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날씨만 보면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데, 그래도 새로운 건 '새로 나온 책'들이다. 어제는 에드워드 윌슨이 공저한 <프로메테우스의 불>(아카넷, 2010)이 눈에 띄더니(오래전에 원서를 구해놓은 책이다) 오늘은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후, 2010)가 '손맛'을 느끼게 한다. 하버드대학에서 정치사상을 강의하는 저자는 특히 마키아벨리 전문가로 그의 <마키아벨리의 덕목>(말글빛냄, 2009)이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찾아보니 몇년 전에 <남자다움>에 대한 워싱턴타임스의 서평이 국내 일간지에 실렸다. 서평부터 읽어본다(국내 일간지 서평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7/h2010070221465284210.htm 참조).     

 

세계일보(06. 03. 23) [해외논단]남녀평등 사회에 대한 조언

프로이트는 결코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라고 물은 적이 없다. 그는 누구나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롭게 된 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남자들과 경쟁하게 됨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의 개념들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됐다.

하버드대학의 하비 맨스필드 교수는 오늘날 남성들이 남성 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성역할의 혼란은 현대의 여성주의 때문에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더 복잡한 것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의 삶은 남성의 에너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활동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저서 ‘남성다움(Manliness)’에서 “남성다움은 전쟁을 선호하고 모험을 즐기며 영웅을 숭배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통제는 평화를 추구하고 모험을 기피하며 영웅보다는 역할모델을 선호하도록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남성들의 타고난 단호함은 약화된다. 양성평등이 엄격한 정의가 된 현대의 삶에서 고정된 성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맨스필드는 그러나 타고난 것으로 여겨지는 고정적 성관념을 어느 정도 용인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사는 가정에 아무 해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맨스필드는 여자들의 행복을 위해 남자가 집 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나 가사를 여자들과 똑같이 반씩 나눠 하도록 강요하는 행태를 조금 줄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것이 남자다운 일인가. 맨스필드는 여자들이 이 같은 자신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러나 여자들이 이 같은 주장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만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버지니아대학의 사회학자 스티븐 노크와 브래드퍼드 윌콕스는 여자들이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남편이 자신과 감정적으로 동조할 때라고 말했다. 이들은 미 전역에 걸쳐 5000쌍이 넘는 부부를 인터뷰한 결과 아직도 대부분의 여성은 감정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 남자가 보다 많은 수입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여성주의자이든 여성주의자가 아니든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정을 이루고 가사와 자녀 양육을 책임지면서 생계를 남편의 벌이에 의존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편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이해를 받는다고 말했다고 이들은 밝혔다.

이는 사람들이 직장에서보다는 가정에서 덜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 여성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남자나 여자 모두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남녀 간의 소득 격차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다. 20년 전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 직장여성들이 겪는 ‘유리 천장’(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 문제를 처음 거론했을 때만 해도 문제의 초점은 여성들에게 불공평한 직장 내 태도였다. 지금도 ‘유리 천장’은 존재하지만, 요즘 여성들은 이를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과거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가족이나 기타 자신이 소속된 사회와의 접촉을 제한할 위험이 있는 일은 남성이 맡아주기를 원하며, 그로 인해 남성들이 더 많은 봉급을 받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또 ‘유리 천장’을 느낄 필요가 없는 여성 창업도 크게 늘었다. 여성기업연구센터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4년 사이 전체 신규 기업 창업은 9%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여성의 창업은 17%나 늘어났다.  

10. 06. 29.  

P.S. 같이 읽어봄직한 책은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리더스북, 2007)의 속편으로 나온 루안 브리젠딘의 <남자의 뇌, 남자의 발견>(리더스북, 2010)이다.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베스트셀러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에 이은 하버드대학교 신경정신과 루안 브리젠딘 박사의 후속작. 생생한 문장과 흥미진진한 일화를 통해 남자 뇌의 일생에 대한 복잡한 연구 결과를 매우 읽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 게이가 되는 비밀, 남자가 아빠가 되면 자상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등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이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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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10-06-29 17:04   좋아요 0 | URL
'전쟁을 선호하고 모험을 즐기고 영웅을 숭배하는' 남성성을 왜 지켜야할까요? 좀 줄어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로쟈 2010-06-29 17:08   좋아요 0 | URL
소위 보수적 남성관이죠. 축구에 대한 열광을 보면 남성성에 대한 숭배는 쉽게 줄어들 거 같지 않습니다...
 
주권 너머의 세계공동체

이번주 시사IN의 서평란 '7월의 책꽂이'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책꽂이'는 매달 첫 주에 나가는데, 내겐 격월로 차례가 오는 걸로 알지만 내부 사정으로 지난달에 연이어 '인문사회과학' 꼭지를 맡게 됐다. 몇 권의 후보작 가운데, 우카이 사토시의 <주권의 너머에서>(그린비, 2010)를 다루었는데, 같이 후보작에 들어 있던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 2010)도 조금 걸쳤다(물론 다 읽을 여유는 없었다). '주권 너머' 혹은 '트랜스내셔널'이란 주제에 관해서라면 최근에 나온 임지현 교수의 <세계사 편지>(휴머니스트, 2010)도 같이 참조할 수 있겠다. 아, 그렇게 되면 사카이 나오키도 있고, 니시카와 나가오도 있고...    

 

시사IN(10. 07. 03) 국가와 국민을 '해체'하다

“어느 나라 국민이냐?”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건과 관련하여 정부와 다른 의견서를 유엔에 제출하자 정운찬 총리가 내뱉은 말이다. 매섭기로는 매카시즘의 언어 못지않다. “어느 나라 정부냐?”란 물음을 되돌려주면서 동시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국가이고 무엇이 주권인가. <주권의 너머에서>의 저자 우카이 사토시가 던지는 질문이기도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소학교 4학년이었던 그는 일본선수를 응원하면서 히노마루(일본국기)와 기미가요(일본국가)에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5학년이 되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소국민’에 대해 거리감을 갖게 된다. 자신이 부르던 노래와 흔들던 깃발에 불쾌감을 느끼며 ‘국민으로의 길’에서 일탈하기 시작했다. 천황제와,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그리고 내외의 전쟁 피해자에 대한 보상 거부 같은 일본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나쁜 국가’에 대한 그의 직관은 확신이 됐다. ‘주권 너머’에 대한 이론적 모색과 성찰에 몰입하고 있는, 한 일본 지식인의 전력이다. 

세기 전환기의 대략 10년간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에서 우카이 사토시가 성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대테러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운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본의 우경화, 노숙자와 외국인 문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카이 사토시는 이런 것은 문제의 표면이고 그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주권의 문제라고 본다. 그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주권론 서설’에서 이론적 시사점을 얻어오는데, 마침 발리바르의 글은 최근에 나온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에 ‘주권 개념에 대한 서론’으로 소개됐기에 참조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칼 슈미트의 주권론을 재검토하면서, 슈미트에게 주권은 항상 국경 위에서 설립되고 국경의 부과로 실행된다고 지적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주권이론과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란 그의 유명한 정의가 국경의 문제에서 조우한다고 말한다. “국경은 ‘정상적인’ 법질서에 대한 통제와 보증이 중지되는 대표적인 장소이자 ‘폭력의 합법적 독점’이 예방적인 대항 폭력의 형태를 띠는 장소다.”

과거 16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지역을 구획하거나 세계의 지도를 그리는 국경의 확정에서 유럽은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근대적 주권 국가는 그러한 영토화를 통해서 탄생했다. 문제는 “과거 수세기에 결쳐 형성되어 온 유럽의 정치문화와, 유럽연합의 구축이라는 현재의 과제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근본적인 괴리이다.” 전쟁과 내란을 통해 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집단적 주체의 구축 과정, 곧 국민의 발명 과정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카이 사토시와 발리바르가 공통 화두로 ‘국민국가 패러다임’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 곧 주권에 대한 대안을 성찰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다.   

'주권의 너머'를 위해서는 '환대의 사유'가 필요하다
국민국가의 패권주의와 폭력에 대해 ‘저항의 논리’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카이 사토시가 ‘주권의 너머’를 모색하기 위해 제안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다. 노숙자(노상생활자)와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유’와 ‘촉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대의 실천을 막는 ‘주권의 윤리’를 “실효성 있게 탈구축하는 과제”가 아직 저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물음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나눠가져야 할 몫이다. 

10. 06. 28. 

P.S. 마지막 문단의 '탈구축'은 데리다의 용어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의 일어 번역이다. 우리가 보통은 '해체'라고 옮기는 단어다. 우카이 사토시는 데리다의 제자라고 하며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 <맹인의 기억> 등을 일본어로 옮긴 바 있다. 그가 발리바르에게서 재인용하고 있는 건 칼 슈미트의 <대지의 노모스>에 나오는 내용인데, 국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칼 슈미트의 주저들이 조만간 다시 나오는 것으로 아는데, 이 책도 재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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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종강은 이미 지지난주에 했지만 오늘에서야 성적처리를 마무리지었기에 실질적인 방학은 이번 주부터다. 하지만 또 곧장 외부 계절강의와 문화센터 강의가 당장 한 달 간 잡혀 있어서 방학 기분을 내는 건 호사스런 일이다. 저녁에 원고 하나를 보내고 나서야 일과가 저무는 듯싶지만 밤에는 또 중요한 '업무'에 돌입해야 한다. 막간에 들여다본 교수신문에서 대담집 <휴머니스트를 위하여>(사계절, 2010)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제목보다는 부제 '경계를 넘어선 세계 지성 27인과의 대화'가 책의 내용을 더 잘 말해준다. '27인과의 대화'이니만큼 분량도 본문만 557쪽이다. 한 꼭지씩 읽으면 한 달 읽을거리다(내가 제일 먼저 읽은 건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 편이다. '아름다움,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해줄 겁니다'란 타이틀에 끌려서). 여름을 건강하게 나려면 먹는 것도 잘 먹고 책도 잘 챙겨읽어야 한다. 이럴 때 "책도 잘 먹어야 한다"고 해야겠군...   

  

교수신문(10. 06. 28) 경계를 넘어 시대와 세계 고민한 27명의 ‘다르고 같은’ 목소리  

대담집의 매력은 무엇일까. 활자로 축 늘어져 있는 텍스트의 무미건조함을 찾아볼 수 없는, 긴장감 있고, 뒤틀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반복되기조차 하지만, 생생한 현장감 있는 고민의 목소리에서 그 매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과학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콘스탄틴 바를뢰벤이 8년에 걸쳐 ‘석학’ 27명을 만나 세계화·인권·생명공학을 공통주제로 대화를 나눈 책 『휴머니스트를 위하여』는 확실히 이런 지적 긴장감과 생생한 고민을 현장 중계하듯 보여주는 책이다. 원제는 ‘Le Livre des Savoirs: Conversation avec les Grands Esprits de Notre Temps’(Grasset & Fasquelle, 2007)로, 전문 번역가 강주헌 박사가 번역했다.

이 대담집의 탄생은 ‘문화를 초월한 시각적 총서’라는 프로젝트와 관계있다. 그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들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방송과 책으로 만드는 방대한 프로젝트였다. 저자는 ‘대담은 창조적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라고 토로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면 “입말의 직관적 지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담에는 학문적 경직성이 없다. 따라서 대담이 제대로 진행되면 위대한 예술가나 사상가가 내면에 감춘 비밀까지 드러낼 수 있다.” ‘내면의 비밀’이 드러날 때, 이를 달리 말하면 ‘사상의 깊이’의 드러남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를 위해 저자는 ‘20세기에 깊은 족적을 남긴 석학들’을 선정했다. 물론 ‘21세기에 미칠 영향’도 간과하지 않았다. “미술과 문학, 종교와 문화, 인류학과 자연과학, 음악 등의 분야에서 학문적 한계를 뛰어넘어 지식의 한계까지 이른 석학”을 대상으로 했다.

저자는 이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그 시대의 ‘지적 상황’에서 제기된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한 인물 (……) 20세기의 터전을 닦은 인물로,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대한 견해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지성들이다. 27명의 대담자들은 문학(고디머, 푸엔테스, 소잉카, 오즈 등)과 음악(메뉴인), 건축(니마니어, 존슨), 과학(굴드, 프리고진 등), 철학(세르, 크리스테바), 정치(부로토스 갈리, 헌팅턴), 역사(슐레징거, 두웨이밍), 인류학(레비스트로스), 종교(파니카르, 푸파르), 매체·미디어 이론(드브레, 비릴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분야의 경계를 넘어 시대와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발언한 지식인이자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대담에서 갈등과 충돌로 점철된 지난 세기와 자신의 생애를 반추하고, 세계화와 문명 간 단절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시대를 성찰한다. 



물론 이 27명의 ‘석학’ 명단은 서구중심적이며, 대체로 인문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특히 철학에서 세르와 크리스테바, 정치에서 헌팅턴 등이 언급된 데는 눈이 둥그레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담 진행 과정, 저자의 기획 의도 등을 고려한다면 이 ‘석학’ 명단 구성보다 이들 ‘석학’의 입을 통해 무엇을 끄집어내려 했는가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27명의 대담자들은 서구와 비서구, 문명의 공존과 충돌, 과학기술의 가능성과 한계 등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타자와 대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타자와 세계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대화할 것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옮긴이가 지적한 것처럼, 관점에 따라 같은 대상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만큼 개념에 대한 정의를 공유하는 것은 대화의 전제조건이다. 옮긴이 강주헌 박사는 이 정의를 두고 ‘사물이나 현상에 접근하는 관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다.(최익현 기자) 

10.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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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6-28 21:27   좋아요 0 | URL
저기 27인에는 안 들어갔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초입에 나오는 '혼자 보는 이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 있는가'라는 대사가 세르의 '아름다움'과 대구를 이루는 것도 같네요...

로쟈 2010-06-28 22:00   좋아요 0 | URL
원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미가 세계를 구원하리라'를 떠올려주는 말이죠. 도스토예프스키나 타르코프스키나, 입니다.^^

sophie 2010-06-29 10:5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심리적 공간의 파괴'라는 지적이 눈에 들어오네요.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를 읽으면서 느낀건데 때로는 인터뷰 기사나 대담의 형식이 책 내용보다 더 많은 걸 알려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나오는 책마다 페이지 수가 어마어마해서 앞으로 300 페이지 이하로 제한하고 싶은 충동이 드네요. 아후~

로쟈 2010-06-29 17:10   좋아요 0 | URL
절반의 책이 제거되겠는데요.^^
 

기만적인 '녹색성장'이 아니라 '생체모방'과 '생태모방'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책들이 출간되었기에 눈여겨 보고자 한다. 지난 달에 나온 재닌 베니어스의 <생체모방>(시스테마, 2010)과 군터 파울리의 <블루 이코노미>(가교출판, 2010)가 문제의 책들이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5. 08) 지구 살리기 ‘자연모방’에 답 있다

인류가 숨쉬고 활동하는 산소와 에너지의 원천은 모두 1억5000만㎞ 저 너머에서 수소폭탄처럼 핵융합반응을 계속하고 있는 태양에서 날아온다. 우리가 먹는 모든 곡물과 채소류는 햇빛이 키웠고 쇠고기 등 육류나 생선도 햇빛으로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 먹이연쇄의 산물이다. 자동차, 컴퓨터, 크리스마스트리 불빛도 그 동력은 광합성이다. 그것들을 만들고 움직이는 원료인 석유 등 화석연료들은 지난 6억년간 햇빛이 키운 식물과 그것을 먹고 산 동물 사체의 압축된 불완전연소 잔존물이다. 플라스틱, 의약품, 화학약품 등 거의 모든 생활제품들도 결국 태양 에너지를 이용한 엽록소의 광합성 소산이다. 지금 인류문명은 장구한 세월 동안 생성된 그 화석연료들을 순간적으로 태워 얻는 에너지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지구라는 닫힌 시스템 속에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화석연료를 이처럼 마구 태워 유해 탄소를 뿜어내는 인류는 촛불 켜 놓고 봉한 병 속의 생쥐, 창문을 꽉 닫아 건 집 안에서 가재도구들을 불태우는 가족들과 같다. 생명 에너지의 원천인 햇빛이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엄청나게 흘러들어오고 있는데도 그것은 보지 않고 죽은 동식물의 유해를 불 속에 던져 넣어 음식을 만들고 난방을 한다. 



미국 럿거스 대학 임학박사 재닌 베니어스의 <생체모방>(Biomimicry)은 이런 지속불가능한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역설하며 그 대안을 찾아나선 책이다. 대안이 바로 생체모방이다. 생체는 지구상에 박테리아가 등장한 이후 38억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 태양 에너지를 활용해 불모의 지구를 생명의 땅으로 바꾸고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적응을 거쳐 최적의 생존조건을 만들어냈다. 생체모방이란 바로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 인간의 기술조차 그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그 지구상 생명체들의 놀라운 생존방식, 인간과는 달리 어떤 폐기물도 배출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 그리고 지구 생태계 전체를 더불어 살리는 상생과 공존의 기술을 알아내서 본받자는 것이다. 책은 생체모방 연구의 최전선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진행중인 연구 현황과 전망을 구체적으로 짚어가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생체모방이라는 말 자체가 1997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비롯됐다.

 

애리조나 주립대 광합성반응센터의 생화학자 토머스 무어와 토론토대학 제임스 길릿 등은 태양에서 날아오는 광자를 생체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엽록소의 작동 메커니즘을 파고들고 있다. 양자역학 차원까지 들어가는 길릿의 인공광합성 연구 모델은 연못에 떠 있는 좀개구리밥. 빛 에너지를 받으면 서너 달 만에 축구장을 다 덮을 정도로 증식하는, 폭 0.6㎝에 지나지 않는 좀개구리밥 하나의 에너지 전환 효율은 인간이 만든 태양전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다.

토지연구소의 웨스 낵슨과 생태학자 존 파이퍼 등은 1만년 전에 시작된 인간의 농업이 가속적으로 파괴해온 지표가 현대에 이르러 화폐수익을 목표로 한 대규모 개간과 단일품종재배, 과도한 비료와 살충제 살포로 급속히 유실되거나 불모지로 변하고 있는 현실에 맞서고 있다. 그들의 모델은 다년생 식물들이 뿌리를 내려 토양과 유기물을 보존하는 야생의 초원과 숲 복합계.

“초원의 생명체 무게 가운데 70%가 뿌리, 잔뿌리, 깊은 곳에서 물을 취하고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단단히 엉킨 덩굴들의 형태로 존재한다. 단 한 그루의 빅블루스템이 총 40㎞의 실뿌리 관을 갖고 있으며, 그 중 약 13㎞는 해마다 죽고 다시 생긴다. 죽은 뿌리의 잔재는 위에서 떨어진 잎사귀들과 함께 개미, 톡토기, 지네, 쥐며느리, 지렁이, 박테리아, 곰팡이로 이루어진 소형 동물원의 배고픈 입속으로 들어간다. 찻숟가락 하나만큼의 흙에는 수천 종류의 벌레들이 있는데, 모두 굴을 파고 먹고 배설하면서 토양 상태를 조금씩 조절해나간다. 벌레들의 마술을 통해, 분해된 영양분은 굶주린 뿌리로 가거나 부식토에 저장된다.” 그들은 지속가능하나 소출이 부족한 야생 초원과 단기 소출은 많지만 미래가 없는 대규모 단작재배 사이의, 스스로 조직화하면서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지속가능한 최적점에서 농업의 미래를 찾으려 하고 있다. 베이너스는 이밖에 강철보다 다섯 배나 강한 거미줄, 세락믹보다 두 배나 강한 전복 속껍질 같은 자연 속 기적의 물질과 침팬지 등 야생동물의 자연치유 능력, 삼나무숲 같은 생태운영의 비밀을 풀어가는 현장들을 찾아간다.

성장주의를 배격하는 베이너스의 생체모방은 요즘 군사부문에서 유행하는 동식물의 특출한 기능 본따기, 그 죽음의 기술 추구와는 철학적 출발점이 다르다. 그는 자신을 살리면서 지구상 모든 존재와 지구 자체도 함께 윤택하게 만든 생명체의 38억년의 역사, 최후에 출현한 인간 때문에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는 그 역사를 되살리는 길을 자연 속에서 찾는다. 따라서 생체모방보다는 자연모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 10가지 기준은 이렇다. “햇빛으로 작동하는가? 필요한 에너지만 사용하는가? 형태를 기능에 맞추는가? 모든 것을 재활용하는가? 협동에 보상해주는가? 다양성에 의존하고 있는가? 지역 전문가들을 활용하는가? 내부로부터 과잉을 억제하는가? 한계라는 힘을 이용하는가? 아름다운가?”(한승동 선임기자)   

한국일보(10. 06. 26) 경제 살리는 혁신기술… "자연을 따르라"

환경 위기를 절감하는 기업인들은 지속 가능한 경제의 모델로 '녹색산업'을 제시하고 있다. 옥수수를 이용한 바이오연료 자동차나 야자 기름으로 만든 생분해성 세제 등 이른바 친환경 제품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블루 이코노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럽연합의 미래 연구 모임인 로마클럽 회원이자 대안 경제를 모색하는 비영리재단 ZERI(Zero Emissions Research Instituteㆍ쓰레기 배출 제로 연구소)의 설립자 군터 파울리가 쓴 이 책은 녹색경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블루 이코노미'를 제안한다. 그는 야자유 세제를 생산하느라 열대우림이 죄다 야자수 농장으로 바뀌어 황폐해지면서 오랑우탄이 서식지를 잃는 것을 보고 녹색경제는 '덜 나쁜' 방식일 뿐임을 깨달았다. 녹색경제는 기업과 소비자에게 더 많은 투자와 지출을 요구하기 때문에 경제 침체기에는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방법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블루 이코노미는 자연 생태계의 순환 시스템을 따라하는 경제를 가리킨다. 자연에는 버려지는 것이 없고 모든 생물종이 저마다 역할이 있어 전체 생태계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라, 생태계의 이러한 효율성을 모방하면 지구와 경제 둘 다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블루 이코노미를 위한 혁신기술과 실천 사례를 소개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한다. 화학물질을 풀어 물을 정화할 게 아니라 물의 소용돌이 작용을 이용해 자연 정화를 하고, 화석 연료로 전기를 생산할 게 아니라 중력을 이용한 압전기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등 자연이 제공하는 놀랍고 우아한 해결책들을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10년 안에 100가지 혁신기술이 1억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콜롬비아의 가비오타스 지역은 황무지로 변한 땅을 소나무와 버섯의 공생 관계를 활용해 울창한 우림으로 되살린 기적의 현장이다. 땅이 비옥해지면서 주민들의 수입이 증가했고 숲이 우거지면서 풍부해진 물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다.

서부 아프리카의 빈국인 베냉의 손가이센터는 사람과 동물이 배출한 쓰레기를 활용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도살장에서 나온 폐기물을 파리가 들락거릴 수 있도록 구멍을 낸 상자에 모아서 몽땅 처리하고, 거기 생긴 구더기로 물고기와 메추라기를 키워 수익을 내고 있다. 구더기의 효소는 상처 치료에 특효가 있어 제약회사들이 주목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 있는 10층짜리 건물 이스트게이트 쇼핑센터는 에어컨이 없는데도 늘 쾌적하기로 유명하다. 흰개미의 집 짓기 기술을 원용했다. 흰개미는 높은 탑을 쌓으면서 통풍구를 만들어 내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이 해낸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작은 투자로도 다각적인 수익을 낼 수 있고, 자연을 착취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활용하고, 낭비도 부족함도 없는 것이 블루 이코노미의 특징이라고 요약한다. 저자는 자연이 가르쳐주는 혁신기술의 무한한 잠재력을 강조하면서, 블루 이코노미는 이상주의자의 백일몽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며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오미환기자) 

10.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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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를 정리하던 중 비공개로 예전에 스크랩해놓은 글 가운데 '라캉과 라클라우'라는 게 있어서 '로쟈의 지젝'으로 옮겨놓는다. 몇년 전 글이지만 '라캉주의 좌파'에 대해 글을 쓸 일도 있어서 요긴한 참고가 된다. 필자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의 역자이며, 주로 라클라우-스타브라카키스와 라캉-지젝의 주장을 대비해서 정리해주고 있다. '정리'라곤 하지만 내용은 다소 전문적이다.      

 

담비(07. 05. 27)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스타브라카키스의 저서 『라캉과 정치』의 영어판 부제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기(thinking the political)’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부제를 달면 ‘라클라우와 라캉’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저서는 라클라우를 정신분석화하고 있으며, 탈구나 헤게모니와 같은 라클라우의 개념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시도만이 유일한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인가?’ ‘왜 정신분석학인가?’ 왜냐하면 푸코의 권력이론이나 들뢰즈·가따리의 정치이론과 같이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 저서를 이론과 정치의 공간에서 맥락화하며 그 맥락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 저서가 담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관련된 논쟁의 결절점을 제공해주는 (곧 도서출판b에서 번역 출간될)『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라클라우와 버틀러,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왜 정신분석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버틀러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으며, 『라캉과 정치』가 제시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들은 라클라우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라캉과 정치』 안에서 다시 반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과 정치』를 맥락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의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의 대립을 보여주는 두 언급을 보자.

급진적 민주주의와 라캉의 윤리
스타브라카키스는 민주주의의 역설로서 ‘동유럽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서구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울한 실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지젝은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근본적인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면으로서 불러냈다고 지적한다. 이 서로 다른 지적은 두 이론가의 주장 모두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 정치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그는 환상과 증상의 변증법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와 대타자는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결핍을 메움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를 라클라우의 용어로 번역하면 적대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사회적 환상을 통해 부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적대의 한 담지자는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증상)로 환상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의 굴락과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유토피아 정치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통과하면서도 급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급진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탈구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치기획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정치기획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윤리적 행위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면,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윤리적 행위란 유토피아적인 조화의 윤리학을 넘어선 사회적 결핍의 제도화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로 하자면 민주주의 혁명으로 창출된 권력의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의 유일한 이름은 오로지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논의는 정치를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진정한 행위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라캉의 윤리적 차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스타브라카키스의 행위란 실재 앞에서의 항상 실패한 행위라는 것이다. 지젝은 행위를 ‘발생한 불가능’으로서 정의한다. 여기에서 불가능성이란 불가능성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좌표 내부’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과가 돌아가는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행위란 사회-상징적 질서의 재정의 과정이다. 이러한 지젝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와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성(historicity)과 비역사적인 중핵 간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의 제시를 통해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버틀러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보편성’ 개념이다.

텅 빈 보편성과 근본적 불가능성의 문제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내용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헤게모니라는 우연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계급본질주의와 같은 정치적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버틀러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역사적인 배제/포함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특히 비역사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성차의 구별이라는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즉 성차란 섹슈얼리티라는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젠더라는 수행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를 넘어선 성차의 정치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들이 말하는 보편성 그 자체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성차의 우연성이든 정치의 우연성이든 이 모두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이며, 이 형식이 출현하기 위해서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은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하는 특수한 내용을 분석할 뿐 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 두 가지 관계를 적대와 차이에 종속된 적대(또는 무페의 용어로는 대항의 논리로 번역된 적대)의 변증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적 적대란 ‘실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즉 외상적인 것)이며, 이 실재적 불가능성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을 통해 남/녀의 성차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또는 이 불가능성의 원초적인 억압을 통해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지젝의 논점은 정치적 적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 둘이 누락한 문제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즉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는 전체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억압된 역사적 유물론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젝의 행위 개념과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이 지젝의 논의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가 전근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조직화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정초적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젝은 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의 조건)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논리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다양한 주체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던 정치를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계급투쟁을 라클라우적 용어로 차이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로 재개념화하며, 이러한 계급적대에 대한 분석의 누락은 포스트모던 정치가 자본주의를 탈정치화하는 징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지젝은 반자본주의적인 행위를 기존의 상징적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유토피아(u-topic)를 열어나가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아직 지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만약 지젝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이병주 경희대 신문방송학 강사)  

10. 06. 26.  

P.S. 지젝 자신의 책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학에 관한 책도 연이어 출간되고 있기에 마지막 문단에서 필자가 제기한 '이론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면 또 애써 궁리해봐야겠고... 한편 지젝의 신작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2010)는 어쩐 일인지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아마존으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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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6-2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2010-06-28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8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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