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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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많다고 하지 않고 깊다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아주 은밀한 속살 너머 저 깊고 깊은 그곳에 숨겨둔, 내 오래된 두려움에 가닿았기 때문이다. 책을 잡은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쓰는 이유도 그 깊은 여운을 조금 더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덮고 나자마자 글을 쓰면 내 속에 들어왔다가 시원하게 통과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통과한 후 책꽂이에 꽂혀지면 나는 뒤돌아 후련한 마음이 든다. 다음 적어도 마음에 새겨진 무늬정도는 기록을 한 사람이 되어 그 책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이 책은 기대만큼은 아닙니다. 이 책은 의외로 유익하네요. 이 책은 명불허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지 않고 나 혼자 비밀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십 년 전에 출간된 이 고전 한 권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나는 내 속내를 감추고픈 속속내와 마주한다. 아무래도 나는 고독이 꽤 좋았던 사람인 모양이다. 이 책은 은둔과 고독을 자처한 나를 위해 나타난 구원자처럼 기품 있고 당당하다. 그런데 다른 구원자처럼 자신의 손을 잡으라 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도 좋은 것이라 말했다. 다르게 살라고 충고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늦게 본 자식에다가 그 시절 흔치 않은 외동이였다. 친구들은 혼자서 방을 쓰는 것을 굉장히 부러워했고 학교 다닐 땐 우리 집에(정확히는 내 방에) 머물다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살면서 많이 받아본 질문 중에 혼자여서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외로운 것이 무어냐고 자주 되받아 물었다. 정확하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형제가 없었던 나로선 혼자 있는 것의 장단점을 비교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자여서 심심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육아의 고단함이 아니고 도무지 혼자인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혼자서 영화도 잘 보고 밥도 잘 먹고 여행도 잘 간다. 아파트 뒷산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돌아오는 벤치도 있다. 뒷산-도서관-벤치와 영화관-서점-카페는 아이 데리고 마트가는 만큼이나 빈번한 코스이다. 살면서 외로움이라는 건 이런 것이구나를 뼈저리게 느낀 적은 딱 한번, 엄마의 장례식 날이었다. 아버지 돌아 가신 후 엄마마저 떠나는 날은 그동안 혼자 누리고 받았던 모든 사랑만큼이나 무지막지한 슬픔도 온전한 내 몫이었다. 나는 아마 죽는 날까지 그때 느꼈던 외로움을 떠들다가 갈지도 모른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그 정도의 외로움을 느끼는 날은 내가 죽는 날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마치 인생외로움의 필수 코스를 그런대로 이수한 사람처럼 마음이 편하고 혼자할 수 없는 숙제를 마친 사람처럼 그 어떤 외로움에도 두려움이 없다. 물론 ‘혼자서도 잘해요’가 꼭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혼자인 시간을 무척 사랑하는 부류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 어찌 ‘혼자 있는 능력’ 을 말하는 이 책이 눈물겹지 않겠는가.

 

 

 

    ‘혼자 있는 능력’ 이란 사무치게 외로와 죽겠는데 이 악물고 고독을 잘 견디는 능력이 아니다. 혼자 있는 동안 각자의 뇌에서 최고의 잠재력이 발휘되는 기특한 순간의 능력이다. 즉,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정서변화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혼자 있는 건 능력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예를 들어 고독이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발전시켜 창작활동에 기여한다면 그때의 고독은 능력이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작가, 음악가, 철학자의 삶을 예로 들고 정신분석 및 통계자료를 통해 창조과정, 개인화 과정이 고독 속에서 더 잘 내면화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극단적인 예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뉴턴 같은 천재는 가정을 이루지 않았고 가까운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았고 금욕적인 생활에 몰두했다. 이들은 모두 철저하게 일과 연구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그들의 인생이 꼭 불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타인과의 친밀한 애착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삶이 꼭 불완전하거나 열등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인간관계에서 찾을 것인가 내면화된 고독 속에서 찾을 것인가는 개인의 성향과 선택일 뿐 어느 한쪽이 정답이거나 다른 쪽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었다.

 

 

 

    우리 모두는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저들의 고독와 우리의 고독은 질적으로 다르다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행복을 가르치는 많은 서적과 사회학 통계치로부터 대부분 노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라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내가 아는 행복론에서 건강한 노년은 적어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이웃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정원을 가꾸는 인자한 모습이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물로서 조직에선 거의 치명적인 결격사유에 해당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인간관계의 완성도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리라고 말한다. 혹시나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필요이상으로 불행해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꼭 친하지 않고 형식적, 피상적인 관계도 일상에선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이 나이 되도록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하나 없는지 왜 회사에선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 할 동료가 없으며 왜 그 흔한 학교 선배하나 남지 않았는지 자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현실세계라는 외부 대신 상상이라는 내면세계를 잊지 말고 그 속에서 불운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기르라고. 고독은 현실로부터 외면당한 절망의 공간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라고.

 

 

 

    그러니까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고독과 창의성을 연계시킨 지점이다. 창의성이라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증에 취약하다는 결과와 만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과 어린 시절과의 상관관계를 밝힌 것이다. 부모의 상실, 결핍 등으로 어린 시절 혼자 있었던 아이들이 상상하기를 즐기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싹트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 중 다수는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껴 고립된 시간에 놓이게 된다. 유전, 환경적 우울적인 기질은 강박증이나 신경쇠약, 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적 요소는 다시 자극제가 되어 내면 깊은 곳을 탐험하고 갈등과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상실과 고독은 창작의 가장 확실한 배경이 되고 다시 창의력을 가진 사람은 상실을 치유하며 고독을 내면화하는데 성공한다. 고독한 사람은 상상하고 상상하는 사람은 창조하고 창조된 세계는 자신은 물론 친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선사한다. 이른바 고독의 선순환 과정에 대한 치밀한 보고서인 것이다.

 

 

 

    저자는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면서도 친밀한 관계 맺기를 두려워했던 카프카의 삶에서 글쓰기를 언급했다. 분열적인 카프카를 치명적인 고독과 창의성을, 창의적 재능과 우울증의 본보기로 제시했다. 카프카는 누군가 곁에 있으면 자신의 나약한 정신구조가 무너질까봐 -글을 못 쓰게 될까봐 -연인을 거부하고 두려워했다. 카프카에겐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가장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카프카를 보면서 간혹 가족이 없어야 글을 쓰는 사람과 가족이 있어도 글을 쓰는 사람과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도 정도가 있듯이 예술가도 고독에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정도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절대 고독에서만이 절대 작품이 탄생한다고 믿는 예술가는 아마도 더 간절히 사랑을 원하고 그래서 혹 자신의 재능이 그 사랑으로부터 파괴(패배)당할까봐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친밀한 관계는 자기 창조의 동력을 앗아간다는 것을 천재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면 오랜 고독과 그 속에서의 집중이 내면의 재능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인간관계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려는 개인의 보상기제일수도 있겠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인간관계보다는 내면의 관심사에 더 몰두하게 된다는데-이는 죽음이 가까워지므로 이별을 준비하는 자연스러운 자세가 아닐지-우리는 나이들어 이웃과 교류하나 없는 어르신들을 고집불통의 노인네라 속으로 흉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면 정서적으로 성숙한 것이고 혼자 고독하게 지내면 병적인 것이라 구분해 오진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창조적 삶을 위해 고독하게 살라는 뜻은 절대 아니라 부연하고 싶다. 어쩌다 보니 찾아온 고독을 지속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말하고 싶다. 누구든 지금 고독하다면 고독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그것에서 생성된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투사할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글이 되었건 음악이 되었건 자기 고독을 치유하는지도 모르고 상상력은 고독을 입체화해 줄 것을 믿어 보라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은 새로운 통찰을 얻는 순간, 다시 말해 새로운 발견을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혼자 있는 순간 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대개는 그렇다
- p20

 

 

 

 

    우리는 베토벤이나 칸트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고독하다. 가끔은 고독하고 어쩌다 고독하고 불현듯 고독하고 그리고 자주, 쓰리게 고독하다. 상대가 나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독하고 알아도 어쩔 수 없어서 고독하고 어떻게 해준다 해도 고독하다. 아마 죽는 순간 가장 절정의 고독이 완성되겠지만 어차피 고독으로 완결될 거 기왕이면 긍정의 고독, 생산의 고독이 더 그립고 절실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외롭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그 외로움을 비교적 잘 내면화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외로우면 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독이야말로 고독을 이기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어느 비오는 밤 당신이 고독해보여도 혹은 당신이 그 빗소리에 고독하다 외친다 해도 당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독은 슬픔이나 절망이 아니다. 고독은 고독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할 수 없는 희망이요 기쁨이다. 당신의 고독을 늘 질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고독하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제대로 고독할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내가 맞는다고 하는데 슬며시 미소 짓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디 당신의 고독위에 나와 같은 반가운 미소가 사뿐히 내려앉기를. 우리는 고독한 이 밤이 가장 좋은 사람들이니까...

 

 

 

 

 

덧붙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짧은 리뷰도 처음이고

줄이는 것도 힘들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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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2-0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깊은 위로 말고요,
때로, 때때로 한번씩 어깨를 툭~하고 쳐주는 그런 보일듯 말듯한 제스츄어요~^^

원제가 'solitude'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우리말 제목이 의외네요~^^

gimssim 2012-02-0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독은 기쁨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아마 혼자 놀기의 명수여서 그런가 봅니다.
어릴 적에는 우리집 마당에 스무명의 아이들이 해질녘까지 놀다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저는 혼자가 되어있었어요.
지금은 '조직'내에서도 늘 '혼자'인 것이 약간 문제가 되곤 합니다만...

gimssim 2012-02-11 21:22   좋아요 0 | URL
스무 명의 아이들이란 게, 제가 그때는 무척 활동적이었을 때이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 저희 집이었어요.
아무튼 방도 여러 개였고 장독대, 우물, 감나무, 분꽃이 많이 폈던 꽃밭도 있었드랬는데.... 결혼해서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이십 여 년만에 주인이 바뀐 집에 가보았더니 에게, 마당이 이렇게 좁았나 싶었어요.

꽃도둑 2012-02-0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시간에 갇히는 거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요...
번잡하고 북적대고 복잡한 곳에 있는 것도,그런 일과 사람들을 맞닥뜨리는 거 그야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아, 나를(?) 알아주는 글인 것 같아 내심 위안이 되네요..^^
창의적인 일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일텐데...조금 더 기다려보죠 뭐..ㅋㅋ

보물선 2012-02-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미투한번 와봐봐.
어제 알라딘에서 10만원정도의 적립금이 들어왔다가
그거 실수한거래서 완전 김샜어.
그거 다 써버릴껄! ㅠㅠ

보물선 2012-02-10 15:34   좋아요 0 | URL
내말이~~
좋다가 말았잖아....ㅠㅠ

cyrus 2012-02-10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에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요.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으로 고독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다는군요. 마침 이 책이랑 <고독의 위로>를 같이 읽어보려고 하는데
저 역시 이 책으로 고독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

[그장소] 2015-04-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할 나위 없네요.^^
누구나 다 안다면 굳이 이 상태를 이해시킬 필요도 없을텐데.
일상생활을 나눔으로 좋음은 이미 했었으니
이제 온전한 혼자로 삶도..그런 형태가 되길
바래봅니다.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 남자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당신에게
남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를 다시 생각해봐

 

 

 

   누군가 결혼은 택시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마침 잡아타려고 하는데 내 앞을 지나가다 운 좋게 걸리면 타게 되는 것이 택시이듯 결혼도 내가 지금 하려고 작정한 그 타이밍에 하필(?) 내 앞에 있던 남자와 하게 된다는 뜻. 즉 결혼은 서로 죽고 못 살아야만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고 죽고 못 살게 될 수도 있는 운명적 인연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다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할 줄 몰랐던 사람이라고 꼭 결혼을 안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만 해도 뜻하지 않은 사람과 전혀 뜻하지 않은 시기에 결혼을 했고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그러다 또 뜻밖의 남자를 만나 뜻하지 않게 인연을 만들고 지금은 뜻과는 달리 헤어진 상태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여튼 나는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모두 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 인생에서 남자는 늘 뜻밖 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어쨌거나 남자는 나와 맞지 않는다, 정도가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고 이 책을 마주한 내 심경이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결혼하고 일 년 간을 가장 많이 싸우고 분노하며 상대를 이해해보려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그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나는 좀 더 남자에 대해 빨리 편해질 수 있었을까, 싶은 책이다. 아마도 그때라면 나 잘난 맛에 이런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2,30대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라, 는 식의 충고 혹은 위로형 서적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남자는 이렇게 길들여야 하고 사랑과 이별은 잘 해야 하고...하는 책들은 웃기다는 쪽이었다. 그건 독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땐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마디로 일과 성공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남녀간에 발생하는 성격차를 통해 원인과 결과를 제시하는 방법론적 서적들은 거의 사치에 가까웠다. 어떤 면에선 남자에 대한 분석이나 방안에 대한 신뢰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책과 같은 일반론 속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낭만이나 치기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책을 덮고 나니 내용의 주 타겟은 한창 그 남자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 때문에 정말 죽을 것 같은 여자이어야 할 듯하다. 도저히 내가 택한 이 남자와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시점의 여자이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실상 그 시기엔 이런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너무 배가 고프면 요리책 따윈 너무 멀거나 귀찮은 것이다. 나만해도 이제 남자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남자 분석 같은 건 필요치 않을 줄 알았는데 바로 이런 시점에 아무런 기대가 없기 때문에 외려 내 열린 마음에 이런 책이 무리 없이 안착하는 이상한 경우가 발생했다. 그냥 이 책이 끌렸다. 이젠 모두 이해하고 긍정하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인 내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난날 내 남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높았던 여자였을 뿐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그다지 새롭진 않다는 것인데 -사실 여자에게 남자처럼 진부한 소재가 어디있단 말인가 - 성실하고 논리적이고 치밀한 자세로 그 점을 편안하게(치밀하면서 편안하기 힘들다)보완했다. 느낌은 생각보다 괜찮다.

 

 

   지금 남자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내게 있어, 이 책의 느낌은 이렇다.

 

 

   평소에 여기저기서 잘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한번 원 없이(?) 다양하게(?) 써본 제품이라 그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데-그래서 다시는 구매의사가 없었던 차인데-그래도 한번 마음을 바꾸어 보라고 작정하고 설득을 하는 느낌. 제품의 피상적, 구체적, 추상적, 심리적 모든 문제들을 다 알고 있는 전문가 한분이 콕콕 집어 올바른 사용법을 쉽게 가르쳐주는 느낌. 그동안 제품 사용에 있어 내가 이해할 수 없었거나 그냥 묻었거나 넘어가 버린 문제점들을 소상히 밝혀주는 느낌.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이 어필하듯 남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내 생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당신 생각이 원래 맞지만 더 현명하고 우월한(?) 당신이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는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는 남자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면 같이 가는 방법을 달리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잘 살고 있거나 이미 헤어졌다면 이 책은 필요치 않을까? 내 생각에 남자와 사는데 잘 살고 있는 여자는 없다고 보기에 어느 시기든 유용할 것이며 남자와 헤어졌더라도 그 시기를 돌이켜보며 조용한 회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듯 하다. 비록 지나갔지만 앞으로의 시행착오를 막는 의미에서도 이 책은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한 가지 남자에 해당하는 혹자들은 이 책이 여성이라는 우월적 위치에서 남자를 관찰하는 시각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시종일관 이 책에 의하면 남자들은 오로지 여자를 통해서야만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여자를 통해서만 성숙한 인간, 철든 남성이 된다. 여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불안감을 관리할 수 있으며 ‘언제고 여자에게 길들여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남자라 말하기 때문이다. 아니라 반박하고 싶은 남자만 이 책을 들쳐 보면 된다.

 

 

남자는 진짜 남자가 목표라구

 

 

 

   우선 작가가 진단하는 병인은 남성성에 집착하는 남자病이다. 남자가 대화에 소질이 없는 이유,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 서열을 중요시 하는 이유, 게임이나 술 중독,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 폭력적이 되는 이유, 일찍 죽는 이유 등등 결국은 진짜 남자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 말한다. 여자는 결코 ‘여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닌데, 남자는 진짜 남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내가 가장 짜증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남자들의 태도중 하나는 누가 봐도 잘못한 일에 절대로 사과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대체로 아내가 조목조목 하나부터 열까지 지나온 경위를 밟아가며 잘못된 부분을 하나씩 짚으면서 결과적으로 당신이 잘못했다고 따져드는 순간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못견뎌한다. 아내 입장에선 미안하다 한마디면 될 것을 그 한마디를 하지 않는 서운함이 괘씸함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남자의 잘못을 역순으로 톺아보는 시뮬레이션 과정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남자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 끝에 가선 모멸감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미안하다는 답을 해줄 리가 없다. 아내는 억울하다. 애초에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잘못한 사람은 잘못을 추궁하는 것만 서운해 하고 자기 자존심만 중요하게 생각하니 어떻게든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다보면 끝까지 그 소리를 안 하고 넘어가려는 꼴을 죽어도 못 봐주는 아내 때문에 또 진정성 없이 일단 순간을 모면하려고 대충 미안하다 얼버무리는 태도로 사태는 전환된다. 이 상황을 이미 예상하는 아내는 점점 입을 닫게 되고 남편은 항상 화나 있는 아내를 보게 된다. 남자들은 말한다. 왜 화가 나 있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하하. 아내들은 말한다. 내가 백번을 이야기해도 달라지 않고 똑같다고.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늘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이유로 스파크가 일어난다. 나처럼 남자를 과감하게 버린 내 지인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남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남자는 결코 철들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라 그걸 못 견디는 여자인 자신일 뿐이다. 고로 결혼 생활을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하는 여성들은 남자들이 특별히 우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남자를 잘 견디는 방법을 터득했거나 아니면 특별히 남자를 잘 견디는 성향으로 타고 났거나인 것이다.

 

 

   작가는 남자가 대화에 소질이 없는 이유는 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학습해온 남자공식에 위배되는 발언이기 때문이라 정리한다. 그리고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변화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한 절대 ‘단 1센티미터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옮겨 앉으려 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남자는 죽자고 남자를 이기려 드는 여자를 가장 싫어하며 ‘스스로 멋진 남자라고 느끼게 만드는 여자’, ‘자신을 남자로 느끼게 해주는 여자’에게 끌린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여자에겐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면서도 종국에는 여자가 그것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마침내 찾아낸 여자에겐 충심으로 투항한다. 한마디로 남성성을 모독하는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어하면서도 또 그 자기만의 약점을 알고 보살펴 주고 챙겨주길 원하는 것이다. 이에, 남자는 자신이 진짜 남자라고 느낄 때에만 사람구실을 한다는 것이 작가의 심오한 결론이었다.

 

 

   작가는 이 진짜 남자 컴플렉스에 해당하는 질병을 ‘유리커브’에 비유하며 유리커브의 열쇠를 여는 것이 유리커브를 발견한 여성의 역할이자 임무라 하였다. 아니 여성이야 말로 유리커브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들렸다. 오랫동안 사회에 여성의 승진을 막는 유리 천장이 있다면 남자들에겐 오랜 세월 환경과 교육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의 감옥, ‘유리커브’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표현과 교류가 서툴고 자신의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두르고 있는 갑옷처럼 유리큐브는 사방이 좁아 터진 밀폐의 은신처이다. 여자들이 답답하다고 망치를 들고 유리큐브를 깨려 들지 말고 지혜롭고 유일한 산소통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의 유리큐브를 인정하고 때로는 반들반들하게 닦아 주고 때로는 질식하지 않도록 열어 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남자도 힘들고 슬픈 거야

 

 

 

   또 하나 맞벌이 여성들의 불만에 해당하는 가사부담의 정도에 대해서도 명쾌한 분석이 이어졌다. 나 역시도 늘 집안일과 육아는 그저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보조로서 도와주는 일이라 여기는 구석이 못마땅했는데 남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 때문에 여자들이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자신의 일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었을 그때는 자신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하므로 일찌감치 가사를 자기 영역에서 제외시켰다는 분석이다. 이제 작가는 여자들이 가장으로서의 남자들의 책임감을 나누어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내심 남자들의 부양에 기댈 목적으로 결혼을 하는 여성들이 반드시 감당해야할 태도라 느껴진다. 여자들 스스로 나는 아이 낳고 뒷바라지하고 살림을 하니까 앞으로 경제적 활동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평생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남자들은 잠시 바깥일 하는 아내의 원래 담당인 집안일을 해주는 것이 선심 쓰듯 도와주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차라리 남자의 책임감을 덜어주고 그 책임감을 핑계로 회피하고 있는 많은 의무들을 나누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 충고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것이다.

 

 

   직장 다닐 때는 같은 경력인데도 군가산점 등의 이유로 남자들이 조금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재수안하고 휴학안하고 군대 못가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죄로 재수하고 휴학도 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신입사원이 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시절을 보내었다. 나는 이미 밤새고 뺑이치고 삼년 경력자가 되어 있는데 그들은 갓 들어와 내 지시를 받으면서도 나와 월급이 같았고 슬그머니 일 년 지나면 나와 같은 직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고 대학원 졸업하고 그 와중에 애까지 낳고 돌아온 오년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물론 군대는 국가가 부른 것이고 출산은 내 개인의 선택이므로 보상을 해줄 이유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남자들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국가적으로 시스템화 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보상도 꼭 여자를 차별하는 결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업무적으로 차별을 받거나 직종 특성상 남녀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회사 생활하는 동안엔 남녀차별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축에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여자들의 경력은 세월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억울함과 여자들의 결혼과 출산은 사회에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외려 민폐일 뿐- 피해의식이 많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맨날 야근이다 회식이다 늦게 오는 남편이 아무리 힘들어 죽겠다 소리쳐도 속으로는 다 밖에서 누릴 것을 누리고 대접받을 건 받으니까 그 정도 힘들어도 견디는 것이겠지(아니 당연히 견뎌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누릴 거 누리고 받을 거 받아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구나, 당신들이 힘든 것도 내가 힘든 만큼 같은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우친다. 주로 약자이고 피해자인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슬픔이 있듯이 강자이고 보호자이고 책임자인 남자도 남자이기 때문에 슬픈 것이었구나, 힘은 누가 더 세고 눈물은 누가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힘겨운 슬픔 만큼은 누가 누구보다 더 인 것이 아니었구나... (작가가 대단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남자가 아니면서 남자 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남자보다 더 남자를 잘 말하고 그로써 여자의 생각을 슬슬 바꾸어 놓는다는 것. 작가를 보면서 남자를 말하는 것도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다. 남자에 대한 오해를 여자가 풀어주는 것을 보면)

 

 

   유익한 책이다. 작가는 마지막에 칸느 여우 주연상 전도연은 못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 중 그를 대할 때 필요한 것만을 골라 잘 연기하라고 마무리 한다.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기하라 충고한다. 알면서도 저주고 저주었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원하는 행복을 성취하라 말한다. 이 책은 각 챕터마다 초반엔 주제와 관련된 짧은 이야기가 제시 되고 그 원인과 해석이 뒤를 잇는다. 중국 고전 <금병매>의 캐릭터 반금련, 무대, 서문경, 춘매, 설화를 패러디 했다는 소설이 재미나다. 어쨌거나 남자가 필요한 주인공에 해당하는 금련이 연애에 몇 번 실패하고 무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남편의 실직등 위기를 맞이한 후 중년을 맞는 구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남자를 조종 및 통제하기에 불가능으로 접어든 시기는 마흔 이후로 보는 것 같다. 남자 역시 여자의 도움을 거치지 않고 중년을 맞이하는 인생은 불행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너무 많은 걸 깨우친 중년이 아닌) 아이 하나 낳고 집장만 하느라 뒤도 안 돌아보고 부지런히 뛰었더니 어느덧 낼 모레 마흔을 앞둔 마음 울적한 주부에게 권한다. 나 같이 남자한테는 학을 떼어서(?) 더 이상 남자는 필요 없다는 돌싱내지는 싱글맘에게도 권한다. 나쁜 남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지 좋은 남자야 왜 필요 없겠는가(그러나 불행히도 남자는 잘난 남자와 못난 남자로 구분 지을 뿐이란다...) 가끔 내가 몇 살까지 살게 될까를 상상해 볼 때가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또 뜻밖의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므로 당분간은 이 책의 가르침을 가슴에 고이 간직해두어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어쨌거나 내겐 남자가 되었건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건 그 문제와 대안을 말하는 책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요즘 하루 한권 읽고 그 다음날 리뷰를 쓰는 폭풍의 독서가 이어지고 있다. 아...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이 놈의 남자 근육보다 더 끌리는 저 단단한 책들과 그리고 그를 질펀히 통과한 후 내가 즐기고 있는 이 육체적 사유의 시간을. 다만 좋은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이 현실에 써먹을 날이 부디 다시 돌아오기를 몰래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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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gimssim 2012-02-0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 년 세월을 살면서 저희 부부만큼 많이 싸운 부부도 드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싸우다가 앞뒤 안맞는 남편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더니 돌아오는 말, "그렇게 똑똑한 여자가 왜 나랑 결혼했어?"
참고로 우리 남편은 아직도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똑똑하자!"고 입에 거품을 뭅니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지러운 세상이라구요.
얼마 전,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나이 탓인지 싸우기도 힘에 부쳐서요. ㅎㅎ
싸우고 서재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끼니 때가 되었는데 밥을 줘? 말아? 잠시 갈등했어요.
저는 별로 왜곡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는데 남편은 중학교 때부터 하숙, 자취를 했지요.
오제은 교수 이론에 의하면 남편은 '내면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멈춘 상태라는 거지요.
제가 내린 결론은 '에미가 속상한다고 새끼 밥을 굶기면 되겠어!'
그때부터 '어진 에미'가 되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당신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묻는 것이었어요.
(남편만 모르지만 저는 자타가 인정하는 천사표에요.)
속으로는 '넌 내 새끼니까!'
겉으로는 "나같은 마누라 데리고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폭풍 독서, 리뷰...부러워요. 멈추지 마세요!

2012-02-05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8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2-02-08 19:46   좋아요 0 | URL
난 집에 있는 맘들이 젤 부럽다!
굶고 사는 것도 아니고
골치 안아파도 되고~
 
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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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좋은 소설입니다. 건강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기까지 하군요.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덮고 이 소설 참 마음에 든다,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겠구나, 생각들이 그 많은 마음을 한 곳으로 움직이겠구나, 아마도 움직여진 그곳은 작가가 손을 잡아 이끈 곳이겠구나..... 오랜만에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을 만났습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과 세상에 마음이 상하는 시간이 많았던 분이라면 아마 그 마음이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꿈쩍 않던 마음 하나 움직이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수도 있으니까요.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읽는데 어떤 반감이나 무리가 전혀 없습니다. 쉽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작가의 문체와 단정한 문장이 편안한 느낌입니다. 능숙한 것과도 조금 다른데 어디서 한번 마주친 듯한 사람처럼 낯설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친근한 것과도 조금은 다른데 사람으로 치자면 독특한 호감이 있어 자꾸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랄까. 무심코 라디오를 듣다 보면 그래, 바로 지금 이런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할 때가 있잖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음악을 듣다보면 지금 내 마음이 이러했구나, 깨달을 때가 있잖아요. 이 책이 그래요. 바로 지금, 내가 듣고 싶고 읽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한번쯤 우리는 이런 소설을 기다려 온 것은 아닐까. 어딘가 불편하고 속상하고 아픈 구석이 있어도 꼭 이런 구성, 이런 결말이 필요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죠. 소설이란 마치 동네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기약 같아요. 그러나 내게 유독 잘 맞고 잘 듣는 약은 흔치가 않잖아요. 글쎄, 좋은 소설이란 지금 내가 걸린 무언가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싶네요. 이 소설을 읽고 새삼 그 ‘좋은’ 감정을 정리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가슴 속 무언가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아니 세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한물간 외주 제작사 PD 박상운과 경영대 출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 정기섭과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김일우라는 소년. 주인공은 자폐인데다가 지능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지만 청각에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김일우 소년이겠지만 저는 한 번 실패한 어른이라서 그런지 아주 못되지도 아주 착하지도 않은 두 아저씨들이 더 공감 갔던 것 같습니다. 아저씨들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한 시절 잘나갈 때가 있었거든요. 장애 소년이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듯 우리도 그들처럼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람들의 안 보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로 받아 들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선한 구석은 있고 또 아무리 착한 사람도 욕심은 있기 마련이죠. 이 소설은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하기 때문에 누가 피해자가 되고 그래서 상대가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리얼리티가 듬뿍 살아 있어요. 아무리 소설적인 상황이라지만 살다보면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일 부지기수잖아요. 그보다 더 사악한 사람들 쌔고 쌨잖아요. 일우 학생만 빼고 나면 나머지 어른들은 우리 현실세계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고 어쩌면 일우마저도 가끔 등장하는 우리네 일상 속 그저 그런 불행으로 보였어요. 

 

 

우리와 멀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표면적으로 아무런 연고관계가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전반부에 배치하고 중반부에 그들을 만나게 한 후 각자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헤어지게 하고 다시 재기를 다짐하고 후반부에 재회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결론은 맞아요, 돈 때문에 모여서 돈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돈 때문에 재회하는 것입니다. 이 들을 운명처럼 엮어주고 그들 모두에게 희망과 상처를 번갈아 주면서 우리의 감성을 들었다 놓았다 마구 뒤흔드는 이유는 모두 돈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같은 목적이 없었다면 이들이 사는 동안 만나야 할 기회는 전무 했을지 모릅니다. 돈 좀 벌어 보려고 그래서 명예도 얻고 사람답게 좀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죠.

 

   그렇다고 우리 사는 곳과 아주 멀거나 가기 어려운 곳도 아니지요. 그들이 원하는 돈도 백만장자가 될 만큼의 일확천금은 아니었어요. 사실 이 부분이 아스라이 저릿해지는 부분입니다. 김일우의 부모인 오영미와 김민구는 말합니다. 주제넘게 분수에 넘치는 돈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 만한 동네에서 식구 살기에 좁지 않은 아파트 한 채 사고 중형차도 한 대 뽑고 기분 내면서 외식도 좀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랍니다. 조금 더 바란다면 보너스와 연말 정산 모아 일 년에 한번 해외여행 정도 추가해 볼까요. 수천 만 원 짜리 명품백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A나 B로 시작되는 외제차를 굴리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호텔이나 콘도, 골프회원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주식으로 갑자기 대박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욕심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부부의 소박하고도 평범한 바람이 슬퍼지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소박하다고 여기는 그 정도, 그 평범함이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평범이란 개념은 대중적일뿐 결코 많거나 쉽다는 뜻과는 전혀 별개지요.

 

   거리에 나가보면 곳곳에 짓는 것이 아파트이고 24시간 달리는 것이 자동차인데 내 집과 내 자동차는 늘 그들보다 작고 형편 없습니다. 어느 개그맨이 그랬죠. 아이 키우는 집에선 월급 받고 아무 것도 안하고 숨만 쉬고 200살까지 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다고요. 요즘처럼 물가가 오른 식당에서는 아이들 데리고 고기 한번 먹으러 나가기도 얼마나 무섭던가요. 지금은 멀쩡하지만 언제 회사가 주저앉아 거리로 나 안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그랬지만 사업하다 한 번 망하면 삼년은 빚 갚느라 아무것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김일우네 가족에 닥친 시련은 서민에서 최하층 신세로 추락하는 보기 좋은 촉매제가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작가는 인물의 이름이 캐릭터와 딱 들어맞게 잘도 작명하신 것 같아요. 김일우의 이름은 어쩐지 한번 바보(一愚)는 영원한 바보일 것 같고 엄마인 오영미와 아빠인 김민구는 말 그대로 쌀이 없고 구직이 어려운 사람들 같아요. 잘 풀렸으면 영리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국민을 구하는 부부가 되었을 텐데요... 설상가상으로 아빠 김민구는 십년 넘도록 일해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중국집 배달부로 전락합니다. 사립학교 비정규직이었다고 해요. 법에 호소해 복직을 하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똘똘 뭉쳐 이미 오래전 해결된 공금횡령을 이유로 사람을 짓밟기만 하네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가진 사람들은 그 잠깐의 미동도 보기 싫고 귀찮은 법이거든요. 내 발밑에서 죽어가는 지렁이 보다는 더러워질 내 구두 밑창이 더 걱정인 것이죠. 어떻게 마련한 구두인데요...

 

   하지만, 지능이 떨어지던 자식을 돈이 없어 제때 치료도 못한 채 입에 풀칠을 면하기 위해 극한 생활전선에 내몰리는 가장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보아온 그림 이라구요? 치매할머니를 모시고 학교를 다니는 소녀가장도 있고 건설현장에서 불구가 된 아버지를 수발하는 소년도 있다구요. 예, 맞아요. 이 소설은 우리와 많이 멀지는 않아요. 너무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더 흠칫하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일우 아빠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들을 학대하는 일만 남게 되었어요. 엄마는 늘 쪼들리는 생활에 성격은 급하여 아들을 바보같은 놈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어요. 평범한 서민에게 가족의 병은 빈곤과 추락을 피할 수 없는 지름길이 되고 맙니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삼대독자 일우인데 그 일우가 바보라는 건 희망을 안주느니만 못한 주었다 빼앗는 더 억울한 일은 아닐까요. 무능력해 보이는 가장 김민구는 말해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세상 험한 꼴 많이 봤다 해도 힘든 건 힘든 거’라구요. 그 말이 왜 그리도 시큰한지 한참 입에 맴돌았어요. 힘든 건 힘든 거라구... 불행의 크기는 그것을 겪는 사람에겐 전부이고 더 할 수 없죠...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힘들어 질까봐 입술을 깨물었어요.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부친의 가게를 물려받아 세오 건어물의 사장이 된 정기섭의 사연은 웃기고도 서글펐어요. 딴에는 대학물을 먹었고 전공이 컨설팅이라고 장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위인이지만 상인회 일에는 물불을 안 가리는 기섭씨 같은 가장은 어쩌면 무능력한 일우 아빠보다 더 지독할지 몰라요. 작가는 기섭씨의 상인회 총무활동을 통해 대형마트의 무차별적 진출과정과 지역상권의 피해상황을 넌지시 고발하고 싶었나 봐요. 기섭씨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시장의 영웅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꼭 요즘 개봉중인 영화 <댄싱퀸>에서 황정민이 우연치 않게 시민을 구하는 덕에 일약 서울시민의 영웅이 되는 과정과 비슷하더라구요. 유머가 잘 믹스된 에피소드였습니다. 살다보면 별 생각 없이 한 일도 마치 정의에 불타는 시민이 행한 개념적 사건이 될 때가 있는 것이죠. 어쩌면 사람들은 늘 시민을 구해주는 슈퍼맨 같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작가는 자신의 손 끝에 마치 고화질의 다양한 카메라 렌즈가 달린 것처럼 행동과 심리를 디테일하게 혹은 대범하게 포착하더군요. 아마 방송 구성작가 출신인 이점을 살린 덕인지 후반부로 지날수록 더욱 사실적 현장감이 빛을 발했던 듯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야기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저를 웃고 울게 한 사람은 네오 프로덕션의 사장 박상운이었어요. 아내된 입장에서 기섭씨의 행보가 매우 ‘섭섭’하다면 박상운 PD의 사회생활은 참 팔자가 센 것이라고 할 밖에요. ‘운’이 필요이상으로 좋았다가 또 억세게 ‘운’이 나빠지는 경우. 늘 그 놈의 ‘운’ 때문에 성패가 좌우되는 사람. 어떤 면에서 작가는 박 PD를 통해 결국 자신이 몸담았던 시사 프로그램 방송 현장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시청자 입장에서 보자면 김일우가 대박을 터뜨릴만한 게스트이고 정기섭이 어리버리한 협찬사라면 박 PD는 마음 급한 연출자인 것이죠.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시청률 지상주의 제작자 이구요. 박 PD가 자꾸 눈에 밟혔던 이유는 순전 한 때 잘 나가가는 PD였기 때문이어요. 그는 사이비 수련원에서 ‘종교의식으로 포장된 원장 교주의 성폭력과 집단 구타 현장을 몰래 촬영’하기도 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원장이 원생을 학대하는 장면을 고발하기도 하여 시사다큐분야에선 스타가 된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 시절 꼴통이라 수없이 불렀던 후배 김상호가 방송국의 갑이 되어 박 PD에게 당한만큼 되돌려 주더군요... 공교롭게도 저 역시 큰 회사에 있다가 나와 그 회사 용역을 수행하는 개인회사를 운영했는데 직원들 월급 주려고 옛날 까마득한 후배 찾아가 굽실거린 적이 있었거든요. 영세한 개인 프로덕션 사정이야 뻔하죠. 드럽고 치사고 목구멍에 욕지기가 수없이 올라와도 그 놈의 돈 때문에 지긋이 참아야 하는 것이죠.

 

   작가는 박상운 PD가 궁지에 몰려 있을 때 무리한 기획을 하게 되는 배경으로 열악한 방송제작현실과 갑과 을 간의 관례화된 부당한 방송시스템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은 시청률 위주의 ‘의미고 나발이고 확 터뜨릴 수 있을 만큼 쌈박하고도 통 큰 협찬사가 붙을 만한 대단한 프로그램’을 원한다는 것이죠. 힘들다고 모두 도둑질하고 사기 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례자를 조작하고 편집을 자극적이게 이어 붙이고 협찬사를 급조하는 등의 제작과정이 꼭 박 PD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소리로 들렸어요. <귀를 기울이면>이 방송국 입장에서 보자면 시사 프로가 사회 곳곳의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서 고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잘못되기까지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잘못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뜻으로도 들렸어요. 지금은 거대한 ‘잘못’, 볼거리가 될 만 한 ‘잘못’을 미리부터 기획해 놓고 그에 맞는 ‘잘못’을 찾으러 다니는 것일지 모른다구요. 이렇듯 방송제작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이 작품 곳곳에 주도면밀하게 숨어 있어요.

 

방송사에서 그렇게 운영을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다. 세상에는 프로덕션도 넘쳐났고 피디와 작가, 촬영기사, 조명기사, 리포터와 그 지망생들은 더욱 많았다. 방송사는 그럼에도 일하겠다는 사람들 중에 구미에 맞게 골라 쓰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칙이고 시장경제의 원칙이었다. 절은 몰랐다. 그래서 중들이 점점 저질이 되어간다는 것을, 중들은 절에 대한 애정이 없어졌고, 책임감도 없어졌다. 먹여주고 사람대접해준다면 교회든 성당이든 갈 판이었다.      -p89


 

   요즘 MBC가 파업 중이잖아요. 물론 소설과는 다른 이유지만 시청자를 위하고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시청률 위주의 방송을 제작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시청자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더군요.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시청자 되기도 쉬운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저만해도 TV 프로 하나 보는 것을 단순한 오락시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송환경 및 프로그램 발전을 위해 어떤 프로를 시청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전보다 똑똑해진 시청자도 많아졌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진 덕에 요즘은 시청자가 비판의 도가니가 되가는 건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한예슬이 드라마 펑크 내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미국으로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때 한예슬 덕에 같은 드라마에서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맨날 밤새던 스탭들이 잠잘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소설에선 제작자 박 PD가 이렇게 말하네요.

 

 

씨발, 어지간한 건 약하다고 컨펌을 안 해줬잖아. 정신과 통해서, 상담실 통해서 정식으로 섭외하려면 돈이랑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서 묻냐? 우리한테 그만큼 제작비랑 제작기간 줘봤냐? 컨펌은 늦게 주지. 걸핏하면 약하다고 엎어버리고 다시 찍으라고 하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어딨어? 그나마 우리가 밤새 뺑이치고 있으니까 사고 안 나고 방송 꼬박꼬박 나온 거야.      -p96

 

 

   아마도 작가는 이렇게 목구멍까지 차올라 꼭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가 봅니다. 제가 다 속이 시원해 지더라구요. 작가는 이슈가 될 만한 기사거리를 두고 언론과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세밀하고 단계적으로 묘사하더군요. 제목만 보면 의혹도 사실로 추정되는 무차별적 기사와 네티즌의 광분에 가까운 집단 심리가 마치 ‘복음이 전파되고 전염병이 옮아가듯’ 퍼트려진다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대회 참가비로 시장 개보수를 하겠다는 정기섭 총무나 장애 아들을 앞세워 상금을 챙겨보겠다는 일우 부모님이나 일단 화제성을 창출해서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려 보겠다는 박 PD의 발상을 아무도 욕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비 윤리적이고 선정적인 도박성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우리는 아무도 그들이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네오 프로덕션 사장도 나름 피디의 저널리즘이 있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도 나름 책임감이 있고 김일우 부부도 간절한 사정이 있는 걸요. 그것이 야바위 대회면 어떻습니까. 전 재산을 걸었다고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사실 시청자인 우리들이야 말로 늘상 극적인 드라마를 기다리고 성공이라는 환타지를 꿈꾸지 않습니까. 제작진과 협의된 어느 정도 위선이나 거짓이라는 것도 알면서 눈물짓고 환호하고 감동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예, 멀쩡한 집안에 멀쩡하게 생긴 소년보단 찢어지게 가난한 중국집 배달부의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소년이 도전하여 우승한다면 더 좋지 않겠어요? 그들이 참가비 열배의 상금을 가져가는 것이 더 공평하고 더 옳은 것이고 더 감동이라 믿지 않나요?

 

 

   우리는 무수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일등의 기가 막힌 사연을 기다리고 그들의 드라마가 승리하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니까요. 감동적인 인생 역전 드라마야 말로 현실에선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두뇌 스포츠가 되었든 춤이 되었던 연기나 노래가 되었든 상관이 없는 것이죠. 중요한 건 어느 서바이벌에서도 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참가자는 등장할 것이고 반드시 우승자는 일우만큼의 상처가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

 

 

 

“삶이 벼랑 끝이라고 느껴지십니까? 더 이상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이제 당신이 인생의 챔피언이 됩니다.
더 챔피언, 그 마지막 게임이 시작됩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 TV속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흔해졌습니다. 이제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쓰리컵 대회'만큼이나 발상이 자극적인 프로는 얼마든지 채널을 돌리면 쉽게 마주치는 것 같아요. 한 달 전 인가, ‘괴물녀’라는 별명으로 일상 생활이 힘든 이십대 여성이 미인을 만들어 주는 프로에 출연했더군요. 사연이 누가 봐도 충격적이고 기구하면 여러 닥터들의 검증을 거쳐 얼굴 및 구강은 물론 체중까지 거의 전신 성형을 무료로 해주는 형식이었어요. 너무 못 생겨서 저 정도면 해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저도 모르게 생기더군요. 시청자들은 그 ‘괴물녀’가 시간에 걸쳐 점차 괴력의 ‘미녀’로 변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 소설 말미에 박 PD는 일우의 부모에게 일우의 갱생프로젝트로서 재활과정을 담아 이른바 ‘서바이벌 휴먼다큐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의 프로를 연출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른바 바보가 똑똑해지는 과정이나 추녀가 미녀가 되는 과정이나 핵심은 남의 불행을 자세히 구경하며 내 처지를 위로 받고 그들의 성공을 확인하며 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청자와 참가자간 사연거래의 맥락은 같다고 봅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핵심에 돈이라는 자본과 성공이라는 욕망이 은밀히 숨어 있어요. 돈이 있어야 똑똑해질 수 있고 예뻐질 수 있는 것. 그래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수 있는 것. 그러니 인생을 바꾸는 건 돈이라는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죠.

 

 

   소설에서 가장 권력자로 등장하는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박 PD에게 마지막으로 ‘판결이 어떻게 나든 결국 힘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충고합니다. 글쎄... 저는 이 소리를 끝까지 듣기 싫었던 주인공 일우가 그 옳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듣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일우가 들었던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 였고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말하지 않고도 전해주는 소리였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 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어떻게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온 일우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기 싫었던 것일까...

 

 

   ‘소리 없는 소리’란 어쩌면 처음부터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요?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란 어쩌면 일우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닐까요? 아, 그렇담 우리가 들어주지 않고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서번트 증후군은 좌뇌가 발달이 되지 않은 것의 보상으로 우뇌의 특정 부분이 발달하게 된 결과 청각 같은 특수한 재능이 천재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래요. 우리는 말로는 다 듣고 귀로는 모두 이해하는 듯이 말하지만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맘에 드는 것만 이해하면서 편하게 살아왔네요. 이 소설은 사회, 가정 곳곳에서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환기시킵니다. 이미 들었으나 오해하고 잊어 버렸던 이야기, 반쪽 짜리 진실만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쩜 소설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지만 작가는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주장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 해요. 비록 버스 정류장은 아니지만 소설을 정류장 삼아 가만히 기다려 보고 싶어요.... 소설 속 이야기들이 한자 한자 말을 걸어 오네요. 지나가는 바람처럼 촉촉한 빗님처럼. 이제야 알겠어요. 소리란 바로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느끼는 것임을.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마음이 이렇게 들리고 진심이 알아진다는 것을. 어때요? 나는 안 보이는 당신을 듣습니다. 당신도 들리나요? 혹시 우리에게도 천재적 재능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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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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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아니어도 재차 옥수수와 닭의 의미를 해석하고 김영하의 작품세계로부터 감탄 혹은 비판을 할 것이다. 나 역시 지난 페이퍼에 이미 김영하만을 언급했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우수상작만 모으고 싶었다. (하나로 모으자니 너무 길고 이미 쓴 걸 줄이자니 번거로와서...) 그런데 나는 나가수나 오디션 프로의 영향 때문인지 이 책에 실린 우수상 수상작에 순위를 매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 심사위원들의 변을 보면 하나같이 마지막까지 김숨과 김영하를 놓고 고민을 했다고들 하는데 수록 순서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가나다 순도 아니고 서사의 흐름을 배려한 편집자의 순서도 아니고 무작위 제비뽑기 순서도 아닐 것이다. 읽을 땐 순서가 의미 없었는데 정작 우수상작만 따로 글을 써보려 하니 불현듯 순서의 의미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아마 등단연도 순인 듯한데 나는 내 맘대로 순위를 정해보았다. 순전 내 기준이고 내 기분 대로이므로 이야말로 의미는 없다.

 

 

 

 

1. 김숨 <국수>

 

 

 

   김숨은 작년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소설엔 유난히도 국이나 탕을 끓이거나 생선을 튀기고 굽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풍성한 식탁이 아니고 가난과 질병, 죽음과 생계의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편린 속에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아무리 하찮은 생명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삶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서늘하게 깨우치게 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이 숨 막히는 현실과 숨 쉴 틈 없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 생명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은 아닐까를 조용히 느끼게 된다. 이번엔 국수 밀가루 반죽을 하는 시간이 고통스럽게 전개되는 서사를 다루었다.

 

 

   마흔셋의 석녀가 재취로 들어와 자기 속으로 낳지 않은 의붓자식을 기르면서 수없이 치대던 밀가루 반죽의 의미는 이미 맏딸이었던 야박스런 화자가 계모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비로소 원망의 국수가 아닌 화해의 국수로 변모한다. 화자는 밀가루를 양푼에 개고 간을 하고 반죽을 하고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양념장을 만들고 국숫발을 뽑고 끓여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하는 동안 한 많은 한 여인과 자신의 일생을 연결 지으며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을 가진다. 뽑아놓은 국수 한 가닥이 꼭 ‘저기 당신과 여기 나 사이에 놓인 연줄’만 같아서 도로 뭉쳐버리고 싶지만 시간을 견뎌내고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어머니 앞에 국수를 내놓는다. 이야기의 속도감이 부족하고 서사의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 하였지만 기껏해야 멀건 국수 한 그릇 만들어 내놓는 일을 이렇게 끔찍하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서글프고 아프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어 가장 많은 공감이 갔던 작품이다. 아마 한번이라도 국수를 끓여 본적이 있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그러 할 것이다.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p244

 

 

   오래전 젊었을 때 생선을 갈아 어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 절대로 그 어떤 어묵도 안 드신다는 어르신이 생각난다. 어떤 한 가지 음식의 공정을 아주 긴 시간 반복해서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세월을 가진 사람들은 달인처럼 아마도 그 음식의 자타공인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세월이 그 음식만을 하도록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아니 그 음식만이 그 세월을 견디는 시간이었다면 그는 세월이 원망스러울까 음식이 원망스러울까...... 김숨은 세월도 음식도 소중한 자기 생의 일부분이었고 그렇기에 국수를 지겹게도 만들어준 그분의 일생도 소중했다고 회상한다. 늘 그렇듯 그 고마움을 느낄 때란 그를 잃고 나서이다. 아직 삼십대 후반인 그녀가 무에 그리 깨우친 삶의 이치가 많은 것인지 나는 그것이 소름끼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번엔 당당한 대상의 수상 소식을 기다린다.

 

 

 

2. 조현 <그 순간 너와 나는>

 

 

 

   이 작가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소설집에서 아주 난해한 단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라는 단편인데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2010, 현대문학)에 수록 되어 있다. 그때도 김숨, 박민규, 권여선, 김경욱 등과 같이 선정된 것이었는데 내 기억으로 그들 소설 중에서 전혀 서사자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어느 정도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단연 이야기가 탄탄한 구성이 재미난 소설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심사위원은 쓸데없는 에피소드가 많아 다소 구성이 산만하다 하였지만 분량도 그렇고 외려 장편으로 구성한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름 상상을 해보았다. 나이 상으로도 같은 연배이고 나 역시 비슷한 시기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어린 시절에 처음 보았던 서울의 삼십년 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지라 공감도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시골에서 상경해 80년에 왕십리역 근처로 이사 온 화자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겠다는 각오로 끝맺는다.

 

 

살아 남아야 생을 바꿀 수 있고, 정말로 간절한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다.  - p367

 

 

   왕십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자는 다 가진 것으로 보여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친구 민혁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에 가면서 당시 미래를 엿볼 줄 알았던 무당집 딸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무당집 딸과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불행의 사연을 간직하게 되는데 그중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는 살아남는 것이야 말로 어떻게든 운명을 바꿀 기회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무당집 딸의 예언대로 내일 죽는 운명일 지라도 오늘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네 서글픈 운명이라고 들려왔다. 우수상 수상 작가들 중에는 가장 늦게 등단한(2008) 작가로서 아직 장편이 없는 듯 한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3. 김경욱 <스프레이>

 

 

 

   이 작품은 읽는 내내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연상시켰다.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수집하며 소통 불가한 이웃들을 이해해보려는 한 남자의 집착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쓰레기 봉투가 이번엔 택배상자로 바뀌면서 단순한 실수가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와 연결되어 가는지 서사를 흥미롭게 구성하였다. 다만 그 구성이 흡사 기술자가 조립해 만든 레고 작품처럼 딱딱 들어맞도록 너무 완벽했다는 것이 주제가 약하다는 식의 심사평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이 백화점 구두잡화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는 것. 단골가게의 점원이 하도 손님의 발을 만지면서 늘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다 보니 집에서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기억났다. 화자이며 주인공인 구두점원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며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트레스의 탈출구로 남의 택배상자를 택했다.

 

 

잘못 들고 온 택배상자를 뜯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p182

 

 

   이 작품의 매력은 도대체 끝이 어떻게 될지 결말을 향한 매순간마다의 긴장감인 듯하다. 김경욱은 다른 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꾸준히 오르는 작가이다. 장편 <동화처럼>에서 실망한 기억이 있어 예리하다는 소설집을 아직 넘겨보지 않았던 터였다. 페이지의 가독력이야 김영하 못지 않았는데 결말이 좀 새롭지 않아서 였을까.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말보다는 신선하지 않은 결말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거장들은 대부분 차라리 새로울 수 없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결말을 맺으라고 했던 것 같다. 독자들은 결말에서 만큼은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난 결말을 택하고 결론짓는 것은 모두 작가의 한계치를 상징하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새로움만을 지향할 수도 없고 또 새롭다 예상하여도 작가의 생각만큼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새로움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어쩌면 조금 덜 소설적이지 않았나, 감히 판단해본다. 그런데 또 난 이런 짜 맞추어진 소설이 늘 즐겁고 짜릿한 독자였다. 기대한 대로 끝나주는 것도 좋더란 말이다. 어떤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나는 어디서 생겼을지도 모를 작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김경욱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4. 최제훈 <미루의 초상화>

 

 

 

   김경욱과는 반대로 이야기의 구성은 퍽이나 흥미로와 좋았는데 너무 소설적이어서 좀 그랬던 작품이다. 최제훈은 어쩐지 이야기를 경영한다는 느낌이 가끔, 든다. 그것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결과적으로 높아 보이는 완성도가 소설의 신비감을 떨어트린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기인의 풍모를 하고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어느 화가의 고백과 그 초상화에게 여자 친구의 그림을 부탁한 대학생의 사연이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지다가 마지막 초상화 그림에서 합쳐지는 구성이다. 화가의 궤변과도 같은 예술 사랑과 인간 사랑의 의미를 읽어가다 보면 예술과 사랑의 합일을 이루었다 생각하는 화가의 일생이 위대해보이기는 커녕 한없이 비루하고 이기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마지막 여자 친구의 초상화에서 화가가 발견한 생의 진리(?)를 똑같이 발견해 내는 주인공의 착각은 왜 화가 나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술 하는 것의 의미를 죽는 날까지 정립하고 그것을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든 못 벌 든 자기예술의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삶는 일은 생존만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생존의 이유일지 모른다. 최제훈은 자신이 글 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작가는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것 같고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늦게 시작한)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는 다름 아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이 소설의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미루의 초상화'는 예술과 사랑, 이상과 현실이 모두 담겨있는 자기중심적인 예술의 총체, 즉 예술가의 인생이 응집 축약된 유기적인 결과물인 듯하다. 예술은 어쩌면 무언가를 죽여서 녹여낸 신비하고 야릇한 생명체 일지 모른다. 비록 생과 사라는 폭력을 녹여낸 것이지만 또 다른 생명을 위무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할 뿐인 것이다. 소설가 역시 어떤 말 안 되는 죽음과 기가 막힌 고통을 빚어낼 지언정 이야기로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려선 안 될 것이다. 최제훈은 그것이 자신에게 소설 쓰는 소설가임을 이해시키는 방편은 아닐까.

 

 

 

5. 조해진 <유리>

 

 

 

   이 작품은 이름이 한유리인 한 대학강사의 유리같은 인생을 위태롭게 조망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유리로 상징되는 상처의 표상을 너무나 강렬하게 묘사한 덕분이지 서사가 묻히는 느낌을 받았다. 즉,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곤란한 심경이다. 남는 것은 상처의 내용이 아니고 상처의 외면, 즉 상처의 형상이 제시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읽는 내내 사방 유리에 찔리고 유리를 밟는 것과 같은 ‘통증의 촉수’를 세심하게 감지할 수 있어서 독서 후 불쾌한 느낌만은 최고로 생생했던 것 같다.

 

 

   K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는 강사 한유리에게는 열 네 살 이전의 기억이 모두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에서 살았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이 유리도시에서 깨달은 삶의 진리는 아마도 ‘자신이 깨지지 않으려면 상대를 깨트려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인 듯하다. 그러나 유리에 짓밟히면서 얻은 교훈도 그녀를 유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진 않은 듯했다. 그녀는 강의 전담 계약직 교수를 채용한다는 학교 공고에 불안을 느끼고 시답지도 않은 한참어린 제자와 도피의 여행을 떠나고 만다. 그녀에게 현실은 여전히 ‘입구도 출구도 없는 밀폐된 유리알 속’인 것이다.

 

 

짓밟히지도, 짓밟지도 않으면서 그 모든 곳들을 통과하려 했으나 돌이켜보니 세상은 늘 상처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유리일 뿐이었다. 상처가 남아 있는 한, 완벽한 망각은 불가능했다.    -p284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 전반을 은밀하게 흐르던 여성의 피해의식이 지나치게 과하게 심층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논리적으로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 한유리의 어린시절 상처가 너무 특수화(?)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유리의 아픔과 주인공의 아픔이 일체되지 않는 괴리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번 읽어보고 싶다. 중간 중간 ‘통증의 촉수’를 자극하는 문장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6. 하성란 <오후, 가로지르다>

 

 

 

   이 작품은 거의 대상을 수상할 뻔(?) 하고도 마지막 서사의 한 자락에 어떤 작가의 고집 때문에 급격하게 서사가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 된 밥에 코 빠트린 격으로 화가 나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심사위원 중에 여자가 뺨을 맞은 이유가 무엇인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분이 있었는데 나 역시 그 이유를 왜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장 짜증이 났다. 무언가 대단한, 아니면 어이없는 이유는 있겠지 하고 끝나는 느낌이 배심의 클리세 처럼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하성란의 작품에서는 독자와의 소통, 이해보다는 자기만의 주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무언지 모르게 이 작품이 그랬다. 작가의 이유야 너무나 분명하게 있겠지만(큐비클은 원인 따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이유가 내게는 아픔이었네... 하듯 이번엔 그렇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80년대 상사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십대 중반의 미스 김, 이제는 갱년기를 앞두고 신입사원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말단 회사원이다. 작가는 신도시와 구도시의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 이미지를 큐비클로 조형화하고 이를 삼면이 칸막이로 막힌 사무실내 구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자신을 알릴 유일한 방법으로 내세운다. 큐비클 속에서 싹트는 동지의식을 면밀히 투시한다. 그 비인간적이면서 별다를 것 없는 조직의 에피소드가 이 소설을 이루는 큐비클의 조각들이다.

 

 

맞습니다. 저는 길을 잃었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p220

 

 

   현실의 큐비클은 너무나 쉽고 너무나 분명하고 단순해서 삶의 길을 잃었다는 역설이다. 이는 바닷가에서 사람이 빠져서 찾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바닷속은 그 컴컴한 물길이 들여다보이지 않기라도 하는데 큐비클은 고개만 들면 훤히 속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초반, 중반의 기대감이 후반부에서 지속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밀착 취재한 듯한 느낌의 하성란식 치밀 묘사는 소설은 결국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꿋꿋하게 알려준다. 올해는 제발, 에이와는 다른 소설을 만나고 싶다. (A도 독자를 배려하는 소설은 아니지 않나......)

 

 

 

7. 함정임 <저녁식사가 끝난 뒤>

 

 

 

   오래된 지인들을 초대해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난 후의 소회를 담담히 적어 내려가는 류의 소설은 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교수나 의미 있는 직책에 오른 여성작가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식사를 준비하며 과거를 회상할 것이고 반드시 사연이 될 만한 누군가가 표면에 등장할 것이고 그와의 인연에 놓인 지인들이 하나둘 나타날 때 화자의 심경변화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불같은 청춘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만한 지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떠드는 자리는 누구를 위한 모임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이며, 어떤 이를 위한 시간일 것인가.

 

 

   내 기억으로 이들은 대부분 이제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인들의 위선과 가식에 실망을 하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났던 것 같다. 인상적이었던 건 화자인 순남씨가 여행지에서의 사진이나 은촛대, 괘종시계, 색소폰 등의 소품과 관련된 자기 사연을 간간히 믹스하였다는 것인데 초반부 무언가 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던 은촛대가 나중에 힘을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하게 사라진 것이 서운했다고 할까. 이야기는 갑자기 나만 몰랐던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겠지만 그렇다고 앞부분에서 페이크인척 하였던 자기 집중의 서사가 결말을 위한 설득을 가지진 못했다는 점에서 좀 뜬금없다는 기분이었다.

 

 

   또 하나 이 소설은 순번 상 마치 나가수 1번 가수의 노래가 7번 가수의 노래를 듣고 나면 대단치 않을 경우 기억에 가물가물한 이치와도 같았다. 무언가 진부하다는 느낌도 서사가 갈피를 못 잡았다는 느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우수상 수상작 중 꼴찌를 주었다. (아...어쩐지 인순이가 꼴지한 느낌은 무엇인가...)

 

 

 

 

 

    아쉬운 게 있다면 지난번까지 우수상 수상작도 (뒤편에)따로 평이 더해졌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김영하에 치중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건 평가식으로 글을 모두 적고 나니 또 대상은 김영하가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등은 일등의 실력 때문이 아니고 일등을 할만한 이유가 있을 뿐...) 나가수 식(자문위원식)으로 말하자면 함정임과 하성란은 주제를 상징화하는 무대의 관록을 엿볼 수 있었고 김경욱과 최제훈은 치밀한 구성으로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고, 조해진은 섬세한 감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묘사의 절정을 보여주었고, 조현은 서사에 본인의 이야기가 녹아든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고, 김숨은 소름끼치는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감동을 선사했다. 모든 작가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마치 심사위원이나 된듯이 우쭐하구나 ㅋ)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분명한 건 내가 그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고 그저 그런 오늘, 어제와 달라질 것 없는 오늘을 보내면서도 새로운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당신들이 피할 수 없는 문학의 ‘큐비클’이고 안 먹을 수 없는 ‘옥수수’이고 매번 기다려지는 ‘국수’이고  입출구 없는 ‘유리’알 속이고 30년 전 ‘왕십리’이고 기다려지는 ‘택배’상자이고 살아있는 ‘초상화’이고 일 년에 한번 있는 ‘만찬’이다. 이상으로 다소 빚진 심정이었던 이상문학상의 리뷰를 마친다. 나의 이상은 언제쯤 날개를 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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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잘 읽었습니다.
전 언제부턴가 더이상 김영하는 읽지 않지만, 이 페이퍼를 보니 김경욱은 끌리는 걸요.
근데 말이죠, 근데 말이죠~
김경욱 얼굴이 윤상 버젼으로 나왔어요.
이 말 들으면 김경욱이 승질 낼까요, 아님 윤상이 승질 낼까요?
옥수수 먹고 싶어요.
목욕 가야 하는데,
목욕 가면서 옥수수 파는데 없나 찾아보려구요~^^

노이에자이트 2012-01-2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의 초창기 화제작 '투견'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왠지 묘한 분위기...개도살하는 장면을 정말 실감나게 묘사했어요.

작가 나이 삼십대 후반이면 인생에 대해 충분히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닐 나이라고 봅니다.작가가 인생을 보는 통찰력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듯해요.

2012-01-3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2-01-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난 딱 김영하만 읽었어.
재밌더만. 허전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영하답다~는 느낌이었어.

니가 매긴 순위에 따라 다음 작품을 한번 읽어볼까?
나도 우수상의 순서가 무엇일까.. 의아해 하다가 말았음. (난 요렇게 포기 잘함)
맨날 의전을 하다보니 순서가 중요하게 생각되기까진 해.

함정임을 인순이에 비유했네. 좋아했던 작가인데^^

그나마 난 요즘 조금 정신이 나는 시기야. 바쁜것 좀 끝났고...
이제서야 2012년을 시작하는 느낌^^
직장녀는 인생의 촛점이 그저 회사라우~ ㅋ


아이리시스 2012-01-3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도 공지영 만큼이나 어색하네요, 저 자리가ㅋㅋㅋ
저는 매번 욕심만 내고 문학상 수상집을 잘 못 읽어요.
사놓고 몇 년 된 것도 있고요. 이거 너무 재밌어요. 우수상 수상작들까지 분석해주시고^^
진짜 한 권 읽은 듯한 느낌이네요.
저는 문체가 좋은 작품이 좋더라고요. 내용까지는 아직 잘 못 보는 것 같아요.

여기도 함정임쌤이 계시네요. 제가 4학년 때 저희 학교로 오셔서 소설이론과 창작을 강의하셨어요.
바로 그 다음해에 졸업을 해서, 제 지도교수님은 강은교 쌤이라 잘은 모르지만요.
그래서 매번 반갑네요. 그런데 몇 번째 우수작인 것 같아요.
 
침묵 입문 - 말 많은 세상에서 말하지 않는 즐거움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말 버리기 연습

 

 

 

   짧고, 쉽고, 분명하고, 유익하고. 한마디로 이 책은 오며 가며 펼쳐들 수 있는 책이었다. 


   류노스케 스님의 책은 <생각 버리기 연습>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을 말할 땐 은근히 기대만큼 별로였다는 뉘앙스의 평을 할 때가 많은데 내겐 의외로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매 순간마다 하고 있는 것에 더 집중하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의 메시지를 거의 잡념을 버리고 오감이 느껴지는 바를 더 생생히 체감해보라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 (예를 들어 생각에 사로잡혀 밥을 먹으면서도 전혀 밥맛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을 청산 하라는) 그것이 더 인생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충고가 나같이 생각만 끊이지 않는 사람에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말이 쉽지 나조차도 알 수 없게 떠오른 생각을 무슨 수로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잊으려고 하면 더욱 생각나는 헤어진 사람처럼 생각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허나 힘겹게 버리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하면 버려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설파하는 것은 제대로 솔깃한 주장이었다. (가만보면 사람을 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버려질 수 있는 과정을 말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생각 버리기 연습>의 연장선상에 있다. 생각 버리기가 아니라 말 버리기 연습쯤 될 듯하다. 누구나 생각을 버리고, 화내지 않고, 버리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처음부터 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有이기 때문에 자신처럼 無를 지향할 수 있다 말한다. 하지만 운이 좋아 노력한 대로 無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有는 존재한다 말한다. 생각을 버린다고 말을 아낀다고 생각이 사라지고 말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실용서에 가깝다) 아무튼, 이 책은 <생각 버리기 연습>보다 유연하고 부담이 없다. 큰 기대 없이 카페에 앉아 두어 시간 들추어 볼 수 있는 미덕을 가졌다. (그러므로 제목만큼의 심오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자기농도의 희석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용어는 ‘자기 농도’이다. 와인으로 치자면 바디감이다. 당연히, 묵직한 풀 바디감을 선호해 온 나였다.


‘나 자신’에 연연하며 ‘자기농도’를 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각자 내뱉는 지루한 얘기처럼 인간관계도 별 볼일 없어진다.    -p15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진심으로 자신을 말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성이며 그러한 마음만이 상대에게 잘 전달 될 것이라 믿고는 한다. 거짓된 마음 없이 내 심경을 모두 전한다면 상대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전하여지는 나 자신에 대한 자기농도를 ‘엷게’ 만들어야 ‘맑고 투명하게’ 살면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고 충고한다. 인생을 맛있는 과자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재료를 아주 조금만 넣어도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책의 제목이 되고 있는 침묵은 실상 나에 대한 침묵, 나를 말하는 것에 대한 침묵이다. 나 자신에 대해 조금만 덜 말하고 조금만 더 옅어지라는 것이다. 흠칫흠칫 자꾸 호흡이 멈추었던 것은 아마도 나라는 사람이 나 자신을 말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내 생각을 말하고 전달하는 방법과도 연결되었다.


   남에게 생각을 말할 때, 특히나 글로 전달하려고 할 때 나는 어지간한 밀도이하의 글은 아예 쓰지 않으려 한다. 사유가 헐렁한 것은 무언가 덜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초창기 리뷰 쓸 땐 생각도 충분히 하고 그 생각을 모두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부부싸움을 할 때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내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설명하면 할수록 상대는 더욱 들리지 않는 것 같은 경험...나중에는 아예 같은 시작이 될까봐 설명을 거부하던 시간... 살면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나는 침묵이라는 카드를 써먹으며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보면 말 안하고 견디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겐 조용히 침묵하는 것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이는 모두가 자기 잘난 병에 걸린 사람들의 욕망이요 분노요 어리석음이라, 저자는 타이른다. 자기 색깔이 너무 짙고 강하여 발생하는 피곤함이라는 것이다.


 

비난으로부터의 자유

 

 

   저자는 특히 트집이나 불평, 비판이 실은 자기 만족을 위한 일이므로 일절 삼가라 말한다. 상대의 행동이나 말에 트집을 잡는 것은 속으로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불과하며 상대를 위한답시고 솔직함을 드러내는 일도 자기 농도를 높이는 일에 불과하다고. 모두의 발전을 위해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도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건져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정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역시 자의식 과잉이라는 독소 때문이라고. 이어지는 습관적인 사과 또한 순간을 모면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위선일 뿐 자신은 변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라 일갈한다. 논쟁으로 상대를 이기려 하는 것도 상대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천박한 욕망의 일환이라 꼬집는다. 그럴듯한 논리로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런 당신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뜻이라 말한다. 한마디로 건전한 비판이란 없으며 비판은 애초부터 모두 불건전하다는 식이다.

 

비판이란 자신이 멋지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을 그럴 듯하게 아닌 척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이란 이름을 빌려, ‘나 자신’이 가진 아우라를 드러내려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또 자기 농도가 진해지는 것을 피 할 수 없다. -p76

 


 

   흔히들 우리는 남을 비판할 때 그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라며 혹은 학문적으로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며 아니면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며 자신의 비판이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비판에 상처받고 흥분하는 일을 우스운 일로 여기려는 경향들도 있다. 서로서로 이렇게 비판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 나는 비판받지 않기 위해 완벽한 글을 써보려고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나는 비판의 내용보다 우선 내가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음에 충격을 받고서 며칠을 멍했던 기억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비난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일이라고. 즉 무엇을 하든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부처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예전부터 말해온 것이고, 지금 새삼스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도 비난을 하고, 말을 많이 해도 비난을 하며, 조금만 말해도 비난을 한다. 이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을 사람은 없다.”   -p127

 

무릇 비난에 대해 일일이 화를 내거나 상처를 입는 것은, ‘내가 이만큼 잘하는데 비난 받을 리가 없지’라는 기대와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와 환상도 사실은 삶에 대해 유치하게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p128

 



   아... 도대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만큼 잘하는데 비난 받을 리가 없지’... 왜 이 대목이 목에 가시처럼 커억 걸리는 것일까. 나는 혹시 이렇게 까지 열심히 진심으로 썼는데 누군가 나를 비난하진 않겠지... 내 진심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겠지...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살면서 비난의 면역력을 높이라고 말한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듯 자신을 보고 막 일어난 감정을 관찰하여 감정이 발화한 지점을 집중해 응시한 후 그것이 나를 관통해 흘러가게 내버려 두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침묵수행법은 일종의 명상법이기도 한데 자기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기분을 명상으로 요리하는 방법을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다. 당장 따라 하기만 하면 집착이 줄어들고 자기 농도가 낮추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차분히 반복해서 읽다보니 가능도 하겠다 싶었다. 


    만약 지금 화가 났다면 화가 일어난 그 지점을 집중해서 응시해 보시라... 그리고 욕망의 더러움, 질투의 유치함, 분노의 어리석음... 욕망의 바보, 질투의 멍청이, 분노의 불구...이렇게 여러번 되뇌여 보시라. 어떤 나보다 형편없는 사람(예를 들면 실력도 꽝이고 인간성도 파이고 게다가 얼굴까지 나보다 아닌 하하하)이 어느 날 갑자기 나보다 잘되어 유명세를 타고선 떼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나는 지금 그 사람이 몹시 부럽구나...나는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한 내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하는구나... 나는 지금 그 사람보다 내가 무엇이 못났는지를 분통터져 하는구나...하면서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투시해보시라. 다른 누가 지적해서가 아닌 내게 일어난 내 감정을 내 스스로가 관찰하며 진단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견뎌낸 다면 흥분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저자는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오는 이 과정이 집착을 버리는 명상의 시간이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쓸데없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초조한 마음으로 나를 말하는 것에 에너지를 덜 쏟게 되고 자연스레 자기 농도가 낮아져 상대가 편안하게 느낀다고 한다.

 

 

   달리 보면 침묵하기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나를 이기는 자세로 여겨진다. 욕망에 휘둘리는 자신을 구속해 자기농도를 흐리게 한 뒤에 이야기도 몸짓도 느리게 한다면 혀로부터 오는 재앙을 막을 수는 있다는 것. 화법으로는 애매하게 부정하는 화법 - 글쎄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런 경우도 있었군요. 어떻게 된 거 였더라. 그래요? - 와 같은 아가씨 화법이 서로간의 상처를 줄일 수 있다는 부분에선 박근혜가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금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린 대부분 침묵해야 할 때 나서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우를 범해왔으니까. 그러나 책이라는 것이 이 책을 읽을 땐 이 책이 모두 진리이고 정답이다. 그것은 리뷰를 작성하는 동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지식들을 내재화하고 새기면 되는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 다음 불교에서 말하는 십선계를 적어본다. (세속에서 선행을 쌓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열 가지)

 

 

불망어 (不忘語,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불기어 (不錡語, 현란한 말을 하지 않는다)

불악구 (不惡口, 험담을 하지 않는다)

불양설 (不兩舌, 이간질을 하지 않는다)

불살생 (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

불투도 (不偸盜, 도둑질하지 않는다)

불사음 (不邪淫,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하지 않는다)

불탐욕 (不貪欲, 욕망을 억누른다)

부진에 (不瞋恚, 분노를 억누른다)

불사견 (不邪見, 그릇된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

 

 

   이중에 직접적으로 말과 관련된 것이 네 가지나 된다. 다른 것도 욕망이나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할 수 있고 그릇된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사실상 7할이 말이요, 입이요, 혀이다. 입하나만 잘 다스려도 인생이 평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선 현란한 말이 제일 걸린다. 사전을 찾아보면 ‘현란하다’는 것이 ‘시나 글 따위에 아름다운 수식이 많아서 문체가 화려하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수식이 많다고 모두 화려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수식을 하지 않는다면 화려해질 확률은 줄어든다. 이번 책을 통해 ‘침묵’과 ‘현란’사이를 조심히 왕복해본다. 오가는 여정이 그럴듯 해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지도만큼 쉬워 보이진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늘 그렇듯 다음은 실천인 것이다. 나를 좀 줄이고 수식을 덜어 보자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토록 짧은 리뷰에 성공을 했다... 웃기지만 조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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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1-2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시는 말씀들이 모두 저에게도 상당부분 해당되는 말이라, 읽으면서 마음이 뜨끔뜨끔합니다. 새겨들어야 할 좋은 말이 많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2-01-2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선계라 좀 뜨끔한 말이네요.과연 저대로 살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보물선 2012-01-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트에 <굿바이 카뮈>가 있네?

선물받아 읽고 있는 책인데
도무지 책표지가 너무 맘에 안들어.
초등3학년용 책 같아.
나름 철학책인데 표지가 좀 우아~했으면 ㅋㅋ
간만에 달력종이 찾아서 책한번 싸봐... 우...ㅅ ㅅㅣ...

보물선 2012-01-27 15:30   좋아요 0 | URL
내가 오늘 미투에 이상문학상 표지 이야기 올렸는데!
맘이 통했어~

꽃도둑 2012-01-2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농도를 엷게 만들라고 하셨다고요?...그러다 물처럼 되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인간이 될런지요?...ㅎㅎ
공자께서 말씀하셨지요. "모두가 좋다고 하는 사람을 경계하라"
저는 공자님 말씀에 한표!ㅎㅎ
저자 이 분의 말씀은 다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 서면 자기농도를 엷게 만드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하루에 수십번도 짙어졌다 묽어졌다 하는데....(나만 그런가?)
이론과 실제의 괴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하는데..
그래서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책이 필요한 거 아닌가 싶네요..^^

반딧불이 2012-01-2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이 금이 되기는 커녕 싸움이 되는 일이 많은 저도 뜨끔하는 글이군요. '인생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양념을 조금만 넣어야'한다는 말씀 올해보터 명심하고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