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문학 강연에서

왜 사는지를 묻는 것 보다는 왜 죽지 않는지를 물어 보는 게 빠르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이 거꾸로 방식이 답하기 간단치 않은 거의 모든 류의 질문에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왜 같이 사느냐 보다 왜 헤어지지 않느냐에 딩동~

왜 결혼을 하느냐 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에 딩동~

왜 애를 낳느냐보다 왜 애를 낳지 않느냐

왜 다니느냐보다 왜 그만두지 않냐...

 

생각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사소하다.

아주 작은 부정은 아무리 큰 긍정도 품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이 놈의 집구석 청소할 사람이 없어서 죽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시대 엄니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의 희생과 역할에 대한 필요성이 곧 그들의 삶이자 목숨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감지하곤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왜 사셨을까... 아니 왜 죽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죽네 안죽네 사네 못사네 따위 입 밖으로 낼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연휴동안 책 몇 권을 들척거렸다. 집중해서 각 잡고 정독한 것이 아니므로 그야말로 성의없이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가 정확할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모컨보다 책장에 더 신경이 쓰여 꽤 무거운 시간들을 보내었다. 안 그래도 늘 이맘때면-연초부터 꽃피기 전까지-심리적 상중이라-내 아버지는 1월에 어머니는 3월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2월에 굳이 웃으며 룰루 거리기 귀찮아 어차피 오지 않은 봄, 춘삼월까지 꽃피기 기다렸다가 꽃잎이 떨어지려할 무렵부터 마음을 바꾼다.-경건하고 엄숙한 멘탈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근 십년 이상 아버지에 대해 깊고도 넓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결론은 아버지 살아생전에도 나는 아버지에 대해 무언가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기억으로 마무리 되었다. 보다 확실한 증거로 나는 아버지에 대해 한 줄도 정확히 쓸 수 있는 정보가 몇 개 없었다. 창피하게도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 초본에 적혀있는 열 몇 줄 객관적 사실만큼도 모르는 자식이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나 극적인 스토리도 들었는지 버렸는지 결코 문장으로 엮을 만큼이 되지 않았다.

 

201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읽으면서 급작스레 소환된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새삼스러웠고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나도 살면서 한번은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꽤 낯설은 욕심을 보았을 뿐, 나는 아버지에 대해 단 한글자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왜 사는지, 즉 왜 죽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차이는 그 대상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상대를 알려고 하는 목적은 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 그러니까 그의 행복에 기여하고 싶은 내 욕심을 의미할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아버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미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싶어 했다.

 

 

여자가 대학생 때였고 현대시의 이해인지 감상인지 하는 제목의 교양수업시간이었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던 젊은 강사가 여자에게 어떤 영시를 낭독하게 했다. 가스오븐에 머리를 들이밀어 자살했다는 한 여자 시인의 작품이었다. ......(중략)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는 비밀로 할 테니.” (중략)

 

여자가 끝내 내뱉지 못한 구절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중략)

 

그리고 문제의 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37p

 

 

돌아보면 아버지가 남은 생을 강렬히 열망했을 시절, 나는 그가 어서 생을 마감해주길 바랬다. 그의 삶이 끝나야 비로소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될 것처럼.

 

1910년에 태어나 울분과 절망의 세월 동안 소설가로 살다 가셨다는 김훈의 아버지. 1948년생으로서 내 아버지뻘 되는 김훈 작가의 아버지가 새삼 가여워져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는 예전에 읽었던 글들도 있었고, 어떤 내용일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아무생각없이 책장을 넘겼다 할 것이다.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36p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37p

 

아버지의 관이 떠내려 갈 때 나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작심했다. 내 아버지가 조국이라는 운명을 저주했듯이 나는 내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너무나 슬퍼서 조국을 버리고 싶었다던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의 글을 읽으면 지금도 나는 목맨다. -46p

 

 

김훈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있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만 쌓여’ 있다고 했다. 그가 실패를 거듭하는 까닭은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의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내 아버지가 어떤 시대 어느 정권 아래에서 정확히 어떤 일로 밥을 먹고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꿈이 무엇이었으며 무슨 일로 좌절과 절망을 겪었는지도 아는 바가 없다. 그의 국적과 나의 국적이 같고 심지어는 적어도 삼십년 정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고 서류상으로도 확인되고 있건만, 사실이 그렇다.

 

우리라는 ‘보편적’ 국민과 ‘개별적’ 개인의 삶에서 우리는 과연 아버지라는 '불가학적' 역사를 부정하고 망각해도 되는 일일까. 아니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보다 더 아니 최소한 아버지 만큼은 아니게 살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시대 아버지의 많고도 다양한 울분과 절망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을 감당하려 했던 건 아닐까.

 

연휴 내내 책장을 들추고 이책 저책 집었다 놓았다를 하면서 우리의 아버지들을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려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할지 모르고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내 무지와 무심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

 

아버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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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1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2-11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김훈님의 아버지를 향한 저 표현 `온 몸을 갈았다`가 잊혀지지 않아요. 우리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될 어떤 미래가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맨몸으로 갈았던 그 시대보다 나아질 지..

[그장소] 2016-02-1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 ㅡ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