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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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강렬합니다. 색상이 진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도 인상은 강렬했어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저자가 여러 방향으로 에둘러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 핵심을 전달하는 어법이었습니다. 인문서를 읽다보면 보통 처음에 정의를 하고 부연 설명을 하거나 반대로 설명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결론을 내는 방법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방대한 다른 이야기로만 중심을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놀이기구로 말하자면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전체를 둘러보는 식의 투어형 탑승기구를 상상하게 됩니다. 모두 둘러보았더니 출구에서야 모아진 하나의 그림이 남겨지는 것. 여행은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습니다. 호흡도 길고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들었다고 꼭 끝에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진 않은데 그 하나의 그림을 무언가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해설이 참 고맙더군요. 평소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졌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독자에겐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저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1979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주제를 미리 소개하는 세 차례 강연 모음집입니다. 강연은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어체에다 설명위주로 구성되었어요. 강연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출간되기 전에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원저 못지않게 자주 인용되며 경제사회학 분야를 비롯한 여러 강의와 세미나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원저는 너무나 방대하여 일반 독자외에 전문가로서도 힘겹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프랑스 역사학자인데 15-18세기 세계 경제사를 30년에 걸쳐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30년 세월의 결론을 그려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저술 하는데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저자는 1985년 사망했는데 그렇다면 40대 후반부터 인생 말년기를 통털어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집요하게 천착한 것이 됩니다. 바로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역사가’였다는 것이 이 책을 꿰뚫어보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말합니다. 아주 핵심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전제조건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거의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것, 인간의 명료한 의식 밖의 역사, 인간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 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 같은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보았어요. 예를 들어 화폐와 도시는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뼈대를 이룬 구조물입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표층의 역사’가 아니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좀 섬직한 이야기도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 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존재이지만 역사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 200년, 10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기나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뿐. 자본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 언제를 정확하게 말하려면 인간 생활의 변화부터 포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14-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400-500년 동안 유럽에서의 경제를 해부했어요. 이 책이 의미 있었던 건 현재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뉴욕 이전에 서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흐름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그 시기 서유럽을 살펴보았더니 맨 밑에 물질생활, 그 위에 시장경제, 그리고 맨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구조를 발견했어요. 400년 이상 서유럽에서 장기 지속했던 이 구조의 특징은 바로 상업자본주의의 주된 특징들(운송, 상인, 화폐, 무역의 역할 등)이었고 이 오래된 역사가 사실상 자본주의를 탄생케 하였다고 본 것이죠.

 

당시 교환메커니즘은 중국이나 이슬람등 유럽 외에도 있었지만 거래소와 다양한 신용 형태같은 우월한 장치와 제도 덕분에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유럽경제가 다른 곳보다 앞서 있었다고 합니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이 슬프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는 구별되는 시대의 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늘 역사가들이 무대의 중앙에 배치했던 주제이잖아요. 브로델은 역사가로서 애석한 점이 바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않는 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최하층에서 자본주의 실체가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니라 최상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장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아니라 독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일어난다고 보았어요. 장기 지속하는 역사를 보았더니 자본주의는 결코 경쟁에 바탕을 둔 게 아니라 경쟁을 없애는 반시장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반대되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늘 자동반사적으로 시장은 경쟁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외워왔으니까요. (그런데 독점을 자본주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요즘 동네빵집을 잠식하고 있는 대기업 제과 프랜차이즈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독점으로 시장을 장악한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수직적 위계의 교환의 세계에서 상인자본가들은 선주이면서 보험업자이면서 대부업자, 차입자, 금융가, 은행가이기도 했어요. 한편 농장의 경영주이기도 했죠. 외려 하층은 전문화 되어 있는 반면 최상층은 전문화가 거의 없어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손에 자본을 손에 쥔 상인들의 기득권이 곧 선점효과였고 그것이 전문성 없이 유지되어온 배경이었어요. 당시 원거리 무역이 일어나면서 자본가들은 그들이 축적한 자본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해당 시대의 굵직한 국제사업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과정은 곧 최상층의 상거래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브로델에 의하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경쟁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데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본질적 요소인데 이 ‘불평등의 힘’, ‘소수 특권층의 힘’은 단지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으로 뻗어 나간다는 게 자본주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운 좋게도 전 세계가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어야 하는데 영국은 바로 그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안팍으로 갖추어졌기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나서 기초적 경제의 힘과 활력이 넘쳐났고 그러한 배경이 산업 자본주의를 받쳐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당도하는 ‘밤의 손님’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좋아서 하고 싶다고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역사가는 ‘왜?’라는 문제보다는 ‘어떻게?’라는 문제를 더 편하게 접근합니다. 또 커다란 문제의 근원보다는 결과를 더 잘 알아 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역사가는 더욱 더 그 근원을 찾는데 열광합니다. 비록 그러한 근원들이 역사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자주 비껴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p94


역사가라는 직업이 원래 유럽에서 발달했잖아요.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는 건 항상 자신들의 과거였구요. 저자가 보기에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까지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에서 발달했고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구요. 브로델은 자신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를 통해 유럽이 팽창했고 더불어 유럽의 경제계들이 자본주의적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들 전형적인 경제계가 유럽자본주의를 낳았고 이것이 다시 세계 자본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결론 냅니다. 유럽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미국. 크루즈 여행으로 보면 자본주의 탐험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결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최상층의 존재라는 것. 자본주의의 특징과 강점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하고 그 변화하는 국면에 따라 수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변화무쌍함의 와중에도 비교적 자본주의의 고유한 본질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또한 자본주의 특징이라는 점.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고 언제나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자본주의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어느듯 다시 생환해 있잖아요. (지금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 몇번의 위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살아나던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의 부제인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같은 뱀이죠. 머리가 9개 달린 괴물의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났다고 해요. 바로 자본주의를 불사의 영속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독하고도 끈질기며 탁월한 유연성과 적응력으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역사가 아니라는 것. 소름이 끼쳤습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할 때 이제 곧 자본주의는 사라진다는 기사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들자는 책도 보았습니다. 세계의 경제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해 얼마나들 노력하고 있습니까. 몇 백 년 전부터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의 역사가 새삼 두려워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안도 중요하겠지만 변하지 않았던 과거의 원대한 흐름을 뒤돌아 보는 것도 오늘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좋은 거울이 될 듯 합니다. 무엇보다 한 평생 자신들의 과거만 연구한 역사가의 충고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입니다.

 

“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처럼...”


프랑스의 역사가가 그려낸 세계지도는 과거의 강물이 현재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쩐지 우리의 미래를 더 입체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마치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사진처럼요.

 

 

 

덧붙임)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이 궁금해 찾아보니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중 일부를 확대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산 루이지 교회에 그려진 그림 중 하나인데 제목은 <성 마태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이다. 마태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 그림은 바로 세리(세무관리)인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을 은유해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일생이 뒤바뀌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잘 보면 오른 쪽에 나타나 ‘나를 따르라’고 손짓을 하는 이가 예수이고 놀란 눈을 한 채 왼손으로 ‘나 말입니까’하는 인물이 마태 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세금 징수업자였던 마태가 아닌 고개 숙여 돈을 세고 있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어 표지로 한 것일까.

 

 

 

 


자세히 보면 표지에서 돈을 향한 손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돈에 눈을 맞추고 있는 인물의 손 같지만 위에 손은 바로 마태의 손이고 아랫 손만 고개숙인 인물의 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마태는 왼손으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있지만 오른속으로는 계속 하던 일인 돈을 세고 있는 것이었다.

 

악덕업자로 불리던 세금관리는 그 시절 무척 안정된 직업군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의하면 16, 17세기 이탈리아는 자본주의를 태동케 한 일등공신이다. 자본주의가 일부 소수 특권층에게만 일어나는 최상층의 현상을 상징한다고 보았을때 이 그림에서 돈을 가리키는 손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정확히 세고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와 상관없이 경쟁을 비껴나와 독점으로 향하는 히드라와 같은 괴물. 그렇다면 아마도 고개를 숙인 청년의 눈은 돈에 눈멀어 자본주의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나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혹 사람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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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2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빠서 어리버리하는 사이에 글을 많이 올리셨네요
앞으로 정리 계획에 있으신 자본주의 역사, 저는 기대가 좀 됩니다.
쉬운말로
"'돈'과 무관하게 서술된 세계의 역사는 정말 김빠진 사이다와 다를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저 지금 기대에 부풀어 있으니까요^^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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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하는 바보를 위하여

 

이 책을 덮은 느낌을 단 한마디로만 말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부끄럽다’고 할 것이다. 두 마디로 가능하다면 ‘부끄럽다, 그리고 놀랍다’ 일 것이다. 세 마디까지 허용된다면 다음에 붙여질 한마디는 아마도 ‘내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 정도가 될 듯하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생각의 오류를 낱낱이 해부한 책이다. 나름 생각이 너무 많아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과 비례해 꽤 합리적인 인간이라 자처했던 나로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온 것들이 그저 불합리, 불공정, 비현실적인 사고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충격이 적지 않았음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러한 내 사고방식이 여지껏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치 그동안 건강하리라 여겼던 오장육부에 대한 정밀검사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나는 재미있고 인상 깊고 여운이 많아 감성을 자극하는 책을 많이 집어 들었다. 사고를 유도하는 책보다는 사고를 막아주는 책을 원했다. 물론 어떤 책도 그런 책은 없었다. 책을 쓴 사람은 이 책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강렬히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두려운 마음이 많았다. 어쩐지 기존의 내 사고체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받게 될 것 같아서 였달까. 이 책은 분명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원하는 분들에겐 금상첨화일 듯하다. 더 나은 선택은 당연히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틀린 생각, 잘못된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불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이처럼 직접적인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책은 만나기가 어렵다. 누구나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는 힘들며 그렇다하더라도 또 다른 책에 의해 언제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 책이란 그 책을 읽는 동안엔 그 책이 전하는 세상이 전부인 관계로 책과 소통한다는 것은 사실상 해당 저자가 그려준 그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책 밖으로 나오면 그 책과 반대되는 논리와 상황은 너무나 수두룩하다. 내 경우 두 권 이상을 동시에 읽지 않는 이상, 그리고 몰입을 전제로 한다면 보통 책 한권이 곧 한 사람의 한 가지 주장이라 여기게 된다. 그 한 가지 주장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놓으면 마치 내가 그 책을 더 잘 소화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유익한 순간은 곧 다른 책과 다른 리뷰로 대체되고 독서의 경험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아마 이 책도 세월이 흐르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겠지만 내 기억 속엔 분명 여지껏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는 인식만은 영구 저장될 듯하다. 그 저장된 라이브러리에서 가끔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의 종류를 다시 꺼내어 나의 선택과 판단에 적용해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듯 하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이의 생각이나 책에서 펼쳐지는 논리를 따져보고자 저자의 주장을 다시 뒤져볼 것만 같다. 유익한 책이란 이 순간의 유익함이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책이 유익하지 않은 독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렇지만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만큼 논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하는 바보, 그 인간의 바보 같은 생각을 다루었다. 이 책에 의하면 바보가 되지 않을 사람은 딱 한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할지 모른다.

 

 

편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말할 때 흔히들 사고가 편향적이다,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비판에 해당한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듣지 않으려고 상충되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려 하고 내 판단의 근거를 찾아 제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노력을 증명하려 애를 쓰곤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일까? 관점을 이동시켜 사고한다는 것의 실현가능성, 그 완벽한 일치를 백으로 보았을때 결과는 반도 되지 않을 듯하다. 그저 피상적으로 가늠할 뿐인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누가 뭐래도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제 1의 천성이라고. 그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으로만 추론하는 휴리스틱으로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온 존재였다고.

 

쉽게 말해 저자는 우리의 직관이 편향을 만든다 말한다. 그리고 이성은 편향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편향은 착각이 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나아가 확신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전문가일수록 사고 체계의 오류에서 벗어난 판단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저자는 여러 실험을 통해 전문가들도 편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일반인과 전문인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전문가는 자신의 편향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인정하지 않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저자는 이 결론을 보다 흥미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하 S1, S2)라는 가상의 등장인물을 내세웠다. S1은 노력이나 통제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직관에 해당하는 자아이며, 이 책의 주인공에 해당한다.(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증명했다) S2는 노력과 통제를 수반하여 느리게 진행되는, 의식하고 추론하는 자아에 해당한다. S1과 S2는 모두 우리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린 그들의 존재가 분리되어 활동하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S1이나 S2는 모두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상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사후 반응 혹은 사고 후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일어난 후 한 사람이 감정상으로는 슬프지만 감정을 통제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행위를 감성 대 이성의 대결로 보고 이 구조가 S1과 S2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 대 이성은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빠르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 느리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사고주체이다. 흑인으로 제시된 살인범의 몽타쥬를 보고 바로 혐오감을 가졌다면 S1이 작동한 것이고 범인이 여러 정황상 흑인일 것이라는 기사를 읽고 타당성을 따져보는 것은 S2가 작동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S1은 단순하고 S2는 복잡하며, 간혹 S1이 내 사고를 지배하더라도 잘 학습된 S2가 있어 결국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은 반대로 S2가 내 논리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때로는 S1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경우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의 직관은 마치 무당이나 역술인처럼 예지능력을 의미하는 나만의 경쟁력이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관은 직관대로 나의 장점이며 사고력은 또 깊은 대로 나의 능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처음부터 난 예감 했었어’, ‘무슨 일이 터질 줄 알았어’, ‘그 팀이 우승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이 스스로의 직관을 꽤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자신의 지식에 자부심이 있다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터이다. 간혹 실수나 착각을 하긴 해도 크게 봐선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해칠 만큼은 아니라 생각하며 그건 전체 생산총량 대비 불량률정도로 치부해왔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간혹 일어나는 실수에 해당하는 사고불량률이 가뭄에 콩 나듯 발생하는 합리적인 경우이고 나머진 대부분 실수와 착각과 오류로 얼룩진 시간이라 설명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결과만 해도 몇 십 개가 등장한다. 이 책의 예문을 읽고 정답을 추론하는 일은 흥미롭긴 해도 꽤 머리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배워 온대로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왜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을 의심하지 않을까, 였다. 논리는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반론을 만들어 자기 이론의 타당성을 구축하면서 직관은 그러려니 해 버리지 않는가. (직관은 그것이 작동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혹은 직관으로 치부하기 싫은 심리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직관은 언제나 진실보다는 익숙함을 택하고 익숙함은 호감을 낳으며 호감은 기억의 패턴으로 굳어진다. 가장 허탈한 예로 한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 판사는 배고팠을 때가 식사가 끝났을 때보다 가석방 요청을 거부하는 비율이 크다. 의사 또한 피곤한 상태에선 오진을 할 확률도 수술에서 실수를 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도 잘 갖추었다.

 

우리는 미모의 상담원, 인상이 좋은 영업사원이 권하는 보험이나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감동받은 영화,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이 내가 경험한 가장 작품성 있는 컨텐츠로 대체된다. 잡지의 화보를 본 기억 때문에 그리스 해변 가에 살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광우병 소식 때문에 갑자기 소고기를 사지도 먹지도 않게 된다. 노인에 관한 문장, 노후에 관한 기사를 보면 느리게 걷게 된다. 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발음이 쉽고 철자도 쉬운 회사의 주식에 끌리게 된다. 같은 결과라도 병원에선 생존률 보다는 사망률에 반응한다. 선거에선 객관적인 능력보단 자기 마음에 드는 외모를 보고 후보를 결정한다. 행복감은 언제나 현재의 마음 상태만이 기준이 된다. 혜택은 과대평가하고 비용은 과소평가한다. 복권은 아무리 당첨률이 낮아도 상금을 타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당첨 가능성 때문에 계속하여 사게 된다. 테러나 가스폭발은 위험률이 매우 낮지만 걱정하느니 마음 편하게 보험을 들게 된다. 쓰나미나 지진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내가 여행을 갈 땐 중요한 변수이다. 새로 생긴 식당에서 메뉴를 추천받았지만 후회할까봐 주문을 하진 않는다. 미래의 휴가는 마지막 휴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결정이 된다. 비싼 입장권을 내 돈 주고 샀기 때문에 눈보라나 폭우를 뚫고서도 야구 경기장으로 향한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며 손해를 보아도 다 경험상 좋은 실패였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옳고 좋은 판단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판단의 패턴은 반복되며 여간해선 수정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까. 저자는 의심을 지속하기 보다는 확신에 빠지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 생각엔 직관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보다 익숙한 그림을 택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즉, S2는 S1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인간은 좀 더 쉽고 편한 S1을 자꾸 지향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일부러 그러려고 느리게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받아 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몸이 편한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주의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사고도 편한 방식을 좇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편한 대로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자기기만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그 내러티브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어떤 이야기에 인과성이 부여되면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연성은 물론이고 타당성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좋은 일만 하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고 나쁜 일만 한다는 무책임한 직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비난했다면 그 사람은 비난의 대상을 직관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논리는 차후에 직관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사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느닷없이 황당한 종류의 비판을 당하는 경우 이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방법과 자료가 없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직관을 증거로 말하면 아무도 신빙성 있게 받아주지 않는다. (대개 함부로 오해하지 말라고 비이성적이라는 핀잔만 듣게 될 것이 뻔하다) 그만큼 직관은 그저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심증정도로 과소평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운 때문에 발생한 일들에도 인과성을 부여해 정합성을 구성하길 좋아한다 말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말이 안 되면서도 자주 목격되는 예는 바로 장례식장에서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그 사람이 직전에 행했던 일들이 모두 사망의 원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이가 죽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나봐... 그이가 그 일을 한 건 며칠 후 죽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이런 판단은 사후편향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사람은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인지적 착각이 내 자신은 물론 내 인생까지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고한다. 바로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착각이 우리 스스로 미래를 예견하고 통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사후에 평가하는 생각의 오류를 미처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이 심리는 미래가 불안 할 경우 더욱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가 되는 듯하다. 현재, 과거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착각은 당연히 지금 위치의 자기 능력을 과신하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긍정을 지나 낙관이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산 주식이 판 주식에 비해 더 좋은 수익률을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투자자가 판 주식이 산 주식보다 수익률이 높게 나타났다. 저자는 가장 적게 거래하는 투자자가 가장 좋은 성과를 내며 여성이 남성보다 투자성과가 좋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주식에 있어 낙관은 그저 잘못된 직관의 하나의 유형일 뿐인 것. 대다수의 펀드 매니저는 포커게임이 아닌 주사위게임처럼 주식을 선택해 추천하고 거의 모든 주식투자자는 운에 좌우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회사가 운을 기술로 착각하고 보상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식을 투자할 기회는 있었으나 주변에서 이득을 본 사람을 보지 못해 실행에 옮기진 않아 왔다. 저자는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라서 그런 것인지 손해와 이익을 비교하는 데이터가 많았고 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무척 흥미로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심리중 하나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위험회피’를 지향한다는 심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달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150달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보다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골프 선수들이 보기보다 파 퍼팅을 할 때 성공률이 더 높은 이유는 손해를 두려워하는 심리가 강해져서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손실을 막고자 하는 이 심리는 자기가 가진 좋은 재화(예를 들어 와인이나 카메라, 자동차 등)를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재화를 얻음으로써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긴 하다.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심리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득을 얻기 보다는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세상과 조직과 사람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저자는 그래서 방어하는 쪽이 이길 승산이 많다고 보았다. 최소한의 변화만 선호하는 우리 사회 보수지향자들이 왜 확실히 눈에 보이는 혜택보다 손실이 적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이 논리는 이번 진보당 사태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비주류 진보주의자들이라 해도 그 속에서는 기득권과 비주류가 또 나뉘어 진다. 최소한의 변화만 원하고 손해가 적길 바라는 심리는 진보나 보수나 매 한가지라는 뜻이다. 사회가 진보적이길 바라는 것과 자기 생각이 진보적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와서 좀 충고해주었음 좋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더욱 우리는 인간에게 실망해야지 진보에게 실망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곧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보다는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후회에 더 민감하다는 심리와도 연결된다. 지난 4.11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해온 대로 새누리당을 지지해서 결과가 좋을 것이라기 보다는 민주당을 지지해서 후회를 할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S1이 직관이고 S2가 이성이라 보았을 때 보수는 직관에 호소하고 진보는 논리에 호소했다는 사실도 내겐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S2는 대부분 S1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기려면 S1을 더 의심하고 더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진보주의자들이 꼭 탐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생각에 관한 생각들이 개인의 삶과 행복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S1과 S2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생활하는 ‘경험자아’와 점수를 매기고 선택하는 ‘기억자아’의 출연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결혼을 보아도 만약 이혼한 사람에게 당신의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간의 ‘경험자아’를 무시하고 마지막에 불행을 초래한 ‘기억자아’만 우대하여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고 행복의 유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삶의 질이 경험자아에 있으니 행복의 의미를 기억자아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결론은 S1와 S2, 그리고 경험자아와 기억자아, 사고하는 자신과 행동하는 자신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선택을 위해 S2에 더 많은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S1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 그것만이 바보 같은 생각을 줄이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이라 조언한다. 생각보다 생각을 잘하는 인간이 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을 한다고 다 생각다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수두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을 잘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는 일은 그다지 인간답지 않은 일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하길 싫어하고 잘못 판단하길 좋아하며 그러는 자신을 가장 편안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완벽한 모순의 존재인 듯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동안은 불변하는 딜레마일지 모른다. 생각은 그 자체로 미완을 의미하진 않으나 언제나 미완성의 결과로 인간을 곤경에 빠트린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그 곤경에서 탈출하는 방법 또한 생각하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만이 완성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비인간적일 필요가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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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의 글을 보면 참 합리적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논리 정연하고, 이론도 제대로 끌어다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픈 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런 글을 언뜻 보면 S2를 제대로 활용한 것 같지만, 실은 S1이 먼저 작동되어 S1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을 타당화시키기 위하여 S2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S1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1은 편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이 잘못 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S2를 이용하여 포장하는 때도 있죠.

깨어있는다...........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쉼없이, 이렇게 노력하는 한사람님이 저는, 항상 좋아보이고 멋져 보입니다.
즐거운 주말 되셔요.

가연 2012-05-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읽네요. 요즘은 거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로그인도 잘 안하는 편이라 그동한 뜸했습니다. ㅎㅎ 어쨌든..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숲노래 2012-05-19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배운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바보짓을 해요. 사람들은 '느낀 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들어져요.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까닭은, 아이들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아닌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든 믿음이든 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데, 사랑이라면 이렇게 되야 하거나 믿음이라면 저렇게 되야 하는 듯 자꾸 한쪽으로 내모는 '교육을 제도권에서 주입'시키고 '책으로 읽히'며 '지식으로 가두'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배울수록 바보가 돼'요.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스스로 손에 호미를 쥐어 들판에서 몸을 놀리며 풀내음 흙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물내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익혀'야, 비로소 '마음을 슬기롭게 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깨달아요.

차트랑 2012-05-2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성공률은 언제나 80%이상,
타인의 실패율은 언제나 80%이상,
같은 대상을 두고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S1과 S2가 자신에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

스마트 폰으로 글을 읽다보면 저는 눈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5분을 못 넘기고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나빠서 그러나?? 싶습니다요 ㅠ.ㅠ

서점엘 자주 가시나봅니다.

저의 동네에 참 괜찮은 서점이 하나 들어온지가 오래지 않은데
매장이 얼마나 널찌근하고 좋던지...
교보나 종로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여유로움,
아마도 이런 여유로움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느낀 듯...
서적들을 디스플레이한 방식도 이건 정말 독특하다...
책을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의 것이라며
완전 효율성이 떨어지는 책들의 배치...
대신 책을 보기에는 최고의 배치...
서점에서 감동먹기는 처음이었습죠.

그곳에 종종 놀러가곤 했었는데...
어이없게도 지난해 여름 홍수 피해로 그만...
널찌근한 빌딩의 건물 지하 전체를 서점으로 꾸몄는데
홍수때 물이 가득 들어 찬거에요.

결국 그 서점은 없어졌습니다.
홍수피해로 자동차들이 사거리에서 둥둥떠다니던 지난 해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에는 시원하 에어컨을 돌려주는
서점에가서 책을 꺼내들면 바로 피서였는데...

그렇게 저는 서점을 잃었답니다 ㅠ.ㅠ
제가 그 서점 주인은 아닙니다만
어찌나 서운하던지...ㅠ.ㅠ

저는 서점엘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ㅠ.ㅠ
 
자연의 농담 -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
마크 S. 브룸버그 지음, 김아림 옮김 / 알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1. 괴물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연의 ‘농담’은 단도직입적으로 ‘기형’이고 ‘괴물’을 말한다. 라틴어로 두 다리가 없는 염소로 태어났지만 그런대로 걷게 된 동물을 루수스 나투라(lusus natura), 자연의 농담이라고 불렀다. 괴물이라는 단어도 라틴어로 ‘경고하다’라는 뜻인 모네레(monere)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농담 중에서도 가장 뼈있는 자연의 농담은 경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인간에 경고하는 신호라 보아도 좋을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반인에게 기형은 불행이고 비극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과학자에게 기형은 ‘선물’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서 존재하는 유별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생명의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자가 말하는 농담이 모두의 불행이 아닌 행운의 기회가 되길 바라는 책이다.

 

사전적 의미로 전형(典型)은 모범이 되는 본보기이며 이형(異型)은 보통과 다른 모양이고, 기형(畸形)은 보통과 다르면서 비정상적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전형과 기형 사이에 이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어떠한 변이를 일으켜 이형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비정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 오답인 이유는 전형이 정답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오히려 이형이야 말로 진화를 위한 새로운 선택을 의미하지 않느냐 질문한다. 전형이라는 고정관념이 완성과 미완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선택의 편견을 낳게 되는 건 아닌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착화하는 것은 아닌지 제고해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만약 괴물을 만드는 발생적 메커니즘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해서 다양한 종류의 발생적 이형이 왜 다양한 괴물의 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기형이 유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그 바탕에는 진화와 DNA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찍이 위대한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의 범주를 넘어 다른 많은 학문 영역들은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 p. 20,  최재천 <다윈지능> 中에서

 

저자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자연이 완벽하며 더불어 진화론도 완벽한 체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설계와 조절 및 통제능력을 갖고 있어 동물이 조립되어 가는 설계도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DNA를 잘 계획된 프로그램이나 조리법, 청사진 등으로 은유하고 발생적 이형은 돌연변이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는 급작스런 사건으로 치부한다. 통섭학자 최재천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보잘 것 없는 DNA라는 화학물질이 단세포생물을 거쳐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살아남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니며 내 생명의 주인은 꼭 나만 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다. 도킨스는 끊임없이 그 명맥을 이어온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른다. 이 완벽해 보이는 이론은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듯이 공존, 공생의 개념을 떠올리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의 관점에서만 재해석한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이형의 발생, 이어지는 기형이라는 판단의 소용돌이이다.

 

예를 들어 남녀가 각기 다른 자세로 소변을 보는 것은 본능인가 유전인가 학습인가. 신체적 형태가 달라 다른 행동이 나타나는 차이는 유전적 행동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평범한 외부요소의 상호 영향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뇌에 유전적으로 배선된, 계획적으로 특성화된 행동 유전자와 연결 짓고 싶어 한다. 발가락이 네 개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발가락 네 개 유전자로 기형이 된 것이 아니다. 발가락 갯수는 사지가 처음 자라나는 뿌리인 사지싹의 발생과정과 크기와 관련이 있다. 괴물 같은 팔다리 기형이 가장 빈번한 동물은 양서류인데 이들은 유전적 돌연변이 때문에 팔다리 기형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과성이 용이한 피부특질과 표피 없는 알의 특성 때문에 배아가 이루어 질 때 환경적 요소가 보다 쉽게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팔다리 없는 양서류가 많이 출현한다면 환경의 오염도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딱정벌레의 경우도 뿔이 크면 혼자서 공급하는 똥이 많기 때문에 유충이 더 잘 자라게 도움을 준다. 결과적으로 몸집이 큰 아비 밑에 큰 새끼가 자라나게 된다. 이는 유전적 요소가 진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발생을 특징짓는 상호작용의 속성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유전과 DNA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후세에 더 좋은 쪽으로 진화한 것도 유전이요, 더 나쁜 쪽으로 대물림 된 것도 유전이라는 식이다.

 

저자는 DNA를 모든 발생을 위해 원료제공을 돕는 분자 정도로 인식해야지 통제 가능한 만능 프로그램으로 인식하지 말라 충고한다. 이 책은 불완전한 자연과 그 속에서의 진화보다는 발생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다. 전통적인 다윈주의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유전자 중심적의 사고방식을 경계한다. 유전적으로 예정된 산물보다 발생적인 과정에 더 집중하는 후성설을 자기 이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과학적인 평가는 전문영역이겠지만 DNA 만능이론에 안주하던 독자들에겐 의미 있는 반론인 듯하다. 무엇보다 기형이 유전이 아닌 발생의 문제라면 괴물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공동으로 인식해야 할 인재일수 있으며, 어쩌면 괴물이 괴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어쩌다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괴물은 그다지 운명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린 괴물을 그다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2. 괴물은 인간인가 초능력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산모였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이미지는 흉측한 기형아의 모습이 많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기형아들을 티베르강에 익사시켰다고 한다. 산모는 한번쯤 자신의 태아가 기형아인 꿈을 꾼다고 한다. 만약 태아가 기형이라는 결과를 받았다면 충분히 낙태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상이 아닌 것을 혐오하고 공포스러워 하는 심경은 이해가지만 정상이 아닌 이유가 곧 죽거나 불행해야 할 조건인가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알려준 외눈증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정상의 경우는 외눈증과 두얼굴 증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한 경우의 수 일 뿐이다. 새로운 형태라고 무조건 돌연변이라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싶어진다. 정상인 얼굴이 더 완성된 것이고 더 완벽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면 대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에 손을 들고 싶다. 외눈증이 비정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형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전형의 관점에서 다르게 생긴 이형일 뿐이다. 이러한 발생적 이형은 배아 초기에 가해진 어떤 원인에 의해 드러난 복잡한 발생의 연쇄적 산물일 뿐 신적인 유기체가 있어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된 계시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머리 하나를 생성하는 가능성을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연히 머리 두 개의 가능성이 진화한 것이라 부연한다. 머리가 하나일 확률이 많아지면 마찬가지로 머리가 두 개일 확률도 많아진다는 것이 진화론에 입각한 논리 일 것이다.

 



 

- 외눈증에서 정상적 형태를 거쳐 두얼굴증에 이르는 와일더의 전체 '코스모비아'계열.
두얼굴증 너머에는 두머리증이 보임. 두머리증은 두얼굴증이 심화된 형태가 아니라 결합쌍둥이의 변형된 형태 -

 


저자는 이처럼 난자가 수정된 직후의 초기 배아에서 일어난 ‘무차별적 순간’, ‘최고의 순간’을 기형을 유발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다.

 

이 시점은 “무언가 중요한 발생학적 단계가 빠르게 진행 중이거나 빠른 변화로 막 진입할 예정이어서 특정한 부분의 발생이 다른 부분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p 80

 

역으로 이 시점에 수많은 환경적 조작을 가함으로서 다양한 기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점에 환경적 손상을 입히면 어떤 특정 기관의 발생도 괴물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다. 병아리 배아단계에서 온도나 화학처리 같은 부화환경을 조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한다. 어떤 종은 온도를 달리할 경우 성별이 달라지는 것도 있다. 따라서 진화와 발생은 분리 될 수 없으며 어떤 기형도 유전이나 환경 하나의 요인만으로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발생 메커니즘을 알면 진화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무엇도 정해진 발생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는 곧 괴물로 정해질 운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괴물일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괴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발생에서의 실패자일 뿐이다. 무차별적인 괴물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 좋게(?) 괴물이 된 후엔 어떻게 생이 달라질까.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아이는 두 팔로도 걷기를 배우고 다리를 두 개만 가지고 태어난 염소는 절룩거리며 두 다리로만 걷기를 습득한다. 기형이 된 다음에도 얼마든지 정상은 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는 채로 태어난 아이는 우리가 보기에는 불구이지만 생애초기부터 두뇌는 새롭게 조직화되고 사지가 없는 신체에 연관된 행동적 적응을 포함한 특별한 발생 경로를 겪기 때문에 외려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팔로도 잘 걸어 다니고 세심한 동작을 해낼 수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두뇌의 조직화를 통해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게 되는 보상작용이 이루어진다.(장님이지만 청각이나 촉각, 후각이 정상인 보다 더 발달한 이유가 대뇌피질의 재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달리기나 수영하기 같은 움직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이는 타고난 능력이 아니고 신체 각 부분 발생적 대화와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생명체에 있어 발생의 각 단계는 여러 선택의 나열로 구성될 뿐 최후의 완성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의도적 과정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삶의 단계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스스로 발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절대로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유전적으로 조절되는 본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제 괴물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부족한 조건으로도 자기 발전을 이루었으니 우리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인 것은 아닐까.

 

3. 괴물은 친구인가 적인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선과 악, 유전자와 환경,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의 구분이 익숙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적 모호함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단성unisexual, 간성, 다중성multisexual에 대한 개방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성별이 남성과 여성만 존재해야 한다는 시각은 자연이 어떠해야 한다는 인간이 만든 선입관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이 부분에서 '동성결혼' 찬성의 입장을 밝힌후 지지율이 하락했다는 오바마를 떠올렸다. 등을 돌린건 우파 여성이었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성별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는지 새삼 궁금하다) 환경에 따라 성전환이 가능한 열대어의 사례는 충격적이기 보다 부러웠달까. 저자는 인간과 동물계에 존재하는 가지각색의 성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모호한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나 사회의 관점으로 일방적인 수술을 하기 보다는 아이의 성정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례에서 보았듯이 태어난 직후 시행한 성 재지정 시술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정체성의 결정에 더 이성적이고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충고가 선뜻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이형이나 기형이 그 전과는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후성유전학적인 관점으로 발생기간에 형태와 기능이 상호작용한다는 인식은 신선하고도 인상적이다. 기형에 대한 동질감까지는 아직 이지만 적어도 혐오나 공포감은 많이 사그라든 느낌이다. 자연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을 놀라게 한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보다 더 놀라울 수 없다’는 저자의 깨달음이 새삼 자연 앞에 숙연해지는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은 괴물을 만든 적이 없지만 인간만이 인간을 괴물이라 부른다. 인간이 괴물을 창조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괴물이 아닌 것에 감사한 적이 있을까. 살아가면서 실은 괴물이 아니었던 사람이 더 괴물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닐까. 신체가 멀쩡하다고 해서 꼭 정신도 같이 정상이라는 법은 없다. 대개 정신적 괴물은 신체가 정상인 사람에게 더 빈번한 후천적 발생과정인 듯하다. 그렇게 보자면 어차피 괴물은 서로에게 적대자가 아니라 친구일 수밖에 없으며 누가 누구의 조연이 아닌 각자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거울을 보며 거울 속 우리 자신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겠다.

 

우리는 수많은 부분과 과정의 총합이며 생식기의 성장을 촉진하고 두뇌의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와 생식선, 호르몬분비 간 연쇄효과의 산물이다. 이 모든 요소가 협력해 거울 앞에 보이는 우리 자신을 만든다. 게다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궁극적으로는 가족과 문화 안에서, 시대 속 개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 거울에는 단 한 명의 모습만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셈이다. -p 212

 

우리는 지금 나 아닌 괴물, 그리고 옛날에 나 일수도 있었던 괴물, 앞으로 나 일지도 모를 괴물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 존재이다. 괴물은 곧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괴물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같은 인간이니까. 그러므로 괴물이 아니라 좋아할 것도 괴물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다. 괴물이 아니라면 괴물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괴물이라면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공평하다. 농담은 아마 우리 모두가 괴물이기도 하고 또 모두가 괴물이 아니기도 하다는 괴물 같지만 괴담은 아닌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지금 잠시 어떤 이유로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 할 자격도 없다. 인간은 괴물이 될 가능성과 괴물로 변할 잠재력을 이 세상 어느 존재보다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괴물이 되지 못한 인간만이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한번만 손가락질을 해보자. 우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의심할 수 없는 괴물을 향한 것이라면 그 방향은 아마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괴물의 얼굴은 아닐까. 그때라면 지금처럼 웃으며 농담이라 말할 순 없지 않을까.

 

 

 

 

 

* 이 리뷰는 yes 24와 조선일보에 먼저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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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1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적 이형 혹은 기형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허약한 사람들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망케해야 한다고 주장 하던 플라톤과 그의 시대보다
현대는 좀더 포용적인 개념의 시대에 와있어보입니다.

또,
말씀해주신 정신적 이기형은 그 수가 더욱 증가하는 듯 합니다만...
오늘은 저의 손가락을 거울을 향해 한 번 찔러보겠습니다 ㅠ.ㅠ
이거...생각을 많이 해봐야겠는걸요 ㅡㅠㅡ.

차트랑 2012-05-19 16:44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시니 기억이 납니다.
언제나 페이퍼를 써놓고도 잊고 있었더군요 ㅠ.ㅠ.
그것도 물과 얼마전에 말입니다 ㅠ.ㅠ

자연의 농담이 농담이 아닌가 봅니다요.
재미있는 책이라구요..?
그럴 것 같아요..그것도 아주아주..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어낸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
피터 노왁 지음, 이은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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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은 인간을 선택 했나 기술을 선택 했나

 

 

1996년도에 아이네트라는 회사에서 인터넷을 처음 배웠다. 그땐 전화선으로 PC통신이 대중화된 시기였다. 브라우저도 익스플로러가 아니고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가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강사 중 한분이 인터넷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모든 건 미 국방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말이다. 컴퓨터 끼리 데이터 통신이 가장 절실한 곳이 미 국방부였고 무언가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 누드 사진도 주고받고 싶어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리하여 인터넷 기술의 정점은 포르노가 될 것이라 말했다. 생각해보라고 사진이 될수록 빨리 떨어지고 동영상이 빨리 전송되어야 할 것 아니냐고, 그것도 실시간의 고화질 화면으로. 가끔은 우리끼리 무언가를 찍어서 돈도 벌어야 할 것 아니냐고. 모두 회사원들이었고 당시 강의는 한 달에 오십 만원이나 하는 고액의 특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말하던 기술들은 거의 실현이 된 듯하다. 그리고 강사가 농담 반으로 부연하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십 오년도 더 지나 나는 이 책에서 농담이 진담이 되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새삼 그때 넷스케이프를 띠우고 알타비스타에 검색문구를 쳐대던 모습이 떠올라 빙긋 웃음이 났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 북에서 사진을 공유하며 네비게이션은 물론 쇼핑, 게임, 강의, 영화, 음악, 라디오, TV등의 다양한 손바닥네트워크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 모든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사실은 미 국방부에서 만들었고 포르노에 가장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놀랄만한 뉴스는 아니다.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본 뉴스에 속한다가 맞을 것이다. 허나 이 책은 그것이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의 기술은 나쁜 전쟁의 기술이 착한 일상의 기술로 전이된 것이므로 우리는 그동안 악의 축을 기둥삼아 열심히 개인의 욕망을 실현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미래란 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로 상징되는 욕망의 삼위일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악덕과의 공존 전략을 세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모든 현대기술의 핵심은 20세기 중반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미국이다. 자본주의 주권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저자의 논리는 ‘많은 기술을 가진 자가 많은 식량을 소유하고 많은 권력을 가진다’는 데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미국은 적보다 유리한 기술을 찾아 유능한 과학자를 대거 투입시켰다. 당시 천재들은 모두 비밀리에 군사기술에 투입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은 군사기술에 쏟는 투자가 곧 과학연구의 중추로 자리 잡았고 신기술은 산업으로 빠르게 이전되어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미군의 피나는 기술개발이 가전제품의 대중화를 가져왔고 식품가공의 혁명을 이끌었고 컴퓨터 산업의 혁신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성혁명이 상업화, 개인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 섹스, 음식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둘러싸고 거대산업이 발전한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성욕, 경쟁,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대변하므로 3대 악의 축은 곧 3대 욕망의 뿌리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건 미국 탓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탓이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순서대로라면 맞는 말이긴 하나 읽다보면 서서히 갑갑해지고 우울해지는 책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 의하면 이미 결과가 드러난 상태에서 모든 과거의 일은 사후에 얼마든지 편향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개연성과 타당성, 합리성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연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저자는 기술발명이라는 것이 늘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과연 초창기 기술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일까? 기술전이의 핵심이 된 사람들이 모두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로부터 자유롭다고 해도 그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알지 못해서 선택을 이어왔던 것일까. 예를 들어 새로운 전쟁기술을 개발하는 목적은 고귀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함이라 떠들지만 기술이 개발된 시점엔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기술을 어디에 응용하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젊은 시절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살았던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은 이 책에 언급된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증인중 한 사람이다. 파인만은 그의 저서와 전기 등에서 폭탄을 제조해 실험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분명히 ‘사회적 책임’을 언급한 바 있다. 모두 천재수준의 과학자들로만 구성된 팀원들은 사막 한 가운데서 폭탄이 터질 때 성공의 환호성을 질렀지만 돌아올 때 침묵하였다. 원래는 독일의 위협으로 그들이 폭탄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폭탄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실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은 일본에 떨어졌다. 파인만은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끝까지 염두에 못 둔 것이 도덕적인 면에서 실수였다고,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그 이후로 국가의 기밀작업엔 참여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파인만은 당시에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했는지 생각해본 사람이 분명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은 단지 기술을 의뢰할 뿐이며 과학자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할 뿐이며 상인은 기술을 응용해 팔기만 할뿐이고 소비자는 그것을 이용만 할 뿐이라면 인간은 로봇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선택해온 사실들은 잊어버린 듯하다. 이 책은 지난 시절 미국이 해온 일들을 객관적인 통계자료와 결과지향적인 가치관으로 상당부분 합리화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문제는 지금 이후인 듯하다. 그래도 의미 있고 감사한 건 지금까지의 전개과정을 낱낱이 알려준 성실함이다. 현대문명에 있어 미국의 기여도와 과정을, 그 속내와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는 일일 것이기에.

 

 

 

2. 미국 음식을 먹는 것은 미국식 삶을 먹는 것이다

 

 

독일의 폭격으로 자존심이 상한 영국은 미국과 합작으로 레이더 장치를 개발해 많은 인명을 살렸으나 마찬가지로 적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살인광선으로 레이더를 활용했다. 이 살인기술은 전쟁이 끝나고 전자파를 이용한 전자레인지로 거듭나 일반 가정의 부엌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테프론도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 과정에서 발견된 화학물질이 프라이팬으로 변신한 결과였다. 오늘날 식용유 없이도 계란 후라이가 가능한 테팔 프라이팬은 사실 폭발물 제조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기술이었다. 전쟁덕분에 세상에 등장한 플라스틱은 다양한 밀폐용기로 널리 보급되었고 건강을 해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밤새워 공부하고 난 뒤에 또 밤새워 논다고 총력전 뒤에는 총력생활이 뒤따랐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번영과 사치, 즉각적인 쾌락이 더 중요했던 5,60년대는 환경이나 생태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시에 개발된 기술은 가정의 요리기술로 안착했고 사람들은 전쟁을 잊고 풍요를 꿈꾸었다.

 

 

우리 집 아이는 대표적인 정크 식품인 스팸과 햄, 소시지를 좋아한다. 이것저것 온갖 종류의 햄이 들어간 부대찌개도 유난히 좋아한다. 어린이 성장과정에서 특히 두뇌와 골격의 발달에 좋지 않다는 뉴스와 연구결과를 보고도 아이는 스팸의 맛을 잊지 못한다. 스팸은 알다시피 미군이 전시식량으로 택한 음식이었다. 전 세계 식품가공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와 동일하다. 아마 당시 미국의 군부대에 스팸을 납품한 업체는 떼돈을 벌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 통계상으로 스팸을 즐겨먹는 나라에선 하나같이 당뇨병, 뇌졸중, 심장병 같은 성인병 발병이 높게 나타난다. 주부의 경험으로 보자면 식품 첨가물과 나트륨의 함유량도 대단한 중독성이 있는 듯하다. 그만한 맛과 그 정도의 간에 익숙해진 입맛은 꼭 일정량 이상 마셔야 술을 마셨다 생각하는 알코올 도수 및 주량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요즘은 감자튀김도 양파맛, 치즈맛 등의 화학조미료를 즉석에서 첨가해 더 강한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화 되었다. 뉴스에선 하루가 지난 감자튀김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알려주지만 담배 피지 말라고 해서 알아듣는 성인이 드물듯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아이 따라 먹어보면 확실히 순간의 자극은 더 심화되었고 그 기억은 또 새로운 맛이 나타날 때 까지 유효할 듯하다. 나는 아직도 태어나 처음 롯데리아에서 감자튀김을 먹었을 때 그 맛을 기억하는데 한창 성장기에 인스턴트 식품과 화학조미료의 맛이 얼마나 맛날 것인가.

 

 

냉동감자의 시작도 알고 보면 고기와 채소를 냉동식품으로 팔아온 군납업체에서 비롯되었다. 인스턴트 커피도 마찬가지다. 군인이 지치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해선 필히 탈수, 냉동, 건조 기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부지런히 전시에 오렌지주스, 감자, 우유, 달걀 등을 실험함으로써 음식맛을 가공하는 법을 알아내었다. 김연아가 광고하는 믹스커피는 전장에서 군인이 그토록 그리워한 커피 한 모금의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질량분석기는 방부제와 첨가물을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식품가공기술의 발달은 대량생산 기술과 함께 패스트푸드의 발달을 가져왔다. 잠수함 주방을 설계하던 기술자는 맥도날드 주방을 표준화했고 맥도날드는 기술혁신과 품질관리로 엄청난 수익을 올려 물류공급의 표준모델이 되었다. 미국 전체 식품 생산 시스템은 맥도날드의 모델을 따랐고 별 대안 없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렇듯 미국은 60년대 이미 식품혁명이 완료 된 나라였다.

 

 

고등학생 때 처음 압구정동 한양쇼핑 맞은 편에 맥도널드가 문을 연 날을 기억한다. 한동안 줄을 서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90년대 맥도널드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반드시 유명 연예인을 볼 수 있었다. 맥도널드는 당시 압구정동의 젊은 소비문화를 리딩하던 대표적, 상징적인 브랜드였다. 강남역 뉴욕제과가 지하철을 매개로한 만남이었다면 압구정동 맥도날드는 자가용을 전제로 한 만남을 의미했다. 미국이 전수한 패스트푸드는 우리에게 단순히 식품혁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형할인점에 가면 프라이팬, 타파웨어, 감자튀김, 믹스커피, 일회용 식품들이 즐비하다. 군인을 위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온 것이 우리자신이라 보았을 때 우린 미국식 풍요를 향해 삶의 궤도를 수정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 책에 의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우린 미국을 알기 전엔 미국처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인류가 미국식 삶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나라인 것이다.

 

 

 

3.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대상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다

 

 

식품 혁명 이후의 욕구는 성혁명으로 이어졌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 한국, 일본이 포르노 매출이 가장 높은 3대국가라 하여 흠칫 놀랐다. 전쟁, 섹스, 음식 중 섹스의 발달이 제일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인간이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은밀한 욕구를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전투장면을 찍어야 했던 필요성과 당위성이다. 미군은 훈련용 영화를 만들어 나중에 분석을 해야 했고 따라서 헐리우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카메라 작동법을 배운 군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무엇을 만들었을까. 영화계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쳤고 기술과 장비는 나날이 발전해 표준화되기 시작한다. 53년 <플레이보이>지의 창간은 소비 지상주의에 부합하는 사회적 욕구였을까. 남성용 영화제작도 활발해져 6,70년대엔 B 급 포르노 영화가 성행을 이루고 80년대엔 비디오테잎과 캠코더의 보급으로 개인 비디오 촬영이 가능해진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포르노는 더 이상 장롱 속에 숨겨둔 비밀이 되지 못했다. 군사기술은 장난감과 게임발전도 견인했으며 가상현실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역으로 전쟁이 게임화되기에 이르렀다. 종이인형이 관절이 꺾이는 바비인형이 되기까지 미사일 기술자가 미사일이 견뎌야하는 중력이나 속력, 항력을 계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인형은 로봇공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가정용 로봇, 섹스용 로봇으로 발전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군대에서 비롯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파인만과 함께 핵폭탄에 필요한 타이밍 회로를 만들었던 히긴 보덤은 같은 시기 연구소에서 간단한 비디오 테니스 게임을 고안했다. 하필 이 게임이 전신이 되어 전자오락산업의 길을 열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회사들은 10년 간 군에서 쓰는 전자장치만 만들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회사였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인텔과 소니의 탄생에 기여했다. NASA 가 미국 산업계에 넘겨준 기술의 양은 곧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갈 첨단 기술과 동일하다. 구글의 위성 사진 서비스도 지상원격탐사를 위한 미군의 프로젝트가 상업화 된 것이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미국이 무엇과 전쟁을 벌이고 있느냐가 곧 향후 산업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미국을 위협하는 무엇이 곧 적대적 대상이 될 터이다. 우주개발이든, 질병이든, 테러이든, 무역이든,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자의 논리 전개에서 본의 아니게 발견하게 된 것은 미국의 전략적인 세계지배 구상이다. 현재 전 세계 유전자변형 농산물 생산량의 60퍼센트는 미국에서 나온다. 미국산 유전자 변형 농산물로 가공된 식품은 우리 대형마트에도 수두룩하다. 미국과 이해관계가 있는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형식품의 유해성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교묘히 옹호한다. 꼭 월가와 관계를 맺은 경제전문가들이 미국의 은행을 비난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미국이 고안한 논리는 가난한 나라에 보다 많은 식량을 분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가난하면 절망하고 절망하면 더욱 테러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전 세계가 테러와 전쟁을 하느니 아예 애초부터 원인을 없애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많은 기술을 가진 자가 많은 식량을 가지게 되고 많은 권력을 얻는다는 논리로 보았을 때 미국은 식량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할 수 있다. 여전히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쟁기술을 연구하고 신 무기와 첨단 장치를 개발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군에서 나온 부산물이 모두 자기네 나라를 먹여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이제 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구하는 무기로 적이 되는 나라의 사람을 대량 살상해온 이력을 안다.

 

 

그렇다고 갑자기 환경과 생태를 위해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편리한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버리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삶의 복원이며 미래지향적인 방안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새겨야 할 사항은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인류 문명의 자산이 ‘나쁜 것들’을 통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창출했다고 해도 나쁜 것의 원래 나쁜 속성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나쁜 것들이라도 지금 좋은 것이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나쁜 것들은 분명 나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훗날 좋은 것들이 될 확률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것들을 택할 당시 그것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야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 좋아진 사실과 결과가 나쁜 것을 택한 자들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택했던 이유는 그것이 택하는 자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파인만이 한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초에 폭탄을 제조했던 이유는 그 폭탄으로 사람을 살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폭탄을 제조한 적군에 맞서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레이더를 만들 땐 야간폭격을 대비해 사람을 대피시키려 했던 것이지 역으로 야간에 목적물을 찾아 공격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패리스 힐턴의 섹스 비디오에 나오는 속살이 분홍색이 아닌 에메랄드빛임을 보고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힐턴의 비디오와 1991년 걸프전 당시 CNN을 통해 중계된 야간폭격 장면이 같은 색이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다. 인간은 대단히 실망스런 존재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생존을 위협해도 결국은 다 같이 진화하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존재임을 믿고 싶다. 선택의 기준이 오로지 욕망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인간으로 남게 되지 못할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것을 택하여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인간과 나라가 더 자신들에게 떳떳한 일일 것이다. 불가피하게 나쁜 것을 택했다면 파인만처럼 최초의 그 불가피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의 선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존은 결국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선택을 인정하고 손 잡는 일이다. 순간의 선택이 어떤 한쪽의 피해와 상처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알고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은 궁극에 공멸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미국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유아독존이 아닌 서로를 위한 상존, 모두를 위한 공존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계속하여 그들의 나쁜 선택을 미화하고 정당화하기에 지구촌은 더 이상 공멸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패리스 힐턴의 초록 비디오가 걸프전의 초록 영상이 부디 원래 초록이 의미하는 자연과 희망의 상징으로 변화하는 선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저자가 오랜 기간 준비 끝에 이 책을 발간한 이유는 미국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책임을 더 자각하기 위함이었다고 믿는다. 저자가 바라는 다음의 초록은 아마 우리가 모르는 초록은 아닐 것이다.

 

 

 

덧붙임)

 

 

12.jpg


이 책의 결론은 '악덕이 베푸는 미덕'이다.

이른바, 본능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논리다.

가장 거슬렸던 표현은 발전했다, 진화했다가 아닌 베풀었다는

내재된 우월감의 잔상이다.


앞으로 더욱,

공존을 위한 책임있는 '선택'이 본능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미덕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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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고마워요 :)

계속 리뷰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요. 그리고 이제 취소. 발병 안 나실 거예요 히히히히히히히

차트랑 2012-05-0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워낙 적나나해서 관심밖이었는데...
한사람님의 리뷰를 읽으니 생각이 완전 달라지는데요??

저는 아직도 고리타분한 티를 벗지 못했나 봅니다 ㅠ.ㅠ
저 책을 어떻게 서재에 꼽아둔다?...생각 하면서 걱정부터 했거든요^^
저의 초등학교 동창생 이야기가 딱 맞나봅니다.
'너는 조선에서 왔냐??, 공간은 같되 시간은 왠지 다른 것만 같아...' ㅠ.ㅠ

2012-05-09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5-1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사람님,
고맙습니다

꽃도둑 2012-05-1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흥미롭겠는데요?... 세 개의 단어로 현대과학의 기술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칼자루였던 거군요,,,
이 저자의 관점이 다분히 미국에 손을 들어준거라면 그 칼자루를 던져버리고 새로이
갈아 끼우는 방법을 모색하던가..아니면 미국의 손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너무 깊숙히 너무 광범위하게 손길이 뻗어 있어서 어렵겠지요?,,^^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고. 권력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아 누구라도 한번 맛보면 그 중독성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과학적인 실험으로 입증된 결과도 있다. 권력은 두뇌에 코카인과 똑같은 효과를 일으켜 중독성 높은 도파민 물질을 상승하게 한다. 동물을 실험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도파민도 높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도 권력에 취하면 체내에 도파민이 과다 생성되어 오만해지고 공격적이 되며 성적으로도 왕성해 지는 것이다. 기분 좋은 흥분과 그로인한 자신감. 권력은 그것에 취하게 된 순간 흡사 마약주사처럼 체내에 빠르게 침투되는 위험한 약물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어쩌면 마약에 빠져 부모고 부인이고 자식이고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던 중독자들의 일생을 뒤돌아 성찰케 하는 일종의 사후 진단서이다. 그들은 조선조 황금빛 중흥기를 이끈 절대 권력자들이었고 모두 우리의 조상들이다. 우리는 중독자의 유전자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므로 어떤 이는 권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약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유난히 권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집착하는 성향의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혹시 내가 아직 권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주체자의 위치에 서보지 못해서 권력을 돌보듯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나는 마약을 해보지 않았기에 마약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저 피상적으로 주워들은 지식만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물론 마약을 해보았고 권력을 손에 쥐어보았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엇이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약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약을 해 본 자와 권력을 취해 본 자들의 일생을 주도면밀히 분석하고 파헤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왕이 되어보지 못했고 왕의 아들이 되어 본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들의 입장을 퍽이나 세심하게 배려한 듯하다. 그런 다음 후대의 사람들이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을 매우 곡진하게 전달하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많아 보였다. 내가 권력자가 되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그들을 연구한 건 아니지만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던 마약관련 지식을 알차게 수정해주고 새롭게 확장해주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영정조 시대를 바로 곁에서 목격하고 취재한 어느 유능한 탐정처럼 사건의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마침내 ‘권력과 인간’이라는 전체 그림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도세자를 쌀뒤주에 갇혀 죽은 미친 왕의 아들쯤으로 생각한다. 뇌리에 무엇보다 각인된 상징은 ‘뒤주’라는 엽기성이며 그 엽기적 공간에 아들을 몰아넣은 아버지의 비정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버지가 영조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인 것은 역사에 무관심한 독자들에겐 사실 거의 은폐된 역사와 다름없다. 굳이 뒤주와 영조, 정조를 연결시키려면 필연적으로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떠올려야 하는데 가장 쉽고 간단한 쪽은 아무래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 만한 잘못을 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즉, 죽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아버지에게)죽었을 것이라 믿는 것이 가장 편안한 방식의 추론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영정조 시기는 최고의 부흥의 시절이며 임금 또한 어질고 현명하기 짝이 없는 성인들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사치에 관심도 없고 친인척 비리에도 깨끗하고 - 외려 척결하였으면 했지 - 불철주야 국민만 생각하며 철저한 자기관리에 학식까지 우러러볼 수준의 대통령이다. 당연히 모두가 존경할만한 인물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절대자의 판단으로 실행된 아들의 죽음이라면 아들에게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와 동정으로 마음이 기울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죽을 짓을 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 죽을 짓을 안했는데 뒤주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겠지... 오랜 세월 내 머릿속에 기록된 사도세자는 불쌍하고 억울하겠지만 어떻든 당시 죽을 짓을 했기에 죽어야 했던 왕자였다.

 

 

그런데 과연 사도세자는 죽을만한 짓을 했던 것일까. 사도세자도 뒤주에 갇히면서 자신이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그것이 죽을만한 일이냐고 묻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여지껏 사도세자가 죽을 짓을 했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차기 임금으로 내정된 아들을 꼭 죽여야 했던 영조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죄인이 되어 죽었지만 아들인 정조가 어떻게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끌 수 있었는지도 연결고리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늘 중요 이슈는 과연 사도세자가 죽을 만큼의 짓을 했는지의 여부와 그 죽을 짓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선정성이 남달라 역으로 다른 연계된 인물들의 입장과 당시 배경, 여러 정황들을 가리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미쳤기 때문에 죽었다는 ‘광증(狂症)설’이 진실인지 당시 주도세력인 노론의 반대편에 섰다가 음모에 휘말려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이 진실인지 죽음의 이유를 따지는 타당성 연구만이 부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건의 사인에서 한발 물러나 렌즈를 교환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닌 절대 권력자와 권력을 위협하고 대항하는 반군의 관계로 피사체를 새롭게 주목했다. 주인공은 영조도 사도세자도 정조도 아닌 ‘권력’이라는 보다 확실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실체였다.

 

 

영조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 사람이었고 미친 아들이 급기야 자신을 죽일까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군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사건을 조작하고 자작극은 물론 사기극까지 마다않은 치밀한 계략의 종결자였다. <한중록>을 집필한 혜경궁은 친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단식과 자살기도까지 주저하지 않았던 철의 여인이었다. 이 세 명의 공통점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약은 순간의 행복감과 희열을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초조, 집착과 편집증을 불러오는 영혼의 쓰나미이다. 완벽한 권력자는 완벽한 정신병자이다. 마약과 같이 권력에 중독되면 진실이 하찮게 여겨지고 중요한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진실이냐 뿐이다. 오로지 자기 권력을 잃게 될까봐 모든 신경을 권력보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권력상실에의 두려움은 아마도 마약주사를 끊게 되는 두려움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반응이자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것이다.

 

 

영조는 권력을 잃을까봐 그 두려움에 진실을 외면하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조는 권력을 더 유지시키기 위해 진실을 조작하고 왜곡했다. 혜경궁은 무너진 권력을 복원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 이들이 가진 것은 권력이었고 잃은 것도 권력이었다. 이들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 자기 자신을 투자한 일은 권력을 만들고 지킨 일이었다. 권력은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으나 실행주체는 오로지 자신이기 때문에 궁극에 가장 사적인 욕망의 영역이 된다. 개인의 욕망은 결국 부모나 자식 같은 혈연관계나 부인과 남편이라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뛰어 넘는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그 권력의 크기를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지금처럼 임기 없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보장받는 절대자라면 그에게 있어 권력은 목숨과 동격일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아들이 다음의 왕이 되는 것이라면 죽기 전까진 그 누구도 왕의 권력에 흠집을 내어선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권력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사도세자 역시 광란의 순간엔 신하들의 두려움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그것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쾌감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왕실에서의 권력싸움은 곧 피를 부르는 전쟁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핏줄과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권력의 피(皮)는 혈연의 피(血)보다 두껍고 진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며 가장 마음 아팠던 사람은 권력이라는 옷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하고 피를 본 왕자, 가장 끈끈한 핏줄이었지만 가장 처참한 피의 숙청을 당한 사도세자였다. 가끔 드라마에서 완벽한 아버지를 둔 무능력한 아들을 목격할 때가 있다. 권력과 명예, 돈과 인기를 다 가진 아버지는 세상에서 더 없이 평판 좋은 인물이었지만 유독 아들에게만은 혹독하기 짝이 없어 늘 아들이 못마땅하고 꼴 보기 싫은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 노력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버지 앞에서만 주눅이 들고 실수투성이이다.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꼭 아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간만에 이룬 성과도 깎아내리고 자신처럼 완벽하지 못한 아들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린 이러한 통속의 드라마에서 아들의 행보가 어떠할지 너무나 잘 학습되어 있다. 아들은 점점 야비해 질 것이며 세상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아들은 필히 사고를 치게 될 것이며 아버지와는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아들의 삐뚤어진 복수와 아버지의 비열한 대응 사이에 아마도 치정과 불륜, 출생의 비밀이라는 자극적 스토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을 터이다. 우리가 쉽게 치부해온 그동안의 막장 드라마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피할 수 없는 유전자의 변형된 모습일지 모르겠다. 부자지간의 갈등과 출생의 비밀, 권력과 재산싸움에 얽힌 통속 시나리오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요즘 재벌에서도 유효하다. 왕실과 재벌, 그리고 드라마의 통속은 한통속이라는 게 새삼 씁쓸해지는 건 왜 일까.

 

 

그렇다고 마음의 병이 깊어 정신분열에 이른 사도세자가 모두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좀 더 약삭빠르고 현명했더라면 자신의 아들 정조처럼 자기 이미지를 포장하는데 능숙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에 자기 편을 더 만들고 아버지의 무시를 무시하고 주변으로부터 차근히 신뢰를 쌓아나갔더라면 설사 뒤주에 갇혔더라도 탈출구는 있지 않았을까 싶어 너무나 안타까웠다. 뒤주에 갇히고 난후 일주일 이상 사람들이 세자의 죽음을 방치하였다는 사실이 뒤주에 들어가라고 한 영조보다 더 소름끼쳤다. 세상은 역시 살아있는 권력에만 관심을 가진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갈 만큼의 죽을 짓은 안했을지 몰라도 뒤주에서 당연히 나올만한 아니 마땅히 나왔어야 할 죽지 않아도 될 짓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가진 자라면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살아야 할 이유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조와 정조, 혜경궁은 한 평생 지독히도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더 많았기에 그토록 비정한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적당한 위선과 처세술이 곧 권력을 굳건히 하는 기본적 기술이라는 깨달음이 서글프다.

 

 

인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 넘어가는 줄 모르게 흥미롭고 또 슬픈 책이다. 부록으로 실린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은 역사학자로서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독자 스스로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에 대해 짜릿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권력으로 오만해진 사람들을 목격하는 일은 슬픈 일상이다. 정치인뿐 아니라 재계인사, 유명 연예인, 스포츠 인물 할 것 없이 권력이라는 마약에 대책 없이 빠져든 사람들이 몰락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우울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릇 무상한 삶의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권력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그 무상함을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 심화시키는 결정적 폐인은 아닐까 싶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절대 권력자들은 자기가 쏘아댄 새들처럼 처량하게 추락하지 않았던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영,정조 시대를 촘촘히 둘러본 이 책은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비굴하고 초라해 질수 있는지 어떻게 잔인하고 교활할 수 있는지 가장 화려하고 막강한 임금의 실상을 통해 진실을 전달해 준다.

 

 

앞으로 우린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는 역사적 광경을 지켜보아야 할 시점에 도착해있다. ‘군주는 대단한 거짓말쟁이이며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통치철학을 훌륭하게 준수한 정조처럼 스스로 달이 되어 이 세상을 감시, 조종, 통제하는 통치자를 만나게 될까 두렵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인물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권력을 얻으려고 그 측근이 되고자 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가려내어야 할지 새삼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맛을 본 중독자들일 것이기에 더 강한 약효만을 원할 것이 자명하다. 이 책을 거울삼은 독자로서 나는 그저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는 명언만 기억하시라 조용히 돌아서서 중얼거리고 싶다. 슬프지만 그것이 권력에 집착한 중독자들의 말로일 것이라 혼자 끄덕이며 눈감아 드리고 싶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오늘날 치유가 가능하지만 권력자의 정신병은 불치병임도 함께 알려드리면서.

 

 

 

덧붙임)

 

 

 

1.jpg

 


신령스런 칼이 오래도록 땅에 묻혔으나
검광은 북두칠성을 쏘고

붕새가 날자 그 날갯짓 하늘을 덮네

대장부가 뜻을 얻음은 모두 이와 같으니

어찌 산수에서 세월을 보내리

- 사도세자의 문집 <능허관만고>, 아무에게 주다 中, 1758 -

 

 

불안한듯 분명한 개성이 있어 보이는 필체가 인상깊었다.

내용상 대장부의 뜻을 펼치지 못한 사도세자가

왕의 아들로 태어났음이 안타까워지는 글이다.

사도세자는 친필로 된 시를 그때그때 곁에 있던 시종에게 주었던 듯하다.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허공에 띄우는 그의 심경이 기울어진 필체와 함께

새겨졌다.

아무에게나 주었다는 그 아무개는 이 시를 읽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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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0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도세자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저절로 소름이 돋습니다.
한사람님 말씀대로, 일주일이나 뒤주 안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기다렸다는 사실이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세자가 약삭빠르거나 현명하거나.... 라는 문구, 한숨이 나오네요.
저는 이덕일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좋아해서리,,, 비판하는 분들도 많지만 말입니다. ^^

음,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할 올해........... 어쩐지 기대 하나도 안 되고 다시 기대하기도 무서운건 저 뿐일까요?
5월, 어버이날이네요, 저는 카네이션 화분 받았는데, 한사람님은?

숲노래 2012-05-08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들이 임금이라는 자리를 물려받거나 이어주려 하지 않으면,
스스로 조용히 제 삶을 일구는 흙일꾼으로 지내고자 한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할 까닭이 없겠지요.

한 자리를 혼자 차지하려고 다투니까,
꿍꿍이가 태어나고
나쁜 마음과 미움과 앙갚음이 생기겠지요.

2012-05-09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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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9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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