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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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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사람들

   이 책은 재미난 책은 아니지만 의외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내가 그들의 작품을 읽은 것이라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까뮈의 <이방인>정도에 불과했다. 이 단편적인 지식과 어디나 천편일률적인 인물 소개를 통해 내 머릿속에 저장된 그들은 그냥 위대한 프랑스 지성인중 두 사람 정도였달까.(한명이 철학자고 한명은 예술가라는 구분없이) 두 사람이 친구였고 서로의 사상 때문에 절교를 했는지 그들 사이에 보부아르라는 증인이 있었는지 그런 사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프랑스 어느 시기 아니 세계사의 어떤 흐름속에서 어떤 개인적 의도로 작품을 집필했는지 해당 작품이 상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알려고도 않은 채) 그동안 나는 그래도 그들의 작품을 읽어는 봤다는 알량한 독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새삼 사르트르는 왜 그러한 변명을 하면서 지식인을 ‘정의’ 내리려 했는지 까뮈의 뫼르소는 왜 그러한 ‘살인’을 해야 했는지 다시 질문하며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서로는 서로를 만난이후 평생 동안 아니 죽고 나서도 서로의 작품을 벗어나 본적은 없는 듯하다. 이것은 서로가 한 말과 글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한 운명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상대의 전체 중 부분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독자적으로 완성된 작가들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런 운명적인 관계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두 사람의 치열했던 인생을 때론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때론 망원경으로 조망하며 독자들 앞에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였다. 번역도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자의 사유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정직하게 배치되는 느낌을 받았다. 또 미처 읽어보지 못한 두 사람의 작품도 골고루 소개하며 때론 집중적으로 반복, 인용하면서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정성도 대단했다. 결국 숨은 에피소드, 두 사람의 지인, 당시 잡지와 기사, 언론과 대중의 반응, 정치 및 국제 변화등이 다양하게 증언의 역할을 하며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한편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영화 한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엿보는 듯한 추적과 추리, 추론의 재미가 아닐까. 사색과 사유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바이다.



1. ‘관찰자’로서 ‘개입자’ 되기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거슬렸던 건 사르트르도 까뮈도 아닌 보부아르였다. 보부아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밀접하게 그들을 겪은 지인으로 등장한다. 때론 인터뷰로 혹은 자신의 문학으로 그녀는 그들을 회상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나는 보부아르가 여성이었고 사르트르와 연인관계였던 것이 궁극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조건임을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려본 상황은 같은 여성으로서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세 사람간의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가장 측근에 오래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도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녀의 견해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그때 같은 장소에 있었던 보부아르는, 하고 자주 증언의 기회를 부여, 삽입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종의 불쾌감이 자주 들었고 보부아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저자의 말처럼 ‘제 3의 극’으로서 관계에 연루된 자로서 적어도 이번 영화에선 주조연이 확실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몇 년 동안 두 명의 남성과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둘 다 각각 그 분야의 최고였다. 한명은 기획자로서 지적인 외모를 가졌고 한명은 디자이너로서 터프한 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 두 명은 나와 작업을 하기 이전에 이미 동료이기도 했다. 동창이거나 사는 동네, 전공때문이 아니라 업무상의 필요에 의해 친구가 된 경우였다. 나는 디자인을 공부한 기획자였다. 내 역할은 기획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풀고 디자인의 의미를 다시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가 없어도 결과물을 낼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커지자 더 큰 성공을 위해 나는 계획적으로 투입된 사람이었다. 기획자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한국의 일류대를 졸업했고 디자이너는 어렵게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였다. 둘 다 기혼자였기 때문에 나는 이성적(異性的)으로도 자유로왔고 한참 선배들이라 그들 양쪽으로부터 배우고자하는 의지가 충만한 시절이었다. 우리 팀은 바깥에서 보기에 완벽해보였다.

   궁극에 추구하는 작품 성향은 같았지만 세분화하여 나눠보면 어떨 땐 기획이 더 좋은 평판을 얻기도 하고 어떨 땐 디자인이 뛰어나 당선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간 자존심 문제였는데 세간의 평판에 따라 그들은 점점 어색한 사이가 되어갔다. 원래 사내에서 브리핑을 도맡아하던 냉철한 기획자는 처음엔 새로운 감성이 돋보이는 디자이너를 앞장서서 소개하고 각종 모임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성적인 매력과 섹시한 외모를 지닌 새로운 디자이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는 가끔 돌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충동적인 감성으로 주위를 놀래켰지만 그러한 기질적 성향마저도 창의적인 태도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기획자는 좀처럼 일인자의 자리를 디자이너에게 내주는 법이 없었고 일의 성과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 인맥이 풍부했고 사회성이 뛰어났던 기획자는 업계에서 디자이너를 소외시키는데 성공했고 두 사람은 공모에서 적으로 자주 만나는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기획자, 디자이너 모두 개인회사를 오픈하여 실력있는 업체로 인정받았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고 특히 디자이너는 (업계와 타협하지 않는)독자적인 행보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주류 디자인 인맥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실수나 오류를 감싸안는 디자이너들도 많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인 디자이너에게 더 끌렸지만 업무이해 관계상 디자이너의 편을 들어주진 못했다. 나도 결국은 기획자였고 내가 디자인으로 밥벌어 먹고 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디자이너의 곁에선 영원한 보조나 이인자가 될 것이라는 계산적인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나도 그를 외면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했기로 그 디자이너의 생각과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많이 도와줄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겁하게 침묵한 적이 많았다. 내 쪽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은근히 그의 작품을 비난의 도구로 활용한 적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선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마음 한 켠에 이렇듯 오래된 부채감은 오래도록 나를 분열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들 기획자의 마음속에 그는 차별화된 능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던 최고의 디자이너였지만 이미 그가 화려하게 재기하기 힘들 시점에서야 그의 전설을 가십거리처럼 회자하곤 했다. 학벌과 지연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그는 일인자가 되기 힘들었고 그를 견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비타협적인 독선, 다혈질적인 성격, 예술적 고집을 이유로 들며 그를 고립시켰다.

   내가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내 개인적인 경험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대도 다르고 분야와 레벨도 다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감히 회사시절 내 위치를 사르트르와 까뮈의 우정과 투쟁을 지켜본 보부아르의 위치와 견줄 순 없겠지만 나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의 역학적 흐름을 바탕으로 몇몇 그녀의 인터뷰에서 위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필히 까뮈에게서 더 남성적인 매력을 강하게 느꼈다고 판단된다.(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으리라고 본다) 까뮈는 사르트르보다 보부아르에게 마음을 자주 털어 놓았고 보부아르 역시 (사르트르 부재시)그런 카뮈를 받아주었을 터이다. 사르트르는 작은 키, 사팔뜨기라는 핸디캡으로 외모상으로 카뮈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쪽이었다.(나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부아르는 각종 모임에서 카뮈와 사르트르가 여자를 사이에 둔 감정적이고 성적인 긴장이 종종 있었다고도 언급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위대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도 결국은 그 이전에 여성에 어필하는 남성이었다. 그들은 사상과 작품, 정치뿐 아니라 남성성으로서도 내외적으로 경쟁하는 위치는 아니었을까. 경쟁구도 속에서 보부아르는 머리로는 사르트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알고 있고 친하다는 것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는 순간도 있었을 터이다. 때론 카뮈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론 사르트르에 대한 미안함으로 대외적 칭찬과 비난을 적절히 구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대리인이 되어 글을 쓴 적도 있었고 카뮈의 상담자가 되어 위로를 한 적도 있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보부아르는 그들 사이의 단순관찰자가 아니라 ‘제 3의 극’으로서 그들 관계에 자발적, 타의적으로 개입했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모든 공표된 객관이 결코 그녀 개인의 모든 주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백프로 솔직하지 못했다고(할 수 없었다고) 여긴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면 필히 보부아르를 그들 사이 중재가 아닌 긴장을 유발하는 주역으로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만약, 이 상황에서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 보았을 것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우정에 이미 오래전부터 개입되있었던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건 관찰자가 아닌 확실한 개입자 혹은 공모자, 방관자, 조정자로서 이 영화속 주조연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덕에 이렇듯 독자의 위치에서 그들 사이 인간관계를 추론해보고 또 내 맘대로 배치시켜보는 건 행운이었다.

   그녀의 많은 증언가운데 기억나는 한마디를 옮겨본다.


“ 나는 그(카뮈)에게서 그가 자신의 생과 쾌락에 몰두하는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를 좋아했다. ”     -114p


   나는 그녀마저 사르트르의 우월감의 테두리에 포함되려고 했던 심리가 거울을 보듯 당황스러워 슬픈 기분마저 들었다. 보부아르는 여튼 카뮈에 대해 호불호를 자주 언급했는데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방식이 기분좋지는 않았다.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는 나로선 상당히 모멸감을 느끼는 표현이다. 보부아르는 왜 그 좋다는 태도로 인해 카뮈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자신들은 열광적이지도 그래서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혹 카뮈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기 충분했지만 진정으로 카뮈를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2.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책을 덮고 두 사람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떠오른 감정은 확연했다. 사르트르의 우월감과 카뮈의 순수함. 적어도 사르트르는 카뮈가 자신에게 대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치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카뮈를 처음만난 날부터 (자신이 가지지 못한)그의 재능에 이끌렸지만 항상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평가하고 재단했다. 이는 사르트르가 이미 유명인사로서 연장자였고 출신성분도 중산층 이상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었기에 알제리 출신 청소부의 아들이었던 카뮈를 자연스럽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될 수 있었을 터이다. 카뮈역시 자존심 때문에 그의 위성으로서 무리에 속하길 원하지 않았고 사르트르 다음의 이인자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외려 정치활동은 카뮈가 더 선배격이었고 레지스탕스 대원, 비중있는 일간지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얼마든지 자신을 차별화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는 양상을 들여다보면 사르트르가 카뮈에 더 적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카뮈는 배신과 상처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것이 사르트르가 카뮈와 경쟁하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까뮈는 자신이 서른 살이고 사르트르가 서른 여덟살 때 첫 만남에서 이미 비평적 명료함에선 한수 위인 사르트르가 자신보다 훨씬 지적이라 판단했지만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족했던 본능적인 창조성, 독립심, 용기를 지닌 카뮈를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자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서로가 상대를 평가하는 그 지점이 애초부터 영원한 친구로 이어지기 어려웠던 불씨라는 생각이다. (만약, 존경하는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된다면 모를까) 우정은 사랑과 존경과 달라 아무리 분야가 다르고 나이차이가 나도 서로 동격임을 인정하는 배경이 튼실해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겹게도 자신이 평가한 지점으로만 카뮈를 위치시키고 싶어 했고 카뮈는 끈질기게 그 위치를 거부, 외면했다. 서로를 비난할 때도 카뮈는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자들의 성향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한 반면 사르트르는 카뮈 개인의 역량에 집중적인 공격을 한다. 카뮈가 언급했듯이 사르트르는 자신들의 유죄성을 무마하려 상대의 유죄를 발본하여 비난하는 위선적 기질이 다분했다.(그런데 이건 경지에 오른 지식인의 보편적 특성아닐까) 담론을 창출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논쟁으로 승리를 이끄는 것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층으로서 커다란 능력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보여준 정치적 저널리즘의 양상들로부터 카뮈는 애초부터 사르트르 개인을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신의 견해에 저항하는 카뮈 개인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당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묻지도 않은 질문에 상대가 답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한쪽에서 화답을 해야 했던 상호적 관계였다. 이 관계에서 카뮈는 다소 방어적으로 보였고 사르트르는 무릇 공격적으로 보였던 것 역시 두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위치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이것은 대부분 아주 냉철한 문장 속에서도 ‘반공산주의자는 개다’같은 한마디로 급진적인 색깔을 감추지 않는 사르트르의 타고난 신분적 우월감때문이 아닐까.(누가 감히 사르트르에게 인간이 아닌 신분으로서의 '개'를 빗댈 수 있겠는가) 서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작품에 화답하면서 상대 저서를 통해 논쟁하는 방식은 직접적으로 상처주지 않는 고품격의 매너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 이름을 올려놓기 싫은 지식인 기득권층의 세련된 위선은 아니었을지.

   
 
불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르트르 추도사 中에서
 
   

   카뮈는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카뮈 사후 20여년 동안 사르트르는 카뮈에 대해 발언할 자의적, 타의적 기회가 부여된다. 만약 사르트르가 먼저 죽고 카뮈가 그의 추도사를 작성했다면 저렇게 말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함께’ 살아가는 ‘다른’ 방식은 서로가 동의하에 마련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느 한쪽이 주도한 방식이라 하기도 난감하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삶의 방식을 각자 인식하면서 서로와 같이 나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결과적으로 그 방식은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해야 할 듯하다. 사르트르의 추도사는 틀린 말은 아니나 사르트르가 해야 할 말로는 적당해보이지 않았고 그건 세상이 그들에게 해야 할 말로 보였다. 나는 그 위치가 곧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상정한 관계상의 우월적 관점이라 생각한다.

   가끔 이곳 서재에서도 어떤 블로거가 글을 올리면 마치 그에 화답하듯 반대나 찬성의 글이 올라오고 어떤 블로거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사유를 확장, 정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의 리뷰가 올라오면 마치 그 리뷰에 답하듯 전혀 다른 평의 리뷰가 올라오기도 한다. 때론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반대로 공감의 시너지가 확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재활동이라는 것이 혼자서 사고하고 오롯한 자기 생각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고 있는 관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도 분명 사르트르적, 카뮈적, 보부아르적인 ‘다른’ 태도가 공존한다고 느낀다. 위선에 강인한 사람, 위선에 상처받는 사람,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어느 지성인에 가까울까를 생각했다.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한계를 뛰어넘고 두 사람의 세계관을 복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기다린다 했지만 나는 어쩐지 사르트르적인 카뮈보다는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더 끌린다. 그래서 우울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진정한 지식인은 도덕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아니라 말했다.(이말도 결국 카뮈를 겨냥한 듯 보였지만)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순속에 사는 것이며 자신을 만들어온 근원적 상황과 그 형성과정에 의해 부단히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까뮈는 그런 지식인들이 결국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자기비판을 하고 자기 위선을 감추기 위해 상대에게 죄를 덧씌우는 것이 모순이라 지적했다. 결국 두 사람의 충고를 종합하면 자기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도의 자기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모습이 그래도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3. ‘반항’이냐 ‘혁명’이냐

   또 하나 보부아르와 함께 이 책의 조연으로 인상깊었던 인물은 메를로 퐁티였다.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사용에 우호적인 반면 카뮈는 공산주의를 무조건적인 살인자 집단으로 보고 폭력에 엄중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메를로 퐁티는 ‘공산주의가 자행하는 폭력을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폭력을 종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동의한 사르트르는 폭력적, 억압적이지 않고서는 이미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메를로 퐁띠는 이미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 설파한 철학자였다.(나는 리뷰에 이 문구를 몇 번이나 인용했던가) 우리가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주장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왜 이 폭력 메카니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실력행사를 한 것일까. 사르트르가 노동자계급에게 방향을 급선회한 것은 문학의 운명이 노동자계급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기 철학의 근본적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평생 그 계급에 저항하는 모순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기철학인 실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통합하고자 폭력과 혁명을 결합시키면서 서구에 대항하고자 했다. 하여 부르주아의 폭력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폭력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이 새삼 대단해 보인 것은 태생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철학을 정치행동과 일치시키기 위해 나아가 자기이론을 역사에 실행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자기 삶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르트르 개인의 사상적 변화를 넘어 자유와 사회주의를 연결시키는 개념으로서 바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대응하는 당시 프랑스의 답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뮈는 마르크스주의를 살인과 동일시하여 살인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사르트르를 이해하지 못했고 급기야 공산주의를 ‘문명의 질병’, ‘현대의 광기’로 규정짓게 된다. 카뮈는 미,소 두 진영사이의 제 3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파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솔직히 당시 프랑스에서 카뮈가 더 혁명적 인사가 될 줄 알았던 독자로선 의아한 행보이긴 했다. 여기서 나는 정치활동 이전의 카뮈의 예술적 기질을 떠올려 본다. 사르트르가 현실적, 실리적이었다면 카뮈는 이상적, 도덕적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의 사르트르와 알제리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카뮈는 각자 태생적인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람은 현실과의 타협을 한사람은 보다 근원적인 가치를 지향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카뮈는 사르트르가 있는 한 자신을 철학자가 아닌 예술가로 칭해지길 바랐는데 나는 이 차이가 곧 자신이 자신을 바라는 궁극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는 곧 내게 있어 ‘혁명’과 ‘반항’의 차이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궁금하던 책은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행히도 저자는 <반항적 인간>에 대해 많이도 친절했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은 원초적이고 존중과 연대성을 전제로 하면서 승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혁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주저하지 않는 건강하지 못한 태도라 말한다. 즉, ‘반항’에는 그 어떠한 폭력적 함의도 소거한 채로 인간적인 소박한 기원을 담고 있을 뿐 인 것이다. ‘반항’은 카뮈가 공산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한 개념이며 사르트르가 ‘혁명가’라면 카뮈는 ‘반항인’이라 볼 수 있는 중요한 태도 변수이다. 카뮈가 말하는 ‘혁명가’는 추상적, 권위적, 종말론적이고 교양이 풍부한 서구적 인간을 상징하며 사르트르가 말하는 ‘반항인’은 자기기만과 부조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프랑스와 친공산 좌파지식인은 <반항적 인간>에 반항했고 우파인 미, 영 언론은 대체로 옹호했다. 카뮈가 용감했던 것은 바로 우파로부터 응원을 좌파로부터 조롱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사르트르가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정작 혼자서 정치폭풍을 감당해내는 이러한 배짱과 용기가 없었다고 꼬집는다. 내 생각에 카뮈의 반항은 ‘예술’이고 사르트르의 혁명은 ‘정치’였다고 본다.

   <반항적 인간>은 철학, 사상, 문학, 미학, 정치에 대해 사르트르에 화답한 저서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이 도전에 절대로 침묵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자신보다 급 떨어지는 동료에게 <반항적 인간>의 서평을 쓰게 하여 카뮈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반항적 인간>을 통해 자신을 무시한 카뮈를 교묘하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로간 서평을 통한 논쟁은 일 년 이상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슴없이 전개되는 사르트르의 카뮈를 향한 신랄한 비판들은 독자입장에서도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우파적인)을 사이비 지식인이라 말했는데 그는 1930년대 프랑스 소설가 니장(Nizan) 의 ‘집 지키는 개’를 인용하며 그들을 한껏 비하한 적이 있다. 자기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층을 ‘개’에 비유한 사르트르가 카뮈가 포함된 반공산주의자를 ‘개’의 집단으로 격하시킨 발언은 카뮈가 말하는 반항을 패배적인 노예기질로 판정하며 현실 부적격자로 위치시킨 것은 아닐까. 이 ‘개’같은 발언은 프랑스 출신이 아닌 식민지 알제리 출신인 카뮈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사르트르의 공개모욕은 누가보아도 절교선언이 되었을 터이다. 이는 ‘당신은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았군요’ 혹은 ‘자신들의 의자를 역사의 방향으로만 놓았던 비판자들’이라는 카뮈의 문학적 표현에 비하면 너무나 충격적이고 살인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까뮈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그런 식으로 정치할거면 앞으로 영영 이 사회에 적응하지 말라는(예술이나 하라는) 사형선고에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완벽한 사람들

   저자는 사르트르 연구자였지만 이 책은 다분 카뮈입장에서 충격, 불신, 배신감, 상처들에 더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나 역시 두 사람 중 카뮈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이 사실이 내게 알려준건, 그러므로 나는 사르트르에 가까운 인간이구나, 였다 ㅠ) 지방출신으로 출세한 카뮈가 특권지식인층에 비웃음을 사고 축출, 배반, 고립화, 은둔, 예술적 고갈로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밝혀내었기에. 카뮈주변엔 무조건 충실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사르트르 주변엔 카뮈 외에 친구가 없었다는 식으로 카뮈는 인간적으로 인간에 충실했고 사르트르는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무시했다는 뉘앙스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사르트르가 카뮈의 출세에 공헌은 했지만 역으로 그의 고립에 누구보다 기여했다며 가해자로서의 역할을 재확인 한다. 저자는 카뮈는 사르트르를 증오했고 사르트르는 자기 정당화에 일생을 바친 것이라 말한다. 카뮈는 작품의 성공과 인생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사르트르는 자기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상을 거부했다고 평한다. (카뮈가 받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닐까, 그래야 카뮈와 다른 격으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저자는 결국 그들 모두의 행동과 태도를 ‘반은 옳고 반은 그른 ’것으로 자기기만의 체계를 이룬 것이라 평가했다. 오늘날 승리자는 카뮈라고 손들어 준 채로. 비록 카뮈 살아생전엔 서평간 논쟁을 통해 사르트르가 판정승을 거두고 그 후에도 정치적 우세속에서 카뮈를 공격해왔지만 카뮈 사후 사르트르는 자신들이 비웃었던 카뮈의 ‘적십자적 도덕’에 굴복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서로 자기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전력을 소모했고 그럼으로써 각자 발전했다. 각자 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자신들의 정치적 관점과 동일하게 전개하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자 역사인 채로 기록되었다.


“카뮈와 사르트르 각자는 상호적 토론속에서 자신들을 형성해 나갔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에게서 인정하게 될 완벽한 정치적 지식인들로 탄생했던 것이다.”     -485p


   저자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을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오늘날 이분법적인 해석을 통한 왜곡보다는 폭력과 전쟁이 여전한 세계적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적 지식인을 기다린다며 펜을 놓았다. 두 사람의 능력과 세계관을 통합시키는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고.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945.11.15
 
   

   이것은 카뮈가 사르트르를 만난 지 약 일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카뮈는 자신이 사르트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내 저서는 실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즉, 사르트르와 카뮈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서로에 끌린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우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 우정이 영원하길 바래서 만남을 지속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이미 예감된 이별을 확인하고 싶어 관계를 이어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짜피 이별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만이 중요했던 것이고 그 시점의 조율과 기획은 아마도 사르트르 쪽이 더 치밀하고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조합한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는 저자를 보면서 그 완벽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어떤 희망을 얻게 된다. 이들은 각자 서로보다 완벽히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를 자신보다 완벽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상대, 그런데 그 재능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에 자신보다 월등히 빛나는 타자를 볼 때 부러움과 함께 패배감, 시기, 열등감을 내재화하게 된다. 그런데 상대의 재능이 내가 진출하고자 하는 분야와 상관이 없다면 모를까 내 희망과 정면에서 상충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그처럼 되려고 그를 한번이라도 이겨보려고 아니 그 근처에라도 가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지 않을까. 때론 아무리 해도 안되는 자신에 실망하며 터무니 없는 성과에 절망도 하겠지만 이기고 지고와 상관없이 그동안의 시간들이 결국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완벽하다면 나는 아무런 노력도 희망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부족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를 미소짓게 한다. 다만, 과다한 자기비판이 또 다른 복종을 향한 퇴보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시스템의 지배와 억압을 용인하면서 밖으론 자유를 떠벌리는 위선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주변 인간관계를 잃으면서까지 내 자신의 명성만을 지키는 독선자도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카뮈가 사르트르에게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가 가지지 못한 약점을 비난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사르트르의 단점도 카뮈의 약점도 무수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역으로 상대의 장점이 사무치게 부러워서 터져 나온 반응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들이 가장 위대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 내 부족함이 상대의 능력에 반하고 상대의 부족함이 내 능력에 끌리는 것이 각자가 완벽한 세상보다는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부족함으로써 각자 부족한 완벽자로 서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람은 자신만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지금 우리의 우정보다 영원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누군가의 사르트르가 아니 내 미래 경쟁자의 카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살면서 나의 카뮈가 당신의 사르트르가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은 행운이다. 그 행운을 위해 가끔 등장하는 보부아르쯤은 참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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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질투'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릅니다.
내게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권력, 금전, 능력..)에 대한 질투, 저는 항상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 하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필연적으로 '위선'을 하게 되어버려요.

저는 위선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악이라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균형은 중요한거죠.
위선이 너무 없는 사람, 위선이 너무 많은 사람... 결국 제가 추구하는 것은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인가요?

실존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르트르 평전부터 몇권이나 사놓고는, 아직도 서재 그 자리에.. ㅠㅠ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한사람님, 즐거운 주말되세요. 중년의 늘어진 주말 말구요~ 헤헤.
(동갑내기가 맨날 중년의 주말을 쓰니까, 저두 함께 쳐진단 말예요! 항의 중~~~~~~~ ㅋㅋㅋㅋ)

보물선 2011-09-20 13:02   좋아요 0 | URL
저도 중년이라는 표현에 항의를 더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9-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건 제가 괜찮아요? 라고 물었던 그 책이네요.ㅎㅎ 반갑다..^^

카뮈와 사르트르도 미칠 것 같이 좋은데 보부아르가 중심에 있다니 이건 정말 호기심 동하는 어려운 책이에요. <카뮈 전집>을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펴보는 것. 그건 제 꿈이거든요. 좋아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카뮈는 어쩐지 살아가는 데에도 답을 알려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해서 좋은가 봐요. 궁금하고.

중년의 주말 쓰지 말래요, 마고님이.ㅋㅋㅋㅋㅋㅋㅋㅋ

참!

2011-09-16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와 사르트르의 대립은 나치부역자에게 관용을 베풀 것인가의 여부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에 초점을 두지요.저 역시 그런 분야를 자세히 파헤친 책을 읽었고요.하지만 한사람 님 처럼 두 남자 사이에 보부아르를 넣고 바라보니 또달리 선명해지는 느낌이네요.

이 책에선 나치부역자 처벌문제로 카뮈와 사르트르가 맞선 이야기엔 비중을 어느 정도 할애하고 있던가요?

cyrus 2011-09-1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소설부터 먼저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의 관계에 대한 책은 예전에 꽤 나왔던데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인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부역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다른 책들에서 많이 다루었죠.

알제리 문제에서 카뮈가 좀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지금도 욕을 많이 먹고 있죠.역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한 달콤한 맛은 버리기가 힘든가 봐요.프랑스가 전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잔인함은 상상이상이죠.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가 왠지 멋있는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심해놔서...

사르코지 집권 이후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했던 시절을 못사는 나라에 근대문물을 전해주었다 운운 하며 합리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죠.이런 견강부회도 굉장히 뿌리가 깊더라고요.

한사람 님의 다정한 인사가 기분 좋습니다.

가연 2011-09-1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민하다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거슬리는' 보부아르를 축으로 쓰려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 한사람님께서 먼저 이렇게 리뷰를 쓰셔서ㅎㅎ 괜스레 저도 그런 방식으로 했으면 완전 비교될 뻔 했네요, 풋.

2011-09-20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