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40자평만 적어놓고 입을 닫으면 '오해'를 부를 것 같아서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번역에 대한 유감을 몇 자 적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 연이어 '하버드' 간판을 달고 나온 책이라서, 인터뷰이가 된 14명의 철학자 가운데 9명은 '구면'이지만 나머지 5명의 '철학'은 궁금하기도 해서 책은 단박에 구입했다. 공역자 중에 강유원씨도 포함돼 있어서 번역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도 보태졌다.'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말하는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대한 조언'!? 하지만 정작 읽은 책은(나는 1/3을 읽었다) 무척 당혹스럽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척 괴이하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어디에다 조언을 구해야 하는지?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따라가보려고 했지만, 내가 얻은 건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고민이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다.
번역서는 원서와 차례가 좀 다른데, 존 롤스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움베르토 에코로 시작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덜 부담스러우리라는 '배려'일 것이다(국내에 좀 지명도가 있는 리처드 로티도 전진 배치되었다). 하지만 번역은 에코의 약력 소개에서 "튜랭대학에서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중세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삐걱거린다. '토리노(Turin)'란 지명을 영어로는 '튜랭'이라고 읽어주는지? '밀라노(Milan)'와 '피렌체(Florence)'가 '밀란'과 '플로렌스'로 옮겨지지 않은 걸 보면, 지명은 이탈리아어 표기를 따라준 것인데, 듣보잡 지명인 '튜랭'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을까? 유려한 번역서였다면 '옥에티'가 되었을 뿐이겠지만, 읽다 보니 여기저기 '튜랭'이다. 리처드 로티까지의 인터뷰를 보다가 나는 원서를 구하기로 했다. 번역서만으론 읽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고, 그게 두 주 전이다. 그리고 엊저녁에서야 잠시 시간을 내서 코넬 웨스트 편을 읽고(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철학자다) 오늘 스탠리 카벨에서 책을 덮었다.
한 언론 리뷰에서는 기자가 '기계적인 번역' 같다는 인상을 적었지만 뜻이 통한다면 기계적인 번역이라고 해서 '유감'까지 가질 이유는 없다. 문제는 '작문'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말 제대로 된 '공역' 작업이 이뤄진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나마 잘 넘어가는 편인 에코의 인터뷰 말미에서(곁다리로 말해두자면, 이 인터뷰의 질문자에는 홍종민이라는 학생이 포함돼 있다. 한국 학생인 듯하다) 에코가 하는 말을 보라.
"개념이나 사상들이 기호라는 것은 오컴의 사상에서 알 수 있듯이, 로크의 말보다 더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자유롭게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26쪽)
17세기 철학자인 존 로크가 "사상조차 기호들이다"란 말을 했다는 질문자의 언급에 실상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인데,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은 "But it can be found even before."의 번역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발견될 수 있다"는 정도가 '직역' 아닌가. 어떤 심오한 의역의 과정을 거쳐서 "공표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 "-라고 가정해봅시다" 다음에 "If Mind=Brain, then what happens are certain physical states"란 문장이 누락됐다. "만약 정신(마음)=뇌라면,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물질적 상태들이죠." 그리고 이어서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또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란 문장 앞에서 "Certainly they are not things"(분명히 그것들이 사물은 아니죠)는 번역이 누락됐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은 일부러 생략한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유럽에선 열두 살과 열여섯 살에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읽기 시작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많이 알게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조금 더 정확하게 옮기자면 "유럽의 상급학교에선 열두 살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기 시작해서 열여섯 살이 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걸 알아야 하게끔 돼 있습니다."이다. 하지만 <쿠란>은 물론 <성서>도 읽지 않으며 불교 교리에 대해선 구경도 못해본다는 것이 '유럽중심적 교과과정'의 오류이고, 이것이 '보편교육'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에코의 지적이다.
이어서 로티는 내가 한때 열렬히 관심을 갖던 철학자여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일단 로티의 약력에서 미국의 주류 분석철학계의 '우등생'으로 프린스턴대학 철학과에 몸담고 있다가 버지니아대학의 (철학과가 아닌) 인문학교수로 가서, 다시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로 자리를 옮긴 일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
"직업적으로 보면, 로티는 미합중국 철학과 사랑싸움을 벌였지만 끝내는 이혼을 한 것처럼 끝나버렸다. 로티가 버지니아대학의 소속 학과가 없는 자리로 가면서 프린스턴대학을 그만둔 것이다."(31쪽)
'미국(America)'을 '미합중국'이라고(혹은 '유에스'라고) 옮기는 것은 강유원씨의 고집이다('미국'이 '미합중국'의 준말이란 사실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는 취지일까?). 뒷문장은 "Rorty left Princeton for a non-department position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and now teaches in the Comparative Literature department at Stanford."을 옮긴 것이다. 물론 로티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잉여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누락시킬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
로티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그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1쪽)
번역문은 이미 장황한데, 여기에도 누락이 있다. 원문은 "Rorty argues that 'true' is simply a 'compliment' to views that we think well-justified, as that the notion of truth as the representatio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is no more than dogma."이다. 로티의 기본적인 입장은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진리=자연의 거울)이 도그마에 불과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 대신에 존재하는 것은 '정당화된 견해들'뿐이고, '진리'란 말은 이 '견해들'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이다.('브라보!' 혹은 '굿잡!') 다시 옮기면, "로티는 '진리'란 우리가 잘 정당화됐다고 보는 견해에 대한 '칭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개념은 도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리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다. "로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윤리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버리려 했으며, 인간만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세계에 대답할 수 있음'이라는 진리의 개념을 포기해야만 하고, 인간으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답할수 있음'은 'answerability to the world'의 번역이며, 지배적 진리관이었던 '대응설'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로티에게 문제가 되며,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별히 '자연'을 제외하고, 로티에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문만 보자면, 로티에게는 자연만이 유일하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라는 것이 되는데, 이야말로 정반대의 해석이다. 원문은 "To him there is no court of appeal beyond humanity itself, particularly not 'Nature'."이다. 강조한 대목은 '특히 '자연을 제외하고'가 아니라 '특히 자연은 그러한 법정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참고로, 'court of appeal'은 '항소법원' 혹은 '최고법원'이란 뜻이라고 한 분이 알려주셨다.)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시간관계상,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코넬 웨스트 편으로 넘어간다. 1953년생의 중견철학자인 그는 현재 프린스턴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비평가와 시민권 운동가이기도 하다고. 이 번역서에 나는 별점을 둘 주었는데, 번역은 아주 실망스럽지만 코넬 웨스트란 저자를 알게 해준 것 때문에 별점 하나를 덧붙인 것이다. 그를 소개하는 서두에 보면, 2000년 봄학기에 웨스트는 하버드에서 힐러리 퍼트넘과 함께 '실용주의와 신실용주의'란 강의를 했다. 웨스트 교수의 강의 습관은 매 시간 공부하게 되는 각 철학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전에 핵심 단어 몇개 쌍을 칠판에 적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대목.
"웨스트의 철학에 대한 강좌에서 퍼트넘은 싱긋 웃는 웨스트의 습관을 따라하며, 웨스트가 철학적으로 조망한 주요 관심사로 죽음/욕망, 독단주의/대화주의, 지배/민주주의를 들었다."(49쪽)
원문은 "When it came to the lecture on West's own philsophy, Putnam, with a playful grin, borrowed West's habbit and wrote what West had acknowledged as the primary concerns in West's philsophical landscape: death/desire; dogmatism/dialogue; domination/democracy."이다. 요는 '싱긋 웃기'가 웨스트의 습관이 아니라 '주요 개념쌍을 칠판에 미리 쓰기'가 습관이라는 것이고, 퍼트남이 웨스트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걸 흉내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너무 대충 번역했다는 인상이다.
코넬 웨스트는 이스라엘 셰플러(<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의 저자)에게서 배우고, 리처드 로티에게서 실용주의를 배운다. 그리고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를 발견"한다. 번역서는 불친절하게도 조시아 로이스에 아무런 설명도 붙이고 있지 않은데, 미국 철학자 'Josiah Royce(1855-1916)'를 가리킨다. 주저는 <근대철학의 정신>(1892). 'old Josiah Royce'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가 아니라 '옛날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를 뜻한다. 별로 주목받지 않은 철학자였던 것 같은데, 웨스트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주저에 포함된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는 "미합중국 철학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까지 꼽는다. 웨스트의 특이한 점이긴 한데, 그는 "키르케고르적이고, 쇼펜하우어적인 경로"를 통해서 실용주의를 알게 되고, 또 그런 관점에서 해석한다.
웨스트는 미국 분석철학계의 좌장이었던 윌러드 콰인도 실용주의 철학자로 간주할 정도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 "콰인이 천재적인 것은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로 기호 논리학자와 논리실증주의자의 가장 복잡한 담론들에 개입했다는 점 때문"(53쪽)이라고 쓴 구절을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한데 이 인용도 핀트가 맞지 않게 옮겨졌다. 원문은 "The genius of W. V. Quine was to intervene in the most sophisticated discourses of symbolic logicians and logical positivists with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이다. 구문은 'intervene A with B'이다. 'B를 가지고 A에 개입하다'. 문제는 B에 해당하는 두 가지다.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을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라고 옮겼는데, 어떻게 해서 '도식들'이 뒤에 나오는 '에머슨적인'도 받게 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A)pragmatic formulations (B)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가 따로따로다.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란 엉뚱한 소리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저는 물리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세계-만들기에 대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소견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굿맨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측력에 관해서라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예측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이 있으며, 제가 콰인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54쪽)
이 대목은 웨스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는데, 번역문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넬슨 굿맨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그러졌다. 굿맨의 책은 <예술의 언어들> 번역이 두 종 나왔었는데, 이대출판부판은 어찌된 영문인지 뜨지 않는다. 번역문의 첫 문장은 "And I do believe that physicists have much to tell us, they have their own versions of world-making, to use Goodman's language, and they predict better than any of the other groups."이다. '굿맨의 언어(용어)를 빌리자면"이라고 해놓고, 정작 그게 무엇인지 번역문은 놓쳤다. '세계-만들기'가 굿맨의 용어이고, 그는 <세계만들기의 방식들>이란 저작을 갖고 있다(박이문 교수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으로 나는 한때 번역스터디를 한 인연이 있다). 굿맨이 보기엔 예술이나 과학이나 다 대등하게'세계만들기'의 방식들(버전들)일 뿐이다. 물리주의자들의 언어로 기술되는 세계판은 '예측력'에서는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그게 유일한 세계판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술은 예술대로 독자적인 '세계만들기'로서 정당화된다. 그게 굿맨의 기본적인 예술철학이고 언어철학이다. 대체로 역자는 미국 철학에 별다른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게 아닌지.
"당연히 그것은 흑인 학생이 아닌 학생들, 백인, 종동계, 남미계,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용기 있게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전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계층, 와스프(WASP), 남성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흑인은 흑인 청교도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아니라, 보다 나은 계층이며, 와스프이며, 남성입니다. 존재하려는 용기를, 고투를 할 용기만 충분하다면, 그런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67쪽)
"존재하려는 용기, 고투를 할 용기"(courage to be, to wrestle)는 웨스트 철학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강조할 일은 아니고, 다만 '흑인 청교도인'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흑인 프롤레타리아(black proletarian)'의 오역이란 것만 지적한다. '프롤레타리아'와 '청교도(Puritan)'를 혼동한 것이리라. 기독교 얘기가 나온 김에 키르케고르로 넘어간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삶이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지만, 그는 기독교의 원조를 받고 있었습니다. 버나드 쇼는 증오란 겁쟁이가 된 비겁한 자의 복수라고 말했는데, 레비나스처럼 하다가는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70쪽)
키르케고르가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다고 한 대목은 "Kierkegaard shows Christian life is living dangerously -ah, proto-Nietzschean, but he's got it under Christian auspices, right?"를 옮긴 것이다. '기독교의 원조'보다는 '기독교의 보호' 하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원문은 이렇다. "Bernard Shaw says hatred is a coward's revenge to being intimidated, so that you can't deal with otherness, you can't deal with stangeness, in the courageous way that trying to relate, commune - it's almost Levinas-like."이다. 번역문은 '그건 거의 레비나스식이죠'라는 대목을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와 연결시켜놨는데, 정반대 아닌가? '타자성의 철학자'가 '타자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다니! 번역문대로라면 코넬 웨스트가 멍청이란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비로소, 본론이자 클라이막스다. 코넬 웨스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부분인 동시에 번역의 '횡포'에 화가 났던 부분이다(70-73쪽).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도 잠시 따라가본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적 용기가 철학의 전성기를 만듭니다.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했던 것이 맞다면, 소크라테스는 심오한 방식의 지적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 예수는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결국 소크라테스보다 더욱 더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에 관한 대목은 "And for me, of course, Jesus is not so much intellectual courage, but it's courage as compassion, which I think in the end is much more profound than Socrates."을 옮긴 것이다. 'compassion'을 '자비'라고 옮겼는데(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이다), 뒤에 보면 '눈물 흘리는 예수'를 겨냥한 말이다.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은 방점이 잘못 찍혔다. "예수는 지적 용기라기보다는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제 생각엔 결국 그게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입니다."라고 옮기고 싶다. 왜 더 심오한가? 소크라테스는 울지 않았지만 예수는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뭔가 많은 걸 잃어버린 것이라고 웨스트는 생각한다. 체호프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 점 때문에 체호프로 돌아가게 되는데, 우리는 진정 소크라테스, 예수, 지적인 관심, 과학자, 의사 그리고 뿌리 깊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 면에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위안이 없는데도 기독교적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좋은 겁니다!"
원문은 "And that takes us back to Chekhov, because you really do have Socrates, Jesus, intellectual curiocity, scientist, medical doctor, and deep Christian backdrop but agnostic in belief. Christian temper without the Christian consolation, see, that's good stuff!"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크라테스+예수=체호프'이다. 그런데, 번역몬은 그 의미상 주어로서의 '체호프'를 '우리'라고 옮겨놓았다. 우리는 모두 체호프다!? 이어지는 문장도 부정확하게 옮겨진 건 마찬가지다.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연을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이 체호프입니다. 보세요, 체호프 안에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것이 있지만, 그는 끝내는 저희 할아버지가 하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할 용기,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싸우라는 겁니다. 휴! 그것이 체호프가 말하는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체호프에 대한 연이은 경탄이고 찬사다. 그런데, 첫 문장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을 보면 역자는 자신이 무얼 옮기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듯싶다. 즉 이게 모두 체호프에 관한 설명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체호프를 읽은 적은 있는 것일까?). 첫 문장의 원문은 "All that love and compassion, courage, but still Socratic, in terms of intellectual engagement, go wherever the conclusions take you and so forth, but you're still loving."이다. 다시 옮기면, "체호프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기를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입니다. 지적인 개입이란 관점에서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든지 간에 거기엔 또 사랑이 있구요." "휴, 이건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해요! 그게 바로 체호프입니다."(Look into the abyss, whew! That's Chekhov.)
이 '유일무이한 사람' 체호프에 견줄 만한 철학자가 있는가? 웨스트가 보기엔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그는 겁이 많았다. "그는 사상의 측면에서는 용기 있었지만 삶을 견뎌내지는 못했어요"라는 게 웨스트의 평가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위대한 천재이고 그의 삶 속에서 철학적 대화를 재연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용기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학생들을 난폭하고 가혹하게 대했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충분히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방식이므로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비트겐슈타인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코 체호프 같은 인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과 체호프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것처럼 체호프의 재능은 그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체호프, 와일드 두 사람 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니체적 기준을 만나게 됩니다. 체호프는 주로 낮에는 의사였지만 문학예술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믿기지 않지요."
이 대목도 원문을 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Chekhov, who didn't just invest his genius in his work, his talent in his life as Oscar Wild talked about; it was both."이 첫 문장의 원문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망발이자 엉터리 번역이다. "체호프는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에만 쏟아붓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체호프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니다. 유미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호프는 자신의 재능(천재성)을 그의 삶 속에도 실현했다는 내용이다. 체호프와 와일드 두 사람이 다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 한숨이 나왔다. "it was both"라는 건 체호프가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과 삶 양쪽 모두에 쏟아부었다는 것, 곧 그의 재능은 작품과 삶 모두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그는 작가이면서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냉정한 관찰자이면서 풍부한 연민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런 체호프야말로 "너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라"는 니체적 기준(요구)에 부합하는 사례라는 얘기다. 믿기지 않는가?!
그래서 코넬 웨스트가 기대하는 철학 또한 체호프적인 철학, 체호프를 닮은 철학이다. "저는 결국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체호프와 철학적으로 유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웨스트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거라고 이해한다. 그는 '철학에서의 체호프'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과에서는 체호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등은 철학 강의실에서 만날 수 있지만 체호프는 아니다. "체호프는 정말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는 게 그의 결론이므로 체호프에 관한 그의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당장은 <코넬 웨스트 독본>이라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코넬 웨스트와 체호프'에 대해 적었으므로 번역에 대한 시비는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 알고 보니 코넬 웨스트는 지젝, 아비탈 로넬, 주디스 버틀러 등과 함께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영화 <이그재민드 라이프>(2008)에 출연하기도 했다(마이클 하트, 마사 누스바움, 피터 싱어 등이 더 출연하는군). 겸사겸사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다.
정작 써야 할 원고와 해야 할 번역이 산더미인 상황에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요긴한 책이 번역돼 나온 듯해서 반가워했지만, 아무튼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번역이어서 유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자들은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궁금한 사람,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철학은 공부하고 있는 사람, 철학을 공부하다가 다른 인문학과의 연계가 궁금해진 사람, 그 누구보다 철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는 냉소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이 가리키는 건 번역서가 아니라 원서다. 때문에 우려스러운 건 잔뜩 기대를 안고서 책을 펼쳐든 독자가 오히려 철학에 대한 냉소나 품게 되지 않을까란 점이다. 역자들의 바람에 걸맞게끔 좀더 온전한 번역서가 나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10. 08. 01.
P.S. 책은 스탠리 카벨의 인터뷰까지 읽었지만, 시시비비를 더 옮겨적지는 않겠다. 카벨은 예전에 철학과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귀동냥을 한 덕분에 여러 권의 책을 구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분석철학을 전공했지만 미학을 강의하고 또 영화와 오페라에 대해서도 정통한 드문 철학자다. 소로의 <월든>과 하이데거와의 친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 게 그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그가 에머슨과 소로를 재발견하게 된 일에 대해 회고하는 대목의 번역만 인상적이어서 옮겨놓는다.
"저는 소로를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으로 제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93쪽)
'환영 꽃다발을 들고있는 소년'으로서의 소로? 원문은 "I wasn't intersted in holding up Thoreau as a flower child"이다. 여기서 '플라워 차일드'는 1960년대 히피 세대를 가리킨다. 당시 자연주의자 소로는 히피들의 숭배대상이었고. 이를 테면, '원조 히피'? 그러니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 곧 '화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카벨은 소로를 그런 '원조 히피'로 숭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