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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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면

 

 

 

   올해 나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성장했다. 순수한 시간의 속도감은 사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빠르게 체감 되었지만 글쓰기로 내가 이룬 것들은 성과 면에서 본다면 지지부진, 그야말로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성과를 지향하지 않으니 가시적인 성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무어라도 하나 챙겨 받는 사람들이 더욱 남들의 성과를 부러워하고 자연스레 욕심도 낼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것. 이 증상이 꼭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괜한 열패감 때문에 서글퍼지거나 혹은 어줍잖은 위선이나 기만으로 서로 의무적인 축하의 당위성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꼴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천히 걸어 오래 사는 거북이를 택했기에 올해 나는 글쓰기만을 위한 글쓰는 자유를 눈에 보이는 보상과 과감히 빅딜할 수 있었다고 본다.

 

 

   새삼, 지난 일 년 간 내 글쓰기 행보를 돌이켜보면 중간에 색다른 유혹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상채기들도 예상보다 많이 치루어 낸 듯하다. 모두 그전과는 다르게 쓰고 다른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달라진 글 때문이라 생각한다. 허나 글쓰기라는 행위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다짐했다고 해서 쉽게 바뀌어지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역량을 평소 열정의 부피만큼 동일한 정도로 발전시키는데 퍽이나 힘겨운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래야 하는 나를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아니 그랬기 때문에 얼마간은 견뎌내었고 결과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이룬 가장 큰 성과로 삼고 싶다.

 

 

   냉정하게 말해 글쓰는 내 수준과 현재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지방 어느 중소도시 읍내 나이트 클럽의 무희 혹은 전속까지는 안 되고 이리저리 알바 뛰는 미사리 밤무대 가수 정도라 생각한다. 신인가수로 데뷔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오디션 같은 등용문을 통과하기엔 질곡한 세월의 때가 두껍게 쌓여 버린. 물론 나도 내 전공이 있고 내가 해온 일이 있으므로 그 바닥에선 전문가 소릴 들을 수 있(었)을 지언정, 노래로 치자면 그러니까 가수를 하겠다고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고 보자면 앞날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춘문예에는 대부분 문창과 출신들의 공모용으로 잘 훈련된 글이 당선이 되고 출판사 문학상에는 다소 실험적인 작품들이 신인상의 영예를 차지하며 운 좋게 그러한 바늘구멍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낙타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생활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쯤은 말 안 해줘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까놓고 말해 무엇 하나 보장되지 않은 문학의 길에 당신의 남은 인생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딱히 근사하게 답해줄 말은 없다. 언제까지 생업으로 미사리 가수를 지속할지도 모르겠고(미사리 가수는 그래도 돈이라도 받지 ㅠ)이마저도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확신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칼만 빼들은 상태인지라 포기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긴 하다만 올해 같은 시간이 몇 년 만 더 지나간다면 나는 아마 지나온 시간을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지 몰랐듯이 그때 나 역시 그렇게 살게 될지 모를 것이 뻔하지 않은가.

 

 

   늘 그렇듯, 이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한 쓸쓸함보다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적지 않은 글쓰기 책과 작법을 알려주는 책, 소설가의 소설 쓰는 이야기 책을 습관적으로 집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수많은 위대한 소설가들 중에 굳이 닮고 싶은 작가는 없다. 누구를 모델로 삼은 적도 없고 어떤 작품을 흠모해 본 적도 없다. 작가의 인생과 그가 견뎌낸 세월과 그로인해 탄생한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들은 나와는 점점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그러면서 반대로 그 작가의 단점을 찾아내 그 구멍으로 탈출구를 빚어 낼 줄은 알았다. 예를 들어 문체상으로는 이청준, 이문열, 김훈의 글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과 가장 비슷하다 여기지만 감성이 부족한 보수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는 식이다. 중산층 비틀기로서의 박완서는 완벽하지만 과거로의 끝없는 회기와 동어 반복적 서사는 고루하기 짝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소설적이지 않다, 뭐 이런 식으로 웃기지도 않게 나는 내 맘대로 내 잣대로 선을 그어 버린다.

 

 

   나는 내 글이 어느 정도 서사의 리듬감은 있지만 문장 속에서 유머나 위트가 현저히 부족해 무겁게만 느껴진 적이 많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칼날을 휘두르면 엄청난 냉소가 느껴지고 조금만 청승을 떨면 여지없이 땅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누구나 자신의 글에 대해 객관적일수가 없겠지만 나에 대해 그리고 내 글에 대해 말하는 여러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내 글은 지나치게 고집스럽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만의 논리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고, 나쁘게 꼬집으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독단의 도가니. 나는 이 성향이 좋고 싫고를 떠나 형제 없이 혼자자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온 삶의 이력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방식이라 진단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내가 쓰는 방식을 결정지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내 고집이 과연 어떠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것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제공할 수 있는 가인데 그 부분의 긍극적 질문에 이르면 내가 과연 왜 소설을 쓰려고 했던 가로 그만 다시 회기하고 만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소설은 쓰여 지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소설은 택하여 지는가. 나는. 왜. 하필. 소설. 인 것인가.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쓰고 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고 하루마다 답을 한다. 며칠 전엔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해보고자...하는 궁색한 답을 내놓고는 서둘러 질문을 폐기해버렸는데 고맙게도 그날, 이웃 한분이 당신은 미셀 투르니에 같은 글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미셀 투르니에의 작품을 하나 안 읽어 보았지만 바로 한권도 읽어보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갑자기 가슴이 홧홧해져 오는 것이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발은 흩날리자마자 길바닥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날은 그렇게 쌓이지 않는 눈들이 빗물보다 눈물보다 더 부질 없어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님이 말해주기 전까지 전혀 내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책이었지만 그 사이 혹시 누군가 그의 책들을 다 빌려라도 갔을까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생이라는 게 참 눈이 그렇게 쏟아져도 아무것도 쌓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두어 개 빌려왔고 대여를 하면서 누군가가 반납한 책이 눈에 들어와 그 책도 덤으로 가져왔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두어 달 전 같은 책을 서점에서 들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미셀 투르니에 책은 신간 에세이도 한권 주문을 했고 빌려온 두 권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안 빌려도 되었을, 아니 자칫하면 안 빌릴 수 있었던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자꾸 눈에 밟혀 결국 그 책을 먼저 읽고 말았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한 개 정도의 페이퍼를 더 쓸지 모르겠는데 만약 쓰게 된다면 미셀 트루니에로 하자,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안해도 되는 다짐을 왜 했는지 ㅠ) 나는 지금도 본 책이 아닌 별책부록을 먼저 대접한 것에 겸연쩍어 하고 있다. 어쩌면 부록이 간절해 본 책을 구입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때로는 부록이 본전이상을 뽑으며 톡톡히 효자노릇을 할 때도 있으니까.

 

 

 

 

비법을 말해 준다면

 

 

 

   제목은 우선 그럴싸한 페이크임이 분명하다. 그럴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에는 열일곱 명의 소설가가 자신만의 창작론을 저마다의 문체로 자아내고 있다. 모두들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가 되니 그것들을 모아놓고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라 근사하게 이름 붙였을 뿐. 사실 적절한 주제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나는 늘 출판사의 제목마케팅에 불만이 많은 독자라...) 허나 누가 봐도 ‘쓴다’는 것보단 ‘산다’는 것이 더 철학적, 문학적이며 더 깊이 있고 더 팔릴만한 뉘앙스이렷다. 소설가로 산다는 건 소설을 쓴다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넘어가주기로 하고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느꼈던 몇 가지 감상은 기록해두고 싶다.

 

 

   먼저 개인적으로 열일곱 명중에 소설가로 사는 모습이 정말로 궁금했던 작가는 전경린이었고 창작론이 궁금했던 작가는 김인숙, 하성란 정도였다. 나머지(라 칭하여 죄송하지만) 분들은 큰 기대가 없었다.(별로 비밀을 알려 줄 것 같지 않아서 ㅋ) 김경욱의 작자와 화자, 주인공에 대한 식견은 쉽게 해도 될 말을 현학적으로 치장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김애란의 경우도 마치 단편 소설을 쓰듯 접근한 방식이, 문청시절을 아스라이 회상하는 언어들이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음악을 모티브로 작업을 한다는 김연수의 글도 흡사 논문숙제를 하는 느낌이 들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북경, 세기 전 신채호가 살았던 집을 거닌다.’로 시작되는 김인숙의 글은 소설의 소재를 좇아 마치 마지막 퍼즐을 찾듯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글 자체로 보여준 것 같아 그 울림이 색다르고 깊게 다가왔다. 직업 소설가 십 삼년 차라는 김종광의 글은 평소 생각을 꾸미지 않고 솔직한 심정을 전달한 것 같아 애틋하게 느껴졌달까. 김훈의 글은 언젠가 책을 뒤적이면서 가장 먼저 읽었던 기억이 생생한 내용인지라 익숙했다. 하지만 그가 쓴 창작론을 읽고도 실제 창작에 도움되는 힌트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김훈은 언제나 내게 문장의 완벽함은 선사하지만 그 완벽함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박민규도 자기만의 비법 같은 건 절대 공개하지 않을 작가로 인식되는데(외려 비법이 없음에 대한 논리를 만들겠지만) 이번 글 역시 주제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아 독자로서 심히 불쾌하기 까지 했다. 글이야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실험적, 창의적이었고 심심하니까 자동기술법을 연마한다는 박민규식 오토매틱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읽고 나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김훈과 매일반이었다고 할까. 차라리 부부 동반 자리에 초대를 받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회상하며 소설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톺아가는 서하진의 글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결혼하여 이십 오 년을 살았다는 지인을 보면서 대단하지 않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소설가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는 심윤경의 글에선 자신의 낙선작에 대한 논평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심경이 제일 공감갔다.(알레고리와 메타포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던 말에 무조건 끄덕끄덕) 윤성희는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에 스티븐 킹이 답했다는 “한 번에 한 단어씩 쓰죠.” 라는 대답의 의미를 좇아 글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순간의 고민을 풀어 놓았다. 일개 독자지만 작가의 글에서 한결같은 성실함의 태도가 엿보였다고 한다면 건방지다 하실런가. 윤영수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선배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도 계속하여 글을 고민하고 있는 작가의 내면을 그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작가의 삶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나이는 고작 오십 줄이지만 의식이 통과했던 시간은 조선중엽까지의 시간을 포함하기에 추억의 깊이가 남다르게 느껴진 이순원은 어디선가 받아놓고 꽂아만 두었던 <은비령>을 쓴 작가였다. 어린 시절 별에 대해 꿈꾸어 온 것들이 다시 소설로 그려진 것이라는 그는 작가에게 공백의 시간은 없다고 위로했다.

 

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 p187    이순원 - 삼백 년 전 소년이 그려낸 ‘은비령’


  

 

    그런가 하면 이혜경의 글처럼 분명 읽었는데 인상적인 구절하나 기억나지 않는 글도 있었다. 보편적이고 무난하고 재미날 것 없어 보이는 개인의 경험들은 확실히 책속에서도 묻히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굳이 뒤져보고 나서 발견한 대목은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구절이었는데 평소 글 잘 쓰는 사람이 꼭 인품이 훌륭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곧 잘 상처를 받는 편이라 밑줄을 그어대고 싶은 걸 그냥 참고 넘어갔구나 하는 정도만 겨우 기억해 냈다.

 

다행히, 전기나 평전들은 나에게 일러주었다. 글쓴이의 인품과 글이 주는 감동이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을 쓴 작가가 고매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인품은 뛰어나나 글로만 보면 얕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니, 아예 글 같은 걸 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 p198    이혜경 - 가만히, 말을 걸어보다

 

 

   하성란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져오신 <세계 어린이 명화>라는 책에서 본적 있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에서 시작해 작품이 거울 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배치한 다음 거울에 비친 풍경을 기다리고 말하는 일이 소설가인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고 증언한다.(한편의 잘 짜여진 소설과도 같은 글이라 역시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한창훈은 서울에서 섬에 왔다가 다시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야기를 하며 사나운 바람과 거친 파도가 그리워지는 이유에 대해 자기만의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다. 함정임은 광화문 시절의 문학사상사, 적선동 현대빌딩 팔층의 책상을 회상하며 소설이 시작된 곳을 추억하는 여정의 기록을 작성했다. 기억나는 건 소설이 미리 플롯을 정해놓지 않고 ‘누구도 끝을 알 수 없는, 한편의 미지의 소설을 향해 길을 떠나는, 떠나는 중에 하나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는 고백이었다.

 

 

 

 

계속 써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현재 내 위치에서 가장 구체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전경린이었다. 내가 만약 원고를 청탁한 쪽이었다면 전경린의 글이 가장 취지에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저마다 개성적인 자기만의 문체로 자신만의 창작론을 언급했지만 대부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았던 반면 전경린은 구체적인 디테일을 이야기 하면서도 큰 크림을 자신만의 언어로 축조하는데 능숙했다. 그녀는 지금 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내게 고맙게도 소설이 쓰이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소설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은유라 말했다. 말하자면 ‘내가 쓰는 전체를 한 단어로 은유할 수 있는가, 한 문장으로 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소설쓰기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과정이다. 대부분 내 소설은 내가 잘 아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을 향해간다. ...머뭇거림이란 불길한 징조다... 흥미는 사라지고 채워야 할 당위만 남아 뻣뻣하게 굳은 과제로 변해버린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을 끌고 가는 의문과 유혹과 몰입이다.   - p207 

 

 

소설이 삼분의 일 지점을 살짝 넘어설 때에야 대체로 전체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와 함께 쓰기의 원인도 잡히고 결말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기가 쓰는 것에 대해 잘 모를 때도 열망이 있다면 쓰기 시작해야 하고 계속 써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쓰기의 현재성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 소설 역시 발밑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과정 자체의 아름다운 인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고 완성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쓰는 것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내 의도를 지나가, 잠재되어 있었던 가능성의 끝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겨우 초고가 생겨난다.   - p209

 

- 전경린 - 울려와 은유 中

 

 

   책을 낸 작가보다 초고를 품고 있는 작가가 부럽다는 전경린은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무어라고 감히 문단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이 말하는 창작론을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책을 읽었다는 독자된 특권으로 작가와 방법론을 비교하며 즐거운 평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울러 진부하지만 그들로부터 또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가려한다. 현재 능력은 안 되지만 끙끙대며 두 번째 소설(비슷한 작품)을 써대고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떠한 성과가 없다 하더라도 절대 중단하지 않고 끝을 낼 작정이다. (나는 현재 서바이벌 형식의 연재소설 공모에 참여중이다) 연말에 내린 결심이라곤 이거 하나지만 나는 어디서 상 하나 타는 실적보다 우스운 결말이라도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막연히 깨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비 작가들이 다음 단계로 진출이 확정되지 못하면 스스로 연재를 중단한다는 다소 처연한 분위기의 고지를 올린다. 어떤 분은 2단계 심사가 통과되지 못하여 아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쓰셨다. 그의 아내도 아니면서 그의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따로 소설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거절당한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완성을 하게 될 지 그냥 그것으로써 작품의 운명은 끝나게 되는 것인지도. 다른 작가들이 속속들이 다음 단계를 통과하며 고지를 향하고 있을 때 탈락한 작품을 붙들고 완결한답시고 연재를 지속하기가 얼마나 쪽팔리고 또 서글픈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나도 끝까지 갈 것 같지는 않고 대충 어느 단계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이유로(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평가로) 탈락이 될지 모른다. 나 역시도 그때가 되더라도 그래도 끝은 내야겠다며 고집스럽게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이 틀렸는지 어디가 부족한지 집요하게 듣고 알아보기 위해 그리하여 그 어렵다는 객관의 평을 손에 붙들고 읽고 또 읽어보기 위해, 그분처럼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번쯤 울어는 보기 위해 끝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끝내는 두려움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기에 ㅋ)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이미 쓰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한다면 지금,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는다는 김병만의 얼굴이 생각난다. 거북이의 매력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꿈을 이루는 일은 어쩌면 살면서 가장 기쁜 일이기에 누구에게나 슬픈 추억이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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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2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일종의 `고시 합격생 수기`같은 것이로군요. 아무래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앞으로 그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일 것이므로 뭔가 회상적이고 비틀어진 글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직접적인 것이 더 나을 수 있겠죠.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는데 `소설가는 삶의 공백을 보는 사람`이라고..그렇다면 문제는 그 공백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겠지요. (저는 여기에 없지만 배수아 작가의 창작기, 창작론이 궁금하네요. 여기에 낄 급(?)은 아닌지 모르지만, 김중혁 작가라면 뭔가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줄 것 같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