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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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아본 언니에게

 

 

 

 

   아직도, 글로만 보면 내가 중년의 남성인줄로 아는 분들이 꽤 있다. 서재 타이틀이 일단 책방 아저씨이고 댓글도 최대한 점잖게 대응하고 리뷰에서도 제대로 정색을 하고 문체도 보수적이고... 암튼 내가 봐도 종합적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한 쪽이니까. 그런데 나는 얼굴보고 마주하면 이 분위기를 확 깨는 반전의 성향인지라 사실 일상과 글과는 영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상에서의 지인이 온라인상의 나를 확인하는 것도 싫고(재수 없어 할 것이므로) 온라인에서 아는 사람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도(실망할 것이므로) 불편하다. 특히나 온라인에서 글로만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근엄하게 앉아 책만 보고 도 닦듯이 글만 쓰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글의 내용도 기쁘고 밝은 이야기 보다는 주로 슬픔과 상처, 고독과 절망이 주를 이루므로 그만한 사연을 가지고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은 채(?) 꿋꿋이 살아가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구라도 온라인에서 알게 되어 실제로 만나게 되는 기회가 생기면 대부분 거절, 사양, 핑계, 포기로 일관한다. 여기서의 한사람과 눈앞에 있는 나를 일치시키기 힘들어 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나도 편한 일이 아니다. 온라인과 일상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몇 안 되는데 이들도 원래부터 알았던 한쪽의 나머지 반쪽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먼저 알게 된 그 한쪽대로 나를 대하는 상대를 배반하기 싫어 최대한 나머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보고 싶어 하는 대로 보여 준다. 왜 이렇게 이중적인 생활태도를 취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대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터 서서히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새삼 당시를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나는 좀 놀아본 언니(?)에 속한다. 우리 나이에 왕년에 한번쯤 놀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대학생이 되어 이년 정도는 신나게 돈을 쓰며 놀았고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엔 돈이 없어 방황하면서 놀았다. 죽도록 일도 했지만 궁금한 일은 대부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돌아다니면서 후회 없이 놀았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이 영화는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놀았던 그 한 시절에 같이 놀았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이다. 엄정화가 (연대 사회체육학과) 91 학번 쯤으로, 황정민은 (고대 법학과) 71년생으로 나오므로 추정컨대 그들은 내가 뻔질나게 놀러 다닌 곳에 분명 함께 다녀간 적이 있을 것이다. 엄정화의 별명은 ‘신촌 마돈나’이고 대사 중에는 ‘독수리 다방’도 스쳐 지나가고 국회의원 사모님은 그녀더러 그 유명한 ‘X세대’가 아니냐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엄정화가 나이트에서 무대 춤을 선보일 때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런던 보이스(London Boys)의 할렘 디자이어(harlem desire, 1987)이고 이 노래는 두 사람이 학교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도망칠 때도 계속 멈추지 않는다. 꼭 써니에서 7공주가 피카디리극장인가 데모현장에서 전투경찰을 사이에 두고 불량서클과 육탄전을 벌일 때 흘러나오던 조이(Joy)의 터치 바이 터치(touch by touch)때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보면 된다.

 

 


  91학번 엄정화는 신촌가는 버스에서 마이마이를 듣고 있구나. 
  가죽팔찌, 찡팔찌, 야광팔찌... 특히 야광시계는 인정. 손목이 들어갈만한 왕귀걸이도 인정.
  그때 베네통 가디건과 아디다스 테니스 팔목보호대가 엄청 유행이었지, 하하하.

 

 

 

   사실 훗날 그 음악들이 이렇게 데모배경음악으로 훌륭하게 편집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아니면 우리 같이 나아가리라 그런 노래만 듣고 우린, 눈물만 삼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영화속)엄정화가 나이트에서 날릴 때 한창 유행하던 음악은 할렘 디자이어는 아니었다. 런던보이스는 내 고딩 시절이었고, 내가 이틀에 세 번꼴로 나이트를 다닐 때 (89년에서 92년 사이)허구한 날 흘러나오던 음악은 바비 브라운(Bobby Brown)과 폴라 압둘(Paula Abdul)이 대세였다. 당시 Don’t Be Cruel과 Straight up은 강남역 월드 팝에서 분위기가 달아 오르기 전 시작을 알리던 오프닝 뮤직으로 많이 쓰였다. 우리는 강남역 뉴욕제과 앞에서 만나 다섯시 반부터 나이트를 입장하곤 했다. 그때 압구정동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 한잔이 오륙천원 할 때인데 (나이트)기본이 만 오천원 이었다. 목화예식장 옆 ‘유니콘’이 거의 망해 갈 무렵 ‘월드 팝’은 당시 좀 노는 8학군 출신 대학생들의 거의 유일한 쉼터(?) 였었다. 싼 맛에 가끔 이대앞 ‘애프터’에서 과모임을 가지기도 했는데 물이 안 좋고 후져서 곧 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남역에서 역삼동 쪽으로 좀 내려오면 뉴월드라고 어중간 한 호텔 지하에 ‘당꼬’라는 나이트도 있었다. 거기 농구선수와 탤런트들이 왕왕 다녀가곤 했는데 이승철과 강문영, 허재도 본 기억이 있다. 반갑게도 엄정화는 정확하게 당시 유행하던 춤 두어 개를 추기도 했다. (그 부분에서 나는 딸아이에게 저거저거 그때 유행하던 춤이야, 이렇게 말하고 말았고 아이는 엄마 너무 크게 말한 거 알아? 흑, 이렇게 답했다...)아쉬웠던 건 중간에 브루스 타임이나 나이트 문 닫을 타임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인데 리얼리티는 살았겠지만 너무 진부해서 누락되었나 싶다. 언제 브루스를 신청 할 것인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레오나드 코헨의 I'm your Man이나 끝나기가 아쉬워 여러 번 틀어대던 쿠와타 밴드의 Just man in love정도가 흘렀다면 그야 말로 시대의 완벽한 고증이자 깨알 같은 디테일 이었을 텐데 말이다.

 

 

 

 

#2. 지나온 언니에게

 

 

 

   아무튼 이 영화는 우리가 예상한 내용을 예상한 바대로, 가장 잘 어울리는 두 배우가 예상한 만큼 열연했다. 엄정화는 자기 옷을 입은 듯 배역과 동일인물 같았고 황정민은 소탈하고 진솔한 남편이었다. 사람들이 훌쩍 거리는 부분은 의외로 엄정화 씬이 아니고 황정민 씬이었는데 역시 연기파 배우답게 두어 번 찐한 감동을 선사하는 한방이 있었다. 시나리오 상으로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의 인물들이라 예외적인 인물이 없긴 하지만 그 전형성을 다행히 배우의 연기력과 유머, 감동으로 잘 메운 듯하다. 꿈은 이루어지고 사랑은 계속된다. 고로, 행복은 약속된다.

 

 

 

   한 가지 나만 그런 것인지 황정민을 보면서 생각나는 한사람이 있었는데... 투박한 부산 사투리와 돈 안 되는 인권 변호사...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소탈한 모습... 그리고 마지막 아내의 꿈도 자신의 꿈 이상으로 소중하게 인식하며 사람들에게 심경을 설파하는 장면들이 꼭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고 외쳤던 노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가 계란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내를 말할 때 정말로 울컥울컥 했다고 고백한다.

 

 

 

 

 

말은 안되지만 나는 이 장면 울컥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80년대 후반 올림픽과 성장을 같이한 X세대가 한 분 단에 두 명 간다는 대학에 들어간 90년대 초반, 오렌지족과 같은 야타 시절을 불같이 보낸 나 같은 아줌마들을 위한 드림 환타지 영화였다. 날카로운 비평과 분석 등은 영화전문가에게 맡긴다. 아줌마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냥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내가 버린 남자, 혹은 어이없이 내가 놓친 기회, 더불어 내가 잊었던 꿈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에 참 고마운 작품이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다시 46kg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마흔 넘어 슈퍼스타 K에 도전해 인상 깊은 도전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기억나는 출연자 쯤으로 생방송에 한번 초대된다면 대박 행운 정도가 될 것이다. 내 남편은 절대로 시장 후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갑자기 집값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주식이 대박 나거나 방학이 지났다고 아이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일 년에 두 번이라는 명절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것인지 후라이팬 앞에서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맡아야 할 것이다. 식구들을 챙기고 며느리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많은 꼴을 눈감고 안 듣고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고마운 오늘이 아닌가. 분명한 건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가 아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여기까지 왔구나로 느껴지는 오늘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것인가. 나는 기억한다. 그때 강남역 거리마다 불법테이프를 팔고 있던 리어카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신승훈이었고 김현식이었고 김민우였고 이범학이었고 심신과 강수지였다. 우린 저마다 상대의 미소 속에 비친 내 사랑이 내 곁에서 오직 하나뿐이길 원했고 이별 아닌 이별을 했기에 흩어진 나날들을 보냈다. 돌아보니, 1991년도는 참 좋았다. 그때 아무리 아팠어도 분명 다가올 미래를 누구보다 기다렸고 사랑을 약속했다. 그 설레이던 시간은 당신과 나 사이에서 영원한 이야기로 남았다. 글쎄, 나는 그 시절을 다녀온 당신과 이렇게 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참 기쁘다. 나이 먹는 다는 건 추억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 둘 누군가와 추억을 나눌 꺼리가 더 많아진다는 소식만 같다. 1991년도를 생생히 기억하는 당신, 한번쯤 놀아본 당신에게 이 영화를 건네 드린다. 그렇게 오늘도 해피 설날, 메리 행복, 댄싱퀸을 꿈꾸자고 말해 드리고 싶다.


 

 

   비록 1991년도의 꿈은 지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때 우리가 꾸었던 꿈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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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2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나 즐겁게 읽었는지요 :)

제가 대학을 다니던 93년에는 그러니까 락까페라는 것이 막 생기기 시작해서 나이트를 가기에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청춘들을 구제(?)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요. 늘 무채색의 옷만 입던 저는 언니의 스테파넬 원피스를 훔쳐입고 락카페를 갔었습니다요. 물론 들켰죠. 죽다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 보다 친구들과 검정 비닐 봉지를 가방에 넣고 이태원을 뒤졌습니다.
검정 비닐봉지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주인만 아는 그런 유럽 브랜드의 옷을 사서 흐뭇하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물론 입을 수 있는 옷은 별로 없었습니다.
일명 리조트룩이라 불릴 수 있는 옷들이었으니까요. 아마 그거 입고 집 밖을 나섰으면 아버지에게 맞아서 죽었을 겁니다. 여튼 그렇게 한 2년을 검정 비닐봉지와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밥 딜런의 음악을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검정 비닐봉지와 너무 안어울리는 모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음....생각하니 그때 저는 세상을 구원하는 꿈도 꾸었던 것 같네요.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말도 안되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엄청 빨간 책들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혁명을 꿈꾸고...
그곳 친구들은 제가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이유를 몰랐었던 것 같아요.
철저한 이중생활이었죠^^
아득하네요~!

한사람 2012-01-22 11: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락카페 !!!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홍대앞에 생겼어요~
스테파넬 원피스도 생각나요. 약간 몸매되고 리조트룩이 어울릴만한 자신감, 리버럴이 있어야 입을수 있는, 히히(저는 딴에 럭셔리하게 오리지널리, 영우 이런 영국풍의 원피스를 입고 잘난척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ㅋㅋㅋ)

검정비닐봉지에 유럽 브랜드 혹시 막스 마라, 이런거 아닐까용??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불온서적을 읽는 굿바이님이 어떤 모습일지, 음...그 이중 생활
조금은 짐작이 가면서도, 하하.
아메리칸 트래디셔널 아니고 버버리풍, 지중해풍.. 심하게 공감합니다^^
93년에 참 대전엑스포 이딴것도 했습니다 !
(그때 첫 직장에서요 ㅋ)


stella.K 2012-01-20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어쩌면 강남역에서 스쳐지나가듯 만나었는지도 모르겠군요.ㅋ
진짜 엄정화와 황정민의 출신 학교가 그런가요? 첨 알았네요.
아, 과거는 늘 아련해요. 그죠? 이범학. 그 이름 잊고 있었는데.
이 영화 꽤 웃기다던데. 쿡 tv로 넘어 오면 한번 봐야겠어요.
아님 그 안에 기분 꿀꿀해지면 한번 보던가.^^

한사람 2012-01-22 11:35   좋아요 0 | URL

진짜 엄정화는 대학 나왔나요? (음...심한발언?)
황정민은 예대로 알고 있는데..(저와 동갑이거든요 ㅠ)
하지만 둘다 나이상으로 제 세대라..반갑고 짜릿하죠
이범학은 아직도 가끔 나오더라구요, 저는 이정석을 좋아 했습니다, 하하

영화는 대체로 써니보다는 웃긴 장면이 많고
즐겁게 볼만합니다~
(혼자보다는 친구들과 더 좋을 듯 해요)

얼마전 인사하고 또 하기 뭐하지만, 그래도
새해 복마니마니~ 늘 건강하게~
웃는 한 해 되시길요^^

stella.K 2012-01-22 13:50   좋아요 0 | URL
어제 <위험한 상견례> 보다 잤는데
80년대 배경으로한 영화들이 제법 많이 만들어졌더군요.
영화는 재밌었는데 넘 졸려서 눈 떠보니 내용이 많이 지나있더군요.
그래서 아예 자버렸습니다.
봄이 온 맹키로 나른하고 졸립네요.ㅋㅋ

고맙습니다. 한사람님도 명절 잘 지내구요,
그래요. 올핸 많이 웃고 살자구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1-2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는 페이퍼네요...ㅎㅎ 유니콘과 브루스타임, 독수리 다방, 압구정동, 강남역 뉴욕제과, 최루탄, 마이마이, 길거리테이프...모든것이 91년 그때를 추억하게 하네요^^ 개념없이 겁없이 놀고 마시고 웃던 시절...그러면서 한 날은 전경에 쫓겨 신발도 버려두고 도망갔던 기억도 나구요...그땐 모든게 뿌연 것 같았는데 지금은 참 좋았던 시절이네요.. 이 영화 꼭 봐야겠네요~

한사람 2012-01-22 11:41   좋아요 0 | URL

어머어머, 현맘님 유니콘 아시는군요? 히히
(그럼 이층 스피커 앞에서 춤추던 사람들도 아시겠네요 ㅋ)
길거리 구루마에서 진짜 심하게 '내사랑 내곁에' 만 흘렀어요. 92년도엔요...흑..
저는 학교 가다가 지하철역에서 맨날 검문 당했구요..
스크루바 먹다가 학교앞에 전경들이 들이 닥쳐서 빨간 하이힐 신고 엄청 도망가던 생각도 나네요 ㅠ
그걸 떨어뜨리지 않고 끝까지 먹겠다고 그 집념이 ㅋㅋ

최루탄은 정말 지독했어요. 특히 화장 좀 신경쓴 날 눈물에 마스카라 번지고 완전 너구리 되어서
(민주화를 위해 불사르는 단식 선배들 뒤로) 집에 간날이 몇날이었는지...

현맘님은 이 영화 보시고 어떻게 이야기 해주실지 궁금합니다!!

숲노래 2012-01-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1년에 저는,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대입시험이 바뀐다는 소식을 들으며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밤 11시까지 학교에 갇히던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ㅋㅋ

할렘 어쩌구는 저로서는 중학생 때에 떠돌던 노래 같네요 @.@

한사람 2012-01-22 11:44   좋아요 0 | URL

앗, 된장님 후배님이셨군요..
요즘은 학력고사 이야기 하면 전설세대 취급 당해서요, 어디가서 잘 안하는데 히히
저도 학교에서 열시까지 야자하고 독서실 가서 한시까지 놀다가 두시까지 겨우 비비다가
봉고차에서 흐르는 푸른 하늘의 '겨울바다'를 들으며 집으로 가던 생각이 나네요.

그러게요, 할렘 어쩌구는 나이트에서 잘 안쳐주던 노래인데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1-2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 님 글은 딱 한 번만 훑어봐도 여자가 썼음을 알 수 있던데요.그러니 임꺽정 같은 남자일 거라고 짐작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안심하시길...

한사람 2012-01-22 11:45   좋아요 0 | URL

헉, 노이에자이트님의 예리하시고 통찰력 있는 시각엔
그러했군요 ㅠ
저는 사실 글에서 여성의 냄새가 나는 걸 안하고 싶었거든요..
리뷰말고 페이퍼를 쓰면서 부터 여성적인 내용을 많이 쓰게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완전 공무원을 겨냥하는 글이었다구요 ㅋㅋ

마노아 2012-01-2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 글 참 좋아요. 특히 마지막 문단이 찡하네요. 노래 제목을 엮은 것도 아주 반짝여요. 저도 이 영화보면서 노대통령이 어찌나 생각나던지요. 전 나이트를 못 가봐서 롤러장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 클럽에서 엄청 틀어주었을 노래들을 이렇게 영화속에서 만난다면 청춘이 불같이 떠오르며 아주 화르르 타오를 것만 같아요. 한사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한사람 2012-01-22 11:53   좋아요 0 | URL

으앗, 알아주시는군요.(고마워요 ^^)
제가 이 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문장이 바로, 그 노래를 엮은 것인데 ㅋㅋ
(한가지 김민우의 사랑일뿐이야를 빼먹었는데... 잘 안되가지고)
마노아님도 저와 생각이 같았군요.. 노대통령 맞죠?, 박원순 시장 아니구요, 그죠?
저는 롤러장은 못가봤어요(나름 범생이 였다는 ㅋ, 아니 머 마노아님도 그랬을거라고 믿어욧)

그나저나 프로필 사진이 아주 고혹적입니다^^
마노아님도 올해는 화이팅만입니다~~~



가연 2012-01-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사실 저는 음.. 남성분인가? 아저씨??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글에서 몇 번 성별이 언급되어서 아, 그렇군요, 라고 고개를 끄덕거린 케이스라...ㅎㅎㅎ 어째 위에 덧글이랑 좀 상반되는 이야기같네요ㅠ 하지만 예전에 글만 보고 판단했다가 놀란 적이 있어서ㅎㅎㅎ 온라인에서 아는 분은 안만나는게 정석인것같아요..ㅎㅎ 이건 제생각이지만요. 물론 저도 이전부터 만나뵙던분들은 있지만..ㅎㅎ 그분들외에는 나이가 드니깐 더 못만나겠더라구요.

사실 제가 이런 댄싱퀸같은 복고적 영화?? 같은 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이 글을 읽고 와, 한 번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1991년을 놀던 날로 기억하기에는 좀 많이 어린 것 같네요, 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사람 2012-01-22 11:53   좋아요 0 | URL

아.. 저는 가연님이 여자분인줄 알았어요 ㅋㅋ 서로 반대군요, 하하하

저도 가연님 나이(?)에는 복고풍 영화같은걸 안좋아했습니다. 그땐 컬트나 프랑스 영화를 선호했어요 ㅋ
한국영화도 잘난척 한다고 무시하고, 그랬죠.

영화관에 보니 방학이라 학생들과 제 또래 아줌마들이 많더라구요.
음..가연님은 누구와 보게될지, 괜히 궁금하네요.

연휴가 많이 남았는데, 계속 편안함 맘으로..
(참 녹지대 다 읽었어요, 가만 있기 힘들어 연휴 짬짬이 리뷰나 써볼까해요!!! 느무 좋아서...)

마녀고양이 2012-01-2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이 편안해졌네요... 참 기분좋게 읽었습니다.
저는 늘어져서, 페이퍼 쓸 에너지가 몽땅 휘발성같이 날아갔네요.

1991년, 참 많은 시간이 지났군요. 방황을 위해 방황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요즘 신촌, 홍대, 모두.. 남의 나라 같습니다. 아하하.

한사람 2012-01-25 17:02   좋아요 0 | URL

연휴 잘 보내었나요?
이번엔 짧았지만 제대로 추웠죠 !!
저는 추운건 딱 질색이라 간절히 봄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91년이 참..아득하네요.그런데 저는 기억만은 생생해요 ㅠㅠ
(신촌, 홍대, 강남 모두.. 외국 같다는 말 격하게 공감하구 말구요 ㅋ)


보물선 2012-01-2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당신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해.
이 깨알같은 디테일이라니^^

91학번. 내게는 새내기라는 풋풋한 단어와 김귀정(알아?)의 죽음이라는 아주 상반된 이미지의 조합이야.
아직도 기억하는 9106529. 참 아련하다~

난 어제 금쪽같은 휴가날, <부러진 화살>을 봤어. 요건 낭중에 나도 우리 꼬마랑^^

한사람 2012-01-27 09:08   좋아요 0 | URL

김귀정...강경대...
(그들이 살았으면 다 내 나이겠구먼)
나이트 이야기 하다가 민주열사로 바뀌니까 흠칫하다 흠칫해 ㅠ

나도 학번을 여기저기 비번으로 많이 활용하거든~

아이랑 보기가 그래서 <부러진 화살>을 못봤어, 써니보다 재밌다고 하더라, 하하
부러진..은 혼자 봐야 할듯^^


보물선 2012-01-27 15:36   좋아요 0 | URL
나는 학생운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는데도
내가 성균관대 나왔거든.
그래서 김귀정의 죽음을 너무나 가까이서 겪어서 확 떠오르는 거야.
나같은 1학년도 사수대 도시락 싸들고 백병원도 가고
장례식날 엉엉 울기도 하고 그랬어.

부러진 화살에 아이가 못 볼 장면은 딱 하나야.
하긴 모든 장면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니깐 아이에게 볼만한 건 아니겠네~ㅋ

2012-01-30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0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이터 - The Figh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가족이란 무엇일까. 형제란 어떤 관계일까. 챔피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가족의 힘과 형제간 믿음, 그리고 챔피언의 의미에 대해 이 영화는 말한다. 챔피언도 형제와 함께라면 가족모두 행복한 것이라고... 끝내, 행복해지는 영화였다. 드라마틱한 연출이나 강요된 감동없이 드라마는 투박하고도 수줍게 감동을 이끌었다. 막이 내리고 나는 썩 감동받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어쩌면 늘상 마주하는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는지 모른다. 어제 본 가족이, 내일 다르지 않을 그들이 오늘이라고 유난히 반갑지 않은 일상의 마음가짐이었다. 어쩌면 남들 앞에서 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감동을 드러내는 것이 겸연쩍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혼자 돌아와 그들 몰래 아주 어릴 적 촌스럽게 찍었던 몇 장 안되는 흑백 가족사진을 들쳐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마음이었달까. 지긋지긋해도 내 살처럼 편하고 티격태격해도 내 체온처럼 미더운. 어쩌면 아주 익숙해 잠시 눈물을 미루어 두었을지도. 형제...사실 난 형제가 없다. 무엇을 놓고 경쟁해 본 적도 협동해 본 적도 양보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일까. 내게 이 영화는 못해 본 정겨움이자 못다 핀 그리움이었다.

알려졌듯이 이 영화는 쌍둥이 복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며, 이번 아카데미 남녀 조연상을 석권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이 영화선택을 이끌었던 건 아니다. 실화가 아니고 상을 받지 못했어도 나는 이 영화에 자석처럼 끌렸다. 뭐랄까 대단하진 않지만 든든한 밥심같은, 조금은 거칠고 퉁명하게 새삼스러워도 속마음은 뜨거워 질 것 같은. 크레딧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형 디키역의 크리스찬 베일은 (너무 살이 빠져)알아보지 못했을 뻔 했고 동생으로 분한 마크 윌버그와 엄마역의 멜리사 레오의 이름도 쉽게 기억하지는 못했다.(물론 그들의 대표작조차도) 꼭 얼굴은 익숙한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한국 드라마의 연기파 단골 조연배우들 같았달까. 하지만 그동안의 우리사이 세월이야말로 작품의 흥행과 관계없이 무언의 신뢰를 제공하는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배우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몸에 힘을 빼고 로웰마을의 실제 주민들처럼 울고 웃었다. 표면상 주인공이었던 동생 미키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특이하게도 스포츠 소재의 영화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빛나는 순간 더 눈부신 형과 엄마가 밟히던 것은 아마도 이들의 오래된 익숙함이자 신비한 연기력이었나보다. 모두들 얼마나 실제 인물을 연구했을지 그들의 제 몸같은 연기가 가끔 인간극장류의 휴먼 다큐멘타리로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워 그 애틋함이 스크린을 보면서도 꽤 오래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영화로서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만 없었다면 나는 이 영화가 거의 한국의 미니시리즈식 드라마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특이했던 건 바로 시작과 끝이 동생과 함께인 형의 감정상태였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감독의 확실한 연출의도가 구성상 ‘to be continue’의 드라마가 아닌 ‘the end’ 의 영화로 보이게 했다. 이 수미쌍관식의 인터뷰 촬영장면은 이 영화를 더욱 리얼하게 전달하는 일등공신이기도 했는데 내겐 마치 어떤 근사한 그림의 액자이자 개성있는 선물의 케이스와 같이 느껴졌다. 유명 스포츠 채널인 HBO에서 왕년의 복서 형의 영화를 촬영한다는 설정으로 시작된 형의 인터뷰가 마지막에는 이 영화는 ‘내 영화가 아닌 동생의 영화’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엔 껄렁껄렁하게 잡담하듯 대답을 내뱉다가 마지막에 목이 메어 눈물을 글썽이던 형의 목소리는 이 영화에서 동생의 승리만큼이나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옛날엔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동생이라고, 동생이 로웰의 자랑이며 인생은 그런 거라고 하지만 나처럼 되고 싶어 했던 동생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아느냐고. (물론, 그런 형의 눈물에 굳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한 일이라는 동생의 첨언도 기억한다)



              "동생에겐 제 전부를 가르쳐줬죠"             "예전엔 저였지만 이젠 동생이죠"


형은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울음으로 영화를 마친 것이다. 하지만 처음 웃음은 자만이었고 마지막 울음은 겸손이었기에 우린 형이 울어도 행복했다. 형은 자신의 영화를 찍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동생의 영화로 끝이 난 것에 슬픔이 아닌 감격의 눈물을 흘림으로써 결국 자신의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승리는 동생의 것만이 아닌 망가져가던 형의 승리였고, 형에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가족 모두의 것이기도 했다. 혹시 동생이 실패하고 형 역시 폐인이 되고 그로 인해 가족이 절망한다고 했어도 나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가족인 것, 서로 미워하고 부담주고 상처를 주었다 해도 그들이 가족이라는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마지막에 위로가 될 것은 가족밖에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영화라는 현실은, 아니 영화같은 현실은 우리를 울리지 않았다. 대신 웃고 있어도 가슴에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형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동생의 이야기이며 알고 보니 엄마의 이야기도 누나들의 이야기도 어쩌면 아빠와 여자친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가난하고 할 줄 아는 게 한가지 밖에 없는, 어쩌면 특별히 아무 재능도 없고 그렇다고 유달리 부지런하지도 않은 우리들 이야기일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욕심은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
 
그랬다. 그들은 변두리 마을에서 소시민의 욕심을 가졌기로 남들에게 절대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남들만큼 실패했고 나이만큼 실수했다. 적당히 위법하고 요령껏 반칙한다. 한번 영웅이면 영원한 영웅이듯 그때를 회상하며 오늘을 소모한다. 상금이 될수록 많으면 좋겠고 내 아이한테 존경받고 싶다. 그리곤 내 방식대로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려든다. 가족이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하고 어떨 땐 구성원의 희생에 침묵한다. 이들은 너무 영화적이어서 완벽하거나 절대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또 기특하게도 귀여운 장점들이 있었다. 내 어머니처럼 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고 내 아버지처럼 능력이 없었고 내 형처럼 허풍이 많았고 내 동생처럼 가족을 지겨워했고 내 누나처럼 여자친구 탓을 했다. 하나같이 거짓말처럼 영화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를 실제보다 더 리얼하게 감동을 선사한 요인이 되었다.

형제들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아홉 남매의 어머니, 육십대에도 미니스커트와 화이트 스키니진이 어색하지 않은 글래머 몸매에 화려한 옷차림, 외향적으로는 가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서 두 형제가 어렸을 적 부터 권투경기의 매니저 역할을 해온, 아버지와 싸울 땐 후라이팬을 집어 던지고 누나들과 협심해 아들의 여자친구를 찾아가기도 하는, 그녀야말로 이 영화의 파이터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말한다. 우린 가족이라고. 형도 네가 잘되길 원한다고. 당신보단 내가 더 아들을 잘 안다고. 장남에게 많은 기득권이 주어지는 대신 막중한 역할이 기다리는 우리네 가족관계의 그것처럼 형의 성공은 곧 우리 가문의 자랑이고 마을의 영광이니 가족모두는 대 가정의 행복이라는 대의에 따라야 하느니. 고시 공부를 하는 우리네 큰 형들을 위해 동생들이 무언가 해야 한다면 그건 우상같은 형과 기둥이 될 오빠를 위해 부모님의 욕망을 기꺼이 수용하는 일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그건 차별이 아니라 차별화 전략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같이 복서를 했지만 설사 동생이 형의 연습상대로만 존재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져주는 경기를 해야 할 지라도 가족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형이 주로 좌충우돌 사고를 유발하는 '트러블 메이커'였다면 어머닌 작품내에서 그들의 가정내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로 긴장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메이커'였달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언제나 구경꾼처럼 소파에 모여앉아 사태를 관망하던 일곱명의 누나들, 무능력해 보이던 딸기코 아버지와는 달리 그들 가운데 유일한 아들은 열 두살때부터 열 여덟살이라 속이며 경기를 해온 권투유망주, 속칭 인생 역전, 한방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는 기특한 마법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자자손손 마을의 영광이 될 수 있는 자랑스런 아들을 낳은 당사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시원하게 날리고 싶었던 건 혹시 다른 건 별볼일 없었던(?) 자신의 인생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다른 가족들도 저마다 세상을 향해 무언가 날리고 싶었던 무엇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인생은 한 방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조롱하고 무시해온 그들을 보기 좋게 한방 먹인 결말이었다는 것이 참 반가운 영화였다.

가만 보면 이 작품은 형을 통해 동생을 말하는 영화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형은 처음부터 인터뷰할 때 자신의 이야길 바로하기 보다 동생과 함께인 자신을 설명하려 했다. 동생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 맞아 준다고, 자신은 바깥쪽을 선호하는데 동생은 안쪽을 선호한다고. 은연중에 내비친 자신과 동생이 많이 다르다는 형의 진술(?)은 의미심장한 예언이기도 했다. 형의 소개처럼 영화내내 안쪽에서 한방을 준비하던 동생은 시종일관 과묵했고 바깥쪽에서 치명타를 날리는 형은 수다스러웠다. 둘 다 돌주먹이었지만 이들의 권투성향은 서로 반대이기에 조화로울 수밖에 없는 필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챔피언 도전에 나선 동생에게 형은 말한다. 이건 네 무대이고 온전한 네 시간이니 당하고만 있지 말라고. 혹시 형의 주문은 네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너는 해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주먹은 있고 힘도 세지만 자신있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던 동생은 늘 최선의 방어를 공격으로 삼지 않고 최선의 공격을 방어로 삼은 선수였다. 동생에겐 늘 그래왔듯이 형의 전술대로 형이 파악한 상대만큼 형이 지켜볼 때 경기를 하는 것이 가장 쉬웠고 형없이 경기를 하고 형없이 이긴다는 건 상상할수 조차 없었다. 제발 형없이 자신만으로도 이겨보고 싶었지만 그는 감옥에 있는 형을 찾아가 형이 알려준 조언대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마치 형이라는 자기 내부의 우상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 이 영화의 궁극적 가치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보편적인 예상을 깬 실제 형은 영화속 동생보다 나았다. 형은 동생에게 반드시 필요했고 형에게도 동생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 그래서인지 동생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이 동생 자신을 이기도록 독려하는 마지막 영혼의 주문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아무리 옆에서 훈수를 두어도 결국 사각의 링안에서는 자신만이 상대의 주먹을 막아내야 하는 잔인하고도 고독한 시간들을 동생은 알고 있었다. 다만 형은 잠시 그 사실을 잊은 동생의 자존감을 가장 뜨거운 강도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자극할 수 있었던 존재였다. 결국 가장 공격적이라는 건 그러한 고독한 시간을 깨달으며 누구의 도움없이도 자신의 두려움을 깨부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 그것은 형과 동생이 내게 함께 알려준 교훈의 한방이었다.

그렇다면 못다한 형의 꿈을 이루면서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은 동생은 세계챔피언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스포츠에서의 최대 적은 결국은 나와 경기를 하는 상대선수가 아닌 상대가 마주하는 내 자신이었을을 다시금 깨우쳤다. 아무리 막강한 선수와 맞붙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연습한대로 자기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어떠한 전략보다 더 공격적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건 우리가 인생이라는 스포츠를 행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챔피언이 되고 마는 동생을 보고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링위에 서있던 형의 얼굴을 기억한다.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영웅심리와 마약중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형, 교도소에서 까지 전화로 동생의 경기 중계를 듣고는 환호성을 울리던 형. 그의 표정은 흡사 자신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제자가 당당하게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버린 광경을 보고 잠시 만감이 교차되던 오서코치의 눈물을 생각나게 했다. 그 눈물은 동생과 제자의 승리가 누구보다 기뻐서 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래, 어느 개그맨이 그랬다. 스타와 슈퍼스타의 차이는 바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자신감에 있다고.

90년대 초라고는 하지만 8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 한편으로 봄날의 우울을 이겨보고 싶었다. 사는 건 왜이리 극복해야 할 일이 많은지 나이들면서 점점 이제는 날씨마저도 이겨야 할 상대가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오늘 모처럼 예년 기온을 웃돌며 햇살좋은 봄날씨에 마음이 바빠진 하루였다. 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이미 깨달은 나는 서둘러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나 역시 이 봄이 다가기 전에 이 두려움에 지기 싫어 가족의 힘을 빌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굳이 가족영화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분명 가족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그건 내가 꼭 지난시절 가족 때문에 힘을 얻었다고 말하기엔 뭐하지만 그래도 가족이 없었다하면 가장 먼저 힘이 빠지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형을 확인하고 동생을 확인하고 부모님과 기타 가족을 확인하러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가족은 굳이 확인하며 신분과 역할을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형의 이름과 어머니의 고집과 누나의 응원과 동생의 상처를 가슴으로 확인하였을 때 세상엔 내 가족도 있었음이 거짓말처럼 벅차게 고마울 날도 있다는 것. 가끔은 그렇게 고마운 눈물 한 방울로 다시 다가오는 계절도 반가울 수 있다는 걸. 화창한 봄날, 속으론 울었지만 태연한 척 찡긋하며 삐죽거릴 수 있는 오늘, 당신도 공평하게 자기 인생의 파이터로 살아감이 짠해지는 오늘, 불어오는 봄바람을 핑계로 얄미운 사람의 어깨를 툭 쳐봐도 좋을 오늘, 우리 다시 파이팅하자.  삶이 두려운 건 당신과 내가 마찬가지인 오늘, 서로의 한방을 응원하는 우리 목소리가 기분좋은 오늘,  똑같이 내일을 기다리는 도전자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준비하며 기다렸기에 언젠가 터지고 말 그 한방의 파이팅으로. 



                                            이봐요, 앞 일은 누구도 모르는거죠?
                                                  포기하면 안되죠, 절대
                                   
                       - HBO 캐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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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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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 제83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2011)-나탈리 포트만>


드디어 받을 사람이 받았다. 베니스와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그랜드슬럼을 이루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라 그녀의 수상소식이 놀랍진 않았다. 막 어제까지 이런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 생각하여 나라도 어떻게든 리뷰를 써볼까 하던 차였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만 언제쯤 끄적여 볼까 살짝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날아든 수상소식이 조금은 일찍 내 발목을 잡아 당겼달까. 이 영화는 말로 다하기 아까운 아름다움이다. 순간 느꼈던 모든 것을 고이 빚어 나만의 소중한 케이스에 영구 밀봉하고 싶은, 가지고도 기리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도 나는 한참을 넋을 놓아 버렸다.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生의 비밀 답안지라도 몰래 훔쳐본 기분, 그것이 혹 예술이라는 장르에 해당된다면 그것의 속성에 관통상이라도 입은 기분, 어떻게 더 이상 완벽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완벽이라는 마취에 압도당한 나는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이 영화의 마지막은 예리하게도 아려왔고 차마 리뷰는 그 자상을 확인하는 절차가 될듯하다.

영화는 ‘백조의 호수’의 프리 마돈나를 연기하게 된 한 발레리나의 ‘예술적 성공’과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기파멸’의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발레라는 전문적 분야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나탈리 포트만은 실제 열 세 살의 나이에 발레의 꿈을 접기도 한 인물이었기에 이토록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때문에 만나게 된 발레리노(뉴욕 발레단 수석안무가)와 약혼, 현재 임신의 몸으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는 것. 어찌 보면 그녀를 좌절케 했을 발레가 그녀의 꿈과 사랑을 다시 실현시켜준 결과가 되었으니 그녀에게 있어 발레는 영화(映畫)이상의 영화(榮華)가 된 셈이다. 그녀가 ‘레옹’의 마틸다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1994), 그때 난 불같은 청춘이었는데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처럼 ‘애가 애를 낳게 된’ 주인공이 바로 그녀이니 그간의 흐른 세월일랑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지난주 <언노운>에 출연한 다이앤 크루거에 반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엔 나탈리 포트만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몇 년 전에 ‘브이 포 밴데타(V For Vendetta, 2005)’라는 영화에서 삭발한 그녀의 완벽한 두상을 보고 인상깊었던 기억(영화는 별로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훌륭)도 떠올랐고 ‘천일의 스캔들(2008)’에서 스칼렛 요한슨(동생분)을 질투하며 동생을 밀어내던 초록색 드레스의 카리스마도 다시금 겹쳐졌다. 그녀는 대체로 연기 앞에선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 소위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로 뇌리에 각인된 배우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번 영화에서도 강인한 캐릭터를 기대하며 그녀의 성공을 바랐던 것 같다.




< 레옹, 1994 >



<브이 포 밴테타, 2005>
 


< 천일의 스캔들, 2008 >


다행히도, 그녀는 성공했고 불행히도 그녀는 실패했다. 완벽한 성공이었지만 그럼으로써 완벽하게 파멸했다. 성공했기 때문에 파멸한 것일까 파멸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까. 성공과 파멸이 인과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이번 영화를 보고나서 ‘천재는 자기를 파괴하면서 예술을 창조한다’는 논리에 가장 아름답게 설득당해 버린 것이 아닐까.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끊임없는 열정은 바로 완전하게 자아를 상실해야만 비로소 환희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비극적 진실을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누구보다 완벽함을 소원해 온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난 정말 완벽했다’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고 말하며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완벽하고 싶었으면 자신과도 바꾸면서 기어이 얻어야 했던 것일까. 가끔, 자신을 소진시키는 궁극의 가치, 자신의 죽음이라는 막다른 결과에 이르면서 자기창작의 완성을 이루어낸 예술가를 접할 때면 예술은 결코 ‘생산’과 ‘건축’의 장르가 아니고 ‘소모’와 ‘파괴’의 장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나 이번 영화처럼 ‘블랙스완’이라는 어둠과 악의 힘, 그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가 예술로서 대중에게 감동을 전달해야 할 땐 그 매개체가 되는 배우는 ‘흑’과 ‘악’의 광기에 반드시 치명적 관통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에서 ‘블랙스완’을 연기하던 니나는 마침내 등에서 깃털이 생겨나 ‘검은 날개’가 완성되는 합체의 장면에서 가장 큰 감동을 전달한다. 관객은 소름끼치듯 그녀의 연기에 넋을 잃게 되지만 그녀는 그토록 신비한 ‘검은 날개’를 제 몸에서 잉태해내기 위해 무엇을 버린 것일까. 아니 무엇을 만든 것일까. 혹시 그녀 자신이 창조해낸 ‘검은 날개’는 또 다른 니나의 자아로서 현실에 드러나 생명력을 갖게 되면 정작 니나의 생명이 위태로와지는 죽음의 날개는 아니었을까. 니나의 삶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검은 날개’는 과연 니나 자신이 원한 것이었을까. 설사 니나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예술은 왜 그녀가 ‘검은 날개’를 달아주길 바란 것일까. 혹시 누구보다 ‘블랙 스완’을 고대하고 찬양하는 그들(관객),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메이커들(감독) 자신은 스스로 ‘검은 날개’를 달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은 명백히도 두 사람이었다. 모두 인상깊었던 조연들이었다. 한 명은 니나의 어머니(전직 발레리나), 또 한 명은 니나의 스승(현직 발레 감독)이었다. 어머니는 순수하고 순종적인 ‘백조’로서의 니나를 강요해왔고 감독은 니나의 내부 깊숙이 잠재해 있는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흑조’를 찾아내고자 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니나를 컨트롤하고 억압하는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도 확연히 다른 컬러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발레연습장으로 대변되던 감독의 주변엔 철저하게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콘트라스트로 니나가 시종일관 긴장하도록 만들었고 엄마와 단둘이 사는 니나의 소형아파트에서는 핑크빛과 인형으로 연출된 공주님의 방을 연출하여 과보호된 니나의 가정환경을 더욱 대비시켰다. 니나는 주로 이 두 공간만을 지하철로 이동하고 연습실의 복도를 통과하며 하루를 보내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니나가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은 어디서건 존재하는 ‘거울’과 ‘창문’을 통해서 였는데 영화를 통털어 나는 니나가 거울을 볼 때 가장 무서웠고 가장 슬펐다. 니나는 거울속에서 완전한 분열증세를 보였고 거울이 많아질수록 증세는 심각해져 갔다. 어머니의 억압, 감독의 질책, 동료와의 경쟁, 왕년의 스타에 대한 죄책감등이 거울엔 고스란히 투사되어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났다. 이 작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만들고 확인하고 끝내 깨부수는 영화였다.


 

나탈리 포트만이 그다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역할이 아닌 발레리나 역을 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이 ‘거울’을 보고 ‘자신’을 깨닫고 알아가는 내면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발레리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배경음악과 기술적인 효과들이 함께 이루어낸 종합연출의 결과였다고 본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거울을 보며 심리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거울신은 어찌 보면 약속처럼 빈번하고도 계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반복의 공포는 관객에게 점진적인 두려움을 제공해야 했고 비극의 결말을 예상케 할 수도 있었다. 하여 그녀는 과도하게 미쳐서는 안되었고 연기하듯 두려워해서는 서로가 부담스러워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많이 인내하고 절제했다. 시종일관 기쁜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단 한번 마지막에 울면서 희미하게 미소짓는 슬픈 환희는 그래서 더 극적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강인하게 뇌리에 남아 예술이 가진 고통의 미학을 끈질기게 기억하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발레복에 퍼지던 빨간 핏빛이 그대로 붉은 꽃으로 피어나길 기원하라고 그녀의 마지막 눈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사라진 건 그녀일까 그녀의 예술일까 아니면 우리의 댄서일까. 둘 중 하나가 소멸되어야 한다면 우린 그 순간을 외면하고 싶다. 영화는 그래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 수상소식에 힘입어 이 영화가 탄력을 받게 되리라 믿는다. 이미 상을 받았으니 알려진대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에 찬사도 쏟아 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이번 그녀의 연기에서는 완벽함도 만족했지만 배우로서 어떤 행복감을 엿보았다고 느껴진다. 그건 그렇게 발레리나로서 완벽한 연기를 해낸 후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예술가의 극적인 운명처럼 그녀 자신도 그와 같이 살다가 죽는다면 더 좋을 건 없겠다는, 자신이 자신을 최대한 부러워하는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슬픈 얼굴이었다. 배우라는 직업, 광대의 숙명, 예술가의 욕망, 인간의 탐욕, 이 모든 것들이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조명되며 한 마리의 백조와 또 한 마리의 흑조가 비로소 한 몸이 되는, 그래서 엄숙하고도 치명적인 生의 한 순간 그것은 죽음이어야 가능한 절대공연이었다. 끝내 니나의 ‘검은 날개’는 ‘하얀 바닥’으로 추락하며 분열된 정신이 하나가 된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이렇게 더 완벽한 슬픔으로 파도치게 된다. ‘백조’는 떠나갔고 이제 ‘호수’마저 잔잔해진 지금, 그녀가 지나간 당신의 가슴엔 어떠한 파문이 얼마나한 무늬가 그려졌는가. 당신도 나처럼 손톱이 할퀴고 간 마냥 선연한 아픔으로 아름다운 물결을 새기었는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람 속엔 누구나 ‘백조’ 한 마리와 ‘흑조’ 한 마리가 나란히 등을 대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흑조를 숨기고 백조의 모습대로, 누군가는 백조를 잊고 흑조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결국 두 가지 다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예술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니나와 그의 숨겨진 본능을 도출해 내려는 속세의 감독을 보면서 나는 한명의 유명가수를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전교회장으로서 엄친딸이었던 보아, 그녀도 지금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백조’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지금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이 어쩐지 훈련된 ‘흑조’의 모습은 아닐까 염려가 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내가 너무 멀리간 것인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니 우리 연예 산업의 거대 상업적 메카니즘하에서 지독히도 훈련된 아이돌 가수들의 이미지가 불현듯 중첩된다. 한류가수를 내세우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계엔 니나의 발레감독처럼 그들에게서 ‘흑조’라는 상업적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원래 ‘백조’를 잊어버리도록 유도하는 지도자들이 많은 건 아닌지. 우린 어쩌면 깨끗한 ‘백조’가 없다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속으론 내심 ‘흑조’가 제공하는 쾌락만을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대중은 재능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 많은 것이기에.

예술가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오래 살길 바란다. 물론, 이것도 예술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향유할 우리를 위해서라는 걸 고백한다. 또 물론, 예술가라고 그들 모두가 완벽에 집착한다고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건네 본다. 나 역시 완벽에 집착하는 성향을 오래도록 가져본 사람이지만 그 완성도의 종착지가 죽음인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축복받은 예술가임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다.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완벽에 집착하여 정신질환으로 발전하는 것은 삶의 불공평한 코미디요 비극적 멜로일뿐인 것이다. 예술가라고 다 완벽하란 법 없고 그랬다고 다 죽어서도 안된다. 그들은 어쩌면 예외의 인생을 살다갔을 뿐, 예술에 대한 미화나 찬양이 곧 모방이나 롤모델로 동격화 되어선 안될 것이다. 비예술가인 난 그래서 이렇게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부럽고 신기한 건 그들의 슬픈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으로 남겨진 그들의 창작물이요, 그로인해 맛본 진하고 오래된 감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그들이 만들어 준 그것을 낼름 받아 먹으면 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예술가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어제, 봄비가 내렸다. 비는 꼭 을씨년스러워 가을비같았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 내렸으니 너를 ‘봄비’라 불러본다. 이름을 부르고 나니 봄을 손짓하는 모든 생명짓이 그리워진다. 바람이 아직 차다. 그래도 온다하면 조금은 설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 그만 이 변덕이 부끄럽다. 그러고보니 예술하지 않아도 예술가가 아니어도 이 영화, 다시 시작하기 두려운 춘삼월에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우린 예술을 못해도 그것으로 울고 웃을 수 있으니, 봄이 되지 않아도 꽃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 얼마든지 영화로 거울을 깨고 내안에 본성을 확인해도 좋을 영화이다. 그렇게 깨부수고 발견한 나만의 그것, 당신도 나도 그건 꼭꼭 숨었던 ‘흑조’가 아니라 한 송이 ‘흑초’ 이었음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비록 애타는 가슴으로 까맣게 타버린 꽃이라도 그을린 재를 모아 다시 부활하는 만개의 봄날이면 어떨까 싶다. 완전히 연소해진 잿더미 속에서도 꿋꿋이 불사하여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새. 어느 바람부는 봄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런 날 우린 ‘백조’도 아닌 ‘흑조’도 아닌 한 마리의 ‘불사조’로 다시 피는 꽃이 되자. 비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더라도. 예술가는 적고 대중은 많더라도. 봄은 느끼고 시작하는 대중들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렇게 인생이라는 예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완벽이란 건 통제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게 아니야.
해방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지.
스스로 놀래킴으로써 관객을 놀래키는 거야.
탁월함, 그건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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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언노운 - Unknow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거의 개봉과 동시에 보았기에 지인들의 평을 들을 수 없었다. 결말의 보안 유지를 위해 전세계 동시 개봉을 결정했다는 아주 기초적인 정보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영화관에 가지 않으면서 책으로 선회한 나는 오로지 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뿐. 그리고 영화를 보고 원작이 몹시 궁금해지긴 처음이라-이런 경우 원작이 영화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를 포함하여-그런데 또 막상 원작을 집어 들려니 이미 알고 있는 반전의 실체를 자꾸 분석하려 들 것이 뻔하므로-이상야릇한 기분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주 들어 <언노운>의 영화관계자들의 비평을 보니 반전에 대한 실망이 많았기로 나는 비관계자 입장에서 좋았던 점을 기억해보고 싶다.

 먼저, 나는 이 작품의 배경인 베를린이 참 좋았다. 독일에 가보지 못했기에 겨울배경의 베를린은 회색 그 이상의 다크그레이였다고 할까. 마틴 해리스역으로 분한 리암니슨도 좋았지만 독일출신 다이앤 크루거(Diane Kruger, 1976 년생)는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찾아보니 약 5년 전에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2005>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스터리한 인물로 등장했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사라진 여자친구로 등장하며 시종일관 차갑고도 지적인 매력을 잃지 않았다. 마틴 해리스의 아내로 등장한 미국배우 재뉴어리 존스는 낯은 익었지만 출연작이 생각나지 않았고 이번 영화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아무래도 영국풍보다는 독일풍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자체가 여주인공들의 대결구도나 로맨스를 말하는 장르가 아닌지라 여자 배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였지만 다이앤 크루거는 분량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 다이앤 크루거 주연,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 2005>


마틴 해리스 박사가 베를린에 도착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초반부 장면에서 바로 그가 타고 있던 택시를 운전한 여성이 다이앤 크루거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공항과 호텔앞에 즐비한 모든 택시는 화이트 벤츠였다는 것, 그리고 곧 처참하게 물에 빠져 박살이 났다는 것, 그런데 유리창을 무지막지하게 부수고 탈출하는 주인공도 바로 그녀였다는 것, 미모의 여기사는 설상가상 정신잃은 마틴 박사까지 구출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의 액션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활약덕에 그녀가 마틴 박사의 사건에 개입이 되었을 것이라는 예상, 그리고 꽤 비중있는 조연이겠구나 하는 것. 후자는 맞았건만, 전자는 보기 좋게 아니었다.



박사는 72시간만에 깨어나 다시 호텔로 간후 아내와 재회하지만 아내는 자신을 몰라보고 누군가 엉뚱한 사람이 자신이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나 혼자 바보 된 상황인 것이다. 처음엔 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생각했지만 점점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 그가 기억을 더듬어 원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혼자 사건을 추적한다는 설정은 그다지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다. 박사가 죽어야 하는 이유 뒤에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경우 대개 아내가 치정에 얽혀있거나 스파이와 관련되어 감쪽같은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오래전부터 실행되어온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 만약 극적으로 자신을 찾게 된다하면 주변인의 배신에 가슴아파 하며 그들에게 복수를 한 후 최초로 자신을 구해준 택시운전사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엔딩처리 될 것이 자명해보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 공식과도 같은 '잃어버린(빼앗긴) 자아찾기'에서 두가지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하나는 배후조직의 음모(테러의 목적)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연출속에서 나름 21세기 적으로 신선했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시 찾게 된 자아가 원래 자아대로 살지 않고 우리를 배반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를 위로한 결과가 된다는 것. 여기서 이 영화가 그토록 차별화를 선언한 ‘반전’의 물음표는 아마도 ‘지금 당신이 찾고 있는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에 해당하는 질문이 아닐까. 지금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음모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전 당신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야 했을 음모도 있었다면, 하고 말이다. 혹시 그 음모의 희생양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 찾을 수 있기는 한 것일까에 대한 수수께끼 그것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당신이 당신이 찾아야 하는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입증 할 것인지, 하는 허를 찔린 듯한 이 질문은 영화 전반 내내 극적인 긴장감을 유도해 내는 데 성공한 듯 하다.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진실, 그것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웃기지만 아니 웃기지도 않지만 슬픈, 아니 슬프진 않지만 우스운 정말 알 수 없는 비현실. 영화는 그것을 현실화하였다.

사실, 이 궁금증을 해결하는데 다이앤 크루거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돈을 모아 영주권을 얻고자 하는 불법체류자로서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해나가던 이방인이자 하층계급의 인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힘없고 능력없어 뵈는 젊은 처자가 해리스 박사에겐 유일한 의지가 된다. 그녀는 단순한 거래가 일단락 된 뒤에도 해리스 박사를 위험에서 또 한번 구출해내는 수호천사의 역할을 마다 않는다. 우연히 국제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 처자가 꼭 그러했어야 할 당위성을 나는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감성의 공감대를 두 배우가 잘 이끌어 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영상이 주는 시각적 개연성의 효과이자 영화만이 제공하는 매력일 것이다.

이 작품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파괴적이고 거대하진 않으나 과장없이 관객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제공한 점이 장점인 영화였다. 박사가 헤메이는 눈내리는 베를린 거리는 아마 원작과는 상이한 연출인 듯한데(원작의 출장은 파리로 확인) 택시가 사정없이 다리밑으로 추락하는 신, 후진으로 도망치던 거리 추격신, 호텔 폭파신 등은 내 경우 아이와 관람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또 하나, 병원 간호가사 알려주었던 전직 동독 스파이가 동료에게 배신하지 않기 위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는 설정도 의외로 여운을 던져주며 눈길을 끌었는데 이는 관객을 위한 각색의 묘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 나는 늘 테러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슬람계에서 벗어나 테러의 주체는 누가되었건 그 테러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임을 깨우치며 기분좋게 반전을 즐겼다. 반전의 파워가 어찌되었건 그건 보기드문 작품임에는 분명했다. 테러를 계획하는 이유에서도 단순한 보복이나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GMO'(유전자 변형농산물)과 같은 인류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이슈가 등장한 점도 의미있었다. 아마 원작에서였다면 사람의 기억과 자아의 합체,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간의 심도높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로도 짧았지만 내 기억만으로 나를 증명할 수는 없으며, 내가 아는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가 제공하는 메시지를 무리없이 전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원작을 먼저보고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어떠하였을까. 그때도 반전이 새롭지 않다는 평가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할 때 이 영화에서의 반전은 주인공이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지 알게 되었지만 갑자기 그와 일치되지 않게 정의로와진 위선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우리로선 당연한 반가움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로서는 자신이 찾게된 자신을 (원한다 해도)벗어나기 힘든 것이 더 당연한 인지상정 아닐까. 동료의 배신과 생명의 위협이라는 조건부와 상관없이 약간의 갈등도 없었던 주인공의 단호한 태도는 좀 아쉬웠다. 그래도 같이 살던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로 턴하는 방향인데 일말의 갸우뚱은 필요치 않냐는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미국영화의 옥에 티같은 한계이기도 한데 보스니아 내전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지나(다이앤 크루거)를 위해(?), 아니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녀 때문에 마치 은혜를 베풀듯 갑자기 테러를 온몸으로 막아 내고 인류건강에 이바지 할 주인공으로 변모하게 되는 그 영웅심, 미국 영화의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어쩌면 가장 큰 이득을 위해 온갖 종류의 테러와 전쟁을 계획해 내는 미국 스스로를 향한 예술적 단죄이자 문화적 보상은 아닐런지. 그런데 더 큰 진실은 늘상 알면서도 그것에 울고 그것에 우는 우리네 정많은 인간됨은 아닐지.

그녀를 생각하며 독일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유난히도 겨울을 싫어하지만 만약 겨울에 꼭 가야할 여행지가 있다면 나는 그곳이 독일이길 소원할 것이다. 나는 지적인 눈물이 좋다. 리암 니슨은 우리 나이로 환갑일 터인데 다음에도 액션을 하실런지 궁금하다. 다이앤 크루거는 아무래도 미스터리 장르에 어울리는 외모인데 이번 액션도 근사했다. 두사람은 나이차와 상관없이 지적으로 잘 어울렸다. 가는 겨울이, 혹 아쉽다면 이 영화의 흩날리는 눈발에 스산한 마음을 맡겨보면 어떨까. 차도녀는 역시 겨울이 제격 아닌가. 다가오는 봄이 살며시 두려워진 이 변덕의 미련이야 누구를 탓하리오만은 삶은 다행히도, 나를 대신해주는 또 다른 인생이 있더라는 것. 겨울이여, 잠시만 기다려 다오. 아직은 더 쓸쓸해지고 싶었다네, 나 아직은 봄처녀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네.
 


-다이앤 크루거 - 독일, 금발, 선글라스 차도녀 종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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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2-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배경인 영화가 좋긴하지요.
근데 허리우드풍일 것 같아 일단 좀 꺼려져요.
책이 더 좋다는 말도 있고...
마지막 쓰신 글에서 풉~
저도 얼굴이 참 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문제는 도시적이지는 않다는 게 흠이어요.ㅋㅋ

한사람 2011-02-24 14:33   좋아요 0 | URL

얼굴은 찬데 도시적이지는 않다...음...
상상이 어렵다는^^
슬쩍 책 정보를 보니 영화와는 많이 다르더라구요
완전 출장배경부터가 파리니까요
영화에선 아무래도 삭제된 서사가 많을듯 하구요

책을 먼저 봤어야 하는데....

그럼 반전은 완전 충격이었을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