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의 소식지 출판문화(548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이달에 다룬 주제는 '책의 혁명'이다. 책의 역사, 혹은 독서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손에 닿는 대로 열어본 소감을 적었다. 빌미가 된 건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였다.  

출판문화(11년 7월호) 책의 혁명, "손에 책을 들게 하라"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로 유명한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신작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가 출간돼 들여다보면서 ‘책으로 읽는 세상’은 ‘책세상’이기도 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를테면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다. 또 다른 대표작 <책과 혁명>(길, 2003)으로도 널리 알려진 단턴은 ‘책의 역사가’로도 불리는데, 현재는 하버드대학교의 도서관 관장으로 재임중이다. 그가 책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눈길을 돌리게 된 배경일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의 미래>가 제목처럼 전적으로 책의 미래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책의 미래, 현재, 과거를 차례로 살핀다. 원제가 <책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Books)>(2009)인 것은 그 때문이다.   

<책을 위한 변론>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이라고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에 인용된 제목이기도 하다. 번역본으로는 <속도에서 깊이로>가 먼저 나왔지만 원서는 <책을 위한 변론>보다 조금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손에 책을 들게 하라’란 장에서 단턴의 책을 언급할 수 있었다. 저자 파워스가 하버드대 출신인 걸 고려하면 두 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이기도 하다. 파워스가 인용한 단턴의 말은 책의 지구력에 대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종이책을 말하는데, 책은 어떻게 해서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소셜미디어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책은 정보를 제공하고 쉽게 넘겨보기 편리하고 편하게 누워서 읽어도 좋고 보관하기도 쉬우며 쉽게 망가지지도 않는 정말 놀라운 도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업그레이드하거나 다운로드 받을 필요도 없고 부팅을 하거나 암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으며 전원을 연결하거나 웹에서 가져올 필요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책이 갖고 있는 이런 편의성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대체되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전자책이 대중화되고 어느 정도 종이책의 역할을 대신한다 할지라도 책의 종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단턴은 물론 책을 사랑하며 특히 구식 책을 좋아하는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까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기호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 또한 대담집 <책의 우주>(열린책들, 2011)에서 책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고정관념에 일침을 놓는다. 컴퓨터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매체가 있어야 하며 책보다 더 나은 매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컴퓨터도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두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읽노라면 두 눈이 테니스공처럼 부풀어 오를”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므로 욕조 안에서나 침대에 누워서는 읽을 수 없다. 적어도 불편하다. 책도 하나의 도구라면 에코가 보기에 이미 그 기능과 효율성에 있어서는 완벽함에 도달해 있다. 즉 개선의 여지가 없다. 마치 수저나 망치, 바퀴나 가위 같은 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놀랄 만큼 뛰어난 고안품이란 의미에서 책은 일종의 ‘슈퍼노멀’이다.     

 

도구로서 완벽함을 자랑하지만 사실 책은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 도구의 사용자, 곧 독자를, 독자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수저나 망치로는 대신할 수 없는 그 변화는 책을 통한 내면의 발견 혹은 발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자가 발명됐어야 했다. 문자로 된 어떤 기록을 담은 매체가 책이기 때문이다. 그 책을 사람들은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1000년 이상 동안 그 읽기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도서관이나 수도원에 앉아 큰소리로 책을 읽었고 소리 없이 책을 읽는 묵독은 특이하거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때문에 독서는 외부 지향적이고 군중 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다.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고 집단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독서는 구두 기술이자 사회적 기술이었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고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책 또한 아주 비쌌기 때문에 독서는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어려웠다. 아니 실상은 독서 경험이 진정한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개인은 혼자서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가 탄생시킨 개인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에서 환기시켜준 사실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속으로 책을 읽은 최초의 인물은 4세기 후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눈동자로 책을 훑어보고 마음으로 의미를 이해할 뿐 목소리는 조용하고 혀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적고 있는데, 이것이 묵독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앞선다. 처음에 묵독은 특이하고 유별난 행동으로 간주됐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점차 독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된다. 이렇듯 혼자 읽는 경험은 함께 읽거나 소리 내어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속도에서 깊이로>에서 파워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읽는 것은 외부의 통제나 영향력에 종속되지 않는 나만의 내적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러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만의 읽기와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개인’은 아직 소수였다. 책이 너무도 비싼 사치품이었던 데다가 지배계급이었던 교회와 귀족층은 독서와 그로 인한 내적 경험이 보편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묵독은 위험한 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사업가이자 기술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손으로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금속인쇄기를 개발해냈고 이후에 세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의 저자 존 맨이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구텐베르크는 무엇보다 사업가였으며 성경을 대량생산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한 ‘초기 자본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발명한 인쇄술은 예기치 않은 속도로 확산되면서 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455년, 그가 자신이 만든 인쇄기로 처음 성경책을 몇 페이지 인쇄한 해 유럽 전역에서 인쇄된 서적은 모두 합쳐야 수레 하나를 채울 정도였지만, 1480년 즈음에는 120여 곳이 넘는 유럽의 도시와 마을에서 책이 인쇄됐고 1500년까지 대략 3만여 종의 책 수백만 부가 찍혀 나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매년 100억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러한 양적인 팽창과 확산이 산업적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책의 확산은 독자를 일반화했고 읽기를 보편화했다. 이러한 독자 대중의 탄생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를 원제로 갖고 있는 단턴의 <책과 혁명>이 보여준 바대로 ‘금서의 사회사’, 조금 일반화해서 ‘책의 역사’는 근대 사회사와 문화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만들어낸 인쇄술을 인류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발명으로 꼽는 이유이다.  

한편 그러한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 금속활자의 발명이라면 우리가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서지 않는가? 스티븐 로저 피셔도 <읽기의 역사>(지영사, 2011)에서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 “1200년대 한국 인쇄업자들은 중국이 발명한 활자인쇄를 역사상 최초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한국 인쇄업자들은 1403년에 이미(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도 한 세대 앞선다) 조립식 금속활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와 같은, 인쇄술의 급속한 파급과 책의 확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는 “상업적 시장도, 인쇄업자 조합도, 생산과 유통의 상승작용도, 경제적 부 혹은 사회적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읽기 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금속활자인쇄술과 자본주의적 기반의 상호 상승작용이었지만 동아시아는 그러한 배경을 갖고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15세기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한글로 인쇄된 책자를 펴내게 했지만 고위층과 학자들에게만 수 백부를 배포한 식이었다. 예외라면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휴머니스트, 2008)가 보여주듯이 국가 정책적으로 보급한 <삼강행실도> 같은 경우였다.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윤리‧도덕 교과서로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백성의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출판이었다.  

<읽기의 역사>에서 피셔가 지적하는 대로, 문헌 생산이 궁정과 봉건귀족들의 독점을 벗어나기 못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에도 불구하고 출판의 상업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유럽에서 대량인쇄는 문자언어를 보편화시켰고 책이라는 상품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적 개인을 발명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공동체의 출현을 낳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쇄술에 의한 독서 혁명이야말로 근‧현대 서양을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축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공고히 한 토대이며 자양분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육영수, <책과 독서의 문화사>) 분명 인간이 책을 읽기 위해 진화한 것은 아니지만 책은, 책의 발명과 대량보급은 인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책의 혁명’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1. 07. 18.  

P.S.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면서, 그리고 쓴 이후에 모은 책들 가운데는 프랑스 저자들이 쓴 서양 독서의 역사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2판)와 김상웅의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시대의창, 2008), 폴 콜린스의 <식스펜스 하우스>(양철북, 2011) 등도 포함돼 있다. 불볕 더위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피난처'를 따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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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9-19 23:19 
    이번달 출판문화(550호)에 실은 출판 칼럼을 옮겨놓는다.주제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에 대해 썼다. 원고를 써야 할 때쯤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가 손에 잡히기에 읽은 게 빌미가 됐다.출판문화(11년 9월호)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 책중독자지난 7월에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를 빌미로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란 주제를 다룬 바 있다. 구텐베르
 
 
비로그인 2011-07-18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을유문고로 나왔던 E. 그롤리에의 <도서 출판의 역사>(원제: 도서의 역사)에서 '구텐베르크의 시도에 앞서 인쇄된 한국의 어떤 책이 알려져 있다'는 식의 표현을 보고 기분이 묘했던 적이 있었는데요(한국의 '어떤 책'이라...) ㅋㅋ 그러고 보니 에스카르피의 <문학의 사회학>도 생각나네요. 이젠 옛날 책들이로군요^^

로쟈 2011-07-18 19:58   좋아요 0 | URL
역시 을유문화사 책에 정통하시군요.^^ 에스카르피는 저도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너무 오래전인데요.^^;

2011-07-18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