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말에 나온 책으로 언론리뷰에서 '묻힌' 책의 하나는 이택광 교수의 <무례한 복음>(난장, 2009)이다. "엉터리 시장주의와 먹고사니즘이 판치는 한국사회에 날리는 직격탄!"이란 카피가 책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시사칼럼/비평 모음집인데(저자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들을 갈무리한 일종의 '블룩'이기도 하다), '무례한 복음'이란 타이틀은 좀 의외다(의외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2005)를 연상시키는 부제 '쾌도난마 한국문화'도 좀 덜 참신하다. '문화연대기 2008-2009'라는 영어 제목이 책의 실상에 가장 가깝다. 그리고 그게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가장 적극적으로, 대놓고 '실시간 문화비평'을 하는 '문화비평가'들이 드물어진 시점이라(그 많던 문화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의 작업이 도드라져 보인다. 쌓이게 되면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력한 자료(연대기!)의 하나가 될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9. 08. 08) "우리 사회, 먹고사니즘만이 횡행"
2007년 12월 4일부터 2009년 2월 13일까지의 대한민국.
문화평론가 이택광(41ㆍ사진)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가 쓴 비평집 <무례한 복음>(난장 발행)의 평론 대상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강마에와 용산참사와 ‘디자인 서울’과 김연아에 열광하는 40대 아저씨들이 한 두름으로 엮여 도마에 오른다. 정신분석의 방법론을 회칼 삼아 이 교수가 가른 대한민국은, 비릿한 쾌락과 ‘먹고사니즘’으로 뱃속을 채우고 있다.
“지금 사회에서 정치는 실종됐습니다. 자본주의가 주는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어요.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비평이 사회를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 교수는 “숨어 있는 문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문화비평이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 영화 비평, 음악 비평과 같은 장르 비평은 이미 설 자리를 잃었다”며 비평의 책무, 또는 존재 가치를 사회에 대한 ‘개입’에서 찾았다.
“나는 문화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것을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비평은 이론의 자기지시성을 벗어나 그 이론의 대상을 현실로 돌려세우는 실천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입니다.”
예컨대 원더걸스에 대한 열광에서 이 교수는 귀엽고 섹시한 이미지를 ‘나눠 갖는’ 방식에 주목한다. 각 세대가 원더걸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원더걸스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10대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10대가 ‘어른들’의 시선을 받으려면 원더걸스처럼 기성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존재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기성 사회가 강조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우리 사회에는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쾌락의 평등주의, 그리고 ‘나도 먹고 살아야되지 않겠느냐’는 먹고사니즘이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실용과 경제를 구원이라 외치는 ‘무례한 복음’이 너무도 강렬하게 파고들고 있어요. 문화비평의 역할은 대중에게 그러한 진실을 간파하는 감식안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유상호기자)
09. 08. 11.
P.S. 다양한 문화현상과 사건들을 스케치하고 촌평과 함께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저자의 '문화비평' 대상에 '로쟈'도 한 차례가 거명되고 있는데, '이론수입국의 징후'(08. 03. 09)란 꼭지에서다. 랑시에르 번역논쟁을 아예 사건일지로까지 정리해놓기도 했다(215쪽). '로쟈'와 관련된 부분은 이렇다(213-214쪽).
일전에 랑시에르 번역본을 가지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바 있다.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가 랑시에르의 한글 번역본에 대해 비평한 것이 발단이었다. 옛날에 비한다면 훨씬 살살 다룬 것 같은데도, 옮긴이가 로쟈의 오역 지적을 참지 못했는지 고소까지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건 알라딘이 옮긴이의 항의로 로쟈의 원 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게 더 황당하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알라딘이 로쟈 때문에 덕본 게 얼마인가? 지금이야 어떤 '계약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초기에 알라딘에 '자발적'으로 논평을 올려준 건 로쟈였다. 알라딘도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존에 오르는 자기 책에 대한 험담에 불평을 하곤 하는데, 이런 불평 때문에 아마존이 '자발적'으로 그 논평들을 지워버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게 이른바 '시장질서'다. '시장질서'가 싫다면, 뭐 그때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지만, 기업논리를 내세우겠다면 시장질서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가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자들끼리 연대의식을 기를 필요가 있다. 학문은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 학문 집단의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보면 학문은 일종의 체계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학문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거인' 위에 올라탄 난장이에 불과하다. 좀 틀렸다고 해서 잡아먹을 듯이 덤빌 이유도 없고, 그 틀린 걸 누가 폭로했다고 해서 발끈할 이유도 없다. 틀렸다면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수정해가는 게 올바른 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사법부'의 힘을 빌려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 옮긴이의 발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론수입국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정확한' 번역일 테고, 이런 완벽한 번역물을 혼자 만들어낸다는 건 여러 모로 한계가 있다. 사후 교정이 필수적인 거다. 따라서 이런 '소란'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역을 지적하는 걸 하나의 장르로 만든 게 로쟈의 업적이라면 업적이고, 이런 '불경한' 업적에서 우리 방식의 '사유'가 출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알고 보면, 서양의 철학이란 것도 모두 고전에 대한 오역과 오독을 지적하면서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인문학자들의 '연대의식'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한가지 해명하자면 알라딘과 '로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계약관계'도 아니다. '알라딘 서재'의 이용약관에 동의한 것 말고는 그렇다(주 거래서점이니 돈은 내가 더 많이 쓰는군!). 가끔 접하는 이런 의혹/오해는 그 관계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뻘짓'을 내가 하고 있는 건가란 의문은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