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머리가 주는 공포

 사람의 머리를 손에 든다는 것은 무섭고도 불안한-심지어는 겁나는-일이다.

 사람의 머리를 드는 것과 두개골을 드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다. 두개골을 들고 있을 때는 일정한 정서적 거리를 둘 수 있다. 팔을 쭉 뻗어 멀찌감치 들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그다지 마음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체보관소에 있는 머리는 신경을 온통 헤집어 놓는다.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를 그토록 뒤흔들어 놓는 것은 부드러운 조직들, 즉 피부, 모발, 눈, 귀, 입술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모여 얼굴 생김새를 구성한다. 우리가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그릴 때면 살아오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얼굴들 - 거리에서 다가오는 얼굴들, 잡지의 그림이나 사진, 혹은 은막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얼굴들 - 을 떠올린다. 그래서 어떤 형태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여진 머리를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머리에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들고 있을 때면 어떠한 정서적 거리감도 가질 수 없다. 사실 무관심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이 누군가가 자식으로 두고 있는 사람의 머리라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정하고 싶은들 어떻게 머리를 들고 있든 어떤 자세로 놓아두거나 받쳐놓든 머리가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영향력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잘린 머리를 대할 때마다 갖는 - 꼼짝없이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 그 느낌은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중략)

 사람의 안면은 열네 개의 뼈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부분은 서로 대칭되는 모양의 조각들이 쌍을 이루고 있는데, 두개골의 바닥부분에는 후두골이 꼬리뼈(환추)라는 목에 있는 첫 번째 등뼈와 관절을 이룬다. 꼬리뼈를 영어로는 ‘아틀라스’라고 하는데 고대 그리스인들로서는 이 꼬리뼈가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아틀라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 이름. 티탄족에 반란을 일으킨 하늘의 신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그 벌로 하늘을 떠받들고 있게 되었다고 함)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모양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 꼬리뼈로 인해 목 부분의 등뼈 위에 놓인 머리를 돌리거나 굽힐 수 있다.




- 마이클 베이든의 법의학 이야기 <죽은 자들은 토크쇼 게스트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중

   p280-p284


-------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206개의 뼈 중에서 22개가 머리와 안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안면을 구성하는 뼈가 14개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술 등 부드러운 조직들을 구성하는 감싸고 보호하는 데 필요한 뼈이기도 하다. 그걸 쓰다듬고 입 맞추고 지긋이 바라보는 일은 그것과의 모든 추억과 어쩌면 아련한 그 옛날의 꿈이었을지도 모를 개개인의 기억들을 상상해보는 것과 유사하다. 상상력!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인간 삶의 애잔함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이 우리가 살면서 무수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의 얼굴에 대한 공포를 갖게 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그 조직들, 미세한 주름의 수까지도 다른 그 얼굴들이 한편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나는 대개 사람의 얼굴이 두렵다. 오욕칠정의 감정에 독기를 뿜어내기도 하고 충만한 감정에 벅차오르기도 하는, 나를 야누스이게 하는 그 얼굴들이 두려운 것이다. 내 얼굴을 포함하여. 내 얼굴의 조직들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오늘 연 와인의 오크향이 오늘따라 참 좋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푸하 2009-03-2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제 얼굴에 몇 가지 표정(아마도 좋은 표정일 것 같아요.)이 지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9-03-28 09:21   좋아요 0 | URL
푸하님 늘 그렇듯, 읽기모임으로 알게 되는 책들 참 훌륭해 보여요.
사람의 얼굴을 서로 가꿔주는 사이가 아름다운 관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비로그인 2009-03-27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서운 사진 있는줄 알고 클릭할까말까 할까말까 어젯밤부터 고민했었다는 ㅎㅎ

프레이야 2009-03-28 09:19   좋아요 0 | URL
제목이 좀 그랬네요.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3-2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은 무섭지만 본능적으로 시선이 가는듯해요. 저 책 저자는 참으로 논리적이군요.

프레이야 2009-03-28 09:18   좋아요 0 | URL
법의병리학자로서의 경험을 논리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았어요.
흥미롭더군요, 휘모리님.^^

라로 2009-03-2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 넘 자주 드시는거 아냐요????ㅎㅎ

프레이야 2009-03-28 09:19   좋아요 0 | URL
거의 매일 마셔요, 나비님.^^
저건 뽕떼-까네, 음 아주 맘에 들었어요.

2009-03-27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8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년 1월과 2월 동안 점자도서관에서 낭독녹음한 도서다. 

1. 설령 

 미우라 아야꼬 지음 / 설우사 

   독실한 기독교 신자,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기초로 다분히 교조적이고 종교적이지만 

   그것을 초월한 고차원의 인간 미덕이 있다.  살신성인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한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

                        시각장애인 회원의 신청도서였다. 

 

2. 한승원의 글쓰기 비법 108가지 

 

  한승원 지음 

  고향 전라도에 토굴을 짓고 장르를 두루 섭렵하며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는 한승원이 그의 작품을 예문으로 들며 글쓰기 비법을 

  말해준다. 하지만 특별하고 구체적인 비법을 기대하면 실망이 될  

  책이다. 글쓰는 사람의 기본 자세에 초점을 맞춘 근본적인 마음자세

  로 초점을 두고 읽으면 유익하다. 

 

3. 21세기를 사는 지혜, 배신 

 

  김용철 외 지음 / 한겨례 출판사 

  한겨례 특강 '배신'편을 묶은 책이다. 

  연극인 오지혜의 사회 및 인터뷰로 청중들과 함께 하는 살아있는 

  언어와 사고가 숨쉬는 책이다. 배신의 아이러니적 미덕을 

  발견할 수 있고 진정한 배신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에 대한 자성을 하게 될 것이다. 

 

 

4. 열등감을 희망으로 바꾼 오바마 이야기 

                                          

 버락 오바마의 평전, 청소년을 위한 도서로 나와 읽기에 무난하다. 

 그의 연설문들이 영문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의 가족사와 유청년기를 거쳐 그의 과거 행적을 읽을 수 있다. 

 대통령이 된 후의 (지금까지의) 행보와 그의 과거 지향점이 모순에  

                                        이른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씁쓸하다. 

 

5. 섬 

 

  르 클레지오 지음 

 200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방랑 작가 르 클레지오의  

 비교적 후반 소설. 레옹이라는 인물이 다시 랭보와 오버랩되며 

 손자가 할아버지 대의 조상과 겹쳐지는 자기정체성 찾기의 여행.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의 위대함과 물질문명이 회귀해야할 

 모태로서의 자연이 시적이며 은유적이며 화려한 문체로 그려진다.  

                                        수르야바티와 레옹의 사랑은 자연과 도시, 원시와 문명의 결합이다.

                                        분량이 많아 mps 시디로 제작하면 용량이 꽤 클 것이다.  

  

-----

오늘, 마이클 베이든의 법의학 이야기 <죽은자들은 토크쇼 게스트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를 시작했다. 1A, 1B, 2A까지 녹음했다. 흥미로운 분야다. 그중 오늘 밑줄 그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실 우리는 살아온 대로 죽는다. 변사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몸은 그 주인이 평생에 걸쳐 가한 이롭고 해로운 일들을 반영한다. 흡연, 음주, 안경의 착용(콘택트렌즈도 눈의 모양을 바꾸어놓는다), 약물복용, 성적 취향, 스트레스, 운동, 자살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기호와 욕망의 종류는 피부 안, 피부 위 그리고 피부 밑에 모두 드러난다. 시체에서는 마치 그 사람의 일대기라도 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다. 

(22-23쪽) 

 

 원제 DEAD RECKONING 

 마이클 베이든 / 바다출판사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9-03-0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독을 할 때면 속으로 읽을 때보다 더 집중이 되거나 기억에 오래 남거나 하나요? 문득, 그게 궁금해졌어요.

프레이야 2009-03-05 23:20   좋아요 0 | URL
그럴 때도 있고 오히려 안 그럴 때도 있어요.
발음은 물론 단어 하나 토씨 하나 끊어읽기 그외 괄호 부분
주석부분까지 읽어야 하고 호흡을 고르게 가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어떨 땐 내용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다시 돌아가 속으로 한 번 더 읽고 가요.
그래서 전 낭독하다가도 연필을 들고 밑줄긋기를
해요. 그러면 내용을 놓치지 않고 일거양득이 돼요.^^
소설처럼 대사가 많은 책은 나름 그 재미가 있구요.

바람돌이 2009-03-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애들 책 읽어주는 것도 너무 힘들던데... 혜경님 정말 대단하세요.
혜경님의 낭낭한 목소리로 듣는 책은 어떤 느낌일까요? 낭독하는 혜경님의 모습이나 그 마음까지 너무 멋져보이는거 아시죠? ^^

프레이야 2009-03-06 10:42   좋아요 0 | URL
같은 사람의 목소리도 그날그날 미묘하게 달라져요.
그래서 전날 읽었던 끝부분을 조금 듣고 되도록이면
그 목소리톤에 맞춰서 이어나가려고 해요.
어떤 날은 고르고 맑은데 어떤 날은 잠기고 긁히는 소리가 나구요.
낭낭한..우히힛~ 괜스레 기분 좋아요, 바람돌이님.
해아나 예린인 서로 읽어주기하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엄마 목도 서서히 덜 아프고요.^^

bookJourney 2009-03-06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독녹음을 하시는군요. 혜경님, 너무 멋져요!!!

프레이야 2009-03-06 10:43   좋아요 0 | URL
O형 같은 B형 책세상님 ^^
호호.. 그저 좋아서 즐겁게 하는 일이에요.^^

무스탕 2009-03-06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께서 녹음해 준 책들을 듣는 분들은 마음이 편안해질것 같아요.
책 읽으시다 좀 흥분되는 부분에선 같이 목소리 커지고 슬픈 부분에선 덩달아 처지거나 가라앉지 않나요? ^^

프레이야 2009-03-06 10:45   좋아요 0 | URL
듣는 사람에게 편안하게 들리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해요.
실장이 제가 제일 편하게 읽는다고 하더군요.
더 잘해라고 한 말일텐데도 기분은 좋았어요.ㅎㅎ
읽다가 울컥했던 부분도 있고 목소리가 떨리던 부분도 있었어요.
리와인드해서 그 부분은 다시 읽었죠.^^

stella.K 2009-03-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읽고 봉사도 하고 일석이조네요.
저도 예전에 이런 봉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낭독은 더듬거려서 못하고...목소리는 좋은데.쩝.

저 한승원의 책은 군침만 흘리고 있습니다.ㅜ.ㅜ

프레이야 2009-03-06 13:29   좋아요 0 | URL
네, 두마리 토끼에요^^
한승원의 저 책은 뾰족한 비법이라고 보긴 좀 그래요.
스텔라님이라면 그정도 비법은 가지고 계실 듯해요.
목소리 좋다고 자부하실 수 있을 정도면 아~ 듣고싶어요^^

꿈꾸는섬 2009-03-0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목소리가 궁금해요^^ 물론 아름다우시겠죠.^^

프레이야 2009-03-07 14:49   좋아요 0 | URL
아뇨.ㅎㅎ 마이크 앞에서만 가다듬으니까요.

순오기 2009-03-0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사람 앞에서 읽어주는 것과 낭독을 녹음하는 것은 좀 다르겠죠?
고운 목소리에 정성을 담아 낭독하는 혜경님도 떠올려봐요.^^
나도 더 나이 먹어서 책읽어주는 할머니로 살고 싶은데 목소리가 문제되겠다~ㅋㅋ

프레이야 2009-03-11 00:41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책읽어주는 할머니 같이 해요^^
언니 목소리 좋은 건 제가 이미 아는데요 뭘.ㅎㅎ
사람들앞에서 낭송할 때보다 혼자 녹음실에 앉아 낭독하는 게
훨씬 편하고 좋아요. 낭송과 낭독은 다르긴 하지만요.
그게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실제 읽어주는 것도 다르긴 할 거구요.

뽀송이 2009-03-10 23:16   좋아요 0 | URL
ㅎ ㅎ 순오기님, 혜경님 두분 다 따스한 사람 냄새나는 낭독하실 것 같아요.^^
혜경님의 그 고운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 저도 들어보고 싶어요.^^

소나무집 2009-03-22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골고루 다 있네요. 낭독할 책은 혜경님이 직접 고르시는 건가요?

프레이야 2009-03-22 09:25   좋아요 0 | URL
네, 녹음실 책장에 비치된 책 중에서 제가 골라요.
같은 장르만 계속 읽으면 지루하니까 골고루 고르는 편이구요.^^

폭설 2009-03-22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은 돕기를 하시네요.^^ 저도 목소리 더 늙기 전에 녹음봉사 한번 하고 싶은디.. 신청은
어떻게 하나요? 부산은 아닙니다만.
아무나 받아주나요? ㅋㅋ... 아니면 목소리시험 통과해야 하나요?

프레이야 2009-03-23 07:49   좋아요 0 | URL
어느 지역인지 모르겠지만... 부산에는 부산경남 점자도서관 본원이 있어요.
목소리 시험 통과는 해야해요^^ 오디션을 보는 셈인데요..
전 두페이지 가량의 글을 주더군요. 그걸 녹음해서 시각장애인분들이 듣고
통과되어야해요.^^

Alicia 2009-03-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원의 책은 신문에도 소개가 되었던데 어떤가요?
테크닉에만 치중한게 아닌가 싶어서 열어보고 사야 할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9-03-25 20:29   좋아요 0 | URL
그 반대에요, 알리샤님.
오히려 테크닉에 너무 치중하지 않은 게 흠이라면 흠일 것 같은데요.
글쓰기의 구체적비법을 말하기보다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있어요.
거의 모두 자신의 글을 예문으로 들면서요. 그리고 그 예문이란 게 각 꼭지의 내용과
썩 맞아떨어지진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읽고나면 거꾸로 더 갈증이 날 수도 있어요.^^

희망찬샘 2009-03-2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은 일을 하시네요. 저희 어머님도 오랜 시간 맹인선교회에서 봉사를 하시는데... 저도 이 담에 시간 나면 봉사해야지 하고 맘 먹는데 이런 맘은 봉사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거지요?

프레이야 2009-03-30 07:30   좋아요 0 | URL
^^ 무리해서 하는 건 뭐든 별로인 것 같아요.
오래 가지도 못하구요. 시간이 그래도 조금 여유있을 때 하시는 게 맞지요.

지우개 2009-03-3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혜경님 같은 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얼굴도 예쁘시지만 마음도 참 예쁘세요.저도 한때 공부방아이들에게 봉사로 책읽어주기활동을 했었는데 갔다오는길에 많은 것을 마음으로 담아오곤 했었어요.읽어주기...몸 밖으로 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전하기만 하는것 같은데 그 온기가 나에게도 듣는이에게도 행복한 시간이 되더라구요.

프레이야 2009-03-31 21:12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미술엄마님^^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서로에게 행복한 시간이죠.
저도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도 없고 온전히 마음 쏟을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집에서 좀 멀어도 그래서 만날 달려가고 싶은가 봐요. 운전하며
가는 길에 커피 한 잔 사서 음악 들으며 때로는 부르며 가는 그 시간도 참 좋아요. 뿌듯^^
 

3월2일이면 고등학생이 될 희원이가 오늘 2박3일로 오리엔테이션 갔다. 학교와 기숙사 내에서 주로 하고 이튿날은 가까운 산 등반도 하는 걸로 되어있다. 좀 까탈스런 아이라 며칠 전부터 기숙사 들어갈 준비물 챙기느라 몇군데 왔다갔다 했고 어젯밤에는 마지막으로 옷가지랑 세면도구 등등을 챙기고 캐리어에 한 짐 싸두곤 그래도 뭔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지, 아이는 자꾸 히죽거리며 내 주위를 뱅뱅 돌았다. 감정 표현에 서툰 아이라 그 정도면 제 마음이 어느정도인지 내가 뻔히 안다. 그래서 꼭 안아주었다. 살찔까봐 덜 먹는 아이라 마른 듯한 어깨뼈가 내 팔에 닿았다. 키는 벌써 나보다 훌쩍 커설랑은. ^^

알람을 해두고 잤고 오늘 아침 난 그전에 눈이 뜨였다. 날이 흐린 것 같더니 기어이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차로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다. 입구에서 재학생 둘이 서서 안내를 맡고 있었다. 학교가 산 아래 높은 곳에 있어서 기숙사 있는 곳까지 올라가니까 공기가 무척 상쾌했다. 산허리는 윤무에 싸여 있었고 청명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했다. 여학생동은 올라가서 왼쪽, 그 앞에서 학번과 기숙사방의 번호를 확인하고 5층으로 올라갔다. 룸메이트는 나와 같은 성의 학생, 착해보였다. 나보다 연배가 높아보이는 그 엄마와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말도 했다.   

거울과 행거, 탁상달력, 의자, 휴지통, 크리넥스, 슬리퍼, 빗자루와 쓰레받기, 우선 떠오르는 대로 이런 게 빠진 물품이다. 입학식날 보충해야겠다. 밤에 난방은 잘 되어서 추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희원이가 누워잘 2층 침대의 2층에 누워보니까 하늘과 산, 구름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밤이면 별을 보다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침대까지 들어내고 걸레질 하고 있는 다른 방 엄마들도 있더구만 나와 그 엄마는 뭘 이러며 그냥 나왔다. 창틀에 벌레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는데 그거라도 처리해주고 올 걸 그랬다싶다. 나도 내키진 않지만 크악~ 날파리 한 마리에도 꺅~그러는 아인데..  

나도 고3때 기숙사 생활을 다섯 달 했다. 그때 처음 한 달간 화장실을 못 갔고 그때 얻은 만성변비증세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입맛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던지 모르겠다. 희원인 이 기회에 편식습관 고치고 뭐든 잘 먹고 체력 좀 기르면 좋겠다. 식사가 아주 좋다고 하니 안심이지만. 특별활동은 뭘로 선택할 건지 물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하는 걸로 할 거란다. 아유,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쩜 나랑 비슷한지..  아까 점자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기숙사 물품 반입시간 중 남은 시간에 뭐하고 있나싶어 전화했더니 밖에 나와 친구들이랑 어울려 얘기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적응이 빠른 건지.^^  점심 맛있게 많이 먹으라는 말만 했다. 은근 기대된다고 하며 간 아이, 앞으로 정말 멋지고 행복한 시간으로 소중히 가꿔가며 보내라고 마음으로 빌었다.

문득 오래전 기숙사의 내 룸메이트가 생각난다. 머리가 자주 아프다고 호소하며 어느 날인가는 "혜경아, 내 머리안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라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이마를 콕콕 찌르며 내게 말하던 그 애. 지금은 얼굴도 희미하고 목소리는 더욱 흐릿하다. 난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 그럴지도 몰라, 아니면 그럴리가... 어느 쪽이었던지 기억도 안 난다. 아무튼 주말에 집에 와선 엄마한테 그 아이의 말을 했던 기억은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머리 안에 벌레가 몇 마리 기어다니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나무집 2009-02-2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오리엔테이션을 갔군요.
아이 기숙사에 들어가면 많이 섭섭할 것 같아요.
희원이도 님을 많이 닮아가고 있군요.
딸들은 어쩜 엄마를 그렇게 닮는지..
우리 딸도 커가면서 점점 저를 닮는 듯해요.

프레이야 2009-02-25 20:17   좋아요 0 | URL
네, 기분이 좀 그래요.
절 닮은 구석도, 조금은 다른 구석도 있구요.^^
아이들 커가는 모습, 딸은 더 애틋하죠.

stella.K 2009-02-25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요즘엔 고등학교도 오리엔테이션을 하나 보죠?
아니면 희원이 다니는 학교만 그런 건가요?
기숙사 생활 하셨군요.
그 시절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그런 추억도 없고 뭘하며 살았는지...
저도 집 아니면 화장실 잘 못 가는데 힘들었겠군요.

프레이야 2009-02-25 23:45   좋아요 0 | URL
기숙생활하는 특목고라 그런가 봐요.^^
헉~ 오래전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잖아요, 스텔라님.ㅎㅎ
5월 기숙사 담장 붉디붉던 장미넝쿨이 생각나요.

stella.K 2009-02-26 10:51   좋아요 0 | URL
아이고, 딸내미가 공부를 아주 잘하는가 봅니다.^^

마노아 2009-02-2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숙사 생활이라니, 엄마 입장에선 걱정도 되고 섭섭할 것도 같아요. 근데 저는 막 부러운 거 있죠. ^^
아, 머리 속의 벌레라니... 회충이 머리로 간 건지도 몰라요. 마태님 소설에 보면 그런 얘기 나오잖아요ㅠ.ㅠ

프레이야 2009-02-25 23:42   좋아요 0 | URL
11시30분 취침이라 들어서 방금 전화해 봤더니 꺼져있네요.^^
마태님 소설, 기생충..ㅎㅎ
앗, 마노아님이랑 같은 항렬이야요.(썰렁~)


라로 2009-02-2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원인 잘 해낼것 같지만 엄마로서 마음이 짠 하시겠어요,,
우리 딸을 보낸 엄마들끼리 함 뭉치자고요~.ㅋㅋ
근데 혜경님도 기숙사생활을 하셨구나,,,젤 부러운것을,,,그시절엔 어떻하면
집에서 안 살 수 있나 생각 했던듯~ㅎㅎㅎ

프레이야 2009-02-25 23:44   좋아요 0 | URL
나비님 딸은 멀리 가서 더 그럴 거에요.
전 거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에요.
맞아요. 집에서 벗어나 살고싶단 생각을 하게 된 게 그때부터였지
싶어요. 진짜 함 뭉쳐야쥐~ 근데 요새 승연님은 통 안 보여요.ㅠㅠ

진주 2009-02-25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엄마 품을 벗어나기 시작하네요..^^
쑥 자란게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 아쉽기도 하고...

프레이야 2009-02-25 23:4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어릴 때부터도 어디 캠프나 수학여행 같은데 보내면
애가 워낙 담담해서 약간 서운하기도 했었는데 이제 정말 많이
컸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진주님.

책읽는나무 2009-02-26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도 입학이로군요.더군다나 기숙사!
맏딸이라 어딘가 모르게 듬직한 포스가 팍 느껴집니다.
제가 장녀라서 울친정엄마가 간간히 서운할때가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맏딸은 그렇잖아요.속으론 늘상 걱정하고,고민하지만 겉으론 표현하지 않는~~
님의 큰따님도 애써 자신을 다잡으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꺼에요.
그리고 엄마 걱정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잘 하리라 믿어요.

이젠 님도 고등학교 1학년 나이의 엄마가 되신거네요.축하드려요.^^
전 이제 초등1학년 엄마가 되었네요.ㅎㅎ

프레이야 2009-02-26 16:48   좋아요 0 | URL
책읽는나무님, 민이 초등학생 되죠? 축하드려요.^^
둥이들이랑 알콩달콩 좋은 엄마로 살아가시는 모습 늘 좋아보여요.
저도 맏딸이라 엄마와 참 많이 다투기도 했지요.
늘 마음과는 달리 그럴때가 많아요.

하늘바람 2009-02-2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어지는 마음이 어쩔까 생각하면 제가 다 마음아파요.
하지만 제 조카 이야기를 보면 학교에서 연주부인가? 거기서 바이오린을 했고 거기가 무조건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특기 활도을 하고 선후배간의 연계도 잘 되어 있고
외국 대학을 간 선배도 많아서 미래 설계도 아이가 주체적으로 하더군요.
아쉽지만 더 발전된 희원이가 되겠죠. 멋져요 희원이.


프레이야 2009-02-26 16:50   좋아요 0 | URL
주말마다 나올 건데요 뭐.ㅎㅎ 나중엔 데리러 가고 오고 하는게
귀찮아지지 않을까 살짝 우려가..
네, 정말 조카처럼 아이에게도 그런 값진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연주부도 좋겠네요.^^

전호인 2009-02-26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의 맘이랑 아이들이랑은 또 다를 겁니다. 희원이는 아마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을 은근히 즐기려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괜히 급한 것은 부모맘일지도요. 하지만 처음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생활해야 하는 희원이로서는 부모님에게 의지했었던 든든함이 사라진 공허함과 혼자서 잘해야지 하는 새로운 의지력이 샘솟고 있을 겁니다. 옛날 시골에서 처음 도회지(청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얼음장 같던 자취방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다 성장하면서 겪는 과정이려니 생각하시면 좀 편하실까요? 나중에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부쩍 자란 희원이가 기대됩니다.

프레이야 2009-02-26 16:53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격려와 팁 고맙습니다.
아이에게도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좀더 일찍 부모곁을 떠나 살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어요.

혜덕화 2009-02-2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들도 28일 기숙사 들어갑니다. 남자애라서 그런지 준비물이 뭔지도 관심도 없고 제 팬티와 수건을 잘 챙길지 걱정이네요.^^
아이들 데리고 수영장에 현장학습 가면, 여자아이들은 자기 것 잘 챙기는데, 남자아이들은 무엇이 제 것인줄도 모르더라구요. 대학생이라도 일상의 소소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초등 아이들과 같지 않을지......^^
특목고 생활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프레이야 2009-02-26 19:53   좋아요 0 | URL
혜덕화님 대학생인데요 아주 잘 해나갈 거고 오히려 더 자유스러워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서운하시죠? 저랑 동문이더군요, 아들이^^
격려 고맙습니다.^^

새초롬너구리 2009-02-2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따님은 친구들 때문에 조금 늦게 느끼겠지만 님은 바로 빈자리로 그리워하실것 같군요. 눈물을 조금만 흘리세요 ^^

프레이야 2009-02-27 17:31   좋아요 0 | URL
새로촘님, 오늘 낮에 데리고 나와 또 뭐 좀 필요한 것 사서 이제야
집에 들어왔어요. 아이도 좀 피곤해하는데, 처음이라 그렇겠죠.^^
눈물은 안 흘렸어용~~

BRINY 2009-02-2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전이라면 저도 그런 학교에 가고 싶었을 거 같아요. 그때는 그런 학교들도 거의 없었고, 있더쳐도 정보가 없었던 시대였지만요.

프레이야 2009-02-28 01:27   좋아요 0 | URL
브리니님도 집 떠나 있고 싶었군요.^^
아이가 오늘 돌아왔는데 기숙사생활이 불편하다고 좀 투정이네요.
앞으로 잘 적응하고 즐거운 생활을 해야할텐데 살짝 걱정이에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정미경의 소설 읽기는 겨우 두 번째다. 2002년도, 그녀의 비교적 초기작이라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데 세련되게 정제된 것보다 이런 느낌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그러나 거칠다는 느낌과는 다른 거침없다는 표현이 맞겠다.

 6편의 단편들 속 인물들은 삶의 주변부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상실감을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보다 그 속에 미치도록 침잠해서 그걸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깊이 내려앉았다가 제대로 바닥을 치고 올라올 것 같은 희망을 넌지시 암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도덕적 결말을 강요하거나 삶은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두 시간이면 끝나는 영화’와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삶은 다르고 그래서 ‘방금 물이 빠진 갯벌 위에 선 것처럼 자꾸만 내 발바닥을 지그시 잡아당기는 어떤 힘에서 발을 빼내는’ 사람의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지켜봐주는 식이다. 인물들은 소리 없이 울고 있고 분노하고 있고 삶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데 그 울분에 응대해 주는 이런 방식이 독자에게 오히려 힘이 될 수도 있다. 그점에 끌린다. 그리고 위안 받는다. 이야기마다 허를 찌르는 반전과 신산한 삶을 쓴물이 올라오도록 씹는 문장들에 매료된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

 여름이면 아무 곳에나 피어나는 나리꽃 주황빛의 방만함처럼 추억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바로미터가 되어줄 수 있을까. 주인공은 그렇다고 대답할 듯하다. 그러나 그를 협박하러 온 해결사는 하찮은 진실 따위엔 눈감고 힘을 확인하고자 하는 자의 바람대로 해주어버리라고 말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잖아. 안 그래요?”(p36)  이 단편은 사진찍기와 찍히기의 관계처럼 나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실의 오도를  ‘길지도 않은 생에 피사체와 용도가 다른 사진들을 무수히 찍어온' 한 남자의 비루한 타협을 통해 보여준다.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볼 뿐 대상의 진실과 속울음에 가까이 가본 적이 없는 우리가 안아야할 슬픔이다. 나와 대상 사이에 그놈의 기물이 있기 때문일까. 추억도 사진도 기만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호텔 유로 1203}

‘갈망과 특별함에 대한 집착과 사물에 대한 욕정도 뜨거울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보다 더.’(p50) 이 문장에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비애가 묻어난다. 사랑에도 직업에도 물질적인 면에서도 박탈감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 라디오작가가 등장한다. 말을 더듬지 않아도 늘 더듬는 인상을 주는 남자를 떠올리는 여자는 그녀의 생이 그렇게 더듬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가 더욱 싫었던 것일까. 명품에 중독되어 숨을 쉬듯 도벽을 일삼고 밤 아홉시에 약속된 호텔을 찾아가는 그녀는 ‘인간에 대한 집착이나 욕정’에 코웃음 친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알고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와 진짜 사랑을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녀, 세 번째 우려낸 차처럼 담백한 관계 같은 그 지점에서 멈추고 싶어 하는 그녀. 사람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아이러니한 초상에 욕망의 공허함이 배어있다. 스산하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2년 연애, 7년 결혼생활을 한 남자의 갑작스런 죽음 후 열정의 윤리로 살아온 그의 이면을 보게 된다면?  '전등사를 보지 못한 그날을 전등사 갔던 날로 이름 지었듯 뭔가가 빠져 있는 그대로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거지.' (p136)  배반감을 극복하고 그녀가 모자란 사랑을, 피투성이의 잔혹한 연인을, 받아들이는 결말을 통해 파도처럼 맨살을 난타하는 잔혹한 삶을 끌어안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라는 혼잣말은 삶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언제까지나 자신을 물어뜯으면서라도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삶에의 애착이다.

 최승자의 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가 떠올랐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오   (일부)

 여자는 살면서 일어날 수 있었던  ‘어떠한’ 일들에 하나하나 딜리트delete 키를 누르고 죽지 않을 정도의 가려움증까지 견뎌보려는 것이다. 긍정적 기운이 느껴지는 이야기이면서 신산한 바람이 동시에 느껴진다.

{성스러운 봄}

 어린 딸의 오랜 투병과 죽음으로 생의 노래를 잃고 우주의 빛을 잃고 가정의 단란함마저 잃은 남자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 삶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 그걸 또 늦게 깨닫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빛을 내는 경이로움이라는 것을(p168).' 우리가 힘겹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천상의 음률을 들을 수 있는 삶의 절정은 언제일까. 이미 지나갔을 수도 앞으로 올 수도 있겠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교과서적인 답을 해보지만  마음은 늘 모래를 씹는 듯 서걱거리고 마음속에 들어앉아있을 봄도 도무지 기지개를 켜지 않을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난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유리잔처럼 깨어져 어지럽게 흩어진 생에 대해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그에겐 다행일 것이다. 봄이면 꽃망울이 터지듯 그렇게 진즉에 터뜨려야 할 것을.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 대과거의 내적 오버랩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의 영화로 탄생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소 여인}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라는 명제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 우리들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들에 미량으로 들어있는 비소, 정확히는 비소 화합물. 그것의 음험한 작용과 중독성을 빌어 생을 모질게 사랑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일몰의 광경을 담담히 지켜보듯 존재의 소멸을 지켜보며, 소멸해가는 존재가 자신의 보살핌에 감읍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비로소 생의 허기를 채웠던 여자. 그녀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고 품고 쓰다듬어주는 남자 또한 생의 회의나 존재감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개미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생의 만복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먹어도먹어도 끝없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지도 모른다. 단지 어제의 허기를 기억의 회로에서 지우면서 오늘을 맞이할 수밖에. 비소 여인처럼, 누가 나를 용서해주지?, 스스로에게 용서의 말을 뇌까리며.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영화 ‘말리와 나’속의 존 그로건은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다른 존재로서 가족을 재발견했다. 19년이라는 길거나 짧은 생을 통해 빛나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단편에서는 어느 골목길의 ‘지독히 일상적인 삶의 풍경’을 영화를 공부하는 남자의 카메라를 통해 그린다. 인간 군상이 그리는 그 일상적이랄 수 있는 풍경이 과연 일상적일까. ‘하긴 누가 누구에게 이 생을 거짓 없이, 착각 없이, 헛된 사랑 없이, 백일몽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을까 (p232)' 일상을 견디는 힘은 비일상적인 걸 꿈꿀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싸구려 픽션보다 더한 굴곡을 이면에 감추고’ 빛이 감추어주는 이면의 것들에 눈감고 살아가기. 달처럼 우리 존재도 스스로는 빛날 수없는 것, 달이 둥글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때로 풍만한 만월이 되고 낙천적인 반달이 되고 예민한 그믐달도 되고 연약한 초승달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어 줄 수 있을까요?” 승우의 마지막 물음에 “모르겠어요”로 응대한 정은. 그녀가 질퍽하고 노곤한 갯벌에서 발을 빼고 한 편의 영화보다 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가볍지 않다.  그 어깨는 단단하고 때론 유연할 것이다. 정미경 소설이 그렇듯이. 그리고 그 속의 인물들처럼 생을 사랑하는 방법에 왕도는 없는지도 모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호인 2009-02-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풍기는 강렬함에 압도당하는 분위기입니다. 삶, 사랑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깊이 생각할 수록 고뇌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소재들이기도 하죠.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이 싯구에서는 사랑의 간절함, 처절한 소유욕까지 느끼게 되는 데....저만의 생각일까요?

프레이야 2009-02-26 17:0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그 제목이 참 강렬하다 느꼈는데 읽고보니
그게 그것이더군요.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실감도 크다고 하더군요.^^

hnine 2009-02-2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도서관에 갈때마다 찾아보는 책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인데 아직도 기회가 안 닿았어요. 이 작가 팬들이 참 많더군요. 부군이 그림 그리시는 김 병총님 맞지요? 혜경님 리뷰 읽고나니 기필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이야 2009-02-28 22:02   좋아요 0 | URL
네, 김병종님요^^
저도 어느분의 강추로 구입해서 뒤늦게 읽게 되었어요.
정미경, 상당히 매력적이더군요.

맥거핀 2009-03-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글 남기고 가셨었는데, 제가 좀 게을러 이제서야 들러봅니다.^^
정미경 작가님은 예전 이상문학상 수상작 <밤이여 나뉘어라>로 관심가졌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네요. 인간의 감정을 잘 드러내보였던 작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실 덧글 달 생각을 한 건 최승자 시인 시가 있어서요. 좋은 시지요.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났네요.

프레이야 2009-03-13 07:39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오셔서 반가워요.
영화 리뷰를 통해 알게 되어 기뻤는데요..^^
정미경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김추기경 어록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우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으며 인간적인 모습으로 신자들과 국민을 이끌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중)

“교회의 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1987년 7월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 폐지를 주장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평화신문 1996년 신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2003년 11월 서울대 초청강연 중)

“내가 제일 바보 같다.”(2007년 10월 모교인 동성중·고 100주년 기념전에서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리고 밑에 ‘바보야’라고 적은 자화상을 선보이며)  

 

------- 

2009년 2월 16일, 어른이 산소호흡기의 힘도 빌지 않으려하고 조용히 고통을 감내하며 영이별의 길로 들어가셨다. 유리관 속에 누우신 모습을 사진으로 보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실비 2009-02-17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먹먹합니다..

전호인 2009-02-17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사회의 여러방면에서 많은 족적을 남기셨지요.
이제 더이상 이 땅에 군사정권에 대항하거나 민주화운동을 통해 존경받는 인물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분을 편히 보내드리는 마음일 것 같아서요.

깐따삐야 2009-02-1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신부들이 있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인터뷰 한 장면이 찡하니 계속 마음에 남아요.

프레이야 2009-02-17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에 들어가려면 나를 밟고 가라고 하던 말씀도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살아야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도 못했다고 고해하던 모습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