 보고 돈이 되는 놈이 되기로 마음먹은 죄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들이 애초부터 범죄적 성향을 타고났거나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애써 세상에 강조하는 듯했다. 외려 지폐를 수집하거나 인쇄업에 종사했으므로 돈을 그리면 감옥에 간다거나 위폐를 만들면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되는지 누구보다 실감하는 경우였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돈을 만들고자 했을까. 아니 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했을까. 돈과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짝사랑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 이들은 삐뚤어진 짝사랑의 소유자였다. 돈을 세상과 나누어 돌려 쓰지 않고 자신만이 영원히 소유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운 것이다. 바로 제작 목적에 행사의지를 배제함으로써 위조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는 ‘형법 207조’를 들어서라도 우리에게 묻는다. 아니 설득한다. 김준성은 행사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의 화폐를 위조 또는 변조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맑고 깨끗한 눈빛’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약물과 노동에 시달린 거친 손’으로 그저 인쇄공으로서 최고의 기술을 증명하려 했을 뿐이라고. 증거 수집을 위해 경찰이 위탁한 은서가 중간에서 진폐를 가로채 자신의 위폐와 바꿔치기한 범죄 역시 열정적인 그녀의 수집욕 때문이었다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위폐조작행위는 자아성취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모험에 불과했다고.


돈으로 인간이 되는 일

은서와 준성이 작가의 무혈혁명에 표면적인 희생양이었다면 소설 속에서 외롭게 무혈혁명을 마무리한 희생양이 또 한사람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며 고시를 읊조리고 산수화를 그리던 인쇄기술의 전설. 등사원판을 만드는 필경사 출신이면서 직업병으로 납중독을 얻게 된 이 시대 돈의 스승.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제지공장에서 친구에 속아 거액의 달러 지폐용지를 만든 전과자이기도 했다. 작가는 크게 참아야 했기에 스스로 대인(大忍)이 되어버린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피없는 혁명을 연출해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대인과 준성이 나누는 공자왈 맹자왈 식의 대화가 아니었을까. 인물중 가장 비현실적이고 영화처럼 느껴졌던 대인은 돈을 만들겠다는 준성에게 연신 돈처럼 버라이어티한 충고를 이어간다. 참다운 마음으로 공경하고 어리석음을 굴복시키는 ‘예배자’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제 5의 원소처럼 ‘돈이 인간’이라는 싯구절, 최초로 통용된 쿠빌라이의 지폐, 바람이 불면 불경을 읊는다는 대나무같은 존재 죽존자,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종잣돈을 대준 위홍등 때로는 직구로 때로는 선문답같이 돈의 인문학을 강연하는 존재였다. 대인을 통해 작가는 부에 의해 통제된 기회의 편재와 빈자에 대한 인권유린이 우리 사회 심각한 문제라는 메시지를 설파하였다. 마침내 대인은 가난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기회를 나누어주는 무상 종잣돈 제작 및 유통자가 되어 이 작품의 진정한 영웅으로 탄생한 것이다. 준성처럼 화가가 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꿈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꿈을 공모하여 그들에게 ‘기회의 분배’라는 잡지를 매개체로 종잣돈을 나누어주다 !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점은 이 꿈같은 이야기가 실현되는 생생한 현장에는 대인이 언급한 돈철학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5장 제목이기도 하며 그리스 격언으로 알려진 '돈이 인간이다(Chremata aner)'는 말은 알려졌듯이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알카이오스의 시 ‘돈’의 한 구절, ‘돈이 인간이네(chrēmat' anēr). 가난한 사람치고 고귀하거나 영예로운 이는 없네’에서 인용된 명언이다. 그 시절 제 5 원소의 하나로서 돈이 인간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지만 어느 시대이고 늘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고상할 수 없다는 그만큼 돈이 없으면 인격도 높아지기 힘들다는 자조적이고 뼈아픈 풍자의 한구절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 구절이 자꾸 중첩되어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대인이 지폐가 유래된 배경을 준성에게 가르쳐주는 장면때문 일 것이다. 대인은 준성에게 서양에서 근대적 의미의 지폐가 출현하게 된 계기는 중세 페스트로 죽은 시체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준다. 그전까진 고가의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기에 책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페스트로 대량의 인구가 죽은 덕에 시체에서 벗겨낸 옷가지인 면섬유를 지폐의 종이로 대중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죽음에서 피어난 꽃’이 지폐라는 교훈이므로 ‘돈이 인간이다’라는 알카이오스의 시는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준성은 돈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기에 죽어서 비로소 돈이 된 준성은 원래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이는 충분히 ‘돈이 인간이다’는 소설논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논리적 서사인 것이다.

나는 ‘돈이 인간이다’는 작가의 소설논리를 보고 퍼뜩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전에는 이 말을 어떤 경우든 사람이 돈보다 먼저라는 뜻으로만 생각했는데 돈이 너무 좋아서 사람보다 돈을 믿어서 끝내 돈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니 옛날엔 ‘사람 나고 돈 났’지만 지금은 ‘사람 죽고 돈 났’다 이거나 ‘돈 나고 사람 죽’는다고 해야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속담이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이 죽어서 돈이 탄생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는 분명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이라는 속깊은 이치가 아닐까. 이렇듯 돈과 인간, 인간과 돈 사이의 인과관계를 그리스 격언과 대인이라는 스승 캐릭터, 주인공의 반전 서사로 잘 결합해 제조한 작가의 재치는 작년에 출간된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춤>을 연상시킨다. <허수아비춤>은 신랄한 이야기로 이야기 바깥을 지시하면서 소설을 통해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대표적인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오랜 시간 우리 문단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성시키는 조정래 작가는 우리 사는 시대를 문학으로 통찰하며 오늘과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역할을 평생토록 자처한 작가이다. 우리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역사에 당당한 국민이길 충고하는 멘토형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대작가의 작품과 이 작품을 단순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책에서 <허수아비춤>과 같은 사회소설이 가지는 문학위치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대인을 통해 언급된 ‘기회의 분배’는 <허수아비춤>에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를 연상케 한다. 돈에 굴복한 대기업 임원들이 우리네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위조지폐로 꿈을 실현하겠다는 발상 역시 돈에 굴복하여 돈의 노예가 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에서는 애초부터 돈을 만들겠다는 준성을 비롯해 경찰로는 큰 출세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김형사와 능사로 불리운 교도관, 오로지 수집만이 삶의 행복이라는 은서까지 최후엔 모두 불법을 감당하고서라도 돈에 굴복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돈에 대한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인마저도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 전까진 준성의 설득에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청렴결백한 고위공직자라도 뇌물에 약해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지 않아도 눈앞에 굴러들어온 돈에 무심할 인간은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대인이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아내 백상만이 돈에 초월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외려 백상이 제일 비현실적인 캐릭터였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트럭에 꽃을 싣고 다니며 어디서든지 화사한 꽃밭을 연출했다는 백상만이 세월가도 돈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백상이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신앙의 대상이기에 작가나 대인, 우리 모두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는 백상같은 사람을 마음의 멘토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국민도 경찰도, 스승도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는 돈도 사라져도 끝내 신적인 존재였던 백상이 가진 순수만은 잊지 말고 모두의 가슴에 새기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돈이 있건 없건 황폐한 도시에 꽃같은 기운을 잃지 않는 사람, 돈을 벌 건 못 벌 건 그 꽃으로 거리를 향기롭게 하겠다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범한 온갖 백상(白狀)일랑은 잊어 버리고 새로운 힘과 생명의 원천으로서 코끼리 같은 넉넉한 백상(白象)을 섬기기라도 하라고.


돈없이 진실이 되는 일

돈이 좀 있다 싶을 때 나는 돈으로 돈을 빌려 제법 큰 규모의 자영업에 도전했다. 좋은 차에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확실히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유소 알바생들도 90도로 배꼽인사를 한다. 우연하게 돈으로 무언가를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경우라면 그 집행자는 더욱 과대평가되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내가 돈이 있을 때 내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들 나와 코드가 맞거나 내 성격을 좋아해서 헌신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돈 때문에 발생한 후광효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돈이 빠져나가면 물거품처럼 사람도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사업이 망하고 나면 금전적인 상실도 충격이지만 그로인해 사람사이에서 발생한 이해관계로 받은 상처가 더욱 사람을 망가뜨린다. 돈을 잃으면 돈과 관계된 사람,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잃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직도 돈이 없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두렵다. 이렇게 돈과 사람을 함께 잃은 내가 이제와 가장 많이 땅을 치는 것은 정작 돈 없어도 소중한 것들, 돈 있을땐 우습게 보이던 것들인데 이 책의 영웅은 이런 내게 보란 듯이 질문한다.

술을 마신들, 바람을 피운들, 도박한들, 외국여행을 한들, 그 어떤 취미생활을 한다 해도 그런 속 깊은 즐거움, 그런 가슴이 벅차오는 행복이 어디에 있겠나. 187p


제지공장 사장까지 지냈다는 대인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준성에게 아이들, 가족들과 나눈 소소한 일상, 진정한 행복에 대해 말한다. 대인은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이 행복을 알고 있기에 그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에드가 앨런 포우의 시, ‘엘도라도를 찾아서’ 홀연 사라진다. 싯구절처럼 말타고 계곡을 달리는 영혼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고 만 것이다. 엘도라도는 어디에 있는 걸까. 대인은 과연 보물이 가득한 황금의 땅, 돈의 이상향이라 불리는 엘도라도에 도착한 것일까. 엘도라도는 원래 스페인어로 ‘황금을 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콜롬비아의 인디언 마을에는 1년에 한번 씩 추장의 몸에 금을 바르고 뗏목에 보물을 싣고 가 그것을 물속에 던진 후 그 물로 금가루를 씻어내는 풍습이 있었다. 16세기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이 추장을 ‘엘도라도’라 칭했던 것이다. 금을 몸에 바르고 씻어 내린 추장이 엘도라도였다면 어쩐지 스스로 불꽃이 되어 돈을 내던진 대인의 결연함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황금인간이 와전되어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가 되었다니 인간을 돈으로 인식한 것이 대략 돈이 인간이라는 고대의 시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소설에서마저 엘도라도로 다다르는 방법은 자신이 돈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 참 뼈아픈 오늘이다. 엘도라도는 궁극에 우리가 도착하고 이르러야 할 곳이 아니라 영원히 가지 못할 이상향으로 남겨두어야 할 곳은 아닐까.

이 소설은 돈처럼 분명하고 돈처럼 아스라하다. 이토록 현실을 극명하게 자각토록 한 이 소설이 어쩐지 오래 기억될 듯하다. 문득 돈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돈을 만들겠다고 하는지 처음부터 독자를 질타하던 소설 속 스승이 그립다. 결국 위조지폐를 계획하고 제작하여 실행하는 모든 과정은 위조된 이야기, 이야기를 위조하는 소설의 창작과정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교한 위조지폐를 ‘슈퍼 노트’라고 하는 것도 어쩐지 정교한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은행자동화 기기를 통과하는 초정밀 위조지폐처럼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벽같은 독자의 가슴을 관통하는 섬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위대한 엘도라도일 것인가. 위조지폐의 대량유통은 폭탄 테러보다 무서운 경제 테러라지만 위조이야기의 적법유통은 감동과 교훈의 테러가 아닐까. 오늘 이 작가의 이야기 제조과정과 결과를 마주하고 모방심리가 생겨나는 것은 나로선 꽤 흥분되는 일이다.(위조지폐 모방심리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내겐 은서와 준성처럼 소설이라는 위조현장에서 이야기와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역사적 순간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0과 1이 반복되는 슈퍼 레이더 시리얼 넘버처럼 소중하고도 유일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주어진 이야기만 읽다가 내 자신이 이야기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이 어쩐지 주어진 돈만 쓰다가 스스로 돈을 만듦으로써 욕망의 공급자가 되려는 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처지인 것만 같다. 그들이 (불법으로)돈을 만드는 일이 결국 (합법으로)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로 전이될 수 있다면 이것은 소설의 시공간에 편입한 독자참여가 아닌 생생한 삶의 참여인 듯 하다.

돈을 따라 만드는 일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부질없는 일이라면 이야기를 좇아 만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 돈이 인간이고 인간이 이야기이므로 이야기가 돈이 된다면 더욱 좋겠지. 허나 언젠가는 나도 돈되는 인간이 아니라 누구보다 인간된 이야기를 제조해 내고 싶다. 돈되는 이야기가 아닌 돈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돈 없이도 너무나 행복해 그 소중함으로 평생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했으면 좋겠다. 돈없어도 좋을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현재 돈 없는 나를 조금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싶다. 중요한건 오늘 돈이 없어 알게 된 세상의 법칙과 돈이 없기에 발견한 내 본질인 것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돈과 인간의 함수관계, 돈으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의 진실일 것이다. 언제나 내 이야기는 내 돈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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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0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은 정말 말씀 그대로 분명하면서도 아스라하죠.
우리는 항상 돈에 대해 이중적 감정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듯 해요.
돈이 고민의 80%를 해결해준다죠, 그런데 그게 미국 달러 기준 연봉 15000불 정도까지라네요.
그 이상이 넘어가면, 돈의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아진대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보니, 돈을 가지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나봐요.
중간에 언급하셨듯이 소설에서 돈을 위조하는 과정은, 마치 돈을 쫒아가는 우리네 인생 같기도 하고
그 자체가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면,, ㅠㅠ

그러게요, 항상 나의 이야기는 돈보다 소중한거죠.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한사람 2011-06-01 10:30   좋아요 0 | URL

예..이 책읽고 돈생각을 좀 오래해보았는데요..
돈있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닌데,
돈없으면 불행한건 맞더라구요
문제는 돈의 양이 아니고
만족도의 기준인것이죠..

살면서 저도 모르게 그 기준이 날로 높아진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슬픔이구요...ㅠ.ㅠ

이 글이 썩 제 맘에 들지 않는데 좋은 글이라 해주셔서 고마워요 ~
 
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나잇살의 이름값

 


박완서(1931-2011), 이청준(1939-2008), 최일남(1932), 윤후명(1946), 이승우(1959), 권지예(1960), 이나미(1961), 조경란(1969), 김연수(1970), 이명랑(1973). 이상, 감히 이 책을 이루는 주인공들을 열거해 봅니다.  

이름을 부르고 나면 내게 다가와 꽃이라도 되어야 할진대 이들을 호명하고 나니 저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수록된 작품들도 한결같이 그 먹먹한 이름값을 한답니다. 이 책은 2007년에서 2010년 사이 <문학의 문학>이라는 문예지에 실린 중견작가의 단편 10편으로 엮어진 소설집입니다. 작가들의 나이를 보니 이명랑 작가를 제외하면 모두 불혹을 지나셨습니다.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 이청준 작가와 같은 세대인 최일남 작가는 꼭 제 아버지와 출생연도가 같습니다. 저와 갑장인 김연수 작가를 기점으로 얼추 가까운 사촌 동생과 바로 위 언니에서부터 막내이모, 큰 삼촌, 고모부까지 꼭 집안 경조사라고 한자리에 모이신 어르신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된 말로 애들은 가라, 식의 어른들 모임인 것이지요. 이 책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결론은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어느 프로그램처럼 ‘나는 작가다’ 의 진짜(?) 라이브 소설 경연장이라도 구경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달까요. 문학의 연륜이라는 것, 세월의 내공이라는 것, 살면서 쓰면서 그들이 축적해온 것들이 담담하면서도 엄숙하게 녹아들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더군요.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라는 것이죠. 고개를 숙이니 새삼 이참에 처연하게 떨어진 꽃잎들이 서러운 계절을 확인합니다. 이번 봄엔 간다는 것, 가버렸다는 것에 슬퍼하지 말자 다짐을 했더랬죠. 삼년 째 불혹 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병도 오래되니 진화하는가 봅니다. 처음엔 나이드는 것이 꼭 계절에 지는 것만 같았는데 이젠, 슬슬 중년이라는 말도 익숙하고 내가 입어도 될 옷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책과 저와의 인연을 중년이라는 공감으로 정리하자면 이 책은 ‘중년이 그리워지는 소설’, ‘중년을 위로하는 소설’,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제가 소개를 할 순서는 이 책의 목차와는 다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박완서 작가와 이청준 작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그 다음부터는 나이순입니다. 이깟 순서가 뭐 대수라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겠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윗물 아랫물에도 예의를 차리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뭐 중요 하냐,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나이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점점 나이드신 분들에게 깍듯이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 더 오래 더 많이 써온 것이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보기에 한참 어린 저겠지만 나이들지 않고서는 배어 나올 수 없는 향기, 아니 나이 들어서라야만 나오는 체액, 그 나잇살의 아름다운 완성을 보란듯이 증명하셨기 때문에요.


1.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2008) / 박완서(1931-2011)

저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읽을 때마다 청승을 떨었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작가의 글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이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단편이라는 안타까움도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짜릿한 중산층 며느리의 속물적 심경은 이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애틋함이야 당연한 것이겠죠. 이야기는 영원해도 그렇게 한 세대는 가는 것일 테니까요. 허나, 이제 그 다음 세대인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차례구나, 내 할머니고 어머니가 아닌 내 이야기일 수 있구나 하는 현실감이 너무나 분명하게 잔인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꼭 먼저 간 남편은 아직도 젊은이인데 남겨진 아내만 할망구가 되어버린 얄궂은 운명만 같아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다가 저 역시도 사라지는 세대가 될 터이니까요.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나는 사람과 세상에 복수하려고 글을 쓰게 되었다’ 고 한 바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 야속하기만 한 세상에게 보아라, 당신네들이 실은 이렇게 생겨먹지 않았소,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하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상처를 글로 갚는 것이 작가들의 재주이자 팔자인 것일까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며느리도 있(었)고 시어머니도 있는 낀 세대 며느리입니다. 물론 아들도 남편도 있지요.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잃은 작가가 눙쳐낸 며느리 보고서는 뭐라 언급하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사실적이고 속속들이 저릿저릿합니다. 일제시대 경성사범 학교를 나오신 교사출신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는 말합니다. 나는 결코 저런 잘난 시어머니는 되지 말아야 겠다고요. 그런데 여우같은 여자에게 홀려 장가간 아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남의 자식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지금 남남이라니까요, 완전.’ 아무리 지들 좋아 한 결혼이라지만 부모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이혼한 자초지종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던 주인공의 계획은 한 때 며느리였던 아들 전처와의 깔끔한 대화로 마무리됩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이들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 어떤 며느리의 잘못 때문이냐고요. 혹시 아들의 어머니가 갱년기인 탓은 아닐까 하고요. 입술은 마르고 얼굴은 벌개지고 속에선 천불이 난다는데 나이들면 다 그런 것이냐고요. 시어머니에게 위로부터의 모멸감을 느낀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래로부터의 패배감을 느끼며 집에 돌아옵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코 골며, 아, 아 간간이 신음하며’ 잠이 듭니다. 아니 꿈을 꿉니다. 집에서 못된 바람은 죄다 여자에게 불어 오나니 속에서 천불이 날 수 밖에요. 하지만 남편이라는 현실앞에선 완벽히 꺼지지가 않네요. 사람에겐 그래서 꿈이 필요한 걸까요. 가슴이 홧홧해지는 것이 꼭 갱년기 예행연습 만 같아, 이 작품을 예방약처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속은 좀 상해도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속이 시원해지니까요. 아마 박완서 작가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2. 이상한 선물(2007) / 이청준(1939-2008)

이 작품도 이청준 작가의 유작입니다. 두 분 다 소설의 고향같은 분들이라 한자리에서 괜스레 마음이 황망해지는 시간이었어요. 저에게 이청준 작가의 단편은 '소설의 교과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번 읽고는 제 뜻을 파악하지 못한 듯 싶어 두 번, 세 번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곤 한답니다. 이청준 단편들은 언제나 충분히 평범하고 느리게 시작하는 편인데 이 작품도 그저 나이 지긋한 한 사내가 고향길을 찾아가는 장면이 처음입니다. 그다지 별스럽지 않아 보이죠. 극적인 반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심각한 사건이 날 것 같지도 않아요. 그래서 초반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니 쉬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요. 그런데 자꾸 따라 가다보면 정신을 차리지 않고서는 덮고 나서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많지가 않습니다. 꼭 어려운 문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의 당부 말씀 같은 소설입니다. 설명을 하도 완벽하게 잘 하셔서 그럭저럭 수업 들을 땐 내가 내용을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집에 가서 혼자 풀어보려면 손댈 수가 없는 문제처럼 말입니다. 소설이 완벽하다고 선생님이 완벽하다고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야기의 웅숭깊음, 소설의 절대성, 문학의 경지 같은 의미를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청준 단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은 그 완성도를 향한 모든 문장의 적확한 밀도 가 아닐까요. 전혀 작위성을 감지 할 수 없는 편안함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할 말을 하고 싶은 만큼만, 해야 할 만큼만 하고 붓을 놓습니다. 가령,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그 돌판 조각이 진짜 벼루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무연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인데 이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꼭 이것이 끝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끝이라고 하기엔 아쉽고 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여운속에서 몇 번이고 이 문장을 읽습니다. 그러다보면 아...중요한 것은 ‘그 돌판 조각이 진짜 벼루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하는 우리네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돌판 조각도 벼루라고 우기고 그것을 알면서도 돌판으로 먹을 갈았다 하는 것이, 그런 사람이 있었다지, 그 사람을 알고 있네 하는 것이 바로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작가는 혼신을 다해 앞서 이야기가 생산되고 그것을 유통하는 마을사람들의 심리를 잘 설득해주었던 것인 걸요.

그래서 작가가 전해주는 ‘선바우골 인물전’의 인물들은 사실 '날궂이 하는 미친년'이나 유난히 큰 양물을 지녔다는 '장순이'나 비극적 천재 '씨름꾼'이나 동네 '그림자 도둑', '도깨비 할배'의 이야기가 아니고 ‘저 몹쓸 도둑이나 노름꾼, 패륜아 무리까지도 나름대로 사람살이의 반면 거울을 삼을 수 있었’다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동네사람들 중에서도 '걸어 다니는 법'전으로 불렸다는 '황기태 씨'가 동네 최고의 출세인물일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죠. 황기태 씨는 지방 중하위 공무원으로 크게 출세했다고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고향에선 공부로 출세한 그를 ‘선바우골 인물전’의 어엿한 주인공으로 여겼다네요. 작가는 기인이나, 재주꾼, 초인격 인물의 이야기가 신화를 만들고 신화를 통해 마을이 하나로 묶이는 과정, 알면서도 속아주며 풍진세상을 헤쳐 나가는 보통 사람들의 고집스런 세월을 담담히 보고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속담의 주인공, 전남 장흥이 고향인 작가가 고향을 위해 평생토록 해야 했을 일은 시골에 길을 닦아주고 다리를 놓아주는 일이 아니라 황기태 씨처럼 고향 인물전의 주인공이 되어주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니 보다 많은 황기태 씨의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주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이청준은 바로 진짜 벼루로 변신할 지 모르는 숫돌판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어요. 비록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상한 선물’이라고 회자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3. 국화 밑에서(2010) / 최일남(1932)

주제넘지만 저는 여지껏 이런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유식하고 고상하게 혹은 어렵고도 근사하게 이 작품을 말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 언어로 그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할 밖에요. 이 작품은 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두 분의 고인을 제외하면 작가들 중에 가장 고령이시고요. (참고로 제 아버지가 1932 년생이신지라 아버지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가장 연장자가 말하는 소설은 가장 자연스런 ‘죽음’을 주고받는 대화 였습니다. 그냥 소설이라기 보다는 평소 생각으로 보였습니다. 평생토록 생각해온 것들을 다만 글로 적었다는 느낌이었어요. 주인공은 하루에 두 번의 장례식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의 상주와 주거니 받거니 장례문화와 풍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가 놀랍게 느낀 것은 소설언어가 격조높고 고풍스럽다는 것입니다. 같은 한국어인데 어딘가 국어수준이 높은 선진국 나라의 언어같았다고 할까요. (배운)어르신으로서 젠 체 하는 한자나 고리타분한 옛 글투가 아니라 수준높은 한글과 국어, 그리고 인문학적 용어들이 멋스럽게 용해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의성어, 의태어의 맛깔스런 표현이 아니라 예를 들면 ‘미소를 띤 모습이 긴 세월을 와락 당겨 냅뜨는 폭인가,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이 빈소에서 보다 훨씬 뚜렷했다.’ 혹은 ‘근력이 좋아 뵌다는 수인사에 내장은 엉망이라는 겸양이 상투적일지언정 말의 디딤돌로는 불가피하다.’같은 문장에선 이미 우리말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문체로 문학이라는 언어를 이룩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보시게. 사는 일이 들쭉날쭉인 터에 사람들의 삶에 언제는 서론결론이 따로 있었다고 믿나. 심심파적인 양 중간에 어쩌다 반전이 있기는 있거늘 그것도 믿을 게 못되네. 잘못 뒤집었다간 본전마저 날리기 쉬우니깐.”

그래서 위와 같은 구절은 마치 작가라는 대 인생선배가 한참 아래인 인생후배에게 전해주는 생활속 조언만 같습니다. 이 작품에는 장례를 말하는 영화와 소설, 시를 비롯해 작가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아는 만큼, 보고 듣고 느낀 만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저는 이제부터 누군가가 어떻게 죽고 싶느냐고 물어본다면 ‘화장실에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가고 싶다고 그렇게 시적으로 말하려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비로소 환해지는 죽음도 문학에는 있다더라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에는 죽음의 종류도 다양해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가령 어느 노작가의 잘빠진 소설에서처럼 말입니다.


4. 소금창고(2007) / 윤후명(1946)

작년에 윤후명 작가의 글을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2010 / 현대문학>에 수록된 ‘모래의 시’라는 단편으로 뵌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글은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시적입니다. 그래서 끝내 철학적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이기에 읽고 나면 더없이 쓸쓸해지는 바람같이 몹쓸 종류의 소설이죠. ‘모래의 시’는 어머니 임종 후 고향인 강원도 바닷가를 찾아가며 지나온 삶의 편린들을 시적인 감성으로 회상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손 한 번 잡아보자'는 어머니의 유언이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처럼 아스라이 흩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그리움의 야적장 같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버려져 있는 저 폐품들을 보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폐품은 유품이 되어 달겨든다. 버려야지, 하면서 내놓았다가 다시 하는 수 없이 간직하곤 하는, 이젠 못 쓰는 낡은 물건들 속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리움들.... 많은 그리움을 뒤에 두고 우리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 모래의 시 中

우리는 늘 그렇듯이 추억을 찾으러 떠났다가 그리움만 잔뜩 발견하고 돌아오곤 합니다. 결국 그리움도 무언가를 찾기 위한 강렬한 의지로부터 생겨난 욕심일뿐 아닐까요. 누군가가 보고 싶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려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보고 싶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구요.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는 그 시절을 찾아 떠납니다.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 마치 그리움을 해소해 주는 일인 것 처럼요.

더욱 낭만적으로 이제는 사라진 협궤열차를 타고 그 옛날 염전 바닷가에 위치한 소금창고를 찾아 떠납니다. ‘협궤열차’는 주인공에게 ‘지난 한 시절이 실려 있는 열차’이고 ‘내가 헤매 다니던 그곳’이며 ‘오랫동안 내 젊음을 보낸 공간’이기도 합니다. 열차를 타고 달리는 짧은 여행은 과거 ‘조개의 섬’이나 ‘갯벌의 황소’를 만나러 가는 길이며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그리움의 시원, 바로 ‘소금창고’와 재회하러 가는 길인 것입니다. 소금창고는 ‘순간이 마지막 휘발되기 전에 갈피 지어 차곡차곡 쟁여 둠으로써 추억을 발효시키’는 공간이었다죠. 그곳에서 추억을 나눈 친구들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남루한 사진 한 장만 남았지만 그땐 그렇게 소금창고에서 시만 쓰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라면에 바닷가 젓갈들만으로도 살아갈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사람에게 어떤 희망은 죽는 날이라는 절망속에서도 죽도록 잊혀지지 않는 질긴 환영일까요. 그렇다면 주인공이 자꾸 우연히 마주치던 여자 여행객은 소금창고에 저장된 추억의 환영이었을지 모릅니다. 우연도 세 번이 넘으면 필연이라 했던가요. 아...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네요. 그것은 희망으로 동화(同化)되는 한 편의 동화(童話)였습니다. 열차가 달려가는 그곳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희망스런 날들의 시공간, 그 희망의 기록장 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추억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소금창고에 꽁꽁 쟁여둔 소금, 세월이 지나도 절대 썩지 않는 소중한 그것. 나만의 그것 말입니다.


5. 한 구레네사람의 수기(2008) / 이승우(1959)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소설입니다. 저는 사실 소설에 종교적인 기운이 강하게 묻어나 있는 글을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예수와 십자가의 의미를 등에 업고 인간 구원의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행보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성경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제가 호감가지는 장르의 글은 아니었던 것이죠. 구레네 사람 시몬은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골고다 언덕길로 끌고 갈 때, 그 처형장면을 구경하려고 언덕 가까이 왔다가 잡히는 바람에 예수가 무거워 힘들어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는 인물입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기독교 역사상)영광스런 큰일을 한 사람이죠. 작가는 이 성경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시몬의 시점으로 서술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는(re-writing) 방식의 소설 인지라 저는 최근에 익숙한 서사를 재해석하기로 유명한 소설가 최제훈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최제훈 작가의 전략이 텍스트의 변주로 이른바 읽는 사람 마음대로 독자 ‘좋을 대로 해석하기’였다면 이승우 작가의 전략은 ‘다른 눈으로 해석하기’로 생각됩니다. 역사는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는 시점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시몬은 흑인인데다가 장사꾼으로 등장합니다.(구레네는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지방에 해당) 아들과 함께 돈되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보따리 장사꾼인 것이죠. 작가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제 편견을 누그러뜨리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생각한 것은 바로 시몬이 사람의 아들이라 불린다는 나사렛 사나이를 두고 인간적인 의심을 품는 부분이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 를 섬세한 소설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는 과정과 그 순간에 일어나는 한 인간의 깨달음을 종교적이지 않게 주형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시공간에 자석같이 편입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인간이 그것이 구원인지 변심인지 무엇인지 인식하기 전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명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체험이 아니면 감동받기 힘든 것이죠.

“그리고 나는 예감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람으로 인해 나의 인생인 달라질 거라는 예감은 바위처럼 견고했다. ... 그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의 눈과 손에 붙잡혀 다른 존재로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롭게 변화되지 않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그 사람이 예수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한번쯤은 겪게 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특별해 보일 것 같은 순간의 솔직한 보편성에 감동받았습니다. 결국 구원받는 순간은 늘 바라던 구애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나를 구원해주는 대상이 예수가 아니면 어떤가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 달라질 내 인생 인 것이지요. 그건 흑인이건 장사꾼이건 구원을 원하는, 혹은 원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공평한 시작 아닐까요. 돌이켜 보건대, 제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기대하건대, 앞으로도 이 순간이 다시 오길 바라게 되네요. 그러니까, 끝내 ‘희망’을 설득하며 묘한 끌림을 주는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6. 퍼즐(2007) / 권지예(1960)

이 책에서 가장 소름끼치고 을씨년스러워 한나절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통속적일 수 있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이 미세한 고품격의 감성들로만 조각조각 맞추어지는 느낌. 같은 불륜이라도 감독에 따라 예술영화가 되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 책을 덮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완벽히 맞추어진 퍼즐의 잔상에 애도의 시간이라도 가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단 한 조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완전하게 맞추기 위해 퍼즐 게임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인은 5대 독자의 집안에 재취로 시집을 옵니다. 순전 씨받이 역할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웃기기도 하야 전처가 낳은 딸의 방에선 임신 테스트 키트가 발견되지요. 처음부터 대놓고 아들낳기를 강요받아온 이 여인은 여러 차례 태아감별 검사로 강제적 인공유산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폐허가 된 육신은 어느덧 폐경이라는 절망을 받아들여야 했고 가족의 외면속에서 정신마저 피폐되어 갑니다. ‘한 세상 지나며 씨를 내지 못하고 꽃이 진 자신의 몸을’ 매순간 자각하는 여인은 전처 딸의 창가에 둥지를 튼 새와 고양이 울음소리와 사라진 아기들의 뼈, 핏덩이로 흩어진 살점들을 제 정신으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족이 된지 18년이 되었지만 늘 ‘물 위의 기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 여인의 취미로 묘사된 퍼즐을 맞추는 작업은 거꾸로 완성된 작품에서 하나씩 퍼즐이 사라져 가는 게임으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멸의 완성이 퍼즐게임의 승리일 수 있다는 것. 여인은 끝내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킨 것이니까요. 미술품에 애정을 쏟는 남편은 겉모습만 중시하는 가식적인 중산층의 표상이겠죠. 내면의 아름다움과 상관없이 형식적인 틀에 맞춰 아들이라는 퍼즐 하나가 간절했던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거부하는 전처 딸이 둥지에 든 새를 혐오하는 것은 자발적인 낙태와 함께 인명을 경시하는 다음 세대의 환유이겠지요. 파출부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다 큰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좋겠다는 여인의 마지막은 권지예 작가의 계략이자 치밀한 각본의 결과입니다. 포르말린에 채워져 물러 터지고 말 과육과도 같은 살점의 영구보관. 그녀가 스스로 뚜껑을 닫으며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되어버린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뚜껑을 덮으면 엄마 뱃속처럼 따뜻해서 괜찮을 거라는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는 그곳은, 혹 누군가가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까요?


7. 마디(2007) / 이나미(1961)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삭발’을 감행합니다. ‘요즘 부쩍 스무 살 이후로 이십년 세월이 드문드문 도막난 채 떠오른다’는 주인공이니 얼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모양입니다. 그녀는 음대 작곡과 출신의 강사인데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떨어져 귀를 크게 다친 경험일랑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사실이 환기되느냐 하면 삭발하고 보니 그토록 엄청난 상처를 남긴 흉터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즉, 머리만 깍지 않았어도 잊고 살아도 좋을 상처였지요. 왜 머리를 깍아야 했을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어찌어찌하다 마흔에 드디어 삭발하게 된 이유를 말하는 소설인 것입니다. 삭발하였으므로 오래된 상처, 잊었던 나를 발견한 이야기일테니까요.

삭발을 하게 된 경위는 여느 소설과 다르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연을 당했고 친구는 배신했으며 교수임용에도 실패했으니까요. 그런데 작가는 그간의 사연에 구구절절 치중하기 보다는 삭발식으로 향하는 심정과 삭발식의 순간에 보다 집중합니다. 사진관과 목욕탕, 미용실로 옮기는 발걸음이 얼마나 장중하던지 흡사 입대를 앞둔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했으니까요. 직업적으로 청각이 누구보다 중요한 그녀에게 감응 신경성 난청이라는 뜻밖의 진단은 아무리 잘 견뎌온 인생이라지만 새로운 상처가 되고도 남았겠지요. 작가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멀지 않았습니다. 삭발이라는 초강수도 울고 갈 꽃구경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디’가 제목으로서 울림을 주는 절절한 깨달음. 생물의 마디는 절연되었기에 마지막이 아니라 지금부터 성장할 수 있기때문에 소중한 마디였던 것이죠. 잘라내었기 때문에 새롭게 자라나길 기다리는 마디였던 것입니다.

“최근 내 인생도 전지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자의든 타의든 쳐낼 것은 쳐내고 그 상처의 마디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굵고 튼실해진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몽당나무들.”

가지를 치는 것(전지작업,剪枝作業)이 과실의 생산을 늘리기 위한 작업
이었다는 것을 알 게된 불혹이야 말로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나이’라는 작가의 마지막이 저는 어쩐지 이 책에서 주제상으로는 가장 젊다고 느껴진 소설이기도 합니다. 아직, 마흔밖에 되지 않은 것이니까요. 작가의 문장들도 아픔을 무릅쓰고 곁가지를 잘 다듬어 내었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생각보다 마흔 즈음에 찾아오는 불혹병이 깊고 쓰라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젊고 건강하게 한 이십년 살다보니 그 시절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룬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자아성찰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게 되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죠. 제 경우도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처럼 ‘난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내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제와 없어진 무엇을 발견하는 일은 실로 ‘나이 마흔에 벌어 놓은 건 나이뿐이’라는 이 소설의 허탈함과 꼭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상처의 가지치기, 전지작업이 필요했던 제게도 선물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가지치기를 끝내고 다음의 열매를 기다리는 이 심정을 당신도 알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8. 파종(2009) / 조경란(1969)

잘은 모르지만, 작가들은 이런 소설을 훌륭한 소설이라고 말할 듯 합니다. 꼭 화장을 하고 나왔는지 분명히 알고는 있지만 전혀 화장을 안한 듯 느껴지는 고난이도의 화장술처럼 말입니다. 기초부터 꼼꼼히 바를 걸 다 바르고 색조도 종목별로 다 했지만 누구보다 자연스러워 마치 원래 타고난 얼굴인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화장술. 알고 보면 그게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하루아침에 표현할 수 있는 테크닉이 아님을, 오랜 세월 터득하고 반복되어온 끝에 이루어진 진화의 산물임을 화장하는 사람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소설가를 글쓰는 기술자로 보았을 때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수준높은 기술력으로 탄생된 제품일 것입니다.

우선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가족’입니다. ‘어제는 달에 갔습니다.’ 라는 생뚱맞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적 도입이 저는 좋았습니다. 뭐 대충 가족이 시적이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소설에서 만난 가족들은 (우리 가족과 똑같이)대개 ‘구질구질’하거나 ‘지긋지긋’하기 마련이니까요. 작가는 달나라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달밤의 장면을 아름답게 중계합니다. 그 에메랄드빛 바다에 표독스런 송곳니를 가진 바다코끼리를 보았다는데 그 녀석이 꼭 자기 식구들 같다고 노래하네요. 서로의 몸통에 작살처럼 쑤셔 넣는 송곳니야말로 우리네 가족들의 오래된 무기라고요. 무릎을 탁치며 이것은 시라는 실로 소설을 뜨개질하는 작가의 기술력이다, 이렇게 감탄을 했습니다.

그렇게 바다코끼리의 송곳니를 가지고 돌아와 우리 가슴속에 서서히 후벼 파는 기술을 작가는 미련없이 보여주더군요. 읽는 동안만큼은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아팠거든요. 사실, 가족이라는 존재는, 고의로 상처를 주기보다는 툭툭 늘 습관적으로 스크래치를 내고 가지 않습니까. 어떨 땐 상처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때가 더 많은 게죠.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집에서 오래 살다보면 서로의 송곳니도 흉기가 아니라 공구로 생각되니까요. 드라이버 좀 돌렸다고 아프다 소리치면 그건 우리끼리 엄살인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글로 소설화되고 나면 참 전혀 새로운 아픔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 아픔을 별스럽지 않게 감당하는 가족은 아버지와 딸입니다.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단순하게 절제하면서도 그 순간을 정밀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솜씨가 일품입니다.

“아버지는 나 몰래, 나는 동생 몰래 모두가 잠든 한밤중의 식탁에서 눈치껏 술을 마십니다.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는 저녁 밥상을 치우는 것으로 깨끗이 끝납니다. 조금만 배려받지 못하면 풀이 죽고 무시당한 느낌이 들곤 해요.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를 보면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나는 아무 데서나 엎드려 잠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엎으려 있는 내 귀를 왼손으로 잡아 끌어올리면 언니야, 또 달에 갔다 왔냐? 혀를 차기 마련이지요. ”

일본에 시집간 동생이 팔에 기브스를 하는 바람에 살림을 도와주러 간 아버지와 큰 딸은 어쩌다보니 둘도없는 내면의 술친구가 되버립니다. 이들이 가족간의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공교롭게도 알코올이었거든요. 힘이 되주려 간 것이지만 눈치 덩어리가 된 아버지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큰 언니는 도쿄라는 낯선 도시 어느 시장 골목을 헤매돌다  허름한 술집에서 반갑게도 재회합니다. 술을 끊지 못해 서로 울고 싶은 마음으로 웃어보는 두 사람, 서로에게 ‘딱 한잔’만 권하며 술잔을 건네던 그 장면은 조경란 작가가 말하는 웅숭깊은 가족의 백미였습니다. 아버지는 딸네 집 베란다가 허전해 꽃이라도 심어보려고 꽃씨를 사오는 분이었어요. 타국에서 사온 꽃씨가 시금치 씨앗인지도 몰랐고 파종시기도 모르셨지만 시금치가 명아주과라는 풀인 것은 아는 사람이었어요. 여기저기 빈터에서 흔히 자라지만 툭 던져놓으면 잘도 뿌리를 내려 쑥쑥 자라는 풀 말입니다. 어쩌면 가족이란 장미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시금치처럼 질긴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마침 시금치는 찬 바람과 눈을 맞고 자란 1월 것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하잖아요. 각자 가진 송곳니로 서로를 할퀴어도 그토록 시린 세월을 지나온 가족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뜨거운 존재들이겠죠. 조경란의 <파종>은 가족이라는 흔하고도 질긴 씨앗을 송곳니처럼 특별하게 심어주는 소설이었습니다.


9. 깊은 밤, 기린의 말(2010) / 김연수(1970)

이 작품은 이 책의 표제작이면서 첫 수록 작입니다. 책을 덮고 조용히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솔직히 제목만으로 보면 소설집의 이름이 될 만한 작품으로는 이 작품이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열 편을 묶어주는 아예 다른 언어로 제목을 지을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의미심장한 네이밍이라는 것이죠. 특히 동물원이 운영중인 대낮도 아니고 ‘깊은 밤’에 들려오는 ‘기린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기린이 말은 할 수 있으며 또 한다 해도 누군가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린이 말을 한다 가정했을 때 그럼 어떤 내용을 말 하였을 것인가. 그런데 왜 하필 기린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기린’이 의미하는 바를 성찰하는 이야기이며 그것은 이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과적 전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기린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우리는 기린이 하는 말을 꼭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기린이 말을 하지 않았거나 들리지 않았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도 말입니다.

이처럼 기린에게 눈과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가 왜 자폐아 가정을 관망하여 관통하는 동물로 기린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봄날 쌍둥이 자매와 자폐동생 태호 삼남매는 동물원을 가게 됩니다. (동물원에서는 꼭 벚꽃이 흩날리거든요) ‘엄마와 아빠는 우리를 동물원에 버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꽤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도입은 알 수 없는 슬픔을 예고하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물원에서의 ‘기린은 멀리서 우리 쪽을 바라봤다. 우리는 기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린은 무엇도 흔들지 않았다. 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즉 이들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때 기린은 마치 자폐아 동생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쌍둥이 자매는 ‘기린과 태호가 말하는 방식’이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 작품에서 태호의 엄마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내성적인 쌍둥이와 자폐아의 엄마가 된’ 꿈을 잃어버린 중년으로 등장합니다. 엄마는 태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닐지어니’라 시를 적습니다. 엄마는 시를 적고 태호가 관심을 보인 강아지에게 ‘기린’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기린’이라 말하면 태호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며 좋아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태호와 기린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겠죠. 신기한 것은 태호가 기린과 소통이 되(었다 생각하)자 엄마는 문학 신인상 공모에 당선이 되며 시인의 꿈을 이루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애끓는 절망을 적은 것이 애틋한 희망이 되어버린 겁니다. 헌데, 얄궂게도 기린은 앞 못보는 장애 강아지였습니다. 같은 상처를 지닌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그건 꼭 기린과 태호만은 아닐 겁니다. 태호와 가족은 이제 기린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우는 이유를 알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그것은 기린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기린의 말은 시각장애처럼 아픔을 가진 사람이 들려주는 울음과 같은 목소리가 아닐까요. 모두 잠든 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이 소설이라는 시공간에서 각자 생의 상처와 고통을 토해내는 작가들의 깊고도 조용한 말... 그것은 강아지를 기린이라 생각하며 행복을 느끼는 태호에게 희망이 되고도 남는 말일테죠. 누구에게나 들리는 말은 아니고 태호처럼, 태호가족처럼 기린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독 더 생생히 들리는 한밤중의 교신일테죠. 작가들의 발신음이 별처럼 수놓아지는 아름다운 밤일테이죠.

당신은 기린의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기린의 울음소리에 같이 울어 본적이 있나요?


10. 제삿날(2009) / 이명랑(1973)

이 작품을 가장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명랑하다기 보다는 맹랑하달까. 한편의 잘 짜여진 단막극처럼 꽁트로 여겨지는 구성과 솔직하고 시원한 대사들이 매력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화자가 여러 명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각자의 입장에 처한 주장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왔습니다. 모두들 자기 생각만 하는 어른들이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싶어 슬퍼지기도 하더군요.  밖으로 꺼내놓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속으로 삼키는 말을 말풍선에 달아봅시다 ! 모두 똑같을 테죠. 이 책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작가지만 그녀가 들고 나온 문제는 우리사회 만연되어 가고 있는 ‘노인 부양 문제’ 였습니다. 노인을 둘러싼 자기들 문제겠지만요.

소설에선 두 어머니를 둔 아들과 며느리가 등장합니다. 두 어머니는 현재 과부인 실정이고 이들은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된 경우입니다. 그 우연이라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난 비밀이었다는 것인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지는 출생과 양육의 모든 과거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주인과 더부살이 관계인 이들 두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자식들이 병원에 모이게 되었고 여기서 병원비와 간병인에 대한 의견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작가는 이 상황에서 주인 어머니의 큰아들과 큰 며느리, 더부살이 아주머니의 아들과 며느리를 각각 공평한 화자로 내세우며 정당한 발언권을 부여합니다. 이들 네 명이 속내를 드러내며 어떻게든 자기 부모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작태는 속된말로 재수가 없는 꼴이지요. 그 와중에 주인 어머니의 큰 며느리는 충격받아 쓰러진 척, 쇼를 연출하기까지 하네요. 더부살이 아주머니를 내쫓았다는 막장 며느리는 ‘그나저나 이 노인네는 왜 죽지도 않나?’ 하며 자칫 잘못하다가 병수발 들지 모르는 자신의 오늘에 적나라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의 배은망덕한 자식들을 뒤로 더 충격적인 반전의 커밍아웃을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분이 있었으니....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모두들 기구하기 짝이 없을까요. 두 과부가 거짓말처럼 공유한 귀신의 사연이 그것입니다. 어찌 보면 자식들을 속여 온 두 어머니의 세월 속에서 인생의 죄와 벌을 논하는 짜릿한 반격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지만, 책을 덮고 나면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참 완벽해 보였다고 할까요. 조금더 씁쓸해도 좋았을 듯했는데 너무 완벽해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그 점, 그것만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것도 실은 위의 어르신들의 작품을 읽었기에 자동적으로 비교되는 결과였구요. 제가 인위적으로 나이순으로 작품을 배치했는데 그건 아마도 세월따라 쌓여지는 나잇살만큼의 연륜, 마음의 무게가 아닐지요. 


나이듦의 시간값 

긴 서평을 지양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습니다. 요즘 제가 젊은 작가들의 소설집을 동시에 읽고 있는 터라 이 책은 나이는 괜히 먹는 것이 아니라는 끄덕임을 주는 시간이었어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대개 아찔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매스도 예리하고 송곳도 날카롭지요. 반면에 지긋하신 작가들의 소설은 느리고 두껍지만 둔중한 울림이 있습니다. 나이든다는 자신감을 선사하는 자랑스런 작품들이라고나 할까.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많겠지만 자신의 위치와 경력에서 작품으로서 완벽한 소설을 완성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저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당대에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으로만 느껴집니다. 조금 호들갑을 떨어보자면 같이 살아주셔서 읽게해 주셔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만큼이요. 허나 현대미술관 같은 갤러리에서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두 관람한다고 해서 전 작품을 이해하고 돌아오진 않지요. 그냥 가슴으로 느낄 뿐, 작가가 말하려 했던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작품들을 모두 잘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돌아오는 길이 분명 벅찬 감동으로 가득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진실이랍니다.  

나이가 드니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고상하게, 더 품격있고 교양있게 나이들 수 있을지 그것도 고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고민은 나이가 들어도 어째 나이들어 기대하는 자기모습이 아닌 것 같기에 계속 하게 되는 고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나이 들었다고 다 용서되고 다 알아지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씀이죠. 욕심이 사라지기는 커녕 헛된 바램은 더해지고 부질없는 기다림도 생기더란 말입니다. 이제껏 먹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벌어 놓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때 이렇게 나이든 작가들의 나잇값 제대로 하는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 처방인 듯합니다.  

이제 '깊은 밤, 기린의 말'쯤이야 모두 알아 듣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아지도 그가 좋다면 기린이라 부를 수 있고 그래서 기린이기에 못다한 말까지도 강아지 안아주듯 보듬을 수 있는 나이이길 바랍니다.

그 말귀 알아듣는 알찬 시간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나이듦의 시간이 아닐까요. 나잇값을 한다는 것, 그 나잇살만큼 불어난 시간값을 한다는 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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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5-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꼭 봐야겠습니다. 나는 작가다!
정말 '나는 가수다' 보면서 가수가 노래 한 곡 뽑아내기까지
저렇게 힘이 드는거였구나, 새삼 깨닫겠더라구요.
뭘 하든 이런 마음으로 하면 좋겠구나 싶어요.

한사람 2011-05-22 22:00   좋아요 0 | URL

아..스텔라님..후회없으실 거여요~
어제 책 덮고 오늘 오전동안 폭풍처럼 리뷰를 작성했어요^^
노래를 잘한다고 꼭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듯이
소설 잘쓴다고 꼭 책 많이 팔리는거 아니잖아요..
하지만 분명 명품 소설들이었어요^^

굿바이 2011-05-2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기대가 되지만 한사람님의 글이 좋아서 몇 번을 읽습니다.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

한사람 2011-05-23 18:23   좋아요 0 | URL

요즘은 글 잘썼다는 말도 좋지만, 글이 좋다는 말씀이 더 좋습니다^^
제 글이, 몇번이나 읽을 만한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자꾸 다시 보고 싶은 책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5-2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서평이군요, 책 앞에 실렸으면 싶을 정도로 좋은 글이네요.

제가 소설을, 특히 한국 단편 소설을 그다지 선택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한사람님의 글로 인해 냉큼 장바구니로 넣습니다.

네, 나이듦이란 내가 누구인지 알고 타인이 누군이지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말귀를 알고 서로 보듬어준다는 것, 쉽지만은 않은 일 같아요. 그렇게 늙을 수 있을까요?

한사람 2011-05-24 09:58   좋아요 0 | URL

저는 생각해요..나이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것 같아도 어쩐지
반복되는 자신의 말만 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나이들었다고 안들어 주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요 ㅠ.ㅠ
실은 말이 많고 지겨우니까 잘 안듣고 싶은 것인데 말이죠..

요즘은 잘 늙어야 잘 죽을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잘 죽는 건 태어나는 것처럼 아주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물선 2011-06-0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있는데... 이거 이벤트가 되서 문학의문학 계간지도 1년치 온다는데...
문학적인척만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읽어야 내속에 스미지...

한사람 2011-06-02 00:44   좋아요 0 | URL

좋겠다 ~

나는 그런 이벤트는 당첨된적이 거의 없어요 ㅠ.ㅠ
 
초역 니체의 말 초역 시리즈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 삼호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쓸 때 비겁하긴 하나 유명한 철학자를 인용하면 돌파구나 전환점이 될 때가 있다. 까놓고 말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젠 체하며 적고 싶을 때 니체만큼 폼나면서 안전한 사람도 없다. 니체는, 니체라면 우리가 니체를 하나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을 들먹거려도 어쩐지 용서해줄 것 같다. 니체를 말하면 나만 아는 것을 잘난 체 한다는 느낌도 덜하고 그렇다고 식상하다는 인상도 덜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하나 꼭 인용해야 할 학자가 있다면 니체는 호감도면에서 상위권인 것이 확실하다. 니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대해 나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어렴풋이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달까. 날카로운 통찰력이야 철학자들이 가진 공통의 미덕이겠지만 '니체 NIETZSCHE'는 대중성과 신비성을 동시에 지닌 꽤 매력있는 네이밍인 듯하다. 프로이트나 융을 거론하며 심리를 분석하는 건 진부해 보이고 라캉이나 들뢰즈를 언급하며 정신분석학을 가져오긴 지식이 짧게 느껴진다면 분석같은 건 포기하고 그냥 니체의 글 한 토막을 이미지처럼 삽입하면 어떠한가. 좀 더 예술적이고 그래서 더 흥분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절대 사려고 집어 들진 않았다.(왜 변명을 하는 거지? 무엇이 캥기는 것이지?) 그야말로 구경차원에서 페이지를 들쳐보았다. 명언집은 서점에서 오며 가며 들추어 보기 얼마나 적절한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시크하고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불어넣었다.(절대 속지는 않겠다는)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좋겠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불현듯 발생했던 것. 그래도 나는 순간의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집에 가서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고 눈을 크게 떠보았다. 얼마 전 받아든 러셀꼴이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글씨는 단정했고 종이질은 유연했고 광택없는 채도에 냄새마저 순박한 것이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나는 서점에서 책 살 때 꼭 책 냄새를 확인한다) 그래 나는 아직 이 정도의 니체라야 어울리는 사람일지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엔 한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마치 나 들으라는 듯 첫 페이지의 다음 문장이 흠칫하게 만든다.


자신을 대단치 않은 인간이라 폄하해서는 안된다. 21p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내가 요즘 들어 더욱 눈물이 많아진 것에 나이들면서 생기는 감정의 유연함이 아니라 얼마간 자존심의 훼손에서 시작된 무언가의 상실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문장을 읽자 마자 어쩐지 이 책을 덮고 나면 실낱같은 자존심 같은 게 회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젠장)스스로도 잃어버렸다고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었지 말이다. 나는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니체의 문자에 굴복했고 그 사람을 몰래 집으로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부터 당신을 사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고 봄날은 가고 마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잡지 않아도 오늘만은 당신을 가져 가 보겠어요’... 온라인 서점에서 주로 책을 구입하다 보니 예전처럼 충동구매가 사라진 것 같아도 어쩐지 책의 내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만져보고 사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나는 서점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책이 몇 권 있었는데 정작 그 책들은 꼼꼼히 확인하고도 구매의욕이 전혀 일지 않았건만, <니체의 말>, 이 책은 왜 그렇게 강렬하게 나를 끌어 당기던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본능이라고 하는 건데 본능은 가장 지성적인 것이므로 당신의 지성은 나를 원한 것이다. 아... 오월이여. 여인의 변덕을 용서하시라.

  술렁술렁 주말의 여유를 즐기며 이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넘겨갔다. 그리곤 주말이 지나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책은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니체는 나의 꿈쩍 않던 이성을, 꿈틀거리던 감성을 적신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심코 한 두 번 스쳤지만 그러는 사이 그이만의 자연스런 매력을 알게 된 것과 같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추어 본 만남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니체는 내게 무언가를 회복시켜준 것이다. 나는 니체 사상의 계보와 니체 철학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자랑이다) 그저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에 해당되는 몇 종류의 말들만 (그것도 찾아 내어야)어설프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다 알지 못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듯 나는 니체가 했다는 232 번의 말로써도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은 니체의 저서에서 일본인 ‘시라토리 하루히코’라는 번역자가 명언만을 발췌해 엮은 책을 다시 우리 번역으로 소개한 책이다. 이중번역이라고 하기에 문장은 물 넘어가듯 매끄럽고 상당히 정제된 느낌을 받는다. 고가의 정수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맑디 맑은 생수의 느낌. 일본에서 이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는 점이 우리 출판계에 그다지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고 얼마 전 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와 비교하자면 발췌된 문단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편집상 인간내면의 성찰이라는 대전제를 계속하여 환기할 수 있도록 앞뒤 맥락없이도 명언 그 자체로 빛이 발한다는 느낌이다. 잘 모으셨고 소중하게 정리하셨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발췌문의 모음집을 단편적으로 읽었다는 공허함보다는 발췌로 이루어진 하나의 명상 에세이를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부분을 모아놓고도 전체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꽤 진지한 모음집이었던 것이다.

  모아진 글들은 ‘자신’, ‘기쁨’, ‘삶’, ‘마음’, ‘친구’, ‘세상’, ‘인간’, ‘사랑’,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열 개의 카테고리 아래 가지런히 배치되었다. 책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신에 대하여’로 시작하고 그 아래 첫 번째 명언의 제목은 ‘첫걸음은 자신에 대한 존경심에서’였다. 열가지 상위 주제를 주욱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존경해야 하며 그러한 자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 자신을 풍요롭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고귀한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존경스러워 질 때가 바로 자존심을 찾게 되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살아 오면서 자존감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사람에게 그것의 본질을 알려주며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넉넉한 기회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부분도 ‘자존감’에 대한 인식과 ‘자존심’의 회복, ‘자긍심’의 확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새삼 내 자신이 고상해질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기는데 일본 번역자는 니체를 통해 ‘자존심 회복’을 하게 될(해야 할) 일본 독자들을 겨냥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곧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인식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철학하는 자세의 기본일 것이다. 가령, 니체는 자신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다음의 질문에 확실히 답하라 주문한다.

-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가?
- 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답을 모아보면 그것이 곧 의심없는 자신이며 그렇기에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질문의 답은 사람일 수도 어떤 행위일 수도 또는 물질이나 무형의 현상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 자로 답하는, (물론 모범답안처럼)내가 지금까지 진실로 사랑한 것은 ‘나만의 시간’이고, 내 영혼의 차원이 높아지도록 이끌어 준 것은 ‘독서’이고, 내 마음을 채우고 기쁘게 해준 것은 ‘지식’이고, 지금까지 ‘글쓰기’에 몰입하였다고 적어보자. 나의 본질은 대체로 고독한 학자를 추구한다는 뜻이렸다. 이런 ‘도식적인 생각하기’에 나는 내 본질이 흥미로와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의 본질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짜릿하게 가르쳐 주는 시원한 해답도 자주 등장한다.

풍요로움은 스스로에게 있다.
사람은 대상물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 내는 것이다. 결국 풍요로운 대상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능력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요,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즐거운 지식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내 능력이 높아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생도 풍부해지는 것이라는 세상 당연해 보이는 이치는, 인간은 그 대상물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 내는 존재라는 속성을 파악한 니체이기에 무겁도록 놀라워 보이는 것이다. 쉬운 예로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미션곡을 받아든 참가자들을 떠올려볼까. 참가자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조용필의 노래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에 의해 촉발된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사랑, 이별등의)를 찾아내 그것을 끄집어 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임재범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노래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임재범의 노래로 촉발된 우리 가슴속 숨겨진 각자 저마다의 사연이 자극되어 지는 것이기에 끝내 눈물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풍요로우면 그만큼 내 속에서 찾아낼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처가 풍요로운(?) 나는 그래서 그렇게 매순간 눈물이 나는 것이고 복받치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사람마다 자신이 더 보고 싶은 대로 더 듣고 싶은 대로 감동의 위치를 자기위치에 자리시킬 것 같은 책이다. 열 가지 주제하에 전개되는 230여 번의 카드중 분명 심장에 박혀버리는 잊지 못할 패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만으로 볼 때 마지막 장에 위치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번역자의 자의적 해석(과 편집)으로 생각되지만 나는 최종적인 개인의 ‘아름다움’이라는 선택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니체는 지적인 자유를 물론 소중한 가치로 여겼지만 지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부분적인 풍경처럼 한정된 전망에 불과하다 말한다. 광범한 교양도 좋지만 대신 그런 것 보다는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니체가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마라
이상을 버리지 마라. 자신의 영혼속에 있는 영웅을 버리지 마라. 누구나 높은 곳을 목표로 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과거의 일이었다며, 청춘 시절의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 떠올려서는 안 된다. 지금도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이상과 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느 사이엔가 이상의 꿈을 버리게 되면 그것을 말하는 타인이나 젊은이를 조소하게 된다. 시샘과 질투로 마음이 물들어 혼탁해지고 만다. 발전하려는 의지나 자신을 이기려는 마음 또한 버려지고 만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이상과 꿈을 버려서는 안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되면 으레 꿈은 과거의 일일뿐이고 그것은 지나간 청춘에 불과했다고 꿈을 이루어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꿈을 초월한 사람처럼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과 꿈을 버리는 일이 곧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일이라면 결국 자존심의 훼손은 자기 자신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꿈과 포부를 밝히는 청춘을 뒤에서 냉소하고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며 쓴웃음짓는 일이 실은 스스로 자존심을 내팽겨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니체는 과거 ‘어디에서 왔는가’가 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말한다. 화려했던 과거에 집착하면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인간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상투적으로 꿈을 입으로만 내뱉으며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행위는 현재에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냐 반문한다. 이에 우리가 죽는 날까지 노력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보건 말건 자신을 증인삼는 일이며 자기 시련을 겪어 낼 때 비로소 자존심은 바로 서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이 고상한 존재라는 자존심은 곧 자신감이 되며 그것은 자기 시련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자기보상이라는 결론이 나는 미치도록 좋았다. 자존심은 누구를 위한, 누구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내가 수여하는 상장이었다.

  조금은 자존심에 여유를 느끼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 니체의 간략 독서를 마치고자 한다. 실제로도 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니체를 모르면 또 어떠한가. 내가 초대한 그는 나를 기쁘게 하였으니 된 것 아닌가. 니체는 ‘지성’을 말하면서 ‘너무 힘주지 마라’는 뼈아픈 충고를 잊지 않았다. 너무나 온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긴장과 고통스런 인상을 준다고 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고통스런 불쾌감이 배어 있기 때문에 타자는 부담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 전부가 아닌 4분의 3정도만으로 일과 작품을 완성하면 상대에게 여유감을 제공하므로 쾌적한 기분으로 수용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리뷰 힘빼기를 연습중인 나로서는 천금같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책을 덮으며 알게된 4분의 3의 법칙을 나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최근에 나는 내가 바라는 완성도의 늪에서 완벽함의 벽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번 우연은 꼭 그동안의 필연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최종적 절차, 그 절차의 기념식만 같다.

니체는 어느 봄날의 끄트머리, 행복하고 싶었던 그날 오후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실컷 행복했다. '니체'때문인지 '나'때문인지 그건 중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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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0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철학을 '어떻게 하면 사나이답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문제의식이다, 라고 평하던 사람도 있던데ㅎ 어째 인용하신 글들을 보니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정말 제 생에서 우울할때 니체의 글을 만났었습니다. 아직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지만요, 풋.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문장의 광기 같은 것에 전염되어서 같이 울기도 했고.. 그러다 꼭 풍선에 바늘로 콕 찌르듯 펑 터진 후에...(뭐라 설명이 어렵네요 ㅎㅎ;) 좀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한사람 2011-06-04 09:16   좋아요 0 | URL

빵빵해지던 풍선이 한순간에 빵터지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알것 같아요 ~
무릇 남자의, 사나이의 자존심이라는게 대부분 그럴거니까요 ㅋㅋㅋ

하지만 분명 터지기 직전까진 얼마나한 위롭니까?

철학자가 위로주기 힘들어여, 피곤만 가중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ㅋㅋ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반양장)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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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저는 행복했습니다. 건널목 아저씨가 정성껏 깔아준 카페트를 즈려 밟고 꼭 지난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자꾸 추억속의 누군가가 떠오르고 어렴풋이 보고도 싶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나요? 더 정확히 얼굴 생김새와 이름이라도 기억해보려 했지만 그저 씨익 웃는 모습만 스쳐 지나가더군요. 이를테면 노란 스쿨버스를 운전해주시던 콧수염 기사 아저씨, 갈 때마다 서비스로 시원한 빙수를 주시던 떡볶이 집 아주머니, 한쪽 얼굴에 큰 화상흉터가 있었던 매점언니, 뭐 그런 분들이 건널목 저편에서 자꾸 손짓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건널목을 건너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쿵쿵거리더니 길을 다 건널 때쯤 되니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여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슬픈 건 아니었어요. 솔직히 이 책이 아니었으면 평소에 생각날 분들도 아니었는걸요. 그치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꼭 오랫동안 헤어진 ‘그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순간 반갑고도 벅차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사람’과 덥썩 두 손이라도 맞잡고 얼싸안은 후 한번 울고 나서라야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촌스럽고 유치해도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마치 ‘그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거리며 울었더랬습니다. 오랜만에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끝내 달래주는 사람은 없더군요. 예, 저는 어른이니까요. 어른은 스스로를 달래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어쩌면 저는 ‘그 사람’을 만났기에 울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나기 힘들 거라는 예감에, 아니 ‘그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울음이 터진 것 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걸까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 다시는 돌아 갈 수 없는 시절들, 다시는 가볼 수 없는 곳, 하지만 너무도 그리워 언젠가는 어딘가에는 꼭 있을 것만 같은 잡을 수 없는 ‘그리운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동화책, 이 한편의 이야기는 얼마나 기특한가요. 혹시 건널목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마법의 양탄자라도 깔아 주신 건 아닐까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훨훨 날아 도착한 곳, 저는 오늘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저는 김려령이라는 작가를 알 지 못했습니다. <완득이>는 귀에 익은 제목이었지만 작가의 이름은 낯설었어요. 동화는 더 이상 동화같은 시간을 잃어버린 저 같은 어른이 집어들만 한 책이 아니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죠. 제가 무심했습니다. 동화는 동심을 자극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동심을 잃어버렸는지 원래 동심이 있기는 했는지 동화를 읽기 전엔 모르는 것 일 뿐이었어요. 저에게 김려령은 낯설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동화작가 오명랑’은 꼭 옛날 옛적에 제가 나경이와 종원이 만할 때 즐겨보던 명랑만화 ‘꺼벙이’나 ‘로봇 찌빠’, ‘강가딘’ 같은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처럼 느껴졌어요. 요즘은 ‘명랑하다’는 말조차 잘 쓰지 않는 단어라 내심 반갑고도 설레었답니다. 오명랑 작가가 ‘문밖동네’라는 엄청 큰 출판사에서 나온 <내 가슴에 낙타가 산다>를 썼다는 분이니 얼추 김려령 작가의 아바타라고 해도 좋을 듯 하군요. 오명랑 작가는(이하 오작가) ‘아직 독자들에게 들려주지 못하고 가슴에 꽁꽁 숨겨둔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했어요. ‘너무 깊숙이 몸에 박힌 말처럼 툭 나와 버리는 문장’인지라 스스로 지어서 쓰지는 못할 이야기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을 이야기라 쓰지 못해도 꺼내어 보고 싶다고 했지요. 그리곤 끝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대신 써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래서 세상을 따스하게 하는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네요. 맞아요. 어른들은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할 가슴속 이야기가 있어요. 나이가 들면 상처도 그리움이 되지요. 작가들은 이 가슴속 상처를 남몰래 꺼내어 때로는 예쁜 포장을 때로는 섬세한 칼질을 하는 분들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작가지만, 아무리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지만 어떤 사무친 이야기는 글로는 적어낼 수 없는 암 덩어리 같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분명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 살 수 있는 거지만 그것을 없애버리면 그 사람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덩어리를 어떻게든 토해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이야기를 가득 실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지나갈 수 있는 건널목을 설치하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스스로 이야기의 건널목이 되어 드릴 터이니 자신의 이야기를 통과한 아이들이 더 따스한 사람, 지금보다 더 온정넘치는 세상과 만나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바램은 아주 분명하게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울면서 건너온 건널목이지만 이렇게도 행복한 기분이 되었으니까요.

  이야기가 그냥 우리사회 흔한 미담같지 않고 더욱 가슴깊이 와 닿았던 건 아무래도 오작가가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생생한 체험담이라 고백했기에 더욱 그랬을까요? 오작가가 어릴 적 꾹꾹 참아버린 눈물이, 쌀과자를 맛보며 엄마를 기다리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생활보호 대상자로 이층집 지하에 오빠와 단둘이 살면서 건널목 아저씨와 조우한 일곱 살의 기억... 살면서 어떤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불행했던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도록 만들지요. 엄마는 돈을 벌러 집을 나가셨고 그 사이 아빠는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덩그러니 남겨진 태석, 태희 남매의 눈물젖은 라면의 맛은 어땠을까요. 빈병이나 폐품을 줍는 왕거지로 불리우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던 오빠를 바라보던 동생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다른 친구들처럼 달려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놀려주는 친구들을 혼내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서럽고 두려웠을지요. 저는 혼자 자라서 그런지 평소엔 티격태격 하다가도 동생이 싸우면 꼭 같은 편이 되주던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지금까지도 유치하게 무조건 내 편인 사람이 언제나 목마르게 그립기도 하구요. 그래서...책을 반쯤 읽었을 때야 알았어요. 오작가는 건널목 아저씨를 말하려 이야기 교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이야기 교실을 잠시 빌린 것이었다는 것을. 오작가는 건널목 아저씨를 통해 자신의 뭉쳐진 상처를 어른된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고 돌아오고 싶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김려령 작가는 오작가라는 건널목을 통해 우리를 따스한 동화나라에 가닿게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래요. 오작가가 생계방편으로 마련한 이야기 교실은 이야기가 탄생되는 작가의 또 다른 원고지였답니다. 그 입체적인 원고지 안에서 ‘그리운 건널목 아저씨’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나경이, 종원이, 소원이와 함께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 듣기 교실에 수강한 한 명의 어린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에 5시 30분 TV 시작 시간이 되면 모두 모여앉아 만화를 시청하던 그 때 처럼요. 건널목 아저씨는 ‘신호등 안전모’를 쓰고 ‘이동식 건널목’을 배낭에 매고 다니는 이상한 아저씨였어요. 아니 처음엔 만화 주인공처럼 보기엔 남루해도 언젠간 악당이라도 물리칠 근사한 힘을 가진 마법사일지도 몰라 의심을 했지요. 만화에서 보면 고물상이나 실험실 같은 데서 ‘짠’하고 변신하는 정의의 주인공들 있잖아요. 그런데 점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저씬 그런 힘세고 멋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저 아파트 팔각정 뒷길을 따라 만물 고물상에서 쓸쓸히 기거하는 떠돌이 아저씨였어요. 슬프고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거짓말처럼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찻길에 카페트를 깔아 건널목을 만들어 주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비밀스런 아저씨 였으니까요. 저는 그래도 어른이니 그쯤 되면 분명 말 못할 사연이 있을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죠. 오작가와도 어떤 사연이 있는 분이겠다, 그렇다면 건널목 아저씨는 오작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뭐 이런 앞선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답니다.

  예상대로 아저씨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분이었어요. 원래는 자동차 제조회사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아저씨 부인은 쌍둥이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그렇게 아프게 얻은 쌍둥이들이었지만 어이없게도 무단횡단으로 그만 잃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자식을 해치게 된 간접 범인이 된 것이죠.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요.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을 앗아가면서까지 탄생한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마저 아저씨 곁을 떠났으니 멀쩡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아저씨는 더 이상 쌍둥이 자식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쌍둥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위험을 알리고자 건널목이 없는 차도를 찾아 다니신 거여요. 위험한 곳에서 온몸으로 건널목 설치를 건의하는 아름다운 일인 시위자를 자청하신 거랍니다. 저도 부모의 한사람이기에 그것은 자식을 죽게 한 가해자로서 스스로 내린 형벌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는 쌍둥이 형제가 너무나 보고파서 쌍둥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비직도 선뜻 받아 들이셨대요. 그렇게 해서 진짜 건널목이 생기면 아저씬 그 동네를 떠나곤 했답니다. 세상의 모든 건널목이 다 설치되는 그 날까지 아니 죽는 그 날까지 아저씬 가짜 건널목으로 사실 생각이었겠죠. 건널목이 없었기에 쌍둥이를 잃은 아저씨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건널목이라도 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곳도 건너진 못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쌍둥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인 건널목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은, 설령 건널목이 없더라도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늘 바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어른들 일테죠. 하지만 그런 어른들은 보기에 누추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던지고 반대로 겉모습이 화려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겁쟁이들 아닌가요. 어른인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가슴이 답답해져 한숨이 멈추지 않았어요. 우리같은 어른들에게 이 모든 걸 배운 아이들이 바로 건널목 아저씨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어요. 쌍둥이 형제의 돈을 뺏으려던 중학생 아이들에게 아저씨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을 때 저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인 제가 벌을 받아 실컷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많이도 아팠습니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하지만 ‘많은 걸 잃고도 많은 걸 주었던’ 건널목 아저씨에게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만약 근사하게 차려입고 좋은 차에 좋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였다면 절대 쌍둥이 아이들이 돈 뺏기는 현장같은 건 발견할 수도 없었을 거 잖아요. 세상이 야속하다지만 이럴 순 없는 거 잖아요. 자식같은 아이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며 맞아야 했던 아저씨의 서러움이 복받쳐서 저는 그만 목울대가 울렁거렸습니다. 그 순간 왜 꼭 맞고도 가만있어야 했느냐 아저씨에게 묻고 싶었지만 저는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어쩐지 아저씨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거든요. 아저씬 맞으면서도 도망가는 쌍둥이 형제들을 보고 자신의 쌍둥이 자식들을 떠올렸을지 모르잖아요. 자식 먼저 보낸 아비가 잘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 맞아야 한다면 자신이 대신 맞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잖아요. 아니, 아이들에게 차라리 맞기라도 해야 쌍둥이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건널목 아저씨는 바보 아저씨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얼굴이 퉁퉁부어 돌아가던 아저씨 뒤에서 소리치고 싶었어요. 그치만 ‘바보’라고 부르고 나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어쩐지 더 화가 났습니다. 아저씬 그런 제 목소리에도 ‘괜찮다’ 끄덕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셨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런 바보를 알아주는 똑똑한 이웃들이 있었다는 거여요. 이 책에서 복숭아할머니와 경비아저씨, 반장 아주머니, 그리고 15층의 도희 학생이 없었다면 저는 세상을 한없이 원망했을 테니까요. 다시는 이런 나쁜 동화책은 보지 않을 지도 몰랐어요. 바보 아저씨와 똑똑한 이웃들이 사는 그리운 그곳이 우리 사는 같은 아파트 인 것도 저는 좋았어요. 사실 부끄럽지만 어른인 저만해도 옆집 이웃과는 겨우 얼굴인사만 나눈 것이 전부이거든요. 그거 아세요? 저는 아직도 한 달 전 이사 온 옆집 새댁이 건넨 사과주머니에 무엇도 채워 보내지 못했답니다. 이곳 아파트에선 다들 그렇게 서로 바쁜 척 하는 것이 아무런 흉이 되지 않잖아요. 옛날에 저 어릴 적에 서울 아파트에 처음 이사왔을 땐 아랫집 현옥이와 매일 서로 집을 오가며 쥐포도 구워먹고 핫케잌도 태워먹고 그랬는데... 엄마들은 매일 아침 모닝커피 타임을 가지셨고(그때 옆에 있다가 마지막 한 방울을 얻어먹던 재미를 아시나요?) 그러고 보니 그땐 전화도 같이 쓰고 그랬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주차장에서 서필로 땅따먹기 하다가 이집 저집에서 고등어니 된장찌개니 하는 저녁반찬 냄새가 흘러 나오면 엄마들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때 배는 엄청 고파도 친구들과 헤어지던 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지금 생각하니 콧잔등이 다 시큰해지네요. 그랬어요. 건널목 아저씨가 지켜주던 아리랑 아파트 105동은 옛날에 저 어릴 적 살던 아파트의 풍경처럼 그렇게 아스라했습니다.

  지금 사는 우리 아파트 501동에 건널목 아저씨 같은 분이 계시다면 세상엔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도 많구나 그래도 한번 살아볼만한 거구나, 싶어질 텐데요. 건널목 아저씨는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 귀찮고 더러워서 하기 싫은 일은 알아서 미리 해놓는 분이셨어요. 부모님이 싸우기만 하는 도희의 카운슬러가 되어주기도 했구요. 오작가 남매인 태석과 태희는 바로 건널목 아저씨를 통해 훗날 한 가족이 되는 도희를 만나게 되었다네요. 건널목 아저씨는 말 그대로 사람사는 소중한 인연의 건널목이 되어 주셨네요. 그뿐인가요. 건널목 아저씨는 오작가 남매의 지하방에 이불대신 푹신한 건널목을 깔아주고 또 한번 최소한의 안락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런 건널목 아저씨 때문에 태석오빠와 도희언니, 그리고 오작가까지 이들 모두는 건널목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응어리도 건널목 아저씨가 내민 손길 덕택에 그리운 상처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 작품을 읽고 살면서 누군가에게 건널목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답니다. 건널목 아저씨처럼 가진 게 많지는 않지만 그냥 곁에 있어도 포근한 에너지를 전해주는 사람. 누군가의 무단횡단과 어떤 이의 신호위반을 지켜주는 반가운 하얀 善의 마음. 생각해보니 세상에 그런 건널목의 손길과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는 저 건너편의 세상에 도착하기에는 언제나 두렵고 외로우니까요.

  그러니까,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도착한 그곳, 동화나라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었어요. 오작가로 분한 김려령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동화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말해주는 듯해요. 그렇죠? 지금 건널목 아저씨는 사라졌지만 우리도 건널목 아저씨가 되어 줄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것 같아요.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 하나만 데워지면 얼마든지 위험한 그 곳에 건널목이라는 마음을 깔아 줄 수 있다고 말이어요. 그렇담 우리 ‘그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건 어때요? 우리 모두는 어디선가 언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 당신은 나의 ‘그 사람’이 되고 나는 당신의 ‘그 사람’이 되어 드리는 거여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져요. 그럼 길을 가다 건널목을 발견해도 내가 먼저 건너가려 뛰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은 이 건널목을 발견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일랑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이제부턴 우리 아이들에게도 건널목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보다 더 근사하고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래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은 되기 쉬워도 건널목이 되어 주는 사람은 쉽지 않을 거여요. 건널목을 건너기만 하는 사람은 언제나 급하게 건너고 나서 혼자 도착한 그 곳이 무지 외롭고 재미 없을 거여요. 설령 그곳에서 친구를 만났어도 늘 그렇듯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 거여요. 세상의 위험을 혼자서 보란듯이 뛰어 넘는 것만이 生의 목표는 아닐 거여요. 누군가에게 안전하고 튼튼한 바닥이 되어 주는 일, 작지만 포근하고 따스한 천장이, 언제나 그립고도 보고픈 길이 되어 주는 일. 그것이야 말로 우리 生을 더욱 아름답게 살찌울 테죠. 모르는 친구도 내가 놓아준 다리를 통해 건너갈 때 그 행복감은 더 커질테죠. 그렇게 아름다운 건널목, 이토록 든든한 건널목을 통과해 ‘그 사람’과 재회할 수 있는 나라, '그 사람'이 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 곳에서 우리 만나요. 그곳에서 서로가 ‘그 사람’을 본적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해요. 그땐 다시 ‘그 사람’을 못 볼까봐 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같은 ‘그 사람’ 이었다는 것에 우리 서로 마음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손잡고 울어요. 우리 그렇게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아요. 마법이 아닌 진짜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양탄자를 날게 해요. 동화나라가 우리의 오늘이 되는 그 날을 같이 기다려요. 그때까지 모두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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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5-1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그분'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인가요^^

한사람 2011-05-16 15:50   좋아요 0 | URL

헉....속내를 들킨 이 심정이란....ㅋ
네오님 예리하신걸요?

네오 2011-05-16 20:43   좋아요 0 | URL
사연이 너무 구구절절 하셔가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