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내일이면 이십년이네요.
세월의 힘은 이런 걸까요.
언제나 숫자를 말하고 나면 갑자기,
웃으면서 눈물이 나죠.
그제서야 시간의 단위를 통과해 무언가 쌓아왔음을, 아니
무언갈 버려왔음을 깨닫는 순간이니까요.
기억나나요.
1991년 7월 19일.
휴가를 먼저 다녀오는 편이 좋겠다고 한건 형이었어요.
형이 내 사수였으니 쫄병도 휴가를 보내라 한 것도 형이였죠.
그때 나는 남아서 형의 자릴 지키려했습니다.
형이 쓴 육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형이 앉던 자리에 엉덩이를 겹쳐가며
형의 의자에 내 등을 슬며시 기대고 싶었었죠.
나는 형이 쉬러간다는 면도날을 그 시간으로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게,
옳은 것이잖아요?
우린 옳지 않았었고 그래서
연대할 수 있었어요.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어린 나도
그쯤은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내가 몰랐던 건
살면서 그런 기억은 그 사람의 일생을 평생 못 견디게 하는 시간이거나
혹은
그걸 견디게 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는 거여요.
인생이, 그렇잖아요?
못 견딘다 죽겠다 하면서 실은 그 때문에 산다는거.
그때 나는,
형이 사는 동안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요
아마도 형은,
그 믿음 때문에 나를 떠날 수, 아니
떠나지 않고도 헤어질 수, 아니
헤어지지도 않고도 안 만날 수, 아니
안 만나고도 잊지 않을 수...
어쩌면 이렇게 같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니 우린,
지난 이십 년간 한 번도 헤어진 적은 없는거지요.
그렇게 믿고들 사는 것이죠.
그래서 연락도,
만남도 필요없는 것이죠.
그러나 가끔은 나도
형이 한 남자의 육체로서,
회색빛 감성의 실체로서
오늘을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여름이고 휴가가 시작되는 오늘 같은 날.
그때 우리가 2호선 무슨 역에서 헤어졌었나요.
다음 내리실 역이 오른쪽이었나요, 왼쪽이었나요.
아,
우린 아무 역에서도 못내리고
그래서 아무 역에서나 내릴려고 했던가요.
너한테 오늘이 상처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말을
혹시 그날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니? 그런 질문을 내게 한 것은 기억하지 말아요.
그 순간 이후의 형과의 모든 일들이 내 상처가 되란 법은 없잖아요, 안그래요?
그래서 난,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말아요 이런말을 하지 않아요.
그건 이를테면 상대가 이미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확인사살과 마찬가지니까요.
만약 내가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훗.
그런 유치한 가정법을 이십 년동안 해왔다 말하진 않을께요. 나도,
콧대는 좀 높았잖아요?
아니죠. 나도
모질고 독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 형은.
아닙니다. 이건 아니에요. 이런 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죠. 그렇죠?
그러니 우리 사는 동안은 절대로
만나지 말아요. 누가 알아요?
간절히 원하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늘 그래왔듯이 반대로 이루어질지요.
그때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니 우린 꼭 이렇게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누가?
형이 그래줘요.
그땐 그렇게 말해줘요.
그런 말은,
내 몫이 아니야.
내 몫은 처음부터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러다 돌아서는 것이었어.
우린 옳지 않았으니까.
형, 형이
늘 떠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나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우린 올해도 휴가는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오늘을 나 말고 떠올려줄 단 한사람.
그게 형이라는 걸
그걸 알고 있어서 나는 오늘도 내일을 견딜 수 있다는거
알리고 싶었어요
다행이죠.
그렇죠?
이십년후 여름,
내가 가장 오랫동안 사랑한 형에게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를 기억하는 형에게
형을 가장 오래 기억할 한사람이.
아침에 삼십대 후반의 미혼여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그들 중 반은 1인 가정으로 남게 되며, 그렇게 혼자 살다가 죽을 확률이 많다는 결론이었어요. 뭐, 인생의 목표가 결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치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서 자식을 낳는 것이 여성의 표준행복이다 말하는 것 같아 화가 나더라구요. 결혼해봤죠. (다른 것도 해봤지만 ㅋ) 아이도 낳아봤구요.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았으면서 결혼하지 말고 애 낳지 말고 능력있으면 혼자 편하게 살아라, 이렇게 떠들어도 봤죠. 그게 실은 능력이 없어서 능력이 안될 것 같아서, 계속 능력을 알아 줄 것 같지는 않아서 결혼한 거 맞거든요.
남은 생(?)을 누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해봤어요(?)
은희경 작가는 소설쓰기 전에 꼭 손톱을 깍는다고 해요. 손톱이 길면 자판을 잘 못친다구요. 습관 하나 같다는 게 이렇게 반가울수가 있나요? (실은 습작강의 노트 준다고 해서, 적립금 3천원이라고 해서 예판구매했지만 ㅋ) 책이 달려오는게 꼭 그걸 쓴 작가라도 달려오는 것 마냥 설레잖아요
이거이거 예판중독 아닐까요??
암튼, 저는 이 책이 달려온다는 문자를 손꼽아 기다려요.
이번주 일욜은 이 책으로 생각좀 할겁니다.
다른 생각을 할까봐 마음을 붙들기 위해서랍니다.
(아 오늘이 월욜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미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