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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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은 안 해도 된다

 

 

 

   나는 농담 잘하는 사람은 부럽지만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농담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농담의 대상이 된 상대, 혹은 사건 등이 기분 나쁘지 않게 같이 자리한 모두가 유쾌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류의 사람 중엔 뼈있는 농담을 꼭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미 상대가 기분 나빠할 줄 알기에 농담의 형식을 빌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는 경우. 혹은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던져놓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비로소 농담으로 치부하며 얼버무리는 상황. 뼈 있는 말을 해 놓고 농담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거나 웃자고 한 이야기니 기분나빠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모두 진담의 위선으로 농담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해서이다. 


   나는 이미 말하여 지는 순간 누군가가 기분이 상했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그건 확실히 농담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 가깝다. 농담은 먹히지 않을 경우 상대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좋아 제공자에겐 어느 정도 본전인 방법이다. 농담이었다 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기분 나쁜 농담은 전달되지 않은 그 어떤 하찮은 진심만 못하다. 웃음이 사라지면 불쾌감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농담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공유되는 것이지 미리 계획하거나 나중에 포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담이 농담을 넘어서 진담 이상의 실력을 행사하게 되는 상황은 왜 발생할까. 문제는 늘 농담을 한 쪽 보다 농담을 들은 쪽의 해석의 문제인데 이 해석의 기준은 사람과 관계마다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농담이라고 모두 웃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농담의 진정성은 곧 가려진 숨은 뜻의 해독에 있기 때문이다. 농담의 진의, 그러니까 모든 농담은 진짜 뜻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농담은 가짜일 수 있는 것이다. 칭찬도 비난도 자랑도 흉도 모두. 


   이쯤이면 이 정도일 것이라는 상호 신뢰가 없이 이루어지는 무차별 농담은 혹시 사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편은 아닐까. 그런데 농담에의 공감이 상호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배경은 결국 농담의 내용이 뼈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농담을 안 해도 되는 것은 농담을 안 하기 때문이다. 결국 농담은 어느 정도 기분나빠할 소지를 반쯤 내포한 성질을 지니고 드러나는 개인 및 사회의 기획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분나빠해야 할 것이라면 굳이 농담을 하지 말고 그냥 진담으로 말하시오, 뭐 이런 방어 자세를 가진 사람인 듯하다. 이 진지함이 나도 지겨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 중에 농담 많이 하는 사람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나는 농담이 필요했다면 어쩌면 진담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글의 행간을 읽듯이 농담에서의 숨은 뜻을 읽는 수고가 귀찮은 사람이다. (참 피곤한 사람 ㅠ)

 

 

 

그의 농담만 소설이다

 

 

 

   그래서 일까.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희극이라고 써놓고 비극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는 것만 같아 한없이 허탈하고 쓸쓸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인간이 오늘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바로 내일, 아니 오늘 저녁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비극은 사실 대단히 웃기는 일에 속한다. (나는 최진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농담 하지마,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우리가 늘 죽어왔고 서로서로 죽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지독한 우리네 세상은 농담과도 같다고, 그 농담이라는 세상에 속한 우리네 인생은 모두 농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이토록 유쾌하지 않은 뼈 아픈 농담은 안 듣고 안 보느니 만 못한 슬픔이 된다. 소설의 ‘배경 전체를 하나로 통일 시키며 모든 곳에 스며 있는 한기’가 그 슬픔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기분이 정말로 나빠지는 운명 같은 농담인 것이다. 어떤 진담도 견줄수 없는 이것이 왜 농담이어야 하는가. 왜, 농담은 우리를 울게 하는가.

 

 

   농담으로 포장된 진담의 알맹이를 가볍게 툭툭 건네 온 우리 소설가 성석제는 인간은 ‘농담’하는 존재이고 우리 삶은 ‘소풍’과 같은 것이며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소설’이라 말했다. 밀란 쿤데라는 젊음은 실수이고 분노는 지옥이며 시간은 화해이고 농담은 운명이라 말한다. 그것만이 진담이라 주장한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뜻밖에도 내 지난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소설이 왜 나를 빠져들게 했을까, 도대체 좋은 소설이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마치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의 인생도 농담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의 꼬리 끝에 하나로 모아진 결론은 내 잘못을 인정하고 이제 그만 용서하자, 이런 현문우답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소설이 각자 주인공의 절실한 입장을 목격하면서 내 아픔과 실수를 간간히 엿볼 수 있는 무대라면 독자는 바로 자기 잘못과 그로인한 상처를 숨김없이 발견하는 동안 비로소 세상과 자신에 대한 용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세상의 위대한 소설은 이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운 좋은 독자는 무대 앞에서 나처럼 작가의 설득에 기꺼이 머리를 조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한 농담이었든 간에 그것은 그때 그들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속한 세상으로 귀환하여 저마다 농담보다 지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여기 사람들을 격렬하게 두드린다. 원래 모든 소설은 농담이었고 모든 인생은 농담이었는데 우리가 우리 이름표에 미인이나 추남이라 쓰지 않고 남과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같아지기 때문인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이 아닌 동명의 장르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이 그냥 농담인 이유는 다른 종류의 농담 아닌 소설을 대적하는 처사인 것이다. 일반명사가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체의 절대성에서 기인한다. 이 소설은 농담이다, 고로 다른 소설은 농담이 될 수 없다. 아니 그의 농담만이 소설이다. 이는 다른 소설에 대한 실례이고 무례이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유일하게 이해 가능한 독법인 것이다.

 

 

 

가벼움은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이다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농담으로 상징되는 가벼움에 대한 무게이다. 이 가벼움은 그 어떤 삶의 무게를 인지하는 사람도 깃털만큼 가벼워 질수 있는 無에 대한 가능성이다. 부재의 실존을 작가는 몹시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부여잡고 있던 소설 속 빈번한 ‘가벼움’을 무어라 변명했을까. 소설가의 산문에 꽂혀 빌려온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에 이런 힌트가 있다.

 

 

 

<농담> : “나는 이 먼지 날리는 포장도로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묵직한 가벼움을 느꼈다.”

<생의 다른 곳에> : “야로밀은 간혹 무시무시한 꿈을 꾸곤 했다. 그는 찻잔이나 숟가락, 펜같은 아주 가벼운 물건을 들어 올려야만 하는데 들어 올리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면 그 물건들이 가벼운 만큼 자신의 무력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자신의 가벼움에 짓눌리는 것이었다.”

<이별의 왈츠> :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비극적으로 살았고 결국 자신의 행위의 무게에 눌리고 말았다. 야콥은 자신의 행위가 너무도 가벼워 그것이 자기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무게가 없다는 것에 놀란다. 그래서 그는 이 가벼움이 그 러시아 주인공의 신경질적 감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서운 것이 아닌가를 자문해 본다.”

<웃음과 망각의 책> : “배 속의 이 텅 빈 주머니,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다. 하나의 극기 언제라도 다른 극으로 바뀔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는 가벼움은 가벼움의 무시무시한 무거움이 되었고 타미나는 이제 자기가 이 가벼움을 한순간도 더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책의 번역본들을 다시 읽으면서 비로소 이러한 반복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는 소설가 들이 쓰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주제(최초의 소설)에 대한 변용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 p176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008, 민음사

 

 

 

   작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을 이미 <농담>에서 발견했고 그 주제를 다음 작품에 계속하여 주장했다고 고백한다. 며칠 전 김훈의 <흑산>을 읽다가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터였다. 어떤 역사, 어떤 혼란을 그리더라도 결국 자연과의 조화로 귀결되는 그 하나의 실마리, 즉 작가의 작가된 본성을 관통하는 질문의 뿌리는 매 한가지다, 라는 깨달음. 밀란 쿤데라에게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웠던 깨달음은 우리 ‘삶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묵직한 가벼움’ 이 아니었을까. 새털 같이 가벼운 물건 하나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무력감, 그 가벼움에 대한 막중한 절망감, 쉽게 지나쳐 버린 가벼운 행동에 대한 자기 두려움,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기실 텅텅 비어만 가는 인생 주머니 속에 존재하는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자 그 ‘가벼움의 무시무시한 무거움’이었던 것이다. 없어서 더욱 분명하고 가벼워서 사무치게 무거운 건 우리가 살기 때문에 죽어지는 삶의 근원적인 슬픔이다. 나는 <농담>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무게가 똑같이 가벼워 사라질 만큼 희미했던 적이 모두 있었기 때문에 누가 더라 할 거 없이 공평하게 무거운 인생이었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작가가 수사한 이 다양한 삶의 무게들이 신기하게도 나와 똑같은 부피와 질량으로 되새겨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것은 마치 농담같이 짜릿하고 아슬아슬하다. 전율, 충격, 해방, 자유, 그렇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 다음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을 목격한다.

 

 

 

절대음감은 소설의 기술이다

 

 

 

   또 하나 이 소설을 읽어가는 재미는 은근히 감지되는 음악적 리듬감이다. 작가 스스로 스물 다섯 살까지만 하더라도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고 악기를 다루며 음악적 창작활동에 매진했다고 말한다. 소설의 건축술이라 할 수 있는 분할구조와 서술유형이 다분 음악적 구성을 따르고 있고 인물의 비율이 수학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은 루드비크, 야로슬라프, 코스트카, 헬레나, 이렇게 네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 되죠. 루드비크의 독백은 책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독백들은 모두 합해야 전체의 3분의 1- 야로슬라프 6분의 1, 코스트카 9분의 1, 헬레나 18분의 1- 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러한 수학적 구성을 통해 , 제가 ‘인물의 조명’이라 부르는 것이 결정됩니다. 루드비크는 가장 밝은 곳에 있으면서 안으로부터(자신의 독백에 의해) 조명받기도 하고 밖으로부터(다른 사람의 독백은 모두 그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이니까요) 조명받기도 하지요. 야로슬라프가 책 전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독백으로 그려 내는 자화상은 루드비크의 독백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수정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각각의 인물은 각기 다른 밝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명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인 루치에는 자신의 독백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는 루드비크와 코스트카의 독백을 통해 오직 외부로부터만 조명됩니다. 내적 조명이 없는 까닭에 그녀는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유리창 저편에 있어서 사람들이 건드릴 수가 없는 거죠.   -p128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한 번 더 소설과 음악을 비교해도 괜찮겠죠. 한 부는 박자예요. 각 장은 하나의 소절이고요. 이 소절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또는 아주 불규칙한 길이를 갖지요. 이것은 우리를 템포의 문제로 이끌어 갑니다. 제 소설들의 각 부분은 모데라토, 프레스토, 아다지오등과 같은 음악적 지시를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p129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008, 민음사

 

 

 

   하지만 이와 같은 수학적 구조는 작가가 미리 계산하여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어느 체코의 한 비평가가 알려준 공식이라 말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것은 늘 비평가의 몫이다) 템포의 변화는 곧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6부에 다소 이질적인 인물인 코스트카라는 변형된 마디가 출현하는데 이는 새로운 주제를 위해 섬세하게 기술된 의도된 장치라는 것이다. 작가는 음악을 작곡하듯 악기를 연주하듯 각 악장을 자기만의 음표로 빼곡히 채우는 사람이었다. 각장의 분량과 문장이 밀고 가는 속도가 전체 악곡의 균형을 위해 연출되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 한 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나는 여간해선 재미나면서도 그것이 재미로만 끝나지 않고 끝없는 사유를 유도하는 소설을 만나지 못했었는데 지난 주말동안 나는 온전히 이 소설에 빠져 있었고 다시 또 이런 소설을 만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야 했다.

 

   은희경 작가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는 소설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를 느꼈다고 했다. 나는 그 한마디 때문에 <정체성>을 집어 들었지만 작년 이맘때쯤인가 책을 덮으면서 큰 감명을 느끼지 못했었다. 어찌 된 것인지 잘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작가가 말하는 방식에 하나도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밀란 쿤데라의 전집이 새롭게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처녀작인 <농담>을 먼저 읽기로 한 생각은 기특하게도 적절했던 것 같다. 쿤데라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선 <농담>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좋은 소설의 요건과 나지막한 비밀, 그리고 삶의 진리까지 더불어 기쁘기 그지 없는 것들을 한아름 수확해 간다. 내게 이런 고마운 소설이 의미하는 것들은 요즘의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위로이다. 나는 나를 견디고 나를 이기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나를 가르치고 나를 지적하기 위해 소설을 덮는다. 소설은 내게 대답 없는 경쟁자이고 칭찬 없는 선생님이다. 이런 완벽한 소설은 편곡이 필요치 않으며 편곡을 할 수도 없다. 단 하나의 원곡으로서만 존재하는 절대음인 것이다.

 

 

나는 당신의 쓸만한 농담이고 싶다

 

 

 

   소설의 주인공인 루드비크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일 뿐이었고’ 그저 당시 기분 때문에 그랬던 것에 불과한 몇 마디의 농담으로 인해 당과 대학에서 축출되며 당시 체제의 불구대천의 연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바보같은 농담을 즐기는 성향이었지만 마을 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고 어엿한 대학생 신분이었던 루드비크는 졸지에 군대생활, 수감생활, 탄광생활을 차례로 겪게 된다. 청춘을 증오와 분노로 보내고 난후 고향에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며칠 후 고향을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일어난 농담 같은 에피소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고향에 돌아와 그 며칠을 보내면서 돌아본 과거에 의미없던 첫사랑과 친구들의 배신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치욕과 고통의 세월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누구에게나 청춘이 참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작가는 시기적으로 체코의 공산화가 이루어진 1948년 혁명의 시기 이후 사람들이 보여준 ‘위대한 집단적 신념의 시대’를 종교인 코스트카를 빌어 냉철하게 비판한다. ‘종교가 주는 것과 아주 유사한 느낌들’에 사로잡혀 ‘보다 높은 것, 보다 초개인적인 어떤 것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 이익, 사적인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일상과 사고, 의식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읊조린다. 복수와 증오, 분노에 사로잡힌 루드비크가 듣지 못하는 형식으로 그를 충고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루드비크는 마치 그 진심어린 작가의 충고에 화답하듯 자신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전조나 분위기 이탈로 보여지는 코스트카의 대목은 분명 작가를 대리하는 역할로 보여진다. 종교인이라는 이념에 자유로와야 할 지식인을 앞세워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복수를 열망하지요. 당신은 예전에 당신을 해친 사람들과 오늘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러고는 복수하는 거예요. 그래요, 당신은 복수하고 있어요. 당신은 사람들을 도와주고는 있어도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느껴져요.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증오는 또다시 증오를 낳고 복수의 복수를 계속 불러올 뿐 대체 무엇을 가져다 주나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지옥이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334p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파도가 나를 온통 집어삼켰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내 나이에 대한 분노였고, 자기 밖에 놓은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너무도 커다란 수수께께인 그런 나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자기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 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도 같은 열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  -344p

 

 

 

   나는 코스트카의 충고와 루드빅의 독백을 몇 번이나 읽었다. 인간은 자기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를 통해 상쇄한다는 그의 논리가 나를 집요하게 굴복시키려 들었다. 그 증오라는 것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결국 한 개인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라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개인에 분노를 투사하는 것이 우리이고 나라는 사실에 분노했음이다. 작가는 누구라도 단 한번이지만 치명적으로 저질러진 인생의 실수가 ‘괴물처럼 증식해 가는 그 고약한 농담’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실수는 절대 철회할 수가 없으며 ‘너무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한다고 설파한다. 그리하여 그 농담 속에 포함된 자신과 그 불변의 농담자체는 어떻게든 다시 원점으로 무화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다만 실수는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잊혀질 뿐이라는 통찰이 이리도 벅찬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의 영혼의 치유가 되는 장치로 음악을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계처럼 의미 없이 반복되어온 공산당을 선동, 선전하기 위한 정치음악이 아니라 그 옛날 친구들끼리 순수 음악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민속예술로서의 음악으로 귀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다분히 목가적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오래된 친구와 화해했다고 믿는다면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말한다. 작가는 끝까지 농담으로 여정을 마무리 한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이다 말하는 것 같았다. 음악으로의 귀결 직전에 펼쳐지는 후반부의 깨달음의 연속적 문장들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어제 나는 이 소설이 주는 깨달음을 몇 줄 문장으로 요약해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은 시간의 물결을 결국 화해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기억은 취사선택되고 실수는 망각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한 번 저질러진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이 다행이기도 한 이유는 그 잘못과 결과가 동등하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가끔은 당연히 울어야 할 대목에서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웃는다고 그것이 웃어야 할 일이라 마땅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웃음의 주인공은 당연히 울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 정말 살면서 내가 저질러온 만행과도 같은 그 고약한 농담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 내가 한 농담들은 곧 내가 걸어온 내 과거, 그리고 지금 숨 쉬고 있는 현재, 알 수 없는 미래의 모든 것이 될 터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내 삶의 진실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다만 당신도 나와 같다는 것만이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변변치 않지만 쓸만한 농담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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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느 촬영장에서 김효진이 책을 즐겨읽는데 그날은 [정체성]을 읽고 있다고 해서 학생 때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동갑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 뭐 저런 책을 읽나.. 배우가.. 이랬다니까요. 어쨌든 빌려서 대충 읽다 반납한 것 같은데 그때부터 김효진이 좋았어요. 유지태도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알아보는 김효진한테 반했다고 한 것 같아요. 문화적 코드가 통했다면서^^;; 그래서 한사람님 페이퍼 보면서 [정체성] 얘기는 없나.. 하고 쭉 봤어요ㅋㅋㅋ 은희경이 그런 말을 했군요. 근데 이 책은 왜 새 판본이 안나올까요. 기다리는 1인, 바로 저.

새해되고 처음이에요^^

stella.K 2012-01-1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길게 쓰셨구만요.
얼마의 양을 쓰느냐 보다 진지하게 썼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ㅋ
그니까요. 전집으로 읽으시지 않고. 예쁘게 잘 나왔더만.
젊었을 때 멋모르고 참을 수 없는...을 사 읽었다 뭐 이렇게 소설이 어렵나 해서
못 읽겠던데 지금쯤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저의 꼰대(사부)가 밀란 쿤데라와 하루키를 좋아했었어요.
그후 한참만에 다시 만나니까 그 둘을 욕하더군요. 늙으니까 노쇄해져서 노망난 것 같다고.
요는 글이 별볼 일 없어졌다는 거죠. 작가가 오래되면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반짝반짝 할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ㅋ

보물선 2012-01-1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빼꼼~~~^^ (슬며시 얼굴을 들이 밀어 봄)

정말 오래간만에 왔어.
지난 두달쯤 회사일이 너무 정신 없었거든.
마무리 딱 짓고, 3일간 제주를 다녀와 오늘 출근했다우~
그래서인지 오늘이 올해의 첫날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하다니깐^^

다행이야. 설날이 곧 있어서.
새로운 한해를 다시 선물 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내 새해 인사는 받았지?
그새 당신은 달인이 되셨드만! 축하축하!!!
근데 소설은 어디 갔어?
18회 이후 못 읽어서 아주 아쉬워.
개인 출판이라도 해라~ ^^*

cyrus 2012-01-1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쿤데라 전집이 출간되었더라고요. 쿤데라 소설은 안 읽어봤는데 표지가 멋지더라고요.
마그리트 그림이라서 구매욕이 들기도 하고요. 이번 기회에 집에 있는 민음사 전집 <농담>을 읽어봐야겠어요 ^^

꽃도둑 2012-01-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은 일단 길어요. 할 말 다하겠다는 의지가 보이고, 성실해요
또한 짜임새 있는 아주 건강한 글이에요.
저 여간해서 혹~ 하지 않는데...일단 긴호흡이 경이롭네요.
아무래도 제가 폐활량이 적은가봐요...ㅎㅎㅎ 언젠가 날 잡아서 글을 아주 잡으리라 맘 먹고 있는데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몇 해전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긴 읽었는데 정말 제 스탈이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감성코드 에러였지요. 작가와 독자인 저와의 간극이 흑해 갈라지듯 그렇게 쩌~억 갈라졌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좀 좁혀지려나?...암튼 농담에 대한 진지한 견해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01-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좋았는데ㅎㅎ 물론 제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농담이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권 뿐이지만요. 이건 여담인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한테 농담이나 장난을 안걸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농담을 걸면 나는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일테니...

2012-02-20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0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