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처럼 써라 - 헤밍웨이, 포크너, 샐린저 외 18인의 작법 분석
윌리엄 케인 지음, 김민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해가 가기 전에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멍하니 쳐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에 틈만 나면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지난번에 다 읽었으나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한 책들을 정리하면서 무언가 빚진 마음을 털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변명의 리스트에도 끼지 못한 채 읽다가 흐지부지 되었거나 분명 읽기는 했는데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책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 중 놀랍게도 어떤 책은 친절하게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건만 나는 그 중요하다 판단된 구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을 ‘잊는’ 사람들은 아닐까 싶었다. 좋다고 남들한테 추천까지 한 책 중에도 그러한 비운의 책이 있었다. 책을 읽었다고 덮었다고 다 내 것이 되지는 않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섣불리 읽었다고 말해버린 책 중에 다시 두 번째로 정독한 책을 말하고 싶다. 소설 좋아하고 글쓰기 좋아하고 나같이 문학에 꿈을 둔 적이 있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안테나가 발동하여 사들이는 책.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쓰기 책은 사실 주관적인 경향이 짙은데 비평가나 일선 교수가 정리한 책은 체계적이면서 온도가 일정한 장점이 있다. 바로, 위대한 작가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글씨기 비법에 관한 책이다. 

 

 

   사실, 글 쓰는 입장에서 이런 책은 열심히 밑줄 칠 땐 절실하나 막상 덮고 나면 수많은 밑줄만큼 효과가 큰 책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에서 끝나고 연습이나 실천으로 이행되지는 않는 틀에 박힌 내용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론적 차원의 충고들이 현재 소설 좀 써보겠다고 바둥거리는 내게는 새삼 뼈가되고 살이 되는 느낌이다. 책이 어떤 사람에게 찾아와 실용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는 다 때가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보다는 지금 당장 글을 쓰고 있는 와중의 펜을 든 사람들에게 더 유효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작가는 모두 21명이며 그들의 장점이라고 소개된 구체적인 테크닉은 이미 문학적으로 성공이 입증된 장치들이다. 안다고 해서 모든 걸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한다 해서 결코 그들만큼 훌륭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런데 저자는 모방하고 모방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을 뛰어 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주장한다. 줄기차게 모방하다보면 어느덧 모범이 된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그렇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모방’이라는 테크닉에 관한 설명서이다. 독창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려면 모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비롯된 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들도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카프카도 남녀 간의 사랑묘사는 빈약했고 등장인물의 배경설명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샐린저같은 대작가도 어떤 부분 자신보다 뛰어난 카프카를 모방하고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지닌 천재적인 작가 앞에서 숱한 좌절을 느끼며 패배감을 맛보았다. 저자는 내 글이 독자의 귀에 음악처럼 들릴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고 끝까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잊어먹지 않기 위해 현재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분들과 요약노트를 나누는 심정으로, 기록차원에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책에선 작가별로 분류했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다시 소설의 구성요소로 나누어 보았다. 겹치는 내용이 많았고 내게는 누가 말했느냐 보다는 무엇을 말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누구라도 카프카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단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모방은 이런 것이다. 진정한 모방은 본보기로 삼은 작가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방은 당신과 당신이 모범으로 삼은 작가 사이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모범으로 삼은 작가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 183p

 

 

 

 

1. 문장

 

 

 

   맨 처음, 문장으로 치자면 발자크도 거지같은 문체였기에(그의 더듬거리는 문체를 견디지 못한 독자가 많았다고 한다) 매끄러운 문장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문장력이 유려하지 않아도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바꿔 말하면 문장력 좋다고 소설이 꼭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퍼뜩 생각나길 언어학을 공부하고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고종석과 오랜 기자출신의 김훈이 떠올랐다. 고종석은 ‘흠 잡을 데 없는 문장력을 지닌 스타일리스트’ 혹은 ‘가장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알려진 소설가이며 김훈은 서사보다는 문체 장악력이 뛰어난 우리시대 대표적 문장가이다. 이들이 아름다운 문장 통제력을 가진 작가라는 걸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들의 소설이 가장 재미나고 완벽한 소설이라는 데에는 주저하는 독자도 있을 터이다. 문장력이야 작가들의 필수적인 요건이지만 만약 문장에 자신이 없다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적확한 수식어구와 세밀한 감정묘사에 치중하라는 말. 그러다 보면 차츰 문장도 발전하리라는 뜻.

 

 


- 정확한 표현을 위해 주저하지 말고 길고 복잡한 문장을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라.

  (내 글은 길고도 긴 기차와 같다. 문장 끊기가 정말 어렵다.)

- 헤밍웨이는 쉼표와의 전쟁을 벌였다. 종속절이 지나치면 학문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빈번한 종속절을 사용하여 내 논리를 정당화하고자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 페이지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짧은 대화로 속도감을 유도하고 긴 문단 사이에 한 문단 씩 짧은 문단을 삽입하
  라.

  (헤밍웨이는 페이지가 꽉 막힌 듯 답답함을 싫어했다는)

- 많은 시를 읽고 직접 써보는 것이 훌륭한 문장가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소설이 막힐 때 시집을 읽는다고 하지...)

 

 

 

 

2. 소재

 

 

 

   톨스토이, 플로베르, 헤밍웨이, 조지오웰 등 수많은 거장들은 하나같이 실제 인물을 토대로 등장인물을 만들어 왔다는 주장이다.『모비딕』의 허먼 멜빌은 정말로 수년간 바다위에서 항해하면서 사색을 했고 선원생활을 했기 때문에 고래라는 상징적 자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첩보기관에서 일한 이언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저자는 주저 말고 자신의 추억을 최대한 이용하고 경험한 감정을 변형시켜 줄거리를 만들어 인물을 창조하라 말한다. 현실에서 겪었던 인간관계가 소설의 소재로 채택되고 자신의 경험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고서 상상만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대부분의 소설가가 인터뷰 할 때 특정 인물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다 소재가 된 해당 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이라고까지 증언한다. 소설가가 갑자기 친한 친구와 절교했다면 그건 그 친구의 이야기를 소설에 써먹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정). 어느 순간 ‘과거가 작가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그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다시 구성하고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허긴 사연이 없다면 아무도 작가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 현실의 두 인물을 하나로 합친 복합적 캐릭터는 소설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이건 한명만 들이 파면 미안하니까 즐겨 쓰는 방법이란다)

- 여성독자를 겨냥한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처럼)

- 독자를 파악하고 그들이 경험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공하라. 마가렛 미첼은 여성독자의 심리를 이용했다.
 
(드라마 작가들이 자주 이용하는 심리가 아닐까)

 


 

 

3. 주제

 

 

 

   주제는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더라도 본격적으로 써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소설이 있고 반대로 너무 주입식으로 강조하는 소설을 만날 때도 있다. (고구려 같은 소설은 너무 가르치려 드니까 어떤 부분 웃기는 것 같기도..) 또 세간에 알려진 주제와 내가 느끼는 주제가 틀릴 때도 있었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결론이 다른 소설이 더 의미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큰 주제 안에서의 다양성이 아니라 아예 큰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희망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은 줄거리가 단순해도 충분히 더 주제적(?)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바로 조지 오웰의 경우 서사의 복잡함보다는 단순한 스토리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 철학적 개념을 더 자세히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 주제는 구조의 결함을 고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주제를 뒷받침하거나 구현하는 사건이 있다면 최대한 활용하라.

- 주요 모티프와 주제, 상징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한다.

 

 

 

 

4. 서사 및 구성(내러티브)

 

 

 

   18, 19세기 소설가들의 소설 구성 방식이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마치 우리 때와는 다른 책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해도 결국 말하고 듣고 쓰고 읽어야 하는 문제인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하다. 이 책에서는 누구는 발음이 좋았고 누구는 독해가 좋았고 누구는 작문이 좋았다고 구분했다. 작가로 보자면 간결한 문체를 가진 최초의 거장 서머싯 몸 같은 작가도 있고 단어를 아끼고 압축된 글을 쓴 헤밍웨이도 있고 반대로 복잡하고 장황한 글의 포크너도 있다. 이들 중 누가 정답이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한들 어느 한가지의 답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들의 재능이나 매력은 곧 결함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치명적 단점이 그 작가의 개성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거장들은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무슨 공식처럼 그들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똑같이 나도 중요하리라는 법은 없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달린 로렌스도 똑같은 소재로 다섯 번 이상 다른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문제는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발전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정보를 꼭꼭 숨겨두는 미스터리 기법을 활용하라.

-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기대하는 데에서 나아가 근심하고 걱정하도록 만들어라. 위험에 처한 인물의 사건 
  해결이 고의적으로 지연되게 하라.

- 복수하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도록 독자에게 위험을 환기시키고 반복을 통해 불안을 지속시켜라.

- 연애와 사랑을 다루는 소설에서는 첫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 중요한 정보는 반복한다.

-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인물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통합적 기교는 서사를 풍부하게 한다.

- 전조를 소설 곳곳에 12개 정도 흘려 놓는다.
 
(12개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 생각보다 많다고 느낀다. 독자가 기억하는 건 모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일까...)

- 고요함과 격렬함의 교차, 빠른 행동과 느린 설명의 교차, 보폭의 변화로 완급을 조절하라.

-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광고하고 약속하라

- 뜻밖의 사건에는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개연성을 확보하라.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는 불친절한 소설이 많아졌다.)

- 만약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면 주인공의 로맨스로 보편성을 확보하라.

- 소설과 독자 간의 심리적 거리를 단계적으로 좁혀라. 명예롭던 캐릭터가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하락할 때 중간
  과정을 충분히 겪도록 하라.

 

 

 

 

5. 결말

 

 

 

   의심 없이 결말은 소설의 성패를 좌우한다. 어떤 소설을 기억할 때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 소설은 나중에도 결국 희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분명하게 기억되는 결말이 많지 않았다...) 흥미로왔던 건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의 절정과 결말을 정해놓지 않고 소설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등장인물의 망령’이라고도 하는데 흔히들 인물이 소설 속에서 발이 달린 말처럼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고 줄거리를 구성해 나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비록 처음이었지만 나 역시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결말이 결정지어졌기 때문에 이 역시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확실한 결말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것이 더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단편의 경우 더욱 결말을 결말짓는 작업이 힘들다는 생각이다. 결말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 할 사실 중에 독자는 결말에서 놀라움과 발견을 즐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야기 마지막 순간에는 대체로 관대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겉멋을 부린다든지 갑자기 시를 차용한다든지 해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 무엇보다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듬기 위해 작가가 사용해야 할 무기의 하나라는 것이다.

 

 


- 울림이 있는 결말은 주제를 반복하거나 다시 환기시킨다.

- 기분 좋은 울림을 주기 원한다면 ‘그러나’보다 ‘그리고’로 마무리 하는 게 낫다.

   (바꿔 생각하면 ‘그러나’는 비극이나 불쾌한 결말이 아닐까...)

- 결말에서 서로 다른 가치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느낀다.

- 앞선 이야기에서 미묘한 암시를 흘려 결말을 예고하라.

 

 

 

 

6. 인물

 

 

 

   책에선 어떤 작가건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든 부분을 이야기 할 때 인물이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인물은 소설의 핵심이고 작법에 있어 메인이다. 가장 예문과 구체적인 팁들이 많아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 등장인물에는 약점과 결함을 부여하여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도록 하라.

- 등장인물끼리 서로 궁금하도록 만들어라

- 지나치게 인물을 완벽하게 묘사하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척점 상에 놓인 상대적 인물을 그려라

- 등장인물이 자신의 세계에 눈을 뜨는 시점, ‘깨달음의 순간’이 일어나는 지점, 즉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에 정성을 들여라

- 등장인물의 정서적 상태를 드러낼 때에는 감정이 실린 언어를 사용하라.

- 특정인물에 대한 명쾌한 단정보다는 모호한 암시로 관심을 이끌어라.

- 반그림자 접근법이 제공하는 불확실성이 역설적으로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든다. 오해가 충격적 이해로 바뀌
  기 때문이다. 특히 악당은 불확실한 묘사로 더욱 악의가 강렬해진다.
- 단짝 캐릭터를 사용하면 중심인물이 한명 일 때보다 더 심리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비교와 대조를 통해 주제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

- 인물의 지배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하라

-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으로 인물을 밀어 넣고 그 결정이 인물의 인생을 바꿔놓도록 하라.

- 슈퍼 히어로, 괴물(악당), 남성 속에 자리잡은 여성성(amima), 조력자(helper)등 전형을 잘 사용하라.

 

 

 

 

7. 세부사항(묘사, 배경, 화법)

 

 

 

   작법에 있어 디테일한 원칙들은 작가의 취향과 작품의 성격과 관계한다.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며 제시했기 때문에 이해하기는 쉬웠으나 그 작품이 아닌 경우엔 예외적 상황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세부사항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 묘사 > 

 

- 장면전환의 대가는 도스토예프스끼이다. 한 인물의 마음에서 다른 인물의 마음으로 이동하면 장면전환을 입체
  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

- 장소의 빠른 전환과 더불어 정서적 요소를 추가하라.

- 강렬한 감정에 휘둘리는 인물의 외모와 심리상태를 극적으로 묘사하라.

- 등장인물에 매력적인 이름을 짓는다.

- 인물의 지배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하라

- 오감을 자극하고 쾌락을 상상하도록 하여 대리만족 하게 하라.

- 고급음식, 고급차, 고급술, 고급 옷을 자세하게 묘사하라.

- 사치스러움, 상류사회의 삶, 신체의 안락함과 관련된 세부묘사에 공을 들여라

- 인물의 외모를 묘사할 때 풍자를 섞어서 핵심만 짧게 묘사하라.

 

 

< 상징 및 배경 >

 

- 공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 문학적 색깔이 강화된다.

-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집, 먹는 음식으로 신분을 암시하라.

- 더 깊이 있는 소설을 구성하려면 이야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포크너는 입체적인 배경의 대가였다.

- 설득력 있는 소설의 배경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전쟁이나 사건 배경에 대한 느낌과 감상
  을 대화 속에 삽입하라.

-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시각적 생각을 발전시키라.

- 낯선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시작한다.

 

 

< 화법(관점) >

 

 

- 정신적 혼란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먼 과거, 가까운 과거, 현재의 시점을 섞어서 다중시간대를 서술하면 생각
  이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 주인공을 억압하는 의식의 흐름은 꿈을 통해서도 보여주어라

- 1인칭 화자의 경우엔 자신의 병약함을 인정하는 서술을 하라.

- 주인공과 멀고 객관적인 곳에서 가깝고 개인적인 곳으로 접근하라.

- 아무 이유 없이 농담을 하지 말고 진지한 유머로 웃음을 유발하라

- 등장인물의 머리와 마음속에 떠오를 법한 단어나 구절을 찾고 빌려서 말하라. 등장인물이 하는 말과 생각을 비
  롯해 마음속의 느낌까지 전달하는 자유간접화법을 구사하라.

- 수치, 분노, 불안, 추락, 동요, 모욕과 같은 주인공의 감정을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밖으로 꺼내어 보여라

- 인물의 마음속 의식의 흐름과 감정을 폭로하라.

- 주인공을 부드럽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을 고통스럽게 만들어라. 그 옆에 바짝 붙어서 고통을 낱낱이 
  파헤쳐 전달하라.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대부분 은둔하며 글을 썼다.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썼다. 포크너 같은 작가는 독자를 잊어버리고 오직 작가 자신을 위해 글을 썼을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오는 것이라 주장한다. 미리부터 독자의 반응이나 평가에 대한 걱정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주저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독자를 무시하는 작가도 있고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도 있다. 나는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게 될까... 내일은 처음으로 내가 쓴 소설을 평가 받는 날이다. (완성은 아니고 도입부 100매지만 이렇게 떨릴 수가...) 가능성과 용기만으로 글이 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비판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자 이런 책을 다시 펼쳐들고 악착같이 정리까지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뒤돌아 말하고 싶어 이렇게 다독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다시 시작하게 될 때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읽고 나면 더 야무진 마음이 생길지... 부디 포기만 하지 말기를 남몰래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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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2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오래 전에 읽으신 줄 아는데 리뷰는 이제 썼군요.
이책 나름 유익하고 재밌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다 읽지를 못했어요.ㅠ
좋긴한데 리뷰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리를 아주 잘 하셨습니다.^^

굿바이 2011-12-2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이 글 몇 번을 읽어도 신나서...늦었습니다 ㅜㅜ (저녁으로 약속을 옮겼어요)
소설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간 조금 읽어 본 한사람님의 글로 감히 짐작하면
미셀 트루니에,같은 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그저 느낌입니다 :) 싫어하는 작가라면 죄송해요~
그나저나 꼼꼼하게 정리하신 내용을 보면서
저 같은 사람은 포기하기 잘했다 싶습니다. 잘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 어찌나 즐거운지요 orz

2011-12-24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1-12-26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이 모범이 되는 그 두려움이라니요. 울림이 꽤 크네요. ㅠ
포기만 말자는 다짐이 한단계의 심사통과로 돌아와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잘은 몰라서 도대체 몇단계를 거쳐야 최종통과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축하드려요. 흐흐.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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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소설인가


   이 책이 끌렸던 이유는 무엇보다 내게 지금 당면한 문제에서 기인했다. 예전부터 나는 내가 가진 능력과는 상관없이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최근엔 만족스럽진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쓸 수는 있겠다는 생각까지 진도가 나아가긴 했다. ‘하고 싶다’에서 ‘할 수 있다’로 바뀌기 까지 근 이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막상 허접하기 짝이 없는 글을 어영부영 끝마치고 난 후 나는 도저히 내가 쓴 소설 비슷한(?) 글을 다시 읽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이제 그것을 ‘했다’고 말하기엔 얼굴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작정하고 내 글의 내러티브와 구성력, 문체, 인물 등을 면밀히 분석한다면 분명 당신 글은 형편없기 짝이 없군요, 이렇게 말하리라 의심치 않았지만 나는 내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또 (비겁하게도)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건 분명 있긴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잘못을 뒤로 하고는 또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멈추질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은 잘못을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정 오디션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된 듯 했다. 가끔 멘토나 심사위원들이 당신은 당신만의 습관이 너무 굳어진 것 같아 지금 내가 손대기엔 어려워 보인다거나 그동안 불러온 방법을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는 싸늘한 평을 목격할 때가 있었는데 곧 잘 노래는 하지만 가수로 키우긴 석연찮아 보이는 참가자의 모습을, 그만 발견하고 만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려고 발걸음을 떼는 내 모습, 정확히는 그러기 전 거울에 비친 내 참담한 얼굴에서.

 

   제대로 문학을 공부하지 않은 채로 열정과 의지만으로 도전을 해보겠다 생각하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날 내가 들추고 있던 책은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이었고 나는 솔직히 신경숙의 소설이 궁금해서 그 책을 읽어 보던 중은 아니었다. 일정기간 작가의 단편이 알토란하게 모였고 출판사에선 자기네 계간지에 게재된 단편을 앞세워 마치 7년 만에 대단한 소설집을 낸 것처럼 홍보하였지만 나는 소설집에서 몇 편은 이미 다른 책자에서 읽어본 글들이었고 그때 하필 젊은 작가들 틈 사이에서 신경숙의 단편은 그다지 신선하지 못했던 것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유명작가의 신작 소설집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또 관성대로 페이지를 넘겨가며 아무런 감동 없이 소설을 읽어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클릭하는 순간 저마다 예약된 감동에 계산대로 도착해야 한다는 계획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왜 이런 식으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연말에 무언가에 쫓기듯 신경숙을 안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이끌려 무엇을 느끼려 소설을 읽는 것인가. 어제도 그제도 읽었고 내일도 읽을 것이니까 오늘도 읽는다, 는 어처구니없는 변명 앞에서 나는 하루를 보냈다. 급기야 그렇다면 언젠가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오늘 읽고 있는 소설은 맞는 것일까, 왜 하필 많은 글 중에 그것이 소설이어야 하고 소설일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소설을 쓰시오란 말을 들은 적이 없고 그 누구도 내게 소설을 쓰면 좋겠다 말한 적이 없었고 나 또한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소설은 언제부터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언제부터 소설을 향하게 되었을까. 왜 소설만이 감동을 줄 것이라 믿게 되었을까. 아니 나는 왜 다른 무엇이 아닌 소설로 감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까. 이런 대책 없는 생각들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퍽이나 고마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글쎄, 오래전부터 나는 어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한권의 책은 그 시점의 몸과 정신에 당장 필요한 필수적 영양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근육에 단백질이 부족하면 고기가 끌리듯 나는 소설에 대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이 대체 우리네 인생에 무엇이며 나는 왜 내 인생에 하필 소설을 끌어 들였는지를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의 문학 비평교수가 쓴 소설론인데 이 편안하고 간명한 가르침 덕분에 나는 지난 일주일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흡사 소설을 명상하듯 이 글을 따라가며 나를 가라앉히고 나를 다독이며 스스로 답하면서 소설의 본연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누구보다 소설이 필요했던 것이고 소설 속에서 다시 내 인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결국 자기만족적인 서사에 빠져들 수 있었던 시간. 책보다는 사실 그 시간에 대한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 회상의 기록을 전하고자 한다.




2. 나는 누구로 말하는가

 

 

   먼저 이 책의 제목은『 How Fiction Works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며 (물음표가 없다) 'works'는 어떤 기계가 장치로서 작동하다는 뜻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책을 덮고 느낀 결론으로서의 'works'는 소설이 인간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여지껏 소설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어떤 긍정적인 도움을 주었나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논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소설의 구성요소(인물, 사건, 배경, 시점)들을 저자의 방식대로 구분하여 서술하기(Narrating), 세부사항(Detail), 작중인물(Character), 언어(Language), 진실·관습·리얼리즘(Truth·Convention·Realism) 등으로 나누어 논지를 펼쳤다. 이론이나 예시가 장황하지 않고 서론 없이 바로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며 저자가 언급했듯이 시점을 말하다가 인물로 들어가고 인물을 말하다가 세부사항을 정리하는 식으로 각장의 경계는 독립적이지는 않다. 프랑스, 영국과 미국의 많은 작가들이 예시로 등장하고 거의 내가 읽어보지 못한 소설을 인용하고 있지만 작가와 작품을 몰라도 상관이 없는 참으로 편안한 문체와 공감을 유도하려는 설득의 자세가 인상 깊었다.

 

   저자는 이 책이 소설을 섬세하게 읽는 입문서가 되길 바란다고 했는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지금 습작을 하고 있는 예비작가 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특히 내 경우 소설을 쓰려고 하니 제일먼저 화자와 주인공에 대한 시점처리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화법에 대한 불안감을 이 책을 통해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할까. 소설을 읽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입장에선 1인칭과 3인칭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넓고 넓은 시점의 바다에서 끝없이 방황하게 된다. 언젠가 소설가 김훈은 3인칭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최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도 ‘1인칭과 3인칭 사이에서 좌초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조바심 속에서’ 한 줄 한 줄 글을 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면 우선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운반할 3인칭 주어가 있어야 하고, 그 3인칭 주어의 실
   존을 
감당해 줄 만한 술어가 있어야 할 터 인데,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과 글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에게서 너로, 너에게서 그로, 그에게서 그들로, 그들로부터 다시 우리로, 단수명사에
   서 
복수명사로 넘어갈 수 있을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진땀 난다.”

    - 『소설가로 산다는 것』 김훈 / 강물이나 바람, 노을의 어휘 몇 개  中

 

 

    이 책에서 바로 김훈이 고백한 ‘3인칭 주어의 실존을 감당해 줄 만한’ 대상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플로베르와 체호프의 작품을 언급하며 마을공동체 혹은 마을 코러스로부터 전해지는 ‘(미식별) 자유간접화법’을 상세히 알려준다.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시점은 일인칭이 아닌 3인칭 관찰자 혹은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을 말하고 있고 작가들이 자유간접화법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정도를 소설의 발전과정이었다 평하고 있다. 결국 작가 자신의 언어와 작중인물의 언어, 그리고 세상의 언어 모두를 압축하여 그 삼중고를 극복해내는 화법으로서의 시점을 고난이도의 소설적 요소로 보는 것 같았다. (우주속의 신이라는 위치가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우주 속의 신과 같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하고 1852년의 어느 한 편지에 썼다. ‘예술은 제 2의 자연이므로 그 자연의 창조자는 유사한 절차에 따라 작업해야 한다. 숨겨진 가없는 피동성이 모든 원자, 모든 현상에서 느껴지게 하라. 바라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는 경이로움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게 어떻게 일어났을까!’      -p53

 

 

   저자는 <마담 보바리>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의 자서전적 소설『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이 ‘플라뇌르’의 선구자라 칭하며 화자로서 소설을 어떻게 작동시켰는지 말한다. 플라뇌르(flâneur)는 흔히 산책하는 사람(만보객)을 의미하는데 ‘대개 젊은 남성으로 크게 다급한 일 없이 거리를 걸으면서 보고 응시하고 생각에 잠기는 한가한 인물’을 말한다. 도시의 모든 것을 꿈꾸고 사람과 현상을 유유히 관찰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게 거리를 두는 도시 한량이 곧 본질적으로 작가의 대리자로 수행해왔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대체 내가 아닌 누가 어디서 어떤 위치에서 사람들을 말하여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플라뇌르가 모든 창의적인 시점의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나로선 참 반가운 산책자였다.

 

 

 

3. 나는 무엇으로 진실한가

 

 

   저자는 소설의 발전과정은 자유간접 화법의 발전과정이며 그 역사는 세부사항의 부상과정이라 말한다. 세부사항, 즉 서사에서 무심코 제시되는 디테일에서는 무의미한 것들의 의미심장함, 허구적 실재의 효과가 나타내는 진실을 보다 강조하였다. 소설 속에서는 논리와 무관한 것 같아도 실재적 온도를 높이기 위해 제시되는 기법들이 ‘무관함 또는 설명될 수 없음이라는 범주’에 엄연히 속하는 것으로서 무관하지 않은 것들과 같이 ‘삶속에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인위적인 거짓외연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리얼리즘의 기호들이 ‘지시적 환상(referential illusion)’에 불과하다는 바르뜨의 주장을 반론하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교수형」(A Hanging)을 예로 들며 사형수가 교수대로 걸어가는 길에 웅덩이를 비껴가는 모습을 그 반대의 근거로 제시한다. (실제로 오웰은 금방 죽을 목숨인 사형수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충격을 받고 생명의 소중함, 삶의 일상성을 깨닫는다) 오웰의 에세이를 한편의 소설이라 가장 한 후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하는 행위를 (바르뜨의 주장처럼)무관한 세부사항이라 보았을 때 허구에서는 실재 자체의 무관성이 바로 리얼리즘의 효과이며 ‘리얼리즘적’ 문체의 효과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치 생의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는 ‘핵심적인 인간적 진실’을 불현듯 포착하는 것이 훌륭한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이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을 이루는 모든 하찮은 거짓은 삶을 이루는 모든 거대한 진실만큼이나 진실하다는 충고로까지 느껴졌다.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것은 순전히 기억된 습관이다. 그렇다면 삶도 불가피한 잉여, 없어도 무방한 것으로 채워진 여백, 필요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하는 영역-더 많은 물건들, 더 많은 인상들, 더 많은 기억들, 더 많은 습관들, 더 많은 단어들,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불행을 포함하는 영역-을 항상 포함 할 것이다.  -p97

 

 

   저자는 문학은 우리가 삶을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며 우리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과 흡사하게 작동하는 소설은 우리가 보다 다양한 인간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운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책무는 ‘이것이 일어났을 법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늘 지어낸 것이고 모방인 것인데 그렇기에 삶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과 문학, 책은 모두 소설을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소설은 개인의 운명에 관심 갖게 만드는 예술형태‘라는 결론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소중하게 건져내어 가슴 한 구석에 담아 놓고 싶은 구절이었다. 비록 내 운명이 순탄치 않아 소설을 내 인생에 끌어 왔지만 내 소설에 담아낸 사람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영감을 주기를 바라는 기대. 내가 그랬듯 소설이 나를 포함한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혹은 그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 소설은 아직 운명지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운명이 아닐까, 감히 기다려 보는 것.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점이다...(중략)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p77

 

 

   저자는 소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후반부에 성공한 소설과 진정한 작가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저자는 인물의 평면성, 입체성에 대한 논의는 소설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라 생각하지 않아 보였다. 인물이 깊이가 없다거나 반대로 너무 복잡해서 소설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곧 작가가 자신이 탄생시킨 인물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통제하고 운영하는지의 능력과 관계한다. 이는 곧 인물이 평면적이어서 소설이 생동감 없는 것이 아니고(사실 깊게 들어가 보면 그 작품에서 평면적인 인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평면성도 인물의 입체화의 다른 말에 불과하지만) 작가가 평면적인 인물이나 혹은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에 대한 집요한 설득을 끝내 하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 그 부분에서 나는 극적인 캐릭터 없이도 감동적인 소설을 창조해내는 몇몇 작가들과 잔잔한 창법으로도 큰 울림을 선사하는 특정 가수를 떠올렸다.

 

 

소설이 실패하는 것은 작중 인물이 충분히 생생하거나 깊지 않을 때가 아니라, 문제의 소설이 자신의 관습에 어떻게 적응할지 독자에게 가르치는 데 실패했을 때, 작중인물들과 실재성의 수준에 대한 독자의 구체적 허기를 다루는데 실패했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p130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꾼은 신이며, 신이 운명의 대본을 쓴다.’는 전언은 저자가 생각하는 작가의 위치를 잘 말해준다. 소설은 철학적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옳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는 충고도 고마웠고 설득력 있는 불가능성은 설득력 없는 가능성보다 언제나 더 낫다는 명언도 감사했다. 책을 덮으며 소설은 삶에 대해 얼마나 진실해지려는 욕구를 가지고 모든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얼마나 정확하고 세심하게 볼 수 있는가에 따라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작가는 비록 관습적인 생각일지라도 대중이 알고 있는 관습이 작동하기 이전에 그것을 관습적이지 않게 통제하는 특별한 능력을 반복하여 개발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하여 누군가 이미 작동시킨 관습을 따라가지 않고 작가 스스로 최초 대중의 관습으로 자리해 누군가의 관습으로 작동되는 사람이 아닐까.

 

 

진정한 작가, 곧 삶을 자유롭게 섬기는 자는 삶이 마치 소설이 지금껏 포착해 낸 그 어떤 것으로도 포괄되지 않는 범주인 것처럼, 마치 삶 그 자체가 항상 관습적인 것으로 화하기 직전의 순간에 있는 것처럼 항상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다.  -p251

 

 

   이번 독서를 통해 다시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더 진실하기 위해 택한 것이 소설이고 소설은 그동안 나를 더욱 진실하도록 만들었기에 나 또한 소설을 통해 내가 아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 하찮은 진실 하나라도 꼭 전달해야겠다는 의지였다.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내가 포착한 것들, 내가 떠올리는 인물, 그밖에 무수한 허구들은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위대한 작가들도 어떤 대단한 결심이나 창대한 진리가 있어 작품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위대한 작가들도 위대해지기 전에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진실해지려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꼭 내가 지금 진실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소설을 쓰는 것이 자신을 더 진실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이 작동하는 곳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진실이 작동하는 그곳이 아닐까. 진심으로 진실을 작동시키는 소설가야 말로 문학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로 남는 것이 아닐까.

 

   간절히 진실해지고 싶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 불가능도 진실로 작동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설득할 수 있는 불가능은 설득하지 못한 가능성보다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 혹 나처럼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과 이 책이 전하는 진실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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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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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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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2-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해 전 소설을 아주 조금 공부했었어요.
[여명의 눈동자]를 쓰신 추리소설가 김성종 선생님이 꾸려가시는 추리문학관에서 말이죠.
물론 다른 소설가 분이 수업을 맡으셨는데 소설은 이러이러한 형식을 갖추어야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지라..형식을 의식하다 진짜 소설이 뭔지 제대로 한편도 써보지 못한채 그냥 끼적거리던
습작 두 편을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하고 말았어요.
아ㅡ, 소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생각하도록 저를 인도했다면 아마 소설을 써보겠다고
무작정 덤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네요,,ㅋㅋ
글을 읽다가 불현듯 그때가 떠오릅니다.
 
보수를 팝니다 - 대한민국 보수 몰락 시나리오
김용민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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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자


   무엇보다 이 책은 편안하다. '목사 아들 돼지'라는 그의 별명답게 친근함이 가장 큰 매력인 듯하다. 풍기는 인상과 종교적 배경, 교수, 시사평론가라는 직업 때문에 나는 당연히 연배가 나보다 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그는 주진우 기자보다 아래였다.(는 점에서 충격^^, 신선^^) 그는 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도 젊은 책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혹시나 강준만, 유시민 처럼 보수에 대해 이론과 사회,학문적인 접근이 많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저자가 공부는 충분히 했으나 독자에게 일일이 주입시키지 않고 눈높이를 맞추어 나름의 소신대로 논리를 끝까지 유지한 점이 신선했다. 무엇보다 이 책으로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더 중요시 하는 자세가 물씬 느껴져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최근 나꼼수 주자들의 저서는 책의 컨텐츠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소통의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느껴진다. 제발 좀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 우리 의견에 동감 해 달라, 같이 이야기 하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같이 하자, 다 같이 일어나면 이룰 수 있다... 그래서 한층 더 익숙한 공감을 유도했다고 본다. 나 역시 거의 앉은 자리에서 이 책을 완독하며 차근히 보수(保守)에 대한 보수(補修)를 보충할 수 있었다. 하여 책 덮고 서재에 모셔만 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나꼼수’ 여의도 콘서트에서 정치인의 성대모사를 작렬하신 덕에 좀 힘들어 한다는 소식도 접했고 또 하나 이 책을 처음 접한 내 지인들의 반응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도 아쉬웠다.(힘을 좀 내셨으면 해서 ㅠ)


   나는 사실(리뷰에서 여러 번 밝혔지만) 김용민처럼 어린 시절부터 조선일보를 완독하면서 자라나 잘 길러진 온실 속의 화초군단에 속하는 보수였다. 저자는 보수를 모태보수, 기회주의 형 보수, 무지몽매 형 보수, 자본가형 보수로 구분 짓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 지역형 보수를 추가하고 싶다. 내 경우는 다른 무엇보다 부산, 경남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보수의 특징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각 보수의 유형들 중 한 가지 이상 섞여 있는 복합형 보수도 즐비하다고 부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아버진 부자였고 어머니 주변엔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맹모삼천지교에 의해 일류대학까지는 나와 어엿한 기업에 입사한 사람들. 그래서 부모님의 재산을 기반삼아 출발선에서부터 강남의 아파트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비교적 운빨 좋았던 내 친구들...처럼.


   살면서 명예퇴직이나 사업실패, 혹은 권고사직 같은 불이익을 전혀 당해보지 않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삶의 뿌리가 된 중산층에서의 이탈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특별히 나약하고 돈만 중요시해서 라기보다는 삶에 이렇다 할 굴곡이 없었기에 좌절이나 실패에 대한 저항력이 길러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김용민도 두 번의 직장에서의 강제적인 이탈로 인해 보수의 실체를 파악할 기회를 가졌듯이 예정대로 승진하고 예상대로 집값이 오르는 세월이 반복되다보면 세상의 모든 문제에 외려 너그럽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엔 하나같이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무슨 불온서적으로 취급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하지만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SNS 야권인사들은 모두 종북 좌파이며 괴담을 선동하는 우리 사회 불순세력이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트위터를 하느냐 안 하느냐도 이제 보수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정도이다. 보수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게 무엇인지는 자신들도 잘 모르지만)가치를 위협하는 소스가 될 만한 것들은 아예 보거나 듣지도 않으려 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책 좀 읽어보시오, 하는 것은 괜한 논쟁만 유발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 <닥치고 정치>때 나는 그런 비슷한 상황을 겪었었고 그 책 재미있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너도 이런 책을 읽느냐는 식의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 무슨 신종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물질을 쳐다보듯 하던 그들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소모적인 설전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ㅠ) 그런데, 이 책 <보수를 팝니다>는 아예 접근도 하지 않으려 하던 자세에서 진일보해 뭐, 보수?, 하면서 목차를 흥미롭게 살펴보더라는 것이다. 특히 교회관련 부분에 유독 관심을 보이면서 그 부분이라도 펼쳐서 들쳐보고 앉아서 읽어보더라는 것이다. 가져가!, 저자 사인본이니까 돌려보지 말고 꼭 돌려주고. 됐어. 나중에. 하하하. 안 빌려 간다가 아니라, 지금은 말고 나중에 필요하면 보겠다고는 하더라는 것이다. 진보를 사세요가 아니라 보수를 판다는 전략은 일차적으론 성공적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 조현오 성대모사는 완전 수준급이야.”
   “나두 나꼼수를 두 번 인가 들어봤는데 나는 김어준하고 그 깔때기가 싫어. 모두 위선이야. 그렇게 정의로우면 김진숙처럼
   왜 크레인에 안 올라가는데? 앉아서 입으로만 떠드는 것들이 제일 싫다.”
   “저마다 자기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저항 하는 것이지. 그런 말도 쫄아서 못하잖아.”
   “생긴 것도 싫어. 자기가 무슨 히피나 스타일리스트냐.”
   “김용민도 거기 앉아 있잖아. 이 사람 책도 많아.”
   “그래? 아... 그 에어콘과 경쟁한다는 사람이 이 작자야? 점잖게 생겨가지고 목사 아버지가 가만 두시나?”
   “책에 아버지는 존경한다고 써 있어. 자기 아버진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하하, 괜찮은 *이네. 원래 아버지가 목사면 더 위선에 밝은 법이지. 싸가지 있는 * 일세.“
   ”핵심을 흐리지 않으면서, 너무 이론 주입하지도 않고, 또 천박하지도 않아. 자기 경험도 많고. 내용은 진보인데 말하는 방
   식은 보수야. 김어준이 내 타입이면 김용민은 당신 타입, 히히.“

   - 40대 보수 남성과의 대화 中



   김용민은 ‘나꼼수’ 진행자들 중 자신이 비교적 외부의 공격을 덜 받는 편이라고 한 바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배경엔 아무래도 (정치인이 아니면서)목사 아버지, 교수, 방송국 PD출신, 중후한 평론가 이미지들이 더해져 형성된 보수적 아우라가 한 몫을 한 것은 아닐까. 내 주변의 보수들과 이야기를 해보아도 김용민은 그들 중 가장 덜 씹히는 인물이면서(본인 주장으로는 말을 적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확실한 존재감으로 보수층에 가장 은밀한 호감을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김어준의 급진성과 정봉주의 공격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보수라면 김용민의 탈급진, 비공격성에 더 뚜렷이 반응하지 않을까. 위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용민은 너무 튀지 않으면서 보수에 소구하기 적절한 외모를 지녔다. 그래서인지 진보를 주장하지 않고 보수를 주장하는 이 책은 그의 가정 환경적 반전과 외모적 역설과 잘 어우러져 무지몽매형의 보수를 공략하기 참 적절한 책이라는 결론이다. 주변에 별다른 변절의 기회가 없어 그대로 보수를 유지하고 있는 지인들이 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소시민적 보수들에게 다름 아닌 보수의 종말을 나지막이 전도하는 유용한 복음서가 되어 줄 것이다.


선명한 보수는 쫄지 않아


   지난 12월 1일 마침내 종편 채널이 개국을 했다. 어제 오늘 종편 개국과 함께 가장 눈에 띠던 인물은 바로 공지영도 김연아도 아닌 박근혜였다. 종편이 동시에 박근혜를 띠우기로 담합을 했는지 박근혜가 종편을 적극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근혜는 공중파가 아닌 종편을 통해서 꽤 오랜 시간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마치 안철수가 통 큰 기부를 결정하고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에 화답이라도 한다는 듯이. 어짜피 모태보수인 박근혜의 등판이 어쩌면 종편 개국과 잘 짜 맞추어진 듯한 뉘앙스까지 물씬 풍기면서. 이 책에서도 그나마 보수의 마지막 도덕성이나 원칙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부류는 모태보수정도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박근혜는 이참에 자기야 말로 우리 시대 보수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가장 적임자로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보다 사회근본적인(?) 가치를 지켜나가겠다고 천명하는 듯하다. 나는 이명박, 오세훈 같은 기회주의형 보수와 선천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다르다며 안철수처럼 하나의 현상이 아닌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인물(인간)이라고 재차 선포하는 느낌이 들었다. 현상은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람은 인간으로 보여 지는 것이다, 정치는 내가 인간임을 증명하고 나를 인간되게 하는 긍극의 꿈이다...


   김어준에 의하면 박근혜에게 국가는 아버지 유산이며 정치는 효도이자 제사라 말한다. 박근혜는 최근 어느 대학의 강연에서 학생들이 사랑을 해보았냐는 질문에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간이냐는 답을 했는데, 나는 이 답은 거의 김어준을 향한 답이라 생각한다. 김어준은 박근혜가 도무지 생활인, 자연인으로서 구체적이고도 인간적인 경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통찰할 기회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생활인으로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삶의 균형 감각이 없는 인물이고 자기 삶에서 사실상 인간이 빠진 채로 공주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바로 그러한 우리 같은 인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에 예의를 갖추며 애정을 쏟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박근혜는 나도 어엿한 당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며 화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김어준은 연애를 해봐야 자기 밑바닥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공주인 것은 맞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첩’이라는 수식의 연장선상에서 남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기억한다는 하나의 닉네임이므로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고까지 웃어넘기는 포용의 자세를 과시하기까지 한다. 소개팅에서 안철수를 만났더라면 인상이 좋아서 잘 나갔다 생각했을 것이고 비키니 사진이 공개된 것도 몸매가 따라주기 때문이라며 정치인으로서의 여성의 한계를 외려 생활인으로서의 인간적 장점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박근혜가 갑자기 김어준의 책에 반응을 보이기 위해 그러한 준비된 답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20대에 폭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어준을 의식하지 않고서 그에 대한 분석이나 결과하나 없이 20대와 소통하자고 마음을 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박근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꿈, 인간의 삶, 인간의 행복을 언급하며 자신이 인간 속에 있는 다 같은 인간임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의하면 박근혜는 모태보수의 정점에 위치한 인물이다. 새삼스레 박근혜의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바로 누가 뭐래도 꿈쩍 않는 자기 소신에 대한 확신과 흉내 낼 수 없는 비감의 아우라였다. 나는 종편 개국 날 TV 조선의 ‘최·박의 시사토크 판’을 시청했다. 진행자로 나선 조선일보 문화부 박은주 부장은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끄덕이던 조선일보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은 기대대로 서론도 없이 바로 직구로 들어가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상당히 직접적이고 예리한 질문에 잘도 회피하며 핵심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럴싸한 논리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초반부터 던져진 안철수에 대한 껄끄러운 질문에는 그런 것에 정치 공학적으로 연연하면 나의 꿈을 이룰 수가 없다거나 대북정책이 김대중 쪽이냐 이명박 쪽이냐에 대한 질문에는 강할 땐 더 강하게 유연할 땐 더 유연하게 균형을 잡겠다는 진부하면서도 퍽이나 박근혜 다운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누구하나 틀렸다 하지 않고 모두를 수용하겠다는 태도는 모태보수 특유의 자신감으로 더욱 강조되어 보였달까. 언뜻 보았을 때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닌 양극단을 두루 살핀 후 모두를 감싸 안는 중용이 생각날 정도였다. 자유와 평등의 가운데가 아닌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두루 포섭하여 자유와 평등을 뛰어넘는 그 무엇.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을 읽었는데 상당부분 해설에는 오늘날 미국에 대한 종속을 우선가치로 여기는 보수적인 정치인과 상층계급에 속하는 기독교편향의 지식인들 들으라고 하는 쓴 소리가 많았다고 기억한다. 박근혜가 공교롭게도 꼭 내가 읽는 책들만 같이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선명보수 전략은 오세훈, 이명박의 꼼수형 보수와는 차별화된 응집의 시발점이 될 듯하다. 특히, 안 그래도 연일 괴담으로 젊은이를 선동하고 있다며 SNS 야권인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보수 언론에 길들여진 무지몽매형 보수들은 박근혜의 이런 태도에 상당부분 안정감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웃는 자가 이긴다지


   이 책은 감히 그러한 무지몽매형 보수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한 교신서의 역할을 해 줄 것으로 믿는다. 아니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가장 기억에 남은 부분은 아무래도 교회관련 비리를 단순 고발차원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일반적인 성찰의 수준으로 제시했다는 점이고 공부안하는 보수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충고도 뇌리에 남는다. 내가 봐도 보수는 정말 책도 안 읽고 같은 사건에 대해 아는 심도와 수준도 그야말로 수준이하다.(다른 것으로 수준을 과시하면 되기 때문에) 뚜렷한 자기 논리는 없으면서 조선일보 헤드라인만 보고 좌파를 싸잡아 욕하는 습관을 길러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좌파성향의 책들을 관심 없다는 척을 하며 속으로는 두려워한다. <닥치고 정치>까지는 애써 무시했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그들을 이성적으로 충분히 유혹할 만한 책이다.


   또 하나, 김어준이 쫄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면 김용민은 웃을 수 있어야 이긴다고 설파한다. 어느 때보다 정치상황이 심각하다고 같이 심각하게 머리 터질 것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하게 싸우자는 그의 논리가 나는 참 좋았다. 웃자고 정치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모두 웃자고, 웃는 세상을 만들자고 정치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날아오는 폭력과 억압에 분노하고 저항하더라도 공포에 떨지는 말자고 외려 씨익 웃어주자고 독려하는 패기가 어느 혁명에 동참하라는 투사보다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서로 웃는 얼굴을 보며 그 에너지로 내일을 기다리자 다짐하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 때 선관위 홈페이지가 디도스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해 김어준이 누군가 젊은 층의 투표율을 끌어 내리려고 계획한 짓이라 말했을 때 보수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괴담과 음모로 우리사회 분열을 조장한다고 떠들어 대었다. 이제 올해의 문학상에 추정소설 분야를 신설하고 추정과 사실이 일치하는 기준에 의해 그 1회 수상자는 당당히 김어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나꼼수를 없애는 단 한가지 방법은 바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언론을 장악하지 않으면 된다는 이외수 작가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점점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나꼼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또 나꼼수의 분석과 추정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면 반드시 관련 수사가 진행되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적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이렇게 빨리 정치, 사회적으로 조사및 수사가 진행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결과를 눈을 뜨고 주시하고 있는 경우를 겪어 본적도 없다. 일년 전과 같은 뉴스, 괴담논문을 작성중인 신문, 아이돌 기사뿐인 포털과는 다르게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김용민 교수, 정봉주 전의원, 주진우 기자 모두가 이런 폭발적인 관심으로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부디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보수들은 제발 책 좀 읽고 공부를 좀 하길 바란다. 보수는 자존심은 뭣같이 세기 때문에 자기들이 뭘 모른다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이 있다. 처음엔 같이 욕하는 척 하는 것이다. 뭐, 좀 더 아는 우리가 그들을 계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나처럼 대화가 되지 않아서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면 조심스레, 이 책을 권하는 바이다. 김용민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하하.
 


- 지난 11.30 나꼼수 여의도 공연 포스터 / 강풀 -


   성경책을 든 '돼지'와 '먼지뭉치' 그리고 깔대기와 '누나‘ 품에 안긴 남자, 이들의 방송이 이제 거뜬히 두 시간이 넘어가기 때문에 편집하는 입장에서도 고충이 상당할듯하다. 오늘도 나꼼수 녹음 끝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선관위 건 때문인지 재녹음 들어갔다는 소식에 접었던 일정 하나(리뷰쓰기 ㅋ)를 부활시켰다. 체력이 딸려 여의도 같은 공연에 나가진 못하지만 오늘도 나는 그들을 기다린다. 김용민이 책에서 남긴 명언 중에 하나를 옮겨본다. 돼지입장이어서 그런 것인지 이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참으로 절실해 보였음이다. 우리모두는 굶어 죽을 보수를 그 어느때보다도 명징하게 예상할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보수는 정치무관심을 먹고 산다. 그런데 이제 보수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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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느낌이에요. (물론 이것은 알량한 착각이겠지만 ㅎㅎ)
정치에 관련된 서적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른 집어들어야겠네요!

비로그인 2011-12-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딱히 보수한테 공부하라고 하지 않아도 정권은 바뀔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득권층이 바뀌는거죠.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세요. ^^ 거기에 나꼼수가 기여한 바가 큰 듯하구요. 대학생들의 투표참여도가 한참 바뀔듯합니다.

꽃도둑 2011-12-0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도 나꼼수 폐인? 아님 말기 중독자?..ㅋㅋ
저는요 두번 반복해서 보고 듣고 하는 거 재미없어 하는데..
나꼼수는 mp3에 저장해 놓고 틈틈이 반복청취 중입니다. 이정도면?....ㅎㅎ
4인방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즐겁습니다. 너무 선명하고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죠.
30회 듣다가 웃다가 눈물까지 찔금찔금짰어요. 나꼼수가 민주언론상은 받았고 이제 공로상도
줘야 할 거 같은데... 혐오하고(?) 냉소하던 정치를 끌어안게 만들었으니 말이죠..
뭐 보수 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 사람들이 정치를 공부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없다고 생각돼요.
나꼼수도 고맙고,,,^^ 리뷰도 근사하게 쓰신 한사람님도 고맙고,,,^^
 
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 그녀를 말하다


...그녀, 지우기 힘든


   지난 10여 년간 보수논객으로 단단히 굳어진 이미지 때문에 시대와 스스로 불화하며 폐허의 시간을 보낸 이문열의 정치적이지 않은 소설.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을 여주인공의 모델로 삼아 문화적 정체성과 예술가의 고민을 진지하게 교차시킨 이야기. 1980~90년대의 이문열을 사랑했던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권하고 싶은 작품이라는 어느 기자의 한줄 서평. 이 세 가지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책을 덮은 느낌을 음악적 비유로 한마디로 부연하자면 전에 없이 목소리에 힘을 뺀 이승철의 새로운 발라드쯤으로 덧붙이고 싶다. 이문열의 소설을 이렇게 빨리 읽어도 될까 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에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쩐지 이제부턴 겨울이어도 좋겠다는 생각. 스산한 가을을 떠나보내기에 참 적절한 선택이었다.

   작가가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볼까 생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업무 차 동행했던 외지에서 그녀의 추억담을 전해들은 시점이라고 한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 대통령은 네 명이 바뀐 세월이다. 그사이 작가는 더욱 낭만적이 되었고 그녀는 너무나 유명해저 버렸다. 외려 그 시절과는 반대로 작가는 오랫동안 문학적 투쟁을 중단하는 것으로 그녀는 소설적 인물이 아닌 생생한 현실의 무대에 더 화려하게 노출되었다고 할까. 그는 18년간 이렇게 변화한 상황을 의식한 듯 자신의 작품이 ‘마치 냄비처럼 달아오르는 우리 시대의 호오감정에 편승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주 싫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이 책의 출간소식을 접한 그 시점에 하필 박칼린이 어느 토크쇼에 출연한 것을 보면 두 분의 인연도 서로의 의지를 너머서는 운명적(?) 관계는 아닐까, 하고 나름 추상적인 의미를 더하고 싶어진다. 작년 이맘때인가 작가들의 여행기를 담은 프로에(sbs '감성여행 내 안의 쉼표') 그가 출연해 자신의 고향인 영양, 안동을 방문하며 음식과 고향집을 공개하고 산과, 마을을 둘러보던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 이웃집 할아버지 같이 한결 푸근해진 인상과 털털한 웃음, 사투리로 던지던 농담어린 말씀이 나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 짠해지는 것이었다. 모든 작가의 흘러간 세월이란 필연적으로 깊어지는 회한이 아닐까. 저분이 과연 누구보다 현학적인 지식과 관념론적인 수사를 날카롭게 펼치던 한 시대의 거장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는 많이도 둥글어지고 어떤 부분 결연을 너머 초연해져 있었다. 하여 개인적으로 모든 걸 웃음으로 받아 넘기던 작가의 일년 전 얼굴과 최근 토크쇼에서 많은 이야기를 토로한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겹쳐지던 건 어쩔 수 없는 연상효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읊조릴 때 앞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작가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자격’ 출연으로 많은 사랑을 얻었지만 잃은 것도 많았으며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는 고백을 했다. 자신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며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후배가 아닌 선배들의 시기와 질시를 받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마지막에 예술적 재능 및 실력과 상관없이 항상 자신의 국적이 거론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도 했다. 그 프로를 보면서 내가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도시락으로 직접 싸온 반찬들이었는데 고향이 부산인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면서 반갑기 그지없어 저 사람은 정말 한국적으로 살았구나(!)를 비로소(?) 인정했다고 할까. 나조차도 그녀가 사투리를 쓰면서 부산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던 반찬이 그리웠다며 이 맛이 고향의 맛이요 삶의 치료 회복제라 감탄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더욱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이 조용하게 그리고 뭉클하게 이해되었다. 작가는 ‘실존 인물을 여주인공 모델로 삼았을 뿐 소설에 나오는 사건과 갈등구조는 100% 허구’라고 강조하며 나처럼 소설을 현실로 오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실존 인물의 에피소드를 빌려 왔을 뿐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당부를 자꾸 떠올리는 것 자체가 이미 실존인물과 극중 인물을 더 할 수없이 비교하게 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잊자고 애쓰다 보니 더 그리워지는 꼴이었다.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이미 소설의 소재가 된 주인공이 실존인물이고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끝에 가서는 무한대로 퍼져나가던 감동이나 나만의 성찰의 기회를 사정없이 차단해버리더라는 것. 이문열의 작품 치고서는 놀라울만한 가독력을 보여준 작품이었고 만만찮은 작가의 인문학적 통찰력을 과시하며 대중들에게 중첩된 시각으로서 ‘예술의 정체성’이라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칼린만 아니었더라면, 박칼린만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훨씬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 때문에 시발이 되어 그녀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외려 그녀가 방해되는 이 역설을 조금 죄송스러울 정도로 나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이 소설이 그녀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녀, 상간(相姦)의 인연


   소설은 한 연극연출가가 혼자 아파트로 이사와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하는 사진 몇 장으로부터 시작한다. 남자는 그 사진을 설명하던 혜련, 혹은 헬렌 킴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그녀와 헤어진 지 십년이나 되었지만 삼십년 세월너머 '금발의 제니'로 기억되는 그녀를 기꺼이 좇아가는 계기가 된다. 나는 소설의 시작도 마치 한 연극이나 뮤지컬의 서막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린 시절 같은 고향인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대학을 가고 지방 소극단을 운영하고 서울로 입성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하는 이 십여 년의 세월동안 남자는 우연과 필연에 의해 혜련과 조우와 재회를 반복한다. 이 작품을 고향이웃이면서 음악적 선배인 남자와 혜련의 사랑과 예술에 관한 서사라고 본다면 두 사람은 이어질듯 끊어질듯 삶의 어느 한 시기 연속적으로 스치기만 하는 안타까운 인연이자 결실이 맺어지지 않은 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만남을 약속하거나 그렇다고 헤어짐을 다짐한 것도 아닌 사이. 그러나 늘 자기 인생의 사랑과 예술을 떠올릴 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거울처럼 의심없이 반사되는 한사람. 아마 이 소설의 속편이 나온다면 반드시 두 사람은 재회할 것이라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에 변화가 생기진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또 반드시 헤어질 것이므로) 이런 관계는 소설적으로도 상당한 서글픔을 안겨주는 모티브가 되었다.

   혜련은 몽골리안 음악교수와, 연출가는 극단 여배우와 각각 결혼을 하고 서로 비슷한 이유로 파경을 맞으며 홀로이 예술을 실천해가는 아티스트로 성공을 이루어 간다. 두 사람의 시간의 흐름 속에 구체화되는 서사의 줄기는 크게 예술가로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창조하기 위해 고민하고 결론을 정리하는 과정과 부산사투리를 쓰면서 금발의 제니의 외모를 지닌 혜련의 다국적 정체성의 고민이 다각도로 전개되는 과정, 두 가지이다. 그런데 혼혈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당사자 혜련 보다 언제나 관찰자인 남자가 더 깊게 파고 드는 쪽이므로 결국 두 고민 다 작가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혜련의 급작스런 부상과 어이없는 몰락의 과정에서 얼마간 작가의 지난날 상처까지 투사되는 느낌인데 어떤 부분 연출가나 음악가 모두 한사람의 예술가인 작가의 분신으로 느껴졌다. 연출가의 질문과 혜련의 대답을 통해서 결국은 작가가 이 시대 대중들에게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을 천명한 것이라 여겨진다. 보편적이지만 이문열다운 방식이란 생각이다.


“이번 소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고민하는 예술가에 관한 소설이다. 일종의 유미적 주제랄까. 그런 이야기를 여주인공을 내세워 길고 처연하게 하려다 보니 가벼운 사랑의 모티프를 집어넣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 2011. 11.19)




...그녀, 머리칼을 휘날리며


   언젠가 ‘무릎팍 도사’에서 박칼린은 자신의 고향은 부산이고 자신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한국 사람 이어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국적은 미국이지만) 극중 혜련의 외할아버지는 미국도 한국도 아닌 리투아니아의 몰락한 봉건 영주였다. 1940년대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병합될 당시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소련에 끌려간 이후 둘째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해 정착했다. 둘째 딸은 대학에서 각국의 민속음악을 공부하던 중 축제 때 ‘아리랑’을 부른 것을 계기로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한국의 남성과 결혼을 한다. 아리랑을 불렀던 그 둘째 딸이 한국 남성과 만나 낳은 딸, 그녀가 바로 혜련이었다. 책에서도 혜련은 한국과 미국, 리투아니아를 오가며 때로는 도피, 때로는 여행, 때로는 공부의 목적으로 특별한 디아스포라(유민·流民)적 삶을 살게 된다. 작가는 작중 연극연출가의 목소리를 빌어 혜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모들의 기구 만장한 사연을 역사적 지식과 함께 뭉근히 펼쳐 보이고 시대적 운명을 짊어진 그들의 아픔에 인간적인 공감을 유도한다. 식민지와 분단의 상처를 지닌 우리에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겪은 전쟁과 이산의 역사가 전혀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지며 하루아침에 이산가족이 되어 서로의 생사를 모르는 채 각자 타지에서 굴곡진 인생을 마감한 그들이 어쩐지 친척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미국에 데리고 가지 못한 나머지 두딸, 혜련 이모들의 사연은 소설속의 또 하나의 소설이기에 충분했다.

   연출가는 혜련이 들려주는 가족사에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뿌리 깊게도 가족 같은 공감을 느끼면서도 세계의 식단이나 주거, 의상에 관한 그녀의 다문화적 소양을 접할 땐 문화적 다양성에 의문을 가지며 은근한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혼혈 예술인이나 유명인을 대 할때 드러나는 우리네 이중적 시각인 것이다. 작가는 가지처럼 뻗어 나갈 수 있는 문화적 다양성과 근본이 되는 민족적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연출가를 보편타당한 우리 대중의 대표 격으로 상정한 듯 했다. 연출가는 ‘네게는 기본이 되는 음식문화가 없느냐’며 ‘아버지의 것이든 어머니의 것이든 아니면 그 절충이든 지역이나 혈통과 관련된 어떤 기본문화’가 없는 지를 질문하고 독자로 하여금 궁극에 궁금했던 바를 대신 물어 보도록 짐을 지운다. 그에 대한 혜련의 답변은 마치 준비된 자의 반론이 불가능한 자기변호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음의 글에서 나는 작가 이문열의 (생각보다)보수적이지 않은 문화적 관점이 쉽게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 글쎄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제 기본 식성이 한식이냐, 미국식이냐, 또는 리투아니아식이냐를 묻는 것이면 조금은 당황스럽네요. 전 음식문화라면 먹을 것 일반을 두고 변형 발전해온 우리 식생활의 보편성 같은 것만 생각했지, 저만의 기본 문화가 있는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요. 재료부터 그래요. 그게 어느 지역 어떤 족속의 것이든 주재료와 부재료 그리고 향신료의 구분이 있을 뿐이지, 어떤 재료가 내 기본문화와 가깝고 먼지, 또 내가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합치되는지, 그런 것을 따져 본 적은 없어요. 의식주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럴지도 모르죠. 내게 있어 의식주의 문화란 이미 알고 있던 것과 새로 보태지는 것이 있을 뿐이지, 그것들이 원래 내 것인 어떤 것과 특별히 절충되거나 종합효과를 드러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더해 가는 것, 내 다양한 선택 앞에 널려있는 어떤 것들일 뿐이죠.”   - 216p

 
   


   연출가는 이를 '중첩'과 '병렬'이라 표현 했고 혜련의 말에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의는 하지 않는 것으로 문제를 덮는 것으로 보였다. 소설 후반부에 혜련은 더욱 작가의 분신처럼 ‘정체성이란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개념이고,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아가기 위해서 가다듬어 보는 자기 파악의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나의 조국은 음악이고 내 동족은 내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며 ‘거기서는 생물학적인 정체성이나 혈통의 조국처럼 인종과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더 이상 예술 분야에서 한 사람의 혈통이나 국적, 정체성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작가의 시각이며 피와 땅에 바탕 하는 정체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곧 민족주의에 함몰된 배타적인 시각으로서의 섣부른 편견을 나아가서는 진보나 보수에 얽매인 편 가르기 식의 가치논쟁을 질타하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작가는 결말부에 그녀를 통해 투사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로 ‘가축들과 함께 거칠고 낯선 땅을, 멀리 여러 겹 세상의 끝을, 그래도 흥에 겨워 떠돌고 있길 바라는 ‘유목민 악사’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유목민적인 자유로움은 ‘리투아니아의 바닷가에서 그 모래빛깔을 닮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 있는 그녀의 스산한 뒷모습’과 같다는 쓸쓸함으로 결론지으며 결국 예술가 된 자신의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듯했다.


2. 그를 말하다


...그는, 고민 한다


   또 하나 혜련과 상관없이 이 소설에서 돋보였던 것은 연출자가 혼자서 자신과 독대하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연출가인 화자는 자신이 공연해야 할 작품으로 <벚꽃동산>같은 체호프의 문학작품을 상당부분 언급하며 자신과의 내면적 인연을 톺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작품의 완전한 이해와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 그리고 연출의 성과는 그대로 자기 예술의 발전을 의미하고 작가의 문화적 지식이 더해져 어느 부분 소설이 고급스럽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연출가가 작품소재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작품은 분단 전 한국의 대표적 좌파시인 임화의 시,<너 어느 곳에 있느냐>였다.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연출가와 혜련, 그의 후배가 한데 모여서 창작 뮤지컬의 아이디어로 계획하는 실마리를 제공한 시로써 혜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이모들이 헤어지게 된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작품이었다. 시의 제목은 어쩐지 혜련에게 던져지는 궁극의 질문이라는 생각. 그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깨달음. 소설 속에서 혜련의 이모님들의 사연과 더불어 식민지의 딸과 혁명가의 딸을 결합한 창작 뮤지컬 <너 어느 곳에 있느냐> 역시 또 한편의 흥미로운 서사였다고 본다. 북한에서 처형된 아버지 임화와 아버지와 헤어진 임화의 딸 혜란, 미쳐서 막내딸을 업고 평양을 헤매는 혜란의 계모 지하련,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혜란이 북한방문에서 아버지와 지하련의 소식을 듣고는 실어증에 걸린다는 비극의 뮤지컬은 자연스레 월북한 작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가슴 저린 이야기였다.

   그리고 연극과 상관없는 논리적 독백에서 나는 작가의 뚜렷한 관념적 세계를 엿본 듯한 기쁨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고독이나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그것이다.


   
 


고독은 공간을 인식수단으로 삼는 추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밀도와 관련이 깊은 어떤 물질이다. 그것은 우주 속 물질 백에 아흔 아홉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암흑물질처럼 볼 수 없거나 느끼지 못할 때도 끊임없이 우리 삶에 중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고독을 느낄 때를 우리가 공간과 관련된 갈망이나 결핍의 감정에 빠져 있을 때라고 단정한다. 곧 혼자라는 느낌 또는 다른 존재들로부터의 단절이나 소외감에 빠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독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물질의 그것처럼 고독의 중력도 항시적이고 불변이다. 우리가 감지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도 고독의 중력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짓누른다. ”  -97p

 
   


   연출가는 ‘눈앞으로 바짝 다가든 마흔이란 나이가 무의식의 바닥 가까이 밀려나 있던 고독의 중력을 느닷없이 절감케 하고 가중하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고독의 중력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늘 불변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단순한 깨달음과 소름끼치게 일치한다는 생각에서 흠칫 숨이 멎을듯한 느낌이었다. 그런가 하면 뻔하고 진부한 시간의 덧없음에 대한 판단은 이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로울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시간의 파괴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할 수 없을뿐더러, 어쩌다 벌어지는 부질없는 저항은 오히려 웃음거리나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체념한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운명을 허무라 이름 하여 슬퍼하고 한탄해왔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염세와 비관의 노래는 대개가 그런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속절없는 표현이다."    -111p

“모든 변화는 그때껏 진행된 파괴과정의 한 단락이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보는 일이 언제나 우리에게 쓸쓸함을 자아내는 것은 그때까지의 변화 속에 스며있는 사멸과 종말의 예감이다. 오랜 세월 뒤에, 한때 머물렀던 땅 또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찾는 일은 시간의 파괴력을 확인하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 ‘살이’의 부질없음이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곱씹는 일이기도 하다.”    -112p

 
   

   이문열의 소설을 읽는 재미란 이렇듯 서사와 별도로 단순한 속세의 진리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문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지적인 쾌감은 아닐까. 나는 이런 문체와 문장에 좀 과도하게 반응하는 독자인지라 통으로 몇구절을 외우고 싶었음이다.


...그는, 충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서사속에서 지난 10년 동안 상처받은 작가의 흉터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나는 작가가 자신의 상처를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는 의지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세상과 시비를 시작한 이후 문학적 감수성과 언어 감각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 작품이 구상의 시점과는 달리 많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하다고 고백한다. 작품 말미에 혜련은 하루아침에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마찬가지의 아침에 대중을 기만한 예술가로 낙인찍힌다. 혜련은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늘 소신있는 음악적 행보를 멈추지 않아왔지만 대중은 자기들 식으로 그녀를 영웅시했다가 어이없는 일로 갑자기 죄인시하기 시작한다. 대중은 과연 그녀의 예술적 자산인 그녀가 하는 음악이 좋아서 그녀를 좋아한 것이었을까. 책속에서 당사자인 혜련은 그에 대해 침묵하지만 그 모든 부상과 추락을 지켜본 연출가는 혜련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여러 번 하고 있다. 이때 대중들의 속성을 정확하게 짚어주며 논리를 설파하는 연출가는 단연 작가 이문열의 준엄한 목소리로 들렸다. 20여 년 전 부산 동네 한구석에서 사소한 시비로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혜련의 모습은 바로 대중에게 외면 받던 작가의 모습과 중첩되며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말씀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알 것 같아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그 부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혜련을 위해 두려워 한 것은 바로 그런 분별없는 대중의 호오와 종잡을 수 없는 그 변덕이었다. 그들의 대중적 성감대와 맞아 떨어질 때에는 눈부신 아이콘으로 추어올려 그 갈채와 박수에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 주파수가 바뀌고 교신이 끝나면서 예고도 없이 추어올리던 손길을 거두어 버린다. 그리고 패대기쳐지듯 바닥에 떨어지면 호의에서 깨어나 더 표독스러워진 악의로 그 추락한 아이콘을 짓밟아 버린다. 나는 그런 대중의 속성, 특히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정에서 더욱 증폭되고 제어하기 어려워진 집단 악의에 소름이 끼쳤다.”    -243p

“몰려와 헹가래 치는 것도 눈 깜짝할 사이지만, 솟아오른 사람 받쳐주지도 않고 돌아서는 것 또한 이 시대의 분별없는 대중이다.”    -245p

 
   


   연출가는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달은 보지 않고 그 손가락 끝만 빤히 쳐다보다가, 손톱에 낀 때나 찾아내어 “손이나 잘 씻고 다니쇼.”라고 빈정거려 놓고 잘난 듯 사방을 돌아보며 헤헤거리는 부류가 이 시대 마녀재판을 유도하는 사팔뜨기 지식인이라 판단한다. 글쎄, 나는 이 부분이 바로 자신을 열렬히 비난해 대던 진보논객들과 페미니스트 들이 아닐까 여겨진다. 어떤 드라마 작가는 어제, 운명적 사랑은 없다지만 사랑의 운명은 있다고 말했던가.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운명적 소설은 없지만 소설의 운명은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이 소설이 부디 작가에게 유목민 적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회복하는 극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데올로기나 가치적 편협함에 따라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성취가 재단되는 것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여인인 혜련이 그랬듯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문학적 소비자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의 작가.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문학을 이루시기 간절히 바란다. ’리투아니아‘가 작가에게 영원한 예술의 우주라면 ’여인‘은 그 우주를 유영하는 유목민인 것이다. 나는 그가 무한한 예술의 우주에서 어떤 작가보다 자유롭게 자신을 발견하고 그래서 대중을 자석처럼 이끄는 아름다운 난민이 되어주길 바란다.



3. 나를 말하다 
 

   한나절, 말하여야 할까, 를 고민했다.


   우리는 이 좁은 땅 덩어리에서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일지라도 생활 속에서 사회 속에서 자주 ‘정체성의 불협화음’을 느끼곤 한다. 극중 혜련은 외모는 서구적이지만 생활방식은 전통방식으로 한국적이며 학업과 직업에선 미국적인 다국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거창하게 국적을 논하지 않더라도 내 경우엔 글을 쓰는 입장과 남의 글을 읽는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통감한다. 나는 이문열이 비판한 변덕스런 일반 대중의 영역에 당연히 포함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글을 쓸 땐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자세가 되가고 있음을 아프게 주시한다. 최근 들어 내 스스로가 책을 읽었다고 리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책은 거의 한 달만 에 이 책이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이 내 어린 마음을 위무해주고 내 두려운 마음 한 구석을 이겨낼 수 있게 한 점에 대해 감사의 글은 남기고 싶었다. 어떤 집단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추방하는 것과 같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작가도 치열한 내적 추방의 시간을 견뎌내왔을 것이라 믿는다.  

   우연한 혜련이 도왔고 필연의 작가가 나를 구출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운명은 내게 운명적 소설이 되는 것이었나 싶기도 하다. 살면서 이렇듯 어떤 소설은 운명같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가을밤은 시인의 그것과는 달리 그다지 촉촉하지는 않은 것 같다. 리투아니아의 여인처럼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십자가의 언덕에 올라선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 잘은 모르지만 혜련도 이문열도 그 비슷한 마음으로 고통스런 창작을 지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그맣지만 모든 예술인들에게 이 사무치는 마음을 전해드린다. 그들을 경원한다. 그를 축원한다. 그리고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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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0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때마다 감탄, 또 감탄하고 갑니다..
책한권으로 이런 멋진 리뷰를 쓰시다니요 ㅠ

저도 리투아니아 여인 흥미있게 조사햇는데..
책은 아직 못봤어요. 곧 사서 읽어야겠지 말이에요.

2011-12-01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12-0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중심의 소설이라 술술 넘어 간다고 해서
생각할게 뭐 있겠나 싶었는데 역시 같은 이야기 중심이라고 해도
이문열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한사람님 리뷰 때문에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아, 언제 읽을까나...ㅠ

2011-12-0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2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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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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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직설 '편'한 침묵


   나는 말로써 직설(直說)을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직설은 문자 그대로 바른대로 있는 그대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체의 의도대로 바르게 전달되기가 힘든 것도 직설이다. 직설은 컨텐츠의 스탠스에 따라 양질의 충고 혹은 경고일 수도 유익한 비판이나 비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선 대개 모질고 상처를 주는 독설이 될 경우가 많다. 세간에 성행하는 오디션 프로의 심사위원을 보더라도 돌려서 말하지 않고 대놓고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 그들을 독설의 대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상대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칼은 명중률이 높고 의도와는 별도로 상채기를 남기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입장에선 예고도 없이 공격에 노출된 상황에서 직설을 날린 주체에 동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화법이 단점을 고치고 더 발전해야 하는 경우라면 고맙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상처 자체는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직설은 사후관리가 더 큰 몫을 차지한다. 말 못지 않게 글도 뼈아픈 상처가 될 때가 있는데 차라리 말은 얼굴 보며 털어버릴 기회라도 있지만 글로 새긴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숙한 곳에 저장되기만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말보다 글이 더 편해졌다. 누군가와 싸울 때도 나는 글 쓰듯이 똑같이 말을 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 습관이 언제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여간해선 잘 고쳐지질 않는다. 같은 에너지라면 말보다 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분명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문장 자체도 단문을 선호하지 않고 일관된 만연체 스타일에 되도록 종합적인 결론을 지향하는 성향이므로 이 또한 직설적인 과에 속하진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난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는 직설의 능력자들이 많이도 부러웠다. 길게 늘여서 말하라는 건 하겠는데 요약해서 핵심만 말하라 하면 멈칫거리게 된다. 그래서 난 언제나 소설쓰는 작가보다 시쓰는 시인이 부럽고 대단하다 여겨왔다.

   직설을 우리말로 바꾸면 아마도 바른 말을 하는데 거침이 없다는 뜻의 ‘입바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입바른 소리도 에둘러 말하는 편에 속하는데 경험상 입바른 소리야 말로 직설로 접근해야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콕 집어 예를 들지 않으면 입바른 소리의 대상이 광범위해지기 때문에 엉뚱한 오해를 살 확률이 발생한다. 여기서 일부러 특정 사건과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려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려는 건 전형적인 정치적 행보이다. 정치라는 것이 꼭 정치인이 행해야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같은 일반 대중도 얼마든지 이곳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기 이미지를 자기 뜻대로 다스려 운영하고들 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나는 입바른 소리에 해당하는 직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입바른 소리를 시도하는 귀찮음이 간혹 야기되는 오해를 설명하는 귀찮음과 동일시 되면서 자연 편하고 눈질끈 감는 쪽을 선호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이 들어 깨닫게 되는 건 바로 입바른 소리는 그 의도만큼 썩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의 진부한 위선도 지향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위선과 직설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경우 대개 사람들은 그 사안에 대해 침묵을 택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듯 직설의 반대는 돌려막는 곡설이 아니라 침묵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책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자주 대항하는 나같은 대중들이 읽어야 할 책인 듯하다. 침묵을 미덕으로 활용하는 위선자들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될 듯하다. 책의 부제도 ‘한국사회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라 되어 있듯이 그동안 위선을 용인해오고 또 스스로 위선을 경쟁력으로 삼아온 사람들이 해가 넘어가기 전에 꼭 들쳐보아야 할 책이라 할 수도 있겠다. 최근에 이런 식의 직설화법은 ‘나꼼수’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트렌드로까지 읽혀지고 있다. 이른바 개념구라, 구라작가, 구라MC의 테두리에 이 책의 문법도 어엿하게 한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인터뷰에서 서해성 작가는 ‘직설이 문자로 나눈 꼼수였다면, 꼼수는 말로 하는 직설’이라 한 바 있다. 방법이 틀릴 뿐 이들이 말하는 방향은 한 곳이다. 나꼼수가 가카 헌정방송이라면 직설은 MB시대 헌정문학. 다른 게 있다면 나꼼수는 팩트를 모아 추정소설을 말로 연재하는 것이고 직설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 전공 분야를 가지고 MB를 향해 눈치 안보고 떠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멍석 깔아주면 발목이 오그라 들 것이므로 한홍구와 서해성이 적당한 추임새로 용기를 부추기는 형국인 것이다. 무려 이 책에서 만나본 사람은 故 리영희 선생을 비롯해 사십 여명이 되는데 실컷 떠들었던 말들을 글로는 다 옮겨 적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성토한 직설들은 대단한 논픽션 소재로 흠잡을 데가 없다고 본다. 어딜 봐도 도통 불편했던 건 아무래도 MB 정권이라는 지극히 우울한 소재를 미션으로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놈현’과 ‘노무현’의 차이


   이 책은 무엇보다 생각처럼 쉽지도 편하지도 않은 책이다. 혹자들은 직설(直說)이라 하니 속이 시원하거나 그런대로 할 말은 했겠지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책에 호기심을 가지는 독자들은 김어준에 준하는 직설화법을 기대하며 정곡을 찌르는 정치비평을 기대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른바 MB 시대의 직설이라 함은 다른 누가 아닌 MB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돌려서 말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실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목적만큼 고속도로의 직선도로를 달리진 않으며 결론만 강조하는 단순한 문법을 취하진 않았다. A를 말하는데 있어 B,C,D를 찬찬히 둘러보며 A이전과 A이후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쪽이므로 대화전개 방식 역시 직렬보단 병렬이 더 가깝다. 인터뷰가 오가는 방식에서도 얼굴보고 직접 만나서 서로 증상을 진단하며 환부를 확인하다보니 다른 설명없이도 이 통한스런 현실을 더 강렬하게 공감하는 결과를 야기하며 직설보다 직감(直感)적이라 할 수 있다. ‘직설’에선 어쩐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뉘앙스를 부인할 수 없는데 이 책은 문법적으로도 비교나 은유의 탁월한 수사가 매력적인 색다른 비평집이다. 그러니 직구보단 변화구, 직접보단 간접, 직선보단 곡선, 직행보단 완행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직설>은 직설적이긴 하나 결코 직설만은 아니다. 직설을 표방한 곡진한 해설이라 해야 맞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책이 결국 누구를 향한 무엇을 향한 직설이었는지를 생각했다. 과연 삿대질하는 방향에 위치한 그들만을 향한 쓴소리인지 고민해 보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서해성 작가는 2010년 6월 11일 『한겨례』에 게재된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DJ 유훈정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기사에서 바로 ‘놈현’과 ‘관 장사’라는 표현의 강렬한 직설을 사용한 주인공이다. 노무현을 ‘놈현’이라 말하고 유산계승을 ‘관 장사’로 빗댄 그 기사 때문에 유시민은 23년간 구독해온 한겨례를 절독하겠다고 선언했고 한겨례는 며칠 뒤 신문 1면 아래 편집국장 명의로 절절한 사과문을 싣기도 했다. 당시 ‘관장사’ 직설은 시작한지 몇 회 되지 않는 초반 개념 정립단계였다. 시청률로선 대박을 쳤지만 솔직한 토론이라는 최초 신선한 목적은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국민적 비난을 넘지 못했다. 한겨례측은 신문에서 정리하고 편집할 때 노골적 표현을 거르지 못하고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전달한 것을 자신들의 불찰로 인정했다.(하지만 서해성 작가도 그렇게 생각할까?) 유시민은 이 사과를 보고 트위터를 통해 절교선언을 취소하는 해프닝도 보여주었다. 확인해보니 이 책에선 당시 천정배 의원과의 인터뷰를 실으며 ‘놈현’이 표시된 문장을 ‘노무현’으로 정정해 옮겨 놓았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크게 인지하고 그 문장을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맥상에서 ‘노무현’이 ‘놈현’으로 표시되어 있었어도 ‘놈현’을 ‘노무현’의 구어체식 단순 줄임말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난 노빠가 아니기 때문에 ‘노무현’과 ‘놈현’의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구어체를 발음 그대로 실어야 직설이 된다는 원칙에 동감하는 수준이었을 터이다.


   
 
서해성 | 선거 기간 중 국참당 포함한 친노 인사들이 써 붙인 “노무현처럼 일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어요. 이명박이 가진 폭압성을 폭로하는데 ‘노무현’(기사에선 ‘놈현’)이 유효하겠지만, 이제 관 장사는 그만둬야 해요. 참여당 실패는 관 장사밖에 안 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뛰어넘는 비전과 힘을 보여주지 못한 거예요.
-396p
 
   


   앞뒤 문맥상 여기서 중요한건 ‘놈현’이 아니고 ‘관 장사’하지 말라는 메시지인데 유시민은 틀림없이 ‘놈현’ 부분에서 목에 걸려 울컥한 것이렸다. ‘관 장사’만으로도 썩 기분 좋을 단어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이때 ‘놈현’이라는 구어체는 ‘관 장사’라는 풍유법을 더 굴욕적으로 몰고 가는 폭풍의 혀로 작용했다. 이렇듯 구어체로 표현된 직설의 한계는 어쩔수 없이 ‘노무현’과 ‘놈현’의 차이에서 싹트는 불쾌감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자칫 애티튜드만으로 메시지를 넘어설 수 있다는 근본적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맞지만 기분은 드럽다는 것이 직설의 핸디캡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애티튜드 또한 메시지의 일환이라 줄기차게 주장하는 김어준이 반사적으로 겹쳐질 수밖에 없었다. 김어준은 구걸하지도 않고 덕 볼 생각도 안 할 테니 변함없이 쫄지 말고 기죽지 말자는 충고를 한다. 무례함이나 상식, 보편적 정서 따위로 직설화법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다면 내 이야길 듣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리곤 말한다. 그쪽은 훨씬 가진 것도 많고 떠들 곳도 많으니 이 조그만 곳과 그곳에서 오가는 말장난을 막지만 말아달라고. 떠들고 킬킬거리는 그곳에선 사실 <직설>에서의 지적질의 몇 배에 해당하는 욕설이 오가지만 매체의 특성상 아무도(한사람만 제외하고 ㅋ) 방식을 문제 삼진 않는다. 그런데 김어준도 같은 내용을 책이라는 매체로 전환할 땐 확실히 문어체의 화법을 지향하며 꽤 지적인 수사를 연출했다. 이 책이 안타까웠던 건 바로 인터뷰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형식의 매력이 지면으로 똑같이 옮겨졌을 때 그 열의가 반감되는 듯한 차감효과였다. 다른 무엇의 점잖은 대담이 아니라 직설로 오가던 불꽃같은 애드리브와 통쾌한 구라문학의 포스가 종이로 박제되면서 직설의 본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 각계 분투의 직설을 모두 모아 놓았더니 그만 핵심역량(?)이 떨어져 보인다는 느낌. 그래서 직통으로 환부를 관통했다는 짜릿함은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 ‘놈현’과 ‘노무현’이 글자로 등장한다면 말로 했을 땐 있지도 않거나 중요치 않았던 새로운 역학이 증거로 발생한다는 왜곡의 염려. 그것이었다.


'펜대' 꼬나 잡고 '주둥이' 제대로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본질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MB 시대의 당당한 구라문학으로 흔치 않는 의미성을 획득하였다. 그 일등공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놈현 관 장사 사태’를 ‘한겨례 사과사건’으로 몰고 간 서해성이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눈에 띄던 주연아닌 주연. 질문으로 답하는 의도적 인터뷰어. 서해성과 한홍구는 약 사십 여명의 게스트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지며 게스트의 답과는 별도로 스스로도 해답을 찾아 현상과 사건을 정리하는 지적인 사회자들이었다. 이 책의 핵심은 바로 게스트의 답변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힌트와 참조할 자료들을 기자식으로 시시각각 제공해주던 그들의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통찰력이었다.(이 책을 덮고 서해성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보았지만 그 흔한 소설집 하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ㅠ)  한명의 인터뷰가 끝나면 ‘잔설’이라는 해설과 논평이 이어지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인데 나는 서해성의 ‘20년 만에 쓰는 부검입회보고서’를 읽고는 그만 다리가 풀려 버렸다. 서해성은 광주를 생각하면 아직도 ‘총을 든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라 말한다. 그렇다고 지금 총을 들 순 없으니 ‘펜대 꼬나 잡고 주둥이 제대로 놀리는 것으로’ 내 할 일을 시작하자 다짐한다. 적어도 그때 총든 분들의 마음은 간직하자 호소한다. 감히 비슷한 심정이라 입에 올리기 조차 미안하지만 같은 시절 데모하다 경찰의 방망이에 맞아 죽은 나와 꼭 같은 나이의 꽃다운 청춘을 떠올리는 기분이었다고 고백 할까. 기껏해야 시국을 비판하고 MB 정권에 삿대질 하는 책이나 읽어야 그들을 향한 부채감을 간신히 기억해내는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지금 서해성이 적나라하게 칼질하는 그들 죽음의 부검 현장은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 자문하게 만들었다. 왜 그들은 죽었고 우리는 살았는지. 만약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그래서인지 전쟁 때 또래들 절반이 사라진 통에 ‘자신의 실재는 다른 사람들의 부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고은 시인의 넋두리가 가장 울림이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은 시인은 누적된 역사 속에서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건 바로 요절한 시인들의 결핍을 메우라는 명령이라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고등학생은 입시 때문에 죽고 대학생은 등록금 때문에 죽고 노동자는 해고당했다며 죽어버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 후 2년 동안 열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살을 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러한 사회적 비극을 기껏해야 ‘나꼼수’를 통해서야 뒤늦게 알게 된 무심한 사람이었다. 이 책에는 인터뷰를 통해 홍대 청소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직설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여름 강남 물난리때 침수된 대치동 은마아파트 지하실에서 감전사한 어느 아주머니가 떠올랐고 최근에 아주머니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수 없다는 주민들의 기사도 겹쳐졌다. 우리는 과연 학원비 빠듯하다 앓는 소리 하는 같은 아파트 주민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은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살아보지 못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말한다. 장애인과 같이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뜨끔했다. 이명박을 분단 모순의 집적, 냉전의 찌꺼기로 규정한 백기완 선생은 죽어서도 억울하면 벌떡 일어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저항심을 ‘안간’이라 말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이 책에선 유난히도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나 유명인보다 이렇게 그 질긴 세월을 모질게 겪고 나이 들어 이렇게 꾸지람 하는 것도 자신이 마지막이라는 분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정치인들은 의외로 돌려 말하거나 묻는 것만 말하거나 민감한 사안은 회피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성공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정두언 의원이나 역사는 회의론자가 아닌 확신범이 바꾸는 것이라는 정동영 의원, 아침마다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며 그분이 남겨주신 ‘국민 생각이 뭔지 알아봐라. 원칙 버리지 마라.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라’ 이 세 가지를 생각한다는 박지원 의원 정도가 인상깊었다. FTA를 통상의 문제뿐 아니라 외교 전략의 문제이자 민주주의문제, 공공성의 문제로 같이 인식해야 한다는 이해영 교수의 견해도 좋은 말씀이었다. 각자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이 걸어온 세월을 평가하고 현재 고난의 시점에서 문제점을 직시하며 모두가 함께 잘되는 앞으로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것은 저들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별 탈 없이 만인이 자연사하는 사회가 민주사회라는 서해성 작가의 자조적 독백은 다시금 우리가 같은 시대, 같은 나라를 살고 있는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도 인간인 이상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생동안 다른 사람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채 삶을 이어나가서는 안될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도 얻게 된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우리 시대 모든 죽어진 삶에 우리는 어떤 빚을 갚아야 할까. 그들의 결핍을 메우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할 일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골의사 박경철이나 안철수 원장, 박원순 후보, 오세훈 친족이라는 나경원 후보까지도 하나같이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 그 소외된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생존권을 언급한다.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도 그 궁색한 살림에 죽는 날까지 기부를 하다가 가셨다. 나는 다시한번 이 책은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직설이었는지 생각한다. 삿대질 하는 방향의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이 어디였는지 가만히 응시해 본다.

   새삼 한국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다 한 글자라는 서해성의 유머가 따스하다.


   밥, 몸, 일, 집,


   그리고 .


   무엇보다 .


   그러나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부터의 안간힘을 다해 다시 희망을 찾고 싶은 우리 모두의 .


   그  으로 빚어질 공동체의 .


   그 으로 탄생할 새로운 .


   <직설>은 아주 작은 단위의 빛으로 조각조각 쪼개어진 우리 모두의 간절한 '끈' 이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이 중요한 시점에 그 끈 하나로 이어져 마음이 하나되는 기특한 '책' 이었음 좋겠다.

   부디 당신의 펜대와 주둥이를 믿는다. 당신도 나처럼 이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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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을 붙잡고 있는데, 이상하게 진도가 잘 안나가요. 어쩌면 그런 것이 내용보다도,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이 리뷰를 읽으면서 해봅니다. '나꼼수'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나꼼수 방송을 사실 제가 잘 못듣겠더라구요..(사실 한 번 시도해보았는데, 방송을 30분 듣다가 왠지 더 듣기가 싫어져서 그만두었습니다..가카님의 멋진 재테크, 인테크 기술들을 좀 더 배워야 하는데..하하;)

보물선 2011-11-0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중요한 건 한글자라는. 콕 박힌다.

가연 2011-10-2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검입회보고서를 보고 참 마음이... 그나저나 서해성 작가가 소설가로서 별다른 책이 없다는 것을 보고 사실 좀 놀라고 말았지요ㅎ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단 한 권의 책으로 여러 상들을 휩쓸고 난 후에 절필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든 소설가..같은 느낌을 주었달까ㅎㅎ 좀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