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하나로 <죽음의 선고>(그린비, 2011)가 출간됐다. 제1권으로 9권으로 예정된 선집 가운데 네번째 책이다. 이제 중반으로 넘어서는 모양새가 됐다. 걸음을 재촉하고 응원하는 의미에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아울러 선집 출간을 전하는 재작년 기사를 찾아 옮겨놓는다.   

  

한겨레(09. 02. 07) ‘탈근대 철학의 대부’ 블랑쇼 선집 나온다

2003년 타계한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조르주 바타유,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와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꼽힌다. 그린비 출판사가 그의 작품 가운데 9종을 가려 선집을 출간하기로 하고 먼저 소설 <기다림 망각>(1962)을 펴냈다. 그린비 출판사는 올해 <정치평론 1953~1993> <우정> <도래할 책> <카오스의 글쓰기>를 내고, 내년에 <죽음의 선고> <문학의 공간> <무한한 대화> <저 너머로의 발걸음>을 펴내 선집을 완간할 예정이다.

블랑쇼 선집 번역에는 프랑스에서 블랑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준상 전남대 교수를 비롯해 블랑쇼 전공자·연구자인 고재정·박규현·심세광·이재형·이달승 박사가 간행위원회를 꾸려 참여했다. 사르트르·카뮈와 동시대인인 블랑쇼는 20세기 후반 현대철학, 특히 푸코·들뢰즈·데리다에게 영감의 원천 노릇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간행위원회는 블랑쇼가 “근대성이 쌓아올렸던 거대한 이념 더미를 태우는 불꽃을, 그리고 이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주었으며, 이 잿더미 가운데서 근대성 전체를 회상하면서 그 죽음의 미사를 집전하고 근대성의 조종을 울린 사제였다”고 말한다. 블랑쇼는 문학비평서 <문학의 공간>에서 문학의 특성을 죽음에 빗대어 표현하면서, 문학은 황폐의 공간이며 이런 공간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그런 사유의 한 양상을 <기다림 망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블랑쇼 선집 발간을 기념해 프랑스의 블랑쇼 전문가인 크리스토프 비당 파리7대학 교수가 블랑쇼의 삶과 문학을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다. 글 전문을 싣는다. 비당 교수는 블랑쇼 전기인 <모리스 블랑쇼, 보이지 않는 동반자>를 썼으며, 영화 <모리스 블랑쇼>의 공동감독을 맡았고, 블랑쇼 연구 사이트 ‘에스파스 모리스 블랑쇼’(www.blanchot.fr)를 운영하고 있다.(고명섭 기자)  

■ 기고: “블랑쇼, 희망 사라진 곳서 미래 긍정할 준비”

지배적이지만 주변적이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만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모국에서조차 감추어진 위치, 그것이 모리스 블랑쇼가 차지하고 있는 역설적인 위치이다. 그는 소설·비평·철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작품을 남겼고, 그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블랑쇼는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만나 일생 동안 이어질 우정을 나누었고, 이후 두 인물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될 타자의 철학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1940년 또 한 명의 위대한 친구인 조르주 바타유를 알게 되었고, 이후 우정과 공동체의 사상을 함께 추구해 나간다. 그는 1950년대 이후로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무한한 대화> 등의 저서를 출간하면서 가장 유력한 문학 비평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토마 알 수 없는 자>, <하느님>과 같은 소설들과 <원하던 순간에>, <최후의 인간>과 같은 이야기들을 썼다.

또한 그의 사유에서 정치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알제리에서의 저항 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작성된 ‘알제리 전쟁에서의 불복종 권리 선언’을 기안하고 작성했으며, 1968년 5월 혁명에서는 거리에 나가 직접 투쟁에 참여했고, 드골 정권에 반대하는 많은 선언문들과 성명서들을 썼다. 1970년대부터 그는 파리 근교로 물러나 은거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평생 동안 그는 언론에 단 한 장의 사진이 실리는 것도 거부했으며, 우리는 그의 얼굴을 레비나스가 공개한 젊은 시절의 몇 장의 사진과 한 파파라치가 불시에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블랑쇼는 자신의 작품에서 횔덜린·로트레아몽·말라르메·니체·릴케·카프카와 같은 역사에 남은 위대한 작가들과 철학자들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했고, 그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발레리·샤르·사르트르·레리스·클로소프스키·앙텔므·데 포레·첼란과 같은 동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뛰어난 비평을 보여 주었다. 그는 동시대의 여러 작가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롤랑 바르트 같은 비평가들과 들뢰즈·데리다·푸코·낭시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기하게도 이 철학자들은 블랑쇼 이전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받았으며, 세상은 역으로 그들에 의해 그 자신과 그의 작품과 그가 주조해내고 우리에게 남겨준 개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개념들 가운데 ‘중성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있다. 블랑쇼는 ‘중성적인 것’에서 모든 이데올로기와 모든 동일성의 신화와 결별하는 문학의 결정적인 힘을 알아본다. “물음을 가져오는 글쓰기를 추진하는 물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그 물음인 글쓰기, 그것은 네가 세계의 과거 가운데 어느 날 받아들였던 존재(전통·질서·확실성·진리 그리고 모든 유형의 정착으로 이해되는 존재)와의 관계를 더 이상 네게 허락하지 않는다.”

블랑쇼의 사유는 찬미자만큼이나 비방자들을 생겨나게 했다. 그 비방자들은 부당하게 그의 사유에 대해 염세주의라고, 불건전한 사상이라고, 허무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확히 그가 자신의 세기가 가져온 재앙을 염세주의·불건전한 사상·허무주의라는 형태로 가늠할 척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1962년 바타유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쓸 수 있었다. “바로 희망이 사라진 ‘절대적’ 밑바닥에서 저는 진리와 인간의 미래를 전적으로 긍정할 준비를 합니다.” (크리스토프 비당/파리7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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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 앨피 / 2008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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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선고
모리스 블랑쇼 지음, 고재정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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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 그린비 / 2010년 12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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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그린비 / 2009년 1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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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방한했다고 한다.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 동시에 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번 읽어보기 위해서다. 개인적으론 이 '스타 페미니스트'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하여'(2004)란 글에 적은 바 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들어가 있다). 차라리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을까란 게 내 생각이었다. 그 '스타'도 지금은 '할머니'가 됐다... 

 

한겨레(11. 05. 30) “여성이여, 위계 아닌 연계의 세상 위해 노력하라”

세계적인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77)이 23일 한국에 왔다. 2002년 이후 거의 10년 만에 <에스비에스>(SBS) ‘서울디지털포럼’ 참석차 들른 것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진보적 언론인으로 살아온 스타이넘을 지난 24일 오전 서울 광장동의 한 호텔 인터뷰룸에서 만났다. 1970년대 미국의 낙태 금지 반대 피켓시위를 벌이던 사진 속의 ‘금발 페미니스트’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옅은 색 잠자리테 선글라스에 가죽 라이더재킷, 검은 부츠컷 바지를 입은 그는 팔순을 눈앞에 둔 ‘할머니’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인터뷰는 통역 이정규씨와 페미니스트 신학자 현경 교수(미국 유니언신학대)를 사이에 두고 한시간 남짓 진행됐다. 만나본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표어를 여성운동의 전면에서 실천하면서도 자신의 유명세를 향유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위계(rank)가 아닌 연계(link)가 중요하다”고 인터뷰 동안 그는 여러번 말했다. 인터뷰 전체 내용은 이날 대화와 이화여대에서의 페미니스트 모임, 서울디지털포럼의 기조연설 내용 등을 추가해 구성했다. 



-먼저 본인이 이끌고 있는 여성미디어센터(Women’s Media Center)에 대해 설명해달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 여성들의 참모습을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도 각종 인터뷰 쇼에 등장하는 여성은 6%밖에 안 된다. 여전히 여성들은 구름 속에 가려 있는 존재다. 우리는 언론인들과 여성 지식인들을 교육하고 지원한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적 사건 또는 선거 등을 여성의 시각에서 모니터링한다. 재단에서 기금을 모아 운영하는데, 영화배우 제인 폰다가 이사 중 한명이다. 그의 연극 한편과 영화 한편의 판권이 우리에게 기부된다.”

-중산층 여성들의 지원이 운동에 도움이 되나?
“한국에 ‘강남 좌파’라는 말이 있듯이 미국에는 ‘리무진 리버럴’이란 조어가 있다. 우파들이 진보진영을 얕잡아보고 낮추기 위해 만든 용어다. 진보진영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패배시키려는 술책이다. 정의를 위해 모두가 가난해야 하는 건 아니다. 소비지향적이면 안 되겠지만 의미있게 돈을 쓰는 것과 모두가 잘사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아내 엘리노어는 부자이면서도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1920~30년대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침체에서 빠져나오도록 돕지 않았는가. 우리는 중산층 여자들과도 연대해야 한다. 당신도 나도 중산층 여자이다. 우리는 분리가 아니라 공통점을 봐야 한다.”

-여자들끼리의 경쟁, 적대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가부장제가 우리를 분리시키고 경쟁하게 만들고 있다. 각자 가부장제 안에서 인정받도록 부추겨진 것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이 소수자들이 지배계층의 인정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메커니즘이란 걸 봐왔다. 내 경우, 백인만 모여 있거나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없거나 보육시설이 없는 곳에선 강의하지 않는다. 다양성과 사소함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지지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스타이넘은 1972년 페미니즘 잡지 <미즈>를 창간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성이 미혼 시절 ‘미스’로 불리다가 결혼과 함께 ‘남자의 아내’인 ‘미시즈’로 불리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사용하는 ‘미즈’라는 단어를 되살려냈다. 그는 “미즈라는 단어는 1400년대부터 1700년대까지 영어권에서 사용되다가 사라진 어휘였다”고 말했다. 가부장제가 공고해지면서 여성을 남성 가계의 일원으로 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들춰낸 다분히 정치적인 발견이었다.

-한국 사회의 출산율 하락에 대해 알고 있나? 여성들이 ‘출산파업’을 한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직장의 패턴이 남성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하는 여성에겐 맞지 않는다. 기혼여성이 일자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여성에게 맞춰줘야 문제가 풀린다. 인식도 더 변해야 한다. 남자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양육할 수 있지 않나. 스웨덴이 좋은 예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좋은 의도로 출산파업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못 낳거나,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데 낳으라는 국가적 요구도 있다.
“출산은 선택이어야 한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도구로 생각해 계급과 인종, 그리고 민족에 대한 구분을 지속해 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여성은 재생산의 필요성 때문에 몸을 착취당하는 불리함을 경험해야만 했다. 위계, 인종, 계급, 민족적 문제로 겪는 불리함을 여성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순수 혈통의 자손을 보아야 한다는 몸에 대한 통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여자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측면도 있다.
“결혼으로 갖는 직장(가정)이 나쁜 직장보다 좋다는 인식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결혼이 더 나쁜 직장이 될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웃음) 우리는 경제적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아이를 키우고 유지하고 집안일을 하는 돌봄노동이 가진 생산적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흔히 전업주부더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지 않나.”

-한국 사회에서도 ‘여자가 집에서 논다’고 표현한다.
“언어적으로 여성을 노예취급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해온 일들은 옛날 노예들이 하던 일이다. 일을 해도 티가 안 나고, 생산성도 없고, 경제적인 가치도 없고,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경제적 회계방식이 바뀌어 돌봄노동에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조처가 뒤따라야 한다.”

-아이들 주위를 맴도는 ‘헬리콥터 맘’, 아이들을 무섭게 양육하는 ‘호랑이 엄마’처럼 문제적 엄마들도 있지 않나?
“야망 있고 똑똑한 여자들이 집에 갇혀 있을 때 지배적인 양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장소를 잘못 차지한 것이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해서 아이더러 대신 살라고 하니까. 호랑이 아빠나 호랑이 엄마나 아이들의 본성은 장미, 피튜니아, 라일락인데 튤립, 백합으로 만들어버린다.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은 더 심한 것 같다. 다 대학 가라고 하지 않나. 나는 대학에서 배운 걸 극복하는 데만 25년이 더 걸렸는데. 우리 모두 나름 고유성이 있는 존재로 공동체 일원으로서 인정받고, 균형이 있어야 한다.”

스타이넘은 “내 최근의 관심은 사랑을 받고 안전하게 양육된다면 자존감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일상에서 위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면 그것 자체가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 같아 싫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듣는 건 거부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은 조건을 달아서 네가 사인해준다면 나도 사인을 해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연계(link)돼 있지, 위계(rank)돼 있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시스템 구조를 붕괴시키는 건데, 일상과 언어는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970년대만 해도 ‘근동’이나 ‘극동’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는데 역사가 달랐다면 유럽이 ‘서북아시아’로 불렸을 수도 있다. 서구가 말하는 역사는 서구 백인 남성의 역사였지,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다. 잘못된 것을 치료하는 식의, 보충학습이 필요한 것이다. 사진 한장을 찍어도 다양한 계층, 나이, 인종을 포괄해 담는 실천이 중요하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사회운동을 하느라 글을 너무 쓰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87년 <미즈>는 잡지의 색깔을 바꾸지 않는 대신 경영난을 버티지 못해 남의 손에 넘어갔다. 50대에 이르러 그는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치료사의 도움으로 내면으로 들어갔고 평생 강연과 사회운동 때문에 어지러웠던 집을 비로소 정돈했다고 한다. 1992년에 쓴 <내부로부터의 혁명>은 그러한 인생의 전환과 맞닿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언론인으로서 당신의 글을 발견하기가 생각보다 힘든 것 같다.
“슬픈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 길에서 일어났던 일을 쓰려고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보니까 쓸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다. 내가 쓰려고 하는 내용은 아주 사소한 일들에 대한 것이다.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쇼핑몰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두려워서 개입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개입하는 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이가 알도록 일깨워주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흑인 노래 중에 <아이를 때리지 마라>는 노래가 있는데, 누가 길에서 아이를 때리는 걸 보면 이 노래를 부른다.”

그가 방한한 다음, 한국에선 미군이 몰래 파묻은 고엽제 문제가 터졌다. 때마침 북한에서 이주한 여성들이 본인들의 경험을 얘기하는 여성주의 행사에 참석한 뒤, 함께 방한한 정현경 교수가 “6자회담 테이블에 여성이 낀 적이 없었다”는 말을 하자 이렇게 덧붙였다.

“유엔 결의안을 보면 평화회담에는 여성이 참석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특히 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남북 여성들의 목소리는 매우 중요하다. 군사주의가 만연한 상황이면서 동시에 성적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세계 여성들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여성이 더 도덕적이거나 덜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남성성을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결이 필요하다. 상호의존성이 필요한데, 그것이 해답이다. 여성과 자연으로부터 신의 개념을 분리시켜 지배하려 했던 것이 가부장의 역사다. 생명체에 신성이 존재하는 것을 여성들은 더 잘 이해하고 있다. 종교의 정치화는 반대해야 하지만 각자 개인이 힘을 내고 인류 공동의 일원으로서 위계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부분을 어떻게 조직화해낼 수 있나?
“미국 학생운동의 성공 사례를 예로 들고 싶다.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어느 교수가 정치적인 문제로 해직을 당했다. 학교는 학생들과 강사들의 시위를 무시했지만, 통신서비스 제공 노동자와 식당 노동자들이 함께 시위를 했더니 효과가 있었다. 통신 노동자나 식당 노동자만 시위를 했더라도 그들은 해고당했을 것이다. 힘을 합쳐야만 한다. 우리가 함께할 때 더 바꿀 수 있고, 다 바꿀 수 있다. 각각 그룹이 원하는 바를 모두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시비에스 방송국에서 여성 비서들과 중역이 힘을 모아 비서들이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했더니 절반 이상이 합격했다. 기업으로서도 얼마나 많은 인재가 양성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처럼 피라미드식 위계보다 원형의 연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무슨 얘길 해주고 싶나?
“너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라. 남자가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좋은 금언이 ‘나에게 해준 만큼 상대방에게 대하라’는 것이라면, 여자는 거꾸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가 남들에게 해주는 것만큼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를 예로 들자. 스스로 자격 있는 아이라고 느끼지 못하면 그것을 만회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열심히 하게 된다. 그 순간의 ‘나’를 내가 열성적으로 대하는 ‘다른 사람’의 위치에 놓아보라. 그럼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나는 명상을 하는데, 내 안에 완전히 다른 내면의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고난 길이 다르니, 모두가 명상을 할 필요는 없지만, 핵심은 우리 각자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사람인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이며 사회적 존재이므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럼 자신감도 채워질 것이다. 여성운동은 결국 신념과 힘을 얻게 되는 과정이다.” (인터뷰 / 이유진 기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플레이보이클럽 위장취업 경험 폭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34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버라이어티쇼에 나가 춤을 추고, 미인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거의 독학으로 스미스대학에 입학했지만 자신이 받은 교육은 ‘죽은 백인 남자들’의 성취 외엔 없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된다. 졸업 뒤엔 인도로 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접했다.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면서 1968년 잡지 <뉴욕>의 창간에 참여했고, <에스콰이어> <뉴욕 매거진>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실었다. 플레이보이 클럽의 버니걸로 위장취업해 거기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남성사회의 여성차별과 성희롱 실태를 폭로해 일약 명성을 얻었다. 1972년에는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Ms.)를 공동 창간해 15년 동안 편집장을 지냈다.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을 내세운 베티 프리던과 달리 유색인종 여성들과 연대했고, “여성 인권을 증진시켜줄 사람에게 투표하라”며 미국의 지난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흑인인 오바마보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2010년 11월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5인’ 중 한명으로 선정됐다. 지난 27일 열린 에스비에스 서울디지털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중앙선데이(11. 05. 30) "남자 검사들, 가정 포기하고 일한다? 그렇게 못났나”

전 세계 여성운동계의 ‘왕언니’ 글로리아 스타이넘(77)은 예쁘고 유쾌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농담을 즐기며 매력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엔 뼈가 있다. 스타이넘이 누군가. 1960년대부터 인종 및 남녀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서온 페미니즘계의 스타이자 산증인이다. 뉴욕 타임스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스럽다(Gloria Steinemesque)’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그가 1971년 공동 창간한 잡지 ‘미즈(Ms.)’는 여성을 결혼 유무에 따라 ‘미스(Miss)’와 ‘미세스(Mrs.)’로 나눴던 차별을 부숴버렸다. 오늘날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엔 니카라과에서 인도까지 각지의 남녀 팬들이 남긴 ‘당신은 내 인생의 멘토’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가득하다. SBS 주최 서울 디지털 포럼 참석차 방한한 그를 단독 인터뷰했다.

-한국의 검찰총장이 “남자 검사는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 검사는 애가 아프다고 하면 일을 포기하고 애를 보러 간다”고 발언했다. 
“한국의 남자 검사들이 못났다고 광고하는 발언 아닌가. 검사는 정의 구현의 선봉에 서는 존재다. 인생의 기본 터전인 가정을 등한시해야만 일을 잘할 수 있는 존재들이 과연 그 일을 잘해낼 수 있을까? 아니다. 가정을 포기하는 건 기본적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거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균형이다. 그리고 그 균형은 남녀가 함께 맞춰야 한다. 한국에선 검찰총장이 선출직인가 지명직인가?”

-대통령 지명직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시민들이 탄원서를 넣어 의사 표시를 해야 하지 않겠나. 불평만 해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어떤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때, 그 분노를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바람직한 변화가 가능하다. ‘화’를 나 홀로 속으로 삭히면 혼자 우울증만 걸릴 뿐이다. 자신의 분노를 다른 이와 나누고 연대해야 사회 변혁은 가능하다.”

-‘일하는 엄마들’이 큰 화두가 됐다.
“한국에선 여성이 남성보다 육아 부담은 두 배, 가사 부담은 세 배에 달한다고 하더라. 여성이 직장과 가정이라는 두 개의 일터에서 모든 부담을 지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한국 여성들이 ‘출산 파업(baby strike)’을 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내가 만난 한국여성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열정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괜히 그럴 이유가 없다. 여자는 하인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육아·가사)을 남자들은 못 한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그렇게 프로그램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아는 어떤 여성은 아이를 낳은 후 육아 부담을 견딜 수 없어 한 달간 가출을 했다. 돌아와보니 남편이 아기를 아주 잘 돌보고 있더란다(웃음). 모성애가 더 강하다는 믿음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이미 나왔다.”

-남자들은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 점부터 잘못됐다. ‘도와준다’는 건 원래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 선의로 남의 일을 해준다는 의미다.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육아와 가사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국가의 미래도 밝다.”

-한국에선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란 인식이 있었는데 많이 달라졌다.
“(웃으며) 결국 중요한 건 ‘땅’이지 않나. 먹을 것을 경작하는 곳도,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도 이 ‘땅’이다.”

-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만들어낸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여성은 천성적으로 남들과 공감하길 원하고 협력을 추구하는 존재다.”

-하지만 본인에게도 ‘적’이었던 다른 여성들이 있었을 것 아닌가.
“물론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난 어려서부터 엄마를 돌보면서 어찌 보면 ‘엄마에게 엄마 노릇을 하며’ 자라왔다. 이혼한 엄마가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우울증까지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여성을 돌보는 존재’라고 자신을 규정하며 자랐고, 이것이 다른 페미니스트들과도 충돌하는 경우가 있었다.”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가 너무 착했던 게 후회된다’고 했던데.
“지금도 그렇다. 70년대, 80년대엔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일은 잔뜩 해놓고 (미국) 민주당에 최종 결정을 맡기는 식이었다. ‘아빠에게 의지한 성실한 딸’이었던 셈이다. 좀 더 직접적인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대중과 호흡했으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차별 철폐 운동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돌처럼 단단한 차별을 없애려면 힘을 모아 조금씩 그 돌을 쪼아내는 수밖엔 없다. 때론 회의감도 들겠지만, 나를 믿어라. 변화는 온다.”

- ‘얼굴도 예쁜 페미니스트’라고 인식이 되어 있다. 플레이보이 클럽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해 쓴 폭로 기사로 유명했었다. 지금도 멋진 스타일이 눈에 띈다.
“여성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이나 머리가 아닌 외모로 평가받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어떤 신문사 편집국에선 나를 보고 ‘멍청한 금발머리는 필요없다’고 퇴짜를 놓은 적도 있다. 여성에게 외모는 무기이면서 한계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이 좋다. 나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도 좋아한다. 패션과 스타일은 다르다. 패션이 브랜드 중심의 세계라면 스타일을 지킨다는 건 나를 표현하는 일이니까.”

-지금도 올해가 77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비밀이 뭔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답변이 너무 평범한가(웃음).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들 관점에서지만) 못생기고 자신을 가꿀 생각은 안 하고 진지한 괴물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페미니스트로서 난 신나고 즐겁고 행복하게 일해왔다. 훌륭한 애인도 여럿 있었고, 그들은 지금 나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왜 페미니스트를 두려워할까.
“남성들이 찔리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인종차별도 백인들이 ‘흑인들을 내버려두면 결국 우리를 몰아내고 억압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존재했다.”

-결혼 제도에 비판적이다가 2000년 데이비드 베일(‘다크 나이트’ 영화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아버지)과 결혼해 충격을 줬다.
“난 데이비드를 ‘남편’이 아니라 ‘내가 결혼한 친구’라고 불렀다. 당시 데이비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미국 영주권이 필요했고 뇌임파종을 앓고 있었다. 결혼으로 영주권은 물론 건강보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준 결정이었다. 그는 2003년 사망했지만 우린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렸다. 물론 결혼 전에 불행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난 결혼 전에도 행복했다. 지금도 그렇고.”

-유방암 투병을 하기도 했는데.
“선고를 받는 순간 들었던 생각은 ‘지금까지의 인생, 참 좋았다’였다.”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대학 캠퍼스에서 이런 대화가 들려오는 것. 나이 지긋한 교수가 ‘옛날엔 피부의 멜라닌 색소량이라든가 타고난 성별에 의한 차별이 있었단다’라고 하면 남녀 학생 모두가 ‘에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구석기 시대가 어디 있어요?’라며 웃는 거다. 그리고 더 이상 페미니즘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길 꿈꾼다.” (전수진기자) 

11.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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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를 모르는 독자라면 '다미가요 제창'이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군주(君)의 노래'를 뜻하는 ‘기미가요’의 상대어로 '백성(民)의 노래'를 뜻한다고 한다. 원래 쓰는 말인지 신조어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다미가요 제창>(삼인, 2011)이란 책이 지난주에 나왔는데, 저자 정혜영은 재일 조선인 사회학자이고, 역자 후지이 다케시는 한국현대사를 전공한 일본인 역사학자이다(알고보니,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과 주체>(이산,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무심코 지나치려 했는데, 역자 후지이 박사가 언젠가 한 학술대회에서 본 적이 있는 연구자다(성실하고 명석한 학자란 인상을 받았다). 역자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다중국적을 갖도록 하자는 저자의 제안과 함께 '뉴라이트'에 대한 역자의 평가가 인상적이다.    

<民が代>斉唱-アイデンティティ・国民国家・ジェンダー-

한겨레(11. 05. 25) “다중국적, 국민 아닌 민중 되기 위한 생존 전략”

분명 우리말 책인데 “정영혜가 쓰고 후지이 다케시가 옮겼다”고 한다. 지은이와 옮긴이가 뒤바뀐 것 아닌가? 최근 출간된 <다미가요 제창>(삼인 펴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지은이와 옮긴이를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은 재일조선인 사회학자 정영혜씨가 일본어로 쓰고, 한국에서 한국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인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가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일본을 소재로 근대국민국가를 비판하면서 그 경계선을 둘러싼 정치를 사유하는 책의 내용과도 어울리는 절묘한 조합이다. 23일 서울 계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만난 후지이 다케시(사진) 박사는 책을 옮긴 이유에 대해 “일본에서 일본인이라는 ‘다수자’로 살아온 내게, 정영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일조선인이자 여성이라는 이름의 ‘소수자’로서 지은이는 일본이 근대국민국가로 나아가며 만들어낸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그 속에 담긴 차별의 문제를 연구했다. 그의 비판은 민중을 다수자와 소수자로 분단해 억압하고 착취하는 근대국민국가의 구조에 모아진다. 패전 뒤 일본은 1952년 4월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에 맞춰 옛 식민지 출신자들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그리고 이틀 뒤 ‘일본 국적을 가진 자’라는 국적 조항을 적용 대상으로 명시한 ‘전상병자 전몰자 유족 등 원호법’을 공포했다. 지은이는 이것이 식민지배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국적이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체제의 구축이었다고 지적한다.

재일조선인 등 소수자의 비판을 소중히 여긴다는 일본 사회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의 존재는, 오히려 이 체제가 얼마나 단단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들은 ‘소수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몰랐던 비판을 할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로 가려면 이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은이는 이런 생각이 결국은 소수자를 타자화하는 구도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지적은 단일민족주의, 단일문화주의뿐 아니라 다문화주의 역시 차별과 배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비판과도 연결된다. 다양한 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미리 분류된 소수자들에게 정체성을 가지라고 강요하고, 다시 다수자가 이를 공인해주는 구조란 것이다.

이에 대해 후지이 박사는 “소수자를 타자화하지 않고선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다수자의 환상을 산산이 깨뜨린다”고 평가했다. 정씨의 논의는 소수자에 의한 다수자 비판에 머물지 않고 권력구조 자체를 다시 검토해 대안을 찾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정주 외국인은 왜 시민권 획득이 불가능한가? ‘흑인’ 페미니스트와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의 간극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전쟁 때 국외로 강제징용된 일본인과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 사이엔 소통 지점이 없을까? 이와 같은 다양한 물음은 일본뿐 아니라 근대국민국가 체제 자체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대안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국민국가나 국적과 같은 경계에 얽매이는 대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시민권’과 같이 거주 사실에 의거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자고 한다. 국가가 쥐여주는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정체성으로서 ‘다중국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지은이는 자신의 딸을 3중 국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후지이 박사는 “다중국적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민’(民)으로서의 생존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군주(君)의 노래인 ‘기미가요’를 백성(民)의 노래인 ‘다미가요’로 바꾼 책 제목에는 이런 실천적 뜻이 담겼다. 후지이 박사는 “국민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민중이란 존재가 있다는 것이 정영혜 주장의 핵심”이라며 “일본 못지않게 국가주의, 단일민족 인식이 강한 한국에서도 이런 논의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최원형 기자) 

■ 후지이 박사가 본 ‘뉴라이트’

“신자유주의 내세우며 민족주의는 깨려 해”
후지이 다케시(39) 박사는 지난해 ‘족청(조선민족청년단)·족청계의 이념과 활동’이라는 논문으로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현대사, 특히 1950년대가 그의 연구 주제다. 논문에서 그는 ‘반공민족주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던 족청의 이념적 좌표와 50년대 족청계 인사들의 활동을 파헤쳤다. 구도만 보자면 최근 한국현대사학회에서 주목했던 ‘반제반공’의 역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 과정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는 ‘이념적’ 관점과 다르게 당시 반공주의의 파시즘적 성격과 세계사적 위치, 이승만 정권의 동맹자로 활약하다가 어떻게 미국의 이해와 충돌해 몰락했는지 등을 세세하게 풀어냈다. 남한의 ‘친미반공’이 정부 수립 직후부터 당위적인 조건처럼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이들 반제반공 세력이 제거되면서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후지이 박사는 한국현대사학회 출범 등 역사 분야에 대한 뉴라이트의 활동에 대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높아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방어적인 행위에 나서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방어적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말하기보다는 현실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결과론적 접근을 하게 되고, 결국 제대로 된 역사 콘텐츠를 갖출 수 없다는 비판이다. 대안 교과서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한국 뉴라이트 세력의 특징은 신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점이라고 했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전형적인 민족·국가주의인데,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자유시장경제를 지상과제로 내세우면서 그 걸림돌이 되는 민족주의는 깨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대신 “정치를 없애고 강한 행정 기능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특성” 때문에 국가주의에 대한 강조는 더욱 두드러진다고 한다. 후지이 박사는 “그러나 역사는 ‘그때 당시’가 기준이 되어야지, ‘지금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며 역사학의 기본적인 원칙을 되새겼다.(최원형 기자) 

11.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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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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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0 1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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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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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은 대개 가장 편안한 시간이지만 원고가 밀린 날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으며 잠시 기분을 내본다. 어느덧 6월이고 여름이다. 오며가며 타고다니는 버스도 에어컨을 켜지 않지만 후덥지근하기에 체감으론 이미 여름이지만. 이 여름엔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1. 문학 

정과리 교수가 고른 건 필립 딕의 <화성의 타임슬립>(폴라북스, 2011)이다.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Library of America)’에 포함돼 화제가 되기도 했던 ‘필립 K. 딕 걸작선’(12권)이 나오고 있고 <화성의 타임슬립>은 그 첫 권이다. <죽음의 미로>, <닥터 블러드머니>가 같이 나왔다. 표지만으로도 탐을 내게 하는 시리즈이다.     

 

덧붙이자면 나보코프의 소설 <절망>(문학동네, 2011)이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출간됐다.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스터리'란 소개문구를 달고 있는데, 내가 붙인 추천사는 이 나보코프판 <분신>이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에게 던진 강력한 도전장"이란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열린책들)은 <이중인격>(누멘, 2010)으로도 번역돼 있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책은 정현백/김정안의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동녘, 2011)이다. 책의 의의에 대해선 이렇게 짚는다. "여성사 분야의 많은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사 입문서가 나오지 못한 실정이었고, 그동안 몇 권의 번역서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제목처럼 한국인에 의해 처음 시도된 여성사 책이어서 무척 반갑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 여성사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공저자의 한 사람인 정현백 교수의 <여성사 다시쓰기>(당대, 2007)이 여성사의 문제성과 실제를 보여주는 책이라면 조선 여성의 살을 다룬 정해은의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너머북스, 2011)는 "조선 시대를 살았던 25인의 여성과 무명의 여성들에 대한 해석을 담았다".    

개인적으론 '20권으로 읽는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가운데 <이승만과 제1공화국>(역사비평사, 2007), <박정희와 개발독재>(역사비평사, 2007),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역사비평사, 2011)도 스트레이트로 읽어봄직하단 생각이 든다. 80년대까지도 '역사'로 바라보게 된 시점에 도달해 있는 셈인데, 90년대 이후의 역사도 '20권'에 포함돼 있는지 궁금하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책은 오가와 히토시의 <철학의 교실>(파이카, 2011)이다. "저자는 고전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반인에게 쉽게 철학적 사고의 전개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적 고전에 대한 확실한 이해에 기초하면서 쉽게 풀어나가는 필력이 힘있게 펼쳐지는 작품"이라는 평이다. 철학교실에서의 문답식 철학이라면 피터 케이브를 강사로 초빙해도 좋을 듯한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철학적 이유>(어크로스, 2011)가 최근에 나온 책이다(물론 원제는 좀 다르다).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마젤란, 2009)라는 물음에서 철학을 이끌어내고 있으므로 '어려운 철학'이란 핑계는 대기 어렵겠다.    

'리더스 가이드'를 표방하는 철학 입문서 시리즈도 번역되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입문>(서광사, 2011)과 존 프레스턴의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해제>(서광사, 2011)가 같은 시리즈의 원저를 번역한 책들이다(어째서 어떤 건 '입문'이고 어떤 건 '해제'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유사한 성격의 책으론 제임스 윌리엄스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라움, 2010)도 꼽을 수 있다.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에 대한 '해설과 비판'을 시도한 책이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김혜원의 <나 같은 늙은이 찾아와줘서 고마워>(오마이북, 2011)이다. 나로선 좀 생소한 책인데 소개는 이렇다. "탈식민주의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하위주체[소외된 자]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글을 써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바 있다.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인 김혜원씨가 열두 명의 독거노인들로부터 들은 절절한 인생이야기를 모아 놓은 이 책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우리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위주체'는 '서발턴'의 번역어로 쓰이는 말이다. 탈식민주의 역사학 쪽에서 소개한 책들이 눈에 띄는데, 김택현 교수가 쓴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박종철출판사, 2003), 라나지트 구하의 책을 옮긴 <서발턴과 봉기>(박종철출판사, 2008)이 '서발턴'을 제목에 걸었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감요식의 <소셜 리더십>(미다스북스, 2011). 제목상으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의 리더십을 다룬 책으로 보인다. "소셜 네트워크에 대해 많은 책이 출간되었으나 저자는 이 분야의 다양한 저작과 강의 활동을 바탕으로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읽으면서 소셜 네트워크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같은 컨셉의 책으론 김대중의 <소셜리더가 되라>(다음생각, 2011)도 있다. 소셜 미디어와 기업활동에 관해서는 에릭 퀼먼의 <소셜노믹스>(에이콘출판, 2009)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2년전 책이면 이미 낡은 것인가?   

6. 과학 

장영애 동아사이언스 실장이 고른 책은 조나단 해링턴의 <기후 다이어트>(호이테북스, 2011). 제목과 표지 모두 생소한데,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한다. 

지구온난화 문제는 이제 새삼 거론할 필요 없이 우리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세계 각국은 기후 문제를 국가 아젠다로 정하고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일 수 있는 정책과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 인간의 활동이나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총량을 뜻하는 ‘탄소발자국’이라는 용어가 알려지면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일이 대규모 공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해야 하는 일임이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구온난화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내 탄소발자국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 봤지만 ‘어떻게?’에서 막혔다면 이 책은 정말로 도움이 된다. 

지구온난화 혹은 기후변화 문제가 중요한 이슈인 건 틀림없지만, 심각성/시급성으로 보자면 원전 문제가 더한 듯도 하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의 <원자력 딜레마>(사이언스북스, 2011)가 다루고 있는 문제다. 이미 '딜레마'란 말에서 저자의 입장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는 있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책은 강판권의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효형출판, 2011)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선 나무를 부모처럼, 아내처럼, 친구처럼 대할 줄 알게 되는데, 이렇듯 나무를 보는 감수성의 눈이 깊고 넓어지면 그림을 보는 시각도 더불어 확장되는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저자 강판권 교수는 중국의 농업경제사가 전공이라지만 지금은 '나무학'의 권위자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다. 혹 '나무대학'이란 곳이 있다면 학장님 감이다.   

8. 교양 

철학자 탁석산이 고른 교양서는 지상현의 <한국인의 마음>(사회평론, 2011)이다. 부제는 '우래된 미술에서 찾는 우리의 심리적 기질'. 저자는 그 심리적 기질이 '조울증형'이며 '매닉친화형'이라고 말한다. 소개에 따르면 "매닉친화형이란 조울증의 병전(病前) 기질을 일컫는다고 하는데 이 개념을 이용하면 흥, 신명, 해학 등 한국인의 외향성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의 내향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주장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한국인의 마음을 다룬 또다른 책으론 정운현의 <정이란 무엇인가>(책보세, 2011)도 있다. "'다정도 병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네 정의 의미를 되짚어본 정에 관한 종합 담론서"라고 소개되는 책이다. 개인적으론 탁석산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특히 한국인의 허무주의를 설명하는 대목), 한국인의 마음을 다룬 책들도 우리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게 해줄지 궁금하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실용서는 한기호의 <베스트셀러 30년>(교보문고, 2011)이다. 1981년부터 교보문고가 집계한 베스트셀러를 바탕으로 한국출판 30년의 기상도를 압축한 책. 전두환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는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10. 자유론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자유'로 정했다. 밀이나 벌린의 <자유론>이 아니라 일본 학자들의 <자유론>이다. 사이토 준이치의 <자유란 무엇인가>(한울, 2011)가 시발점인데, 기본문헌 안내에서 눈여겨본 책들이 예전에 번역됐거나 이제 막 번역된 참이어서 같이 묶어보았다. 이노우에 타츠오의 <타자에의 자유>(아침, 2008)와 사카이 다카시의 <통치성과 자유>(그린비, 2011)가 그렇게 묶인 책인데, <통치성과 자유>의 원제는 <자유론: 현재성의 계보학>이다.  

11. 05. 28.  

P.S. 개인적으로 '6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숲, 2007)로 골랐다. 군말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강대진의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그린비, 2010)가 유용한 안내서이다. <처음 읽는 일리아스>(웅진지식하우스, 2006)도 가이드삼아 구해놓았는데, 항해사에 딸린 작살잡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6월은 전장에서 보내게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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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여름방학이 되면 미술관 순례를 위해 유럽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잖다. 한번도 그런 마음을 품어본 적은 없지만 서점이나 도서관 순례라면 한번 더 생각해볼 것 같다. 유럽의 명문서점을 안내하는 책, 라이너 모리츠의 <유럽의 명문서점>(프로네시스, 2011)을 우선은 읽어본 다음에... 

 

한겨레(11. 05. 21) 박물관·미술관 뺨치는 개성만점 ‘명문’ 서점들

“정말 멋진 서점들은 무자비한 도시계획에 밀려나거나 파산하여, 우리 기억 속에만 인상 깊게 남아 있을 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출판계에 오래 몸담아온 라이너 모리츠는 이렇게 적었다. 유럽도 다르지 않은가 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동네책방은 거의 멸종 단계에 접어든 듯하고, 대학가에도 서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입시용 참고서와 문제집, 취업과 자격증을 위한 책들로 연명하는 서점들이 드문드문 남았을 뿐이다. 대신 도시 한복판에는 거대한 서점들이 대형 백화점처럼 좌판을 넓게 펼치고 있다.

그래서 라이너 모리츠의 아쉬움은 우리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그가 유럽의 독특하고 유명한 서점 20곳을 뽑아 소개하는 책 <유럽의 명문서점>은 괜찮은 서점조차 찾기 어려운 우리 독자들에겐 ‘서점의 로망’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아직도 이런 서점들이 버티고 있는데 서점의 몰락을 걱정하다니 말이다. 



책이 소개하는 명문 서점들은 아름다운 인테리어 자체로도 눈길을 끌지만, 서점이 들어선 공간이 독특한 점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곳들이 많다. 화려한 쇼핑가의 한가운데 있는 서점, 퇴근길 전차철로 고가 아래에 자리잡은 서점, 교회 건물을 서점으로 바꾼 서점 등등이 이어진다. 

수십년에서 수백년에 이르는 역사를 지닌 서점들은 첨단 시스템을 갖춘 곳도, 오래 묵은 박물관 같은 곳도 있다. 고서점에선 책에서만 만나온 옛 명사들의 흔적이 가득하고, 미술사에 등장하는 천장화를 감상할 수 있는 서점도 있다. 라이너 모리츠의 말마따나 이 책에서 ‘노스탤지어’만 확인하게 되는 건 아니다. 고객 전용 서가를 제공하는 곳도 있으며, 에코백 유행을 불러일으킨 서점도 있다.  

이런 명문 서점들의 흥미진진한 면모는 텍스트를 넘어 전문 사진작가 두명이 찍은 사진들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유럽 여행 가이드북으로 삼아도 좋을 듯 싶다. 책 뒤편에는 스무곳의 주소와 연락처 등 외에 이밖에 더 가볼 만한 서점들을 소개해뒀다. 지도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김진철 기자)  

11. 05. 27. 

 

P.S. 서점 이야기로는 루이스 버즈비의 <노란 불빛의 서점>(문학동네, 2009)도 챙겨놓아야겠다. "이 책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고대 로마, 6세기의 중국 등 역사의 구석구석을 간단없이 누비며 서적판매업이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 상세하고도 매혹적으로 서술해놓았다. ‘관능적인 독서 공간’에 관한 세밀한 고증이자 애정의 기록"인 책. 도서관쪽으로도 책들이 나와 있다.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의 <세계 도서관 기행>(웅진지식하우스, 2010)에서 가보고 싶은 도서관들의 리스트를 얻을 수 있다. 최정태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2011)도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들이 발로 쓴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우리교육, 2009)란 책도 나와 있는 건 이번에 알았다. 도서관에는 다 비치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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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5-27 12:47   좋아요 0 | URL
신문에서 소개기사를 읽고 아쉬어 했습니다. 3년전에 파리(2박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2년전에 런던을 다녀온 터라 일찍 나왔으면 좋았었을텐데요.
미국에서 별 유명하지 않은 대학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깜짝놀랐습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도서관 모습에 .. 우리로써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서점, 도서관 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로쟈 2011-05-28 07:38   좋아요 0 | URL
관심과 열의만큼의 문화를 갖는 것이죠...

Daniel 2011-05-28 04:37   좋아요 0 | URL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읽고는 유럽 여행을 책마을들 위주로 꼭 한번 가고싶다했는데 더 갈 곳이 많았졌네요^^;;

로쟈 2011-05-28 07:36   좋아요 0 | URL
네, 책마을도 있었지요. 찍을 곳이 너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