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를 위한 인문교양지

엊저녁에 '다음 세대를 위한 인문교양지'를 표방한 청소년 잡지 <자음과모음R> 창간호 출간 기념 모임에 다녀왔다. 햇병아리 같은 새책도 받아온 김에 게재한 글을 90% 옮겨놓는다. ''청소년 권장도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적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고심만 거듭하다가 원래 청탁받은 분량도 채우지 못했지만, 지나고 나니 그나마 '펑크'는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목차를 일별하면 알 수 있지만 다른 내용이 풍부하기에 관심을 가져보셔도 좋겠다.   

자음과모음R(10년 7/8월 창간호) 청소년 권장도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자음과모음R>로부터 내가 받은 ‘미션’은 ‘청소년 선정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와 선정도서가 청소년 독서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달라는 것이다. ‘선정도서’란 ‘권장도서’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청소년이 선정한 도서’가 아니라 ‘청소년에게 권장하는 도서’란 뜻으로 새겨야겠지. ‘인터넷 서평꾼’ 노릇은 하고 싶지만(*있지만) 청소년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쏟아온 건 아니어서 내가 이 일에 적격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나의 성벽 탓이다. 성-벽. 굳어진 성질이나 버릇. 덧붙여, 어떤 주제건 ‘조사’하고 ‘탐구’하는 일을 그다지 마다하지 않는 것도 나의 고질이다. 고-질.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치기 어려운 건 또 고치지 않는 것이 나의 성벽이다. 따라서 이 글은 나의 고질과 성벽이 빚어낸 합작품일 공산이 크다.   

어디에서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관내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들을 둘러보고 복사하기도 했다. 그럴 땐 흡사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독학자의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주인공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자주 보게 되는 독학자는 모든 책을 알파벳순으로 다 읽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도서관이라면 그가 읽어나가는 책보다 새로 들어오는 책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한창 때는 1년에 300권씩 책을 읽었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도서관에 매년 새로 입고되는 책은 사실 그 몇 배가 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세상엔 그가 읽지 않은 책 천지다. 그래, 이토록 많은 책들과 상대하려면 뭔가 지침이 주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미리 읽어본 사람이 이 책은 이렇고, 저 책은 저렇다는 소개를 해준다면, 나중에 읽을 사람에게 요긴한 참고가 되지 않겠는가.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 음식을 먼저 먹어본, 혹은 인생을 먼저 살아본 사람이 ‘가이드’가 될 만한 조언을 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면서 권장할 만한 일이다. 애당초 ‘선정도서’ ‘권장도서’ ‘추천도서’가 갖는 의미란 그런 것일 터이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는 ‘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라는 것도 해마다 발표하고 있고, 각 대학에서 ‘권장도서 100선’(서울대)라는 식으로 권장도서 목록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목록이 반발을 사거나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은 드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권장도서 해제집> 같은 책을 사서 읽는 쪽은 대학생이 아니라 보통 입시를 준비 중인 고등학생이 대부분이다. ‘대학생 권장도서’라기보다는 ‘예비 대학생’으로서의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싶다. 소위 입학사정관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권장도서’ 목록이 학생들에게 주는 부담은 더 커질 것이다. 과연 한국에서는 “독서 또한 입시 과목의 하나”라는 비판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거꾸로 독서는 입시와 무관해야 한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이 문제가 갖는 딜레마다. 일본의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에서 주장한 바이기도 한데, 그에 따르면 “대학, 특히 문과 계열의 공부는 책을 읽는 것이 핵심이다. 설사 이과 계열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단련하는 데 독서는 필수다.” 따라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독서가 부정되는 입시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아예 독서력을 묻고 평가하는 것이 입사시험이나 대학입시의 중요한 전형방식이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문제는 독서가 변죽만 울릴 뿐 핵심적인 입시과목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독서가 공부와는 별개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일본도 사정은 우리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정인가?  

“너는 그렇게 책만 읽다가 공부는 언제 할 거니?” 책을 좋아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가끔씩 던질 만한 잔소리다. ‘공부=독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기이한 ‘한국식’ 잔소리는 문법적으론 맞는 말이더라도 의미론적으론 비문, 곧 틀린 말이다. “너는 그렇게 공부만 하다가 공부는 언제 할 거니?”라고 말을 바꿔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일단은 이런 ‘부조리’가 한국 청소년 독서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우물 안 개구리’식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미리 확인해둘 것은 모든 나라의 청소년이 그렇게 공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본 여학생이 핀란드식 교육 경험담을 담은 <핀란드 공부법>이란 책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핀란드 학생들은 시험 전에 ‘공부한다’는 말 대신에 ‘읽는다’는 말을 쓴다. 엄마는 자식에게 “내일 시험이지? 많이 읽어.”라고 격려하고, 학생들끼리는 “이제 곧 시험이네. 많이 읽었어?”라고 대화를 나눈다고. 일본에서도 공부법은 우리처럼 ‘암기’ 하나이지만 핀란드에서는 오직 ‘읽기’뿐이다. ‘공부=독서’라면 ‘공부하다’란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읽다’로 충분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청소년들이 책 읽는 모습은 어떤가? <선생님들이 직접 겪고 쓴 독서교육 길라잡이>에 실린 ‘고등학생의 눈으로 본 좋은 책과 나쁜 책’이란 체험적 독서론이 참고할 만하다. 10년쯤 전 사례이긴 하나 요즘과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진 않다. 일단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읽으라는 책들은 모두 다 삶에 도움이 된다고, 또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라는 서두부터가 ‘권장도서’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를 집약해준다. 글의 필자는 한창 놀고 싶어할 청소년기에 하루에 거의 7-8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한국 학생들의 현실에 대한 푸념을 잊지 않는데, 물론 여기서의 노동은 ‘공부’라는 노동이다. 곧 한국에서는 ‘공부=독서’가 아니라 ‘공부=노동’이다. 그런 만큼 공부(노동)의 연장으로서의 독서를 학생들이 즐길 리 없다.  

‘좋은 책’의 기준으로 “우선 재미있는 책”이 고려되는 것은 독서만큼은 공부에서 분리시키고 싶은 욕구의 표현일 것이다. 그가 고른 두 번째 기준은 “야해서는 안된다”이고 세 번째가 “장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하고 선정적인 책은 혈기 방장한 고등학생으로선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기피하는 이유이고, 장편 선호는 ‘나에게 딱 맞는 책’이 한 권으로 끝난다면 너무 황당할 거라는 게 이유다. 여기서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독서의 쾌락원칙이다. 고통은 최소화하고 쾌락을 최대화하려는 원칙 말이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책은 자연스레 판타지 대작들 쪽으로 기운다. 특이하게도 필자는 국내 판타지물인 <가즈나이트>나 <드래곤 라자> 등을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는데, 거기에는 고등학생 특유의 ‘애국심’도 한몫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이 판타지 소설을 선호하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교훈이나 삶의 지혜” 등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가즈나이트>를 가장 좋은 책으로 꼽은 고등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지는 몰라도, 나는 교훈과 삶의 지혜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지식과 함께 소위 ‘교훈과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면, 학생들은 자신을 ‘스스로 터득하는 주체’로 간주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는 ‘미성년’일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성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태도와 상관적인 것이 청소년기가 갖는 문제적 위상이다. 프랑수아 스퀴텐과 브누아 페테르스의 그래픽 노블 대작 ‘어둠의 시리즈’에 나오는 한 주인공처럼 청소년은 ‘기울어진 신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어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작용하는 것은 ‘또 다른 중력’이다.  

“선생님, 좋은 책 좀 소개해 주세요.”라고 달라붙지만, 한편으론 “내가 읽을 책을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 청소년들의 또 다른 계산 아닐까. ‘책따세’를 주도하고 있는 허병두 교사가 <푸른 영혼을 위한 책읽기 교육>에서 털어놓고 있는 경험담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적이다. 국어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읽을 만한 책을 자주 소개해주지만 나중에 점검해보면 정작 책을 찾아 읽는 아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는 것. “왜 아이들은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 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고서 정작 찾아 읽지는 않는 것일까.”란 것이 허 교사의 의문이었다. 거기서 그는 교사들이 제시하는 일방적인 추천도서 목록이 학생들의 정서적․심리적 상황을 고려하는 데 미흡했다는 자각으로 책 소개 또한 철저하게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지적 수준, 그리고 청소년기의  특성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상황별 권장도서목록’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제 교육현장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더 관찰해볼 일이다.   

다만 나로선 ‘보다 효과적인’ 권장도서목록을 제시하는 것과는 별도로 ‘권장도서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 교사는 “‘청소년 도서’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는 반문에 대해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들에게 적합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하는데, 사실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자면 ‘과연 이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적합한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허 교사가 드는 사례지만, 가령 황석영의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등장인물인 술집 작부 백화의 “내 배 위로 연대 병력이 지나갔어.”라는 대사 때문에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관점을 고수하는 교사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청소년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때 가능한 태도다. ‘교육의 대상’이란 돌봄의 대상이면서 훈육의 대상이다. 아직 자립적인 사고와 판단능력이 부족하기에 적극적인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라고 따져 묻기 전에 궁금한 것은 과연 ‘통제’가 가능한 것인가다. 과거 노출 수위가 높은 장면들만 ‘가위질’하고 상영하던 영화들처럼, 문제가 될 만한 대사와 장면을 삭제한 ‘안전한 문학작품’들만 청소년들에게 읽히는 것이 가능할까? 학생들은 청소년 권장도서에 포함돼 있지 않으면 대다수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는 <삼포 가는 길>을 과연 읽지 않는 것일까? 사실 술집 작부의 말보다도 청소년들에게 더 유해한 것은 ‘스폰서 검사’ 스캔들, 곧 일부 검사들에 대한 향응과 성접대 관련 보도이지 않을까? 더구나 전자가 픽션이라면 후자는 TV뉴스에 나오는 현실이다. 초등학생 납치․성폭행과 여중생 성폭행․살해사건 등은 또 어떤가? 참혹한 국지전의 참상과 난민들의 기아를 보여주는 국제뉴스들은 어떤가? 너무나도 유해할 듯한 이런 ‘현실’을 과연 청소년들로부터 완전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지? 그러니까 ‘청소년 권장도서’를 제시하는 기본 취지에 대한 동의 유무와 무관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실효성이다. 그런 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청소년 권장도서’의 의의를 강변한다면 그건 권장도서에 담긴 ‘이데올로기’ 이전에 ‘알리바이’ 같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만큼 애를 쓰고 있지 않느냐는 알리바이 말이다.    

허병두 교사가 “두 번 세 번 고민하여,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법한 책들”이라고 고른 책 가운데는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도 포함돼 있는데, 사실 국내에서는 많은 청소년 권장도서목록에 포함돼 있지만 미국에서조차도 일부 학교에서 한때는 ‘금서’로 지정됐던 책이다. 잘 알려진 대로 “문제아 홀든 콜필드가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집에 돌아오기까지 2박3일 동안 겪은 방황을 그려낸 소설”이다. “이 땅의 10대들도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로 공감할 이야기”라고 허 교사는 추천이유를 밝혔지만, 이 작품에는 호텔에 투숙한 홀든이 엘리베이터 보이의 꼬드김으로 창녀와 하룻밤을 보낼 뻔한 장면도 나온다. 또 가장 자상한 조언을 해준 선생님을 잠자고 있는 자신을 성추행하려는 ‘변태’로 오인하고 급하게 도망가는 장면도 들어 있다. 공감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10대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할 정도는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이 작품이 ‘청소년 권장도서’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다른 한편으로 ‘권장도서’의 힘과 의의를 승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권장도서이거나 아니거나’가 아닐까. 그것이 학생들의 독서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이란 건 지극히 미심쩍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 영향이 권장도서를 둘러싼 당사자들 간의 이해관계나 입시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될 수는 있을지언정 학생들과는 무관해 보인다.      

청소년 권장도서가 ‘섬기는’ 이데올로기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청소년기 독서가 교육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이겠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오토 볼노브가 <실존철학과 교육학>에서 제시한 견해를 빌리자면, 원래 수공업적 작업에서  ‘재료의 가공’이란 뜻으로 사용되던 라틴어 'formatio animae'의 독일어 번역이 ‘빌둥(Bildung)’이었다. 우리말로는 ‘교육’, ‘교양’, ‘도야’ 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한 기원적 의미를 갖는 교육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기계적인 이해로, 교육을 외부로부터의 기계적인 주조로 간주한다. 다른 하나는 유기체적 이해는 교육을 내부로부터의 유기체적인 성장이라고 정의한다. 서로 상반되는 듯싶지만 이 두 가지 교육관은 인간의 ‘가소성’을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연속적인 형성이든 혹은 연속적인 발달이든 간에 두 경우 모두 점진적으로 인간의 교육을 성취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교육관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연속성과 가소성에 기반한 인간관은 공통적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인간관도 엄연히 가능하며 또한 존재한다. 가령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근본적으로는 어떤 연속적인 삶의 경과도 있을 수 없다. 점진적인 발전이란 없으며 어느 한 순간에 집결된 힘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비약이 있을 뿐이다.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뭔가를 형성해 갈 수 있다는 ‘가소성’을 전제하지만 실존철학은 그러한 가소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창하게 실존적인 인간학까지 꺼낸 것은 권장도서의 이데올로기가 전제하는 것이 역시 똑같이 인간의 가소성이 아닌가란 판단 때문이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제 때에 잘 먹은 학생들의 영양이나 성장이 좋은 것처럼 주위에서 어떻게 돌봐주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독서의 경우라면, 학생들은 ‘재료’가 아니다. 권장도서의 조합으로 학생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인도할 수 없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독서의 효과다. 독서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기성의 가치관이나 통념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란 진술로 시작한다. 주인공의 자학적 페시미즘이 시작부터 도드라진다. 그리고는 ‘의식 자체가 병’이라는 결론까지 도출해낸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있더라도 이런 작품은 가뜩이나 자의식이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 듯싶다. 그래서 이시이 요지로라는 도쿄대 교수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 15권’에 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일반론이며 모든 독서는 특수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불온한’ 혹은 ‘유해한’ 책이라는 데 현혹되어 또 이 작품을 읽으려는 청소년들이 반드시 있다. 대부분은 읽다가 포기하거나 집어던지겠지만 한둘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 ‘입문’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걸 경험할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를 재조정할 수도 있다. 독서는 그런 것이며, 그것이 또한 독서의 힘이고 본성이다. 그러니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건 권장도서로도 역부족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10.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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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크랩]청소년 권장도서에 대한 몇가지 생각 -로쟈
    from 실낱처럼 2010-07-24 08:33 
    적어도 독서의 경우라면, 학생들은 ‘재료’가 아니다. 권장도서의 조합으로 학생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인도할 수 없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독서의 효과다. 독서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기성의 가치관이나 통념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 http://blog.aladin.co.kr/mr
 
 
2010-07-24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0-07-2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받고 창간사와 로쟈님의 글을 가정 먼저 읽었어요. '문제는 독서력이지 권장도서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로쟈 2010-07-25 16:54   좋아요 0 | URL
읽어보셨군요.^^ 잡지는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책을읽는다 2020-07-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장도서 선정이라는 문제에도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objective가 있군요. 취미로 읽어볼만한 책을 추린다던가, 삶의 방향을 발견한다던가, 사고능력을 확장시켜준다던가 하는 효과들 각각의 영향력을 측정하기 힘드니 문제가 더욱 어렵다고 느껴지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 네 번째 이야기를 옮겨놓는다. '네 번째'라고는 하지만, 지난번에 다룬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에 대한 내용의 연장이다. 이야기는 이 글에서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중간다리' 정도라고 해야겠다. 작품에 흥미를 느끼다 보면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다 보면 또 다른 흥미가 생기기 때문에 오래 붙들고 있게 된다. 계획엔 '타자로서의 이웃'이란 테마까지 다루고 나서야 '파티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다. 역시나 글의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606 를 참조하시길.  

 

다시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지난번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첫 문장을 “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고 옮겼는데, 세계단편문학 영국편 <가든파티>(창비, 2010)에서는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그리고 어쨌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And after all the weather was ideal.)라고 옮겼다. ‘충실하다’고 한 건 ‘And’를 ‘그리고’로, ‘ideal’을 ‘이상적’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누구나 문맥과 관계없이 단어만 접한다면 일감으로 떠올릴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게 때로는 작품 분석에 더 유용하다. 이 경우에는 특히 좀 예외적인 서두인 ‘그리고’란 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상식적인 사실을 확인해두자면, ‘그리고’란 접속사는 앞에 무엇인가의 존재를 전제한다. 한데, ‘그리고’가 텍스트의 시작이므로 그 ‘앞’은 텍스트의 ‘바깥’이다. 텍스트의 바깥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작품에서 ‘텍스트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이것은 사진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화면 바깥의 화면, 곧 외화면(外畵面)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상 “사진은 회화와는 달리 반드시 실제로 지각되는 풍경에서 일정 부분을 따온 것”인데, 그것을 사진의 ‘인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의 인용성은 사진의 외화면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보이는 화면이 보이지 않는 화면을 끌고 들어와 한데 결합됨으로써 사진의 전체 화면이 형성된다. 이때 화면이 의식의 영역이라면, 외화면은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무의식적인 외화면이 없이는 사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회화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조광제, '철학으로 본 매체',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199쪽)

‘외화면=무의식의 영역’이라는 주장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진의 인용성이 어떤 것인지 이 인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든파티>에서 ‘그리고’는 이 인용성의 지표라 할 만하다. 그리고 첫 문장에 이어서 바로 “설령 그들이 미리 주문을 했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가든파티에 어울리는 날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화자는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들’이라는 3인칭 대명사는 일반인칭(‘사람들’)이 아니라 곧 등장하는 셰리던 씨 가족을 가리킨다(둘 다 가능할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곧 가든파티 주최측이다. 1인칭 소설이 아닌 이야기의 서두에서, 고유명사보다 3인칭대명사가 먼저 등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파격이다. ‘그’ ‘그녀’ ‘그들’이란 3인칭 대명사는 1인칭과 2인칭(청자 혹은 독자)을 미리 전제해야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같은 대목을 다르게 옮긴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식별할 수 있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든파티에 적당한 날씨를 미리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를 구하진 못했을 거다.”(<가든파티>, 강)

“어쨌거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었다. 가든파티를 위해 특별히 날씨를 주문했다 해도 그보다 완벽한 날은 없었을 것이다.”(<가든파티>, 펭귄클래식)

이 번역들에서 원작의 ‘인용성’은 지워지거나 최소화됐다. 그래서 깔끔하다. 외화면을 거느린 원작의 ‘사진성’을 ‘회화적’으로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콘텍스트를 배제한 만큼 텍스트의 자기완결성이 더 높아지긴 했지만, 맨스필드의 원작은 좀 불안정하며 시작부터 ‘완벽’하지 못하다. 물론 이 ‘완벽하지 못함’은 작가적 의도의 소산이다. (...)

그렇다면, 작가가 단편소설의 미적 자질로서 ‘자기완결성’까지 훼손해가면서 ‘그리고’란 접속사로 작품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날씨는 이상적이었다.”(The weather was ideal.)란 평범하지만 순탄한 서두 대신에 파격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인용성’이 갖는 효과에 주목하고 싶다. 사진의 인용성은 외화면을 화면 안으로 끌고 들어옴과 동시에 화면을 외화면으로 끌고 나간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인용성은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텍스트를 콘텍스트로 데리고 나간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의 지시성이 강화된다. 텍스트의 경계, 곧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만큼 텍스트에서 제기된 문제는 텍스트 바깥으로 쉽게 번져나간다. 그에 따라 주인공의 물음은 독자의 물음으로 전이된다.  



<가든파티>의 번역자 김영희 교수는 짤막한 해설에서 이 작품이 “어른들이 대변하는 중산층적인 계급적 가치와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심성 사이에서 동요하는 어린 소녀 로라의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 계급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나는 로라의 시선을 통해 죽음과 노동자계급이라는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정리하겠다. 크게 두 가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어째서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가? 그리고 ‘죽음’과 ‘계급’이라는 타자와의 조우는 이 작품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로라가 제일 처음 호명되는 대목에서 암시되기 때문이다.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을 치기 위해 인부들이 도착했을 때 인솔자로 한 명이 나서야 했는데, 이 셰리던 씨 집안의 네 남매 가운데 로라가 낙점된다(로라와 메그, 조스, 로리라는 이름은 루이자 메이 울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차용한 것이다).

“네가 가봐야겠네, 로라. 예술가 타입은 너잖아.”(창비)
“네가 가야겠다, 로라. 네가 감각이 있잖아.”(강)
“로라, 네가 가봐야겠다. 네가 예술적이잖니.”(펭귄클래식)
“You'll have to go, Laura; you're the artistic one."

이것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예술적 감각을 갖춘, ‘심미적 주체’로서의 로라는 곧 ‘윤리적 주체’로서의 책임도 떠안게 될 것이다(그러니까 ‘심미적 주체=윤리적 주체’라는 것이 <가든파티>의 한 가지 메시지다). 이 윤리의 문제는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듯싶다...   

10.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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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라의 공통감각과 윤리적 주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27 20:54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를 일단 마무리하는 내용이다(다음 회에 약간 더 부연될 수 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쾌적하지 않은 컨디션 상태에서 쓴 글인데, 블로그에는 깔끔하게 정리돼 올라와 있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720 를 참고하시길.     잠시 철학사 상식을 들추자면,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2010-07-2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7-2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석이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요...^^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로쟈 2010-07-24 21:54   좋아요 0 | URL
주말까지 다음글을 써달라는 독촉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던 책 가운데 마르트 로베르 여사의 책 두 권,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 2003)과 <정신분석 혁명>(문예출판사, 2000)을 어제 입수했다.    

 

<정신분석 혁명>은 나중에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문예출판사, 2007)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된 책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려다가 아무래도 자세히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영역본도 모두 구했다. '여사'라고 붙인 건 마르트 로베르가 1914년생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어에서 찾아보니 지난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하고 말았는데, 로베르는 프랑스의 문학이론가이자 독문학자로 특히 프로이트와 카프카 전문가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하며, 두 권의 카프카 평전을 쓰기까지 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은 1969년작이며, 3년 뒤에 그녀는 걸출한 소설론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을 출간한다(알라딘에는 영어본 대신에, 짐작으론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과 <정신분석 혁명>의 스페인어본만 뜬다). 기원을 찾자면,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이란 책의 존재는 김현의 김원일론('이야기의 뿌리, 뿌리의 이야기')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아마도 '마르트 로베르'란 이름도 같이(성별에 크게 주의하지 않아서 나는 저자가 막연히 남자인 걸로 알았었다).

   

두 주 전인가 갑자기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이 생각나서 좀 들춰보다가 그녀의 카프카론도 이 참에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좀더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 영역본들까지 수소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구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옛것과 새것>(1963)이란 문학론집을 구하지 못한 것.'돈키호테부터 카프카까지'가 부제이며 영역본은 1977년에 나왔다. 내년 가을쯤 강의를 위해 <돈키호테>를 읽어볼 계획인데, 그때까지는 구해봐야겠다(일부는 구글에서 읽을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의 원제는 '프란츠 카프카처럼 고독한' 정도인데, 구스타프 야노우흐와의 대화(<카프카와의 대화>) 한 장면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장면이다. 

"그렇게까지 고독하신가요?"하고 내가 물었다.
카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파르 하우저처럼 말입니까?"
카프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보다 더하지요. 난 프란츠 카프카처럼... 고독합니다." 

 

한때 카프카 관련서들을 상당량 모았었는데, 근년에는 좀 뜸했다. 카프카에 관한 글도 준비할 겸 다시 좀 챙겨야겠다. 갖고 있는 책들이나 제자리에 모아놓는 게 더 먼저여야겠지만... 

10.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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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7-23 09:10   좋아요 0 | URL
<정신분석 혁명>은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절판되어 구하지 못해서 섭섭한 상태였는데, 이 책이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과 같은 책이라니 반갑네요. 역시 로쟈님 서재에서 정보를 얻는군요.^^

로쟈 2010-07-24 00:35   좋아요 0 | URL
그냥 검색만 해봐도 바로 아실 수 있는 건데요.^^;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김없이 4주에 한번씩 칼럼을 쓸 차례가 되는데, 오전까지 아무 생각이 없다가 불현듯 '파레토 법칙'이란 게 떠올라서(사실 어제 읽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힌트를 얻었다) 3시간 동안 꼼지락거리며 쓴 것이다. 파레토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들을 하지만 그의 저작은 거의 소개돼 있지 않다는 점도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하긴 좀 '식상한' 놀라움이기도 하지만...   

경향신문(10. 07. 20) [문화와 세상] ‘20:80의 사회’

‘파레토 법칙’이라는 게 있다. 경제학 상식이긴 한데, 20%의 원인이 80%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발견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법칙을 개미 관찰을 통해서 착안했다. 경제학자가 어쩌다 개미 관찰까지 하게 됐을까 의문스럽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을 착상했다는 뉴턴의 ‘전설’도 있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여하튼 이야기인즉, 파레토가 개미들을 관찰해보니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더란다.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빈둥대며 놀더라는 것이다. 그 일하는 개미 20%만 따로 분리하여 통 속에 넣고 관찰하니까 신기하게도 다시 20%만 일하고 80%는 놀았다. 그럼 빈둥대던 80%를 분리시켜 놓으면? 그중 20%는 ‘정신 차리고’ 또 열심히 일했다. 결과적으론 아주 오묘하게도 항상 20 대 80이 유지됐다. 그래서 ‘법칙’이다. 



이 ‘20 대 80 법칙’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마케팅 쪽에서 “백화점 매출액의 80%는 20%의 단골손님에서 나온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법칙에는 정치적 색깔도 보태질 수 있는데, ‘파레토 우파’라고 부를 만한 진영에선 “20명의 엘리트가 평범한 80명을 살린다”고 주장한다. 개미사회에서도 ‘엘리트 개미’와 ‘평범한 개미’가 나뉘는지 모르겠지만, 20 대 80이란 비율의 의미를 그렇게 엘리트주의로 해석하고 정당화한다.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천재론’은 아예 ‘파레토 극우파’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반면에 ‘파레토 좌파’가 관심을 갖는 건 차등적 소유와 분배 문제다. ‘어떤 사회든 전체 부의 80%는 20%가 소유한다’는 파레토의 통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더욱 심화되어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가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과연 개미사회에서도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와 소유의 독점이 이뤄지는지 의문스러우면서, 동시에 이런 현실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우려와 무관하게 바야흐로 ‘20 대 80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한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만으로 모든 일이 가능해지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80%가 노는 사회가 아니라 80%를 놀게 만드는, ‘쓰레기’로 만드는 사회의 도래다. 이미 징후가 없지 않다. 청년실업이 낳은 자조적인 용어 ‘잉여’는 80%의 실존적 위기감을 표현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20% 안에 들기 위한 경쟁에서 악착같이 승리하는 일? 하지만 개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20 대 80’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인격과 무관한 ‘구조적인’ 것이다. 어떤 사회가 80%의 탈락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면, 사실 그런 사회체제 자체가 ‘쓰레기’ 아닌가? 자학이야말로 ‘삶의 기쁨’이라고 고집하지 않는 한, 80%가 유의미한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20 대 80 사회’가 비관적인 전망만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20%의 노동력만으로도 경제가 유지된다면, 우리는 적절한 로테이션을 통해서 80%가 놀고 먹을 수 있는 ‘개미들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럴 용의와 의지가 있는지가 문제다. 

10. 07. 19. 

P.S. 파레토란 이름을 처음 본 건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일지사, 1978; 시그마프레스, 2003)에서였던 듯싶다. 둘다 절판된 거 같지만, 내가 읽은 건 일지사본이었다. 2003년에 원서의 2판이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번역본도 개정판이 출간되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홍성사, 1980, 기린원, 1988)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수준급의 개설서들일 텐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세월의 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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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7-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었는데, 20:80에 대해 확실이 알았습니다. 손부족한 날에 안전한 이사 바랍니다.

로쟈 2010-07-20 13:39   좋아요 0 | URL
맛보기일 뿐이죠. 개미 얘기의 출처가 궁금해서 좀 찾아봤지만, 모두 '일설'에서 그치더군요...

2010-07-2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이스 멈퍼드-허먼 멜빌-알베르 카뮈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박홍규 교수의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으로 박홍규 교수와의 대담 자리를 갖게 됐다. 도서출판 텍스트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일시는 8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이고, 장소는 청어람아카데미 지하소강당이다. 알라딘 이벤트는 http://blog.aladin.co.kr/culture/3896091 참조.



10. 07. 19. 

 

P.S. 대담일 바로 전 주에 이사가 예정돼 있어서 아마도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준비를 잘할 자신은 없고, 다만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유토피아 이야기>, <아나키즘 이야기> 세 권은 읽고 갈 계획이다. 혹 대담 행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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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