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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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훈과 나 사이

 

 

 

 

   나는 솔직히 이 소설이 전에 없이 지겹고 무겁고 갑갑했다.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대가의 문장과 작품이야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천하의 김건모도 꼴찌를 할 때가 있고 인순이도 탈락은 하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매번 똑같은 밀도로 감동과 위대함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한마디로 전작인 <내 젊은 날의 숲>만은 못했다고 느낀다. (물론 전작 역시 그 전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완벽함 가운데 트집을 잡고 실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리뷰 같은 경우 더더욱 유려한 논리로 신랄하게 작품을 비판하면 좋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세배 이상 똑똑한 사람이라 여긴다는 통계결과치도 있다. 나는 의무가 아닌 경우 책이 지겨웠다면 사실 리뷰를 안 쓴다. (안쓰고 만다) 될 수 있으면 이 책이 별로라는 글도 선호하진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내 지겨움의 깊이와 무게를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겨울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더 솔직히 다음의 계산도 해 볼 만큼 나는 그가 지겨웠다고 말하는 게 죄송스러울 지경이다.(그렇다고 거짓말 할수는 없지 않은가) 

 

 

   1. 나는 내 돈을 주고 예판을 구입했다 - 공짜로 생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한 독서의지 반영.

   2. 리뷰작성의 의무가 없다 - 시간에 맞춰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글을 방지할 수 있음.

   3. 지금 이 책에 관한 어떠한 리뷰대회도 없다(알라딘에서는) - 문장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글 즉, 대회 참가를 위한
      작위적 구성이 필요치 않음.

   4. 나 또한 이 글로 어떠한 평가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 평가항목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됨.

   5.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리뷰를 정성스레 써 놓았다 - (초기가 아니므로) 내 비판이 구매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
     (읽어볼 만한 사람은 거의 읽어보았다고 판단)

 

 

 

   즉, 이 책의 장단점들은 이미 많이 노출된 상태이기에 나는 부담 없이 자유롭고 싶다. 모처럼 맞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비판을 위한 구실만은 아니다. 정말로 내 지겨움의 근원을 찬찬히 따져 물어 정리해 보고 싶은 연유이다. 김훈의 반복적인 세계관도 좋고 끈질기게 설파하는 동어반복의 논리도 좋고 완벽한 문장에 갇혀버린 한계치의 절정도 좋다. 나는 이 리뷰에서 반드시, 김훈이 지겨운 이유를 말할 것이다.

 

 

 

   먼저, 다음은 내가 생각한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길 위에는 늘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고 먼 길을 달려 갈 때 몸과 길이 합쳐져서 앞으로 나아가듯 흐르는 강물은 언제나 흘러서 합쳐지고 물과 하늘은 시야의 끝에서 닿게 되며 저 바다에서는 말이 생겨나지 않기에 언어가 세상을 지배하지 아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언은 누가 지어내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듯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며 삶이 무상한 만큼 똑같이 죽음도 무상하지만 사는 동안 붙어서 번식하는 일은 ‘늘 그러한 일’이어서 그 누구든 피할 수가 없다.

 

 

 

   이제 김훈의 어법으로 말해보면, 김훈과 나 사이에 흘러가는 저 언어들은 내가 한번 읽고 이해했다고 내가 주워 담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김훈의 언어를 찾아서 내 삶속으로 주워 담기에 나는 그의 생각을 온전하게 알 수 없었다. 김훈의 글과 내 마음이 같아서 그의 글이 내 맘으로 흘러와 그 마음으로 세상을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더 이상 세상은 새롭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어둠속에서, 나의 생각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그와 합쳐지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했다. (정말 멋진 말이지만 한마디로 나와는 맞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지)

 

 

 

 

 

2. 김훈과 풍경 사이

 

 

 

 

   책을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가고 가고 또 가는’ 한 마리 생명체의 고요한 날개 짓은 아니었다. 새와 배와 물고기와 말의 형상이 하나의 생명체로 모아진 ‘가고가리’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만 가야하는 지독한 운명 같은 것, 고달프고 서글프지만 끝까지 살아가야하는 지겨움의 기록에 가까웠다. 누구나 한번 주어진 삶을 단념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살기 위해 그토록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간다 해도 사는 것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터인데 왜 그들은 모두 살기 위해, 아니 죽기 위해 삶의 의미에 매달리는 것일까. 모르긴 해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꼭 써야 했을지는 몰라도 쓰고 싶어 쓰고만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틀림없이 작가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하려는 방법 따윈 자신의 일이 아니라 믿었을 것이다. 재미를 말하고자 함도 그것을 느끼게 함도 아닌 이것은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 하는 범박한 우리네 인간사 운명과도 같은데 그 이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것만이 작가의 깨달음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산문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의 지겨움을 준엄하게 설파한 적이 있으며 <내 젊은 날의 숲>같은 소설에서 저절로 피어나 제 색을 이루며 완성되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여러 번 아니 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바라보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고 그 말하여진다고 다 알 수 없는 ‘본래 그러한 것’들을 전달하려 핍진하게 애를 쓰는 고집쟁이 글쟁이였다. <내 젊은 날의 숲>이 사람과 사람, 사람의 몸과 꽃과 나무와 숲, 자연이 서로 엉기어드는 풍경을 그려 보였다면 이 소설은 꽃이 물고기로 나무와 숲이 섬과 바다로 치환된 것일 뿐 ‘흑산’이라는 절망의 시공간 그 안쪽 풍경을 끈질기게 뒤집어 보고픈 지루한 여정의 반복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조선조 천주교 박해를 다루는 역사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자기 내면의 고독한 성찰이 주를 이루는 산문이 더 어울려 보인다. 김훈은 어떠한 시대, 어느 사건, 어떤 인물을 소재로 삼아도 결국 그 전체 풍경의 내피를 투사하여 말로 이해시킬 수 없지만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언어로 자기 한계를 내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훈에겐 자기 한계의 최대치를 최선을 다해 최고로 표현하는 것만이 그가 소설이라는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 초로의 봄날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 물가를 달리다가 새싹이 돋아나는 산들이 물에 비치자 이렇게 말했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이 별 볼일 없는 생애는 어찌 그리도 고단했던가. 땅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구나.’      - <밥벌이의 지겨움>, 156p

 

 

   자전거가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얼마나 고독하고 고단한 길인가. 그는 계속하여 다음의 풍경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어떤 그림이든 그 풍경을 먼저 본 그의 기쁨과 슬픔을 나중에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먼저 깨달은 풍경이 비록 내 걸어감에 일치하지 않더라도 대책없이 걸어갈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늘 그 혼자 걸어감이 지겨웠노라 고백하는 것이다.


 

 

 

3. 김훈과 흑산 사이

 

 

 

 

   그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은 어디인 것인가. 매번 참으로 멀고 깊어 가닿을 수 없어 보이지만 그는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미처 가보지 않았거나 가닿을 수 있는 길도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흑산’은 도대체 어디이고 언제인 것인가. ‘흑산’은 시간인가 공간인가 둘 다인가. ‘흑산’은 흑산도가 아니니 섬이 아니고 산인 것인가. ‘흑산’은 검은 바다를 의미한다는데 그렇다면 산이 아닌 바다인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이 말하는 ‘흑산’은 산도 섬도 바다도 아닌 육지와 섬 사이 끝없는 바다 밑에 숨겨진 캄캄한 길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가 볼 수도 없었지만 영영 모르고 지나갈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아마 이 마을과 저 마을 사이의 길일 수도 있고 여기 사람과 저기 사람과의 보이지 않는 인연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김훈과 작품사이의 길일수도 혹은 작품과 독자사이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약전이 흑산에 끌려와서 흑산에 머물고 흑산에 주저앉듯이,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아니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은 흔히 있을 것이었다. -p280

 

 

   흑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아니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 길은 희망이나 전망이 없이도 살아야 하는 우리네 삶의 길이요, 그래서 믿기 힘든 현실의 길이다. 김훈에게 있어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흥정과 타협의 산물을 뜻한다. 이는 곧 예술이 더럽고 폭력적이어도 하면서 견디고 견디면서 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김훈에게 예술은, 김훈이 할 수 있는 예술은 누가 뭐래도 말이라는 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절대로 칼이 될 수가 없고 칼이 되어서도 안 된다. 칼로서 기능해야 할 때만 제 역할을 하면 된다. 김훈은 ‘말이 칼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버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훈에게 말은 더없이 하찮고 언어는 점점 쓸 수 있는 것이 줄어들어 속수무책지만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칼이 될 수 없기에 그 비극을 견디고 계속 쓰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흑산은 김훈이 걸어온 길이면서 앞으로 지겹도록 가고 또 가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을 가보았다고 갈 수 있으니 가야한다고 말하는 일이 어찌 고통스럽지 아니할 것이며 어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사람이란 무릇, 힘겨우면 더 빨리 지겨울수 있는 통속적 존재가 아니던가.

 

 

 

 

4. 김훈과 죄인 사이

 

 

 

 

   그래서인지 정약전은 시대와 사명과 업보를 바꾼 김훈의 대리인에 불과했다고, 감히 판단한다. 사학죄인 사형제 중 가장 현실적인 사람은 정약전이었다. 나는 정약전의 사고와 상념들 속에서 현실이라는 절망과 비극에 타협하며 세상을 긍정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 작가상을 엿보았다. 정약전은 가장 맏형인 정약현과 함께 동생 정약종과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설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참수 당함으로써 정약전과 정약용을 구해준 것은 동생 정약종이었다. 정약종의 죽음에 기대어 목숨을 건진 건 정약전과 정약용이 마찬가지였지만 황사영을 고발함으로써 완전배교한 정약용에 비해 정약전은 그 행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어중간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종교를 택한 것도 형제를 택한 것도 그렇다고 자신만 택한 것도 아닌 지극히 수동적인 처세였다.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순교를 택한 것도 아닌 정약전은 훗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그는 스스로 배교가 아니라 기교棄敎를 택한 현실에 긍정하며 자신을 흑산과 일체시키는 합리화의 길을 걸어간다. 이 모습은 바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던 (말할 수 없지만 쓸 수밖에 없는)작가의 비극적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작가들은 살거나 죽거나 외에 쓰거나가 하나 더 있다고 여긴다. 살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에 쓴다고 믿는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처음 바다를 바라볼 때 ‘인간이나 세상의 환란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인’ 바다라 생각했지만 서서히 ‘이 막막한 바다일지언정 여기서 끝나고 또 여기서 시작’이라 믿기 시작한다. 마침내 순매와 신접살림을 차리고 흑산에서 ‘집을 지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떠날 것이라 믿었던 마을에 서당을 짓고 사람들에게 하늘의 법치과 인간의 본성을 글로써 가르친다. 형틀에 묶여 매를 맞으면서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살아보니 캄캄한 바닷길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만은 결코 캄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런 작가의 말과 글에 대한 의지는 정약전뿐만이 아니고 열여섯 나이에 급제한 조카사위 황사영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황사영은 단지 김훈의 대리인으로서의 정약전의 한세대 어린 인물을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다지 참혹하거나 슬프지 않았고 외려 한 세대가 끝이 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황사영이 죽었다고 말과 글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그것은 곧 작가의 강력한 고집이자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그들 주인공은 하나같이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를 선호하며 모두 드러나 있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발견함에 기뻐한다. 세상의 원리는 ‘인간의 언어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언어에 의한 증명이 필요 없이 사람의 생각으로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정약전은 형제들과 ‘우주의 근본과 몸과 마음이 살고 또 죽는 이치를 말하며 놀라워 했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말과 글로 엮인 생각의 구조, 말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개념들에 집착하고 그 이룰 수 없는 번민들이 언젠가는 저 흐르는 강물과 합쳐져 새로운 의미로 탄생하길 기대했다. 그것은 말과 글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죄인의 본심은 아니었을까. 말과 글을 버리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자는 다시 말과 글로써 그 세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언어로 증명할 수 없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갈 수 있고 저절로 알 수 있다는 삶의 이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혹 죄인을 심판하기 보다 스스로 죄인이 되어야 삶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5. 김훈과 희망 사이

 

 

 

   정약전은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흑산의 ‘검을 흑黑 자가 단 한 개의 무서운 글자로 이 세상을 격절시키고 있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다. 이 무서움은 비단 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에 대한 무서움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약전은 그 무서움의 안쪽을 들여다 보았고 희미하게나마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흔적’을 발견한다. 정약전이 발견한 흔적은 ‘고향 마재 마을 개울의 게와 흑산 개울의 민물 게’의 모양새가 같다는 기억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증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기억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글이다.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p337

 

 

 

   흑산이라는 캄캄한 바닷길은 바닷 속에 사는 물고기들의 언어에 다다르길 노력하자 흐리고 깊지만 이곳을 의미하는 ‘자산’으로 변모한다. 똑같이 검은 바다였지만 언어로서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흑산이 자산이 된 이유는 검은 바다의 색깔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검은 바닷 속에서 발견한 흐릿한 무엇 때문이다. 저 바다 너머 저 산 너머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감지되는 희망의 빛인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저곳이 아닌 이곳이기에 그들이 아닌 우리들이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산은 당신과 내가 지금 여기 사는 우리들의 섬인 것이다. 그것은 정약전이 흑산에서 지을 수 있었다는 ‘집’이기도 하며 흑산에서 우리가 발견한 김훈이 걸어간 길 위의 ‘집’이기도 할 것이다.

 

 

 

   정약전은 흑산이 아닌 자산 바다의 ‘물고기들의 종류와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적었고 물고기가 글을 끌고 나가니 글이 물고기와 나란히 가는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물고기들이 푸른 등위에 제 몸으로 파도를 헤쳐 나간 무늬를 새기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글을 쓰게 한 것은 물고기이고 사람을 이끄는 것은 글이었다. 사람인 우리는 흑산이라는 길에서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친다. 김훈이 말하는 희망은 실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글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결국 글로써 희망을 안을 수 밖에 없었지 않을까.


 

 

 

6. 김훈과 문장사이

 

 

 

 

   허나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요망한 언동으로 국본을 부수는 삿된 미신의 무리’로 등장한 천주교 신도들에 있었다. 그들은 어쩐 일인지 변별력을 갖추지 못했고 개별적인 캐릭터로 기억되지 않았다. 작가는 정약전과 황사영 사이에 갖가지 기막힌 사연을 가진 노비와 천민의 이야기를 심어 놓았지만 그들 모두는 김훈식 문장의 지배구조 하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말(馬)의 형상을 가진 마부 마노리와 정약현의 노비에서 면천된 김개동, 황사영에게 딸려갔다가 면천된 육손이, 대궐 내시한테 천주교를 배운 길갈녀, 천주교인들의 거점지를 조성한 강사녀, 포도청의 염탐꾼 노릇을 한 박차돌, 남대문 옹기장수 최노인, 오동희, 아리...등등 인상 깊은 조연이 하나 없었던 것은 곧 서사의 빈약한 점으로 연결지어 졌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배, 섬과 바람과 물고기가 삶의 바탕을 이루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순매 정도만 뇌리에 남았고 그들은 그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교 교리 속에 등장하는 이웃의 무리로만 기억될 듯하다. 순환적 문체로 서사를 통제하는 소설이 가지는 치명적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김훈은 자신도 자기 문장의 단점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문장이 ‘내면에서 올라오는 필연성’이기 때문에 오류를 알고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 바 있다. 작년 연말에 막을 내린 드라마 <천일의 약속>의 김수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일의 약속을 보고 싶어도 말이 너무 거슬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는 어느 시청자의 목소리에 김수현은 ‘천일의 약속’을 ‘외면’하라고 응수하며 “나한테 말투 고치라는 건 가수한테 딴 목소리로 노래하란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내 대사가 바로 김수현이니까요” 라고 답했다. 신기하게도 김수현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김수현 한 사람이 속사포 같은 대사를 던지는 느낌이 드는데 김훈도 마찬가지다. 정약전이나 김개동이나 말하는 어투는 불행히도 같게 느껴진다. 흔히들 그의 문체를 ‘칼로 조각한 것 같다’는 표현을 하지만 이번엔 쳇바퀴 돌 듯 그 칼로 조각한 모양이 거기서 거기였다. 아무리 완벽하고 아름다워도 같은 모양의 그림은, 이렇게 지겨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 김훈의 어법은 유배죄인의 언어로서 관조와 고통의 문체를 완성했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완성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자기 고민을 치열하게 펼치고 해결하는 시간으로서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다만 바다와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상념 대 그 바다가 일으키는 파도(매)를 온몸으로 때려 맞는 육신의 아픔을 대치시킨 화법은 정신과 육체를 대변하는 말과 글의 진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끈질긴 공력의 성과가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돌아가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서 복받쳤다. -130p

 

 

 

 

   김훈 어법의 한 유형인 문장을 또박또박 받아 적는다. 현재 유배생활 비슷하게 은둔을 자처하는 죄인 같은 나로선 이 말이 가장 복받치게 들려온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간다하여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그 마음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흑산이 가르쳐준 삶의 지독한 진리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곳 흑산에서도 능히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정약전은 아마 나처럼 웃으면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훈을 견디는 것은 유배지 흑산의 삶을 견디는 것이고 그것은 삶이라는 동일한 지겨움을 견디는 일이다. 지겨움에 면천되는 일은, 글쎄 살아있는 한 가능할 것 같진 않다. 김훈과 나 사이 이 캄캄한 흑산에 의하면.

 

 

 

 

 

 

 

 

 

덧붙임)

 

정말 짧게 쓰고 싶었고 어느 정도 짧게 썼는 줄 알았는데,
다 쓰고 나서 옮겨보니 또 길다...

다섯장 안으로 쓰는 걸 목표로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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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별점 세 개! 왠지 반가운...(응?)
저는 재회의 작품인데도, 글에 공감이 가네요.

gimssim 2012-01-18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흑산>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전에 나온 책도 읽지 않았네요.
부지런히 찾아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마음이 좀 멀어진 이유가 님의 글을 읽다보니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던 5매짜리 칼럼은 '칼'이었었는데...
아무래도 전 좀 더 묵혀두어야할까 봅니다.

gimssim 2012-01-19 21:53   좋아요 1 | URL
아니요, 제목이 '칼'이 아니고 시시칼럼이라 군더더기 없이 시작하고 내용이 대단히 압축적이었다는 뜻입니다.

cyrus 2012-01-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학생 때 <칼의 노래>를 통해 김훈의 글을 처음 만났는데요, 그 때는 정신적으로 어려서 그랬는지
읽어나가는데 애먹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이 책이 노 대통령 필독서라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랐어요. 그리고 김훈이라는 작가의 이력을 모르고 있었는 것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을 줬고요. 그러다가 <자전거 여행>을 읽었는데 에세이는 잘 읽혀지더군요.
여행 에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풍경을 묘사한 문장들이 좋았어요. 군 입대 하기 전에
김훈의 <개>를 구입해서 한 번도 읽지 않은게 후회되네요.
휴가로 부대로 복귀하게 되면 꼭 책 한 권씩 가져오도록 규정이 있었는데 그 때는 책 한 권 사기가
돈이 아까워서 일부러 그 책 한 권을 부대에 기부하고 말았어요. ^^;;
한 번이라도 읽었으면 괜찮았는데 막상 사 놓고 안 읽은 책을 내놓은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2012-01-18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1-19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래한글 원고지쓰기로 해 보셔요 ^^;;;
그러면 그야말로 짧게 쓸 수 있으리라 믿어요~

stella.K 2012-01-19 12:02   좋아요 1 | URL
헉, 그런 기능이 어디 있나요?
난 못 찾겠던데...ㅠ

saint236 2012-01-19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책이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항상 고민만하다가 그냥 오곤 하지요.

stella.K 2012-01-19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젊은 날의 숲은 저도 좀 실망했어요.
이작품 처음 나왔을 때 별로란 말있던데
어느새 별 네개 이상씩 단 리뷰들이 쏟아져서
역시 작가의 명성을 무시 못하겠나 보다 싶기도 하더라구요.
그것과 상관없이 그래도 숲 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데...
저는 김훈이 순교를 어떻게 다뤄놨을지가 궁금해요.
이게 맨 정신 가지고 못할 짓인데 말입니다.
순교도 그렇고, 희생도 그렇고.
갈수록 개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저는 이게 참 낮설면서도 신기할 지경입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