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디자인>이란 잡지를 택배로 받았다. 8월호 '오피니언' 란에 쓴 칼럼 덕분이다. 디자인에 대해 몇마디 해달라는 청탁을 꽤 오래 전에 받았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급조한 글이다. 그런 곤욕스러움도 글에는 배여 있다. 그래도 지면에 번듯하게 실은 글이니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디자인(2010년 8월호) 형태와 불륨에 바치는 예찬

디자인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의상, 공업 제품, 건축 따위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으로 돼 있다. 내 기억에 그런 디자인을 해본 건 중학교 2학년 기술 시간에 양철 쓰레받기를 만든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창조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교과서에 나온 설계도면을 양철판에 그대로 옮겨오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잘 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으로 나뉘었다. 손재주가 없는 편에 속하지만 이때만은 교과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 물론 그런 인연으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후에 디자이너를 꿈꾼 적도 없고 디자인에 대해 깊이 숙고해본 적도 없으니 대략 나는 디자인과 무관한 부류다.   

그럼에도 뭔가 디자인에 대해 할 말을 찾다 보니, 떠오르는 건 ‘형태’뿐이다. 디자인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입체적인 차원에서 어떤 부피를 뜻하는 ‘볼륨’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형태나 볼륨에 시간이란 차원을 추가하면 ‘진화 형태론’이 된다. 진화 형태론의 관심사는 어떤 형태적 자질이 진화적 압력을 견뎌낼 수 있는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사실 디자인 또한 그렇지 않은가. 제품 디자인의 경우, 구매자의 호응이라는 시장의 압력에 대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유력한 자질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니까. 다만 진화적 압력이 시장의 압력과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스케일일 것이다. 지질학자들이 얘기하는 이른바 ‘깊은 시간(deep time)’이 우주적 진화의 시간이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10억을 의미할 때 10뒤에 0이 몇 개나 붙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10억 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건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가령 이 깊은 지질학적 시간을 1마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마지막 몇 인치를 차지한다. 또 우주 달력을 예로 든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제야의 종이 울리기 불과 몇 분 전에 나타났을 뿐이다. 한 지질학자는 지구의 역사를 왕의 코에서부터 쭉 뻗은 손끝까지를 거리로 쟀던 옛 영국식 야드 자로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왕의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손톱줄로 한 번 갈면 인간의 역사는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깊은 시간 앞에 놓일 때 인간은 가련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것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이것을 ‘우주적 공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갈대’에게 방책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깊은 시간’에 대응하는 ‘깊은 개별성’이 특권처럼 주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폴락의 <생명의 기호>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다른 모든 종들이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자손을 낳고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면, 우리 종의 운명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큰 뇌는 사람에게, 의식과 기억과 불멸성에 대한 꿈을 가져다주었고 또한 우리 종이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종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깊은 개별성을 주었다.”  

이 ‘깊은 개별성’이란 특권은 모든 망각을 주도하는 매우 막강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달리 ‘유한성의 방어기제’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모든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한다. 흔한 말로 ‘자기 앞가림’이고, ‘생활’이다. 그런 앞가림에서 벗어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두려운 진실이다. 우주적 공간에 상응하는 무한한 시간과의 조우. 형태에 대한 진화적 압력이란 시간의 압력이다. 곧 시간은 형태의 적이다. 시간은 형태를 마모시키고, 어렵게 가꾸고 다듬은 볼륨을 무너뜨린다. 디자인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건 두려운 일이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 싶다. 그래서? 예의 우리는 자신의 발등만을 주시하며 자신의 일생에만 목을 맨다. 이걸 겸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압력에서 살아남은 형태들은 내게 그런 겸손을 떠올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영웅적 겸손이기도 하다. 비록 한시적일지라도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 역량을 뽐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한편으론 우리를 경탄케 하는 형태와 볼륨에 대한 어떠한 예찬도 과도하지 않다고 해야겠다

10. 08. 0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솝 2010-08-02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디자인이라는 말을 어원으로 풀기를 즐겨합니다.
디자인의 말 뜻을 어원으로 나누면 'Design = De + Sign'이 되고 이 두 단어의 뜻을 풀어보자면 기존의 형식(Sign)을 해체(De)하는 행위가 디자인(Design)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기성세대가 '상식'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것을 두들겨 부셔서, 다시 해석하는 행위. 그것이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쟈 2010-08-02 22:16   좋아요 0 | URL
네, 오래전 강의때 저도 애용한 기억이 나네요. 기호학 강의였거든요.^^

미지 2010-08-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조하셨다고는 해도, 큰 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08-03 23:10   좋아요 0 | URL
그게 급하게 '편집'한 원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