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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도 인연이 되어야 펼쳐본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근 일 년 간 소식을 주고받지 않았던 (독서광인)한 지인이 우연히 내게 보내온 책들 중 한권이었다. 여름이후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책은 이미 여러 권이었지만 예의상 무심코 펼쳐든 터였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번째 소설인 <구멍>은 여간해선 이 책을 덮을 때까지 다른 책을 집어 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다. 언젠가 어느 작가가 말하길, 소설가는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잠긴 것들을 삽으로 팔 것인지 포크레인으로 팔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라 말한 기억이 났다. 안 그래도-최근에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실로-구덩이를 깊게 팔수록 마음만 지옥이니 그 속에 구덩이를 파지 말라는 누군가의 법문 비슷한 충고도 들은 바였다. 소설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해지기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나와 연배도 비슷한)이 작가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게 난 ‘구멍’의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 여기저기 함몰된 내 인생의 여러 ‘구멍’들이 잉크처럼 빠르게 번지더니 하나의 대형 맨홀이라도 만들어진 듯 가슴께를 둔중하게 덮어오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라는, 우리네 말할 수 없는 모든 비밀들의 무게이기도 했다.
이 책에 엮인 열 가지 작품들은 모두 화자가 말할 수 없었던 비밀에 관한 뒤늦은 고백들로 이루어 졌다. 공교롭게도 화자는 약속이나 한 듯 그때 그 일을 당사자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다. 조금 비겁했지만 뒤돌아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선택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언뜻 보면 인생에 있어서 진실의 파헤침이 아니라 묻어둠의 미학을 말하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열편 모두에 흐르는 작가의 공통된 낙관의식이 이해는 가면서도 어쩐지 무책임해 보인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나처럼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공감대를 제공하는 것과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라고 본다. 아마 이 책이 한편으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비밀스런 과거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라고 판단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나고 나면 대개 과거라는 실수와 상처에 대해 후한 점수를 매긴다. 우리는 어쩌면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꽤 너그러운 착각 때문에 계속해서 오늘을 믿어보고 그런대로 미래까지 예견하면서 꿋꿋이 살아가는 존재는 아닐까.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모두 도움 되지 않을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로 사람들이 이런 작품에 자석같이 끌리는 이유는 이와 같은 사후 긍정의 심리가 결국 불안한 미래와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우리들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에.
열 한 살 때 둘도 없는 친구 탈이 잔디를 깎다가 자기네 집 구멍에 빠졌을 때에도 나는 탈이 그 구멍으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당연한 사실이 섬뜩한 이유는 우리가 그 구멍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몰라서 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서 갑자기 그러한 구멍에 빠지게 될지 몰라서는 아닐까. 어떠한 구멍이라도 한번 빠져본 사람들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상 이 책의 전언처럼 들리는 첫 번째 작품 <구멍>에서 작가는 구멍을 ‘부정한 어떤 것, 하나의 비밀 같아’ 보인,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선 사실상 전혀 알지 못’하는,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크고 빈 공간’이라 정의했다. 내게는 이 정의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아마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언제든 이 구멍을 위험이 아닌 유혹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구멍>이 친구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본 죄책감에 대한 ‘고백’이라면 <코요테>는 부모의 결혼생활이 깨어질 것을 예감하고 그 과정을 목격한 스스로에 대한 ‘격려’ 이다. 열 두 살 때부터 겪은 아버지의 부재는 집 뒤쪽 같은 자리에서 울려 퍼지던 코요테의 울음소리로 천천히 들려온다. 화자는 예술가 아버지의 무기력한 일상과 다른 남자를 만나던 어머니의 외로움을 공평하게 이해할만한 나이가 되어 단지 그때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고 회상한다. 화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한 적이 없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을 접수하고 수렴했을 뿐이다. 그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도 전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각한다. 세월 지나 아버지의 재능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니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화자에겐 최선의 배려였을 것이다.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발견은 왜 꼭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1mm라도 움직인 후에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아술>은 아이가 없는 캐런과 폴이라는 부부를 통해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양식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은 알려졌듯이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인간의 천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이때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행동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인간의 (학습된)이성이 (천성인)직관에 의해 발달된 편향을 이길 수 있을까. 혹시 자신도 모르게 강요된 이성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미성년자 아술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직관이며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성이다. 두 부부는 아술에게 닥칠 위험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거울 같은 서로와 직면한다. 아술이 문제가 없는 교환학생이어야 자신들도 문제가 없는 대리부모로 위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신 혹은 외부가 바라는 모습대로 일치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일에 노출된 우리 스스로를 방치하고 자신을 모른 체 하는 경우가 있다. <아술>은 계산된 이성을 위해 익숙한 직관을 외면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마주해야할 자기기만에 대한 ‘진술’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사실 작품들 중에서 가장 뻔뻔하다고 느꼈는데 삶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과학적 이론을 아름답게 지지하는 문학적 변론으로 읽었다. 이 작품의 통속성을 해결한 건 제목이 팔 할이라고 보는데 ‘어느 누구도 빛 입자(인간)가 자신의 경로(삶의 방향)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지 못하며, 특정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은 작가가 드러내는 인생관이자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파인만은 일찍이 규칙이란 건 너무 괴상해서 믿을 수 없지만 그 규칙을 따른다면 답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수수께끼 때문에 과학이 흥미진진하다고 설파한 과학자이다.(나는 언젠가 파인만의 전기를 읽었는데 물리학을 전공한 지인에게 물어본 결과 전공자들도 파인만의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들은 적 있다) 자연의 이치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는 괴상하기 짝이 없어 우리 맘에는 들지 않지만 황당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고 - 이는 철학적 통찰력에 해당한다고는 보지만- 말이다.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사물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얽혀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 그 신비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파인만이 발견한 황당하고 괴상한 규칙이 우리네 알 수 없는 삶의 이치임을 주장하기 위해 당신이 버린 것들이 끝내 버려지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 버린 것들이 실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요건이 될 줄 우리는 그때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울적했던 이유는 로버트를 사랑하면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로버트라는 사실도 알면서 그를 떠나는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로버트가 헤더의 아버지벌 되는 교수라는 배경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종의 함정이었다고 본다. 헤더는 교수와의 불륜을 의식해 괴로웠던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로 발생되는 손득실을 따지게 되는 자신을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위험을 회피하고자하는 보편적 심리는 일단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결혼을 앞둔 남자친구)을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것(새롭게 생긴 로버트)을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헤더는 무언가를 결정해서 발생한 후회보다는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가 자기 삶에 득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 판단이 흐려졌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현재 남편, 심지어 자신을 보내준 로버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로써 끝은 아니다. 작가는 어쩐지 파인만의 이론에서 'strange'를 살짝 빼놓았다. 원래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이 세상의 규칙이다. 크게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결론은 여기까지이고 그 다음은 장담할 수 없다. 작품 너머의 헤더의 삶은 과연 변화를 택하지 않았기에 누릴 수 있었던 안락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죄책감을 덜기 위해 비밀을 고백하는 것이 누구의 행복과도 상관없는 일이라 깨달은 시절이 있었다면 반드시 오랜 비밀을 고백하고 거짓의 형벌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나머지 행복을 기다리는 최소한의 예의임도 깨닫는 날, 반드시 오게 되지는 않을까.
<강가의 개>는 그해 열일곱의 여름,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형의 범죄를 알고 있는 내가, 형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달라는 일종의 탄원으로 읽혔다. 형이 잘했다고 생각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외출>도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열여섯의 여름날 아미시 공동체의 소녀 레이첼과 나누었던 감정을 애써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나를 이해해달라는 청원. 인상적이었던 추억은 레이첼과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밤 맹목에 가까운 믿음으로 10미터 아래 강물위에서 나무 널판을 가로지르던 광경이었다. 재수가 없어 발이 쑥 빠져버리면 10미터 강물 아래로 추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았다는 화자의 기억은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에게서 적당한 호기심을 얻고 거리를 유지한 자신에 대한 -그러니까 그 나이에도 성숙할 수 있었던 -대견함으로 보였달까. 싸움에서 끝까지 무모할 정도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던 아이작 킹을 ‘비정상’이라 단정짓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어떤 동요도 없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한 시절 ‘눈먼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퍽이나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무사히 건넜다고 다음번 철로다리를 무사히 건너란 법은 없는 것 아닐까. 어떨 땐 발을 디디는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면서도 막연한 자신감으로 대책 없는 횡단을 할 때가 있지 않는가, 인생이라는 황당한 규칙에서는.
<머킨>은 어쩐지 한국적인 소설같아 보이는 친근함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동성애자 린의 공식적인 남자친구 마이클이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신이 가르치는 청각장애아의 싯구발표와 대치, 연결시킨 것이 적절했다. 설득력 면에서 가장 안정적이었다고 본다. 마지막 결말에서 린과 마이클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멀리서 지켜본다. 입이 있어도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호세는 마음이 있어도 린에게 전달할 수 없었던 마이클의 다른 모습이다. 두 가지 층위가 마지막에 합쳐지며 어느 정도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이 내가 추구하는 소설적 가치는 아닐까, 이 소설에 호감을 가지는 나를 통해 나는 나만의 비밀을 살짝 발견하기도 했다.
<폭풍>은 아버지의 부재로 상처 입은 누나가 자신의 -과거와는 달리-소중하고 따스한 미래를 위해 가해자 역할을 자신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에 대한 고백이다. 비밀은 여행지에서 누나가 약혼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약혼자가 자신을 버리고 이탈을 한 것이었다. 나는 누나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가족으로서 ‘가꾸기 힘든 씨앗’으로 판명된 누나의 분노를 이해하며 어린 시절 퇴근하는 아버지를 같이 기다리던 시간을 회상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것만큼 소박한 기쁨이 없기에 나는 누나의 비밀에 동의하며 누나의 행복을 바랄 수 있었다. 여러 작품에서 작가는 화자의 가족구성원 중 아버지의 부재를 배경으로 삼는 일관성을 볼 수 있었다. 특이했던 건 아버지의 부재로 어머니와 누나, 형은 모두 일정시기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균열의 상황에 이르나 그 모든 걸 지켜보는 화자는 언제나 객관적, 중립적 입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품 속에서 상실한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장으로서의 담담한 남성성을 무의식적으로 지켜온 것은 아닐까.
가장 짧았지만 꽤 강렬했던 <피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주 어이없는 결말로 마무리되던 체호프나 김영하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서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고 막상 그 미래가 오늘이 되었을 땐 지나간 과거를 습관적으로 후회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현재 내 모습이 미래를 이끌 것이라는 이 단순한 원리를 우리는 매순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긴 하지만 또 지금 내가 매달리고 있는 현재 마음이야 말로 가장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피부’는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오늘이라는 시공간의 시각적 표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피부로 이렇듯 삶의 시간을 이동시켜 그곳을 흐르는 굵직한 혈류로 이어지게 만드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마지막 작품인 <코네티컷>은 열 세 살에 목격한 어머니의 동성애 장면에 대한 당당한 폭로이다. 화자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이웃집 여자와의 비정상적인 만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건은 요양간 아버지가 돌아오고 가족 모두 예전 일상을 되찾았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과거 속으로 안개처럼, 스며든다. 화자에게 남겨진 건 무너지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추스르던 어머니의 모습, 그 힘겨웠던 노력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비밀을 감지하고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해 스스로 화해가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열 세 살 짜리가 어떻게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추론하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를 차분히 끌어가는 과정이 어머니도 화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이번 독서는 그리 즐겁진 않았다. 한 편 한 편 넘겨가며 이번엔 또 어떤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걸까, 왜 작가는 이런 종류의 비밀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와 비슷한 비밀이 어느 시절 나도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설의 작법으로 보자면 열편의 작품은 몇 가지 반복되는 패턴을 가진 자기 복제작에 해당된다. 주로 십대 사춘기 남자 캐릭터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워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 내에서 가족구성원들이 겪어야 했던 상처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목격한 후 그들의 비밀을 공유한 내가 결국엔 삶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으로 다양하게 육화되었다는 것이다. 화자가 그 시절 지켜보았던 건 내 주변을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겪어야 했던 이별 혹은 내가 감당해야 했던 누군가와의 이별이었다. 누군가와 헤어졌기에 그는 나와 만나고 내가 그와 헤어졌기에 그는 누군가와 이어진다. 그런데 가만 보면 크고 작은 이별 속에서도 작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해체시킨 적은 없었다. 가족이란 어쩌면 서로간의 비밀을 파헤치기 보다는 적당히 삭히며 묻어두어야 관계가 지속되기 쉬운 가장 비겁한 단위의 인연의 끈은 아닐까. 갈등이 없는 평화라는 게 실은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을 묵인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서로 이유를 묻지 않아도 더없이 편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그려본다. 사실, 한 가지 내가 너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평생 혼자 간직할 것이라는 자기 약속이야말로 얼마나한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인지 파인만이라고 알수 있었겠는가. 그저 괴상하고 황당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그것이 당신과 나의 인생이라고 조용히 끄덕일 수밖에.
파인만처럼 그를 추종한 작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