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잡지 <공간>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진중권 편, <미디어아트>(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것이다. 미디어아트에 절반을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에 별반 관심이 없다 보니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못한 책이다. 미디어아트의 현단계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해봄 직하다.
공간(09년 8월호) 미디어아트, 예술의 최전선
“20세기에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학을 구상하게 했듯이, 21세기에 컴퓨터와 디지털이라는 합성기술 또는 기술생성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미학을 구성할 과제를 제기하다.”
‘예술의 최전선’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 <미디어아트>의 편자가 서문에 적어놓은 문제의식이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8명의 인터뷰를 모은 이 책은 그러한 과제가 아직 완전한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게 한다. 디지털 예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서 미디어아트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현 단계의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상응하는 미디어아트의 구호는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소위 정보혁명의 생산패러다임이 가능하게 만든 ‘기술합성’은 오늘날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게 하는 대신 ‘혼합현실’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초 군사․산업 용도에서 개발된 영상기술은 ‘뉴미디어아트’ 혹은 ‘디지털 예술 실천’을 낳았다. 이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성격을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을까? 몇 사람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로이 애스콧은 디지털 아트가 창출해낸 ‘가변현실’이 우리의 자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과 정체성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이러한 변형적 인격의 추가가 미디어아트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트 위의 모든 파이버와, 노드, 서버가 우리 자신의 일부이고 잠재성이라면, 이 네트와의 상호작용은 분명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통합된 자아 대신에 다중자아를 갖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게 애스콧의 낙관주의다.
컴퓨터게임의 열광자인 도널드 마리넬리는 지금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면 “세계는 비디오게임이고, 모든 인간은 그저 아바타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초당 100메가바이트의 속도로 어디서나 무선 접속이 가능해지는 현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북한 전역에 비행기로 닌텐도 DS 시스템을 대량으로 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한다.
인터랙티브 아트 작업을 하는 사이먼 페니는 신체와 공간과 사물 사이의 ‘교섭’, 곧 오브제와의 신체적 인터랙션을 화두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직까지 많은 미디어아트가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하는데, 작업의 목적과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이 잘 융합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그 역시 낙관주의의 대열에 선다.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게임의 세기가 될 것이며, 게임의 멜리에스나 뤼미에르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모바일 게임의 셰익스피어도 탄생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인터랙티브 아트에서도 ‘작가’는 전통적 예술에서와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일까?).
새로운 3D 디스플레이를 발전시켜온 일본의 가와구치 요이치로는 자기복제를 하는 인공생명의 창조를 예술적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그에게 예술이란 한마디로 ‘생존’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과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나 로봇의 형태로 아직까지 고안해낼 수 있는 유전적 알고리듬은 5억 년 전의 생명체 수준이다. 진짜 생명체의 신비로운 부분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며, 새와 물고기와 나비와 지네, 바퀴벌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키네틱 아트 작업에서 로보틱 아트로 넘어가고자 하는 한국의 작가 최우람은 기계에 인간과 동등한 욕망이나 욕심, 잠재욕구까지 불어넣고 싶어 한다. 마치 조물주처럼 기계 생명체들의 생태계까지 만드는 것이 그의 예술적 야심이다. 그가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의 30-40%는 동물과 식물을 바라보는 데 바친다고 한다. 그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완결된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은 예술과 기술의 공조이고, 공진화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첨단 기술을 통해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나고, 기술자(엔지니어)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더 나은 기술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 미학을 관장해온 칸트적 미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듯하다. ‘미적 자율성’이나 ‘무목적의 목적성’ 같은 개념이 예술과 기술의 극단적인 결합 형태인 미디어아트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과 ‘기술’을 모두 뜻하던 ‘아트(Art)’란 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싶다. ‘예술의 최전선’은 그렇게 ‘예술의 기원’과 만난다.
09. 0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