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한겨레의 오피니언 란인 훅(hook)에 가끔 들러보는데, 인터넷 액티비즘에 관한 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9879). 필자는 이진순 교수다. 다른 기사를 보니 "1985년 김민석(민주당 최고위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총여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현재 미 올드도미니언대에서 시민저널리즘과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치고 있다." 칼럼은 '위키피디아의 모든 것'을 압축해주고 있다.  

한겨레 훅(10. 08. 03) 위키시대의 지식인 

그 곳에 가면, 노무현과 이명박이 있고 김대중도 전두환도 있다. 원더걸스와 에픽하이, 슈퍼주니어도 있다. 김치와 보신탕은 물론, 찜질방(Jjimjilbang)과 막걸리(Makgeolli), 팥빙수(Patbingsu)도 있다. 여기서 “그 곳”이라 함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폭발력 있는 사이트가 아니지만, 위키피디아는 방문객 숫자 면에서 전 세계 5대 사이트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매체이다. 방대한 분야 1,600만 여개에 달하는 주제어에 대해 주석을 달아 놓은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으로,  매달 3억3천만 명이 찾는 인기 있는 사이트이다.  전 세계 272개 언어로 편찬이 되는데, 이 중 영어로 된  컨텐츠가 330여만 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독일어와 불어가 각 100만여 개, 폴란드어와 이탈리아어, 일본어,  스페인어가 각기 60-70만여 개로 그 뒤를 잇는다.  한국어로 된 항목은 14만여 개로 전체 언어 가운데 21위를 차지한다.  유투브나 페이스북,  마이 스페이스등과 같은 대부분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소유인데 비해, 위키피디아는 비영리법인인 위키미디아재단에 의해 운영되며 배타적 지적재산권이 아닌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협약에 의해 누구나 그  내용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누피디아는 왜 망했을까
위키피디아의 성공적 신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2000년 초, 미국의 웹 광고회사 대표인 지미 웨일스(Jimmy Wales)와 당시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철학과 박사과정 학생이던 래리 생거(Larry Sanger)는,  온라인 상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지식사전을 만들자는 취지로 누피디아(Nupedia)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수천 명의 전문가 메일링 리스트를 확보해서 그들 중 누군가가 내용을 작성하면 다른 전문가들에게 그  내용을 검토하고 감수 편집하게 하는, 일종의 피어리뷰 (peer-review) 시스템이었다.  취지는 참신하고 거창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2000년 3월부터 2003년 9월까지 누피디아에 게재된 주제어는 고작 24개, 74개의 주제어는 여전히 검토 중인 채로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지미 웨일스는 훗날, 누피디아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자신들이 전통적인 학계의 방식을 따르려 한 것이 실책이었다고 고백했다.

 “우리 스스로 전통적인 학술적 방식, 즉 위로부터의 편찬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출된 글들을 검토 비판하고 피드백을 준다는 면에서 기존 학계의 논문심사위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 자원 봉사하는 저자들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는 작업이었겠지요. 그것은 대학원에서 논문을 다루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누피디아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래리 생거는, 누구나 글을 작성해 올리고 아무나 감수 편집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위키 소프트웨어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전문가 저자들에 국한되었던 내용 작성과 편집의 권한을 일반 대중에게 대폭 위임한 것이다. 2001년 1월, 사상 유례가 없는 오픈소스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그렇게 탄생했다. 위키피디아의 광범한 이용에도 불구하고 위키피디아의 신뢰성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다. “아무나 아무 때 아무 내용이나 게재하고 편집할 수  있다면 도대체 그 내용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생들이 학생들 리포트에 위키피디아를 인용하지 말도록 권한다. 저자의 책임성을 물을 수 없고 그 내용이 수시로 변하는데다가 전문가의 감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지식생산의 패러다임은 변화했는데, 그 지식의 신뢰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정말 그런가. 위키피디아에 실린 글들은 믿을만한 소스가 되지 못하는가.

위키피디아의 비밀 
2004년 버팔로대학의 알렉스 할라바이스 (Alex Halavais)교수는 위키피디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하기 위해 흥미로운 실험을 기획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류가 담긴 13개 항목의 내용을 삽입하고 그 오류가 바로잡히는지 관찰한 것이다. 13개 중 몇 개나, 얼마 만에 제대로 수정이 되었을까. 그의 연구는, 13개 오류 모두가 불과 두 세 시간 안에 모두 바로잡혔다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7년, 미국 콜로라도의 지역신문인 덴버포스트도 위키피디아 정보의 질을 조사했다.  문화와 인물, 자연과학과 인문지리가 두루 포괄되도록, “이슬람”과 “빌 클린턴” “지구온난화”와 “중국” “진화”등 다섯 가지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분야 다섯 명의 대학 교수들을 위촉해서 위키피디아에 실린 정보의 정확성과 수준을 면밀하게 검토하도록 했다. 그 결과, 다섯 명 중  네 명이 위키피디아에 대해서 “정확하고 정보적 가치가 있으며 포괄적이고 (accurate, informative, and comprehensive) 학생들과 독자들에게 훌륭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나머지 한  명은, 생략된 부분이 있어서 세부사항을 전달하기에 부정확하다면서 “썩 좋은 것은 아니다 (not very good)”라고 했으나 이  역시 위키피디아의 근원적 오류를 지적했다기보다는, 그 불완전성에 주목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1968년 환경학자인 개릿 하딘 (Garrett Hardin)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the commons)”은, 인간들이 저마다 이기적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공의 자산은 약탈당하고 황폐해 진다고 경고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너무나 손쉽게 누구나 작정만 하면, 원고지 수백 매 분량의 기사를 삭제해 버릴 수도 있고 “갑돌이는 멍텅구리다” 하는 악의적 내용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위키피디아에서는, 하딘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공유지가 확장되고 발전하며 진화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왜일까?  누구나 손쉽게 내용을 수정 편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보가 왜곡되고 훼손될 위험성도 높지만 다른 한편 그 위험으로부터 정보를 보전하고 신속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다. 밤 새워 쓴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저작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위키의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글을 올리고 고치고 업데이트한다. 위키피디아의 성공은, 인터넷의 공공재산을 악의적으로 망치려는 사람보다 고쳐서 발전시키려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너무 낙관적인 소리로 들리는가? 믿기 어렵지만, 그게 아니라면 위키피디아가 쑥대밭이 되지 않고 오늘날 이렇게 건재한 것을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식생산의 새로운 패러다임
위키피디아가 망가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장치가 몇 가지 있다. 모든 아티클은 아무나, 심지어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손을 댈 수  있지만 그 흔적은 모두 “히스토리” 섹션에 남는다. 아티클마다 붙어있는 히스토리 탭을 누르면,  맨 처음 작성된 두어 줄짜리 엉성한 내용부터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내용까지, 몇 월 몇 일 몇 시에 누가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첨삭했는지 시간대별로 한 눈에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순간의 객기로 모든 내용을 삭제하거나 훼손한다 해도, 이전 내용을 복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이전 단계 글을 찾아서 덮어쓰기 하면 끝이다. 망치는 사람보다는 바로 잡는 사람이 많고, 망치는 속도보다는 바로 잡는 속도가 빠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방대한 분량의 세계 최대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이룬다. 그것이 집단지성의 힘이다.

혹자는 위키피디아가 편파적이며 비객관적이라고 말한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기술에서 그런 비판은 두드러진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 어느 백과사전이 “엄정하게” 객관적이며 ”칼로 자른 듯이” 중립적일 수 있을까. 학계에서도 권위를 인정받는 브리태니커는 그럴 수 있는가. 기실 지식이란, 특히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지식이란, 일정한 시각과 입장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브리태니커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편집진에게 편지를 보내고 정정을 요구하고  편집진과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현저하게 잘못된 내용일지라도 정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긴 과정 동안, 모르는 이들은 그 잘못된,  혹은 오래된 정보를 그냥 읽고 인용할 수도 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이런 수고가 줄어든다.  직접 고치면 된다. 때로 상이한 의견을 가진 이가 내가 쓴 글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지만,  갑론을박이 거듭될 만한 사안인 경우 ” 디스커션” 탭을 눌러서 장외 논전을 벌일 수 있도록 위키피디아는 설계되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공공저널리즘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직접 자신들이 조사하고 취재한 내용을 위키피디아에 올리라는 과제를 준다. 그들이 올린 글이 뒷 사람에 의해서 삭제되거나 수정되어도 점수에는 상관없다고 여러 번 강조해도, 막상 자기 글이 다른 사람에 의해 고쳐지게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황하고 불쾌해 한다. 몇몇은 나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몇몇은 자기 글을 수정한 이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서 논쟁을 벌이고 그들이 작성한 아티클을 찾아내서 똑같이 검열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복”을 한다. 자기 글이 삭제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 의해 더 추가되고 발전된 경우, 그 학생들이 가지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재차 삼차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찾아 고치고 새로운 정보를 추가한다. 게재된 자기 글에 대해 일종의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학생들로 하여금 더 많은 자료조사와 공부를 하도록 만든다고 나는 믿는다. 학기 말에 위키피디아 과제물에 대한 소감을 쓰게 하면, 자기 글이 삭제당해 핏대 올리던 학생이나 자기 글이 줄줄이 새끼를 쳤다고 기세 등등하던 학생이나,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위키피디아에 글을 올리는 과정이 이렇게 간단한 줄 몰랐다”, “내가 쓴 글이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 그들은 완제품으로 포장된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되새김질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는 자가 된다. 적어도 노폭시내의 “하이랜드 파크“ 지역이나 ”오션뷰 초등학교“에 관한 한, 그들은 할 얘기가 아주 많다.

지식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  지식은 한 사회의 규범과 도덕과 가치관을 가름한다. 일부 지식생산전문가가 이제 그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서 애달파할  일은 아니다. 지금, 위키피디아의 아무 사이트나 들어가 보라. 찾고자 작정하면, 오류와 불완전함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면, “아 역시 아마추어 대중이 하는 짓이란…”하고 혀를 끌끌 차는 것으로 자칭 “전문가”의 자존심을 채울 것인가. 당신이 돌아서서 “내가 뒤져 봤는데, 위키피디아 그거 엉터리더라구…” 핏대 올리는 동안, 누군가는 그 아티클을 바로잡고 새 내용을 추가할 것이다. 참여 없이 평가만 하는 이들의 지적 권위란 그렇게 사정없이 뭉개지기 마련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될 것인가
벌떼처럼(swarm-like) 들끓고 천방지축인 이 시대의 시민들에게 “지성”이란 타이틀을 내주기 아쉬워 버티기는, 오늘날 한국의 좌우 양 극단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히 “대중은 변덕스럽고 예측불가능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비평한다. 차이가 있다면, 한 쪽은 “누가 배후인가” 뒤쫓는 유령놀음에 빠져 있는 데 반해 다른 한 쪽은 “배후를 거부하는” 개념 없는 대중을 개탄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산정 높이 올라가 고고하고 외로운 성채를 짓고 멀리 산 아래를 관망하며 품평하고 한탄하고 혀를 찬다. 그들 중 상당수는, 80년대 삶과 노동의 현장에서 인생을 배우겠다며 공장이나 농촌으로 향했던 이들이다. 이제 역사는, 산 아래 저 떠들썩한 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산채에 머물며 조악한 구닥다리 망원경으로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는 이들은 여전히 끼리끼리 모여 토론하고 논쟁한다. 이제는 하산해서 현장으로 갈 때다. 고민해서 만든 텍스트가 있으면 온라인에 전면 공개해서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 비판받는 것이 어떨까.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이라도 좀 친절하게 써 주면 좋겠다. 내가 조국, 김두식, 한홍구 교수와 같은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시각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글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읽기 편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 산정에서나 통하는 지식인의 은어를 버리고,  현장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광장의 언어를 쓰지 않으면서 누구와 어떻게 소통을 한단 말인가

10.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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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8-09 11:36 
    위키시대의 지식인 — “그들은 공히 “대중은 변덕스럽고 예측불가능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비평한다. 한 쪽은 “누가 배후인가” 뒤쫓는 유령놀음에 빠져 있는 데 반해 다른 한 쪽은 “배후를 거부하는” 개념 없는 대중을 개탄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via 로쟈)
 
 
얼그레이효과 2010-08-05 14:03   좋아요 0 | URL
학생들에게 위키피디아에 내용을 올리는 숙제를 내주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살피는 대목이 흥미롭네요.(너무 나간 맥락일 수 있으나)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 가르치는 분들 현실 보면..아직 "예전 방식"에 안주해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로쟈 2010-08-05 15:16   좋아요 0 | URL
고고한 표범들이 많이 계시죠...

쟈니 2010-08-05 14:17   좋아요 0 | URL
축적된 기록과, 기록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로쟈 2010-08-05 15:18   좋아요 0 | URL
국내에서도 주목받은 건 4년 정도밖에 안됐는데, 10년후가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05 22:54   좋아요 0 | URL
킬리만자로 산을 직접 올라가 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거기는 표범이 안 산다고 하던데요...

로쟈 2010-08-05 23:00   좋아요 0 | URL
거긴 벌써 다 죽었나 보네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문과 쟁점'을 집약한 책이 출간됐다. <천안함을 묻는다>(창비, 2010). 여전히 조사가 진행중(?)인 이 사건이 어떻게 귀결될지 궁금한데, 짐작엔 머지 않은 장래에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기 전에!)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책은 손 가까이에 둔다고 해놓고 못 찾고 있는데, 일단은 리뷰기사만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 08. 04) 천안함에 ?를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  

<천안함을 묻는다, 의문과 쟁점>(창비)은 지난 3월26일 천안함 침몰 이후 시민사회와 과학계·언론계·군사전문가들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제기한 합리적·상식적인 의심과 의문, 과학적 반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책은 1~4부에서 사건의 발생부터 사태 전개과정, 정치·외교·안보 문제까지 두루 짚고 있다. 주목할 만한 곳은 2부다. 민·군 합동조사단의 5월20일 조사결과 발표는 ‘중간’조사 결과였다. 하지만 정부와 합조단은 5월15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발견한 어뢰 후미부 추진체 등을 20일 ‘결정적 증거물’로 제시하며 사실상 조사를 마무리했다.

이에 이념·정파와 상관없는 과학자들은 정부 발표에 잇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 측은 묵묵부답하다 겨우 해명의 장에 나오고, 또 기존 발표 결과를 번복하기도 했다. 과학자인 서재정 존스홉킨스대 물리학과 교수와 이승헌 버지니아대 물리학과 교수는 ‘결정적 의문, 결정적 증거’란 글을 실었다. 이들은 ‘외부폭발’-‘1번 어뢰’-‘1번 어뢰=북한 어뢰’로 완결된 합조단 논리 중 한 가지라도 입증되지 않으면 논리적 연결고리가 끊어져 북한이 천안함을 파괴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송태호 KAIST 교수는 2일 국방부에서 “어뢰 추진부에서 20도 이상의 온도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1번’ 글씨 부분은 0.1도의 온도 상승도 없어 글씨 등이 열 손상을 입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1번 어뢰’는 고열로 타버렸을 것”이란 주장과 비교해도 좋을 듯하다. 이 교수는 책에서 “알루미늄 파우더가 프로펠러에 접촉하는 순간 액체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알루미늄 용융점은 660도이므로 폭발 때 프로펠러 인근에 그 이상의 고온이 가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대로라면 송 교수의 “0.1도의 온도 상승이 없었다”는 주장은 탄두에서 디스크(1번이라 쓰인 부분)보다 멀리 떨어진 프로펠러에 폭약 성분인 알루미늄이 왜 흡착됐는지 설명 못하는 셈이다.

5부 ‘천안함 사건의 출구와 해법’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최문순 민주당 의원, 강태호 한겨레신문 기자가 천안함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와 정부의 외교 문제를 논의한 좌담이다. 1977년부터 통일 업무를 해온 정 전 장관이 구체적·현실적 진단과 해법을 제시했다. 정 전 장관은 행위 주체가 빠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거론하며 “결론은 ‘대화로 풀라’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렇게 요란을 떤 것인가”라며 “천안함 사건 이후 외교는 자해 행위가 됐다. 이 문제를 불러온 것은 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인식 결여, 철학 부재”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는데도 95년 6월 북한에 쌀 15만t을 지원했다”며 인도적 지원도 강조했다. 그는 “소망교회, 순복음교회에서 대북지원을 해야 한다고 나섰다”며 “대통령은 ‘그분들이 하는 일을 말릴 수는 없지 않은가’ 식으로 화해협력으로 나갈 토대를 만들고, 6자회담이 열렸을 때 나가는 좋다”고 했다. 또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경제공동체 형성 토대가 허물어졌다”며 “‘북한 경제의 중국화’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적으로 큰 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10.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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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부터 매주 두 차례(화, 목)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http://blog.aladin.co.kr/zizek)이 연재된다. 자음과모음의 웹진 형태로 알고 있는데, 연재 공간이 벌써 만들어져 있기에 깜짝 놀랐다. 한창 첫 연재분 구상을 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소개가 이미 나갔지만 조금 보충하자면 이런 취지다.  

'첫 십년의 교훈'?! 지젝의 최근작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서론 제목이다. 돌이켜 보면, '9.11' 특별한 날짜로 시작된 2000년대의 첫 십년은 그 직전 1990년대의 10년만큼이나 다사다난했으며 세계정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도 자극과 충격을 주었다. 과연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으며, 우리는 이 첫 십년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을까?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도 이 문제가 가장 골몰해온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가 동시대의 철학자로서 개념적으로 파악한 지난 첫 십년을 <실재의 사막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국역본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세 권의 책을 되읽어나감으로써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런 기획을 잡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책이 더 많이,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작업과 열정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내게 이 일을 수행할 역량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책임은 있다고 믿는다. 책임이란 '응답'이니까. 또한 '첫 십년의 교훈'을 잘 되새긴다면, 우리가 '다음 십년'은 혹 더 잘 생각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해야만 갈 수 있다."라고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되뇌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지젝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는 '여배우' 대신에 '지젝'을 만날 참이다. 바야흐로 개봉박두! 많은 기대와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 

10.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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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3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3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포지 2010-08-03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두 번씩 지젝에 대해서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말인가요? ... 아 저로선 생각만해도 멀미가 나는 스케쥴이네요...

로쟈 2010-08-03 11:28   좋아요 0 | URL
그나마 몇가지 아이템 가운데 가장 편하다고 생각한 게 '지젝 읽기'였어요.^^;

마태우스 2010-08-0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전문가이신 로쟈님의 면모를 볼 수 있겠군요. 그거 다 읽으면 저도 지젝 좀안다고 딴데가서 우겨도 되는 거겠지요?

로쟈 2010-08-03 17:02   좋아요 0 | URL
전문가라는 건 어폐가 있지만, 가장 반기는 독자 중 한 사람인 건 맞을 것 같고, 그에 대한 '책임'입니다.^^;

2010-08-03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8-0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연재로군요. 로쟈님의 '지젝 이해'에 대해 전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인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는 번역본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연재에서 문제있는 부분들의 교정도 볼 수 있는지요?

로쟈 2010-08-04 11:45   좋아요 0 | URL
네 불가불 그렇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버리기엔 아까운 책이어서요...

2010-08-05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5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전에 <디자인>이란 잡지를 택배로 받았다. 8월호 '오피니언' 란에 쓴 칼럼 덕분이다. 디자인에 대해 몇마디 해달라는 청탁을 꽤 오래 전에 받았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급조한 글이다. 그런 곤욕스러움도 글에는 배여 있다. 그래도 지면에 번듯하게 실은 글이니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디자인(2010년 8월호) 형태와 불륨에 바치는 예찬

디자인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의상, 공업 제품, 건축 따위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으로 돼 있다. 내 기억에 그런 디자인을 해본 건 중학교 2학년 기술 시간에 양철 쓰레받기를 만든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창조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교과서에 나온 설계도면을 양철판에 그대로 옮겨오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잘 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으로 나뉘었다. 손재주가 없는 편에 속하지만 이때만은 교과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 물론 그런 인연으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후에 디자이너를 꿈꾼 적도 없고 디자인에 대해 깊이 숙고해본 적도 없으니 대략 나는 디자인과 무관한 부류다.   

그럼에도 뭔가 디자인에 대해 할 말을 찾다 보니, 떠오르는 건 ‘형태’뿐이다. 디자인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입체적인 차원에서 어떤 부피를 뜻하는 ‘볼륨’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형태나 볼륨에 시간이란 차원을 추가하면 ‘진화 형태론’이 된다. 진화 형태론의 관심사는 어떤 형태적 자질이 진화적 압력을 견뎌낼 수 있는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사실 디자인 또한 그렇지 않은가. 제품 디자인의 경우, 구매자의 호응이라는 시장의 압력에 대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유력한 자질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니까. 다만 진화적 압력이 시장의 압력과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스케일일 것이다. 지질학자들이 얘기하는 이른바 ‘깊은 시간(deep time)’이 우주적 진화의 시간이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10억을 의미할 때 10뒤에 0이 몇 개나 붙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10억 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건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가령 이 깊은 지질학적 시간을 1마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마지막 몇 인치를 차지한다. 또 우주 달력을 예로 든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제야의 종이 울리기 불과 몇 분 전에 나타났을 뿐이다. 한 지질학자는 지구의 역사를 왕의 코에서부터 쭉 뻗은 손끝까지를 거리로 쟀던 옛 영국식 야드 자로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왕의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손톱줄로 한 번 갈면 인간의 역사는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깊은 시간 앞에 놓일 때 인간은 가련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것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이것을 ‘우주적 공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갈대’에게 방책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깊은 시간’에 대응하는 ‘깊은 개별성’이 특권처럼 주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폴락의 <생명의 기호>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다른 모든 종들이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자손을 낳고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면, 우리 종의 운명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큰 뇌는 사람에게, 의식과 기억과 불멸성에 대한 꿈을 가져다주었고 또한 우리 종이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종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깊은 개별성을 주었다.”  

이 ‘깊은 개별성’이란 특권은 모든 망각을 주도하는 매우 막강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달리 ‘유한성의 방어기제’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모든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한다. 흔한 말로 ‘자기 앞가림’이고, ‘생활’이다. 그런 앞가림에서 벗어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두려운 진실이다. 우주적 공간에 상응하는 무한한 시간과의 조우. 형태에 대한 진화적 압력이란 시간의 압력이다. 곧 시간은 형태의 적이다. 시간은 형태를 마모시키고, 어렵게 가꾸고 다듬은 볼륨을 무너뜨린다. 디자인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건 두려운 일이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 싶다. 그래서? 예의 우리는 자신의 발등만을 주시하며 자신의 일생에만 목을 맨다. 이걸 겸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압력에서 살아남은 형태들은 내게 그런 겸손을 떠올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영웅적 겸손이기도 하다. 비록 한시적일지라도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 역량을 뽐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한편으론 우리를 경탄케 하는 형태와 볼륨에 대한 어떠한 예찬도 과도하지 않다고 해야겠다

10. 0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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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솝 2010-08-02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디자인이라는 말을 어원으로 풀기를 즐겨합니다.
디자인의 말 뜻을 어원으로 나누면 'Design = De + Sign'이 되고 이 두 단어의 뜻을 풀어보자면 기존의 형식(Sign)을 해체(De)하는 행위가 디자인(Design)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기성세대가 '상식'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것을 두들겨 부셔서, 다시 해석하는 행위. 그것이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쟈 2010-08-02 22:16   좋아요 0 | URL
네, 오래전 강의때 저도 애용한 기억이 나네요. 기호학 강의였거든요.^^

미지 2010-08-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조하셨다고는 해도, 큰 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08-03 23:10   좋아요 0 | URL
그게 급하게 '편집'한 원고이기도 합니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40자평만 적어놓고 입을 닫으면 '오해'를 부를 것 같아서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번역에 대한 유감을 몇 자 적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 연이어 '하버드' 간판을 달고 나온 책이라서, 인터뷰이가 된 14명의 철학자 가운데 9명은 '구면'이지만 나머지 5명의 '철학'은 궁금하기도 해서 책은 단박에 구입했다. 공역자 중에 강유원씨도 포함돼 있어서 번역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도 보태졌다.'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말하는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대한 조언'!? 하지만 정작 읽은 책은(나는 1/3을 읽었다) 무척 당혹스럽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척 괴이하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어디에다 조언을 구해야 하는지?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따라가보려고 했지만, 내가 얻은 건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고민이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다.  

 

번역서는 원서와 차례가 좀 다른데, 존 롤스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움베르토 에코로 시작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덜 부담스러우리라는 '배려'일 것이다(국내에 좀 지명도가 있는 리처드 로티도 전진 배치되었다). 하지만 번역은 에코의 약력 소개에서 "튜랭대학에서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중세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삐걱거린다. '토리노(Turin)'란 지명을 영어로는 '튜랭'이라고 읽어주는지? '밀라노(Milan)'와 '피렌체(Florence)'가 '밀란'과 '플로렌스'로 옮겨지지 않은 걸 보면, 지명은 이탈리아어 표기를 따라준 것인데, 듣보잡 지명인 '튜랭'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을까? 유려한 번역서였다면 '옥에티'가 되었을 뿐이겠지만, 읽다 보니 여기저기 '튜랭'이다. 리처드 로티까지의 인터뷰를 보다가 나는 원서를 구하기로 했다. 번역서만으론 읽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고, 그게 두 주 전이다. 그리고 엊저녁에서야 잠시 시간을 내서 코넬 웨스트 편을 읽고(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철학자다) 오늘 스탠리 카벨에서 책을 덮었다.  

한 언론 리뷰에서는 기자가 '기계적인 번역' 같다는 인상을 적었지만 뜻이 통한다면 기계적인 번역이라고 해서 '유감'까지 가질 이유는 없다. 문제는 '작문'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말 제대로 된 '공역' 작업이 이뤄진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나마 잘 넘어가는 편인 에코의 인터뷰 말미에서(곁다리로 말해두자면, 이 인터뷰의 질문자에는 홍종민이라는 학생이 포함돼 있다. 한국 학생인 듯하다) 에코가 하는 말을 보라.  

"개념이나 사상들이 기호라는 것은 오컴의 사상에서 알 수 있듯이, 로크의 말보다 더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자유롭게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26쪽)  

17세기 철학자인 존 로크가 "사상조차 기호들이다"란 말을 했다는 질문자의 언급에 실상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인데,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은 "But it can be found even before."의 번역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발견될 수 있다"는 정도가 '직역' 아닌가. 어떤 심오한 의역의 과정을 거쳐서 "공표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 "-라고 가정해봅시다" 다음에 "If Mind=Brain, then what happens are certain physical states"란 문장이 누락됐다. "만약 정신(마음)=뇌라면,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물질적 상태들이죠." 그리고 이어서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또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란 문장 앞에서 "Certainly they are not things"(분명히 그것들이 사물은 아니죠)는 번역이 누락됐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은 일부러 생략한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유럽에선 열두 살과 열여섯 살에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읽기 시작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많이 알게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조금 더 정확하게 옮기자면 "유럽의 상급학교에선 열두 살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기 시작해서 열여섯 살이 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걸 알아야 하게끔 돼 있습니다."이다. 하지만 <쿠란>은 물론 <성서>도 읽지 않으며 불교 교리에 대해선 구경도 못해본다는 것이 '유럽중심적 교과과정'의 오류이고, 이것이 '보편교육'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에코의 지적이다.   

이어서 로티는 내가 한때 열렬히 관심을 갖던 철학자여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일단 로티의 약력에서 미국의 주류 분석철학계의 '우등생'으로 프린스턴대학 철학과에 몸담고 있다가 버지니아대학의 (철학과가 아닌) 인문학교수로 가서, 다시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로 자리를 옮긴 일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   

"직업적으로 보면, 로티는 미합중국 철학과 사랑싸움을 벌였지만 끝내는 이혼을 한 것처럼 끝나버렸다. 로티가 버지니아대학의 소속 학과가 없는 자리로 가면서 프린스턴대학을 그만둔 것이다."(31쪽) 

'미국(America)'을 '미합중국'이라고(혹은 '유에스'라고) 옮기는 것은 강유원씨의 고집이다('미국'이 '미합중국'의 준말이란 사실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는 취지일까?). 뒷문장은 "Rorty left Princeton for a non-department position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and now teaches in the Comparative Literature department at Stanford."을 옮긴 것이다. 물론 로티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잉여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누락시킬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  

로티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그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1쪽)

번역문은 이미 장황한데, 여기에도 누락이 있다. 원문은 "Rorty argues that 'true' is simply a 'compliment' to views that we think well-justified, as that the notion of truth as the representatio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is no more than dogma."이다. 로티의 기본적인 입장은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진리=자연의 거울)이 도그마에 불과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 대신에 존재하는 것은 '정당화된 견해들'뿐이고, '진리'란 말은 이 '견해들'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이다.('브라보!' 혹은 '굿잡!') 다시 옮기면, "로티는 '진리'란 우리가 잘 정당화됐다고 보는 견해에 대한 '칭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개념은 도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리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다. "로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윤리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버리려 했으며, 인간만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세계에 대답할 수 있음'이라는 진리의 개념을 포기해야만 하고, 인간으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답할수 있음'은 'answerability to the world'의 번역이며, 지배적 진리관이었던 '대응설'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로티에게 문제가 되며,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별히 '자연'을 제외하고, 로티에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문만 보자면, 로티에게는 자연만이 유일하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라는 것이 되는데, 이야말로 정반대의 해석이다. 원문은 "To him there is no court of appeal beyond humanity itself, particularly not 'Nature'."이다. 강조한 대목은 '특히 '자연을 제외하고'가 아니라 '특히 자연은 그러한 법정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참고로, 'court of appeal'은 '항소법원' 혹은 '최고법원'이란 뜻이라고 한 분이 알려주셨다.)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시간관계상,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코넬 웨스트 편으로 넘어간다. 1953년생의 중견철학자인 그는 현재 프린스턴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비평가와 시민권 운동가이기도 하다고. 이 번역서에 나는 별점을 둘 주었는데, 번역은 아주 실망스럽지만 코넬 웨스트란 저자를 알게 해준 것 때문에 별점 하나를 덧붙인 것이다. 그를 소개하는 서두에 보면, 2000년 봄학기에 웨스트는 하버드에서 힐러리 퍼트넘과 함께 '실용주의와 신실용주의'란 강의를 했다. 웨스트 교수의 강의 습관은 매 시간 공부하게 되는 각 철학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전에 핵심 단어 몇개 쌍을 칠판에 적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대목. 

"웨스트의 철학에 대한 강좌에서 퍼트넘은 싱긋 웃는 웨스트의 습관을 따라하며, 웨스트가 철학적으로 조망한 주요 관심사로 죽음/욕망, 독단주의/대화주의, 지배/민주주의를 들었다."(49쪽) 

원문은 "When it came to the lecture on West's own philsophy, Putnam, with a playful grin, borrowed West's habbit and wrote what West had acknowledged as the primary concerns in West's philsophical landscape: death/desire; dogmatism/dialogue; domination/democracy."이다. 요는 '싱긋 웃기'가 웨스트의 습관이 아니라 '주요 개념쌍을 칠판에 미리 쓰기'가 습관이라는 것이고, 퍼트남이 웨스트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걸 흉내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너무 대충 번역했다는 인상이다.  

  

코넬 웨스트는 이스라엘 셰플러(<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의 저자)에게서 배우고, 리처드 로티에게서 실용주의를 배운다. 그리고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를 발견"한다. 번역서는 불친절하게도 조시아 로이스에 아무런 설명도 붙이고 있지 않은데, 미국 철학자 'Josiah Royce(1855-1916)'를 가리킨다. 주저는 <근대철학의 정신>(1892). 'old Josiah Royce'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가 아니라 '옛날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를 뜻한다. 별로 주목받지 않은 철학자였던 것 같은데, 웨스트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주저에 포함된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는 "미합중국 철학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까지 꼽는다. 웨스트의 특이한 점이긴 한데, 그는 "키르케고르적이고, 쇼펜하우어적인 경로"를 통해서 실용주의를 알게 되고, 또 그런 관점에서 해석한다.  

웨스트는 미국 분석철학계의 좌장이었던 윌러드 콰인도 실용주의 철학자로 간주할 정도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 "콰인이 천재적인 것은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로 기호 논리학자와 논리실증주의자의 가장 복잡한 담론들에 개입했다는 점 때문"(53쪽)이라고 쓴 구절을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한데 이 인용도 핀트가 맞지 않게 옮겨졌다. 원문은 "The genius of W. V. Quine was to intervene in the most sophisticated discourses of symbolic logicians and logical positivists with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이다. 구문은 'intervene A with B'이다. 'B를 가지고 A에 개입하다'. 문제는 B에 해당하는 두 가지다.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을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라고 옮겼는데, 어떻게 해서 '도식들'이 뒤에 나오는 '에머슨적인'도 받게 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A)pragmatic formulations (B)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가 따로따로다.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란 엉뚱한 소리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저는 물리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세계-만들기에 대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소견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굿맨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측력에 관해서라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예측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이 있으며, 제가 콰인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54쪽) 

이 대목은 웨스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는데, 번역문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넬슨 굿맨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그러졌다. 굿맨의 책은 <예술의 언어들> 번역이 두 종 나왔었는데, 이대출판부판은 어찌된 영문인지 뜨지 않는다. 번역문의 첫 문장은 "And I do believe that physicists have much to tell us, they have their own versions of world-making, to use Goodman's language, and they predict better than any of the other groups."이다. '굿맨의 언어(용어)를 빌리자면"이라고 해놓고, 정작 그게 무엇인지 번역문은 놓쳤다. '세계-만들기'가 굿맨의 용어이고, 그는 <세계만들기의 방식들>이란 저작을 갖고 있다(박이문 교수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으로 나는 한때 번역스터디를 한 인연이 있다). 굿맨이 보기엔 예술이나 과학이나 다 대등하게'세계만들기'의 방식들(버전들)일 뿐이다. 물리주의자들의 언어로 기술되는 세계판은 '예측력'에서는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그게 유일한 세계판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술은 예술대로 독자적인 '세계만들기'로서 정당화된다. 그게 굿맨의 기본적인 예술철학이고 언어철학이다. 대체로 역자는 미국 철학에 별다른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게 아닌지.  

"당연히 그것은 흑인 학생이 아닌 학생들, 백인, 종동계, 남미계,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용기 있게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전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계층, 와스프(WASP), 남성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흑인은 흑인 청교도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아니라, 보다 나은 계층이며, 와스프이며, 남성입니다. 존재하려는 용기를, 고투를 할 용기만 충분하다면, 그런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67쪽) 

"존재하려는 용기, 고투를 할 용기"(courage to be, to wrestle)는 웨스트 철학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강조할 일은 아니고, 다만 '흑인 청교도인'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흑인 프롤레타리아(black proletarian)'의 오역이란 것만 지적한다. '프롤레타리아'와 '청교도(Puritan)'를 혼동한 것이리라. 기독교 얘기가 나온 김에 키르케고르로 넘어간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삶이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지만, 그는 기독교의 원조를 받고 있었습니다. 버나드 쇼는 증오란 겁쟁이가 된 비겁한 자의 복수라고 말했는데, 레비나스처럼 하다가는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70쪽)  

키르케고르가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다고 한 대목은 "Kierkegaard shows Christian life is living dangerously -ah, proto-Nietzschean, but he's got it under Christian auspices, right?"를 옮긴 것이다. '기독교의 원조'보다는 '기독교의 보호' 하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원문은 이렇다. "Bernard Shaw says hatred is a coward's revenge to being intimidated, so that you can't deal with otherness, you can't deal with stangeness, in the courageous way that trying to relate, commune - it's almost Levinas-like."이다. 번역문은 '그건 거의 레비나스식이죠'라는 대목을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와 연결시켜놨는데, 정반대 아닌가? '타자성의 철학자'가 '타자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다니! 번역문대로라면 코넬 웨스트가 멍청이란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비로소, 본론이자 클라이막스다. 코넬 웨스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부분인 동시에 번역의 '횡포'에 화가 났던 부분이다(70-73쪽).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도 잠시 따라가본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적 용기가 철학의 전성기를 만듭니다.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했던 것이 맞다면, 소크라테스는 심오한 방식의 지적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 예수는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결국 소크라테스보다 더욱 더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에 관한 대목은 "And for me, of course, Jesus is not so much intellectual courage, but it's courage as compassion, which I think in the end is much more profound than Socrates."을 옮긴 것이다. 'compassion'을 '자비'라고 옮겼는데(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이다), 뒤에 보면 '눈물 흘리는 예수'를 겨냥한 말이다.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은 방점이 잘못 찍혔다. "예수는 지적 용기라기보다는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제 생각엔 결국 그게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입니다."라고 옮기고 싶다. 왜 더 심오한가? 소크라테스는 울지 않았지만 예수는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뭔가 많은 걸 잃어버린 것이라고 웨스트는 생각한다. 체호프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 점 때문에 체호프로 돌아가게 되는데, 우리는 진정 소크라테스, 예수, 지적인 관심, 과학자, 의사 그리고 뿌리 깊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 면에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위안이 없는데도 기독교적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좋은 겁니다!"   

원문은 "And that takes us back to Chekhov, because you really do have Socrates, Jesus, intellectual curiocity, scientist, medical doctor, and deep Christian backdrop but agnostic in belief. Christian temper without the Christian consolation, see, that's good stuff!"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크라테스+예수=체호프'이다. 그런데, 번역몬은 그 의미상 주어로서의 '체호프'를 '우리'라고 옮겨놓았다. 우리는 모두 체호프다!? 이어지는 문장도 부정확하게 옮겨진 건 마찬가지다.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연을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이 체호프입니다. 보세요, 체호프 안에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것이 있지만, 그는 끝내는 저희 할아버지가 하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할 용기,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싸우라는 겁니다. 휴! 그것이 체호프가 말하는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체호프에 대한 연이은 경탄이고 찬사다. 그런데, 첫 문장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을 보면 역자는 자신이 무얼 옮기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듯싶다. 즉 이게 모두 체호프에 관한 설명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체호프를 읽은 적은 있는 것일까?). 첫 문장의 원문은 "All that love and compassion, courage, but still Socratic, in terms of intellectual engagement, go wherever the conclusions take you and so forth, but you're still loving."이다. 다시 옮기면, "체호프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기를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입니다. 지적인 개입이란 관점에서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든지 간에 거기엔 또 사랑이 있구요." "휴, 이건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해요! 그게 바로 체호프입니다."(Look into the abyss, whew! That's Chekhov.)  

이 '유일무이한 사람' 체호프에 견줄 만한 철학자가 있는가? 웨스트가 보기엔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그는 겁이 많았다. "그는 사상의 측면에서는 용기 있었지만 삶을 견뎌내지는 못했어요"라는 게 웨스트의 평가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위대한 천재이고 그의 삶 속에서 철학적 대화를 재연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용기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학생들을 난폭하고 가혹하게 대했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충분히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방식이므로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비트겐슈타인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코 체호프 같은 인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과 체호프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것처럼 체호프의 재능은 그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체호프, 와일드 두 사람 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니체적 기준을 만나게 됩니다. 체호프는 주로 낮에는 의사였지만 문학예술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믿기지 않지요."

이 대목도 원문을 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Chekhov, who didn't just invest his genius in his work, his talent in his life as Oscar Wild talked about; it was both."이 첫 문장의 원문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망발이자 엉터리 번역이다. "체호프는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에만 쏟아붓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체호프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니다. 유미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호프는 자신의 재능(천재성)을 그의 삶 속에도 실현했다는 내용이다. 체호프와 와일드 두 사람이 다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 한숨이 나왔다. "it was both"라는 건 체호프가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과 삶 양쪽 모두에 쏟아부었다는 것, 곧 그의 재능은 작품과 삶 모두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그는 작가이면서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냉정한 관찰자이면서 풍부한 연민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런 체호프야말로 "너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라"는 니체적 기준(요구)에 부합하는 사례라는 얘기다. 믿기지 않는가?!    

그래서 코넬 웨스트가 기대하는 철학 또한 체호프적인 철학, 체호프를 닮은 철학이다. "저는 결국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체호프와 철학적으로 유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웨스트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거라고 이해한다. 그는 '철학에서의 체호프'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과에서는 체호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등은 철학 강의실에서 만날 수 있지만 체호프는 아니다. "체호프는 정말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는 게 그의 결론이므로 체호프에 관한 그의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당장은 <코넬 웨스트 독본>이라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코넬 웨스트와 체호프'에 대해 적었으므로 번역에 대한 시비는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 알고 보니 코넬 웨스트는 지젝, 아비탈 로넬, 주디스 버틀러 등과 함께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영화 <이그재민드 라이프>(2008)에 출연하기도 했다(마이클 하트, 마사 누스바움, 피터 싱어 등이 더 출연하는군). 겸사겸사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다.  

 

정작 써야 할 원고와 해야 할 번역이 산더미인 상황에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요긴한 책이 번역돼 나온 듯해서 반가워했지만, 아무튼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번역이어서 유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자들은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궁금한 사람,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철학은 공부하고 있는 사람, 철학을 공부하다가 다른 인문학과의 연계가 궁금해진 사람, 그 누구보다 철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는 냉소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이 가리키는 건 번역서가 아니라 원서다. 때문에 우려스러운 건 잔뜩 기대를 안고서 책을 펼쳐든 독자가 오히려 철학에 대한 냉소나 품게 되지 않을까란 점이다. 역자들의 바람에 걸맞게끔 좀더 온전한 번역서가 나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10. 08. 01.  

P.S. 책은 스탠리 카벨의 인터뷰까지 읽었지만, 시시비비를 더 옮겨적지는 않겠다. 카벨은 예전에 철학과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귀동냥을 한 덕분에 여러 권의 책을 구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분석철학을 전공했지만 미학을 강의하고 또 영화와 오페라에 대해서도 정통한 드문 철학자다. 소로의 <월든>과 하이데거와의 친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 게 그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그가 에머슨과 소로를 재발견하게 된 일에 대해 회고하는 대목의 번역만 인상적이어서 옮겨놓는다.  

"저는 소로를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으로 제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93쪽)

'환영 꽃다발을 들고있는 소년'으로서의 소로? 원문은 "I wasn't intersted in holding up Thoreau as a flower child"이다. 여기서 '플라워 차일드'는 1960년대 히피 세대를 가리킨다. 당시 자연주의자 소로는 히피들의 숭배대상이었고. 이를 테면, '원조 히피'? 그러니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 곧 '화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카벨은 소로를 그런 '원조 히피'로 숭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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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버드, 번역을 인터뷰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8 00:39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을 겨우 다 읽었다. 무더위에 다른 일들과 겹쳐서이기도 했지만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 분석철학자들의 인터뷰가 줄줄이 배치돼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달에 나올 서평집('책을 읽을 자유'란 타이틀이다) 교정도 보고 있는 형편이어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진 못했다. 중간에 건너뛴 법철학자 앨런 더쇼비츠 편을 맨마지막에 읽었는데(찾아보니 그의 책도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래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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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8-06 01:30   좋아요 0 | URL
일이 있어서 아직 안 자고 있습니다. '리콜'을 하는 수도 있지만 아주 드물죠. 그냥 1쇄가 빠지길 기다리면서 대충 손보는 게 보통입니다. 너무 많이 손을 봐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합니다. 정오표 정도로 끝날 게 아니면요...

최용준 2010-08-06 09:29   좋아요 0 | URL
로쟈 님, 대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책을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출판 후 오역이나 번역 누락, 오탈자 등의 처리 문제가 궁금했습니다. 물론 출판되기 전에 꼼꼼하고 성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dayfornight 2010-08-0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날도 더운데 한 여름 밤의 썩은 개그에 욕 보십니다.

로쟈 2010-08-06 01:06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선 유로지비라고 하지요.--;

로쟈 2010-08-0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란 번역문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과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맞나요?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은 로티가 줄기차게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것 대신에 로티는 "잘 정당화된 견해"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번역문은 로티의 생각을 전혀 엉뚱하게 옮긴 것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가 안되시면, 로티를 다시 꺼내보세요. 물론 이 영어문장만 독해해도 되지만, 그걸 기대하긴 어려운 듯하네요...

로쟈 2010-08-06 10:57   좋아요 0 | URL
너무 일찍 일어나셨나 봅니다...

2010-08-06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하 2010-08-06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님, 강유원님의 게시판에서 '공표'관련 부분의 지적에 대한 대답으로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는 '심지어 그 이전에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로 고치려 합니다.">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이를 보건데 번역자 또한 님이 제기한 에코의 문맥을 읽어내진 못한 듯합니다.
위 댓글에서 당근주스님은 로쟈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제가 위에서 말한 '공표'가 잘된 의역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오캄,로크,퍼스 등을 단서로 잡고 에코의 말을 뜯어보면 휼륭한 의역이라는 말입니다. 감을 못 잡는 것은 로쟈님의 문제이니 알아서 판단하세요."
이를 통해 당근주스님은 로자님에 대해서 '감을 못 잡는다'라는 주장(이 표현은 이후에도 계속되는군요.)의 근거로 "'공표'가 잘된 의역"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번역자는 '의역'을 한 것이 아니라 '오역'을 하였기 때문에 로자님에 대한 '감을 못 잡는다'는 표현은 당근주스님의 것이 돼 버렸습니다.

번역자가 실수로 맥락을 꿰뚫는 것처럼 '보이는' 번역하여도 그게 실수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에 대한 독자로서의 감을 익히실 필요가 있습니다.

콩세알 2010-08-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들을 보니 이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라도 빨리 1쇄가 다 나가서 오역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도록..^^;; 강유원님의 인문고전강의 오디오 파일이 저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는데 공짜로 그런 강의를 들은 것이 왠지 빚진 기분이었거든요. 이번 기회에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될 것 같다는...^^;;

로쟈 2010-08-06 11:09   좋아요 0 | URL
한가지 방법이긴 합니다. 그렇담 한 10권은 사셔야겠는데요.^^;

ON 2010-08-0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어 보지도 않았고 위와 같은 논쟁을 보면 제 지적 수준으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는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댓글이 늘어나면서 점차 '번역비평이란 무엇이가'라는 의구심을 갖게되었습니다.

인문학이나 어학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비평은 있을것입니다.
저는 건축설계 분야에서 일하면서 비평은 일상화 돼 있습니다.
건축은 특히나 번역과 달라서 쇄를 거듭하면서 수정한다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수정의 영역이 개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비평이 냉정하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비평하기 전에 그렇게 한 "의도"를 먼저 묻는다는 것입니다.
의도(컨셉)가 다르면 현상에 대한 해석도 그에 따른 전개 과정도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비평가는 발표(사적인 대화가 아닌 발표입니다)자의
"의도"를 묻고 그 의도에 부합하게 설계하였는지 비평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의아했습니다. "번역 비평"이란 무엇인가.
번역도 하나의 학문이고 번역자의 "의도"가 있을진데 발표자의 의도를 묻는
그런 노력을 하셨는지.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냐고 하신다면 그건 비평이 아니라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계한 작품에 누군가가 의도를 묻지 않고 비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제 의도를 다 알고 있는 스승님이거나 비트루비우스 정도의 위대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쿼크 2010-08-07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님...

먼저 제 글이 당근주스님에게만 감정을 추스리라고 읽히는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사실 두분(로쟈님과 당근주스님)과 혹시나 모를,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댓글 올리실때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올린 글인데 당근주스님의 댓글에 댓글을 달다보니 그렇게 보이게 된 듯 합니다. 역시나 사람의 생각 그대로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네요...

처음엔 번역자체에 대해 흥미를 가졌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정이 더불어 읽히는게 조금은 거북스러웠습니다. 자칫 생산성 있는 토론이 비효율적으로 흐를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게되었습니다.

저야 대충 이미지화 시켜 영어를 이해하는 수준뿐이기에 번역문제에 직접적으로 끼어들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어깨너머로 공부는 되거든요.

저야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좀 더 좋은 방향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생각이 평행을 달리면 절충이고 뭐고 없잖아요. 문제는 어떻게 끝맺음을 하느냐인데 너무나 완벽한 결론만을 내려고 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실상 책의 번역하신 분들이 주석을 좀 달아줬더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주석 단다는 문제도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 올 수 있기에 뭐라 하기는 힘드네요. 사람마다 호불호도 있고 말이죠. 그래도 출판사가 신경 좀 썼으면 좋겠네요. 제가 알기로는 이 책 출간 좌담회도 있어서, 번역하신 분들이 얘기도 들려줄거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쪽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구요.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좌담회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갈지 궁금해지는군요.

제가 조금 경솔했던 점 사과드리고요, 제 댓글에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많이 배우고 갑니다~~.


Rousseau 2010-08-0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쿼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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