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정의

<일리아스>을 읽으면서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인데, 서양문학 '작가사전'으로 아주 유익한 책이다. 블룸 자신의 기준에 따라 100명의 천재를 선정하고 그 천재성을 10가지 범주로 분류해놓았다. 비록 서양문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무함마드와 <겐지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예외적으로 포함돼 있다) 이만한 규모의 작가론을 써낼 수 있는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해서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놀라우면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책의 구입을 계속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원서와 함께 구입했다. 그건 번역본이 '완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선 역자도 후기에 밝혀놓고 있으므로 완역본을 참칭한다거나 해서 독자를 속인 건 아니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애초에 원문 81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출판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출판사와의 협의에 따라 부득이 일부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 등은 일부 생략했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896쪽) 

번역문이 893쪽에 이르지만 814쪽의 원문을 다 옮긴 건 아니라는 자백이다(짐작에는 5-10% 가량을 덜 옮겼다). 한데 사정상 방대한 분량을 다 옮기진 못했다고만 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독자로선 아쉬움만 클 텐데, 일부 내용을 빠뜨린 이유를 저자 블룸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를 생략했다고 하나 내가 읽은 일부 대목들에서 생략은 그냥 임의적이었다. 역자나 출판사 사정으로 완역하지 못한 것을 애꿎게도 저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다. 

호메로스 편을 예로 들자면, 호메로스의 아이러니는 "자신의 창작이며, 때로는 자신의 승리 그리고 이전의 가인들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블룸은 <일리아스> 2권에 나오는 트라키아 사람 타미리스를 예로 든다. 제우스의 딸인 무즈들과 경연을 해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뮤즈들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고 노래하는 재주도 빼앗긴 시인이다. 그런 전례가 있기에 "호메로스는 뮤즈들과 경쟁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서두를 뮤즈(불멸의 여신)에 대한 간청으로 시작한다.   

<일리아스>를 예로 들면 "Anger be now your song, immortal one"이라고 부르는 식이다(블룸의 인용은 로버트 피츠제럴드의 번역이다. 교재로 좀더 많이 쓰이는 리치먼드 래티모어의 번역은 "Sing, goddess, the anger of Peleus' son Achilleus"로 시작한다). 번역본은 "불멸의 여신이여, 이제 노여움을 노래하소서"라고 옮겼지만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정도가 좋겠다('분노'란 말이 이 작품에서 갖는 중요성을 고려해서도, 원작에서도 첫 단어가 '분노(menin)'라는 점을 고려해서도 그렇다). 이를 통해서 "호메로스는 마치 이전의 시인들이 뮤즈들과 경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으므로, 자신만이 실질적인 최초의 시인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573쪽) 그리고 뮤즈(무사mousa)에 대한 간청을 서두로 삼는 것은 호메로스 이후 서사시의 전통이 된다.   

이 인용문에서 이어서 블룸은 "우리는 타미리스의 목소리를 빼앗은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How should one read the unvoicing of Thamyris?)"라고 질문을 던지고 두 문단에 걸쳐 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번역본에는 생략됐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이거나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로 간주된 모양인데, 애초에 그냥 '편역'이라고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호메로스 편은 물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서사시에 대한 평을 담고 있는데, <일리아스>에 한정하자면 생략된 부분은 한번 더 나온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에는 매우 복잡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나타난 아킬레우스의 보편성은 그의 탁월함은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574쪽)라고 지적한 다음 블룸은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두 영웅의 평판이 서로 엇갈려온 역사를 간단히 기술한다. 200년 전만 해도 아킬레우스가 더 걸출한 인물로 간주됐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작가들에게는 오디세우스(율리시스)가 더 인기를 끌었는데, 그건 "오디세우스의 영웅적이고도 악한 같은 측면이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풍부한 지략과 술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이어서 허클베리 핀과 셰익스피어의 율리시스적 인물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5행 더 나오지만 이 역시 생략됐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플라톤은 <일리아스>의 신들이 장난삼아 인간을 죽였다는 점을 참을 수가 없었다.(574-5쪽) 

원문은 "The Homeric gods, though we think of them as definitive for the ancient Greeks, were very troublesome for many who came after Homer, and for Plato in particular, who could not tolerate the idea that the gods of the Iliad, in particular, killed for their sport."(505쪽)인데, 앞부분을 잘못 옮겼다. '고대 그리스인(the ancient Greeks)'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옮겼기 때문이다(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이 동급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서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었는데, 'definitive'가 '한정적인'이란 뜻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결정적인'란 의미로 풀어주는 게 좋을 듯싶다. 욕심을 내자면 '절대적인'으로 옮기고 싶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의 신들이 절대적인, 확고한 지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들은 한마디로 '골치아픈 존재들'이었고, 특히나 플라톤 같은 경우는 역겹게 생각했다는 지적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다. "어느 면에서 호메로스의 신들은 어린아이이며,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비록 비극적인 인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게 블룸의 견해다. "아킬레우스는 성난 아이가 다친 고양이 새끼를 괴롭히는 것과 흡사하게 트로이인들을 도살한다." 아킬레우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블룸이 꼽는 것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여 다시 전장에 나서 포효하는 대목이다. "<일리아스> 제17권 '참호 위의 아킬레우스'에서"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는데, 문제의 장면은 제18권에 나오므로 아무래도 블룸의 착각 같다(원서의 편집자가 교정하지 못한 것은 의외다). 아테나 여신까지 가세한 포효 소리에 트로이군의 간담은 서늘해지는데 아예 쓰러져 죽기까지 한다.  

그와 아테나가 번갈아 함성을 내지르자 트로이인들은 공포심을 느낀 나머지 가장 용감한 전사 열두 명이 뒤로 주춤거리다가 동료의 창과 이륜전차에 목숨을 잃는다. <일리아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577쪽) 

블룸은 애덤 패리(Adam Parry)의 말을 빌려(번역본은 '애덤 페리(Adam Perry)'라고 오기했다), 아킬레우스를 "일상적인 언어를 수용하지 않으며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호메로스적인 영웅"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데, 여기서 그의 타자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577쪽)

이 대목은 "And yet Homer shrewdly gives the alienated Achilles no language of his own, in which his otherness could be explicitly disclosed."(507쪽)을 옮긴 것인데, 번역문 부정확하게읽힐 수 있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 데서 그의 타자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의 타자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언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혀야 한다.  

패리가 지적했듯이, 햄릿은 공공연하게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뛰어났고 또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비극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에 비해 영웅 아킬레우스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비극을 거의 표현하지 않으며 또한 표현할 수도 없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무능력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아킬레우스가 처한 궁지를 애절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리스 최고의 인물이지만 간절한 승리의 염원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리아스>를 쓴 시인 호메로스의 천재성은 아킬레우스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577쪽)  

여기까지가 블룸의 <일리아스> 읽기다. 기회가 닿으면 블룸의 <오디세이아> 읽기도 마저 다루고 싶다. 그전에 <오디세우스>도 완독해야 하고, 이왕이면 <율리시스>까지 완독해야 할 테니, 먼훗날이 되겠지만... 

11.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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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7-1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덜어낸 분량이 많군요. 5~10%라니... 정말 원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번역본을 듬성듬성 읽기는 했지만 블룸은 치밀한 논리 전개보다는 통찰력있는 언어들을 뱉어내는 비평가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의성'과 '계발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읽어야 될 것 같더군요. 언젠가 오역을 지적하신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하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벌써 상당한 분량일 것 같은데요. 국내 번역서들을 읽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7 12:24   좋아요 0 | URL
나중에 덜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킵하면서 번역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게 못마땅해서 사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나머지 90%에 대해선 참고/인용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낫긴 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현대문학을 잘 모르지만 블룸은 남성,백인,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문학만을 가치있다 여기는 비평가죠.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에서 블룸을 이리 평가합니다. "정전적 인문주의라 불리는 오만한 유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대중연사인 해럴드 블룸은 정신의 활기 넘치는 현존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부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블룸은 언제나 공개강연에서 받은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고, 다른 주장들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며, 그저 단언하고 확언하고 읊조릴 따름입니다. 이것은 자기상찬이지 인문주의가 아니며, 물론 진일보한 비평도 아닙니다."
블룸의 비평관을 저 개인적으로는 수상쩍다 여기고 있습니다.

로쟈 2011-07-18 20:04   좋아요 0 | URL
'정전적 인문주의'란 말을 맞습니다(대개의 '고전'주의자들처럼 블룸 또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죠). 셰익스피어주의라는 게 있다면 셰익스피어주의자이기도 하고요. 활기가 없는 것도 맞습니다. 인터뷰 같은 걸 보면. 동시에 '자아'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래도 저는 그의 작가론과 작품론을 참고합니다. 배우는 게 있어서요...

2011-11-14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