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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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후 없어진 부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 그 부위에 통증이 동반되는 경우를 환지통(幻肢痛)이라 한다. 그런데 환지통은 대뇌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소아에게서는 발병치 않으며 15세 이상인 경우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환지통이 심할 경우는 교감신경을 파괴하는 수술 등으로 통증을 치료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팔, 다리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있다고 여기는 환자의 뇌가 아닐까 싶다. 즉, 우리의 뇌가, 분명히 사라졌음에도 거기 그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현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와 연결시켜보면 우리가 고통스럽다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은 실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 정목 스님이 환지통을 비유하면서 인간은 기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환기시켜준 적이 있다. 모든 고통은 경험한 실제 상황 때문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는 개인의 관점, 시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하면서 그럼에도 끄덕이게 되는 일인가.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 거기 사라졌는데 아직 남아있다 여기는 것. 지금은 잊혀졌지만 그때 그것이 아픔이었다고 믿어온 것. 돌아보면 그때 내가 누군가 때문에 혹은 어떤 사실 때문에 아파했는지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으면서 어느 시절, 어느 장소, 어느 상황을 떠올리곤 아직도 기억의 상처가 유효하다 자신을 위로하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아파했던 걸 애써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명백히 사라졌지만 그때 그 기차역에서의 이별을 말하려면 기차역은 절대 사라지면 안되듯이……. 소설이 바쁘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들에 강렬한 화두를 던지기가 힘든 시절인데 권여선의 소설을 통해 나는 잠시 인간의 기억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즐겨보았다. 재미나고 흥미로운 소설도 많겠지만 덮고 나면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몰랐던 숲길을 혼자서 걸어 나온 기분이랄까. 실제로 나는 열흘 전 혼자 여행을 떠나며 이 책을 슬며시 가방에 넣어놓고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뭇해 한 적도 있다. 한번쯤 스스로 걸어 나온 망각의 숲을 되돌아 가보고 싶을 때, 소설이 뜻밖의 동반자가 되어줄지 모르겠다.  

 

  <팔도기획>은 소설가가 대체 무엇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에 관한 글이다. 궁극에 소설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던 인간의 이야기로 인생을 집필하는 사람인데 그저 그렇고 그런 인간도 소설 속에선 특별해보이고 매일 보던 인간도 낯설어 보이는 게 다 글에 향기를 불어 넣기 때문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소설가라면 글에 향기를 불어 넣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진심을 다해 세상의 진실을 전달하려 하는 사람이다. 진짜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로 전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글에 향기가 스며들어야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충격적인 신문기사나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을 목도하고도 하나도 감동받지 않는 이유는 여백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 틈 하나 없는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은반지>에서 사람들은 한 시절을 공유하여 내가 생각하고 그토록 그리워한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은 감정으로 그 시절을 떠올리진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정반대로 그 사람에겐 악몽의 한 시절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지 않고 전혀 의심하지도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서로 증표로 반지까지 나누어 끼었지만 그 시절이 악몽이었던 상대는 은반지가 일생의 더러운 반지로 기억되고 만다. 인간관계라는 게 시간이 지나다보면 관계를 지속시키고 이어가는 주 패턴이 있어 주종관계가 되기도 하고 일방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 특히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내다 보면 한번 맺어진 관계의 패턴이 도무지 바뀌어 질 기회가 오기 쉽지가 않고 왔다고 하더라도 뜻대로 바꾸기가 참 어렵다. 만약 한쪽에서 패턴을 바꾸려 무언가 시도를 한다면 유지되어온 관계에 금이 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내가 감수해온 것들을 불행히도 상대는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알았다면 좋은 관계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다지 충격적인 언사없이 둔중한 깨우침을 산사의 종소리처럼 깊게 울려준다. 혹시 돌아보니 그때가 누군가와 더없이 좋은 시절, 부러웠을 관계로 기억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 나를 위해 참고 견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며 상대는 나와 반대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묘한 여운을 가장 깊게 남겨주는 글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우리를 그 숲에 데리고 갈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가을저녁처럼 어둑하고 신선한 그 숲’은 가보지 못한 후라야 비로소 비밀의 원형을 복원해 낸다. 사실 이런 기분은 나도 산소를 가면서 많이 접하는 기분이긴 한데 막상 산소에 도착해선 머무르는 시간도 짧고 나누는 대화도 성의없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산소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출발하여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거기 가야할 연유의 모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돌아오고 나서야 매번 깨닫고 하니 말이다. 작가는 ‘환각의 종료를 알리는 뾰족한 별 모양의 현기증’을 끝으로 숲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가보지 않고서도 눈에 선한 숲길을 아주 오래도록 걸어 나온듯한 이 충만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내가 아는, 내가 가본 그 길이라는 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길모퉁이>는 이 책에서 가장 슬펐던 글이다. 한 시절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변변치 않은 나를 찾아와 역시 변변치 않은 수사를 늘어놓고 저 길모퉁이를 돌아나갈 때 그 뒷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비루한 청춘의 눈물에 관한 기록이다. 이십대 초반 가진 건 탱탱한 육체덩어리와 영글지 못한 꿈 하나가 전부일 때 같은 꿈을 향하여 밤낮을 시간단위로 공유하던 친구. 비슷한 이야기로 <진짜 진짜 좋아해> 역시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 살던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돈이 없고 남자도 없고 일이 없어도 수술실 같은 화장실을 같이 쓰며 하루를 기대어온 내 살 같던 친구. 그 친구의 존재를 돌아보니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다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오늘만 동동거리던 여기 우리들에게 길가다 한 대 얻어맞은 뒷통수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나 하는 노래 가사처럼 잠시 내게 왔다가 사라진 너를 위해, 아니 그러한 너를 이제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소설은 말없는 위로를 건넨다. 얄궂은 비를 맞아 뒹굴고 흩어지고 가라앉아도 겨울이 아닌 다음 가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또 한번 저 낙엽들을 가슴에 묻게 된다.

 

  <소녀의 기도>는 이 책에서 가장 치열하고 속도감 있어 같은 작가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외인 글이었다. 명백한 내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남겨진 책임을 덮어 씌우고 다시 내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어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인가. 인간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사실을 해석하고 왜곡하고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꽃잎 속 응달>은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된 이유를 반대로 모든 걸 선택했던 내 잘못으로 돌리고 그것을 오랜 세월 연민하는 보통 여자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돌아보면 마냥 슬프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그렇게 대책 없이 불안한 젊은 날’에도 ‘문득 어디선가 벼락같은 따스함이 찾아오기도’했었다는 회상이 작가가 그려내는 문장의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벚꽃이 딱딱한 가지위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순간처럼 몸속에서 끌어올려진 물기가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촉감의 기적을 만들고 어느 순간 그것은 감격적으로 톡 터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영겁처럼 기나긴 인내와 응달의 시간을 견뎌야 하리라.’   -p228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꽃잎 속 응달’의 실체이다. 이제 우리는 몇 십 번의 꽃잎을 틔우고 또 그만큼의 낙엽을 떨구었기에 그 시절이 영영 가버렸으며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단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한순간의 감격과도 같은 청춘의 희열과 지나고 나면 영겁과도 같은 응달의 시간을 이제는 알 수 있어 마침내 알게 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유독 떨어지는 낙엽이 슬픈 이유는 아마도 자기 생의 남은 낙엽들의 숫자가 점점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은 아닐까. 낙엽의 다음 운명이 궁금한 이유는 아마 다음 번 낙엽을 보고도 계속 궁금해 하는 나를 내 자신이 가장 기다리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다음이 있어야 낙엽의 다음도 있는 것이니까.

 

  다시 환지통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 시절이, 그 상처가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생각하면 우린 오늘까지 살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어제 일어난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중요한 건 얼마나 아팠는지가 아니라 언제라도 반드시 잊혀 진다는 것이다. 잊어야 한다는 그 생각조차 없어져 내가 그 사실을 잊었는지 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날, 기어이 오고 만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잊고 싶어 했으나 아직은 잊혀지지 않은 상처들에 대한 염려이자 걱정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내게 소설은 아무리 내가 죽고 난 머나먼 미래를 말한다 해도 언제나 나만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회상의 동력인 듯하다. 잊혀진 기억, 떠나버린 사람, 추억의 계절, 잊을 수 없는 장소, 잊어서는 안 될 실수, 이 모든 과거의 조각들이 망각의 합작으로 완성될 날을 기다린다. 아쉽고도 애처롭지만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작가는 앞으로 일어날 다음의 망각도 너그러이 용서를 해줄 듯 그렇게 소설로써 회한의 세월을 감싸주었다. 이제 남김없이 떨어진 낙엽들이 어디로 가는지 처음 겨울을 맞는 아이처럼 다시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소설이 소설다운 기능을 하여 소설보다 힘든 현실을 지탱할 조그만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면 부끄럼없이 이 소설을 권한다. 한파가 기다리고 있다는 저 겨울이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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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투 2013-12-2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나만의 과거와 머나면 미래를 그려보는 상상은 나만의 기쁨이곘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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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도 인연이 되어야 펼쳐본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근 일 년 간 소식을 주고받지 않았던 (독서광인)한 지인이 우연히 내게 보내온 책들 중 한권이었다. 여름이후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책은 이미 여러 권이었지만 예의상 무심코 펼쳐든 터였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번째 소설인 <구멍>은 여간해선 이 책을 덮을 때까지 다른 책을 집어 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다. 언젠가 어느 작가가 말하길, 소설가는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잠긴 것들을 삽으로 팔 것인지 포크레인으로 팔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라 말한 기억이 났다. 안 그래도-최근에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실로-구덩이를 깊게 팔수록 마음만 지옥이니 그 속에 구덩이를 파지 말라는 누군가의 법문 비슷한 충고도 들은 바였다. 소설 한편으로 마음이 복잡해지기는 오랜만이었다. 나는 (나와 연배도 비슷한)이 작가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게 난 ‘구멍’의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 여기저기 함몰된 내 인생의 여러 ‘구멍’들이 잉크처럼 빠르게 번지더니 하나의 대형 맨홀이라도 만들어진 듯 가슴께를 둔중하게 덮어오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라는, 우리네 말할 수 없는 모든 비밀들의 무게이기도 했다.

 

  이 책에 엮인 열 가지 작품들은 모두 화자가 말할 수 없었던 비밀에 관한 뒤늦은 고백들로 이루어 졌다. 공교롭게도 화자는 약속이나 한 듯 그때 그 일을 당사자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다. 조금 비겁했지만 뒤돌아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선택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언뜻 보면 인생에 있어서 진실의 파헤침이 아니라 묻어둠의 미학을 말하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열편 모두에 흐르는 작가의 공통된 낙관의식이 이해는 가면서도 어쩐지 무책임해 보인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나처럼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공감대를 제공하는 것과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사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라고 본다. 아마 이 책이 한편으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비밀스런 과거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라고 판단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은 지나고 나면 대개 과거라는 실수와 상처에 대해 후한 점수를 매긴다. 우리는 어쩌면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꽤 너그러운 착각 때문에 계속해서 오늘을 믿어보고 그런대로 미래까지 예견하면서 꿋꿋이 살아가는 존재는 아닐까.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모두 도움 되지 않을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로 사람들이 이런 작품에 자석같이 끌리는 이유는 이와 같은 사후 긍정의 심리가 결국 불안한 미래와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우리들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에.

 

  열 한 살 때 둘도 없는 친구 탈이 잔디를 깎다가 자기네 집 구멍에 빠졌을 때에도 나는 탈이 그 구멍으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당연한 사실이 섬뜩한 이유는 우리가 그 구멍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몰라서 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서 갑자기 그러한 구멍에 빠지게 될지 몰라서는 아닐까. 어떠한 구멍이라도 한번 빠져본 사람들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상 이 책의 전언처럼 들리는 첫 번째 작품 <구멍>에서 작가는 구멍을 ‘부정한 어떤 것, 하나의 비밀 같아’ 보인,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선 사실상 전혀 알지 못’하는, ‘너무 컴컴해서 바닥을 내려다 볼 수 없는, 크고 빈 공간’이라 정의했다. 내게는 이 정의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아마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언제든 이 구멍을 위험이 아닌 유혹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구멍>이 친구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본 죄책감에 대한 ‘고백’이라면 <코요테>는 부모의 결혼생활이 깨어질 것을 예감하고 그 과정을 목격한 스스로에 대한 ‘격려’ 이다. 열 두 살 때부터 겪은 아버지의 부재는 집 뒤쪽 같은 자리에서 울려 퍼지던 코요테의 울음소리로 천천히 들려온다. 화자는 예술가 아버지의 무기력한 일상과 다른 남자를 만나던 어머니의 외로움을 공평하게 이해할만한 나이가 되어 단지 그때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고 회상한다. 화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한 적이 없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을 접수하고 수렴했을 뿐이다. 그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도 전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각한다. 세월 지나 아버지의 재능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니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화자에겐 최선의 배려였을 것이다.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발견은 왜 꼭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1mm라도 움직인 후에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아술>은 아이가 없는 캐런과 폴이라는 부부를 통해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양식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은 알려졌듯이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인간의 천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 이때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행동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인간의 (학습된)이성이 (천성인)직관에 의해 발달된 편향을 이길 수 있을까. 혹시 자신도 모르게 강요된 이성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미성년자 아술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직관이며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성이다. 두 부부는 아술에게 닥칠 위험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거울 같은 서로와 직면한다. 아술이 문제가 없는 교환학생이어야 자신들도 문제가 없는 대리부모로 위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신 혹은 외부가 바라는 모습대로 일치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았던 일에 노출된 우리 스스로를 방치하고 자신을 모른 체 하는 경우가 있다. <아술>은 계산된 이성을 위해 익숙한 직관을 외면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마주해야할 자기기만에 대한 ‘진술’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사실 작품들 중에서 가장 뻔뻔하다고 느꼈는데 삶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과학적 이론을 아름답게 지지하는 문학적 변론으로 읽었다. 이 작품의 통속성을 해결한 건 제목이 팔 할이라고 보는데 ‘어느 누구도 빛 입자(인간)가 자신의 경로(삶의 방향)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지 못하며, 특정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은 작가가 드러내는 인생관이자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파인만은 일찍이 규칙이란 건 너무 괴상해서 믿을 수 없지만 그 규칙을 따른다면 답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수수께끼 때문에 과학이 흥미진진하다고 설파한 과학자이다.(나는 언젠가 파인만의 전기를 읽었는데 물리학을 전공한 지인에게 물어본 결과 전공자들도 파인만의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들은 적 있다) 자연의 이치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는 괴상하기 짝이 없어 우리 맘에는 들지 않지만 황당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고 - 이는 철학적 통찰력에 해당한다고는 보지만- 말이다.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사물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얽혀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 그 신비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파인만이 발견한 황당하고 괴상한 규칙이 우리네 알 수 없는 삶의 이치임을 주장하기 위해 당신이 버린 것들이 끝내 버려지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 버린 것들이 실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요건이 될 줄 우리는 그때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울적했던 이유는 로버트를 사랑하면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로버트라는 사실도 알면서 그를 떠나는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로버트가 헤더의 아버지벌 되는 교수라는 배경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종의 함정이었다고 본다. 헤더는 교수와의 불륜을 의식해 괴로웠던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로 발생되는 손득실을 따지게 되는 자신을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위험을 회피하고자하는 보편적 심리는 일단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결혼을 앞둔 남자친구)을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것(새롭게 생긴 로버트)을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헤더는 무언가를 결정해서 발생한 후회보다는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가 자기 삶에 득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 판단이 흐려졌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현재 남편, 심지어 자신을 보내준 로버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로써 끝은 아니다. 작가는 어쩐지 파인만의 이론에서 'strange'를 살짝 빼놓았다. 원래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이 세상의 규칙이다. 크게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결론은 여기까지이고 그 다음은 장담할 수 없다. 작품 너머의 헤더의 삶은 과연 변화를 택하지 않았기에 누릴 수 있었던 안락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죄책감을 덜기 위해 비밀을 고백하는 것이 누구의 행복과도 상관없는 일이라 깨달은 시절이 있었다면 반드시 오랜 비밀을 고백하고 거짓의 형벌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나머지 행복을 기다리는 최소한의 예의임도 깨닫는 날, 반드시 오게 되지는 않을까.

 

  <강가의 개>는 그해 열일곱의 여름,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형의 범죄를 알고 있는 내가, 형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달라는 일종의 탄원으로 읽혔다. 형이 잘했다고 생각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외출>도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열여섯의 여름날 아미시 공동체의 소녀 레이첼과 나누었던 감정을 애써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나를 이해해달라는 청원. 인상적이었던 추억은 레이첼과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밤 맹목에 가까운 믿음으로 10미터 아래 강물위에서 나무 널판을 가로지르던 광경이었다. 재수가 없어 발이 쑥 빠져버리면 10미터 강물 아래로 추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았다는 화자의 기억은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레이첼에게서 적당한 호기심을 얻고 거리를 유지한 자신에 대한 -그러니까 그 나이에도 성숙할 수 있었던 -대견함으로 보였달까. 싸움에서 끝까지 무모할 정도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던 아이작 킹을 ‘비정상’이라 단정짓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어떤 동요도 없는 것으로 보아 화자는 한 시절 ‘눈먼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퍽이나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무사히 건넜다고 다음번 철로다리를 무사히 건너란 법은 없는 것 아닐까. 어떨 땐 발을 디디는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면서도 막연한 자신감으로 대책 없는 횡단을 할 때가 있지 않는가, 인생이라는 황당한 규칙에서는.

 

  <머킨>은 어쩐지 한국적인 소설같아 보이는 친근함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동성애자 린의 공식적인 남자친구 마이클이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신이 가르치는 청각장애아의 싯구발표와 대치, 연결시킨 것이 적절했다. 설득력 면에서 가장 안정적이었다고 본다. 마지막 결말에서 린과 마이클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멀리서 지켜본다. 입이 있어도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호세는 마음이 있어도 린에게 전달할 수 없었던 마이클의 다른 모습이다. 두 가지 층위가 마지막에 합쳐지며 어느 정도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이 내가 추구하는 소설적 가치는 아닐까, 이 소설에 호감을 가지는 나를 통해 나는 나만의 비밀을 살짝 발견하기도 했다.

 

  <폭풍>은 아버지의 부재로 상처 입은 누나가 자신의 -과거와는 달리-소중하고 따스한 미래를 위해 가해자 역할을 자신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에 대한 고백이다. 비밀은 여행지에서 누나가 약혼자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약혼자가 자신을 버리고 이탈을 한 것이었다. 나는 누나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가족으로서 ‘가꾸기 힘든 씨앗’으로 판명된 누나의 분노를 이해하며 어린 시절 퇴근하는 아버지를 같이 기다리던 시간을 회상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것만큼 소박한 기쁨이 없기에 나는 누나의 비밀에 동의하며 누나의 행복을 바랄 수 있었다. 여러 작품에서 작가는 화자의 가족구성원 중 아버지의 부재를 배경으로 삼는 일관성을 볼 수 있었다. 특이했던 건 아버지의 부재로 어머니와 누나, 형은 모두 일정시기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균열의 상황에 이르나 그 모든 걸 지켜보는 화자는 언제나 객관적, 중립적 입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작품 속에서 상실한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장으로서의 담담한 남성성을 무의식적으로 지켜온 것은 아닐까.

 

  가장 짧았지만 꽤 강렬했던 <피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주 어이없는 결말로 마무리되던 체호프나 김영하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서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고 막상 그 미래가 오늘이 되었을 땐 지나간 과거를 습관적으로 후회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현재 내 모습이 미래를 이끌 것이라는 이 단순한 원리를 우리는 매순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긴 하지만 또 지금 내가 매달리고 있는 현재 마음이야 말로 가장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피부’는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오늘이라는 시공간의 시각적 표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피부로 이렇듯 삶의 시간을 이동시켜 그곳을 흐르는 굵직한 혈류로 이어지게 만드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마지막 작품인 <코네티컷>은 열 세 살에 목격한 어머니의 동성애 장면에 대한 당당한 폭로이다. 화자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이웃집 여자와의 비정상적인 만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건은 요양간 아버지가 돌아오고 가족 모두 예전 일상을 되찾았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과거 속으로 안개처럼, 스며든다. 화자에게 남겨진 건 무너지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추스르던 어머니의 모습, 그 힘겨웠던 노력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비밀을 감지하고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해 스스로 화해가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열 세 살 짜리가 어떻게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을 추론하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를 차분히 끌어가는 과정이 어머니도 화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이번 독서는 그리 즐겁진 않았다. 한 편 한 편 넘겨가며 이번엔 또 어떤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걸까, 왜 작가는 이런 종류의 비밀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와 비슷한 비밀이 어느 시절 나도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설의 작법으로 보자면 열편의 작품은 몇 가지 반복되는 패턴을 가진 자기 복제작에 해당된다. 주로 십대 사춘기 남자 캐릭터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워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 내에서 가족구성원들이 겪어야 했던 상처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목격한 후 그들의 비밀을 공유한 내가 결국엔 삶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으로 다양하게 육화되었다는 것이다. 화자가 그 시절 지켜보았던 건 내 주변을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겪어야 했던 이별 혹은 내가 감당해야 했던 누군가와의 이별이었다. 누군가와 헤어졌기에 그는 나와 만나고 내가 그와 헤어졌기에 그는 누군가와 이어진다. 그런데 가만 보면 크고 작은 이별 속에서도 작가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해체시킨 적은 없었다. 가족이란 어쩌면 서로간의 비밀을 파헤치기 보다는 적당히 삭히며 묻어두어야 관계가 지속되기 쉬운 가장 비겁한 단위의 인연의 끈은 아닐까. 갈등이 없는 평화라는 게 실은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을 묵인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서로 이유를 묻지 않아도 더없이 편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그려본다. 사실, 한 가지 내가 너의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평생 혼자 간직할 것이라는 자기 약속이야말로 얼마나한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인지 파인만이라고 알수 있었겠는가. 그저 괴상하고 황당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그것이 당신과 나의 인생이라고 조용히 끄덕일 수밖에.

 

  파인만처럼 그를 추종한 작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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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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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다 읽었지만 불행히도 무엇을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는 경외감은 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전체적인 느낌은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방인>보다 더 심했다고 본다. 어렸을 때 TV에서 안개가 자욱한 파리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이해는 가지 않으면서도 희미한 안개를 따라 끝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대사도 거의 없고 주인공끼리 가끔가다 던지는 한마디의 의미도 모르겠고 방금 헤어진 것 같은데 다시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가 헤어지고 끝난 것인지 다시 만남을 암시하며 끝난 것인지 내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설음이, 이 맑은 가을날 생생하게 재현 되었달까.

 

  그동안 살면서 골키퍼가 공을 막지 못하고 공이 골인되는 것을 목격하는 심정이 어떠할지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같은 운동장에 있지만 골키퍼가 다른 선수들보다 고독하고 불안하겠다는 생각은 그러니까 4년에 한 번 씩은 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연장전을 마치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페널티킥까지 가는 상황에선 늘 골키퍼가 키커보다 더 유리하다고 여겨왔다. 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막는 것이 기적에 가까우므로 막지 못했다고 욕을 얻어먹지는 않을 것이기에. 다시 말해 넣지 못한 죄보다 막지 못한 죄가 덜하다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페널티킥을 성공하지 못한 키커는 돌릴 수 없는 역적으로 남기 십상이라 사실 골키퍼의 불안 같은 건 키커의 좌절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까지 여겨왔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골키퍼가 아닌 관객의 입장이니 그랬을 것이다. 이 오랜 고정관념을 책 한권이 깨트려 주는 시간이었다.

 

  이 작품에서 블로흐는 과거 꽤 유명한 골키퍼였기에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운동장과 골대와 공과 선수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품 서두에 이렇게 써 있는데 결국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까봐 불안하고 또 불안한 사람일 것이다. 골키퍼에게 있어 골인은 자기 존재 소멸의 순간을 상징하지 않을까. 세상이 나 하나의 고통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운동장에 없는 투명인간이 된 느낌일지 모른다. 어떨 땐 내 앞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내가 보고 겪은 일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 엄청난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정말로 내가 한 일이 맞는가? 싶을 때도 있다. 끔찍한 사건 현장을 목격했을 땐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가? 싶기도 할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인간은 이렇듯 자기 눈앞의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사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현실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일까.

 

  블로흐는 해고당한 기념으로 거리를 배회한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일탈을 감행하지만 여자는 블로흐의 현실을 일깨운 이유로 그의 손에 죽게 된다. 블로흐가 여자를 죽인 이후 돌아다니는 곳은 극장, 카페, 우체국, 기차처럼 시간이 되면 문을 닫는 곳이고 자신의 집이 아닌 여관에서 잠을 잔다. 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목적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이 하루하루 정처 없이 되는대로 돌아다닌다. 자신이 거기 왜 서 있는지도 모르고 상대와 왜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서 있고 떠든다. 가끔씩 순경이나 세관직원이 감시와 관찰의 직무를 수행할 때나 긴장하고 정신을 차리려 하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인식조차도 무의미하게 보인다. 세상엔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그가 그런 줄 아무도 모른다.

 

블로흐는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곧 걷기 시작했다. 잠시 서 있다가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멈춰서, 방향을 바꿔 일정한 걸음걸이로 달리다가,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또 돌리고, 멈췄다가, 이제는 뒤로 달리다가, 다시 뒤로 돌아, 앞으로 달리다가, 다시 또 뒤로 돌아, 뒤로 가다가, 다시 앞으로 달리는 자세를 하고, 몇 걸음 걷다가 빠른 달리기로 바꾸었다가, 감자기 멈춰 서서, 갓돌에 앉았다가, 갑자기 계속해서 달렸다.    - p93

 

  나는 이 문장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라 보았다. 이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중요치 않고 오직 그 이후 같은 패턴으로 불안을 표현하며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 나는 저 행위가 축구선수, 골키퍼의 행위를 상징한다고 본다. 블로흐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경기를 관람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는 쳐다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선 골키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정중히 물어본다. 물론, 관객입장이었던 내가 주목해 본적이 없다고 답하긴 미안하다. 주목하는 경우는 바로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일 때, 그러니까 골키퍼가 가장 고통스럽고 극도로 불안을 느낄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블로흐는 자신이 방황이라고도 생각지 않는 방황을 반복 하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며 끝이 난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의 두 손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키커를 바라보며 블로흐는 한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골키퍼가 된다. 한마디로 내 이런 절박한 심정을 당신도 좀 느껴보시란 말이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블로흐의 직업이 골키퍼였다는 사실을, 한방 먹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블로흐가 해고를 당하긴 한 것일까. 책을 덮으면서 강하게 떠오른 의문은 이 모든 것이 블로흐라는 현실부정형의 인물이 생각하는 일종의 망상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현장감독의 눈짓하나를 해고로 해석하는 주인공이 시발점이다. 그가 문제에 부딪혀서 그것을 처리하고 헤쳐 나가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즉흥적, 직관적, 충동적이다. 무의식이 무장 해제된 사람처럼 제정신인 경우가 드물다. 타자의 언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인식하지도 해결하려들지도 않는다. 일어난 상황과 자신이 보는 것들을 스스로에게 질문할 뿐 절대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소극적인 시도는 하지만 인식과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나는 블로흐가 어쩌면 ‘사건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과거 어떤 사람과 있었던 일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사건 자체에 대한 해석을 내 마음대로 부여하고 오랜 세월 그 의미를 사실과 다르게 인식하려 부단히 노력했더니 정말로 없는 사람, 일어나지 않는 일로 느껴져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강하게 믿어보면 또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인간의 강하디 강한 나약함은 아닐까. 있는 사실도 없다고 믿으면 없어지고 없는 사실도 있다고 믿으면 있어지는 게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 망상행위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흐는 골키퍼 일 때 공이 들어간 적이 없다고 믿고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저 당당한 키커의 힘찬 발길질을 한번 견뎌보고 싶다.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로서 그 불안한 순간을 끝내 이겨내고 싶다. 뒤로는 골대를 두고 앞으로는 공을 두고서 기껏해야 골이 들어가는 일 밖에 더한 일이 있겠는가. 내가 매번 골을 막으면 키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골이 하나도 없는 경기를 관람하는 관객은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골키퍼는 분명 다른 선수들보다 골을 더 잘 막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왕관을 쓰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듯, 공을 막으려는 자 골인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가끔은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사람들이 하필 골키퍼 나 하나 맞으라고 공을 던지는 건 아닐 것이다. 설령 공에 몇 번 맞았다 하더라도 그건 다음 공을 잡기 위한 내 노력이자 하필 골키퍼를 택하였기에 정당한 내 몫일 것이다. 공이 라인 위로 굴러 오는 것을 목격하는 골키퍼가 되고 싶진 않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이 굴러왔기에 그 공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렇기에 앞으로 또 얼마나한 공을 잡을 수 있을지를 떠올리고 싶다. 공은 잡을 수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가끔 들어가는 공 때문에 골키퍼를 그만두는 건 이미 골키퍼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아닐까, 싶다.

 

  모든 페널티킥 앞에선 세상 모든 골키퍼를 응원한다. 그건 어쩌면 세상 모든 현실을 막아내고 그러면서도 뚫린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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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0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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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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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작가는 미겔 스트리트를 미치도록 떠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책을 덮고 가장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인공의 행위는 ‘탈출’이었다. 현실 회피나 도피, 인간 외면이나 부정이 아닌 합법적 탈출. 그런데 작가는 지금 이 탈출을 다행한 추억으로 여길까 아님 행운이나 필연으로 평가할까.

 

  이 소설은 그가 열여덟에 트리니다드 섬을 떠나 옥스퍼드 대학을 마친 후 작가로 생활하기 시작한 초반기에 쓴 작품이다. 그러니까 지긋지긋한 그곳을 떠난 지 채 십년이 되지 않은 불같은 청춘의 시기에 그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작가는 떠나면서 항아리가 깨지는 것이 혹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징조이냐고 어머니에게 확인하면서까지 비행기에 올라탔던 것일까.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난 경위>에서도 언급되지만 작가는 무엇을 특별히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곳을 떠나기 위한 생각뿐이라 답한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곳에선 꿈을 가질 수 없고 가졌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 거리의 사람들처럼 살고는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 곳의 어른처럼 어른 되기는 다시 아이가 되는 것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 트리니타드에서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벗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쉽게 하지 못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은 그에게 어떤 시절이었던 것인가. 결국 쓰레기 수거원이 된 엘리아스에게 웃으며 자랑할 만한 시절이었는가. 결코 성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실패만 약속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성공적이었다 떠들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얻은 해답은 바로 주인공 내가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에 있었다. 나는 작가가 회고하는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을 ‘그리움’이라 칭하고 ‘고마움’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웃겨도 웃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내었음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50년대 영국의 엘리트 사회에서 이민자로서의 열등감, 외모 콤플렉스 등에 시달리며 힘겨운 유학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트리니다드 가디언>지의 기자였는데 아마도 그가 작가가 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지 싶다. 탈출을 했지만 그후 영국에서의 청춘은 부친도 사망하고 자살을 시도할 만큼 작가는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시기를 보내었던 것 같다. 지난 시절 그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도 그 쓸모없음에 매달리고 삶을 의존해왔다. 목수는 가구를 만들지 않았고 재단사는 옷을 만들 수 없었고 정비공은 자동차를 고칠 수 없었으며 이발사는 머리를 제대로 깍지 못했다. 남편은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아내는 바람을 피웠고 자식들은 밥먹듯이 맞고 자랐다. 미치거나 취하지 않은 제정신의 사람은 늘 누군가를 흉보고 이웃의 불행에 그 만큼의 위로를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누군가를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경쟁이나 비교가 의미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쓸모있는 것을 만들고 제 역할을 하며 사는 것이 부질없기만 한 그 거리를 떠나 변화된 환경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인도에서는 ‘이방인’이고 영국에서는 ‘식민지’이고 조국 트리니타드에서는 ‘유랑민’인 그가 왜 그렇게 전 세계를 여행하며 돌아다녔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광활하고 폭넓은 사회는 개인이건 집단이건 변화의 가능성이 많아요. 반면에 비좁고 한정된 사회는 어떤 것을 변화시킨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요. 정체성이란 넓으면 넓을수록 좋아요.”

 

  조그만 식민지 마을 출신의 작가가 앞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미겔 스트리트는 가장 먼저 추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극복되어야 할 치명적인 유산은 아니었을까.

 

  열 일곱 편의 단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경계심>의 주인공 볼로였다. 볼로는 신문에 난 기사를 불신하면서도 신문에 집착하는 유형인데 하이라이트는 바로 자신의 복권 당첨을 믿을 수 없다며 복권을 찢어버린 장면이다. 이 부분은 꼭 그토록 매번 거절당한 상대를 기다리다 지친 여자(혹은 남자)가 마침내 상대가 자신 앞에 돌아왔을 때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매몰차게 차버리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것 같아 가장 짜릿했다. 복권 당첨의 사실여부보다 신문불신에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오지 않음에 대한 믿음이 그를 기다리게 하는 - 안 돌아옴을 견디게 하는 - 힘이 되는 인생의 역설. 복권이 당첨 될 리 없고 그 당첨되지 않을 진실이 실릴 리 없는 신문이 나를 절망케 하는 사실은 바로 오랜 시간 기대온 불신에 대한 광신을 한 번에 저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복권이 얼마나 당첨되고 싶었으면 복권을 찢어버릴 것이며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를 밀쳐내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소설속의 여자들은 허구한 날 두들겨 맞고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또 애를 가지고 낳고 기른다. 남자들 역시 현실에서의 몸부림을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게 토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웃들도 아내와 자식을 구타하는 것을 큰 일로 여기지 않으며 묵인, 방조, 외면, 구경하곤 한다. 작가가 여성들을 야만적으로 학대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소설 속에서 화자는 남자 어른들보다 여자 어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시선이 냉철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피해를 당하면서도 여성들은 그다지 피해자로 인식되지 않았고 외려 확연하게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남성들이 희생자로 남겨지는 인상을 받았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화자의 어머니인데 중요한 결정은 여성이 하고 출산, 양육, 교육의 역할 역시 어머니 쪽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로서는 불운속의 행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청소년기 7,8년을 살았던 나의 스트리트를 떠올려 보았다. 서울 와서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고 그 시기 나의 가치관이 많이 형성된 기간이라 나는 그 동네가 사실상 제 2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땐 저층 아파트에 엘리베이터, 자가용도 없었던 시절이라 이웃 간 왕래가 활발해 서로 어제 저녁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훤히 들 알고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캐릭터로 기억될만한 인물은 손꼽아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어른, 친구들, 이웃들 삶의 풍경이 몇 장의 사진처럼 고정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내가 이웃으로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고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상상해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각각 짧은 이야기지만 대상이 되는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토록 풍부하고 흥미롭게 펼쳐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위대하고 놀라와 보였다.

 

  요즘은 주변 어떤 사람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누구하나 소설이 되지 않는 캐릭터가 없다는 걸 느낀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하나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도 하나 없다. 사람이 문제고 인생이 곧 사연이고 그래서 모두 소설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서늘할 만큼 그 모든 인간과 그들의 사연에 냉정하다.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듯 너무 힘들었기에 별일 아니었다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

 

  쓰는 게 종교란다. 거 참, 웃음도 눈물도 멈추게 하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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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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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두 편의 단편이 희한하게도 술술 읽혔다. 몇 년 전에 읽다가 만 책이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다. 다만 그땐 왜 읽다가 그만두었는지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필요에 의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만 읽었을 것이다. 얄미운 고양이 독서를 해놓고선 이 책을 다 읽은 척, 작가를 아는 척 했던 것도 같다. 이런 책은 다시 집어 들기가 참 싫은데 그래서 더 용기를 내보았다.

 

   순서대로 소설을 읽었고 책을 덮고 난지 며칠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소설의 해석이나 감상보다는 작가의 삶을 그려보게 되었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이 소설들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내게 열 두 편의 소설은 같은 이야기로 들렸고 주인공도 한사람으로 보였다. 그 한사람은 자기 인생에 있어 지나가버린 어느 한 시기를 몹시도 안타까워하고 남몰래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지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살지 못한 회한은 왜 꼭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 찾아오는 것일까. 누구보다 담담한 척해도 나는 그 무심함의 지나침이 바로 간절함의 다른 표현임을 알 것 같았다.

 

   알려졌듯이 레이먼드 카버는 주로 부부를 등장시켜 일상의 한 단면을 현미경처럼 관찰하고 시시콜콜하게 포착해낸다. 이들 부부는 한때 죽도록 사랑했고 그 죽을 만큼으로 미래를 약속한 채 달려왔지만 현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는 실제로 일찍이 알코올 중독과 가정불화로 별거와 이혼을 해 본 사람이고 치료차 입원도 했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뒤늦게 단칼에 금주결심도 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알코올 중독인 화자가 현재 별거중이거나 이혼한 상태에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리거나 더 확실한 이별을 예감하는 이야기는 원인과 배경만 달라졌지 비슷한 구도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화자들은 공교롭게도 툭하면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낸들 알겠는가’ 하고 태연스레 반문한다. 내 삶의 문제이니 ‘그들이 뭘 찾을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고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 있었겠’느냐 자조를 일삼는다. 그렇지 않고 ‘괜찮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어쩌겠는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생 앞의 무력함을 호소한다. 결국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제와 괜찮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게 남은 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가,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첫 번째 이야기 <깃털들>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문제의 깃털을 선물한 ‘올라’였다. 나와 직장동료인 버드의 부인 올라는 센스가 결여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호감의 민폐형 인물이다.(물론 내 기준에서) 이해는 하지만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은 올라가 어리숙한 척하며 할 말은 다하는 사람임을 나는 아직 아이가 없는 프랜에게 자식자랑을 하던 - ‘정말 똑똑해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니까요. 무슨 말을 하면 그걸 다 알아들어요. 그렇지, 해럴드? 한번 아기를 낳아보세요, 프랜. 금방 알게 될 거예요.’ - 장면에서 깊이 공감했다. 가끔 (현실에서도)못생기고 뚱뚱하고 총명하지도 않은 것 같은 여성이 자신의 유일한 경쟁력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자부심으로 아직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을 향해 우월감의 수사를 잔뜩 늘어놓을 때가 있다. 그런 유형은 내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서 너는 왜 아직도 남자가 없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없느냐는 핵심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어 한다. 또 그런 유형은 외모적으로 평균치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는 자기비하와 지나친 배려를 통해 상대방을 더욱 숨막히게 하곤 한다. 사실 이 작품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 천천히 시작되는 변화와 그것을 감지하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사후평가가 굉장한 쓸쓸함으로 남겨지는 글임에도 나는 그저 올라의 역겨운 치열과 그녀를 닮은 못생긴 아이의 얼굴만 강렬하게 남았다. 소설에서 강한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한 작품이다. 

 

   <체프의 집>에서 인상적인 대화는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될 수는 없다는 화자의 항변같은 대답이다. 별거중인 아내에게 답하긴 했지만 결국 헤어짐을 받아들여야하며 더 이상 같이 살수는 없는 이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 답하는 말이기도 했다. 웨스는 여름 한동안 남의 집에 머물며 아내와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불태워보았지만 결국 그 집은 주인의 상황에 때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하는 집이었다. 아무리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도 과거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작가는 아마 술을 끊기 위해 마음으로는 어떤 결심도 하였겠지만 제대로 실천한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당시 (작가가)술을 끊으려 했던 이유가 아마도 같이 사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갈등과 함께 문제가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누군가를 위해서 누구 때문에 끊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대한 리뷰는 故 박완서 작가의 수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작가가 이미 아들을 사고로 먼저 보낸 어머니였기에 아마도 그 심정을 더 공감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줄거리 말미에 ‘삶이란 존엄한 것인지, 치사한 것인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하셨다. 왜냐하면 아들을 잃고도 빵집아저씨와 밤새 대화를 나누며 빵을 먹는 모습을 보니 부부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게도 퉁명스러워만 보이던 빵집주인 -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 같은 - 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밤새 굽는 빵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또 하나 이 소설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 즉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입장과 그 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입장이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무 일 없는 일상과 무슨 일이 터진 일상의 합이 결국 한 사람 인생의 총합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침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었다가 거짓말처럼 다시 운행되기도 한다.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는 때가 언제이고 무슨 이유때문인지를 몰라서 그렇지 이 원칙은 일상을 운행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을 사실 중단되기 직전까지 우린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곧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하는 다음의 예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p102

 

   배경이 집이고 관계가 부부이니 인물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 집을 방문해 현관을 통과하고 문을 열고 등장하는 모습도 빈번하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이지만 작가는 그곳을 불길함을 제공하는 상황으로 이용하고 섬세한 디테일은 초단위로 이루어진다. 소파, TV, 냉장고, 전화, 책상과 같은 소품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고 각종 음료수 및 음식을 놓고 대화가 이어진다. 대단한 사건이나 특별한 갈등이 아니라 단지 어제도 하던 일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할 줄 알았던 일,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존>은 바로 냉장고가 고장 난 일이 어떻게 일상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보존하지 못하게 하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일마치고 돌아온 저녁 왜 갑자기 냉장고의 프레온 가스가 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운전 중 중고차 바닥에서 새어나온 일산화탄소에 질식해 사망한 아빠가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단지 음식물을 보존하는 기능이 잠시 고장 난 것일 뿐인데 그날 저녁의 풍경은 앞으로 더 크고 많은 것이 보존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나 역시 언젠가 세탁기가 고장나고 TV가 고장 난 적이 있다. 한 겨울 세탁기 AS는 그날 일과 중 가장 큰 스트레스였고 TV는 결국 새 제품으로 구입하게 되었는데 며칠 괜히 불안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집안 가전제품이 우리 일상을 아무 일없게 무사히 가동시키는 핵심 장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칸막이 객실>은 목적지가 분명하고 만나는 사람이 확실함에도 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하는지 이동 중인 화자를 통해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외려 스스르 ‘잠속으로 빨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얼마나 무수히 잠 못드는 밤을 지내고 난 뒤 깨달았을까. 사실 우리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어떻게 편히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어떨 땐 앞일을 모른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일 때가 있다는 것, 그건 아마도 어떤 일을 겪고 난 후 그 일을 겪기 전을 떠올리며 비로소 깨우친 인생의 진리는 아닐까 싶다.

 

    <비타민>에선 어쩌다 복합비타민 방문 판매 일을 하게 된 아내가 등장한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배신당하고 아내는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며 ‘어른이 돼서 비타민이나 팔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남편에게 넋두리한다. 결말에 이르러 남편은 골치가 아프므로 비타민이 아닌 아스피린을 찾으며 늘 필요하지 않지만 가끔 필요한 인생의 무엇을 환기시키며 피식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인생은 이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정답을 찾으려는 우리에게 사는데 정답은 없다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조심>에서는 별거중인 남편을 찾아온 아내가 정작 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귀지만 파다가 돌아간다. 이때 작가는 어쨌거나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인생이라 말한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작가의 자전소설 느낌이 많이 드는데 왜 술 마시는 버릇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독백이 잊혀지질 않는다. <조심>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남편인데 이들은 절대 혼자서 병을 치료할 수는 없어보였다. 그리고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자신들을 예전처럼 돌보아주지 않는 것을 다시 알코올 의존에의 이유로 치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 중 만난 굴뚝 청소부 J.P의 아내가 외모도 건실한 여장부처럼 묘사되었고 다른 중독자의 아내들도 무척 현명하고 능력 있는 고학력자로 보인다. 이들은 <열>에서처럼 자신의 전공이나 사랑을 이유로 집을 나가거나 혼자인 남편을 - 혼자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 방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떠나가는 쪽이 아내이고 버려지는 쪽이 언제나 작가와 같은 남자 쪽이다. 그들 화자들은 누구를 탓하느냐 하면서도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신의 확신을 탓’하기도 한다. 즉, 버려질 만 했다는 자책과 반성인 것이다. 허나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제 앞으로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각자 상대방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슬픈 일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 p284

 

   상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과거의 연을 좇아가던 한 시기,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난 것이라 인지한 바로 그 순간의 슬픔과 충격이 작가에겐 한 평생 짐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의 여주인공이 총구를 겨냥해야 했던 주인공은 바로 작가 자신은 아니었을까. 끝내 총을 쏘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여자가 목격한 장면은 늙어서도 티격태격하는 老커플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시간이 되어 기차는 도착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기차에 올라탔건만 승객들은 도통 심드렁하다. 원래부터 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 p241

 

   ‘기차가 움직이면 저마다 기차가 서기전에 빠져들었던 생각, 자신들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라는 작가의 결론이 나는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니 특별할 것 없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가정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살짝 경마도박꾼으로 바뀌어 등장한 <굴레>에선 추락중인 가장이 아파트를 떠나면서 ‘낡은 검은 가죽의 말굴레’를 두고 간다. 굴레를 두고 간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엔 이사를 핑계삼아 굴레를 버리기 적당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니 이사를 가게해서라도 굴레를 잊어버리게......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은 어쩌면 작가의 이루지 못한 소원처럼 느껴져 여운이 길었다. 맹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감각하나를 잃어버린 사람과 정상인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소통이라는 것이 꼭 정상적인 사람들끼리의 축복된 전유물은 아니라는 의미도 있다. 요즘 같으면 서로 테이프에 녹음한 소식을 주고받는 일일랑 무슨 전쟁세대의 낭만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작품 말미에 도저히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남편이 맹인과 짜릿한 공감을 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남편이 살면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맹인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 p351

  나는 그 순간 맹인이 작가라 확신했고 남편은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과 소통하지 못한 세상 모든 이의 표상이라 믿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모든 독자들이 그에게 ‘It's really something’, 이거 정말 뭔가가 있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고 느꼈다. 열 두 편의 이야기 중 가장 해피엔딩이면서 또 가장 울림이 크고 넓었던 이유는 마지막 대사가 마치 어느 대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소설은 지으려고 꾸미려고 노력해서 나오는 이야기 같진 않다. 인생이라는 게 대단히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라는 이것이 정말 뭔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은 별의 별 종류의 일로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내일을 기다린다. 결코 아무 일 없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을 리 없겠지만 저마다 자기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으므로 주어진 일을 닥쳐온 이별을 버려야 할 굴레를 내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 받아들이고 나서 정말 뭔가가 가득하다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행인건 누구에게도 그 순간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작가는 너무 오래전에 그것을 알아버렸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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