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태와 어머니, 그리고 종교라는 주문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동녘사이언스,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친절한 박스기사도 곁들여져 있다). 나도 조금 읽어보고 있는데, 일단 '데닛은 읽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비슷한 난이도라고 보여진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모처럼 '즐독'할 수 있는 교양서이다.  

 

한국일보(10. 05. 22) 종교를 진화론적 관점으로 해체… '금기의 장막' 깨기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을까. 각각이 '겹쳐지지 않는 교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평화공존파가 있긴 하지만, 최근 과학계에서 부상하고 있는 이들은 맹렬한 우상 파괴 과학자들이다. 과학계의 '신(新) 무신론' 운동을 주도하는 최전선의 전사가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69)라면, 대니얼 데닛(68)은 이를 종합하는 철학적인 버팀목 같은 인물이다. 이 양대 거두의 대부는 물론 찰스 다윈이다. 



인지과학 및 심리철학의 거장인 대니얼 데닛 미국 터프츠대 교수의 <주문을 깨다>는 2006년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함께 나란히 출간된 종교 비판서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인류학, 경제학 등으로 퍼져가고 있는 현대 진화론의 성과를 집적, 종교 현상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석한 논쟁적 저작이다.

데닛이 책 제목에서 직접 겨냥하고 있는 '주문'은 종교를 솔직하고 전면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막는 금기다. 주문 깨기는 곧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종교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과 신화, 위선의 장막을 걷어내려는 시도다. "나는 금기 깨기를 두려워하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놓으시오! 놓으시오! 추락하는 걸 느끼지도 못할 겁니다!"(47쪽)

데닛의 작업은 먼저 종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애니미즘, 샤머니즘 등의 민속종교가 체계적인 종교로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가 종교적 관념의 뿌리로 꼽는 것은 '활동이 있는 곳에 행위자를 찾으려는 과잉 경향'(예컨대 바람이 분다면 바람을 일으킨 행위자를 찾는 것)이다. 이는 원래 포식자를 탐지하고 추론하는 능력으로서, 자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가 진화시킨 능력이다(먹고 먹히는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 인지능력에서 나온 부산물이 바로 나무, 바람, 구름 등에 각각의 행위자들이 있다는 물활론(物活論) 등의 초기 종교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관념들이 무익한 것만은 아닌데, 인간에게 '책임 회피' '건강 유지' 등에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데닛은 이로써 종교 관념이 자연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아 복제와 변이 등을 거치면서 진화를 거듭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데닛이 줄기차게 던지는 질문은 '누가 이익을 보느냐'다. 초기 종교 형태에서 '비밀주의'와 '반증에 대한 방어' 등이 출현한 데에는 종교적 사제들의 이기적 동기가 개입했으며 사제와 정치권력의 동맹도 한몫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후 '믿음에 대한 믿음'이라는 만능의 패를 개발해 합리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영속성을 획득하게 됐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지옥불이 채찍이라면 신비는 당근이다. 믿음을 요구하는 명제는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301쪽)

여기서 궁극적 수혜자는 누구인가? 데닛에 따르면, 바로 종교 그 자체다. 종교 스스로가 독자적 단위로 자율성을 획득해 숙주(인간)들의 충성을 이용해 복제하고 번식한다는 결론이다. 이는 곧 도킨스가 제기한 '밈 이론'과 같은 맥락이다. 도킨스가 종교를 해악만 끼치는 '바이러스'로 본다면, 데닛은 종교를 야성에서 순화된 '길들여진 밈'으로 보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종교인들이라면 소름 끼칠 정도로 경악스런 주장이다.

종교적 실체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교는 도덕성을 함양하고 삶의 의미를 주는 긍정적측면이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한 데닛의 대답은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신앙의 절대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종교의 특성상 관용의 제스처는 위선이며 언제든지 광신과 배타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위선의 함정에 빠졌고, 빠져나갈 길은 없다… 엄숙한 종교의 세계에서 급진파는 자신의 신앙을 내세워 비타협을 고집하고 중간파는 위협을 느끼고 침묵을 지키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믿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377쪽)

물론 진화론자들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생물학적 환원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진화론자들이 무기로 삼는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질문 자체가 환원주의적 요소를 깔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데닛이 이 책에서 설명한 종교의 진화 과정 역시, 그 스스로 인정하듯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하지만 각종 종교 현상을 둘러싼 무수한 호기심에 대해서 그냥 얼버무리거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면, 종교와 과학의 최전선의 대척점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데닛의 이 저작은 피해갈 수 없는 책이다. 5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는 종교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지며, 거기 답하기 위한 진화론자들의 현대적 연구 성과가 결집돼 있다.(송용창기자)  



●종교 진화론 진영內서도 시각차 

진화론 진영 내부에서도 종교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라 논쟁이 한창 진행중이다. 초월자를 믿는 행위가 독 있는 음식을 피하는 행위처럼 진화적 적응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보는 '종교 적응주의론'의 대표적 학자는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명예교수와 데이비드 슬론 윌슨 뉴욕 주립대 교수다. 에드워드 윌슨은 종교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을 도와주기 때문에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즉 종교가 개인의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 이득을 줬기 때문에 선택됐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 <인간본성에 대하여> <통섭> 등의 여러 저서가 번역돼 있다.

데이비드 슬론 윌슨 교수도 종교를 적응의 산물로 보지만, 개인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윌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집단의 협동심을 증진시키는 이점 등으로 집단선택으로 종교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종교 행위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질문에서 에드워드 윌슨은 개인이, 데이비드 윌슨은 집단이 이득을 봤다는 설명이다. 데이비드 윌슨의 주저 <종교는 진화한다><진화론의 유혹> 등도 국내에 번역돼 있다.

이에 맞선 것이 종교를 적응의 산물이 아닌 부산물로 보는 견해다. 종교 행위는 행위자 탐지 능력 등의 인지 능력에서 따라 나온 부산물로 인류의 적응에 직접적 이득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밈 이론'으로, 부산물이었던 종교가 자율성을 획득해 스스로 복제 번식하며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리처드 도킨스와 대니얼 데닛이 대표적인 학자다.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수혜자는 종교 그 자체라는 것으로 종교 비판으로서는 가장 과격한 입장이다. 다만 도킨스는 종교를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반면, 데닛은 '야생 밈'과 '길들여진 밈'으로 구분해 종교를 박멸이 아닌, 순화시켜야할 대상으로 본다.

10. 05. 20.  

P.S. 데닛의 기본 아이디어는 본문의 첫 문단에서 제시된다. 번역본 표지의 컨셉이기도 한데, 바로 개미와 개미의 행동을 조종하는 창형흡충이란 기생충 얘기다. <자유는 진화한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고, 기억엔 도킨스 또한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명한 사례다.   

초원에서 개미 한 마리가 풀잎을 타고 열심히 기어오른다. 개미는 높이 더 높이 오르다 결국 떨어지고,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매번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오르고 또 오른다. 개미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개미는 이 고되고 헛된 행위를 통해 무슨 이익을 찾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지금 개미는 예를 들어 영토를 더 잘 굽어보거나, 먹이를 찾거나, 잠재적 배우자에게 과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뇌는 창형흡충이라는 작은 기생충에게 점령당했고, 그 기생충은 번식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양이나 소의 뱃속에 들어가야 한다. 이 작은 뇌 기생충이 개미의 자손이 아닌 자기 자손에게 이득이 되는 위치로 개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미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물고기와 생쥐를 비롯한 다른 생물 종들도 이처럼 행위를 조작하는 기생생물에 감염된다. 이 편승자들은 자신의 기주생물로 하여금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주생물이 아니라 기생생물의 이익을 위해서다.

요컨대, 데닛의 인간과 종교와의 관계를 개미와 창형흡충의 관계로 바라본다.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수혜자는 기주생물인 인간이 아니라(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호하다) 기생생물에 견줄 수 있는 종교 그 자체다. 곧 종교라는 문화적 복제자(밈)이다. 신의 말씀을 '창형흡충'에 비유하는 것이 언짢을지 모르지만, 데닛이 적시한 대로 이것은 성경에서의 비유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곧 마태복음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은 씨앗이고, 그리스도는 씨 뿌리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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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5-22 13:53 
    [책] 데닛은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via 로쟈

이번 주엔 주목할 만한 책들이 여럿 등장했는데, 교양과학서도 예외가 아니다. 일단 한나 홈스의 <인간생태보고서>(웅진지식하우스, 2010). 원제는 '옷 입은 원숭이(The Well-Dressed Ape)'이고,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문예춘추, 2006; 정신세계사, 1991)를 바로 연상케 한다.  

 

2008년에 출간됐으니까 '털없는 원숭이'의 최신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부제대로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로 읽어봄직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한얼미디어, 2006)로 나온 모리스의 자서전이 원래는 <옷을 입은 원숭이>(자유문고, 1987)라고 출간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한권은 세라 블래퍼 허디의 <어머니의 탄생>(사이언스북스, 2010). 저자가 생소하다 싶었는데, '사라 블래퍼 홀디'라고 먼저 소개됐던 영장류학자이자 인류학자.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서해문집, 2006; 서운관 1994)가 그녀의 대표작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란 부제대로 모성의 본질을 파헤친 책. 원서로 752쪽, 번역본으로론 1016쪽에 이르는 대저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모성의 역사를 다룬 새리 엘 서러의 <어머니의 신화>(까치글방, 1995)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독서 우선순위로는 제일 첫머리에 놓고 싶은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동녘사이언스, 2010)이다. 이때 주문은 '종교라는 주문'을 가리킨다. 국내에서 화제가 됐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의 원제와 나란히 놓으면, '종교라는 주문, 신이라는 망상'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철학적으로 대변하는 책"이라는 게 압축적인 소개다. 해설을 쓴 최종덕 교수에 따르면, "데닛의 <주문을 깨다>는 종교 비판서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억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 2008)도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어 '3인방'을 구축했더랬다. 데닛의 책이 제일 나중에 소개된 셈. 그래도 만들자면 '3종 세트'다.  

   

데닛의 책은 <자유는 진화한다>(동녘사이언스, 2009)가 작년에 나왔고, 이제 남은 책으로 내가 기대하는 건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다. 데닛의 책으론 <내용과 의식>(2010)이 최신간으로 뜬다(1969년에 나온 첫 저작을 다시 펴낸 것이다). 한 저자를 제때 따라가는 것도 이렇듯 쉽지가 않다... 

10.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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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데닛은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22 09:41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동녘사이언스,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친절한 박스기사도 곁들여져 있다). 나도 조금 읽어보고 있는데, 일단 '데닛은 읽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비슷한 난이도라고 보여진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모처럼 '즐독'할 수 있는 교양서이다.     한국일보(10. 05. 22) 종교를 진화론적 관
 
 
starla 2010-05-21 07:00   좋아요 0 | URL
주문을 깨다, 가 나와줘서 저도 만세! 부르고 있습니다. 하핫.
한나 홈스 책도 참 재미있겠네요.

로쟈 2010-05-21 09:35   좋아요 0 | URL
기다리던 분들이 계시군요.^^

2010-05-21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ooseme 2010-05-29 10:35   좋아요 0 | URL
<주문을 깨다>의 출판일을 출판사에 문의 했을 때 4월 말에 나온다고 했었는데 결국 5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오더군요. 다윈의 위험한 생각도 올해 안엔 출간된다고 하네요.

만들어진 신과 비슷한 난이도라고 하셨는데 1/4쯤 읽은 바로는 그보다는 난이도가 높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철학자가 쓴 책이라서 그런건지 도킨스만큼 명료하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네요. 철학자의 특성상 설명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질문도 많이 던지고요. 뭐 아직은 초반부니까 끝까지 읽어보고 다시 판단해야겠지요.
 

어제 오전과 저녁 강의 사이에 시간이 비어서 대학로CGV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를 봤다. 곧 종영하는 걸로 나와서 서두른 것이기도 했다(나는 전작 <밀양>을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다). 영화는 격렬한 감정을 다룬 전작에 비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조롭고 단선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비범한 영화였다. 이런 감독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온갖 거짓과 추악의 횡행 속에서도 한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란 눈으로 볼 때 아름다운 것만 아니라 어쩌면 추하고 더러운 것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칸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영화제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으면 좋겠다...   

경향신문(10. 05. 21) "시는 추함에서 아름다움 찾는 일”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인 <시>가 19일(현지시간) 공개됐다. 갈라 스크리닝에 비해 박수가 박한 언론 시사에서도 영화가 끝나자 장시간 박수가 이어졌다.

 

이창동 감독은 언론 시사회 직후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인 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며 “시란 눈으로 볼 때 아름다운 것만 아니라 어쩌면 추하고 더러운 것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밀양>으로 2년 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전도연씨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이창동 감독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편이었다. 회견장에 모인 많은 외신기자들은 대부분 <밀양>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밀양>이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시>는 가해자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해자를 손자로 둔 할머니 마음의 죄의식과 시를 쓰기 위해 찾아야 하는 세상의 아름다운 말 사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주연 윤정희씨(왼쪽)는 외신기자의 질문에는 프랑스어로, 한국 기자의 질문에는 한국어로 답했다. 객석에는 그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도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영화로 돌아온 소감에 대해 윤정희씨는 “영화는 내 인생이다. 한 번도 영화를 떠난 적이 없다. 90살까지는 지금처럼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나이든 육체를 드러낸 장면에 대해선 “영화배우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이와 세월의 흐름은 생각지 않는다. 세월의 흐름에 맞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소설가이자 문화부 장관이었고, 지금은 영화감독인 이 감독에게 어느 직업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도 던져졌다. 그는 “어떤 직업이 좋아서 선택한 적은 없다. 심지어 영화감독이라는 일조차 마찬가지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 회의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영화감독이 재미만 따지면 제일 좋다”고 말했다.

시사회 직후 만난 독일 텔레비전 ZDF의 마이크 플라첸은 “<밀양>과 <시> 모두 좋았지만, <시>가 더 압축적이고 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의 특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시적인 분위기를 내는 대단한 영화”라며 “지금까지 본 경쟁작 중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칸영화제는 23일 폐막과 함께 수상작을 발표한다. 

10. 05. 20. 

P.S.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은 <시>가 <밀양>과 마찬가지로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밀양>의 연장선이라면 영화로 질문을 한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한다는 점, 답을 쉽게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연장이라는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점점 질문을 안 하니까. 나는 영화가 우리의 삶에 당연히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영화는 질문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 나라도 질문을 해보자 하는 거다. 다음을 또 기약하긴 어렵지만 이번만 할게, 하는 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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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10-05-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함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감독의 말을 들으니 무릎을 치게 되더군요. 저는 아직 경험의 부족 때문이겠지만, 추함을 보고 분노하고 몸서리치며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추해보니 그 추악한 일상들 이면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물결(오프닝과 클로징 쇼트)같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왜 잊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살한 여중생에 대한 보상문제를 논의하는 창밖으로 꽃잎의 아름다움을 쫓는 여인의 모습....그리고 그 긴박한 긴장감.

끝내 여중생의 죽음의 장소와 여인의 감정이 이어지던 다리...그리고
죽은 아이가 회생한듯 흠뻑 젖은 채 길 위에 서 있던 여인의 모습.



결국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러나 여전히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전이시키기 어려운 잔상으로 남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그만큼 뿌리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5-21 09:37   좋아요 0 | URL
영화는 두번, 세번 보도록 자극하는 듯해요. 개인적으론 시낭송회 풍경 같은 게 너무나 '정확하게' 그려져서 놀랐습니다...

쉽싸리 2010-05-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주 대구 00시네마에서 보았죠. 토요일 저녁시간 인데도 열 명도 채 안되는 관객들 ㅜㅜ
기본 상영관이 너무 적은것 같습니다. 자본의 논리인지 흥행의 논리인지,,

같이본 파트너는 윤정희씨 연기가 별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참 좋았습니다. 약간 들뜬것 같은, 푼수? 같은 연기가 딱 이더군요.
이불 뒤짚어 쓴 손자를 일으키려고 하는 장면에서는 찡하더군요.
이창동감독 영화의 배우들은 참 연기를 잘해요. 자연스럽게.
이왕이면 좋은 결과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네요,,,

로쟈 2010-05-21 09:38   좋아요 0 | URL
이런 영화를 많이 안 보는 세태와 우리의 정치현실이 무관하지 않겠지요...

blanca 2010-05-2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말에 동감합니다. 90살까지. 너무 감동적입니다. 시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요^^;; 참, 로자님 덕택에 생존자 서문 읽고 있는데 벌써 가슴이 떨리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0-05-21 09:39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어제 받았습니다.^^
 

엊저녁에 알라딘 공부방 2기 강의가 있었다. '인문학으로 마음의 가난을 벗어나는 법'이 주제였고, 나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 들어 있는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이란 글과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열린책들, 2008)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을 자료로 이용했다(이제 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가져온 걸로 오기했다). 그 대목은 옮겨놓는다. 밑줄긋기에 더 적합해 보이지만 '로쟈의 한줄'로 분류해놓으면서. 물론 그 한 줄은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전쟁(2차대전)이 터지자 나는 평화나 위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찮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어려운 시절에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부심을 찾아야 하겠기에, 다시 크레타의 산으로 갔다. 언젠가 나는 일요일 예배가 끝난 다음 성당 입구의 계단에 앉아서 남자다운 용감성을 찾는 방법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얘기하는 늙은 노병을 보았다. 「가능하다면 두려움을 부릅뜬 눈으로 빤히 보아라.」 그가 말했다. 「그러면 두려움은 겁이 나서 도망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지팡이를 들고, 어깨에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갔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쳐들어가 정복하려고 싸우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대낮에 프실로리티 기슭을 건너가려니까 사나운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어이, 여봐요, 잠깐 기다려요! 하나 물어봅시다!」
머리를 들어 보니 어떤 남자가 커다란 바위에서 뒤로 물러나 고꾸라지듯 내려왔다. 그는 바위에서 바위로 성큼성큼 내려왔고, 그의 발밑에는 돌멩이들이 굴러 요란한 소리가 나서 산 전체가 그와 함께 무너지는 듯싶었다. 그가 늙고 덩치가 큰 양치기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무얼 알고 싶어서 저렇게 극성일가? 나는 궁금했다.

그가 가까이 와서 바위 위에 섰다. 겉으로 드러난 가슴은 털이 나고 김이 피어올랐다.
「이봐요,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그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는 어느 나라가 곧 정복되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노르웨이가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몰랐다. 그가 분명히 알았던 사실이라고는 자유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좋아졌어요, 영감님, 좋아졌어요.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다행이구먼.」 성호를 그으면서 늙은 양치기가 큰소리로 말했다.
「담배 태우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제기랄! 내가 뭣하러 담배를 피워요?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노르웨이만 별일 없다면 그만이지!」
그 말을 하고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 떼를 찾아 기어올라갔다.

그리스의 공기는 정말로 신성하고, 자유는 틀림없이 여기서 탄생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세계의 어느 농부나 양치기도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미지의 머나먼 나라의 시련에 대해서 그토록 고민하고 실감나게 의식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자유란 자기가 낳은 딸이나 마찬가지여서, 노르웨이의 투쟁은 그 그리스 양치기의 투쟁이기도 하다.

10. 05. 20. 

P.S. 크레타의 양치기 노인이 아직 살아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요, 한국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비록 한국이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모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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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e02 2010-05-20 13:21   좋아요 0 | URL
엊저녁 인문학 공부방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인용했다는데, 왜 전혀 기억나지 않을까....늙어가는 뇌를 탓했더랬습니다...ㅎㅎ <영혼의 자서전>도 읽어봐야겠네요. 수줍은 소년같은 첫인상은 의외(!)였습니다.....글에서 느껴지던 악동같은 분위기가 강의 중반 이후 살아나더군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치유불가능한 호모사피엔자들의 연대를 위한, 지속적인 글쓰기를 기대합니다.

로쟈 2010-05-21 09:4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조르바와 카찬차키스를 혼동했어요.^^ 제가 '소년'과 '악동' 사이에서 진동했나 봅니다.^^;
 

기력이 좀 나는가 싶었는데 엊그제부턴 목에 가래가 끓는다. 감기인지 아니면 천식인지 모르겠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글을 쓰는 것처럼 뭔가 민감한 일을 해야 할 때는 방해가 된다. 이렇게 몇자 적는 핑계다. 요즘은 보통 하루에 두 가지씩의 일정이 잡혀 있어서 그에 맞게 가방을 챙기다가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손이 갔다. <보봐르에게 남긴 사르트르 최후의 말>(두레, 1982)이 제목이다(요즘은 보기 드문 유형의 제목이다).   

잘 구할 수 없는 책이고, 서지 사항도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를 통해서야 알았다. <보부아르에게 남긴 사르트르 최후의 말>이라고 제목이 인용한 책 일러두기에 나와 있는데, 실제 책에는 '보부아르'가 아니라 '보봐르'라고 표기돼 있다(도서검색을 할 때는 이게 또 두 사람으로 간주된다! 여기서는 '보부아르'라고 표기한다). 거의 30년 전 책이고 말 그대로 누렇게 빛바란 '헌책'이다. 403쪽 분량에 정가는 3,500원. 사르트르 서거 2주기에 맞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제는 <사르트르와의 대화(Entretiens avec Jean-Paul Sartre)>이다. 물론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나눈 대화다. 번역본은 '대담'이란 표현을 썼는데, 둘 사이의 관계와 '대담'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981년에 쓴 서문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이 대담은 1974년 여름 로마에서, 그리고 초가을에 다시 빠리에서 진행되고 끝났다. 때때로 사르트르는 피곤하였고 내게 잘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면 바로 내가 영감이 부족해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기도 했다. 흥미없다고 생각되는 대화들은 내가 삭제해버렸다. 나머지 대화들은 거의 연대순을 따라가며 주제별로 재구성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은 두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한 아주 요긴한 자료와 입문서가 돼줄 듯싶다. 특이한 것은 이 책의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도 영역본이 나와 있는 걸 고려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확한 건 이미 주문해놓은 영역본 <작별의 예식(Adieux)>을 받아봐야 알겠다. 우리말로는 <작별의 예식>(두레, 1982)이라고 번역됐으며 <최후의 말>과 함께 나란히 나온 것으로 보인다(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받아봐야 알겠다고 한 것은 영역본의 쪽수가 국역본과 다르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어본보다는 훨씬 많고 불어본보다는 좀 적은 분량이다. 참고로, 불어본에는 이 두 권이 합본돼 있다.    

  

대학 1, 2학년 때, 그리고 안니 코엔 솔랄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을 읽던 대학원 시절 이후 오랜만에 다시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관해 읽으면서 이 두 권은 챙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좋은 건 새로 책이 나오는 것이지만 현재의 폼새로는 좀 어렵지 않나 싶다. 또 한 가지 희망사항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나남, 2009)을 장서로 소장하는 것인데, 두께나 가격이 모두 만만찮다. 더 넓은 서재를 갖게 된 이후에야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번에 찾아보니 우리와 달리 영어권에서는 제법 활발하게 연구서와 관련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 이번에 관심을 갖게 된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사르트르 사전>도 집필한 게리 콕스다. 입문서 외에도 <사르트르와 소설>(2009)이란 연구서를 펴냈다. <구토>에 대해 쓸 일이 생기면 참고해보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면 <구토>는 현재 마땅한 정본 번역서가 없다. 방곤 교수가 옮긴 <구토>(문예출판사, 초판1983)를 강의용으로 쓰고 있기는 한데, 주인공 로캉탱의 연구대상인 '롤르봉'이 '로르봉'으로 표기돼 있다. 그런 경우 보통은 일어 중역본이 경우가 많아서 의심을 했는데, 박홍규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노오벨상문학전집 제7권 사르트르 편>(신구문화사, 1966)에 실린 이휘영 교수 번역의 <구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중역본은 아닌 듯싶다. 대신에 이휘영본을 거의 베낀 번역이다. 그 전집본에는 방곤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도 들어 있어서 원래 방곤 교수가 옮긴 것을 이휘영 교수의 이름으로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로선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려나 요즘 세계문학전집이 붐인 만큼 새로운 세대의 새 번역이 출간되면 좋겠다... 

10. 05. 18.  



P.S.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는 내게 요긴한 몇가지 정보를 제공해주어 고마운 책인데, 약간 부주의한 대목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에게 흔히 '알랭'이린 필명으로 소개된 '에밀 샤르티에'가 '알랑'이라고 표기된 건 좀 생경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표된 1934년의 제1차 소련작가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앙드레 지드가 '러시아문학의 낭만주의적 리얼리즘'(114쪽)을 찬양했다는 내용도 좀 이상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겸사겸사 지드의 경우에도 예전 <앙드레 지드 전집>에 포함돼 있던 '소련기행' <소련에서 돌아오다>와 <속 소련에서 돌아오다>가 다시금 출간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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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5-18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토>가 아직 정본이 없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군요. 전 방곤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언젠가 지적하셨듯이 표트르와 파벨이 혼동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신뢰를 접었습니다. 이 오류가 다른 역자의 번역에도 있다고 하신 걸로 보아 <구토>의 번역에도 표절이 횡행한 모양입니다. 김희영 번역본이 낫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 책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더군요. 여러가지로 구토감을 느끼게 하는 세상에 제대로 된 <구토> 번역이라도 있으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텐데요.^^

그나저나 한국어로 번역되면 책이 왜이리 두꺼워지고 분량이 많아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한글이 알파벹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져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의도적인 부풀리기도 한몫하는 듯 싶습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저도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었건만 아직 구매버튼을 흔쾌히 누르고 있지 못합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서문을 단 영역본은 한권인데 그러한 편집에 호감이 갑니다.^^

로쟈 2010-05-18 23:51   좋아요 0 | URL
영역본이 한 권이었나요? 기억엔 두 권짜리가 있었는데요. 표트르와 파벨은 사실 사소한 디테일이긴 한데, 문예출판사본에는 제대로 돼 있습니다. 이휘영본에 혼동이 있구요. 한데 그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예요...

푸른바다 2010-05-20 00:56   좋아요 0 | URL
835페이지이긴 하지만 한권짜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7권짜리 초호화 장정으로 나온 <쌍윳따 니까야>같은 책도 영역본으로는 한 권입니다. 플라톤 전집도 영역본으로는 한권이고 그 두께는 <법률> 한국어 번역본 정도.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2권.

아마존에서 찾아 보니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2권이군요. 알라딘에 1권만 올라있어서 착각했던 것 같네요.^^

2010-05-1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8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10-05-1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1983년에 초판발행된 학원사 세계문학의 김희영 번역 '구토'가 있는데요 어렸을때 무척 좋아했기때문에 그 뒤론 한번도 다른 번역본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는데 이 책은 정본 번역서가 아닌가요? 프랑스어과 교수로 나와있던데요.

로쟈 2010-05-18 23:48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이라 잊고 있었네요. 가장 나을 거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