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싫었습니다. 글도 쓰기 싫었습니다.

신기한 건 단지 일상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하기 싫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제겐 다른 일을 하고 말고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꼭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매번 희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사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처럼 습관이 되어버린 일이 어쩌면 하루를 좌우하고 나아가 계절을, 한 해를, 인생을 지배하는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미 책 읽고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세요, 물어 본다면 근사하게 답해줄 대답도 없습니다. 목적이 사라진 것이죠. 아무런 목적 없이 좋아서 하는 단계도 지나고 그냥 해오던 것이니까 관성에 의해 책을 펼칩니다. 그래도 자꾸 모자란 것만 같아 다른 책을 펼치게 되고 그것도 부족한 것만 같아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글은 같이 모자라거나 더 넘치기만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이죠, 아마 이 비슷한 답이 가장 적절해 보이네요. 세상엔 책을 펼칠수록 아직 펼치지 않은 책들이 넘쳐나고 글을 써 나갈수록 잊혀지는 문자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책과 글의 바다, 거기서 허우적 대는 나날들. 이 시간들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이일이 허무해지기 시작한 건 책에서 구한 지혜는 그다지 현실 속에서의 실천과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과 한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요. 읽었다고 떠드는 것도 마찬가지.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 역시 다른 문제입니다. 알지만 하지 않고 썼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것.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 느꼈지만 말하지 않고 말했지만 다시 잊어버리는 것. 물론 책은 책이고 글은 글이며 생각은 생각, 생활은 생활이니 매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니까요. 결국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심인 것이지 내가 그리 살겠다는 의지와는 괴리감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대표적인 위선을 실천하는 행위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위선을 견디기 위해 또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위선이 사라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기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밖에 더 굴었을까요. 책을 읽었다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는 것. 심지어는 이해했다고 버젓이 쓰고 말하고 다른 이에게 아느냐 묻기까지 하는 것... 다른 이의 생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무엇을 안다고 아느냐고 알아야 한다고 묻지도 답하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빛 좋은 위선만 배양하는 생활을 이만 멈추어야 겠다 생각했는데, 이 저자는 그래도 계속 읽어야 한다 말하네요. 달리 방법은 없다고 충고하네요. 책 읽기가 혁명이라 말하네요. 아...혁명하려고 책 읽어온 것은 아닌데 말이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이 여름밤의 궤변도 아름답구나, 아니 참 서정적이며 인간적인 논리구나, 아니야, 내가 몰랐던 진실이구나...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이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 질 정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말처럼 결코 쉽거나 당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을 읽은 최후에 이르게 되는 ‘고독의 싸움’이란 아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렵고도 쓸쓸한 결정의 순간은 아닐까요. 미쳐버리고 싶다는 것은 사실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 일 수 있겠어요. 자신의 무의식을 목격하는 일은 미쳐야 가능한 일이라는 뜻도 되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책에 미치면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 버린 것인데 내 속에 책이 들어온 것인지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하여튼 어느 지점에서 내 무의식과 만나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어요. 결정해야 합니다. 들어와 버린 책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을 뚫고서 원래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허나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다른 책을 읽습니다. 보류하는 것이죠. 그러니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다음 책에서도 똑같고 그렇기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겁한 자가 왜 혁명을 이루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런 - 저같은 -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방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덜 미친 방황의 시간. 고독한 싸움의 맛보기 과정. 열정과 공포의 적당한 반복. 이런 힘겨운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을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괴로움도 중독된다고 그래요, 이 전 책의 스님은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진부합니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책을 읽는 내가, 책을 읽었다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미쳐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제대로 읽었다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책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으로 책 처럼 산다는 건 책 읽기 전의 삶을 버리는 일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자는 40년간 독일어로 나온 책의 3분의 1을 썼던 루터를 예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땐 그것이 가능했죠. 그래서 혁명의 본체는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문학이 혁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저자가 부르짖는 핵심입니다.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웃기지 않나요? 저자가 문학을 과대평가 한 것인지 제가 문학을 과소평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거죠. 이해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읽고 쓰는 것을 목숨 걸고 해야 한다 설파하기엔 우린 다들 순수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기엔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로 먹고 살만큼의 당면한 문제이거든요. 먹고 사는 방법은 문학 말고도 너무나 많은 오늘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읽고 써야 한다면 그건 비참하고 슬픈 일이거든요. 예, 그래서 저는 보다 넓고 큰 바다처럼 존재하는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에 감동적이라든지 신선하다라든지 놀랍다든지 하지는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혁명에 대한 오래된 불감이, 그리하여 문학에 대한 강렬한 불신이 더 팽배한 상태니까요. 읽고 쓰고 노래하는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지금 내 삶과 너무 멀어서요... 단지 문학과 책, 글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설득해준 저자의 논리가 고맙긴 합니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계속 읽고 써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으니까요. 저자는 저 같이 문학에 비관적인 사람에게 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문학을 하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이른 바 사임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겁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p226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저자는 계속하려 설득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요. 인류가 생겨난 건 20만 년 전이고 그중에 문학은 50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아주 젊은 예술에 불과하다고요. 어느 시대건 자기 사는 시대가 암담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던가 봅니다. 니체는 살아 생전엔 니체만큼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술가는 문학 말고도 발에 치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늘 밤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세상은 변혁이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죠. 그러니 니체가, 그를 읽은 우리가 하는 일은 절대로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기만 한데 왜 굳이 종말을 걱정하고 절망을 택하는 것인지 저자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웃고 있어요.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은 저자만의 독특한 에너지가 있어요. 문체도 그렇고 근거 있는 자신감도 매력적입니다. 논리나 내용은 모두 동감하지 못했지만 그냥 심정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잖아요. 말하는 구석은 기분 나빠도 그냥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요. 꼭 이 책이 그렇습니다. 저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어요. 기분도 나빠집니다. 맞기만 하면 다인 줄 알잖아요. 이 책을 옮긴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장하고 떠들어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싫어서 ‘논리적이고 개방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역겨워서 스스로를 편파적이라 말해요. 자신은 편식과 편견에 빠진 사람이라 부르죠. 좋고 싫은 것이 먼저고 다음이 논리라 말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고백하죠. 문체나 행간의 분위기, 비유한 표현, 분노의 에너지 등 이런 점들이 책 전체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말합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공감하진 않았지만 읽다보면 사람에 빠지듯이 점점 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후반부 루터의 혁명부터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근대의 근원을 밝히면서 읽고 쓴다는 것의 혁명성을 체계화하는 통찰은 사상가로서의 자기 주장의 확고함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충분합니다.

 

 

희망을 전달하는 방법이 새로운 책이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시달린지 오랩니다. 그랬기에 책으로 희망을 발견하고 글로 치유해 나가는 것도 익숙합니다. 허나 어줍짢게 이 책을 통해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한 공감을 널리 유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제넘은 추천이나 권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그렇게는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 비록 일 퍼센트라도 그건 큰 확률이라고요. 저자는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는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이라죠. 모두 사라지고 그만큼만 남은 텍스트들의 위대함을 상상해 봅시다. 그러니 만약 적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책이 있다면 그건 승리이며 환희이며 혁명입니다. 살아 남아 또 다른 새로운 혁명을 유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혁명을 이어지게 하는 인류의 끈질긴 과업인 게죠. 이런 깨달음은 평범해 보여도 난해한 실천이 과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읍시다. 일단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읍시다. 그리고, 글을 씁시다. 멈추는 건 대안이 아닌 듯 합니다.

 

 

글쎄, 달리 방법은 없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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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24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고사는 걱정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먹으면서 어떤 이웃하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책도 다른 무엇도 모두 혁명이 되리라 느껴요

비로그인 2012-06-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이 구절을 읽는데 울컥합니다.. ㅠㅠ


2012-06-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6-2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서평단 도서인데, 읽고나서 꼭 다시 리뷰를 읽으러 오겠습니다.

2012-06-26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읽고 댓글은 이제 달아요.) 근래에 읽은 글 중 가장 재밌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분이 한사람님이시죠.^^ 한 가지 주제를 일관되이, 개성있게 밀고 나가는 글. 그리고 그 글은 재미있지만, 주제는 윤리적인 질문이라는 것. 저는 죽어도 이런 글은 못 써요~.

가연 2012-06-2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괜찮죠??ㅎㅎ 평가단에서 추천하고 뿌듯했었답니다.
 
왕따 없는 곤충 학교 재미있는 곤충 학교 3
우샹민 지음, 샤지안 외 그림, 임국화 옮김, 최재천 외 감수 / 명진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첫번째 추억을 떠올리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자주 듣게 된 소리는 바로 ‘왕따’와 ‘일진’이었다. 어느 날인가 반에서 ‘찐따’(찌질한 왕따)로 불리는 아이와 짝이 되어 불쾌하다고 했다. 마트에선 매장에 같은 학년의 일진이 떴다고 빨리 가자며 손을 이끈 적도 있다. 일진에 찍히면 왕따가 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날을 잡아 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 땐 소위 말해 노는 친구를 뜻했던 ‘날나리’는 그냥 노는 애들일 뿐이었다. 그것도 거의 학교 밖에서 날나리들끼리 어울렸고 교실에선 선생님도 아이들도 제외시켰다. 날나리들도 반에선 될수록 눈에 뛰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냈던 것 같다. 교실 밖에선 누구와 나쁜 짓을 하는지 어떤 폭력이 오가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반에서 유난히 친구가 없고 지금처럼 왕따에 가까운 아이가 있긴 했지만 날나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때와는 달리 공부도 잘하고 덩치도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 일진이 되어 반에서 권력을 장악한다. 날나리가 ‘탈선’의 상징이었다면 일진은 ‘위선’의 아이콘이 된 것 같다. 적어도 겉으로 보아선 모범생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진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바탕으로 교실 내에서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아이를 왕따시킬 수 있는 어엿한 신분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운동회 때엔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의 학부모가 반 전체에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알고 봤더니 그 아이는 반장이었다. 아이 말로는 일진이 입는 유명 브랜드의 점퍼와 신발은 다른 아이들이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스마트폰도 계급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서열이 낮은 아이는 교실 내에서 신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벌써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 계급을 나누어 같은 친구들을 지배하는 심리에 익숙해져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서글펐다. 조직 및 계급 서열화와 성과지향주의에 물들어 버린 우리 사회가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물려주었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일진의 눈에 벗어나면 ‘왕따’가 되는 것이다. 뉴스에서도 보았듯이 왕따가 된 친구는 일진으로부터 정신적, 물리적 폭력에 시달려 급기야 자살까지 하게 된 경우도 있다. 왕따와 일진은 분리될 수 없는 학교문제가 되었기에 이제 왕따가 없다면 일진도 없는 것이고 학교폭력이 없다면 왕따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요즘 초등학교 일진은 중학교 일진을 빽으로 두고 반에서 짱노릇을 하는 친구가 많다. 아이 말로는 어떻게라도 일진과 연결고리가 있으면 중학교 언니, 오빠들이 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중학교 일진이 초등학교 후배를 선별해 기르면서 중간관리자를 만드는 꼴이었다. 초등 일진은 왕따를 중학교 일진에 보고하고 중학교 일진은 타겟이 되는 아이들만 골라 돈을 뜯거나 이유 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인접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그 연결고리가 탄탄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진이 싫어도 표면적으로 친한 척 해야 하며 혹시라도 찍힐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들이 일진에 찍히는 것일까. 이웃 학부모들과 이야기 해보면 엄마들이 교실까지 따라다닐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최선이라는 결론이었다. 아니면 공부나 예체능을 아주 잘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실력자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너무 잘난 척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침묵해도 안 되고 혼자 얌체 짓을 해도 안 되고 혼이 났다고 징징대도 안 되고 어떤 특정 과목을(특히 예체능)너무 못해도 안 되고 너무 더러워도 안 되고 너무 뚱뚱하거나 못생겨도 안 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의 중간치인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이 찍히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가슴 아픈 것은 혹시 학원을 안다니고 학습지도 안하고 핸드폰이(혹은 MP3) 없거나 집이 멀다는 이유도 찍힐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 깊은 획일성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전형적인 집단이기심이기도 하다. 아이들 입장에선 더 많은 쪽이 강한 것이고 다르고 적은 쪽이 약한 것이다. 일진이라는 의미는 학교폭력 조직을 상징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아이들(기득권)이 휘두르는 소수자에 대한 과시와 배제 심리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생각할수록 왕따와 일진의 문제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아주 밀접한 학교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라는 조직에서 위선을 먼저 배우고 성장한 후에도 궁극에 권력을 얻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어른이 될까봐 걱정스럽다.


덕분에 나는 언젠가부터 왕따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서점에서도 꼭 훑어보는 학부모가 되었다. 아마 많은 학부모들이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이는 이 책을 보고 자신이 4학년 때 과학관에서 얻어온 장수풍뎅이와의 추억에 흠뻑 빠졌다. 알 상태로 집에 가져온 장수풍뎅이는 애벌레와 번데기를 지나 어엿한 살아있는 곤충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곤충의 몸이 커지자 마트에서 집도 사고 나무와 먹이도 사다가 그럴싸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아이는 당시 전학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갔다 오자마자 ‘짱수’(애칭)에게 인사하고 정을 붙였었다. 짱수는 4월에 우리 집에 들어와 겨울이 시작될 무렵까지 살았다. 친구들의 곤충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지만 평균수명을 고려해 볼 때 퍽이나 오래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는 어느 날인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짱수가 뒤집어 진채로 죽어 있었다고 자신이 새벽에 뒤집어 줬어야 했다며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짱수를 어쩌지 못했던 아이는 첫눈이 흩날리던 날 집 앞 화단에 묻었다. 그 후로 화단을 지날 때 마다 짱수야 안녕, 하며 인사를 잊지 않던 아이였다. 우리는 애완견을 키운 적이 없었고 아이는 개나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편인데 곤충에 쏟는 애정은 남달랐다. 이 책에는 장수풍뎅이 같은 딱정벌레 곤충들이 인격을 가진 친구들로 등장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모범생 장수풍뎅이가 정확한 답안을 쪽지에 적어 사슴벌레에게 전달한다. 폭탄먼지벌레의 독가스 살포로 교실은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타 다른 학생들이 답안을 베껴 쓴 덕에 딱정벌레반은 전체 학생이 시험에 통과한다는 해피엔딩이었다. 정의를 위해 단결한 건 아니지만 아이는 역시 장수가 자기처럼 똑똑하다고 우쭐해 했다.

 

 

 

새로운 추억을 만들다

 

 

나는 아이와 책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에 나오는 곤충들을 예로 들어 보았다. 혹시 반에서 큰 턱으로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슴벌레 같은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사슴벌레의 행동을 지혜롭게 변화시키던 남생이잎벌레처럼 힘이 아닌 머리로 친구들을 움직이는 친구는 있는지 물었다.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누구보다 최고인 달팽이 같은 친구가 있는지도. 독가스를 뿜어대는 폭탄먼지 벌레 같이 결정적 한방이 있는 친구. 초음파로 사냥감을 찾는 박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밤나방 같이 촉이 예민한 친구. 날개는 없지만 독니를 가진 늑대거미 001처럼 자신만의 유별난 무기가 있는 친구. 죽은 동물의 사체를 묻어주는 송장벌레처럼 반에서 더럽고 궂은 일을 하는 친구. 쉰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꿀벌처럼 부지런한 친구. 개미같이 몸은 작아도 반을 위해 자기 역할에 충실한 친구...... 누가 폭력적인지 물었다면 대답하기 더 쉬웠을까. 아니었다. 곤충의 생김새와 특성을 확인하면서 친구를 떠올리니 한결 더 쉬웠다. 희한하게도 곤충학교 학생들은 아이네 반 친구들에서도 볼 수 있는 캐릭터와 일치했다. 친구를 곤충에 비유하고 곤충을 친구이름으로 부르니 마치 소꿉놀이 하듯 재미가 났다. 우린 기세를 몰아 책 뒤에 있는 스티커로 교실 분포도를 만들었다. 스티커 위에 곤충이름과 그 옆에 친구설명을 적고 새롭게 합성된 별명을 만들어 우리끼리 키득키득 거리고 나니 새로운 방법의 독서 감상 대화(?)를 마치고난 느낌이었다.(이름을 적으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실 책은 고학년이 읽기엔 조금 쉬웠으나 어른들도 가끔은 만화나 쉬운 그림책이 재미나듯 아이들도 자신의 수준보다 한 단계 낮은 책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듯 했다. 덕분에 나는 친구관계를 조사하고 감시하는 엄마가 아닌 아이와 친구별명을 만들고 그것을 우리끼리 비밀에 부치는 같이 흉보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 아이와 함께 만들어본 ‘우리 반 곤충분포도’ 이다. 가운데 늑대거미는 노래와 춤도 잘추는 반장이면서 일진인 아이를 상징한다. 일진을 중심으로 2인자 딱정벌레들과 행동대원 사슴벌레, 심부름꾼 바구미들을 근처에 붙였다. 아이는 참았다가 폭발하는 ‘폭탄먼지벌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것저것 고자질을 잘하는 친구, 소문을 내고 말을 옮기는 스피커 같은 친구, 조용히 책 읽고 숨은 지도자 같은 친구, 멋만 부리고 반 일에 관심이 없어 겉도는 친구를 비슷한 곤충과 짝짓기 했다. 맨 오른 쪽과 왼쪽 아래에 못생긴 ‘찐따’ 배자바구미와 더러운 ‘왕따’ 쇠똥구리가 보이고 힘이 세 보이지만 아직 이름은 알수 없는 전학 온 친구도 보인다. 현실은 아쉽게도 왕따 없는 곤충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곤충을 붙이는 위치를 보고 아이가 친구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다 만들어 놓고 나는 이 분포도가 어른들 조직에서도 비슷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나 아이는 학교숙제로 독서 감상문을 내야 하는데 다른 읽은 책이 없어 이 책에 대해 써야겠다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제가 너무 쉽다고 무슨 주제로 써야 할지 내게 물었다. 왕따에 대해 쓰자니 마음이 불편해서 솔직하기 싫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나는 기억나는 한마디가 없느냐 물었고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지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다 싶은 나는 페이지를 펼치며 ‘중요한 건 무엇이 없느냐가 아닌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늑대거미 001의 한마디를 펼쳐보였다. 늑대거미는 뿔이나 턱이 없었지만 독니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아이가 어떤 내용을 써내었는지 보진 않았다. 꼭 내가 가르쳐 준 힌트를 작성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아 부러 잊은 척 했다. 학부모로서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은 많은 것 같다. 벌써 나만해도 곤충을 빗대어 아이 반 친구들을 파악했으니 대화소재로도 유용했다. 교사라면 곤충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역할극을 만들어도 될 만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도움이 된 메시지는 딱정벌레반 반장인 늑대거미의 한마디였다.

 

 

한창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라 요즘 들어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누구는 다리가 짧은데 반바지를 입고 왔다고 흉을 보기도 하고 자신은 신체에 비해 발이 커서 창피하다고도 한다. 어떤 아이는 얼굴에 비해 코가 크고 친구 누구는 눈은 큰데 너무 튀어 나왔다고 대신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한창 다른 친구들의 장점이 유독 부러워 보이고 내가 가진 장점은 크게 여기지 않을 시기인 것이다. 더불어 내 단점만 상대적으로 심각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고 그 사람의 장점은 반드시 단점과 연결이 되는 것. 곤충의 경우에도 더욱 크고 힘이 센 뿔은 일을 하는 데는 효율적이겠지만 운동성과 순발력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꼭 신체 외모 뿐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환경도 장점은 언제든 단점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단점이 어느새 장점으로 기능하게 될 수 있다. 자신의 단점을 긍정하면 상대의 단점도 받아들이게 되고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나아가 왕따를 사라지게 하는 근본은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쉽고 웃기지만 그 효과만은 우리 모녀에게 어떤 책보다도 확실했던 것 같다. 우리는 흔히들 인간의 아주 비참한 상황을 ‘벌레만도 못한 삶’이라 비유하곤 한다. 기어다니고 새의 먹이나 되기 쉽상인 곤충들은 우리가 사는 우주와 생태계에서 아주 하찮은 존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왜 저렇게 생겼을까 싶은 신체 부위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고 부족한 능력은 다른 것으로 보상하며 살아가는, 인간보다 지혜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하기 위해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처음엔 옥신각신하다가도 결국 아무도 왕따없는 교실환경을 구축해나가는 곤충들이야 말로 어쩌면 사람보다 공존과 공생의 개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바로 이 책의 가치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가는 곤충들이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친구들과 무엇이라도 조금만 다르면 왕따가 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곤충들의 모습은 어른이나 아이에게 새삼 되새겨야 할 교훈인 듯 하다.

 

 

작년 말부터 터져 나온 학교 폭력의 실상과 그로인한 청소년들의 자살이 이제 곧 청소년이 되는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처럼 귀뚜라미 선생님이 실종되자 다들 모여 단체로 개미네 집을 방문하는 학생들이 그립다. 문득 아이가 정성을 다해 돌봐주던 짱수도 그립다. 이제 짱수는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유익한 거름이 되었거나 다른 유충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잊혀진 유기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 가슴에 새겨진 맨 처음 곤충의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더불어 오늘 아이와 나눈 우발적인 대화도 짱수 뒤에 새로운 곤충의 추억으로 덧붙여지길 기대한다. 자연속에서 우리 인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와 쉬운 교훈으로 아이와 의미있고 재미난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한다.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 모두에게 이 책은 살아있는 곤충의 추억을 만들고 서로 나누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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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1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한사람님 서재에 들러서 글을 읽다가 남깁니다. 대단한 글이네요. 한사람님 뿐만 아니라 한사람님 자녀와 함께 쓴.. 한편으로는 참.. 뭐랄까 씁쓸한 기분도 남네요. 찐따와 일진은 진짜 사라져야되는데.. 잘안되지요.
 
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반가운 소식

 

 

나는 종교를 기회의 문제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들은 뱃속에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종교를 수용할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쪽에 속했다.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님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고등학교는 불교학교를 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나서 부터 종교는 내게 학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교일지라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선 긍정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신이란 일단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부재한다고 믿는 쪽보다 손해를 덜 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가끔 신에 의지해 남몰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있어 종교는 일상으로 체화될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신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학문과 철학, 그리고 문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 그리고 죽음, 삶의 의미 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만큼 많이 받아 온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종교가 없다고 당당히 답해왔지만 우리 사회는 어쩐지 확실한 종교가 있는 사람을 더 신뢰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어감도 불신이나 부정적 인 의미로 전달되는 듯 했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비종교인을 대할 때 교화나 전도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종교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위로나 의지의 방편으로 대안을 제시하곤 한다. 또 보편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말년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편안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죽음이 두려워 질 때, 상실감에서 헤어나고자 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해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없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가 없으면 개인은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국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똑바로 지칭한다. 종교는 인생을 충분하게 할 순 있지만 인생을 충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이 책은 저자만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저자는 그런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 책이 지루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의 체취와 발자취가 묻어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나라 미국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툭하면 애국심을 앞세우며 태연하게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때 단결 전략으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종교적 메시지이다. 지난 시절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때 마다 자신들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 말해왔다. 그런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신의 계시라며 정당성과 초월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세계에서 가장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향한 짜릿한 일침. 하느님을 믿는 것과 세계평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교회를 다니는 것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미국사회의 주류가치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 생활 정서에 간만에 날아든 고마운 소식이었다.

 

 

 

놀라운 만남

 

 

많은 영역에서 미국사회를 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저자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국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다. 종교적 다원성이 지켜지는 나라이고 비종교인,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배타하는 분위기는 미약하다. 하지만 상하, 수직적 체계에 익숙한 조직과 학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다. 대학 친구의 부모님은 배우자도 당연히 같은 종교인이길 바라셨다. 친구는 처음부터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와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에 있어 아픔이 많았다. 종교가 없었던 또 다른 친구는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종교적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친구의 남편은 공부중이고 마침 친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다. 나 역시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간 어느 지방의 절에서 백배의 절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계절마다 절기마다 절에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절에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며느리에게 종교의 권유 차원을 넘어서 강요를 하는 시집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 사람이니 같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발상이지만 우리네 시집문화라는 것이 생각만큼 현대화되지 않아 종교 갈등은 고부갈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어쩌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여성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전성교, 낙태, 동성애 결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최빈국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이다. 친구나 애인,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할아버지와 섹스에 대해선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 여기며 서로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저자는 일 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에 살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질문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부분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것은 그들에게 살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 남들은 왜 교회를 가는지 혹은 가지 않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소외당할 조건으로 기능한다. 미국과 정반대이다.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의 출산, 내세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기에 그것은 허위사실이고 아이들에게 믿으라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원하면 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권위의식은 서로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건 내 추측인데 그래서 종교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주 옛날부터 교회세를 내왔고 늘 그래왔듯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별 고민 없이 자기 자식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믿음을 행하는 종교는 철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생활 속에서 전통이나 풍습처럼 편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로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은 특정 종교인에만 해당하는 관행이 아닌가.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특정 종교가 행하는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서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온 우리 풍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장례문화로 보아야 하듯 그들의 교회결혼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종교가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사회의 봉사를 유도한다. 그런데 왜 가장 종교적인 나라 미국은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보다 부유하지도 평등하지도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것일까. 종교가 부재하는 세속적인 사회에선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범죄와 타락,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고 하는데 가장 세속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왜 그 반대인 것일까. 덴마크나 스웨덴은 자신들이 비 종교적이라서 나라가 행복하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미국은 종교 없는 나라는 불행 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외려 사회적 건강과 안녕, 도덕과 질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종교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부 보수파 종교단체는 조폭과 연대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스님들도 도박과 룸살롱 출입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MB가 다닌 소망교회는 이 정권에서 주요 핵심인력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해 왔다.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비종교적 국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기록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니 이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을 원인관계로 연결 짓지는 말아도 되지 않을까?


무심한 대답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재미가 없듯 이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시큰둥했다. 나는 그들이 답한 재미없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삶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덮고 비로소 삶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거의 충격에 가까웠던 대답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느냐는 무심한 답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살아가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런 질문 자체는 크게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은 자연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끝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지금의 삶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그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 중에는 외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떤다는 호스피스의 인터뷰는 종교에 대한 반전에 가까웠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혹시 지옥에 갈까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한다니 소름이 끼쳤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마지막 까지 욕심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종교상식과 정반대되는 실례라 이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통계상으로 보면 전 세계 무신론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다음으로 많은 수치라 한다. 믿는 사람만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새삼 종교의 필요성을 폄하하거나 근본적으로 반론하려 이 책을 쓴 것 같진 않다. 단지 종교가 없어도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할 수 있으며 국가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을 신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주변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생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미국사회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종교 없이도 최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전 나는 공교롭게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은 바 있다. 도킨스는 늘 종교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온 과학자였다. 그는 진짜 마법이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 강조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며 그 현실을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영국 철학자 러셀은 ‘신념’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러셀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믿게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은 일침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시 신이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발견

 

과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나는 늘 차동엽 신부같은 종교인의 주장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차동엽 신부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을 믿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필요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기도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또 국가의 사회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가치관들은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에서 종교를 최우선시 하지는 않는 주체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온 듯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이상향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와 종교인의 상반되는 시각, 그리고 철학자의 논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바로 종교를 가족적, 전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절대가치로서의 신념이 아닌 상대가치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이니 만큼 때론 초자연적인 존재에 삶의 한 순간을 기댈 지라도 그 무엇도 내 삶은 초월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관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어떤 교리든 이웃을 도우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든지 실천하고 현재의 내 삶에선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평생가도 겪어 보지 못할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지하지 않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는 삶. 그러한 삶이라면 비록 신이 없더라도 얼마나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가. 내 삶은 초월적인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로만 이루어진다. 내가 사는 곳 너머, 내 인생 너머의 초자연적인 현상과 존재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서 나를 나답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가장 진짜인 내 삶이 존재한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내 삶 속에 살고 있다. 신(神)없는 나라가 신(興)나는 나라가 아닐까. 신을 버리니 새삼 내 삶이 더 커 보인다. 당연히 그 삶의 주인공도 근사해 보인다. 내 안에 삶이라는 새로운(新) 신(神)이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오래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내 삶만을 믿어(信)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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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상대적 가치에 의한 인식은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일한 '보편자' 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열자(列子)께서는 우주의 탄생을 태역-태초-태시-태소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太易: 만물의 분화 이전의 준비과정
太初: 우주의 모습이 구체화되어가는 찰나의 장면(서양의 빅뱅)
太始: 빅뱅 0.001초 후의 현상을 총칭함
太素: 變을 거친 化의 단계로 제모습을 갖춘 우주의 형태

등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답니다.
열자는 기원전 4세기 인물이라던데요...

글을 읽고 언뜻 떠오른 생각이랍니다 한사람님..

2012-06-15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6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6-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
말씀을 들어보니 이해가 갑니다..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참 궁금했었거든요.
평소 한사람님의 좋은 글을 읽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좋은 글에 대한 반응이 제 예상과는 달라서 말이지요.

저는 리뷰대회에 글을 쓴 적이 없고
리뷰대회의 성격도 모릅니다.
겨우 알라딘에서 혼자 놀다가 가는 형편인지라^^

최근 일련의 상황들이 저로하여금 알라딘에 뜸하게 하더군요.
참새 방앗간 같던 알라딘이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해
무척 당황스러웠구요.

책을 가까이 하는 분들의 완고함이
제게는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졌다고나 할까요...

독서는 사람을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을
완전히 깨버리는....

역사는 이를 잘 증명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때론 제 자신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ㅠ.ㅠ
기대감에 대한 적나나한 배신을 자주 목도하면서도
도대체 바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딜레마랍니다 한사람님...ㅠ.ㅠ

친절하신 답 고맙습니다...
 
생각 버리기 연습 2 - 복잡한 생각을 잠재우는 행복한 마음 다스리기 생각 버리기 연습 2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양영철 옮김, 스즈키 도모코 그림 / 21세기북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자주 괴로웠다면 자주 원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번 책에서 말하는 ‘생각’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이다. 지난번 책에서의 생각은 ‘잡념’이었다. 넓게 보면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도 쓸데없는 잡념에 속한다. 저자가 말하는 ‘생각 버리기’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생각만 하고 살라는 뜻이다. 이년 전 베스트셀러가 된 후 ‘생각 버리기 연습’을 읽었을 때 처음 느낌은 썩 좋진 않았다. 언뜻 보기에 생각의 총량을 줄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 나는 현재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모든 오감과 생각을 집중하라는 충고가 부담스러웠다. 절망을 뿌리치기 위해선 절망과 싸울 것이 아니라 다른 희망을 붙잡기만 하면 절망이 사라지듯이 생각도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쓸데없는 잡념들은 사라진다는 이치가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조금은 공허하게 들렸었다. 외려 생각이 없어도 되는 영역까지 피곤하게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싶어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내 모든 생각들이 쓸데없다고 여기기에 나는 미련이 많았다. 가끔 책이 공허하게 느껴지면 더욱 리뷰의 완성도를 높여 나름 그 책을 보완하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심에 시달릴 때가 있다. 기대했던 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더 청개구리 심보가 고개를 내미는 것도 어쩌면 내 선택에 대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더욱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논리를 만들고 지루한 설명을 붙여가며 리뷰를 썼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그때 생각이 소록소록 떠올랐는데 가장 공감하던 불교용어가 흡사 불이 켜지듯 뇌리에서 주르륵 반응했다. 바로 만(慢)이라 불리는 번뇌의 스위치이다. 저자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걱정하고 조바심 내며 프라이드에 집착하는 탐욕'이 만(慢)의 번뇌라 하였다. 인간은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 뇌에서 만(慢)이라는 번뇌모드가 활성화된다. 그 순간 끼어드는 생각의 잡음은 안타깝게도 우리 삶을 삐뚤어지게 이끌어온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만(慢)의 번뇌에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과시욕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과시욕의 밑바탕엔 '그렇지만 나는 못난 사람이다'라는 열등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만(慢)이라는 번뇌에 쫓겨 행동할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드레날린이 활성화되어 흥분 상태가 되고 이러한 고통은 뇌에 자극을 주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뇌는 우리의 마음과 같지 않아 이 자극을 쾌락이라는 정보로 받아들이고 다음번을 기약하게 된다. 뇌는 옳고 그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며 정보수용을 통해 생각구조를 프로그램화해 셋팅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뇌가 원하는 일, 뇌가 좋다고 판단한 일을 자신도 모르게 좇아가며 한번 긍정으로 저장된 생각구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뇌 속의 연인’이 있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고 했던 저자의 주장이 비로소 실감나게 기억났다. 누구든 스스로 괴롭고 싶어서, 고통이 좋아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사람은 모순되게도 괴로움의 고통을 원하는 존재였다.

 

 

살면서 어디서든 보게 되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분명 괴로움에 처했을 것이 확실한데 어쩐 일인지 그 괴롭고 힘든 감정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스스로 괴롭다고도 말하면서 가만 보면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무언가 괴롭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비슷한 유형의 괴로움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자꾸 괴로움의 구렁텅이를 스스로 파헤쳐 빠지게 되는 걸까. 이것은 같은 사람이 비슷한 상처를 자꾸 겪게 되는 과정과도 유사한 듯하다. 저자는 괴로움의 신호가 인간에게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기억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위험을 피하고자하는 것은 생존본능이다. 이때 뇌에 전달된 정보는 다른 정보보다 강렬하고 중요하게 인식될 것이다. 때론 ‘괴로움의 신경회로’가 자극되어 적절한 시기에 실수를 인정하거나 잘못을 사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자극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이어서 생각의 패턴으로 굳어지면 어떻게 될까. 혹시 그전 보다 더 강하고 더 힘겨운 괴로움에 직면하게 되지는 않을까. 괴로움의 자극은 뇌에서 마약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고 괴로움에서 당당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이렇듯 ‘괴로움의 신경회로’가 습관화되는 현상을 ‘업을 쌓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힘을 '염력(念力)'이라 칭한다. ‘념(念)’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잡다한 생각을 잡념(雜念)이라고 하지 않는가. 흔히들 정신을 집중해 물체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위치를 옮기는 초능력을 염력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쓸데없는 생각을 깨닫는 것이 힘들다는 뜻은 아닐까.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자유의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무의식, 무자각의 상태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았다. 현실에서 지혜롭게 매번 괴로움의 신호를 알아차리면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반복, 더 나아가 괴로움의 증폭, 내달리게 되는 폭주 현상을 막기 위해선 무엇을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 후회하지 않아도 될 일, 화내지 않아도 될 일들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괴로움 버리기 연습’은 바로 괴로움을 만드는 신경회로를 개인의 의지로 통제해 나가는 여정이었다. 뇌에서 일어나는 착각과 왜곡에 사로잡히지 말고 고통스런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마음을 괴롭히는 사고나 언어 패턴을 줄일 수 있다는 것. 혹시 비슷한 패턴의 괴로움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땅한 탈출구가 없는 독자들이라면 퍽이나 유용한 정보가 될 듯 하다. 지난번 1권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은 ‘괴로움’이라는 한정된 잡념의 영역을 겨냥하고 있으며 그 해결법 또한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자주 비난했다면 자주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유익한 충고는 비난에 대한 대처였다. 비난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자는 서두부터 비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닐까. 어떤 일이 발생하고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한 뒤 다음날 언론기사를 보면 열에 아홉은 비난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선한 의도로 했다 해도 비난을 면할 순 없다. 저자는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으려 하고 이유를 찾아내 남을 헐뜯으려 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난받도록 되어 있기에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나 주장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의견과 관련된 기억정보를 떠올리게 한다. 기억 속에는 공감뿐 아니라 개인적인 반감, 상처, 이해관계, 경험, 지식 등이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개인의 기억구조를 피할 수 없었던 부처도 심한 공격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의견을 제시하는 쪽은 이러한 인간의 생각구조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를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앞세우게 된다. 저자는 타자의 이해를 바라는 심리 자체를 헛된 기대, 응석, 혹은 망상이나 환상이라 일갈한다. 비난은 세상의 이치이고 원리이며 자연스런 인간 활동에 불과한데 왜 부자연스런 칭찬이나 이해를 먼저 구하냐는 말로 들렸다. 그러니 누군가 비난을 받았다면 그건 애초부터 억울할 일도 화가 날 일도 따질 일도 아닌 것이다. 물론 누구나 비난을 해도 상관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비난하는 사람이 옳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마음속에서 비난이 아닌 칭찬을 받고 싶다는 기대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이 쓴 글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도 나 혼자 쓰고 말 일이 아닌 세상을 향해 떠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쓸 땐 칭찬보단 비난이 더 당연하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면 어떠한 비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저자는 전에부터 분노 에너지를 극대화시키지 않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체의 방문회수나 댓글에도 마음을 닫으라 충고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메일에서도 서로 자아를 자극하는 정보를 전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번뇌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심리가 쓸데없는 잡념을 만드는 요인이다. 무언가 모자라다는 느낌은 뇌에서 감지하는 만큼의 쾌락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인 것. 저자의 일침은 사실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절대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성화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각부터 정돈 하는 것이 더욱 단단한 네티즌으로 살아가는 한 방법이라 깨우쳐 주는 적절한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상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견을 제시하며 그 의견에 동조하길 바란다. 겉으론 사람들 마다 다양한 생각이 있다고 전제를 두지만 더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가 보면 그래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뇌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환상의 방을 마련해 놓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그래서 옳은 생각을 했고 이 의견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에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동조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생각이 불가에서 보자면 왜 쓸데없는 집착에 불과한 것일까.

 

 

당신의 의견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 줄 때,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이미지를 뇌에 형성하고 싶은 까닭에, 비난의 위험을 망각하고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당신이 옳다는 망상을 뇌에 심어두고 싶은 것이다. -21p

 

 

이 책은 맨 앞에서 비난을 대비하는 방법을 말하고 마지막에 ‘의견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의견 자체는 논쟁이나 말싸움과 다르다. 다양한 의견이 모아져 발전적인 방향을 이끄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의견을 주장하다보면 주장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른 의견은 다른 기억을 부르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에 의해 분노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분노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나는 옳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 뇌 속의 연인은 온갖 환타지로 구성된 자신만이 드나드는 착각의 방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칭찬과 공감, 찬성의 목소리는 뇌를 수시로 자극하는 정보들이다. 마찬가지로 남의 의견에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같은 이치다. 흔히 길고 충분하게 설명하면 상대가 이해할 것이라 여기지만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상대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한 내용을 이해하진 못한다. 의견에 집착하다가 결국은 반대하는 자신만 주장하거나 마찬가지인 상대방만 보게 되어 논쟁의 상처만 남게 된다. 저자는 빈번한 논쟁이 마음속에 뒤틀어진 망상만 키우게 된다며 의견자체에서 벗어나라 따끔히 충고했다.

 

 

자주 흔들렸다면 자주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망상의 업을 키우지 않기 위해 저자는 무엇보다 타인을 구실로 자신감, 자존감, 자만심을 구하거나 잃지도 말 것을 강조했다. 타인과 바깥세상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은 외부 세계에 좌지우지 되어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응 때문에 자존심을 상해한다거나 자신감을 잃는 것 모두 평정심이 없기 때문이므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주장을 피력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지 자신이 있다면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보자면 주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가장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자신을 잃어 버려 놓고 타자나 세상을 통해 자존심을 찾으려는 발상은 계속하여 자존심에만 집착하게 되는 요인은 아닐까.

 

 

예를 들어 살면서 친한 친구는 하나쯤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 연인이 필요하다는 생각,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확신, 가족이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 동료가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이기심, 배우자가 이것을 해주어야 한다는 고집도 모두모두 내 평정심을 해치는 쓸데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면 어떨까. 중요한건 내 마음의 평정이지 그들과의 관계 완성도가 아니다. 특히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타자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려는 것도 대표적으로 쓸데없는 만(慢)의 욕구에 해당된다 가르친다. 부처가 말한 악마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이자 불만이 악마부대를 늘리기도 줄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악마는 다분 자기학대적인 성향이 있어 불쾌한 자극을 반복하려 든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뇌는 정보를 왜곡해 그릇된 환상을 만드는 사기꾼이라 여기고 뇌의 정보처리에 농락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고 헛된 미래를 꿈꾸는 것 역시 오늘의 나를 보지 못하는 자세이다. 저자는 다른 누구보다 지금의 나를 응시하고 집중하며 관찰하는 습관을 반복하라 주입한다. 화가 났다면 내가 지금 처한 감정이 무엇이라는 자각만 제대로 인지해도 금방 화는 줄어들게 된다. 친한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독을 음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을 미화하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오래된 방법이다.

 

 

이처럼 저자가 알려준 방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업을 쌓지 말라는 뼈아픈 충고였다. 불교에서 ‘업’이란 ‘마음에 축적되어 다음에 생길 감정을 낳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 마음의 에너지는 사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운동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뿌린 마음의 씨앗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 같아도 결국 내 마음을 불태우거나 재로 만든다. 업을 쌓아가는 주체가 언젠가 어디선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겨난 에너지의 여파는 반드시 본인과 상대에게 다음 감정을 불러들이고 좋건 나쁘건 어떤 형태로든 이차적인 에너지로 축적, 응고되어 훗날 더 큰 고통의 감정, 업의 결실을 만들게 된다. 부정적인 행위, 생각들이 업이라는 에너지의 흐름을 활성화시켜 괴로움을 유발하는 패턴이 된다. 그러니 남의 험담, 혹은 잘 보이기 위한 위선, 무심코 던진 거짓, 사소한 말다툼 이런 것들은 죄다 훗날 분노와 욕망의 열매로 익어가는 착실한 과정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온라인에 글을 남기고 이웃과 글을 나누는 것 자체가 업을 쌓는 행위이고 또 다른 감정을 유발하는 악업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남겨온 글들과 수많은 대화의 궤적을 생각하면 새삼 소름이 끼친다. 더욱 평정심을 뒤 흔드는 글과 말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내 경우는 글을 쓰면서 힘겨웠던 시간을 털어버리는 습관이 있어 일단 쓰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동안 내 평정심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평정심을 해치지 않았나 싶고 사실 이 글도 그다지 속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모두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들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가만 보면 오해하는 것도 기실 하는 입장에선 자기 입장에서의 이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오해는 대부분 오해를 부르는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자업자득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해보다는 오해가 더 일반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해는 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에 늘 오해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우리는 마음에 사소한 악업을 쌓지 않도록, 욕망과 분노에 휘둘리지 않도록 늘 의식의 센서를 켜놓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생활속에서 염력을 발휘하는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었다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기도 쉽지가 않다. 나만해도 지난번에 읽은 ‘생각버리기 연습’에서의 충고를 또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우를 범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깨우친다. 괴롭고 싶어 하는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자신에게 속지도 자신을 속이지도 말아야 할 것을 당부드리고 싶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괴로움을 유발하는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괴로움을 진정 괴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그 당연한 절차를 거부해온 시간들에 사과한다. 괴로운 건 괴로운 것이다. 미처 몰랐다면 지금부터 괴롭다고 적어보자. 그리고 읽어보자. ‘괴롭다’고 쓰고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부디 당신도 그래주시길. 괴로움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괴롭지 않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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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6-06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게 살아가는 내 하루를 사랑할 수 있으면
언제나 좋은 이야기 피어나리라 믿어요

가연 2012-06-0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뇌 리셋, 이 코이케 류노스케의 전작이었는데.. 그 책은 조금 읽어본 기억이 나네요. 저는 또 얼마나 많은 업을 쌓으며 살아가는지.. ㅎㅎ

비로그인 2012-06-0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내가 범했던 시행착오들이니 다른 오해는 없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이렇게 이쁜 글이라니요... ^^
 
자본주의, 미국의 역사 - 1차 세계대전부터 월스트리트 점령까지
전상봉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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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무엇을 좇고 있나

 

 

이 책은 지루하다. 내용상 화가 나는 구석이 많은 편인데 그 화남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이 지루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지난해 월가의 점령시위에 이르기까지 약 백 년 동안 미국이 돈을 가지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보고서이다. 한평생 자본주의의 역사만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9개 달린 괴물 같은 뱀, 히드라와 같다고 말했다.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다시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나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 같은 특질이 자본주의 본성이라는 것. 지난 백년간 자본주의는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언제나 그 변화의 국면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어 자본주의의 본성에 충실함을 증명해 보였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을 ‘도덕성’의 싸움이 아니라 ‘현실성’의 싸움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것은 사회주의보다 더 도덕적,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덜 도덕적이고 덜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지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에 바짝 붙어 공생해 왔다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과거의 모든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그러한 나를 깨달으며 내일을 더 지혜롭고 풍요롭게 살고자 한다. 여기서 어떤 인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누구나 오늘을 산다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현재는 사실 한정된 시간이지만 욕망이라는 현실은 내일도 계속된다. 어제의 오늘, 내일의 오늘에도 변함없이 돈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결국 돈을 지배하는 주체의 역사이다. 돈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인간만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무엇도 인간만큼 돈을 지배하려고 원했던 존재는 없었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직접적으로 빠르게 해결해주는 제일 분명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은 돈의 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팔순이 너머 외할머니는 처음 커피 맛을 보시곤 내가 왜 여태까지 커피를 안 먹었을까 하셨다. 그 전까진 아무리 커피가 맛나다는 사람을 보아도 반응이 없으셨다. 쉬운 예를 들었지만 돈의 맛에 길들여져 그것에 눈멀게 되면 자본주의 본성 같은 건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아이를 학원에 잘 보내다가도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학원을 보내지 않으면 되는 시절에 살게 되었나, 무엇 때문에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것인가, 왜 아이에게까지 스마트폰을 사주고 또 그것에 중독될까 염려해야 하나,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주변에 한국에서의 교육정책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마침 남편의 공사 해외발령으로 미국과 태국, 홍콩에 살다온 친구가 있다. 원래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살아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온 사람이 아니라 친구처럼 생의 일정 시기에 해외에서 살게 된 경우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들끼리 모여서 특유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 같다. 그곳에서도 서열화 중심의 입학경쟁은 똑같았고 거기서의 창의적(으로 보인) 경험은 돌아와서 그럴싸한 이력서 몇 줄로 대체 될 수 있음을 친구는 더 극명하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일단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아 어디가 되었건 올라갈 수 있을 때 까지 올라가길 바라는 심리는 요즘 거의 습관이나 관행에 가까울 지경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교육정책에도 있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승자독식과 우승열패, 한탕주의 식의 경쟁구조를 나도 모르게 수용하고 좇아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똑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똑같은 학교를 보낸다는 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식의 경쟁에 놓여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언뜻 보기에 내가 사는 지역과 사는 곳, 학교 등을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택한 것 같지만 우리는 많은 것이 이미 택해진 세상에 발을 들여 놓고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에서 일등이 혼자서 엄청난 상금을 다 가져가는 것을 당연히 받아 들이며 경쟁구도에서 탈락한 사람의 눈물에 예전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일진’도 승자독식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땐 소위 말해 노는 친구를 뜻했던 ‘날나리’는 그냥 노는 애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학교 밖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렸고 교실에선 될수록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냈다. 즉, 교실 밖에선 누구와 나쁜 짓을 하는지 어떤 폭력이 오가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일진 중엔 공부도 잘하고 키도 크고(발육이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선 모범생과 다를 바가 없고 외모도 세련되어 인기도 많다. 놀라운 사실은 아이 반에서 일진으로 불리는 친구가 반장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운동회 때엔 일진(반장) 아이의 학부모가 반 전체에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일진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바탕으로 모종의 권력을 얻는다. 아직 돈을 모르는 아이들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까. 바로 교실 내에서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아이를 왕따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일진은 학교폭력이라는 표면적 의미외에도 반에서 최상층의 신분을 상징하고 친구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아이 말로는 일진이 입는 유명 브랜드의 점퍼와 신발은 다른 아이들이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스마트폰을 인터넷에 떠도는 계급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서열이 낮은 아이는 교실 내에서 신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이러한 서열화 작업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단순히 높은 위치라 생각되는 아이들을 외려 부러워 한다는 것. 이긴 자, 혹은 높은 자는 다 가져도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어떻게 높은 지위를 만들고 그 위치에 있는 아이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벌써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 계급을 나누어 같은 친구들을 지배하는 심리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기만 한다. 우리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는가. 조직 및 계급 서열화, 그리고 성과지향주의에 물들어 버린 우리 사회가 결국은 아이들에게 성장한 후에도 권력을 얻기 위해 무조건 노력하라는 것 밖에 더 가르쳐 주었는가. 권력은 곧 돈으로 발생하니 되도록 돈 많이 버는 직업을 택해라, 그럴려면 반드시 일류대에 가야하고 그럴려면 오늘 가기 싫은 학원도 가야하느니.... 아... 우리의 일상은 무엇에 지배받고 무엇에 조종되어 굴러가는 것인가. 주체적인 삶, 인간다운 삶, 나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잘사는 사회라는 듣기 좋고 보기 좋고 허울 좋은 그 옛날 도덕책에나 나오는 소리를 아이들이 진심이라고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리 부모들은 기껏해야 일진의 눈에 안띄게 앞에서는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라는 말 밖에 더해왔는가. 우리 부모님들은 그래도 탈선을 방지하고자 날나리와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린 위선을 가르치고자 일진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떠들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몸속에 무엇이 흘러 들어왔나

 

 

우연히 올해 들어 자본주의에 관한 책만 몇 권 째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유럽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혹은 우리나라 이야기건 하나같이 이런 책을 덮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우리나라와 내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이렇게 쳇바퀴를 돌다 영원히 돈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바둥바둥 살아갈 수 밖에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 생활은 40대 주부로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키우는 지극히 평범한 학부모의 일상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어찌 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적 일상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잘 운영해온 미국의 역사를 아는 것과 2012년 우리 일상은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날 유가 폭등을 지켜본 미국은 중화학 공업으로 대표되는 고에너지 산업을 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철강, 조선, 기계 등의 중화학공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이때 아랍 산유국들의 막대한 오일머니는 어디로 들어갔을까. 월가는 이 돈을 돌려 개발도상국에 선심 쓰듯 빌려주었고 그 결과 중남미는 80년대 외채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미국의 판단과 선택이 다른 나라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음을 기록으로 부인할 수가 없다.

 

 

비약적으로 말하면 일진과 왕따는 신자유주의 추종과 신봉의 결과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현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스트레스를 감지하는 주체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사회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보편적 스트레스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이나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다.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본 것이다.

 

 

지난 일 백년간 우리 몸속에 내장처럼 깊숙이 흡수되어 온 삶은 바로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미국적 삶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을 가장 앞에서 조종하고 주창하고 운영, 유지해온 주체는 미국이다. 미국은 우리와 낮과 밤도 틀리고 바다건너 먼 곳에 있는 나라지만 그들이 쓰는 돈과 버는 돈의 궤적이 사실상 우리 삶의 궤적을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얽히고 설킨 국제관계속에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치는 영향의 크기와 의미로 보았을 때 그렇다. 그래서 인지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읽는 일은 한국인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 책의 결론은 마음에 안 들게도 새롭게 부상한 중국을 중심으로 경제위기 해결방안을 마련하든가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위기와 혼란을 지속하든가 하는 상당히 자조적인 조언이다. 지난 백년을 미국 중심의 역사로 서술해 놓고 앞으로 탐욕에 눈먼 1퍼센트가 아닌 99퍼센트의 민중이 변화를 선도하도록 ‘미국 없이’ 노력하라고 하니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이 책은 역설적으로 앞으로도 미국중심의, 미국이 해결하는 자본주의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결론보다는 과거정리 차원의 꼼꼼한 기록의 여정에 더 관심일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을 넘기면서 새삼 매 시기 미국의 발빠른 행보와 탁월한 선택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유럽 열강들의 이권다툼은 전쟁을 낳았고 전쟁은 독일이라는 패자를 낳았다. 승자는 패자에 엄청난 책임을 물었고 패자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패자는 기회를 엿보다 어떻게든 계기를 만들어 다시 전쟁을 창출했다. 두 번의 세계 전쟁으로 혜택을 입은 나라는 미국이라는 패권국이었다. 패권국은 끊임없이 주류 담론을 만들고 그에 따라 세계를 지배해왔다. 패권국은 때론 자작극과 조작을 서슴치 않았으며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삼아 왔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참여할 때 내세운 논리는 “우리는 독일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적과 싸우는 것이다”였다. 때마다 전쟁특수로 위기를 탈출해온 이력이 곧 미국의 역사를 대변한다. 전쟁이 남는 장사임을 깨달은 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장사로 여긴 나라는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다. 피를 흘려도 돌아오는 이익이 많다면 전쟁은 언제나 정당화되는 국가활동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기론 언제나 혁명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늘 포악한 공산당 쪽이라 자다가 깨어나도 공산당이 싫다고 외칠 정도로 지겹게 세뇌당해 왔다. 미국은 툭하면 세계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테러를 뿌리 뽑기 위해라며 전쟁선언을 하곤 한다. 그런 미군이 전쟁 때마다 죽여온 민간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이 책을 넘기다 보면 결국 죽여 온 사람이 많은 나라가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는 구나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돈의 맛을 어디에서 배워왔나

 

 

예전에는 한국이 미국과 얼마나 격차가 있을까 이런 질문과 기사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미국은 1920년대 이미 부와 번영으로 돈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나라였다. 당시 미국인 여섯 명 중 한명이 자동차를 소유했고 미인대회와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가 탄생했고 주식의 광풍으로 구두닦이 까지 주식시장에 발을 들여다 놓았다. 파산으로 투자자 열 한명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은 1929년의 일이었다. 이후 미국은 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문제는 어느 시기건 미국이 공황이면 결국 유럽이고 아시아고 전 세계로 그 여파가 확산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자본에 의지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미국은 대공황을 2차 대전 덕에 잘 극복하게 되고 공황이라는 위기를 잘 학습한 자본주의 경력자로 거듭난다. 공황을 겪었기 때문에 애국심도 생겨나고 국민이 단결해 정부의 개입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은 똑같은 이유로 나중에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게 되는데 시장이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지금가진 돈을 더 불리고 잃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을 둔 같은 문제였다. 50년대 한국전쟁, 70년대 오일쇼크, 80년대 중동 전쟁, 90년대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을 버라이어티하게 헤쳐 나온 미국은 늘 앞에선 세계평화와 번영을 주장하면서 뒤에선 자신들이 가져갈 돈 계산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1차,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살펴보다 보면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은 애초부터 미국을 얕잡아 보고 무시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이 미국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 우월감은 지금도 유럽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열패감과 분노를 느끼는 유럽은 연합으로 대항해 세력을 만들고자 하지만 생각만큼 단결이 쉽게 되어 보이진 않는다. 미국은 두 번의 전쟁이후 엄청난 기술개발과 경제발전을 이루며 70년대 말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하기 전까지 상당부분 유럽과 격차를 벌여 놓게 된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를 통해 미국은 이미 50년대 다국적 기업을 출발 시켰고 60년대에 식품혁명이 완료된 상태에서 현대문명을 이루는 기술개발이 전문화, 집중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첨단 군사기술은 과학과, 식품, 전자, 영화, 방송, 통신 등 전 분야에 이전되며 미국식 풍요를 전 세계에 전도해왔다. 이제와 부질없는 소리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너무 구석으로 몰았다는 생각이 든다. 애국심의 극단이 나치즘이라 보았을 때 정도의 차이만 배제한다면 사실 부시의 애국심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애국심은 강대국이라는 프리미엄 덕에 언제나 세계평화와 안전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며 사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아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평화는 매번 소환되어야 하는 허울좋은 태제일뿐이었다.

 

 

한 가지 예로 독일의 폭격으로 자존심이 무척 상한 영국은 미국과 합작으로 레이더 장치를 개발했지만 정작 그 레이더를 대중화시켜 전 세계 가정에 전자렌지라는 새바람을 몰고 온 건 미국이었다. 영국은 자존심은 찾았는지 모르지만 실리는 얻지 못했다. 지금의 미국을 보면 유럽 나라들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잘 이용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자존심이 상하면 곧바로 애국심이 발동되는 나라였다. 애국심은 세계를 지키겠다는 공명심으로 발전한다. 이 한몸 던져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허리우드 영웅들은 지난 시절 숱하게 반복되어 온 전세계 공통의 영화적 학습장치였다. 미국이 지켜온 건 사실 자국의 이익뿐이었다. 전쟁 이후 만들어진 국제기구들은 대부분 미국이 협상시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본주의 유지 시스템들이었다. IMF의 최대주주는 미국이었고 미국의 지지와 동의를 얻지 못하면 사실상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무역자유화와 외환거래의 자유화로 가장 큰 이득을 볼 나라는 언제나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부업체처럼 돈을 빌려주었다가 그 나라가 빚을 못 갚아 파산을 하게 되면 재빨리 투기 자본을 침투시켜 중요기업들을 사들인다. 어떤 협상도 누구를 위한 개방이고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따지고 들어가 보면 결국 미국을 부자 시켜주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렇게 미국의 파렴치함을 비난하기는 쉬운데 정작 그것을 가장 잘 복제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은 있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평화로와 질 수 있는가

 

 

최근 그리스가 재정위기에 빠졌다고 우리는 국민이 게을러서 혹은 은행이 방만해서라는 식의 학습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긴축재정에 나선 그리스 정부가 복지 축소로 연금을 삭감했기 때문에 노후 연금이 끊긴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국제 금융 자본가들은 그리스의 방만한 경영, 그리스의 내재적 결함이 재정위기를 초래했다고 18세기식의 청교도 윤리를 들이대곤 한다. 이를 보고 우리 보수와 수구언론은 그리스가 복지를 마구 시행하다가 재정위기가 온 것처럼 떠들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유럽의 재정위기가 복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일 통화를 사용하지만 단일한 연방국가가 아닌 유로 존 때문이라 한바 있다. 유로 존에서는 화폐만 통합되었을 뿐 자유무역으로 인한 소득격차, 생산성 격차는 모두 각국의 소관이다. 쉽게 말해 관광업 발달한 그리스는 제조업 발달한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하준은 같은 유로존 속에서 그리스를 도와주지 않는 유럽 국가(특히 독일)들을 강원도가 부도났는데 나라가 해결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며 상당히 비윤리적인 행태라 꼬집었다. IMF가 터졌을 때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해서 외환위기가 닥쳤다고 믿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시절 장롱속의 금반지를 죄다 꺼내어 나라 빚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고자 그렇게 너도나도 줄을 서대지 않았던가. IMF의 근본적 원인은 자유화된 국제 자본의 횡포에 있었다. 동남아 외환위기는 대처리즘과 레이거 노믹스로 가시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지 갑자기 우리나라 혼자서 흥청망청해서 일어난 경제위기가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외환위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만성 고질병쯤으로 생각된다. 단지 이번이 중남미면 다음은 서유럽, 그 다음은 동아시아, 또 그다음은 순서를 바꾸어 등장하게 되는 무슨 당번 같기도 하다. 당번이 죽어라 죽겠다 소리칠 때 미국은 엄청난 규정을 제시하며 도와주는 생색을 낸다. 케인스 주의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잇는 신자유주의는 지난 시절 신보수주의(반공 이데올로기와 패권주의)와 결탁해 미국의 침략이데올로기로 십분 활용되었다.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양극화를 초래했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냉전과 소련해체도 주도했다. 미국에는 유독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을 무대로 치고 빠지는 식의 투자를 일삼아 막대한 수익을 챙기는 투자자들이 많다. 금융자본주의가 활황하기 시작하던 90년대 이후 국제 금융시장은 이들 투기 자본가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교역 상대국엔 자국의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버젓이 불공정 무역과 시장개방의 압력을 가한다. FTA 가 발효되면 농업, 제조업, 제약업 등에서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이제 중국의 대미 수출 증가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다른 나라가 외환위기에 닥쳤을 때 미국이 주장했듯이 글로벌 불균형이 미국 내부의 과잉소비가 원인이라 일침을 가했다. 미국이 말하는 균형은 어디까지나 자국이 중심이 된 자국이 흑자를 내는 방식의 균형이다. 그러던 미국에서 드디어 2008년 158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세계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금융자본주의도 파산했을까? 아쉽게도 오바마는 노무현이 검찰개혁을 하지 못했듯이 금융개혁을 하지 못했다. 월가의 집요한 로비는 꼭 검찰이 권력과 멀어짐을 두려워 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미국은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을 걷어 월가 은행들에 공적자금을 퍼부어 주고 그들은 임원에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는 나라다. 이긴 자가 다 가지는 것이고 다 가졌던 자가 더 가지기 쉬운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라틴어로 미국의 평화를 뜻한다는 ‘팍스 아메리카’는 누구를 위한 평화였는지 명백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는 이겨서 가진 자, 가져서 강해진 자, 이른바 소수 특권층으로 상징되는 1%를 위한 평화였던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는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상층의 상부구조에서 발달해 왔다. 최상층의 경제활동은 독점을 상징했고 독점은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불평등의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불평등은 불공정, 불합리적 경쟁관계를 연차적으로 유도할 것이다. 99퍼센트의 민중이 평화로와 지는 날은 어쩌면 도래하지 않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인간은 미래를 낙관한다. 탐욕으로 눈 먼 1퍼센트를 지지해 놓고도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이 실현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국이 쏘아대는 미사일을 두 눈으로 보고도 세계는 곧 평화로와 질 것이라 기대한다. 99퍼센트의 평화를 원한다면 최상층이 원하는 탐욕의 현실적 욕망을 버리고 공정과 도덕이 지배하는 비현실적인 이상을 택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99퍼센트의 평화는 99퍼센트의 불가능만큼이나 비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비록 단 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그것이 특권층이 아닌 대다수 국민들의 행복과 평화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99퍼센트 확신하게 된 이 책의 가장 큰 교훈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희망을 절망과 바꿀줄 아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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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2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우리나라의 구제금융 상황은 약과에 불과했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파장은 매우 컸지만요..

요즘의 그리스처럼 지하금융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은 탓이기도하고
국채와 기업의 외자의 존도가 상대적으로
그리스보다 규모가 적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국가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덕분인가 싶습니다.

사실 털어 먹을 것이 적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일본의 경우 그지경까지 털리리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는 모습은
그 얼마나 강력한 타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지적해주신 팍스 아메리카의 개념이
우리의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러의 붕괴가능성 이지 싶습니다.

경제와 역사는 양면의 동전과 같아서
어쩌면 자본이 배제된 순수한 역사의 개념을 기대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아닌가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역사 연구의 의도가 대부분 불순한 것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구요.

한동안 경제관련 서적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글을 읽으니....
또 이러네요 ㅠ.ㅠ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님~

차트랑 2012-05-27 07:58   좋아요 0 | URL
쿠더덩~
한사람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는....ㅠ.ㅠ
제가 몸둘바를 몰라
얼굴이 화끈 붉어집니다 ㅠ.ㅠ

연휴에는 경제 역사와 상관없이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여
부처님께 다녀올 계획입니다^^

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를 보기도하고
부처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렇게 가끔 하거든요^^

한사람님께서도 편안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2012-05-25 2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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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6 2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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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7 08: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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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7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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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2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 책 별 세 개예요? 한사람님도 별점에 후하신 편이라 생각하는데 이거이거 왜 세 개예요? 어떤 의미로? 이 책 장바구니에 끼여있단 말이에요. 세 개짜리는 싫어요. 이건 소설이 아니니까요 :) 근데요,

2012-05-27 2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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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7 2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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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7 2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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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7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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