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별의 계절

 

 

여름이 끝나갈 즈음 어떤 인간관계가 멀어질 때가 있다. 어느 날인가부터 더 이상 서로 열대야를 안주 삼을 필요가 없어질 때, 아침이면 제철을 맞아 떼 창을 해대던 매미들이 슬그머니 조용해질 때, 한 시간씩 해가 짧아지더니 마침내 하루가 짧아진 기분이 들 때, 바로 그때 여름 내내 연락하고 시시콜콜 안부를 묻던 누군가와 시들해지는 중은 아닐까.

 

지난 이십년 간 여름에 특히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여름을 사람에 기대며 여름을 견디는 사람은 아닐까, 청소를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름과 가을이 뭐가 틀린 줄 알아?”

이렇게 묻고 나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빛의 무게야.”

이렇게 답했다.

“더 단단해지고 건조해진 빛들이 내 눈엔 여름보다 선명하게 보여.”

“사람 눈이 여름보다 한 곳을 더 오래 응시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사람은 계절이 변하려고 할 때, 그때야 비로소 내가 지나온 계절을 곱씹어보거든.”

 

우리는 여름과 가을 사이를 이야기 했고 아직 가을이 오기 전에 서둘러 멀어졌다. 어떤 이와는 전화를 끊을 때 다시는 전화 할 일이 없겠구나 예감하듯, 또 어떤 이는 ‘잘가’ 라고 인사할 때 다시 볼일은 아주 멀겠구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시 볼 것 같지 않아도 문득 마주치게 되는 이가 있으니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말로 내 뜻과는 무관한 일이 아닐까. 이런 저런 경험에 의한 삶의 법칙들이 하나둘 쌓여 - 아니 쌓이는 줄도 모르던 그 어느 날 - 자신만의 패턴이 되었음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 오늘 아침 비로소 빈번하게 반복되는 여름마감 이별의 법칙을 발견하곤 그것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 공식을 알고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없어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여름 이별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2. 이별의 약속

 

 

<마지막 4중주>라는 영화를 보았다. 사람들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슬프지 않은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옴을 스스로 이해시키느라 오랜 시간 마음정리가 필요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서 전혀 상관없는 영화를 보았지만 전에 일어난 일이 마음의 박동에 관여한 것이라 누군가 내게 이야기했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것이다. 나는 온전히 이 영화에 몰입했고 영화는 내가 잊고 있었던 슬픔을 가동시켰고 그것들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이렇게 우겼을 것이다.

 

요즘 나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나이드는 것, 늙어가는 것, 그래서 잘 늙고 그것에도 만족하는 것이다. 은퇴라는 것은 저렇게 - 지금까지 행복하게 해왔습니다. 이제는 이 자리와 이 역할을 나보다 건강하고 총명한 젊은 사람에게 양보합니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 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것이리. <설국열차>나 <감기>도 <숨바꼭질>도 좋았지만 어느 순간 자극적인 소재는 마치 음료수처럼 갈증만 유발하는 것 같다면 이 영화를 꼭 추천한다. 돌아와 OST를 찾아서 다시 들었다. 바로 지난주에 하루키책을 덮고 다자키 스쿠루가 들었던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하루 종일 들었는데 갑자기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듣고 또 들었다. 그들이 연주한 건 자신들의 인생이라기 보다는 모두의 인생에 기여하는 자기 역할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4중주  A Late Quartet, 2012 -

 

 

#3. 이별의 방식

 

 

 

“......거기서 벗어나 뭔가를 한다는 건 거의 생각할 수 없었어.”

“거기에 멋진 조화가 있었으니까?”

“거기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부분이 된 듯한 느낌이 있었거든, 그건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감각이었어.”

 

 

- p259,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등장하는데 한 개인이 전체의 일부분에 속해있다는 소속감, 일체감, 조화감이 주는 안정과 평화는 적어도 그 하나가 깨어지기 전까지는 아니 어쩌면 언젠간 깨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소설을 덮고 한 참 지나 - 막상 그땐 별 감흥이 없었지만 - 나는 여름 내내 그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면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관계가 일방적으로 단절되었을 때 - 주로 내가 아닌 상대 혹은 타의 및 환경에 의해 - 그것을 견디는 힘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보다 잘 헤어지는 다시 말해 이별이 더 익숙한 그러니까 이별 후 상처에 덜 민감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 그의 내적자아는 어디서부터 단단해진 것일까.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나는 이 소설이 좋지 못한 이별을 한 주인공이 뒤늦게라도 좋은 이별을 하고 돌아와 비로소 단단해진 자신과 마주하는 여정으로 읽었다. 나는 이별의 방식도 습관이 된다고 믿는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이별법은 하루라도 빨리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4. 이별의 대처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거나 떠나버리곤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일터이다. 모든 일상이 잠시 정지되고 더 이상 삶이라는 그릇에 아무것도 담으려 하지 않는다.

 

꼭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야 자폐공간에 숨어든 건 아닐테다. 어떤 사람은 방에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집과 회사만으로 최소한의 동선을 유지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취미삼는 특정 모임 혹은 장소를 자폐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다니는 장소만 다니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도 비슷한 심리에서 파생되는 증상이다. 불안하거나 위험요소를 피할 수 있는 사람, 해당 장소에서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거의 24시간 잠을 잔다. 최소한의 기초대사량만 소모하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말수가 줄어들며 행동반경은 최소화한다. 잠들지 않아도 누워서 눈을 감고 잠들고자 더 정확히는 깨어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슬픔을 감당하려면 일정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나는 그 슬픔의 무게에 압도되어 얼마간 항복해버린다. 그러니 이별한 후 내 자폐공간은 침대인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몸을 움직임으로써 마음을 조절한다고 하는데 나는 내 마음과 몸이 가장 일치하는 장소를 찾게 된다. 고통을 인식하고 슬픔, 분노, 원망과 화해할 용기가 일어 날 때 비로소 한발짝 내밀어 걷기라도 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오래 걸으면서 무언가를 떨쳐버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이도 나이 들어서 그런 건지 일단은 드러눕는다.

 

어떤 방법이 되었건 좋게, 이해할 수 있게 이별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인연따라 만났다가 인연따라 헤어지는 것이니 슬퍼할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슬픔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다. 여러 번 이별을 겪었고 그때마다 슬픔을 잘 극복했다고 해서 다시 슬퍼질때 덜 슬퍼지지는 않는다. 외려 어떻게 슬프고 얼마나 견뎌야 할지를 알기 때문에 그 경험치 만큼의 플러스 알파가 더해지기까지 하는 게 나이듦의 서러움일 것이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죽을 것 같던 모든 이별도 결국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나는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이별들이 새로운 이별들을 견디고 보내게 하는 아주 고마운 시간들. 그래서 여름과 이별하는 것도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애도 과정에서 내면에 통합되어야 할 것은 떠난 사람이나 그와의 추억만은 아니다. 애도과정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들도 의식속으로 통합해야 한다. 고통을 조절하고 슬픔과 화해해야 한다. 애도작업을 이행한 사람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거나 사망한 후 훨씬 의미가 풍부해지고 역량이 커진다. 내면화, 통합이 영원한 성장법임을 알고 적극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 <좋은 이별>, 김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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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8-25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사랑스레 사귄 이들과 즐겁게 놀고 나면
즐겁게 헤어지고, 다시 즐겁게 만날 날을 기다릴 수 있어요.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도 즐거이 누리시기를 빌어요.

2013-08-25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3-08-3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다른 곳에 살았지만,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군^^*
다자끼 스꾸루와 마지막 4중주.

당신에게 여름과 함께 이별한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가을과 함께 다시 만난 사람으로 해주라~

각자의 자리겠지만,
잘 지내자, 우리~
 

 

 

 

 

가끔 대책 없이 오랜 세월 한 사람만을 사랑해온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 보기엔 그 대상이 그렇게까지 인생 전체를 걸만큼은 아닌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외려 그 한 사람에게 인생 전체를 걸었던 사람이 더 아까울 정도로 능력 있고 모자랄 것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어도 좋을 대상이 너무나 훌륭하고 완벽해서 라기 보다는 목숨 거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다른 무엇과 바꾸지 않겠다는 아집의 문제인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갈망은 곧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욕망이라 생각한다. 내가 느낀 내 사랑을 얻어내고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의지는 실은 대상의 소중함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세월이 지나면 환경과 조건이 변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변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변한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까닭이다. 어느 시절이건 왜 그래야 했는지 이유를 먼저 따지고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그저 세상이 사람이 원래 이런 것이라 받아들이는 편이 더 지혜로와 보인다.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세월 지나면 절대 머물러 있지 않는다. 단지 소중하게 여긴 내 마음을 기억하고 오래 저장해 두었기에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손에 움켜쥐어 봤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과거를 거슬러 시간과 공간, 상황을 그때 수준으로 복원하면 사람과 사랑까지 다시 되찾을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이 간혹 있다. ‘되찾고 싶다’와 ‘되찾아야 한다’가 목숨만큼 절실하다고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마 지난 5월말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로 보고 난 후였던 것 같다. 그런데 글은 두어 달이 지난 다음에야 쓰는구나...

 

 

 

책만 읽고 글만 쓰던 생활패턴이 바뀐 지 오래다.

 

 

독서와 글쓰기에도 근력이라는 게 있어 매일 습관붙이지 않으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 나는 책과 글을 멀리 하면서 매우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온라인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다보니 온라인에서의 관심사에서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알라딘을 알고 여기서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 ‘이름이 뭐예요?’ 하듯 모르는 사람에겐 전혀 몰라도 될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하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다들 더 바쁘고 더 소통하고 현명하게 사는 것 같아도 들여다보면 더 멍청하고 더 외롭고 정신없이 산다는 걸 깨닫고 있다. 소통의 홍수는 반드시 불통의 씨앗이 된다. 즉각적인 반응은 잦은 실수와 무례를 부른다. 하루하루 누구와 무엇을 주고받는지 모르게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이것이 쌓이다 보니 요즘은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다들 서로가 아닌 전화기 화면만 쳐다본다. 서로가 다들 문제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그렇게 살아간다. 궁금한 건 바로 해결되고 처리도 빨라 참 편리한 세상인데 사람 마음, 그 마음 하나는 어쩐지 더 허무해지고 텅 비어간다.

 

 

채울수록 허탈해지고 비울수록 마음이 채워짐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또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하루를 나선다. 벌써 주문한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반도 못 읽은 책들이다. 아무런 편견이나 어떠한 부담없이 그저 소설 읽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재미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중이다. 처음엔 제목이 웃기다 생각했는데... 그 의미 역시 알아가는 중이다.

 

이번 주말엔 꼭...

 

장마가 지나고 한 여름이 시작되려한다. 매미가 우렁차게 울어대는 걸 보니 여름은 여름인가보다. 모두 저마다 자기 갈 길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이므로 왜 그러냐 묻지 말기로.

 

 

 

 

 

 

 

 

 

 

 

 

 

 

 

천천히 답하고

좀 시간을 두었다가 결정해도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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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7-2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은 두권이라 반갑네요^^
더 멍청하고, 더 외롭고, 더 정신없이 살게하는 스마트폰!
최소한 휴가때는 스마트폰을 멀리하려고 생각중입니다.

숲노래 2013-07-2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남 깊은 시골에서는 한창 한여름이었지만
서울 경기 강원 수도권은 이제 좀
장마가 걷히면서
후끈후끈 한여름이 되는구나 싶어요.

땀 뻘뻘 즐겁게 흘리면서
시원하고 재미난 하루하루 누리셔요

2013-07-26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그러냐 묻지 말기로~" ㅎ
 

 

 

글쎄,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저는 정치인 유시민은 별로였지만 글쟁이 유시민은 좋아졌습니다.

 

 

사실 유시민은 변한 게 없지만 제 마음이 변한 것이겠죠. 제 마음이 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유시민의 개인적인 고백, 말하지 않았던 가족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심경 등입니다. 저는 몰랐던 유시민의 한 부분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한 것이고 그것들은 현재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던 제 마음에 천천히 밀착되어 앞으로 이 사람이 정말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였습니다.

 

 

저는 유난히도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화두에 자석처럼 끌립니다. 누군가 지금 하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 무어냐 물으면 늘 습관처럼 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는지 헤아려 보면 대충 6,7년 정도는 된 듯합니다. 이런 질문에 심각하게 봉착하게 되는 계기는 아마도 그동안의 삶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일 테고 그러한 시간은 무엇이 계기가 되었든 언젠가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지금까지 혹시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괴감에 빠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다시는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 뼈저리게 자각하는 순간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어쩔 수 없이 또 그렇다면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마음속 유언을 차분히 정리하게 되어 있죠.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음으로써 남은 삶을 마감할 것인가의 준말인 것입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저는 왜 이리 허무하고 서글픈지 모르겠습니다. 그 추운 겨울을 잘도 견디었는데 막상 기다렸던 봄이 오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으며 꽃은 피었다가 다시 질 것이라는 자연의 이치만 분명해질 뿐입니다. 지금, 여기 오늘 내가 사는 이곳에서 감사와 기쁨을 느끼며 내가 마주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내가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스님이든 교수든 이제는 멘토식 멘트의 정석이 되어버린 말들이 왜 이리 진부하고 지루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어쩌면 이미 답도 잘 알면서 그새 다른 말들, 다른 생각, 다른 글들이 그리워 여기 기웃, 저기 들락거리는 건 아니었을까요. 어디 공허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지적이고, 너무 잘난 척 하지 않으면서 감동도 있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가끔은 이상을 염원하는, 그래서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아 마지막 한 장을 덮고 나면 뭐야? 가 아닌, 음... 하며 천천히 무언가 채워지는 듯한 그런 책이 없을까... 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났네요. 책도 인연이 되어야 펼칠 수 있고 덮을 수 있습니다.

 

 

요즘 출판계에는 오십대가 쓴 오십대 이야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죠. 주변에 오십대가 많아서 그런지 유시민도 오십대 중반이라서 그런지 이 책 역시 오십대가 전하는 깨달음의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저자는 시종일관 원래의 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다가가는 삶, 궁극에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고 싶다고 외칩니다. 그런 생각이 지금 가장 화두인 이유는 그동안 그렇게 살지 못했기 때문은...아닐까요. 그는 왜 원하지도 않는 삶을 그토록 치열하게 살은 것인지... 그런데 가만 보면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왔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 ‘운동movement'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학생운동에 청년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정치운동까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때가 없었다.

 

 

그는 말합니다.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사는 인생으로 살았고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고요. 결국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니까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겠죠. 얄밉게도 저 위에 올라간 본 사람들은 내려온 후 꼭 그렇게 말하더군요.

 

 

- 나는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참고 견디는 삶에서 벗어나 일상이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또 다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이 이제 다시는 정치인으로 살지 않겠다로 들리진 않았어요. 정치인이 되기는 싫었지만 국민의 염원 때문에 그 거대한 바램을 거스를 수 없어 정치인을 하기로 결심한 안철수를 보면은요. 중요한 건 그가 정치를 다시 하건 안하건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진심은 물씬 전해진 게 아닐까, 저는 그러네요.

 

 

 

- 그런데 아무리 잘 살아도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형 집행일과 집행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살아 있는 인간은 모두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자살을 제외하면) 누구든 죽음의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좋은 죽음, 바라는 죽음은 상상하고 염원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 속에서 유난히도 인격적 존엄, 인생의 품격을 주장합니다. 왜 자살하지 않는지 카뮈의 질문을 빌어 여러 번 묻고 답해보자 부추깁니다. 알고 보면 이 풍진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도 자살할 이유가 없어 자살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죽을 만큼의 이유는 곧 살만큼의 이유와 같다고 느낍니다.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는 개인의 의지이고 선택입니다. 만약 십 분후 추락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면 그 남은 십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정치말고 더 좋은 일을 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 참 많은 사람을 사랑했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이 조금 났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만약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십 분을 허락받는다면 나는 그 십 분을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보낼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사랑의 감정을 되살리면서, 그것이 주는 행복한 느낌을 음미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 책에서 모르는 뜻, 이해 안 되는 문장, 난해한 표현 같은 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정치인 유시민의 삶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가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처음엔 세간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이어 온 분이라 이 책 역시 이제 이런 글을 쓸 만한 적당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의 글을 책으로 펼쳤구나, 이런 편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진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글이면서 또 가장 크게 감동 느끼는 것도 글이잖아요. 독자가 원하는 글을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책 덮은 후엔 제 선입견이 부끄러워 졌어요.

 

 

저자는 정치로 마모된 인간성, 소모된 인격을 채우는 일은 역시 글쓰기였고 앞으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나 글 쓰는 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설같은 문학작품에도 도전한다면 어떨까...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이 책은 독자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을 듯 합니다.

 

 

꽃구경 가려던 마음을 비 때문이라며 핑계를 실컷 할 수 있는 주말입니다. 통계적으로 3,4월에 가장 많은 자살 시도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활발해지는 계절인가 봅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하는데 봄비를 느끼며 죽음을 준비해 보는 시간은 어떨까요. 애통함을 덜 남기고 마지막 순간 자기 인생에 후회가 없으려면 제대로 삶을 살아야 할테니까요. 왜 자살하지 않는지, 남 몰래 목록을 적어보는 건 어떨까요. 아주 옛날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수첩에 적어보다 그 수가 터무니 없이 적은 것에 한숨을 쉰 적이 있답니다. 지금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아마도 우리를 더 살게 하는 삶의 기쁨이자 행복일 거예요. 사실 따져보면 여러 좋은 장점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기쁜 요소들이 많아서 행복이 큰 것은 아니지요. 남들이 보기엔 너무나 하찮고 별 볼일 없는 이유일지라도 내가 행복해 하는 그 하나만 있다면 우린 오늘도 내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니까요.

 

 

 

유시민의 텍스트가 빡빡하게 느껴진다면 이런 책도 있더군요. 요즘 스님들의 서적이 어엿한 장르가 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부터 스님 책들에 마음이 끌립니다. 삶과 수행이 일치하는 분들의 가르침은 언제고 환영입니다.

 

이 책의 화두 역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거든요. 밤에 잠들기 전 차분한 마음으로 몇 페이지 읽고 덮기에 좋습니다.

 

이 분의 말씀 중에 '생각이나 말이나 글을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실과 진실, 실재의 내용과 모습을 확인하는 삶'이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며칠전 친구와 아무일도 없었는데 그저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말과 문자로 언쟁이 오간 적이 있었기에... 저로선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것 같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느낌을 전하는 것도 글이므로 글의 필요성이나 효용성에 의문을 가지자는 건 아니구요. 다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라고 자기가 쓴 글, 자기 머리에서 든 생각이라고 그것이 내것이며 마치 내 자아를 대변하는 양 그것에 끄달리며 살아가는 것의 어리석음을 의미한다고 여깁니다..불교에선 무아와 무상만이 깨달음의 지혜라 주장하니까요.

 

 

며칠 전 ‘지아이조 2’- 이병헌이 주연이던걸요? -를 보고 나오면서 시집 모음집을 하나 샀는데 온라인에서 봤으면 구입하지 않았겠지만 시집들 속에서 상대적 경쟁력을 가지고 제 손에 들어와 잡혀버린 책입니다.

 

저는 요즘 시들이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한편 씩 해설이 깃들여진 글들이 좋더군요.. 시 선택의 기준은 완전히 저자의 마음입니다. 제가 어떤 기준을 가질 수준이 안되기 때문에 그냥 믿어보고 의지하는 것이죠.

 

 

 

 

 

 

 

 

 

오랜만에 주말에 글을 써 봅니다. 예상대로 비가 많아 머리도 가슴도 촉촉함을 유지하기 그만이네요. 이렇게 촉촉할 수 있는 봄이 아직도 충분히 남았는데 어찌, 자살할 수 있겠어요. 모든 자살을 떠올리는 젊은이들이 이 봄은 화려한 색색의 꽃들만 사는 게 아니라 색도 향도 없는 바람도 비도 가끔은 눈까지도 삶을 기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당신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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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4-0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촉촉한 비가 오며 이제 사월 꽃들 깨어나라고 재촉하는구나 싶어요.
이제부터 모과꽃도 뽕꽃도 감꽃도 피어나겠구나 싶어요.
고운 삼월 지나
어여쁜 사월 다가옵니다.

채소가몸에좋아 2013-04-0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성 있고 좋은 글 너무도 잘 읽고 갑니다.
 

 

 

 

#1. 흘러간 마음

 

 

2012년 하반기 이후 거의 서재 활동을 하지 못했다. 내가 책을 돌아보지 않은 시기는 정확하게 6월 달부터. 그런데 엊그제 서재의 달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덜커덕 한동안의 무심함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이 뭣고. 누가 무엇이 되었는고. 내가 왜.

 

서재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시기 다른 활동과 개인적인 공부 등으로 어떻게 한해가 지나갔는지 인식할 수 없었다. 그동안 출판사로부터 몇 차례 책을 무상으로 받고 서평도 쓰지 못한 책이 수두룩하며 아예 들쳐보지도 못한 책도 상당하다. 미안해서 받아 놓고 그렇게 무책임한 시간이 흘러 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심지어는 어떻게 서평을 썼는지 조차 잊어버렸다고 할까. 다시 돌아와 보니 이 낯설음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꼭 옛날 애인과 재회라도 한 듯한 기분. 그동안 나 없이... 잘 살았어?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차츰 서재와 멀어져 간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천천히 조금씩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음은 흘러가 버리는데 무엇을 좇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 사이도 그런 걸까. 어떤 이와 친해지다가도 서로간의 오해로 틈이 벌어지고 한동안 멀어졌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반가와 지는 것이. 그러고 보니 왜 헤어졌는지 모르게 헤어져 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걸까. 그렇담 우리네 이별의 이유란 그 이유 때문이 아니고 그저 헤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인 걸까.

 

이곳에 머무르지 않는 동안 나는 열정에 대해 위험성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활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든 일이든 그것을 대상삼아 대부분의 일상을 의존하고 기대기 시작하면 반드시 실망과 상처가 따르기 때문이다. 적정한 거리두기. 한발짝 물러서기. 잠시 쉬어가기. 멈춘 것에 조바심 내지 않기. 때로는 멈춘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지켜봐주기. 다시 마음이 일 때까지 그 마음 기다려 주기.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 일이다. 정작 글을 쓰고 있을 때 나는 글이란 무엇이고 어떤 글을 쓰며 생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글을 안 쓰는 것도 아니고 안 쓸 것도 아니면서 그랬다. 불안이고 초조였다. 글을 수단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 혹시 글은 아닐까 싶어서 였을 것이다. 글을 안 써도 되고 글로 아무것이 안 되어도 좋다라는 마음이 들 때까지 글이 아닌 것들을 다시 찾아 취해보았다. 예전에 하던 일을 했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다. 글을 안 써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믿었던 이 역설이 나를 다시 깨웠다.

 

그러다가 신기하게도 작년 말에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내 자신도 내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사람에게 마음이 한결 같다는 말은 틀려도 한참 틀린 말은 아닐까. 마음은 환경과 조건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하는데 어떻게 한가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 변하지 않는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변하는 마음만을 믿는다. 그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변할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이 사실을 믿는 내 마음조차 변할지 모른다. 마음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우리는 때로 좇아가며 때로 머무르며 그렇게 내 하나의 마음이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

 

 

#2. 다시 흘러온 마음

 

 

마음 공부를 하면서 전문적인 서적과 유명한 스님들의 에세이, 혹은 불교 경전서들을 들쳐 보았다. 종교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의도가 일차적이었다. 그들 중에 실생활에서 도움이 되는 책과 반복해서 읽기 좋은 책을 소개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독성, 탐욕과 화, 무지를 어떻게 정화하고 치유하여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지 알려준다. 요즘은 힐링 서적도 많고 저마다 건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하고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단순히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일회성 위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속세에 살고 있는 우리가 불교에 귀의해 절에 들어가 스님처럼 도를 연마하자는 뜻이 아니다. 어떤 분야 어느 지위에서건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치유하는 불교읽기에서는 평가기준을, 마음공부를 통해서 인간이나 자연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그릇된 생각이 잘 치유되어 안정되고 조화로운 정서 상태를 회복했는가에 둔다. 또 자신의 내면과 대인관계에서 얼마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조화롭고 균형있게 드러나는가에 관심을 둔다. ...(중략) 내면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명료해져야 하고, 대인관계에서는 뭔가 그만큼 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너그러운 말, 행동, 생각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치유하는 불교읽기는 바로 이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말과 행동과 생각을 치유하는데 일차 목표를 둔다.
- 22p

 

보다 적게 화내고 정서적으로 일관된 인격이란 말처럼 평범하고 쉬운 단계가 아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절로 수행이 된 인격으로 변화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상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해져 자아중심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고,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나의 가치관은 이것이다는 식의 ‘나’에 대한 온갖 고정관념만 늘어날 뿐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믿다가 그 ‘나’에 속고 그 ‘나’가 진짜 자신인 줄 착각하며 상대에게 ‘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기수인가. 물론 나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불교에서는 자아란 결국 과거 경험의 누적과 그에 대한 집착일뿐 고정된 자아의 실체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교와 사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아의식을 교육받고 내 생각, 내 주장, 내 방식, 내 견해를 정립하여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나를 만들고 알리는 길이라 배워왔다. 이러한 과정이 2,30대 치열한 경쟁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는 성과위주의 세월을 지나온 세대에겐 자아야 말로 조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무엇이 진짜 나인지,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내가 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시원하게... 답을 할 수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자신과 이웃을 끊임없이 비교하고(我慢, self-pride), 자기중심적인 사랑(我愛, self-love)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我癡, self-ignorance), 그러면서도 영원하고 독립적인 자신이 존재한다는 견해(我見, self-view)를 버리지 못한다. 이것들이 어떻게 인간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지 왜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그 중심에 철저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자아가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괴로움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가 있다. 아무리 ‘너’가 있다 해도 결국 ‘너’를 보고 무언가를 느낀 ‘나’를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괴로움의 뿌리를 본다는 것은 그 괴로움 속에서 ‘나’를 본다는 것이다. 이 책은 화나고 섭섭하고 불편한 마음 이면에 ‘나’를 드러내고 세우려는 마음이 손상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한다. 혹시나 요즘 들어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다고, 아니면 늙어가는 내 몸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면 괴로움의 화살을 내 마음으로 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마음 어느 구석이 고장났나 먼저 알아보고 집중적인 치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반야심경이다. 제대로 느리게 읽기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은 어렵고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 답답할 때가 있다. 중요한 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진다는 것. 마음 공부를 시작하고 나면 자꾸 더 깊고 넓게 마음을 헤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 책은 지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머리로는 이해하나 제대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는 없는 책이다. 아는 것과 하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 일체될 때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이루어지는 것 일테고 내 수준에선 그저 ‘알음알이’나 ‘엿보기’에 그치는 듯 하다.

 

 

참고로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사이트를 첨부한다. 내 경우 이동 중에 스마트 폰으로 들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목소리 톤과 이야기 하는 방식이 자신에 맞는 스님을 택하여(?) 하루 한번 명상하듯 들으면 공부도 되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 종범스님의 향기있는 법문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457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678

 

- 치유하는 불교읽기(서광스님)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741

 

 

물론 머리로는 이렇게 알고 있지만 또 화는 나고 그 화를 참기는 어렵다. 단지 지난 육개월 동안 이곳을 떠나 조금이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 화가 나고 그 마음이 곧 떠나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러는 동안 화가 난 나는 화가 나지 않는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다. 내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이든 깊고 처절하게 바라볼 수 있다. 언젠가는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또 불현듯 화가 나고 슬프겠지만 그것을 좇아 머무르지 않아야 함을 아주 조금 깨우쳤다고 할까...

 

자신의 마음구조와 반응행동, 인간관계 패턴에 대한 치열한 이해는 사는 동안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마음 편하게 내일도 모레도 사는 날, 아니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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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는 날'은 생각하지 마시고요,
'살아가는 오늘'만 즐거이 생각하셔요.

반야심경을 읽은 뒤에는 금강경 읽으시겠지요?
한글로 옮겨진 불경은
누가 옮기느냐에 따라 줄거리나 느낌이 달라지는 듯해요.
그래도, 책마다 서린 이야기를 잘 헤아리면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리라 믿어요.

2013년 한 해에
'글 없이 예쁘게 사는 사람들 사랑'을 잘 삭혀서
'글 하나에 담는 웃음꽃' 곱게 나누어 주소서.

마녀고양이 2013-01-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그동안 뭐하셨습니까... ^^
한사람님, 고운 새해 맞이하고, 새해 초반부에 얼굴 내밀어줘서 감사드려요.. 헤헤.

화를 낸다, 슬픔을 느낀다, 모두 인간이니까 당연한거 아닐까 싶어져요.
열정만큼 화를 내고 분노를 느끼고 슬픔도 삭히고, 한사람님은 부러울 정도로 열정이 많은 멋진 분이예요.. 부비부비.
아하하.... 덧붙여 저두... 그놈의 화가 한몫을 한다눈.. ㅋ
우리 올해 사땡 잡았네요, 우앗....

덧붙임. 헛갈리실까봐, 저는 마녀고양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