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
조지프 핼리넌 지음, 김광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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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나이 들었다는 건 그 만큼 실수의 경험도 많다는 뜻일 터이다. 하지만 실수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을 매번 수정하고 보완하며 살아왔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반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교정하긴 커녕 외려 같은 종류의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덮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바로 우리가 실수의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실수할 수밖에 없었구나 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실수가 잦아지는 경험을 한다. 작게는 사람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에서 시작해 돈 계산을 틀리게 하거나 크게는 주어 담을 수 없는 말을 하거나 운전 중에 차도로 뛰어드는 강아지를 보지 못하는 등의 실수까지, 실수는 아무리 조심하려해도 사라지지 않고 더 성화를 부리는 듯하다. 이제 기억력의 감퇴로 인한 단순실수나 순간의 착각으로 인한 판단착오는 하루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생활 속 한 단면이다. 그런데 생명을 다루는 의사나 안전이 생명인 조종사,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판사처럼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비극으로 초래된다면 그때의 실수는 얼마나 치명적인가. 실수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실수(失手)이상의 참수(斬首)로 느껴진다. 어떤 실수는 어떻게든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불행한 과거이기에 기록되며 보관되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의료과실을 주제로 한 보도로 199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한 저널리스트의 저서이다. 20년 동안 사람들의 실수담을 모았더니 그 원인도 해결책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책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삶은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저자의 보도 경험과 저널리스트로서의 오랜 통찰력이 매끈한 번역과 함께 빛을 발했다. 실수하는 내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보시다 시피 이 책에서 말하는 실수는 무언가를 ‘잘못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잘못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사전적 의미로 실수는 과정보다는 결과에 비중을 둔다. 누군가에게 조심하지 않아서 발생한 잘못, 다시 말하면 말이나 행동이 예의에 벗어난 행위로서 실례(失禮)에 가깝다. 실수에는 분명 중대한 실수가 있고 사소한 실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드러난 결과로서의 실수의 무게감을 구분 짓지 않고 인간이 사고하는 과정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실수를 말하고 있다. 우리 문화에서 실수는 사소한 착오로 빚어진 우발적인 결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아 이 책에서의 실수와는 의미가 다른 듯하다. 사고의 결과가 아닌 그 시작과 전개과정을 따져볼 수 있는 기회로서 이 책은 유용한 의미를 지닌다. 실수를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 치부해버리면 같은 실수는 반복될 것이며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나뿐만이 아니고 누군가의 불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과정에선 도대체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실수를 하는 것인가.

 

 

편향은 실수의 지름길이다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한 것은 ‘편향’과 ‘과신’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보통 이상은 된다고 믿는다. 특정 부분 열등감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평균을 상회한다고 믿는다. 또 어느 정도 독서와 글쓰기가 생활태도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무척 합리적이며 구사하는 논리는 매우 타당하며 개연성, 정합성, 객관성에 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말하고 쓰는 것이 직업인 사람, 가방 끈이 긴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보고 듣고 아는 것이 많으면 아는 것 만큼 옳고 정확한 판단을 할 것이라 자타가 기대를 한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은 것과 옳은 판단을 많이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많이 알아도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는 편향성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자기 과신은 늘면 늘었지 줄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내 자신이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자만과 그로 인한 판단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 커질 뿐. 외려 많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똑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잘 알려진 사회유명인사들 중엔 누가 보아도 뻔한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제2, 제3의 논리를 만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저자가 첫 번째로 강조한 우리가 실수하는 이유는,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을 보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일부를 판단의 근거로 사용한다. 사상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그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 김영사, 2012>에서 인간의 편향성 중 하나로 WYSIATI의 법칙을 주장했다. WYSIATI은 ‘What You See Is All There Is’의 약자이며,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뜻이다. 인간은 좀처럼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의 직관을 벗어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의 이성으로 사고하기가 힘든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지극히 제한된 정보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심지어는 보고 들은 내용으로 사실을 재구성해 인과성을 부여하고 개연성은 물론 꽤 타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 해당해 특별히 인간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쉬운 예로 뒤에서 하면 뒷담화 일 것이며 앞에서 하면 충고나 비판으로 포장될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직관이 판단하는 대로 인상 좋고 착한 사람이 좋은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며 반대로 험악하게 생긴 못된 사람이 나쁜 일을 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선시된 직관적 사고로 이루어지는 편향은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과 판단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저자는 편향이 곧 실수의 지름길임을 지적했다.

 

 

일상에서 나는 잃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한 물건들을 자주 찾기 힘든 곳에 두는 바람에 물건을 찾느라 진땀을 뺀 적이 많다.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더 신경 써서 보관한다는 것이 꼭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찾고 보면 어이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며 장소를 선택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험과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서 물건을 찾는다고 한다. 특이한 장소라면 기억하기 쉬울 것이라는 착각이 화를 부르는 것이다. 특이한 장소는 반대로 기억하기 최악의 장소이며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장소이다. 연구자들은 무언가를 숨기기에 알맞은 최적의 장소는 숨길 물건과 숨길 장소가 곧바로 연결되는 곳이라 말한다. 사람들의 머리는 의미의 연결 없이 단순한 문자만으로 기억이 가동될 만큼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엊그제도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들어오다가 아파트 현관에서 비밀번호 12자리 중 끝에 4자리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창피를 무릅쓰고 경비실을 호출한 적이 있다. 비밀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어렵게 구성하다보니 가끔씩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의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구성하는 논리에 의미를 붙이고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실수를 거침없이 자행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편향 중에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기 힘든 종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검정이나 빨간색 캡슐의 약이 흰색보다 약효가 강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어이없는 결과는 충격적이기 까지 했다.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약효라는 과학적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니 새삼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구나를 실감했다. 첫인상에 대한 집착도 인상 깊었다. 시험을 칠 때 처음 선택한 답에 집착하면 정답을 맞히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는 처음 택한 답을 고치는 학생이 정답을 맞힐 확률이 많은데 우린 답을 고쳐서 틀린 경우를 더 기억하기 때문에 여전히 처음 답이 정답일 것이라 믿는다. 나 역시 학창시절 처음 생각한 것이 답이니 절대로 고치지 말라는 선생님의 당부를 얼마나 들어왔던가. 후보자 선호도에서도 능력보다는 외모가 주는 첫인상이 결정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입증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후보자의 정책이 더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쉽게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이는 행동하지 않았을 때보다 행동했을 때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인간의 후회심리를 반영한다. 무언가를 실행하다가 실패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난 4.11 총선에서도 우린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어 후회를 하느니 차라리 여당을 선택하는 편이 후회에 안전하다고 판단한 유권자를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시험에서도 괜히 답을 바꿔서 틀리는 것보다는 내버려 두는 편이 덜 후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애초 믿은 대로 변화하지 않으려는 습관. 역시 단순한 인간에겐 의심보다는 확신이 더 편하기 때문일까.

 

 

과신은 자신에 대한 무지이다

 

 

이처럼 편향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용하며 판단착오에 큰 영향을 준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편향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줄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편향만큼이나 무책임한 또 하나의 요인은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며 과신을 근거로 한 실수는 주식이나 기업 경영의 실패로 이어지기도 한다.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은 실제 자기 성적보다 더 부풀려 성적을 기억하고 자신의 얼굴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으로 평가하며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을 더 중책으로 여긴다고 한다. 다이어트는 몇 개월 내로 성공할 것이며 헬스 이용권은 연중 적절히 활용할 것이며 대출금은 때가 되면 갚을 수 있다고 믿는다. 보통 여성보다는 남성이 자신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고 지능이나 매력도 높게 여긴다.- 그래서 전쟁이나 금융쪽에 남성이 더 과감한 것이다 -  여성은 실수를 했을 때 보다 자신을 더 책망하고 남성은 여성에 비해 빨리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이는 남성이 좀 더 낙관적인 미래를 예측하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가 남성과 여성이 실수에 이르는 과정을 구분하는 덕에 나는 어떤 실수가 각각의 성별에 더 어울리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미래는 결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과거의 말이나 행동을 미화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과거의 기억을 긍정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장밋빛 안경’ 이라 칭했다. 사건의 결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과거의 사건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이미 결정이 나버린 일은 얼마든지 ‘사후해석’을 통해 필연적인 사건으로 포장할 수가 있다. 실연이나 실패는 마치 미래를 위한 초석쯤으로 보이게 된다. 상처가 지나간 뒤 과거를 모두 받아들인 후 그때 일을 좋았던 것으로 해석하면 현재 시점에서 미래는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이 한참 서로를 할퀴며 싸우고 난 뒤 시간이 흘러 그 일은 우리 관계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서로의 눈에 ‘장밋빛 안경’을 끼워 준채로 미래를 낙관했다면 그 연인은 반드시 비슷한 이유로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평가 하는 데는 대부분 너그럽고 어떻든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 든다. 나 역시 사업이 망한 이유는 남은 내 인생의 성공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고 여기고 있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도 다 지나가고 나니 하나도 이해되지 않을 일이 없는 것이다. 사후해석 편향은 이렇듯 과거를 덮거나 묻는 익숙한 방편이 되어 왔다.

 

 

그 외 실수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대충 보고 간과하는 습관, 멀티태스킹의 신화에 사로잡혀 집중력을 잃게 되는 경향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 알고 익숙한 것은 자세히 쳐다보지 않는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지 15초 만에 과거의 문제를 망각하는 단순함도 지녔다.투자자들은 주 초반에 나온 소식은 꼼꼼하게 챙기면서 주 후반에 나온 소식은 대충 본다. 자기가 쓴 원고는 절대 자신이 교정볼 수가 없다. 회사에서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다가 전화 등의 방해를 받은 후 다시 본래의 집중력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이나 걸린다. 특히나 40대 이후부터는 집중력이 본격히 떨어지는 시기이기에 멀티태스킹은 실수를 부르는 자유路인 것이다. 운전하면서 네비게이션을 조작하거나 전화를 받는 것도 실수를 부르는 위험한 발상이다. TV를 보면서 뜨개질을 한 적이 있는데 다 뜨고 나서 펼쳐보니 특정 부분만 실의 조직이 더 엉성하게 짜여 진 적이 있다. 보통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며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많다. 실수를 유발할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 놓고 또 실수했다고 자책하는 주부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했다.

 

 

더욱 씁쓸한 것은 편향은 편향사실을 공개하거나 인정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명백한 근거나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도 자신이 옳았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문가 일수록 무언가를 처리하는 그 한 가지 방식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자신은 부정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이후의 잇따른 상황에서 부정한 행위를 반복한다고 한다. 자신은 편견이 없다고 당당히 선언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노선을 확실히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그 아는 것보다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인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적, 객관적이지 않다. 자기 이성은 자기 직관을 이기지 못한다.

 

 

실수는 행복을 위해 존재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합리적이지 못하고 생각만큼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이 실수 없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과 비슷한 논점을 펼쳐낸 대니얼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결론 내기를 끊임없이 자신의 직관을 이성으로 의심하라고 충고했다. 직관은 손 쓸 틈 없이 저만치 멀리 달아나지만 이성은 한참이나 느리고 게으르다. 느린 이성으로 빠른 직관을 제때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저자가 밝혀낸 실수의 원인 중 꼭 나쁘지만은 않은 습관도 있다고 여겨진다. 사람의 단점은 곧 장점과 연결되므로 똑같은 성격이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건을 엉뚱하게 재구성하는 습관은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사고의 오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 영역은 아닐까.

 

 

파리주민은 지도에서 센 강을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인식한다는 예처럼 사람은 세상을 본능적으로 균형 잡힌 모양으로, 더 정돈된 형태로 바라보고자 한다는 사실이 희망적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인식의 정확도로 보자면 분명 왜곡하는 습성이겠지만 이 부정확성과 비현실성이 외려 사람을 다시 살게도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다. 인간의 합리화 과정에는 반드시 그 사람만의 독특한 기질과 성격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별자리를 중심으로 구성하듯 하루 동안 겪은 사건 중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서열화하여 재구성한다. 모든 것이 내 중심이고 내가 사는 세상의 주인공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각은 종종 위로의 일상이며 왜곡은 사고전환의 필수이다. 현재의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에 착각이나 왜곡만큼 도움닫기를 해줄 만한 것도 없지 않을까 싶다. 절망이 일어나기 전까지 착각은 현재를 버티는 유일한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무언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상황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존재이다. 그 방법을 빨리 배울수록 행복과 평화가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이 터진 후에는 자신의 결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위로를 할 줄도 안다. 남들은 다 틀렸다고 손가락질해도 그토록 맞고 싶어 했던 마음만은 오직 자신만이 이해해준다. 우리가 이야기의 원형을 파괴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무언가를 각색하는 일은 어쩌면 생존본능에 해당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은 애초부터 절망이 아닌 희망을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는 사실도 곧 사소한 이유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행복하면 실수도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실수에 대한 결론은 무엇이 궁극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가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양식부터 알아봐야 한다는 저자의 결론에 동의한다. 그러나 덧붙여 자신도 모르는 채 실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첨언도 곁들이고 싶다.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은 애초부터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인간만큼 희망이나 미래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실수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앞으로 더 행복해지기 위해 실수를 줄이는 삶을 살고 싶다. 실수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최소한의 실수로 최대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지나간 실수의 원인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실수하는 인간에게 더 매력을 느껴온 사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실수를 너그러이 포용하듯 누군가도 부디 나의 실수를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내 실수를 돌아보았기에 기꺼이 상대의 실수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의 실수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다함께 행복해지는 지도를 그려나가야 하지 않을까. 실수를 지금보다 줄여야 할 이유가 있다면 나뿐만이 아닌 당신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의가 공동체의 가치로 자리매김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덧붙임)

 

 

 

 < 생각에 관한 생각 >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저/이진원 역 | 김영사 | 원서 : Thinking Fast and Slow


리뷰에 인용한 책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는 꼭

<생각에 관한 생각>의 축약본 같았달까요. 비슷한 논점이 반복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직관'과 '이성'을 두 인물로 내세워 인간의 사고체계가 가지는 허술점을

밝힌 책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직관이 주인공이고 노벨상을 탄 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주장했습니다. 살면서 직관은 본능에 가까운 예지력이나

무당이 점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라 여겼는데 이 책을 읽고 직관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분량은 500p가 넘고 전문용어가 많은 편이지만

자세한 설명과 흥미로운 실험등으로 지루한지 모르고 파고들게 되는 책입니다.

평소 인간의 사고체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분이라면 유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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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5-0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과 '잘못'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 때에
내 '눈에 드리워진 들보' 때문에
스스로 이쪽 저쪽으로 편을 가르고 마니까,
마치 이것은 '잘'이고 저것은 '잘못'이라고
금을 긋고 말아요.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하는 까닭이 있어요.
찬찬히 숨을 고르면서
생각을 기울이노라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깨달을 수 있어요.
나한테 무언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생겨요.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한사람 님 삶과 마음에
이러저러하게 맺힌 앙금과 안개와 구름이
시나브로 걷힐 수 있기를 빌어요.

철수 2012-05-0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수..
어떤위치에서 누가하느냐....이를테면
의사, 판사, 고속버스 운전수, 비행기 조종사...
어떤상황에서,실수에 대해 용서를 빌고..용서를 받고 하는게 애매하겠죠.
사소한 실수일지라도..
그 실수로 인한 자신의 손해뿐아니라 타인의 손해의 크기가
쟁점이 될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일어날수 있는 소소한 그야말로 '실수'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발생할수가 있겠죠.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벼운 실수에 대해서
미소로 답하는 그런 사회를 꿈꿉니다.

리뷰 잘읽었습니다.

비연 2012-05-0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책인 듯.
리뷰 잘 읽었어요. 같은 책을 읽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친근감 게이지가 상승하니..
역시 알라딘 서재에 머무는 맛은 이런 거겠다 싶어요..^^

2012-05-02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4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 클라시쿠스 - 클래식 멘토 7인이 전하는 클래식 대화법
김용배 외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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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에는 어떤 눈물을

 

 

봄. 봄바람. 봄비. 봄처녀...

 

 

사실 그렇다. 불혹을 지난 여자에게 봄은 어떤 의미인가. 활짝 핀 벚꽃은 무슨 의미인가. 흐드러진다는 건 어떤 심경인가. 언젠가부터 해마다 봄이면 이 느낌을 설명해보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해석은 그때마다 틀렸고 꽃이 피는 이유만큼 지는 이유가 존재했다. 즉, 그때 봄에 처한 내 상황에 맞추어 꽃도 피고 봄도 가고 그랬던 것이다. 봄뿐만 아니라 의미부여하기 참 좋은 가을이나 겨울도 늘 그래왔던 것 같다. 계절이 아무리 네 가지 스타일이라 해도 한 사람에게 있어 계절은 그가 살아온 나이만큼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

 

 

요즘 들어 발견한 봄의 심상은 두려움이다. 지난날의 이별, 잦은 실수, 뜻밖의 시련, 이런 것들이 생각날까봐 나는 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꽃구경 가자는 말이 꼭 돌아오기 힘든 어디 먼 곳에 가자는 말로 들린다. 왜 그럴까. 사람의 뇌에 축적된 데이터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잘 정돈된 서랍처럼 생겨 먹진 않은 것 같다. 뇌 과학 같은 건 한 글자도 공부해보지 못한 내 방식대로 뇌 스캔을 해보자면 계절의 데이터는 내가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난립된 융합의 창고이다. 이 데이터들은 진화와 쇠퇴를 반복하면서 한 인간의 성장과 추락에 조용히 기여한다. 각 데이터들 간의 비교우위를 논하고 싶지만 인간은 한 곳에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정된 함수를 가지진 않는다. 예를 들어 올 봄에는 벚꽃을 보고 20년 전 헤어진 사람을 떠올릴 수 있지만 작년 봄에는 그때 만나던 사랑에 더 집착했을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나이가 들어가면 축적된 데이터와 그 데이터가 등장해 해당 계절을 지배했던 2차 데이터가 증가하고 그것들은 다음 계절을 맞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발전한다. 매해 봄마다 느꼈던 소회가 똑같았다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지면 그 총량의 무게로 인해 - 데이터의 사용양의 증가로 인해 - 감성의 깊이가 더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데이터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알 수 없는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소실되기를 바라는 시점이 온다. 나는 그 시기가 어떤 특정 계절을 같은 방식으로 견뎌오다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것을 보게 될 때가 아닐까 한다. 지난 봄에 보지 못했던 나무, 지난 봄비에 맞아 보지 못했던 바람, 지난 벚꽃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 혹은 슬픔. 계절은 나를 보기 좋게 통과하는 것 같아도 나 또한 계절에 그다지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봄을 걸어가며 제대로 느낀다.

 

 

이번 봄에 나는 흘러가는 음악의 가사 한 줄에도 폐부가 찔릴까봐 노래하지 않고 연주하는 음악만 들었다. 주로 뉴에이지풍의 피아노곡과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 가사가 없는 음악은 책을 읽을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집중력에 많은 도움이 된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무잡념의 시간은 나같이 생각 많고 머리 복잡한 사람에게 영원한 이상향이다. 지난날 적지 않은 세월을 성과위주의 삶을 살아왔기에 아직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결심한 일들은 해치우지 않고선 맘 편히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많았다. 숙제를 끝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나는 늘 지금 말고 다음 과제를 질문하여 생을 달려왔다. 그렇게 달리다만 보면 스스로 멈추고 싶어도 관성에 의해 자기 몸이 의지대로 되질 않는다. 결국 나는 천천히 멈추는 법을 알지 못했기에 절벽너머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서도 계속 달리면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잠시 멈추는 법, 멈추고 쉬는 법, 쉬면서 계획하지 않는 법,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살아왔다. 이런 것들을 몰라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을 모르고 자신을 소모하는 인생밖에 더 되었을까 싶은 것이 요즘이다.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무언가 삶을 리셋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면, 아니 잠시라도 소모된 내 인생에 평화의 휴식을 제공하고 싶다면 클래식을 듣기를 권한다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오랜 세월 클래식 방송을 해왔던 평론가와 연주가, 방송인들의 이야기이다. 클래식 전문 방송 'KBS클래식 FM' 개국 33주년 기념도서이기도 하다. 93.1을 자주 즐겨 들었다면 7명의 저자들이 익숙할 것이다. 언젠가 비가 사정없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누군가와 싸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였다. 무심코 맞춰놓은 라디오에서 파바로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반포대교 건너 올림픽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차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평균속도 20km로 주행하고 있었다. 와이퍼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내쳐지는 빗물도 덩달아 격해지고 있었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빗물이 앞을 가리는 것인지 눈물로 시야가 흐려진 탓인지 운전을 더 하기가 힘들어 졌을 때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리곤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금 뚫려진 도로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감성을 건드렸던 음악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인지 알지 못했다. <당신의 밤과 음악>을 진행하는 이미선 아나운서는 출연자들 중 송창식의 이야기를 하며 이 노래를 회상했다. 성악가 지망생이었던 송창식이 선생님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생활이 어려워서 중간에 성악을 포기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테너 베냐미노 질리의 목소리를 꼭 빼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작년인가 놀러와에서 쎄시봉 특집에 송창식이 조영남과 이 노래 앞 소절을 부른 기억이 난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다시 노래를 들어보았다. 아무일 없었지만 다시 눈물이 흘렀다. 남 몰래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 있는 분들게 추천하고 싶다.

 

 

#2. 오늘은 어떤 음악을

 

 

이 책의 저자들은 하나같이 일상에서 클래식을 듣다 보면 삶이 풍요로와지고 행복해진다 주장한다. 또 클래식이 어느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젠 손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며 한곡이라도 집중해서 들어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다 점점 문학이나 미술 등의 인접장르 속에서 음악을 발견하는 재미도 느껴보라 말한다. 음향기기에 집착하거나 특정 연주가 한사람에게만 몰두하거나 특정 작곡가만 찾아서 듣는 것도 나름의 클래식을 이해하는 방법이라 전한다. ‘클라시쿠스’라는 말은 원래 고대 로마에서 시민 계급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최상급을 지칭하는 계급용어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 클라시쿠스는 최고의 계층이 아니라 일상에서 클래식과 동행하는 사람, 클래식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일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클래식을 대중가요보다 더 우선시 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클래식 연합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그땐 다른 대학교 선배들이 술 사주고 영화 보여 준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들은 확실한 부르조아였다. 당시 그 나이 대 - 정신이 제대로 박힌 ㅋ - 선배들이라면 대부분 민주화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 선배들은 아메리칸 트래디셔널의 달달한 자켓을 입고 머리엔 무스를 바른 채 아버지 자가용을 끌고 다녔다. 우린 철없게도 그 선배들이 예매하는 영화를 좋다며 졸졸 따라다니며 무료 관람했고 이 나라의 오렌지족 문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때 우린 매주 한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그 작곡가의 일생을 토론하고 끝나고 나면 신나게 호프집에 가서 건배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 -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OST 로 유명 -, 드보르작의 교향곡,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이런 곡들이다. 이 책에서도 클래식 동아리 활동을 한 저자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이 클래식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클래식은 부르주아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택한 하나의 예술적 표상이 맞다고 확신한다. 적어도 당시 지방에서 부모님이 소 팔아 보내주신 돈으로 학교를 다니며 오월의 축제기간에도 공부를 하던 선배들은 클래식 같은 건 듣지 않았다. 그때 동아리 선배들이 지금 이 나라 클래식계의 주류가 되었는데 이제와 우린 부르조아가 아니다 말하는 건 명백한 위선이라는 생각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분위기속에서 클래식을 들어왔고 전공이나 취미가 음악이었고 직업까지 이어졌다면 대부분 모범생의 길을 걸어왔거나 보수, 우파 일 확률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이건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좌파가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좌파는 클래식을추구하는 성향과 정치적인 진보의 자세간에 괴리감을 많이 느낀다. 클래식은 귀족과 모범생, 격식과 예절, 보수와 기득권, 안정, 교양, 불변등의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역사속에서 노동과 혁명은 전복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클래식과는 상반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에서 더욱 미적가치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경쟁과 계산중심의 자본주의에서는 그야말로 특정 계층만 진정한 휴식이 가능한 것 아닐까. 사회주의에선 다 같이 같은 신분으로 놀이를 향유하고 서로가 교감하며 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와 정치적 관점이 아닌 삶의 가치관과 꿈꾸는 방식으로 보자면 클래식은 외려 좌파에 어울려야 맞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저자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체와 주장을 피력한 사람은 유정아였다. 방송인 유정아는 클래식의 속성이야말로 ‘혁명적’이라 주장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꿈이 테너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녀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기존의 것을 지키고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견디거나 혁신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즉, 음악을 듣는 행태는 보수적일지 모르나 그 청취를 통해 내 몸속에 들어온 음악은 나와 세상을 바꾸는 적혈구가 된다는 것이다. 서양의 클래식은 자신의 삶을 지켜줄 절대자에게 바치거나 노동의 힘겨움을 잊기 위한 의식에서 생겨났다. 작곡가는 음악이 발전해 오는 과정에서 교회나 왕, 귀족을 위해 봉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오늘날에도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클래식을 상류층이 즐겨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 작곡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호흡이 그들의 삶과 음악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클래식 말고도 다른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고 시대적 환경과 변화에 따라 취향도 다양해졌을 뿐인 것이다. 내 생각에 클래식은 다른 음악보다 시간과 공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음악의 근원적인 보편성을 자기 본질로 획득하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이 클래식의 장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들음으로써 과연 내안에서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냐 인 듯하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처럼 클래식을 듣는 방식 또한 다양할 것이다. 요즘은 클래식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어플도 다양하고 손쉬운 음원서비스도 많아 공연예술의 높은 문턱을 보완해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다. 혁명하고 싶으면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거창하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도 주체없이 눈물이 흐르고 마는 이 내 한 몸에 쏟아지는 저 처연한 계절을 견디기 위한 백신으로서라도 클래식은 아주 좋은 적혈구 주사가 되어 줄 것이다. 나처럼 봄이 시리고 아직도 겨울 옷을 벗지 못한 많은 분들과 이 책에서 소개하는 추천곡을 같이 듣고 싶다. 오늘만은 행복한 클라시쿠스로 살자.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그 다음 날엔 또 그날의 오늘로...

 

 

 

 

 

꽃미남 연주자들로만 구성된 눈이 즐거워지는 연주다.
피아니스트 지용과 비올라의 용재 오닐의 표정에서

애절함을 느껴보자.

 

<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Op.114 '송어' 4악장 - 2010 디토 페스티벌 실황 中 >

 

앙상블 디토

바이올린 - 스테판 피 재키브

첼로 - 마이클 니콜라스

비올라 - 리처드 용재 오닐

더블베이스 - 다쑨 장

피아노 - 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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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4-1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같이 들어야 하고,
아이들도 청소년도 들어야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노동자도 대통령도,
군수도 공무원도,
버스기사도 농사꾼도
다 함께 느긋하며 즐겁게 들어야 한다고 느껴요.

철수 2012-04-1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기 좋은 멜로디입니다.
거울같은 강물에 숭어가 뛰노네..
화살보다 더 빨리 헤엄쳐 뛰노네..
나그네 길 멈추고 언덕에 오올라아서..
경쾌한 해석이 아주 좋네요.

아..글은 안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긁적긁적..

2012-04-19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4-19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제 편견인데... 우파는 클래식을 안 들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ㅠㅜ
제가 부산 살거든요. (여기서 우파는 사회학, 정치학적 우파 말고... 보수꼴통들이 자기들이라고 우기는 우파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지음 / 부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F 세대에 묻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조금 충격을 받았다. - 워낙 책 읽고 매번 충격 받는 스타일이라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 내용은 어렵지 않고 대담형식으로 서술된 경어체라 전달방법도 무척 친절하다. 예도 많이 들고 비교도 많고 추상적인 문구 없이 상황 정리도 명쾌하다. 주로 <시사 IN>의 이종태 팀장이 아젠다를 펼쳐내 어떻게 생각하시냐 질문을 하면 장하준 교수와 정승일 위원이 답을 하는 구성이다. 최근 시즌을 맞아 반 MB정서, 반 자본주의에 몰두해 있던 나로선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새롭다기보다 낯설었달까. 정확히는 당황스런 수치심이다. 이 책엔 한마디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진보, 좌파에 대한 일침이 한 가득이다. 당신들의 주장과 논리는 여기서부터 이렇게 틀려먹었으니 정신 차리고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말로 들린다. 마침 책 제목도 선거철을 맞아 무엇을 택할 것인지 - 결국 누구를 택할 것인지 - 묻고 있지만 덮고 난 심정이 책의 결론처럼 분명하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독자로서 개인적인 한계일 것이다.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나와 같은 세대들이 앞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들의 주장을 면밀히 비교해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뭘 알아야 비교도 해 볼 것이니까.

 

 

나와 같은 세대라 한정지은 것은 내 세대가 요즘 언론에서 자주 언급하는 잊혀진 세대, F 세대이기 때문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태어나 80년대 컬러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90년대 말에 결혼해 2천 년대에 아이를 낳고 지금은 학부모가 된 사십대. F는 ‘Forgotten’, ‘Fire’, ‘Facebook’, ‘Formidable members’를 두루 의미한다. 민주화 운동권 선배를 두었지만 데모는 하지 않았고 취직해서 결혼할 무렵에 IMF를 만났을 것이다. 사교육 열풍 속에서 아이가 걸음 떼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었을 것이다. 집값이 자꾸 오르자 불안감에 무리하게 대출하여 집이라도 장만했다면 분명 이자에 허덕이며 ‘하우스푸어’로 전락했을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들 사십대가 2030세대와 합쳐지면 유권자의 반이 넘어가기 때문에 표심을 결정할 중요한 변수로 생각한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보았듯이 박빙일 때엔 이들이 보수로 기우느냐 야권으로 기우느냐가 당락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 이 F세대의 특성을 말해보라 누가 묻는다면 한마디로 ‘뒤쳐지지 않는 삶’이라고 본다. 사실 사십대에 들어서 직장인으로서 서울 어느 구에라도 번듯한 아파트를 한 채 장만한 부부라면 그 삶은 지난날 지겨운 경쟁에서 잘도 살아남은 축에 속한다. 대학입학, 취업, 결혼, 육아, 집장만에 이르기까지 그 이십 여 년의 세월은 분명 메인 프레임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이념투쟁이라는 추상적 가치보다는 개인의 행복이나 실질적인 혜택 등의 실용적 가치이다. 그래서 명예나 도덕을 따지는 사람은 위선이라 여기며 속물정신이나 편법 등의 수법으로 성공한 사람을 크게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도 언제든 기회만 되면 그렇게 해서라도 한 계단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준화 속에서의 궁극적 차별화. 삼성을 욕하지만 삼성에 들어가고 싶고 이명박을 욕하지만 이명박처럼 재산을 불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마나들 많았는가.

 

 

역사의식과 사회참여도 도덕성, 지식수준도 386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 심지어는 머리가 나빠 공부도 못하고 날라리만 많은 세대라 - 운좋게 취직해 지금은 사회의 중진이 되었건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 이들에게 향후 십년은 이제 막 은퇴가 시작된 베이비 붐 세대의 십년과도 다르며 결혼과 육아를 늦추고 있는 삼십대의 십년과도 다르다. 이들의 미래 십년은 정확하게 한국이 선진국으로 돌입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런데 지금부터의 십년은 F 세대의 자녀들이 성장해 성인이 되는 세월이다. 지출항목이 더 많아지고 커지기만 하는 시기, 평범한 직장생활로는 더 이상의 재산증식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시기이다. 여기까지 잘 달려온 세월에 미안해서라도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쉽지 않고 어쩌다 추락할까봐 두려운 시기이다. 그 전에는 성장이나 발전도 중요했지만 지금부터는 복지라는 말이 아주 구체적으로 와 닿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 4년 동안 양극화 때문에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에 분노와 절망을 감추기 어려웠던 시기인 것이다. 보수신문은 지난 일년 내내 복지를 과하게 시행하면 나라가 망하는 수가 있다며 다음 세대를 위해 복지포퓰리즘은 안 된다 주입해 왔다. 하지만 서민이라면 그 기사 때문에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중간하게 가난하면 복지혜택은 받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늘 재벌개혁하자는 불가능하고 진부해 보이는 진보쪽 보다는 '생애 맞춤형 복지'라는 그럴듯한 대안을 내세운 박근혜가 우리에게 더 유리한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마치 방황하는 F 세대를 위해 적절한 시기에 복지교본을 툭, 제공한 느낌이다. 혹시라도 언뜻 구호만 보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무조건 옳고 합리적인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라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F 세대는 공정 한가

 

 

불안한 F세대는 부자의 재산을 나누어 빈곤층에 나누어주는 식의 미국식 잔여 복지에 끌린다. 하향식 평준화는 아무래도 나의 추락을 방지해 줄 안전망으로 기능할 것 같기 때문에. 그러나 더 생산적인 의미의 북유럽 식 복지, 즉 퇴출당해도 실직수당이 보장되어 있고 직업 교육, 그를 통한 재취업이 보장되어 있는 선순환 식 복지도 흥미롭다. 언제 조직에서 나가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복지는 북유럽식 복지이다. FTA 가 발효되면 농업, 제조업, 제약업 등에서 피해자가 생길 것이므로 악영향을 최소화 하려면 복지 국가를 만들어 피해자들이 재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FTA는 분명 해서는 안 되는 계약이었지만 비준까지 한 상태에서 폐기는 말이 안 되니까, 지금 상황에서 대책을 세우자는 것이다.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은 단순히 생활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구조, 생산체제와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패자부활전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재벌이나 부자의 세금을 더 걷어서는 택도 없으므로 어쨌든 국민이 세금을 더 내는 수 밖에 없는데 장하준은 이를 두고 ‘복지 공동구매’라는 개념으로 복지를 재정립하자고 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탁아, 교육, 의료, 노후대비, 질병 등에 대한 보험을 온 국민이 공동구매해서 가격을 낮추자는 것’이니 세금은 공동구매를 위한 자금임을 강조한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건 새삼 박근혜가 치밀하다는 것이었다. 야권에서 누가 후보가 되건 박근혜보다 치밀하진 않을 것이다. 박근혜는 이미 이슈만으로는 ‘보편적 복지’를 선점했다. 공식만으로는 아버지의 잘한 점, 이명박의 잘못한 점, 그리고 야권의 오류를 다 더해 복지 밑그림을 짜 놓은 듯 하다. 다만 큰 그림만 있고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없는데 이 부분은 아마 상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준비된 시나리오를 척척 끼워 맞출 것이 분명하다. - 그러니까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게 전략인데 야권에서 박근혜 복지는 내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걸려드는 것이다 - 좌파가 더 공부해야 할 것은 새누리당이 기존에 잘못한 것들을 나열하여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것보다 자신들도 잘못한 것을 빨리 정리해서 그동안의 오류를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꾸 우리가 한 잘못은 니들이 한 것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도 안 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데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도둑질은 나만 한 것이 아니라는 보수 프레임에 갇히는 꼴이다) 어차피 나도 잘못한 것이 맞다면 이걸 반복하지 않는 방안이 더 중요하다. FTA든 재벌이든 비리든 사찰이든 노무현도 했지만 이명박은 더 하지 않았느냐, 는 논리를 제발 거두어 주었으면 한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한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의 정부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박근혜보다 먼저 말해야 한다. 글쎄, 정치 문외한인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느낀 점이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인정하기 싫은 건 이명박 정부가 사악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안 죽어도 되었을 사람이니 면죄부 주고 싶은 심정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박정희 시대로 끌어올려 결국 그의 딸인 박근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밀어붙이는 식은 자신들의 잘못을 덮으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장하준은 우리가 외적 성장에 비해 내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외환위기 이후 지속, 강화되어 온 ‘신자유주의 논리화’의 결과라 말한다. 금융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자유무역협정(FTA) 등이 그것이다. 좌파들이 말하는 경제민주화, 재벌개혁도 결국 신자유주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방법이 아니고 외려 재벌해체로 적대적 M&A를 불러와 엉뚱한 해외 큰손들만 재산을 늘리게 되었다 주장한다. 주주중심 경영도 결국 단기수익에 집착해 점점 신규 개발을 꺼리게 되어 국가적으로 경쟁력을 키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양극화가 된 건 금융자본과 주주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지 재벌이나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는 것. 모든 걸 박정희와 재벌 탓으로 돌리는 건 박근혜는 절대 안 되고 이건희만 물러나면 다 저절로 해결된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러다보니 야권의 주장은 늘 재벌해체이고 국가의 개입은 절대 안 된다는 식이다. 관치와 토건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재벌에 대한 분노가 얽혀 정작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우려가 되는 것은 혹시 이러한 주장들이 역으로 재벌옹호나 박정희 찬양, 혹은 박근혜 복지의 홍보의 수단으로 쓰이게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좌파도 우파도 잘못된 정책은 공정하게 비판했다고 보여 진다. 중요한 건 더 많이 알고 더 분석하여 더 적절한 대안을 구상하는 일일 터이다. 그런 면에서 F 세대들이 더욱 역사적 위치를 인식하고 책임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더 이상 우리는 젊지만도 그렇다고 완전한 기득권층도 아니다. F 하면 퍼뜩 Fair(공정)이 떠오르는데 이는 언급되지 않았으니 우린 공정함을 주요가치로 내세우진 않았나 보다. 그래서 문득 F 세대는 공정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오늘 우리의 경제 현실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경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묻고 있다. 경제를 내세웠지만 결론은 경제민주화가 복지의 다른 말이라 가르친다. 복지가 향후 정치의 핵심이라 알려준다. 복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처럼 30년에 걸쳐 시행하면  북유럽을 따라 갈수 있다고 그 처음 5년을 누구와 시작할 것인지 묻는다. 아니 누가 되더라도 복지는 필연인데 당신들은 어떤 복지를 택할 것인지 묻는다. F 세대는,  과연 공정할 수 있을까.

 

 

F 세대여 돌을 던져라

 

 

저자들은 이탈리아 무시하지 말고 그리스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탈리아가 마피아 조직만 있고 선진국하고 한참 거리가 멀 것 같아도 복지 수준은 OECD 중간이고 우리가 이탈리아를 따라가려면 십년이 걸린다고 한다. 또 그리스가 최근 재정위기에 빠졌다고 국민이 게을러서 혹은 은행이 방만해서라며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그리스의 은퇴한 약사 한 명이 국회의사당에서 약 100m 떨어진 아테네 중심가 신타그마 광장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해버렸다. 놀랍게도 그는 사회빈곤층이 아니라 94년 은퇴할 때까지 35년간 약사로 일하며 성실하게 연금을 납부했던 전문직 출신이었다. 긴축재정에 나선 그리스 정부가 복지 축소로 연금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장하준은 보수와 수구언론이 마치 그리스가 복지를 시행하다가 재정위기가 온 것처럼 떠들고 있다고 반박한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복지와 아무 상관이 없고 단일 통화를 사용하지만 단일한 연방국가가 아닌 유로 존 때문이라 말한다. 유로 존에서는 화폐만 통합되었을 뿐 자유무역으로 인한 소득격차, 생산성 격차는 모두 각국의 소관이다. 쉽게 말해 관광업 발달한 그리스는 제조업 발달한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독일이나 프랑스, 국제 금융 자본가들은 그리스의 방만한 경영, 그리스의 내재적 결함이 재정위기를 초래했다고 18세기식의 청교도 윤리를 들이대는 것이다. 이 모습은 지난 97년 외환 위기 때 우리가 들었던 비난의 내용과 꼭 같다.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들도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보수가 강력히 주입해온 가치들은 다시 우리가 보수적인 시각으로 남의 나라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 듯하다. 장하준은 같은 유로존 속에서 그리스를 도와주지 않는 유럽 국가(특히 독일)들을 강원도가 부도났는데 나라가 해결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며 상당히 비윤리적인 행태라 꼬집었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재벌은 원래 성질이 나쁜 개인데, 누가 돌을 던져서 개가 미친 듯이 사람을 물려고 하면, 돌을 던진 사람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한 정승일 위원이었다.(장하준보다 더 예리하다고 느꼈다) 즉. 중소기업 단가를 깎는 재벌이 나쁘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주들이 자기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청단가를 내려칠 수밖에 없는 경영방식의 근본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 인원감축하고 단가를 깎아야 주가가 올라가는 비정한 현실은 단지 대기업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 이런 식이라면 대기업에는 공정한 내실경영이겠지만 중소기업엔 불공정이 따로 없다. 이렇듯 금융자본과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하지 않고 단순히 공정을 주장하거나 불공정을 비난해선 안된다 말한다.

 

 

결국 이 책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좌파에 대한 따끔하고도 현실적인 충고. FTA 발효 이후 벌어질 현상에 대한 대책. 그 준비로서의 복지에 대한 개념 정립. 복지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서의 증세에 대한 공감대 형성. 재벌을 공격하기보다 이미 커져버린 재벌을 잘 이용하자는 현실적인 방안들을 잘 정리한 모습으로 탄생했다. 다행히 이 책의 장점은 너무 먼 미래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추상적인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국은 전후 아프리카 가나의 절반에도 못 미치던 소득 수준에서 눈부신 신흥 공업국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국민의 힘을 모으면 복지 또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결론이 미래를 위해 국민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세금 더 내라는 말 하려고 이렇게 길고 복잡하였던 것인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완벽한 정부도 시행착오가 없을 순 없다. 정권의 말기엔 언제나 집권 정당과 현직 대통령이 모든 잘못의 원흉이었다. 이 책이 10년 뒤 우리 다음 세대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지금처럼 절망에 가득한 분노로 그 이전의 정부와 정책을 비난하지는 않도록, 부디 우리 아이들의 희망에 일조하는 정보가 되길 바란다.

 

 

선택이란 것은 늘 새롭게 느껴지지만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늘 같은 방식으로 하며 살아왔다. 선택이 새롭다기 보다는 선택으로 새로워지길 바란다가 맞을 것이다. 그러니 같은 방식, 같은 생각으로 선택을 해놓고 새로워지길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식은 선택하기 전까지 집요하게 따지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년만이 아닌 십년 후, 이십 년 후까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아는 F 세대는 투쟁에 익숙하지 않고 누가 돌을 던지면 같이 동조하거나 아니라 생각했다면 침묵으로 고개를 돌릴 사람들이다. 고독한 독립투사보단 외롭지 않은 연대를 택할 사람들이다. 2002년의 삼십대는 이제 노란저금통의 추억으로 남았다. 십년이 지나 어느덧 중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하나 분명한 건 그 공감대의 키워드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지금 우리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난 십년을 반성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더 이상 우린 삶의 단기이익을 좇아서는 안 된다. 공무원이 꿈이라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우리의 책임이 있다. 개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모아 박을 터뜨리는 심정으로 돌을 던지자. 개는 이미 개가 된 이상 우리가 아니라도 개의 삶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행운의 박을 향해 함께 던지면 돌도 빛나는 희망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집어들어 선택된 돌이라면 F 세대가 앞장서도 될 것이다. 역사에서 잊혀진 세대가 이번엔 맨 앞줄에 서서 돌을 던져볼 기회인 것이다.

 

 

그렇게 모두 친구Fellow가 되어 파이팅Fighting하는 물결Flow이 되자.

세상을 향해 Follow me!, 한번은 이렇게 외쳐보자.

꼭 한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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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4-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입니다. 저는 F세대라는 단어를 보고, '뭐지?'라고 생각했고, 60대말 70년대 초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을 알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Fail'입니다.
 
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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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고 술을 좀 마셨다. 오늘도 바로 리뷰를 써야지 생각은 했지만 좀처럼 가슴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았다. 머리도 뜨겁고 눈도 시리고 목도 따끔거렸다. 몇 번이나 울컥한 심정에 물을 몇 잔이나 벌컥거리며 마셔댔는지 모르겠다.

 

 

오늘 오전(2012. 4. 3) 주진우 기자의 트윗엔 “쌍용차에서 22번째 비명을 들었습니다.”라는 멘션이 올라왔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한 조합원이 또 투신을 한 모양이었다.(작년까지 열 몇 명이었는데...그새 또 늘었다) 원래는 지난달 말에 사망했는데 부모도 배우자도 없어 뒤늦게 알려졌다고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조중동엔 저녁때까지 기사 한 줄도 뜨지 않았고 언론에 대서특필된 건 한국계 미국인 남성이 총기난사로 학생들을 몇 명이나 죽였다는 기사였다. 방금 전 메인 페이지를 확인하니 총기난사 기사 바로 아래에 김용민 후보가 (인터넷 방송에서)몇 년 전에 한 말을 문제 삼아 지겨운 자질론을 들이대며 무슨 시국사건처럼 보도하고 있다. 오늘 업데이트된 봉주 10회의 내용이 천안함 합조단의 보고서 일부가 조작이라는 내용에 황급히 보복대응한 기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 총기난사로 숨진 피해자를 실어 나르는 사진 밑에 ‘테러’라는 제목이 들어간 기사 타이틀과 함께 절묘하게 배치된 김용민의 사진은, 지나가다 언뜻 보면 무슨 연관이 있나 싶어지기까지 한다. 적지 않은 세월 나도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갇혀있던 사람이라 이런 기사를 보고 바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너무나 잘 안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된 나꼼수 죽이기 프로젝트는 참 디테일하고 꼼꼼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다. 어쩜 그리 내가 아는 한 사람과 똑같은 행보인지 알면서도 매번 새로운 오늘이다.

 

 

중요한건 오늘 쌍용자동차 해고자 한 분이 자살한 소식 같은 건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니 뉴스로 안쳐줄 뿐만 아니라 뉴스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지방에서 상경해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한 십 오년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해고를 당하고 삼년동안 무직으로 살았던 한 남자가 빨갱이 소리나 들으면서 주변으로부터 냉대를 받다가 결국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진 일 같은 건 주진우 기자나 트윗으로 올려주지 우리 사회 메인 언론들은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거다. 그 정도 억울한 사람은 명함도 못 내밀기 때문인 걸까. 그런 자살쯤이야 너무나 흔해서 일까. 어쩌면 돈 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아예 피해자들이 다 죽어버려서 시끄럽고 귀찮게 하지 말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면서 하게 되었다. 반도체에서 한 2조를 빼내어 집집마다 LG 대신 삼성으로 냉장고를 바꾸어 주라는 이건희의 발상을 보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서다. 실제로 약 7년 전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에 삼성 브랜드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세워질 무렵, 일조권을 침해받은 아파트 단지에 일제히 최신형 지펠 냉장고가 선사된 일이 있었다. 가시는 발걸음에 한 치라도 피곤한 일이 생기면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방식, 돈으로 안 되면 주먹으로, 주먹으로 안 되면 법을 만들고 바꾸어서라도 자기들 재산을 불리는 일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이 책은 돈과 땅,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이 더 가지고 더 불리고 더 오래 해먹기 위해 불철주야 혈안이 된 사건들만 쫒아 다닌 한 기자의 피같은 현장기록이다. 현장을 찾아 직접 발로 뛰어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진상을 파헤친 기자라 그런 것인지 김어준, 김용민, 정봉주의 글보다 온도는 더 높았다. 아직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몸의 체온이 가시지 않은 듯 했다. 늘 하는 일이 그러므로 어쩌면 주기자는 남들보다 고온으로 일상을 살아갈지 모르겠다. 나라도 뻔히 피해자를 만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두 눈으로 똑바로 확인했는데 기사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꼴을 본다면 혈압은 매번 정상이 아닐 것이다. 시기적으로 정봉주 전 의원이 구속 된 후 출간이고 얼마 전 나경원 전 의원의 남편 기소청탁 건으로 맘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행간에 비치는 울분도 상당해 보였다. 같은 사람을 욕해도 언어는 모두 다르다. 김어준이 냉소와 조롱이라면 김용민은 은유와 모사이다. 정봉주가 유머와 풍자라면 주진우는 단연 디테일과 증거다. 이 책을 생각보다 빨리 읽지 못한 것은 팩트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많은 증거와 디테일한 정황묘사 때문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주기자의 실전 이야기, ‘일단 가본다, 일단 해본다’의 취재기법을 가진 그의 체험 삶의 현장 스토리도 빼놓을 수 없다.

 

 

주기자가 가장 먼저 칼을 간 대상은 이 나라 검찰조직이었다. 주기자는 나경원 전 의원의 남편이 박은정 검사에게 기소청탁을 한 사실을 나꼼수에서 처음 말할 때에도 목소리 톤이 올라가 있었다. 이 나라에선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검사가 기소를 하거나 죄를 묻지 않으면 죄가 안 되기 때문이다. 무슨 뇌물을 무슨 목적으로 얼마를 주었건 검사가 묻지 않으면 그건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 뇌물도 주지 않았어도 검사가 물으면 죄다. 묻겠다는 건 죄를 잡겠다는 것이기에 일단 불려 가면 설령 죄가 없어도 어떻게든 죄인 취급을 면할 수는 없다. 무죄판결나기 전에 이미 하이에나처럼 물어 뜯어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여론은 의구심을 확산해 놓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살아있는 권력뿐이다. 그는 검찰조직에서 법과 양심, 진실과 정의는 철저하게 출세보다 하위개념이라 꼬집는다. 그런 검찰에도 천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독재천재를 총수로 둔 삼성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이 콕 집어 삼성소설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조정래 작가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을 만나 오랜동안 자료를 수집했다고 하는 그 기자가 주기자다) 소설에 대기업에서 승진에 목숨 건 인물이 공무원의 이삿날 이삿짐을 날라주며 청소는 물론이요 화분을 옮겨다 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주진우 기자가 일러준 실제 인물의 이야기였다. 삼성은 검찰(과 경찰, 기자)에 하도 떡값을 뿌려 놓았기에 검사들은 삼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독립시킨다 하면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외려 정권의 개가 되길 자처하는 집단. 민주주의 보다는 독재를 사랑하는 집단. 우리나라에서 가장 염치 없으면서 부끄러움도 모르는 집단. 주기자가 10년 넘게 피의자로 불려 다니면서 깨달은 검찰은 올라갈수록 더 유치하고 확실하게 더럽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고소를 무릅쓰고 짱돌을 던진다는 주기자는 자기가 쓰는 기사가 대단한 특종은 아니라 말한다. 조금만 열심히 다니면 누구나 쓸 수 있는데 기자들이 눈치만 봐서 그렇단다. 다들 명절에 오십만원, 백만원씩 받은 게 켕겨서 그렇단다.  예를 들어 경찰과 매춘업주가 결탁하고 검찰이 묵인하는 것은 너무나 오래된 관행인데 내가 봐도 굳이 여수까지 가서 여자 몇 명 구하자고 경찰 간부들을 잘라야 할까, 이런 생각을 어찌 안 하겠나 기자님들이. 다른 맛있고 돈 되는 사건들도 많아 죽겠는데.

 

 

삼성전문가가 된 것도 모든 기자가 물러서 있었기에 자신이 조금만 해도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란다. 김어준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건희가 물러난다고 삼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기자 역시 이건희,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씨등 오너만 삼성에서 떼어 놓으면 더 훌륭한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삼성은 주기자에게 앞날을 책임지겠다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 삼성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이 나라의 중요인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주기자는 삼성의 비자금 수법을 폭로한 김용철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에게 고마운 마음이 많다고 했다. 비록 삼성에 누릴 것을 얼마간 누리고 나왔지만 ‘사회를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평가했다. 꼭 지금 나꼼수 멤버들이 그렇다. 좌파도 우아하게 강남으로 가는 길이 없지 않다. 글빨과 말빨이 있는데 지금보다 편하게 사는 방법이 왜 없겠는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건 바로 그들 가진 자들은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인과 친척들 중에 대기업의 프레임에 속한 사람들이 많다. 나도 한때 사업 망하기 전까지는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모님이 찍는 후보에 표를 던진 사람이었다. 돈을 더 벌게 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자연스레 그들 세계에서 행해지는 방식대로 살게 된다. 더 조용하고 더 편한 호텔. 더 수준 높고 더 깨끗한 음식. 더 고급이고 더 우아한 옷. 돈이 많아지면 자연 돈 없는 사람들과 무엇이든 같이 하고 싶지 않게 된다. 오로지 단 한사람 이건희만을 위한 단독 슬로프를 보라 - 도로공사가 이건희 길을 안 닦은게 이상하다 - 말로하면 현실이 되는 그들이다. 이건희가 그 정점이요 극단이라고 하지만 그 나머지 추종자들도 그를 욕할 자격은 없다. 그건 쌍욕하면서 투표소에서 이명박을 찍은 심리와 똑같다. 그리고 특별히 이들이 처음부터 오만하고 허영심 많아서 라기 보다는 돈맛을 봤더니 오만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더 맞다. 알고 봤더니 돈으로 안 되는게 은근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어려운 사법고시를 통과한 검사들만 하는 게 아니다. 돈으로 생긴 우월감은 자연 도덕에의 불감증을 초래한다. 검사들이 스폰서의 지원으로 매번 룸살롱에서 술 마시고 골프 치는 것이 당연해지는 것처럼 세금 안내고 장부 속이고 횡령하고 하는 것들은 점점 일상이 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비자금 빼돌려 투자하고 먹튀하는 건 일종의 능력이다. BBK는 기업가로서 이명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일상에 불과하다. 무엇이 문젭니까? 그 정도 머리도 안쓰고 어떻게 사업 합니까? 그럴 사람들이다. 필요하면 조폭도 부르고 그들에게 청부 폭력도 시키는 것이 꼭 대기업 오너들만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벤처 사업가는 90년대 말 벤쳐 붐을 타고 코스닥에 상장해 유망기업이 된 후 지금은 어엿한 중견기업의 사장이 된 사람이 있다. 그도 처음엔 순수했고 열정과 자존심으로 뭉친 말 그대로 장래 촉망받는 벤쳐 사업가였다. 지금은 한강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시원하게 생일파티를 한다. 조선일보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사업가의 칼럼은 항상 그의 몫이다. 내용은 언제나 같다. 수출은 희망적이며 기술은 세계최고이며 대기업과 공조는 자기네 장점이라고. 보수 프레임에서 메인의 위치에 오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한번 안착하면 또 그렇게 굳건하고 탄탄할 수가 없다. 이른바 검찰, 경찰, 정치, 언론의 커넥션이 구축이 되었다는 뜻이다. 슬픈 건 일단 올라가면 무슨 자동 제어장치 처럼 알아서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촌오라버니 중에 대기업 임원이 세 명 있다. 그들 모두 학창시절 때부터 성격 좋고 사람 좋고 몇 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은 불온서적이다. 그들은 나꼼수같은 종북좌파들의 괴담방송은 듣지 않는다. 일단 가지게 되면 사는 동안 어떻게든 가진 것을 부풀려 놓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메인 스트림이 해온 방식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또 슬픈 건 그들 앞에서 누구도 그러한 방식을 욕하거나 잘못된 관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어떻게 하면 나도 그 틈에 끼어 뭐라도 얻어 먹을까를 생각하면 했지. 대통령이 사기꾼인데 뭐하러 도덕찾고 법따지고 할 것인가. 좋은 자리 있는 동안 한 몫 챙기면 그만이다.

 

 

주기자는 검찰과 삼성 외에도 종교와 언론, MB와 친일파의 속성도 잘 정리했다. 모든 특징은 이명박으로 통하는데 그 중에서 ‘친일파의 애국백년사’는 우리나라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을 규정짓는 중요한 실마리라 생각된다. 종교가 조폭과 연대하고 언론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보수의 도덕불감증의 연원은 결국 친일파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일은 결국 박정희와 수구언론을 상징한다. 반미친일은 반공친미로 발전했고 오늘날 이명박까지 이르렀다. 한마디로 나라 팔아 자기 챙긴 협잡꾼 들이 권력위에서 외려 나라 살리자 하는 형국이었다. 친일파가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로 대변되는 김대중 죽이기와 대안논리로 내세우는 박정희 찬양이다. 이는 오늘날 보수 프레임에서의 종북좌파와 박근혜의 대립구도로 요약된다. 친일파의 불감증은 주기자가 지적했듯이 어쩔 수 없어서 일본을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신대를 모집하고 징병을 부추긴 파렴치함에 있다. 지들 가진 자들만 잘 먹고 잘살면 나머지 국민은 피 눈물을 흘려도 되는 태도가 오늘날 속물과 위선, 염치불구와 안하무인의 보수를 잉태한 것이다. 독립운동 유가족들은 하나같이 못먹고 못사는데 친일 끄나풀 들은 대대손손 떵떵거리면서 사는게 우리나라이다. 그래서,

 

 

주기자는 기자생활이 독립운동이라고 말한다. 기자의 결론은 더 서글프다. 지극히 평범한 당신도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 명심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약자이고 저들은 강한 자들이니까. 약자는 평생 살아온 터전이라도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면 때려 맞으면서 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용역깡패 피하려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게 된다. 재수 없어 불에타서 죽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미군기지가 들어온다고 해군기지가 세워진다고 잘 살고 있던 마을을 하루 아침에 떠나야 한다. 삶과 터전이 무너져서 시위라도 하면 바로 빨갱이라 손짓하고 억울하다 자살해봐야 신문에 한 줄도 안 나온다. 단순 교통사고 사망자는 이름과 나이, 사는 곳, 사고 경위까지 나온다. 내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 아무리 더 살고 싶어도 내일 그 곳이 개발될지 어떨지 이 놈의 나라에선 이명박과 그 측근만 안다. 제기럴, 조폭을 세탁한 때 아닌 철거회사만  밤이고 낮이고 호황인 시절이었다. 아! 정말로 무식하고 탐욕스런 쥐새끼들이 코끼리처럼 판을 치는 시절이었다.

 

 

우리가 이명박을 뽑은 건 우리의 탐욕 때문임을 인정하자. 우리는 그가 국가를 잘 경영해 다 같이 잘살게 되는 나라를 만들어 주길 기대했지만 그는 보기 좋게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오로지 자기네 식구와 측근들만 잘사는 것이 가능하다 증명해보였다. 삼성의 절대 안 들키는 돈을 받은 검찰과 기자들. 이명박이 눈감아준 검찰과 정치인. 종교가 눈감아준 조폭. 조폭이 뒤를 봐준 건설사. 삼성과 언론에 동조한 지식인.... 주기자는 ‘친이인명사전’을 작성해 끝까지 추적하겠다 말했다.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알고 나꼼수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 말했다. 수줍은 꼴통, 열일곱의 심장을 가진 기자는 혼자 피하면 쪽팔리는 거라 말한다. 약한 사람들이 당할 때 옆에서 같이 욕이라도 해주고 비록 진흙탕이지만 같이 범벅이 되어 싸워주면 그놈들도 흠칫 당황한다고 주장한다. 쌍용자동차 해고자의 자살소식에 얼마나 더 아파해야 하는지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지 마음에도 비가 온다고 한다.

 

 

오늘 우리 가슴에 내리는 비가 그저 약자들의 젖은 옷자락으로만 버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살면서 봄비가 내릴 때 나는 우산위로 하나둘 떨어지던 빗소리가 좋았다. 여름 소나기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가을비처럼 을씨년스럽지도 겨울비처럼 쓸쓸하지도 않은 것이 이상하게 어떤 설레임을 안겨주었다. 약자들에겐 다행히 희망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마지막 가능성이 있다. 진실이 뜨거운 것이라면 그 뜨거운 맛을 꼭 거짓된 자들이 맛보기를 소원한다. “넌 정말 나쁜 새끼야” 나는 이렇게 쫓아가서 욕을 할 주제는 못된다. 하지만 당신들이 골치 아픈 "주기자를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야" 이렇게 떠들 순 있다. 생각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보수들이 갈등하는 건 언제나 자기 혼자 깨끗해서 무엇하느냐는 것이었다. 다들 입다물고 속이고 빼돌려서 잘 먹고 잘 사는데 혼자 아무것도 안 챙기면 무엇을 얻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진실은 뜨겁고 거짓은 시리다. (하필 이 책에서 마지막이 최진실의 이야기이다...) 심장이 따스하고 죽음은 차가운 이유다. 살아있는 한 우리 심장은 적어도 진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서 숨쉬며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볼 줄 안다면 저 위에서 군림하는 거짓된 자들의 심장에 진실이라는 비수는 꽂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잠못들고 있는 내 부끄러운 영혼의 고백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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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기자를 주기지 말아주세요~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차트랑 2012-05-12 00:48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저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만,
저의 페이퍼 하나가 당선되었답니다 ㅠ.ㅠ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이가 강으로 추락할 때 사람들은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말했다. 마술은 실패한 것일까 성공한 것일까. 마술사는 제이의 몸을 토막 낸 다음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뼈를 발라냈을 것이다. 피로 범벅된 뼛조각에 다시 살을 입혀 제이를 소생시키고 밧줄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을 것이다. 관객들은 제이가 밧줄을 사용해 승천하는 묘기를 신기한 듯 지켜보았을 것이다. 티벳 신화에 의하면 밧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치였다. 밧줄을 타고 왕래를 하는 사람은 초능력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밧줄이 끊어진 뒤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영혼만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다고 믿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면 좋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비록 마술이라도 누군가 실종이 되거나 충격을 받아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모른다. 마술은 실패한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닌, 꼭 성공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제이였을까. 제이는 분명 선택받은 사람인 듯하다. 비록 어리지만 자신도 일찌감치 그걸 알고 있었다. 제이는 자신의 영혼을 이탈시켜 다른 존재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갇혀있는 개의 붉은 눈을 보고 눈물이 맺히고 밧줄로 묶여진 의자에서도 사물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체감했다. 친구들에게 흉기를 휘둘렀지만 그 고통이 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지만 그가 느끼는 분노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를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저 하늘에서 누군가 제이에게 밧줄을 묶어 놓았다면 그건 고통의 탯줄, 그 속박의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제이는 고통 하는 존재들과 소통하는 자유를 누렸지만 과거에 속박당한 채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밧줄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구속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제이가 쇠바늘의 바리케이드에 몸이 잘려 나갈 때 그만 내게도 달려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우리는 신들이 밧줄을 매달아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는 아닐까 하늘에선 우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 위해 인형극을 연출한 건 아닐까, 하는 섬직한 생각이 들었다. 내면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끊어지고 나니 비로소 그 장면은 먼 훗날 우리의 마지막은 아닐까 싶었다. 어차피 삶이라는 이 길의 끝에서 죽음과 마주칠지 알면서도 달려가는 나, 그리고 당신, 그리하여 멈추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제이를 닮았다고 느꼈다. 제이가 느낀 고통의 무게가 소름끼치듯 선명하고 둔중하게 다가왔다. 우리도 혹 제이와 보이지 않는 밧줄로 연결된 존재들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묘기를 연출한 마술사는 제이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마술사로 분한 소설가는 제이의 죽음을 구경한 관조자 동규도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제이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끔찍한 마술 현장의 관객이었던 우리는 남겨진 동규의 절망과 충격을 헤아리지 못했다. 소설가는 동규의 고통을 배려하지 못한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제이가 죽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동규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제이라는 배우의 이야기가 아닌 제이가 출연하는 공연을 관람한 동규의 이야기이도 한 것이다. 소설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도 결코 마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마술의 고통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듯 했다. 나아가 사람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 사람답지 못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반문하는 듯 했다.

 

 

 

제이(提耳)는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말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제이의 속삭임은 이제 폭주족의 굉음이 되어 최후의 비명으로 남았다. 환청이나 이명이 아니고 화인처럼 선명하게 각인되는 슬픔의 낙인으로. 오늘 우리가 슬픈 것은 우리 존재가 모두 고아(孤兒)와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고아(苦我)로 살아갈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제이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이어주는 밧줄이었듯이 소설가는 신음하는 고아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세상을 이어주는 단단한 밧줄이길 소망한다. 소설이 사라진 시대, 소설가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네 고아 같은 지독한 고통을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아인 우리를 이승의 부활로 이끌어줄 가장 튼튼한 밧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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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2-04-0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역시.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이 작품 읽어줬는데
처음 부분과 제이와 동규가 만나는 부분을 읽어줬어.
마지막을 못들었는데, 혹시 마법사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으이.

너의 한자 명명 솜씨는 최고야!
어릴때 서당을 다닌게야??
논어를 읽으면 잘 읽을 사람이야.^^

서평 잘 봤어. 등긁어 준 느낌이야~

보물선 2012-04-04 18:36   좋아요 0 | URL
난 요즘 나온 논어는 너무 방대해 보이고
신정근 교수의 <마흔, 논어...>를 봐볼까 해^^
(마음은 원이로되, 쉰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라나...ㅋㅋ)

가연 2012-04-0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서두를 마술사 이야기로 시작했었던가요. 저는 다 못읽고 프롤로그부분에 해당하는 마술사이야기만 읽고 내려놓았는데,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부활하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야 한다..ㅋㅋ 하지만 왕이 보고 즐거워서 마술사가 다시 살려줄거라고 하면서 칼로 베어버렸던 신하는 끝내 못살아났으니... 부활하려면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하나봐요, 풋. 끝까지 못읽어서 어떻게 내용이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