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숲, 2007)에 대한 감상을 몇마디 적었다(워낙에 대작인지라 짧은 지면에 몇마디 적어봐야 별로 표도 안나겠지만). 원고는 지난주에 보냈는데, 특집기사들 때문에 한주 순연되어 실린다. 개인적으론 <일리아스>를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관련자료를 많이 참고했는데, 윌리엄 J.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서광사, 2010),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책과함께, 2011)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겨레(11. 07. 16) 아킬레우스 시대판 ‘정의란 무엇인가’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킬레우스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 고전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머리이다. 그렇듯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그 분노가 어떻게 해소되는가를 보여주며 끝난다. 1만5000행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시를 가능하게 했으니 특별하면서도 대단한 분노다.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인류사적 의미를 갖는 분노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트로이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헬레네의 ‘파괴적인’ 아름다움이었다면, 그 전쟁을 더 잔혹하게 만든 건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였다. 사실 그가 직접 무얼 파괴한 것은 아니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한 데 격분하여 칼을 뽑지만 아킬레우스는 아테네 여신의 충고에 따라 그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니까. 다만 그는 자기 막사에 틀어박혀 참전을 거부하며 이것이 희랍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진퇴를 거듭하긴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빠진 희랍군은 결국엔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아군에 밀리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전투의 살상 장면은 현대의 여느 전쟁영화에서보다 더 잔혹하게 묘사된다. “오뒷세우스가 전우 때문에 화가 나 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맞히자 청동 창끝이 그의 다른 관자놀이를 뚫고 나왔다.” “페이로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창끝으로 그의 배꼽 옆을 찌르자 창자가 모두 땅 위로 쏟아졌고,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 같은 식의 묘사가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불만도 터져 나온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교양강좌 수강 체험담을 담은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에서도 <일리아스>는 제일 처음 읽히는 작품인데, 저자 데이비드 덴비는 “여성을 억압하고 전쟁을 찬미하는 시이며, 주인공은 소아병적인 영웅”에 불과하다는 일부 교수들의 불평을 소개한다.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일을 ‘옳음과 그름’이 아닌 ‘좋음과 나쁨’, ‘강함과 약함’이라는 척도로 재단했던 세계의 이야기를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적 의의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가령 트로이아군의 사르페돈이 동료 글라우코스에게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장면이 그렇다. 사람들이 평소 남다른 대접을 하며 자신들을 존경해온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묻고서 그는 이런 전장에서 선두에 서라는 뜻이라고 답한다. 인간으로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다른가.
한편으로 분노를 풀고서 다시 희랍군을 도와달라는 아가멤논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아킬레우스의 태도도 옹졸하기만 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푸짐한 포상에 대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심을 꺾지 않는 것은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불공정하며 정의롭지 못하다. 즉 여기서 아킬레우스가 요구하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규칙 자체의 변경이다.
그래서 고대 희랍 윤리학을 다룬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의 저자 윌리엄 프라이어는 그를 호메로스의 영웅들 가운데 관례적인 규칙의 한계를 깨달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한다. 아킬레우스는 분노와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통찰이 아킬레우스에게 명예를 대신할 다른 규칙까지 일러주지는 못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다시 전장에 나서게 되니까. 무엇이 진정 좋은 삶인가.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11. 07. 15.
P.S. <일리아스> 완독을 시도해본 것은 몇권의 가이드북을 참고할 수 있어서인데, 강대진의 <일리아스, 영웅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그린비, 2010)가 대표적이다(이 책에는 더 참고할 만한 책들의 목록도 포함돼 있다).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솔출판사, 2004)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며, <처음 읽는 일리아스>(웅진지식하우스, 2006)은 원작의 내용을 각권별로 간명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길잡이로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