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한글역주 시리즈의 하나로 <중용한글역주>(통나무, 2011)이 출간됐다. <논어한글역주>(통나무, 2008)로 방향을 잡은 이후엔 파죽지세다. 올해 안으로 <맹자한글역주>까지 출간된다고 한다. 예전에 <도올선생 중용강의>(통나무, 1995)를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도올의 책이 흔히 그랬듯이 나오다 만 책이었다. 사정이 좀 달라졌다는 걸 알겠다. 인터뷰기사에서도 저자의 진지한 태도가 읽힌다. '새로운 문명' 얘기에는 아직도 공감하기 어렵지만...    

  

한겨레(11. 07. 20)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모든 극단 포용하는것”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가 최근 동양의 고전인 <중용>을 우리말로 풀고 주석을 붙인 <중용한글역주>를 펴냈다. 김 교수는 2008년부터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한글 세대를 위해 동양의 고전 역주 작업을 계속해왔다. <논어>, <효경>, <대학>에 이어 이번에 <중용>을 펴냈으며, 올해 출간할 계획인 <맹자>까지 펴내면 ‘사서’를 모두 우리말로 옮기게 된다. 특히 이번 <중용한글역주> 작업에 대해 김 교수는 “나의 사상 역정의 모든 생각과 체험을 집결한 분수령”이라며 “나의 사상은 <중용한글역주> 전과 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중용> 한글역주 작업을 이처럼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8일 서울 동숭동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중용>에는 인간과 인간이 속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며 “과연 인간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긍정적인 건설의 철학으로서, 서양문명의 한계에서 벗어나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용>의 문헌학적 배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찍이 사마천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었다”고 했지만, 청나라 때 옛 문헌을 의심하는 ‘의고풍’ 학문이 번성하면서 이를 믿지 않는 시각이 한때 대세를 이뤘다. 특히 <중용>은 유·불·도의 사상적 면모를 모두 포함하고 있고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논술을 펼쳐가는 방식으로 이뤄졌기에, ‘한나라 초기에 당시 제자백가의 논의를 취합하여 만들어진 저술이 아니냐’는 시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3년 중국 허베이성 궈잔촌에서 대량으로 죽간이 발견된 뒤, 자사의 존재와 그가 <중용>을 저술한 사실 등이 문헌학적으로 증명됐다. 김 교수는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정신문명의 정수가 생성된 시기를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정도로 올려 잡아야 하며, <중용>이 제자백가의 논의를 취합한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보다 앞서 그 정신적 원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 그는 “결국 <중용>은 자사가 공자의 사상을 망라하여 ‘유교’라는 사상의 체계적인 틀을 만들어내기 위해 펼친 작업”이라며 “그런 관점을 전제로 깔고 <중용>을 풀이했다는 것이 내 작업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은이인 자사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면, <중용>의 핵심은 ‘성’(誠)으로 압축된다”고 말했다. ‘성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요, 도는 스스로 길지워 나가는 것이다’(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 등의 문장에서 나타나듯, 성은 ‘천지(天地)의 성실한 모습’, 곧 끊임없이 창조적인 현실태로서 우주 자연의 운영 원리를 뜻한다고 한다.

또 흔히 ‘중용’을 ‘이것과 저것의 가운데’ 정도의 뜻으로 쓰는데, 김 교수는 “의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모든 극단적 상황들을 포용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간이 아니라, 만용과 비겁을 포용하는 데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이라 한다.

<중용>의 이런 사상적 면모에 대해 김 교수는 “서양 사상은 완전과 불완전, 보편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나누어놓고 생각하지만, <중용>은 모든 극단을 포용하며 ‘불완전하지만 완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서양 사상은 신이나 최고의 선(善) 등 인간 외부에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에 기대는 목적론적 성격이 강하지만, <중용>에 담긴 사상은 끊임없는 우주의 운영 원리를 담고 있는 인간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중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에 대해 주체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는 인간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느냐를 고민하는 창조와 건설의 철학”이라고 역설했다. 홀로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삼가는 ‘신독’(愼獨)의 개념이 이를 압축해서 드러낸다고 했다.

최근 유교를 정신문명의 기반으로 다시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 공산당 역시 유교 정신의 정수로서 <중용>에 주목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근본적으로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서양 사상은 더이상 인류를 이끌고 나가기에 부족하다”며 “중국 문명이 <중용>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해야 하는데, 우리가 나서서 선구적 모델을 만드는 지렛대 구실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면 ‘꼰대들이 읽는 고리타분한 규범윤리’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중용>에 담긴 가치들을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최원형 기자) 

11. 07. 20.   

P.S. <중용한글역주>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김진석의 <우충좌돌>(개마고원, 2011)로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저자가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일련의 사회비평집 가운데 하나다. 부제가 '중도의 재발견'이니 '중도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책으로 읽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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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hema 2011-07-20 19:10   좋아요 0 | URL
김용옥의 특기가 "나오다 만 책"이지요. 도올문집 시리즈도 1차분 100권 낸다고 떠들고서는 2005년에 도올문집9 나온 이후 안 나오고 있지요. 김용옥이 100권을 쓸 수 있을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로쟈 2011-07-20 21:57   좋아요 0 | URL
전력은 그런데, 최근의 행보는 좀 다르네요...

미국사람 2011-07-21 06:49   좋아요 0 | URL
도올의 중용강의는 상편은 책으로 나왔고 하편은 출판이 안되었는데 하편은 인테넷에 텍스트 화일로 돌아 다닙니다. 파일을 읽어보면 거의 완전한 형태인데 왜 출판이 안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 아마 도올서당에서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정리한 것인지...

도올의 책은 거의 전부 읽어보았는데 재주가 너무 많아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방해가 된 것 아닌가 싶읍니다. 방송나오구 기자하고 하면서 시간이 없겠조. 다만 이번에 나오고 있는 13경 주석은 도올이 거의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벌이는 일인 것 같아서 약간 기대가 됩니다. 글쎄 워냑 튀는 사람이라 끝까지 갈지는 모르겠읍니다만.

학자로 성공하려면 사람이 단순 무식해야하고 하고 공부 이외에 재주가 없어야합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은 학자로서 성공하기 어렵죠. 주변에 보니까 학부시절 공부잘하던 친구들보다 무식하고 성실한 쪽이 오십 넘어서 돋보이더군요.


로쟈 2011-07-21 08:07   좋아요 0 | URL
도울이 21세가 3대 과제 중 하나로 '학문과 삶의 소통'을 들기도 했는데, 그런 면으로는 가장 성공한 학자이긴 합니다. 동양철학 전공자로 그만큼의 대중적 영향을 가진 학자도 없을 듯하니까요. 학자의 사회적 용도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번주 관심도서 가운데 하나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자서전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 2011)이다. 역사가의 자서전이라고 하니까 강만길 선생의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을 비롯해서 몇 권의 책이 떠오른다(사실은 몇 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국내 역사가로 김용섭, 국외로 눈길을 돌리면 에릭 홉스봄과 하워드 진 정도. 그래도 다섯 명은 채웠기에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한편 <역사를 쓰다>의 책소개에는 강만길 선생과 이이화 선생을 이렇게 비교해놓았다.    

강만길 선생은 기존의 보수적 역사학계의 반대편에서 최초로 분단 시대의 역사학을 주창하고, 좌익계열의 독립운동 활동을 우리 독립운동사에 포함시킴으로써 근현대사 연구의 큰 족적을 남겼지만, 선생 역시 기성학계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이이화 선생은 고졸 학력에 제대로 된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역사를 쓰다- 이이화 자서전
이이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자서전, 2010년 제25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구판절판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해방시대 학자의 역사연구 역사강의
김용섭 지음 / 지식산업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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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5월 2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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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7-20 03:31   좋아요 0 | URL
조르주 뒤비(Georges Duby)의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인 '역사가의 자서전' <역사는 계속된다(L'histoire continue)>를 절대 빼놓을 수 없죠! ^^

로쟈 2011-07-20 08:58   좋아요 0 | URL
네, 뒤비도 있군요. 한데 대담이라 종류가 약간 다르긴 해요.^^

람혼 2011-07-20 15:12   좋아요 0 | URL
<역사는 계속된다>는 대담이 아니라 일종의 학문적 회고록이라고 해야겠죠.^^

로쟈 2011-07-20 15:25   좋아요 0 | URL
레비스트로스 편처럼 디디에 에리봉과의 좌담 회고록으로 (잘못)기억하고 있었어요.^^;

람혼 2011-07-20 19:59   좋아요 0 | URL
조르주 뒤비가 아니라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이 디디에 에리봉과 함께한 회고적 성격의 대담집, 그것도 참 재밌죠.^^

로쟈 2011-07-20 21:35   좋아요 0 | URL
같은 동문선 책이다 보니 헷갈렸네요. 뒤비의 책은 안 갖고 있어서요.^^;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소식지 출판문화(548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이달에 다룬 주제는 '책의 혁명'이다. 책의 역사, 혹은 독서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손에 닿는 대로 열어본 소감을 적었다. 빌미가 된 건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였다.  

출판문화(11년 7월호) 책의 혁명, "손에 책을 들게 하라"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로 유명한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신작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가 출간돼 들여다보면서 ‘책으로 읽는 세상’은 ‘책세상’이기도 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를테면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다. 또 다른 대표작 <책과 혁명>(길, 2003)으로도 널리 알려진 단턴은 ‘책의 역사가’로도 불리는데, 현재는 하버드대학교의 도서관 관장으로 재임중이다. 그가 책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눈길을 돌리게 된 배경일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의 미래>가 제목처럼 전적으로 책의 미래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책의 미래, 현재, 과거를 차례로 살핀다. 원제가 <책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Books)>(2009)인 것은 그 때문이다.   

<책을 위한 변론>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이라고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에 인용된 제목이기도 하다. 번역본으로는 <속도에서 깊이로>가 먼저 나왔지만 원서는 <책을 위한 변론>보다 조금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손에 책을 들게 하라’란 장에서 단턴의 책을 언급할 수 있었다. 저자 파워스가 하버드대 출신인 걸 고려하면 두 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이기도 하다. 파워스가 인용한 단턴의 말은 책의 지구력에 대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종이책을 말하는데, 책은 어떻게 해서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소셜미디어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책은 정보를 제공하고 쉽게 넘겨보기 편리하고 편하게 누워서 읽어도 좋고 보관하기도 쉬우며 쉽게 망가지지도 않는 정말 놀라운 도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업그레이드하거나 다운로드 받을 필요도 없고 부팅을 하거나 암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으며 전원을 연결하거나 웹에서 가져올 필요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책이 갖고 있는 이런 편의성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대체되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전자책이 대중화되고 어느 정도 종이책의 역할을 대신한다 할지라도 책의 종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단턴은 물론 책을 사랑하며 특히 구식 책을 좋아하는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까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기호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 또한 대담집 <책의 우주>(열린책들, 2011)에서 책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고정관념에 일침을 놓는다. 컴퓨터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매체가 있어야 하며 책보다 더 나은 매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컴퓨터도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두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읽노라면 두 눈이 테니스공처럼 부풀어 오를”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므로 욕조 안에서나 침대에 누워서는 읽을 수 없다. 적어도 불편하다. 책도 하나의 도구라면 에코가 보기에 이미 그 기능과 효율성에 있어서는 완벽함에 도달해 있다. 즉 개선의 여지가 없다. 마치 수저나 망치, 바퀴나 가위 같은 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놀랄 만큼 뛰어난 고안품이란 의미에서 책은 일종의 ‘슈퍼노멀’이다.     

 

도구로서 완벽함을 자랑하지만 사실 책은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 도구의 사용자, 곧 독자를, 독자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수저나 망치로는 대신할 수 없는 그 변화는 책을 통한 내면의 발견 혹은 발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자가 발명됐어야 했다. 문자로 된 어떤 기록을 담은 매체가 책이기 때문이다. 그 책을 사람들은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1000년 이상 동안 그 읽기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도서관이나 수도원에 앉아 큰소리로 책을 읽었고 소리 없이 책을 읽는 묵독은 특이하거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때문에 독서는 외부 지향적이고 군중 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다.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고 집단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독서는 구두 기술이자 사회적 기술이었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고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책 또한 아주 비쌌기 때문에 독서는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어려웠다. 아니 실상은 독서 경험이 진정한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개인은 혼자서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가 탄생시킨 개인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에서 환기시켜준 사실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속으로 책을 읽은 최초의 인물은 4세기 후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눈동자로 책을 훑어보고 마음으로 의미를 이해할 뿐 목소리는 조용하고 혀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적고 있는데, 이것이 묵독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앞선다. 처음에 묵독은 특이하고 유별난 행동으로 간주됐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점차 독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된다. 이렇듯 혼자 읽는 경험은 함께 읽거나 소리 내어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속도에서 깊이로>에서 파워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읽는 것은 외부의 통제나 영향력에 종속되지 않는 나만의 내적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러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만의 읽기와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개인’은 아직 소수였다. 책이 너무도 비싼 사치품이었던 데다가 지배계급이었던 교회와 귀족층은 독서와 그로 인한 내적 경험이 보편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묵독은 위험한 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사업가이자 기술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손으로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금속인쇄기를 개발해냈고 이후에 세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의 저자 존 맨이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구텐베르크는 무엇보다 사업가였으며 성경을 대량생산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한 ‘초기 자본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발명한 인쇄술은 예기치 않은 속도로 확산되면서 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455년, 그가 자신이 만든 인쇄기로 처음 성경책을 몇 페이지 인쇄한 해 유럽 전역에서 인쇄된 서적은 모두 합쳐야 수레 하나를 채울 정도였지만, 1480년 즈음에는 120여 곳이 넘는 유럽의 도시와 마을에서 책이 인쇄됐고 1500년까지 대략 3만여 종의 책 수백만 부가 찍혀 나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매년 100억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러한 양적인 팽창과 확산이 산업적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책의 확산은 독자를 일반화했고 읽기를 보편화했다. 이러한 독자 대중의 탄생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를 원제로 갖고 있는 단턴의 <책과 혁명>이 보여준 바대로 ‘금서의 사회사’, 조금 일반화해서 ‘책의 역사’는 근대 사회사와 문화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만들어낸 인쇄술을 인류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발명으로 꼽는 이유이다.  

한편 그러한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 금속활자의 발명이라면 우리가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서지 않는가? 스티븐 로저 피셔도 <읽기의 역사>(지영사, 2011)에서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 “1200년대 한국 인쇄업자들은 중국이 발명한 활자인쇄를 역사상 최초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한국 인쇄업자들은 1403년에 이미(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도 한 세대 앞선다) 조립식 금속활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와 같은, 인쇄술의 급속한 파급과 책의 확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는 “상업적 시장도, 인쇄업자 조합도, 생산과 유통의 상승작용도, 경제적 부 혹은 사회적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읽기 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금속활자인쇄술과 자본주의적 기반의 상호 상승작용이었지만 동아시아는 그러한 배경을 갖고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15세기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한글로 인쇄된 책자를 펴내게 했지만 고위층과 학자들에게만 수 백부를 배포한 식이었다. 예외라면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휴머니스트, 2008)가 보여주듯이 국가 정책적으로 보급한 <삼강행실도> 같은 경우였다.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윤리‧도덕 교과서로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백성의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출판이었다.  

<읽기의 역사>에서 피셔가 지적하는 대로, 문헌 생산이 궁정과 봉건귀족들의 독점을 벗어나기 못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에도 불구하고 출판의 상업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유럽에서 대량인쇄는 문자언어를 보편화시켰고 책이라는 상품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적 개인을 발명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공동체의 출현을 낳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쇄술에 의한 독서 혁명이야말로 근‧현대 서양을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축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공고히 한 토대이며 자양분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육영수, <책과 독서의 문화사>) 분명 인간이 책을 읽기 위해 진화한 것은 아니지만 책은, 책의 발명과 대량보급은 인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책의 혁명’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1. 07. 18.  

P.S.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면서, 그리고 쓴 이후에 모은 책들 가운데는 프랑스 저자들이 쓴 서양 독서의 역사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2판)와 김상웅의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시대의창, 2008), 폴 콜린스의 <식스펜스 하우스>(양철북, 2011) 등도 포함돼 있다. 불볕 더위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피난처'를 따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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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9-19 23:19 
    이번달 출판문화(550호)에 실은 출판 칼럼을 옮겨놓는다.주제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에 대해 썼다. 원고를 써야 할 때쯤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가 손에 잡히기에 읽은 게 빌미가 됐다.출판문화(11년 9월호)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 책중독자지난 7월에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를 빌미로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란 주제를 다룬 바 있다. 구텐베르
 
 
비로그인 2011-07-18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을유문고로 나왔던 E. 그롤리에의 <도서 출판의 역사>(원제: 도서의 역사)에서 '구텐베르크의 시도에 앞서 인쇄된 한국의 어떤 책이 알려져 있다'는 식의 표현을 보고 기분이 묘했던 적이 있었는데요(한국의 '어떤 책'이라...) ㅋㅋ 그러고 보니 에스카르피의 <문학의 사회학>도 생각나네요. 이젠 옛날 책들이로군요^^

로쟈 2011-07-18 19:58   좋아요 0 | URL
역시 을유문화사 책에 정통하시군요.^^ 에스카르피는 저도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너무 오래전인데요.^^;

2011-07-18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 푸른역사 아카데미의 목요강좌에서 '<이방인> 다시 읽기'란 강의를 진행하기에(http://blog.daum.net/purunacademy/52) 강의자료를 챙기다가 두달 전에 읽은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 생각나 찾아서 옮겨놓는다. 민음사 세계문학판으로 다시 나온 <이방인>(민음사, 2011)을 거리로 삼았는데, 이후에 번역본은 <이방인>(열린책들, 2011)과 <이인>(문학동네, 2011) 두 종이 더 추가됐다. 가능하면 모두 비교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한겨레(11. 05. 09)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책세상 펴냄·1994)은 김화영 선생이 1987년에 번역해서 출간한 번역본의 3판 1쇄 버전이다. 그 책을 1995년에 읽은 것 같다. 최근 선생께서 20여 년 만에 새 번역본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신간 <이방인>(민음사 펴냄·2011)을 구입했다. 몇 페이지만 비교해봐도 어휘나 구문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그 강렬한 줄거리는 그대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슬퍼하기는커녕 한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누는 타입의 청년인 뫼르소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휴양지에서 한 아랍 청년을 총으로 쏴 죽이는데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도 상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는 이야기다. 

다들 배운 대로 소설의 3요소는 ‘주제·구성·문체’다. 간단한 이야기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예로 들자면, 하필 윤희중 같은 타입의 인물이 하필 무진이라는 공간에 던져졌기 때문에 하필 그와 같은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캐릭터 기념관이라는 게 있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지하생활자의 수기>), 멜빌의 ‘바틀비’(<필경사 바틀비>), 그리고 카뮈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이상(李箱)이 뫼르소보다 6년 먼저 탄생시킨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한 인물이 소설의 거의 전부다. <이방인> 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진, 그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게 관건인 그런 작품이다. 구성 자체가 그렇다. 작가는 1부에서 뫼르소의 성격과 그가 자행한 사건을 소개하고, 2부에서 그를 이해·오해하기 위한 법정을 열어 독자와 토론을 벌인다.

토론의 구도는 이렇다. 그는 사건 1(모친상)을 겪었고, 사건 2(살인)를 저질렀다. 이 두 사건의 관계를 조합하는 세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첫째, 1은 2의 근거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냉담할 정도의 인간이니 무고한 아랍인도 죽인 것이다. 둘째, 1과 2는 별개다. 그가 무정한 아들이건 말건 그것은 사법이 아니라 도덕에 속하는 문제이고, 그의 (비도덕 혹은 반도덕이 아니라) 무도덕은 오히려 우리의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성찰하게 하는 의의를 갖는다. 셋째, 1과 2는 은밀하게 매개돼 있다.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두 사건 모두에 등장하는 저 태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나 인간 뫼르소의 핵심이자 이 소설의 가장 깊은 신비인 이것은 가려져 있다.

첫 번째 시각은 바로 검사와 배심원의 논리 그대로다. 카뮈는 이런 통념적인 시각에 맞서 두 번째 시각을 제기하려 한 것 같다. 뫼르소의 무도덕은 정직함의 어떤 극단적인 양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다음날에는 애인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그토록 불편한가?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 뫼르소만의 것인가? 그는 단지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늘 하는 거짓말을 안 할 뿐이다. 더 나아가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이 지독한 문장은 카뮈의 다른 글에도 있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사르트르의 <벽> 서평, 전집 18) 이런 매력적인 단호함으로 카뮈가 (특히 미국판 서문에서) 두 번째 시각에 힘을 싣고 있지만, 또 이것이 작품의 윤리적 급진성을 잘 추려내는 독법이겠지만,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다. 세 번째 시각으로 봐야 할 뫼르소의 심연은 여전히 깊어서 그것은 백인백색의 탐구 대상이다. 이 예외적인 내면의 매력 덕분에 이 소설이 70년째 읽히고 있다.(신형철_문학평론가) 

11. 07. 17.  

P.S. 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 번역본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휘영본 <이방인>(문예출판사)과 김화영본 <이방인>(책세상)까지 포함해 다섯 종 정도이다. 범우사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요 번역본을 갖고 있는 셈인데, 출간 순서대로 차례로 맨 서두 부분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儆白).'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휘영, 문예출판사)   

불어 'maman'을 '어머니'로 옮긴 게 특징적이며 경백(儆白)은 한자가 잘못 병기된 듯싶다(그렇게도 썼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였는지도 모른다'와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가 반복돼 리듬감을 주지만, 좀 늘어지는 느낌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책세상) 

'어머니'가 '엄마'로 바뀌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고 짧게 끊었는데,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원문도 그렇게 처리됐을 듯싶다. 한데,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가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로 변화한 건 개선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만으로써는'도 마찬가지다('그걸로는'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민음사) 

'경백(敬白)'이 '근조(謹弔)'로 바뀌었다. 그밖에 이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예정. 삼가 애도함.'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김예령, 열린책들) 

콤마(,)로 끊은 게 특징이다. 짧게 끊어지는 효과를 의도한 듯싶다. 전보문에 '삼가 애도함'이라고 쓰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전보문에 '근조(謹弔)'라고 한자가 병기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어 전보문이라면 '모친 사망. 명일 장례. 근조.' 정도이지 않을까(띄어쓰기도 안 할 듯싶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이기언, 문학동네)

가장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는 문장이다. 카뮈도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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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17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정말 조금씩 다 다르군요ㅎㅎ 제가 처음 구입해 읽은 <이방인>은 주우세계문학전집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김병일 씨란 분의 번역이었지 싶은데 그분 번역의 첫 문장도 위에 예를 드신 번역문들과 또 달랐던 것으로 기억되는군요.
저도 마지막에 예를 드신 이기언 씨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이참에 구입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방인>이 아니라 <이인>을 읽게 되겠군요^^

로쟈 2011-07-17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일 처음 읽은 건 주우판이었어요.^^

VANITAS 2011-07-1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와 책세상 판본의 역자가 동일하더군요 책세상판이 전집답게 해설이라던지 연보가 조금 더 추가되있고..저도 이번에 나온 '이인'에 관심이 가네요.

로쟈 2011-07-18 19:59   좋아요 0 | URL
연보는 이번에 나온 민음사판이 압권입니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에요.^^;

페크pek0501 2011-07-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뫼르소를 소재로 하여 생활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를 비난하는 대신 ‘뫼르소’ 같은 사람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어떨까."로 그 글을 끝맺었어요.

우리가 인간의 모든 유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하는 특이한 점이 그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괴물이죠. 저도 제 생각을 또는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번역의 비교, 잘 감상했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로쟈 2011-07-18 20:00   좋아요 0 | URL
네, 뫼르소도 있고 바틀비도 있고 또...^^

해원 2011-07-2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은 언제 읽어도 새롭습니다. 다시 서로 비교하며 읽는 재미를 가질 수 있겠군요.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정의

<일리아스>을 읽으면서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인데, 서양문학 '작가사전'으로 아주 유익한 책이다. 블룸 자신의 기준에 따라 100명의 천재를 선정하고 그 천재성을 10가지 범주로 분류해놓았다. 비록 서양문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무함마드와 <겐지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예외적으로 포함돼 있다) 이만한 규모의 작가론을 써낼 수 있는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해서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놀라우면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책의 구입을 계속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원서와 함께 구입했다. 그건 번역본이 '완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선 역자도 후기에 밝혀놓고 있으므로 완역본을 참칭한다거나 해서 독자를 속인 건 아니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애초에 원문 81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출판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출판사와의 협의에 따라 부득이 일부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 등은 일부 생략했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896쪽) 

번역문이 893쪽에 이르지만 814쪽의 원문을 다 옮긴 건 아니라는 자백이다(짐작에는 5-10% 가량을 덜 옮겼다). 한데 사정상 방대한 분량을 다 옮기진 못했다고만 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독자로선 아쉬움만 클 텐데, 일부 내용을 빠뜨린 이유를 저자 블룸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를 생략했다고 하나 내가 읽은 일부 대목들에서 생략은 그냥 임의적이었다. 역자나 출판사 사정으로 완역하지 못한 것을 애꿎게도 저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다. 

호메로스 편을 예로 들자면, 호메로스의 아이러니는 "자신의 창작이며, 때로는 자신의 승리 그리고 이전의 가인들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블룸은 <일리아스> 2권에 나오는 트라키아 사람 타미리스를 예로 든다. 제우스의 딸인 무즈들과 경연을 해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뮤즈들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고 노래하는 재주도 빼앗긴 시인이다. 그런 전례가 있기에 "호메로스는 뮤즈들과 경쟁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서두를 뮤즈(불멸의 여신)에 대한 간청으로 시작한다.   

<일리아스>를 예로 들면 "Anger be now your song, immortal one"이라고 부르는 식이다(블룸의 인용은 로버트 피츠제럴드의 번역이다. 교재로 좀더 많이 쓰이는 리치먼드 래티모어의 번역은 "Sing, goddess, the anger of Peleus' son Achilleus"로 시작한다). 번역본은 "불멸의 여신이여, 이제 노여움을 노래하소서"라고 옮겼지만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정도가 좋겠다('분노'란 말이 이 작품에서 갖는 중요성을 고려해서도, 원작에서도 첫 단어가 '분노(menin)'라는 점을 고려해서도 그렇다). 이를 통해서 "호메로스는 마치 이전의 시인들이 뮤즈들과 경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으므로, 자신만이 실질적인 최초의 시인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573쪽) 그리고 뮤즈(무사mousa)에 대한 간청을 서두로 삼는 것은 호메로스 이후 서사시의 전통이 된다.   

이 인용문에서 이어서 블룸은 "우리는 타미리스의 목소리를 빼앗은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How should one read the unvoicing of Thamyris?)"라고 질문을 던지고 두 문단에 걸쳐 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번역본에는 생략됐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이거나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로 간주된 모양인데, 애초에 그냥 '편역'이라고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호메로스 편은 물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서사시에 대한 평을 담고 있는데, <일리아스>에 한정하자면 생략된 부분은 한번 더 나온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에는 매우 복잡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나타난 아킬레우스의 보편성은 그의 탁월함은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574쪽)라고 지적한 다음 블룸은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두 영웅의 평판이 서로 엇갈려온 역사를 간단히 기술한다. 200년 전만 해도 아킬레우스가 더 걸출한 인물로 간주됐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작가들에게는 오디세우스(율리시스)가 더 인기를 끌었는데, 그건 "오디세우스의 영웅적이고도 악한 같은 측면이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풍부한 지략과 술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이어서 허클베리 핀과 셰익스피어의 율리시스적 인물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5행 더 나오지만 이 역시 생략됐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플라톤은 <일리아스>의 신들이 장난삼아 인간을 죽였다는 점을 참을 수가 없었다.(574-5쪽) 

원문은 "The Homeric gods, though we think of them as definitive for the ancient Greeks, were very troublesome for many who came after Homer, and for Plato in particular, who could not tolerate the idea that the gods of the Iliad, in particular, killed for their sport."(505쪽)인데, 앞부분을 잘못 옮겼다. '고대 그리스인(the ancient Greeks)'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옮겼기 때문이다(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이 동급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서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었는데, 'definitive'가 '한정적인'이란 뜻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결정적인'란 의미로 풀어주는 게 좋을 듯싶다. 욕심을 내자면 '절대적인'으로 옮기고 싶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의 신들이 절대적인, 확고한 지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들은 한마디로 '골치아픈 존재들'이었고, 특히나 플라톤 같은 경우는 역겹게 생각했다는 지적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다. "어느 면에서 호메로스의 신들은 어린아이이며,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비록 비극적인 인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게 블룸의 견해다. "아킬레우스는 성난 아이가 다친 고양이 새끼를 괴롭히는 것과 흡사하게 트로이인들을 도살한다." 아킬레우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블룸이 꼽는 것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여 다시 전장에 나서 포효하는 대목이다. "<일리아스> 제17권 '참호 위의 아킬레우스'에서"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는데, 문제의 장면은 제18권에 나오므로 아무래도 블룸의 착각 같다(원서의 편집자가 교정하지 못한 것은 의외다). 아테나 여신까지 가세한 포효 소리에 트로이군의 간담은 서늘해지는데 아예 쓰러져 죽기까지 한다.  

그와 아테나가 번갈아 함성을 내지르자 트로이인들은 공포심을 느낀 나머지 가장 용감한 전사 열두 명이 뒤로 주춤거리다가 동료의 창과 이륜전차에 목숨을 잃는다. <일리아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577쪽) 

블룸은 애덤 패리(Adam Parry)의 말을 빌려(번역본은 '애덤 페리(Adam Perry)'라고 오기했다), 아킬레우스를 "일상적인 언어를 수용하지 않으며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호메로스적인 영웅"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데, 여기서 그의 타자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577쪽)

이 대목은 "And yet Homer shrewdly gives the alienated Achilles no language of his own, in which his otherness could be explicitly disclosed."(507쪽)을 옮긴 것인데, 번역문 부정확하게읽힐 수 있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 데서 그의 타자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의 타자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언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혀야 한다.  

패리가 지적했듯이, 햄릿은 공공연하게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뛰어났고 또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비극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에 비해 영웅 아킬레우스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비극을 거의 표현하지 않으며 또한 표현할 수도 없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무능력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아킬레우스가 처한 궁지를 애절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리스 최고의 인물이지만 간절한 승리의 염원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리아스>를 쓴 시인 호메로스의 천재성은 아킬레우스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577쪽)  

여기까지가 블룸의 <일리아스> 읽기다. 기회가 닿으면 블룸의 <오디세이아> 읽기도 마저 다루고 싶다. 그전에 <오디세우스>도 완독해야 하고, 이왕이면 <율리시스>까지 완독해야 할 테니, 먼훗날이 되겠지만... 

11.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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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7-1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덜어낸 분량이 많군요. 5~10%라니... 정말 원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번역본을 듬성듬성 읽기는 했지만 블룸은 치밀한 논리 전개보다는 통찰력있는 언어들을 뱉어내는 비평가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의성'과 '계발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읽어야 될 것 같더군요. 언젠가 오역을 지적하신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하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벌써 상당한 분량일 것 같은데요. 국내 번역서들을 읽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7 12:24   좋아요 0 | URL
나중에 덜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킵하면서 번역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게 못마땅해서 사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나머지 90%에 대해선 참고/인용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낫긴 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현대문학을 잘 모르지만 블룸은 남성,백인,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문학만을 가치있다 여기는 비평가죠.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에서 블룸을 이리 평가합니다. "정전적 인문주의라 불리는 오만한 유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대중연사인 해럴드 블룸은 정신의 활기 넘치는 현존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부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블룸은 언제나 공개강연에서 받은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고, 다른 주장들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며, 그저 단언하고 확언하고 읊조릴 따름입니다. 이것은 자기상찬이지 인문주의가 아니며, 물론 진일보한 비평도 아닙니다."
블룸의 비평관을 저 개인적으로는 수상쩍다 여기고 있습니다.

로쟈 2011-07-18 20:04   좋아요 0 | URL
'정전적 인문주의'란 말을 맞습니다(대개의 '고전'주의자들처럼 블룸 또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죠). 셰익스피어주의라는 게 있다면 셰익스피어주의자이기도 하고요. 활기가 없는 것도 맞습니다. 인터뷰 같은 걸 보면. 동시에 '자아'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래도 저는 그의 작가론과 작품론을 참고합니다. 배우는 게 있어서요...

2011-11-14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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