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은 일반적으로 독송 또는 암송되는 경전이라 소개를 받는 경우 힘든 일이 있을 때 외우면 영험이 있다는 설명이 곁들여지는 정도이고 경 자체의 의미까지 전해 듣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적지 않은 책들이 있지만 천수경 경전의 뜻이 궁금해서 직접 들춰 본 책들이 세가지이다.
월호 스님의 <천수경 강의>, 현봉 스님의 <너는 또 다른 나>는 천수경 전체의 의미를 강설한 책이고 전재성 님의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은 특히 천수경 대다라니의 범어 원문을 중점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이 중 월호 스님의 <천수경 강의>는 친근한 설명과 함께 선의 맥락도 적절히 전해주는 책이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대자비심을 찬탄하고 그 가피를 기원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Nīlakaṇṭha Dhāranī, Great Compassion Mantra, 대비주 大悲呪)의 앞과 뒤에 예경, 참회, 발원문이 덧붙여져 만들어진 경전이다. 다라니는 만트라, 진언이라고도 하고 불보살의 참 뜻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도록 해 주는 주문이라는 뜻이다.
<천수경 강의>는 일단 실제 강의를 옮겨 만든 책이라 구어체이고 대상이 일반 재가 불자들이어서 어투가 평이하다. 그러면서도 천수경의 부분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짚어가면서 적절히 불교의 핵심적 사상에 이해하기 쉽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는 "싸라 싸라 씨리 씨리 쓰루 쓰루 부다야 부다야 보다야 보다야"로, "물은 흐르고 또 흐르니, 깨달음으로 깨달음으로, 깨닫고 또 깨닫게 하소서!"의 뜻입니다. (..) 윤회의 세계를 물이 흘러가는 데에 비유한 것입니다. 윤회, 물의 흐름, 강물, 그렇지만 고정된 실체로서의 강은 사실 없습니다. (..) 똑같은 섬진강물에 내가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변하고 있는 섬진강은 있는 것이고, 변화하면서, 계속 흘러가면서 많은 생물들을 갈무리하고 있고, 토사를 운반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죠.
'변화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나'는 없지만 그러나 '바로 지금 여기서 변화하고 있는 나'는 있는 것입니다. (..) 항상 찰나생명의 나인데, 시시때때로 내가 어떤 쓰임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 존재가 창조되고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죠. (..)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 말은 그만큼 엄청난 가능성,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런 다른 표현이 되는 것이죠. 그런 말을 두고 "진공은 묘유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참다운 공은 결코 허무주의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아니고 묘유, 묘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 "깨달음으로 깨달음으로, 깨닫고 또 깨닫게 하소서."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말씀드린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하소서, 이런 소리입니다. (p.122-125)
제행무상에서 시작해 진공묘유나 쌍차쌍조, 숭산 스님의 선원禪圓 개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서 '산은 푸르고 물은 흐른다'로 이어지는 깨달음 등 선가의 요점을 떠올리게 한다. 대비주 한 구절에 대한 설명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느낌이다.
관세음보살로 체현된 큰 수레, 마하야나 또는 대승 불교의 자각각타自覺覺他의 뜻이 천수경 곳곳에 배어 있음을 또한 설명하고 있다.
"목에 푸른 빛을 띤 님"이라는 것은 청경존靑頸尊이라고 하는데, "푸른 목을 가진 존귀한 분"이라는 말이죠. (..) 독사가 푸른 독을 내뿜어서 모든 중생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님께서 그 독사의 독을 한꺼번에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 삼키지 않고 목에 두었기 때문에 그 푸른 독사의 독이 목에 푸른 빛을 띠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p.97)
조그만 돌 하나를 강에 풍덩 던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가라앉죠. 퐁당 던지면 조그만 돌도 가라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큰 배에 실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가라앉죠. 커다란 바위도 큰 배에 실으면 안 가라앉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업장, 조그마한 업장이라도 자기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풍덩 가라앉지만, 불보살님들의 큰 대승의 배에 타게 되면 엄청난 바위도 가라앉지 않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p.40)
홀로 깨달음의 길을 걷는 선에서도 선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듯 혼자만의 힘으로 역부족일 때가 많다. 살아 낸다 버텨 낸다고들 하는 세속에서의 삶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대승의 큰 배는 이에 의지처, 득력처가 된다는 것이다. 육조단경과 같은 자각불교에 비견하는 '타력신앙의 보고'인 천수경이 지닌 가치라는 것. 내 노력을 대신할 수 없고 내 삶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아니지만, 관세음보살은 각자의 발원과 고난을 가피加被로써 살펴주는 자비로운 후원자라는 것이다.
경전 해설을 떠나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부분은 새벽예불에서 듣게 되는 운판, 목어, 법고, 범종 사물四物에 대한 저자 자신의 깨달음을 소개한 부분이다.
운판이라는 것은 구름 모양으로 생긴 쇠로 이루어진 건데, 날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의 들뜬 마음, 허영심, 오락가락 갈피를 못 잡는 이런 것들을 바로 날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왔다갔다 하고, 허영심에 들떠 있는데 캉캉캉캉 하는 쇳소리를 들으면 그런 들뜬 마음이 가라앉게 됩니다.
그 다음에 목어가 물짐승을 제도한다고 하는 것은, 물짐승은 내 마음의 축축한 마음, 우울한 마음,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둔탁한 나무의 소리, 탁탁탁탁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건조된다, 축축했던 마음들이 건조되는 것이죠. 그래서 가라앉았던 마음들이 올라옵니다. (p.67)
가죽으로 만들어진 법고는 들짐승 즉 투쟁심을, 쇳물로 만드어진 범종은 들끓는 분노를 제도하고 가라 앉힌다는 것이다. 사물四物을 들을 때 경계들로 인해 복잡하던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것이 불교의 본질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 불교의 상징이나 예식이 곧바로 본성 즉 본마음으로 향하고 있음을 평이한 체험담으로 풀어내는 것이 인상 깊다. 단순하게 천수경 구절을 독송하면서 이런 의미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책에서 언급되는 여러 영험담들은 선뜻 집어들기 어려운 문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천수경 기도를 통해 불보살님의 가피를 얻어 사찰의 중창이 가능했다던지, 석가여래 당시 육신통에 관한 이야기, 윤회 환생 경험담 등.) 내용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어서 건너 뛸 수 있다. 천수경은 금강경, 육조단경과 같은 심지법문 쪽 경전보다 밀교경전 쪽이기 때문에 이런 영험담들이 언급될 여지가 더 많다.
월호 스님의 다른 저서들 역시 <천수경 강의>처럼 평이한 어법, 풍부한 예화, 적절한 불교의 사상들과의 연결이 특징이다. 초심자로서 읽기에 부담이 없고, 불교 사상서들을 접하고 와도 배울 게 많다는 느낌이다. 쉬우면서 적확한,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월호 스님 책들을 읽을 때 간간이 개인적인 의문이 드는 부분들이 있기도 했고 설명이 누락된 부분도 눈에 띄는 경우가 있었다. 의문이 드는 부분은 내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만, 누락된 부분 같은 경우는 예컨대 <행복도 내 작품입니다>의 경우 117쪽의 난타 비구의 예화 같이 완성되지 않은 채 언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예는 드물고 대체로 잘 읽히면서도 깊이가 있고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그 의미를 새기며 읽을 때 다시금 천수경의 깊이를 느끼도록 해주는 강론서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nilakantha-nama hrdayam avartayisyami
니라 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목에 푸른 빛을 띤 그 마음을 노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