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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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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님이 58년생일 줄 몰랐다. 바람의 딸로 내게 다가왔던 그녀는 젊음과 열정의 대명사로 기억되어 있어서 나는 그녀의 나이가 (좀 과장하여) 이십대 혹은 많아도 삼십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를 들어보고 책을 읽어보면 물리적 나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는, 그야말로 패기와 도전과 사랑으로 똘똘 뭉친 청춘으로 연상되기 때문이다. 얼마전 텔레비전 모 프로그램에 나와 세계여행에 관한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마음 속에 늘 세계지도를 품어라.'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세계지도와 지구본을 날마다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늘 새로운 도전에 흔쾌히 응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말대로 하느님의 부름이기도 하겠지만 가슴속에 늘 품고 있는 세계지도의 힘이 아닐까싶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이후 신간 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는 좀더 솔직담백한 그녀의 생각과 삶을 엿볼 수 있다. 사소한 이야기에서부터 좀더 거시적인 이야기까지 그녀가 발로 뛰어가며 몸으로 느꼈던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늘 그렇듯 그 울림이 강하다. 머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헌신하고 온 가슴으로 부대끼며 겪었던 일들과 구체적이고 놀라운 경험들이 두루 녹아있다. 그녀의 문장은 여전히 통통 튀고 쉽게 읽힌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퇴고에 퇴고를 마감시간 직전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놀랐다. 그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날밤을 새며 글을 지우고 또 지워가며 써서 마감시간을 꽉 채우고서야 보낸다고 한다. 역시 쉽게 읽히는 내공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정성과 성실성에 기반하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지도를 가슴에 품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고 말한 뜻을 이 책에서 알게 된다. 2007년 여름부터 시작한 세계시민학교의 별칭이 '지도 밖 행군단'이다. 세계시민학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세계시민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자율적인 프로그램이다.   

   
  나라는 지도, 나의 한계라는 지도, 사회의 통념과 편견이라는 지도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도 밖,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도 살피고 돌보라는 뜻이다. 나는 이 행군단의 단장이다. 영원한 단장이다. 해마다 새로 만나게 될 눈빛 반짝이는 내 아들딸 같은 행군단원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280쪽)
 
   
 

그녀가 두려워 하는 것은 나이 먹는 것이 아니라 '후지게 나이 먹는 것'이란다. 자신의 내부에 행복발전소를 두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찾아내어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고 하느님의 사랑에도 확신에 찬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끝내 벼랑 아래로 밀어버리는 하느님이지만 그때 그 순간 비로소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의 인용된 글귀는 잔잔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또한 종교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할 태도와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종교적 태도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횡행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 들려주듯 풀어놓은 사례들이 흥미진진하면서 충분히 의미있게 읽힌다.  배낭여행의 장점과 진정한 성공의 의미 그리고 구호요원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그들 옆에 있어주는 것)에 대한 겸허한 이야기도 충분히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높은 책장에 책이 빽빽한 서재에 퍼질러 앉아 책을 읽는 그녀의 사진이 보기 좋다. 권장도서로 그녀가 내미는 책들을 보면 그녀의 가치관과 삶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구호활동과 관련하여 엿볼 수 있다.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들이다. 

그녀의 매력을 들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이 책에 겸손하게 거의 모두 담겨있다. 9년 간의 월드비전 일을 일단 미루고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학교의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과정에 합격되어 올 9월부터 다시 학생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그녀! 그녀의 수많은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밝은 앞날을 기대한다. 등산을 좋아하는데 그곳엔 산이 적을 것이라 행복한 고민 중인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하나의 희망에너지가 된다.   

특히 그녀가 말하는 젊음의 실체에도 귀기울여볼 만하다. 이런 한비야님을 누구인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굶주리는 아이가 없는 세상,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갖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 청춘과 인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친다고 한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건 한마디로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이 꿈을 가슴에 가득 안고 바보들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룰 수는 없을지언정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아니, 포기해서는 안 되는 꿈이기 때문이다.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자. 

언제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돈키호테>의 내용이다.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말이지만 나는 이것이 젊음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이 젊음의 특권을 그냥 놓아버리겠다는 말인가, 여러분. (15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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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7-3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이 앞을 가려 추천을 안할 수 없구랴~.ㅠㅠ
한비야씨가 제 정곡을 찔렀어요,,,,요즘 제가 두려워 하는 정체는 아마도
후지게 나이먹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후져지기 싫은데,,,,발버둥만 치면 안되는데,,,그죠??

프레이야 2009-07-31 07:38   좋아요 0 | URL
후지게 나이먹지 말자! 저도 이말에 콕 찔렸어요.ㅎㅎ
팔랑나비님, 모두 잘 되었으니 오늘 한비야님 만나서 저도 그녀를 좋아한다고
전해주세용~~ 또 기쁨의 눈물 흘리는 거 아닌지 몰라 ㅋㅋ

순오기 2009-07-3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녀를 만나러 출발하기 전에 리뷰를 봐서 행복해요.
다녀올게요~` ^^

프레이야 2009-07-31 18:55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잘 다녀오세요.
멋진 만남이 될 것 같아요.
나비님이랑 뜨겁게 포옹도 하시구요.ㅎㅎ

2009-08-04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8-04 22:2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 장면이 눈에 그려지네요.
전국구 오기언니^^ 땡스투 고마워요.

최상철 2009-07-3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58년생이라니...
읽는다하면서도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책이에요.
리뷰 보고 나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프레이야 2009-07-31 18:56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놀랐어요.
상철님도 읽으면 아주 재미있고 뜻있을 거에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도 권해요.

후애(厚愛) 2009-07-3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중에 기회가 오면 꼭 읽고 싶어요.^^
이래서 빨리 나가야 하는데... ㅠㅠ
이곳에 있으면 읽고 싶은 책들을 평생 못 읽을 것 같아요. ㅎㅎㅎ
우선 리스트에 담아 두어야겠어요.^^

프레이야 2009-07-31 18:58   좋아요 0 | URL
후애님, 외국 사시면 우리말 책이 그립다고 하더군요.^^
우선 담아두신 것들이 무척 많겠어요.

라로 2009-08-0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책을 고르라시니 두권 골랐습니다~.(에헤헤 좋아라~.ㅎㅎ)
하나는 고종석의 <어루만지다> 아주 좋아하는 책인데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서
마침 주문하려고 했던거와 스콧 스톨의 <자전거로 나를 세운다>에요.
최근에 나온 신간인데 보관함에 담아 놓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뻔뻔하게 골라도 되는건지????(헤벌레 하고 있는 중~ㅎㅎㅎㅎㅎㅎ)

프레이야 2009-08-02 23:24   좋아요 0 | URL
팔랑나비님이 헤벌헤 하면
전 헤벌쭉이라우~ 기다려용~

세실 2009-08-02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행복발전소 닮고 싶네요. 당장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좋은 기운 팍팍 받고 싶어요. 적어도 후지게 나이먹는 것은 하지 말아야 겠죠.

프레이야 2009-08-02 23:25   좋아요 0 | URL
세실님의 기운도 한비야 못지않은 걸요.
행복발전소의 기운 말에요.^^
읽어보시면 만족하실거에요.

2009-08-03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3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3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3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9-08-0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 이룰 수는 없어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꿈.
그런 꿈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현실과 타협하다보면 꿈도 희망도 쉽게 사라지는 것 같아요.
사실 현실은 핑계죠. 열정을 갖거나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이죠.
현호가 이제 7개월이 되어가고 조금 여유가 생기다보니..
또 제 갈길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픈 요즘이예요.
다시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ㅋㅋ

프레이야 2009-08-04 22:2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열정을 이어나가는 힘이 부족한가 싶기도 하구요.
현호가 7개월이면 이제 정말 예쁠 때에요.
그때쯤의 제가 생각나네요. 전 뭘 했나싶기도하고..
20대초반의 그 마음으로 돌아간 기분이라니 참 좋으네요.^^
찬찬히 천천히, 현실과 타협 아닌 협상을 하며 장미님의 꿈 잘 이루시기 바라요.
 
<도가니>를 리뷰해주세요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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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인공 강인호는 현실적인 인물에 가깝다. 적당한 지식인, 적당한 패배자, 적당한 순정파, 적당한 열성파. '적당한'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모호하지만 적확한 의미가 우리들에게도 잘 어울리는 게 아닐까. 적당히 강하고 적당히 약한,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어리석은 강인호. 그의 삶은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그가 주체적으로 이끌어왔다기보다 명명하기 어려운 거대하고 애매한 채찍에 몰려 이끌려왔다. 그가 살아온 세상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휘두르는, 받아치려고 해도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내몰려온 것처럼 보인다. 어쩌다보니 집요한 사랑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는 이별을 경험하고, 전교조 입회 서류에는 도장을 찍었을 뿐이고, 사업에도 실패한, 이제는 아내와 어린 딸까지 생긴 그에게,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를 '무진'은 여태까지 살아온 세상이 확대 혹은 축소된 무서운 공간이다.

 안개! 그것은 자신의 실체를 가리고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다가 어디선가 나타나 뒤통수를 갈기는 퍽치기 같은 것! 강인호가 무진에 와서 "상식 밖의" 엄청난 사건에 서서히 휘말리기 시작했다고 느낀 어느 날 밤, 거리에서 당한 ‘퍽치기’와 같은 것이었다. 정의에 대한 신념의 배신이라기보다는 삶 그 자체의 배신이다. 정혜신 정신과 박사가 우리 시대 ‘배신’에 비유한 퍽치기는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어리숙한 기대에서 출발한, 다분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판정이다. 그것은 겉보기엔 아름답고 공명정대한 무진시로 상징된, 안개 즉 거대폭력이 휘두른 예정된 강타였다. 퍽치기를 당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소소한 것들(신분증이 들었을 지갑 등)을 부지불식간에 빼앗긴 그날 밤 강인호의 뇌리에 무진의 거리는 ‘악몽보다 섬뜩한 것’으로 박힌다. 그 불길한 예감이 빗나갔으면 좋으련만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소설은 집요하게 그 예감을 파고든다. 

 청각장애 학생들의 학교, 자애학원에 기간제교사로 부임한 인호는 자끄 프레베르의 '밤의 파리'로 첫수업을 시작한다. 아직은 로맨틱한 감성과 순수한(순진한) 열성으로 접근하는 젊은 남자 선생이다.

 

   
  어둠속에서 세 개비의 성냥에 불을 붙인다. / 첫번째 성냥은 너의 얼굴을 보려고 / 두번째 성냥은 너의 두 눈을 보려고/ 마지막 성냥은 너의 입을 보려고 / 그리고 오는 송두리째 어둠을 / 너를 내 품에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 (29쪽)
 
   

 

 전편에 깔리는 안개의 이미지는 공간적 배경이자 주제를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안개는 다시 '어둠'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그것은 소리 이외에는 어떠한 감각도 허용하지 않는 악의 기제로 작용한다. 혼을 읽을 수 있는 얼굴, 공포와 소망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눈, 정의와 진실을 읽을 수 있는 입을 어둠은 삼켜버린다. 단지 소리만이 존재하는 어둠속에서 무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소리마저도 들을 수 없다. 아니 들려도 귀를 막거나 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송두리째 어둠을 안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도가니>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을 엄연한 진실로 기억하고, 불감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들의 소식을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여기 ‘그들’에는 인권의 사각지대를 사는 그들뿐만 아니라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용감한 대개의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 또한 세상의 달콤하고 빛나는 것들을 독점하고 약자를 유린하는 것에 죄책감도 부채감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포함된다.  

 

 분노의 도가니, 광란의 도가니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인호는 결국 욕망이 꿈틀대는 불볕 도시에서 잠깐의 그늘을 찾는 ‘하얀 와이셔츠’들로 중첩된다. 작가는 이들을 이렇게 연민한다.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끝끝내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할 사람들”(291쪽)

 참여정부 때 5년형을 받은 이 실제사건(광주 인화학교 사건)은 집행유예로 판정된다. 그들 가진 것 많은 파렴치범의 인권과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자들의 인권은 다른 것인가. 최근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장의 사임사를 읽고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이 왜 소중한 것인지, 인권이란 게 특히 왜 그들을 위해 존재해야하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일부를 옮긴다. 

   
  모든 국가기관을 대리하여, 약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대해 고언을 제공하는 일,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강자와 다수자에게 생길지 모르는 약간의 불편을 무릅쓰고라도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국가. 인권국가, 법치국가의 본령입니다. 힘없는 자의 분노를 위무하고, 가난한 사람의 한숨과 눈물을 담아내는 일에 인색한 정부는 올바른 정부가 아닙니다. 흔히 소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다수자의 인권이 더욱 중요하다고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인권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부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기재가 다수자와 강자의 관점과 이해를 옹호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인간세상의 자연적 속성이기에 인권의 본질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은 왜 당하고만 있었느냐, 대항하거나 피할 수 없었느냐, 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 말은 그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자들을 위해 인권의 '권력'이 필요한 것이다.

 

<도가니>는 절망 속에 우리를 두지 않는다. 희망을 가지라 하고 우리들 존재의 존귀함을 강조한다. 이는 숨막힐 듯 전편에 흐르는 안개와 어둠의 이미지 속에서도 언뜻언뜻 그러나 분명히 보이는 "빛"의 존재를 자주 떠올려준 작가의 의도에서 읽힌다. 이 일이 있고 “우리도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하는 가엾은 장애우 민수의 말, “그것으로도 우리가 완전히 진 건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당찬 여성 서유진의 자신감은 감히 성냥불 같은 가느다란 빛, 그런 희망을 놓지 말라고 말한다. 빛의 이미지는 전편에 흐르는 어둠과 안개의 공간에서도 불현듯 현시되는 빛의 존재를 감각하는 문장들에서 살아난다. 이는 촛불축제를 떠올려 주고 '홀더!'라는 신조어로 또렷하다. “홀로 서고 더불어 살기”. 이 말로 작가는 개인의 강인한 생명력과 더불어 군중의 강력한 연대를 강조한다. 공감하고 연민하고 나아가 함께 일어서라고 권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후 작가의 또다른 변화와 힘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진실을 감추고 덮으려는 성향이 있다. 진실은 대개 상당한 불편을 주고 진실을 인식하기에는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진실’의 진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이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165쪽)
 
   

 

<도가니>는 살벌한 안개의 기운처럼 거대 음모와 협잡으로 이루어진 기득권층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광란의 도가니를 날것으로 보여준다. 문장은 때로는 건조하고 대개는 치열하게 내달린다. 강인호를 찾아 무진에 온 아내와의 하룻밤 묘사는 모래바람이 이는 듯 메마르다. 공지영의 문장으로 이렇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무하다. 그날 밤, 가장 극렬한 갈등으로 내면의 지옥을 겪었을 인호의 심리가 그려진듯. 집필을 위해 실제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없이 분노했을 작가자신과 그 도가니 속에서 ‘앗 뜨거워’ 하면서도 그럭저럭 또는 무기력하게 군중속에 숨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박차가 느껴진다. 미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강인호’들, 그들의 근황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에요,라고 장경사에게 일갈한 서유진 못지않게 사는 일이 힘겨운 강인호의 안녕을 비는 것이다. 

 덧: 장애인을 위한 예산을 대폭 줄였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말로만 하는 복지가 아니라 진정 그들을 위한 복지가 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생각해야한다. 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 잘못된 상식이나 지식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공공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청각장애가 있어도 그 정도가 다 다르고 음파에 따라 들리는 음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게 있다는 사실 등, 똑똑한 여학생 연두의 이야기와 그의 아버지가 하는 말에 귀담을 필요가 있다. 연두가 법정에서 조성모의 노래에 반응하는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뒤의 일들은 어처구니 없는 쪽으로 선회된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이들은 한가지 장애만이 아니라 지적장애나 지극한 가난, 부모의 장애와 무능력 등 이중 삼중의 고통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스스로 일어설 자산도 애초에 결핍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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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from 처녀자리의 책방 2011-09-24 23:32 
    도가니 / 황동혁 / 2011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튼튼한 줄기를 얻고 /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바람은 오늘도 분다 / 수만의 잎은 제각기 /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도 하나 /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 자기를 헤집고 있다//피하지 마라 / 빈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전문)오규원님의 이 시
 
 
꿈꾸는섬 2009-07-10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리뷰에요. 공지영의 소설인데도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었는데 이 리뷰를 보고 나니까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드네요.^^

프레이야 2009-07-11 11:48   좋아요 0 | URL
너무 적나라하게 가슴 아픈 장면들이 있어 섬님처럼 여린 분은 어떨지 모르겠어요.ㅜㅜ
공지영이 더 부드러우면서도 내면은 더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꿈꾸는섬 2009-07-16 22:38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여린 사람으로 비쳐지는군요.ㅎㅎ 몰랐어요. 하지만 애 둘이나 낳은 아줌마가 얼마나 여릴까요?ㅎㅎㅎ 그래도 기분은 좋은데요.^^

순오기 2009-07-1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약주문으로 사놓고 아직 손도 못댔어요.
광주인화학교 사건~~ 많이들 알지요.ㅜㅜ

프레이야 2009-07-11 01: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ㅜㅜ
이곳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몇 해 전 있었어요.
이중삼중의 고통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 너무 가혹해요.

비로그인 2009-07-1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이 턱, 막히는 리뷰에요. 프레이야님. 단지 그냥 리뷰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으로 다가오는.

주말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아이는 수영장 생일파티가고 토욜에도 일하는 남편은 아직 안온지라 심심해요..

프레이야 2009-07-11 19:41   좋아요 0 | URL
여긴 흐리고 빗방울이 간혹 내려요. 그곳도 그런가요?
조용한 토욜 보내고 계셨군요.
지금쯤은 다들 돌아와 단란한 시간 보내고 계시겠죠.^^
내일 전 어느 노문우의 시비제막식에 가야해요. 울산으로..
비가 와도 가야할 것 같은데 비오면 좀 불편해도 더 운치 있으려나요.^^
만치님 만치님 예쁜 만치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용~~~

비로그인 2009-07-11 22:32   좋아요 0 | URL
오후까지는 흐리기만 하더니 저녁이 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네요.
비오는 울산에서 시비제막이라니.. 멋져요. 비가 와도 잘 다녀오세요.
앗 그리고 부산 사진! 드디어 보냈어요 ^^; 사진보니까 다들 보고싶어요 헤헤.

프레이야 2009-07-12 19:12   좋아요 0 | URL
빗방울이 뿌리다 걷히다 진흙도 밟고 우산 쓰고 잘 다녀왔어요.^^
사진 넘넘 고마워요. 그거 보면서 또다시 헤벌쭉~ 그랬다우~

다락방 2009-07-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답하고 화가나서 눈물이 나는 그런 소설이지요.

프레이야 2009-07-12 19:14   좋아요 0 | URL
눈앞이 안 보이고 갑갑한 상황이라 답답하고 강인호가 '엎어치기'를 당할 땐
그 어이없음에 더욱 분노하게 되더군요. 그럼에도 눈물은 차라리 나지않고
차분해지고 냉정해지는 것 같아요. 결말처럼요.

네꼬 2009-07-1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음이 작아서 읽기 어려울 거예요. -_- 아니나 다를까 프레이야님의 (이토록 좋은) 리뷰를 읽고 나니 책의 분위기가 훤히 잡혀서 더욱. (일곱 번째 추천이 저예요)

프레이야 2009-07-12 19:27   좋아요 0 | URL
네꼬님은 정말 마음이 여려서 어려울지 몰라요.
입에 담기 힘든 증언을 들어야하니까요. 그것도 수화로요..
추천, 씽긋~

같은하늘 2009-07-1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엽서를 준 다는 얘기에 덥썩 예약주문 해놓고 못 보고 있는데...
프에이야님의 리뷰를 보니 책을 보기가 힘들어질 것 같다는...ㅜㅜ

프레이야 2009-07-13 11:36   좋아요 0 | URL
같은하늘님, 별로 그렇지 않을 거에요^^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어젯밤 여긴 천둥번개 요란했어요. 지금도 장맛비가..
 
<헤세의 사랑>을 리뷰해주세요
헤세의 사랑 -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헤르만 헤세 : 사랑, 예술 그리고 인생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켈스 엮음, 이재원 옮김 / 그책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헤르만 헤세는 자신을 시인이고 화가이며 정원사라고 불렀다. 그는 비평가들에게 오직 들의 범신론자, 숲의 범신론자, 초원의 범신론자로 불리길 원했다. 헤세의 예술이 인생과 문학의 정신을 노래했듯 헤세의 사랑은 범신론적인 사랑의 노래다. 머무르지 않고 부드럽게 흐르는 사랑, 감성과 지성이 조화로운 사랑, 고난을 승화하고 피어난 깊고 넓은 사랑이다. 그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 사랑은 자신과 하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하는 이유다. 이웃을 먼저 사랑하라는 '계율'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말한다. 자기혐오증은 지독한 이기주의의 다른 말이고 그것은 삶을, 사람을, 예술을 사랑하지 못하는 끔찍한 병증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어 보인다.  

어느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어느 프레임에도 갖히지 않은 그는 자유혼과 예술혼을 억압하는 어떠한 것에도 굴하지 않았다.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시를 쓰며 견딘 청춘의 시절을 거쳐 불운한 결혼 생활과 아들의 죽음, 사랑과 결혼의 실패와 극복 등, 그림을 그리며 그 모든 고뇌를 승화시킨 그의 성숙된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헤세의 사랑>에 묶여있다. 아홉살 연상의 여인과의 첫 결혼생활에서 느낀 어려움을 적은 짧은 글과 스무살 연하의 여인과 두번째로 결혼하여 짧은 인연을 끝낸, 나이 많은 남자로서의 자책이 담긴 솔직한 글이 좀더 인간적으로 읽혔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생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글들은, 짧게 모아두었지만 충분히 그의 인생관을 드러내어주는 소중한 글귀들이다.

<헤세의 예술>처럼 이 책에도 헤세의 시 몇 수가 들어있다. 음악을 '예술의 영혼'이라고 부른 그는 대위법에 심취하여 스스로 건축에 비유한 고전음악을 흠모했다. 그의 시는 다분히 음악적이다. 그것은 내면의 음률과 유희정신으로서의 희열을 잃지않고 있다. 모자라는 시라도 훌륭한 작곡이 살려준다고 생각한 그의 시가 실제로 음악으로 탄생한 것들이 많다. 문학도 음악에 '속'하는 것으로 본 듯한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글들이 별도의 꼭지로 이 책에 모여있다. '음악, 심오한 치유의 마술'이라는 장을 별도로 하여둔 것이 눈에 띈다. 헤세의 사랑에는 음악 즉 예술의 영혼이 크게 자리했던 것이다. 또한 삶을, 사람을, 예술을 사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노련한 생의 지혜, 즉 무엇보다 우선인 유머의 가치에 대해서는 '명랑함은 사랑 속에 있다'라는 장을 마련하여 말한다. 인생 후반에 얻을 수 있는 혜안이었다. 삶을 얼마나 진지한 명랑함을 유지하며 사랑하려했는지 느낄 수 있다.  

첫장 '인생은 사랑으로 의미를 가지리'에서 읽을 수 있는 헤세의 사랑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와 참사랑에 대한 진정어린 고백이다. 그는 사랑을 욕망하고 사랑의 능력에 헌신하기를 동경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인용한 글에서는 우정의 에로스적 측면을 보여줘 산도르 마라이의 글귀 '모든 관계에는 에로스가 들어있다'가 떠오른다. 그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변질되거나 왜곡되는 감정을 경계한다. - '사랑과 욕망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은 현명해진 욕망으로서, 사랑은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려고 할 뿐이다.'(20쪽) - 이는 1918년 아들 마르틴의 일기 중에서 나온 글귀다. 아들과 서신으로 주고받았을 시적인 글귀들이 여기 실린 것 이외에도 얼마나 많았을까. 예술혼을 좀 먹는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가 엿보이는 글귀도 있지만 아버지로서 아들과 나눈 대화를 상상해보면 멋지지 않은가. 또 아래 글은 위트가 느껴진다. 

사람들이 아무리 다른 이유를 내세운다고 해도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은 오로지 여자 때문에 하게 된다. 

- <빈둥거린 날> 1926년 

사랑과 예술의 동질성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는 글도 마음에 들어온다. 예술에서도 개성을 존중한 그는 '개성 없이는 사랑이, 정말로 깊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모방하고 위조할 수 있지만 사랑만은 그럴 수가 없다. 사랑은 훔칠 수 없으며 모방할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자신을 완전히 줄 줄 아는 마음속에서만 산다. 그것은 모든 예술의 원천이다. 

- 비평 <호들러의 작품> 1915년 7월 

그가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애정으로 정원일을 하듯 아꼈는가는 셋째 장 '행복이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타고난 방랑감각을 사랑했고 진정한 방랑자로서 살아가길 원했다. 방랑자는 모든 즐거움이 덧없다는 것, 한 때뿐이라는 걸 알기에 잃어버린 것을 오래 바라보고 있지 않고, 좋다고 생각한 그곳에 바로 뿌리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고요하며 진지하게 즐거운, 그리고 언제나 작별을 고할 수 있는 방랑 감각"을 예찬한다. 그는 자신을 '불성실과 변화와 환상의 숭배자'라고 칭하고 사랑도 고여있는 물이 되지 않도록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우리의 사랑이 고착되고 성실과 미덕이 될 때, 그것은 내게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방랑 1918/19, 55쪽)  이는 '사랑할 때 가능한 것들'이란 장에 실려있는 글귀다.  

헤세의 사랑은 헤세의 행복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그의 행복론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삶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는, 삶의 기술'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기애에서 출발하여 형제애를 거쳐 박애까지 다양한 사랑의 기술을 통찰했듯 그는 행복과 사랑의 기술을 말하며 결국 "삶의 기술"을 말한다. 그의 글을 보면 삶의 풍요는 영혼의 풍요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가 육체의 행복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욕망과 죄의식을 건져올려 우리 의식 내에서 영혼의 교류가 생겨나야 건강하고 행복한 영혼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글귀는 인상적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기 쉽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하던가. '너의 존재를 작고 깊은 호수라고 상상해 보라. 표면은 의식이다.'로 시작하는 문장인데, 삶을 비유적으로 보듯, 이 또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유의 깊이가 그윽하다.  

(중략)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번도 밝은 표면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래에서 썩어가고 고통스러워하는 수천수만 가지 것들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썩어가고 고통을 당한다는 이유로 그것들은 계속해서 영혼에 의해 거부당하며 의심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모든 도덕의 의미이다. - 해롭다고 인식된 것은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해롭지도 이롭지도 않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자신의 것이지만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이 위로 올라오게 되면 불행이 있을 것이라고 도덕은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행복이 있을 것이다!  

- <묵상> 1918/1919년 

   

이 책에는 새기고 싶고 다시 여러번 생각하게 하는 글귀들이 많다. 아무 장이나 펼쳐 읽어도 좋고 아무 데서나 펼쳐 읽어도 좋다. 하드커버이지만 책의 크기는 작고 가벼워 가방안에 넣어다니기도 좋다. 한두 줄의 글귀에도 잔잔한 감동이 오고 대가의 깊은 눈과 귀와 입이 느껴진다. 사랑은 성숙된 인간의 이상이다,라는 글귀 또한 반전정신과 관련하여 그 모든 불화와 갈등에 대한 해답으로 읽힌다.

이 책의 표지에 부제가 이렇게 씌어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사랑함으로 인해 치러야하는 슬픔과 괴로움과 외로움 또한 더 높은 가치를 위한 것으로 승화시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의 열정이 살아있다면 그것이 세상의 고귀한 일에 쓰임으로서 사랑의 가치가 드높아진다는 내용의 글귀가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흔히 말하듯, 행복이 정말 삶의 목표일까. 행복하기 위해 산다면, 다음 글귀는 행복이라는 철없는 꽃송이 앞에서 또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하는가.  

인간은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행복을 오랫동안 견디지는 못합니다.  

- 1946년의 신년인사 

불행은 우리가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행복이 된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조르주 상드의 서신 교환>에 대한 비평 1919년 11월   

 

 덧 : 표지를 떼어버리면 훨씬 좋다. 자주색 하드커버에 세밀화로 그린 식물 한 가지가 흑백으로 그려져 있다. 저 위의 표지를 걷어내면 보인다. <헤세의예술>도 마찬가지로 표지를 걷어내면 파란 바탕에 흑백으로 그린 수동타자기가 보이는데 그게 훨씬 마음에 든다. 표지그림이 소중한 글귀에 비해 값싸보였기 때문이다. 오자가 하나 있는 것도 조금 걸린다. 그럼에도 별 다섯을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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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도서로 별 다섯개 짜리 책을 받으시다니 좋으시겠구만요. 생각할거리를 많이 주는 책이네요.
아프지말고 병원 다녀오세요..

프레이야 2009-07-07 09:30   좋아요 0 | URL
만치님 여기 오늘 장맛비 퍼붓고 있어요. 빗소리가 시원해요.
병원 좀 있다 가봐야겠어요. 흑흑..

2009-07-0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7-07 19: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9-07-0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은 오로지 여자 때문에 하게 된다.
맞아요.. 하하


프레이야 2009-07-07 19:13   좋아요 0 | URL
한사님도 동감하시는군요.^^
 
헤르만 헤세 展을 보고
<헤세의 예술>을 리뷰해주세요
헤세의 예술 - 예술은 영혼의 언어이다 헤르만 헤세 : 사랑, 예술 그리고 인생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켈스 엮음, 이재원 옮김 / 그책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년 전 헤르만헤세展에서 보았던 오래된 수동타자기 생각이 난다. 헤세가 사용했던 것으로 유리상자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책의 표지에도 수동 타자기 한 대가 덩그러니 그려져있다. 그 때 전시장에서 본 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수동타자기 특유의 묘한 향수를 불러준다. 폴 오스터의 타자기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타닥타닥 타다닥.. 한 자 한 자 글자를 불러오며 자신만의 언어를 조합, 재생산해 내는 작업. 작가로 산다는 것, 나아가 예술가로 산다는 것, 그 정신의 근간을 읽을 수 있는 책이 <헤세의 예술>이다. 헤세가 그의 작품을 비롯해 지인과 나눈 편지, 독자와 아들, 비평이나 에세이 등에서 밝힌 예술관의 정수를 엮어서 나온 책이다. 엮은이 폴커 미헬스는 독문학을 가르치고 출판일을 하며 헤세 전집 20권을 최초로 발간했을 정도의 헤세 매니아인데 원래 전공은 의학과 심리학이다. 독특한 이력이다.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는 독일의 시인이지 소설가이다. 나치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매국노라는 지탄까지 받고 그는 스위스 국적을 딴다. 그의 글은 오랜 방황과 고통의 과정을 겪고 탄생된 것들이다.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모든 강제와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중퇴하고 이런저런 힘든 일들에 몸을 굴리고 자살 미수의 경험도 있다. 정신과적인 심리치료까지 받고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갱생한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사상가다운 면모를 보인다. 불행한 가정생활과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40세에 시작한 수채화 그리기를 죽을 때까지 하며 그것으로 생의 기쁨에 매달렸다. 정원을 가꾸고 수채화를 그리는 깡마른 노년의 머리에는 밀짚모자가, 안경 너머 깊은 눈은 노인의 혜안으로 번득이는 것 같았다. <정원일의 즐거움>에서 본 인상이다. 헤세전에서 본 그의 정원 입구에는 '방문객 사절입니다'라는 푯말이 서있었는데 그게 참 인상적이었다. 수채화에도 사람을 일절 그리지 않아 사람에 대한 불신을 표현했듯이. 그런대도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며 흙과 꽃과 나비와 함께 하려는 노인의 얼굴이 오히려 넉넉해 보였다.  그때 전시장에서 헤세 수채화가 든 액자 두 개와 노벨문학상 수상작 <유리알 유희>를 사왔다.

이 책은 크게 다섯 장으로 나뉘어 헤세의 글귀를 모아둔다. 각 장마다 제목을 두었는데 내용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 예술의 정의 또는 기능과 가치, 예술가 정신, 작가 정신, 작가가 쓰는 언어의 중요성, 고독의 유희로서의 詩-시의 본질. 그는 이성과 감성, 지성과 열정, 온건과 강경한 태도에 있어서 균형 잡힌 저울을 지녔다는 생각이 드는 글귀들을 만날 수 있다.   

첫째 장 [예술은 사랑과 위안이다] 에서 그는 예술에서 새로운 것을 환영하지만 '도덕적인 것, 즉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서는 유행과 개혁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는 정신적인 작업을 '오직 가슴으로만'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성이 개입되지 않은 예술은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구체성에 천착할수록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다가가게 되고 치열한 관찰력이 깊고 풍부한 이미지들을 보여준다는 아래 글귀가 마음에 들어온다. 

   
 

예술가가 진실하고 솔직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리고 단 한 번뿐이고 덧없는 것을 겸손하고 충실하게 모방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작품에서는 영속적인 것이 표현되거나 예감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상반신을 더욱 충실하고 비슷하게 묘사하면 할수록, 다시 말해 덜 이상화하고 덜 일반화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 묘사된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관찰자에게 보편적인 것, 즉 인간 형제의 이미지, 살아있는 사람, 고통을 겪는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이미지를 더 많이 보여줍니다. 

- 엘스 부허러에게 보낸 편지, 1931년 4월 17일 (70쪽)

 
   

 

둘째 장 [예술가 정신]에서는 '문학의 정신'이라고 바꿔 말해도 되는 글귀들이 함께 있다. 그는 예술은 인류 전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과정이었던 승화의 과정으로 역할할 때 바람직하다고 밝힌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에게도 승화란 '충동의 억압'이었다고 말하며 '인간이 상황에 따라 자신의 충동과 이기적인 것을 초월하고, 정신적이며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목표에 봉사하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 정신을 향한 헌신, 그리고 성자와 순교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세계사에서 얻는 긍정적인 힘이라 했다. 그러나 예술가적인 충동과 기질은 억압되어서는 안 되고 고무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C.G. 융(헤세는 융의 제자에게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재능있는 사람이 자기가 지닌 충동의 힘으로 예술을 발전시킬 때 나는 그의 실존과 행동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가 어쩌면 개인으로서는 병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정신분석은 예술가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위험합니다." (89쪽)  더구나 완소 문장 하나, 감정, 부드러운 영혼의 떨림과 가벼운 흥분, 이것이 나의 지참금이며 그것을 가지고 나의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103쪽) 

세째 장 [작가로 산다는 것]에서는 아래 글귀가 소중하다. 

   
 

이 시대는 시대의 목표와 이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며, 저항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이다. 작가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남아 있으려면 성공에 취한 세계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영혼의 종이고 대변자이며 기사인 것이 작가의 유일한 과제이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고독과 고통의 선고를 받은 것으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 (중략)  이에 반해 책 읽는 부르주아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우글거린다. 이들은 재능과 미감으로 언제나 부르주아가 의도하는 이상과 목표에 따라 오늘은 전쟁을, 내일은 평화를 미화한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 중 많은 사람들은 지옥의 공간 속에서 침묵한 채 파멸해간다. 

- <작가의 고백> 1927년

 
   

  

그는 삶에 대한 눈과 귀를 결여한 사람이 작가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쓰며 삶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그것을 정확한 자신만의 표현으로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리를 얻으려고' 글을 쓰라고 권한다. 그러면 아름다움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문학이 어떤 목적에 봉사하지 않아야 하며, 개인의 기억을 드러냄으로써 고통의 해소보다는 고통의 강화를 위해 글을 쓰라고. 개성도 중요하지만 성실함과 책임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귀들도 마음에 들어온다. 부단한 노력과 실천의 문제일 것이다. 

네째 장 [언어의 마법]에서는 특히 이 글귀가 허를 찌른다.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언어를 육성하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것, 즉 진정으로 강하게 체험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동생 마룰라에게 보낸 편지(1928년 11월)에서 읽혔다. 강렬한 체험, 온몸을 흔들고 파고드는 아찔한 체험. 그것은 기억의 혼란, 인식의 파격, 망상으로부터의 이탈이 이뤄지는 순간이 아닐까. 진정한 언어란 진정한 체험의 표현일 경우에 해당되는 것. 초개인적인 경험, 바늘로 바위를 뚫듯 천착해들어가는 강렬하고 섬세한 경험으로 가득 한 언어이어야 아름답다는 말이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 아니 소망을 가져본다.

실제로 헤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 많다. 2년 전 헤세 전시장에서 그의 시가 음악으로 탄생한 오래된 LP재킷들을 보았다. 그는 시, 특히 서정시의 예찬을 이렇게 한다.  이것은 다섯 째 장 [시, 고독의 유희]에 있다.

   
 

모든 서정시는 개별적인 자아 속에 세계가 반영된 것이며, 세계에 대한 자아의 대답이며 탄식이고 숙고이자 완전하게 의식된 고독의 유희이다.  

- 비평 <헤르만 헤세가 추천하다>  1933년 3월

 
   

'시는 음악이며, 시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고 '시 속에는 상당한 양의 독이 달라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 그것은 고통을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고통은 매우 친절하게도 서투른 시행을 통해 흘러 나가 사라진다'고 썼다. 1896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19세 때의 글귀이다. 시를 쓰며 고민과 방황을 했던 청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1938년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詩作의 엄준한 책임감과 함께 고통의 작업이라는 의미가 읽히는 글귀가 있다. "전적으로 감정에서 우러나서 시를 쓴다는 것은 망상입니다......오히려 모든 것이 수많은 선택과 노동을 통해, 매우 엄격한 집중 속에서, 그리고 종종 기존의 법칙과 형식에 대한 극히 고통스러운 점검을 통해 써집니다." (194쪽) 

1962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예술가로서 작가로서 격동과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헤세를 짧은 글에서 두루 읽을 수 있다. 그는 예술가적 영감과 재능 못지않게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부단한 연마로 형식을 가다듬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술은 무엇보다 사랑과 위안이면서 내면을 파고들어 우주의 근원에 닿는 것이어야 한다. 이 책은 글을 쓰든, 음악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사람들에게 영혼을 밝히는 아포리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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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7-0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리뷰였어요. thanks to~

프레이야 2009-07-03 19:13   좋아요 0 | URL
네^^
헤세의 사랑,도 올려야하는데 이러고 있네요.

라로 2009-07-0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부지런하세요????리뷰를 몇개나 올리시고!!!!와

프레이야 2009-07-04 00:02   좋아요 0 | URL
서평도서에요^^
참, 그날 그 문제의 리뷰요..(요 아래)
나비님의 기운찬 에너지 받아 특종 먹었어요.
우리 담에 떡 사먹어요.ㅎㅎ

라로 2009-07-04 00:32   좋아요 0 | URL
것봐요!!!제가 상 받을거라 그랬죠!!!!ㅋㅎㅎㅎㅎㅎ
떡 사먹으려면 대전에 오셔야 할듯~ㅎㅎㅎ
 
<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를 리뷰해주세요
나 누주드, 열살 이혼녀
누주드 무함마드 알리.델핀 미누이 지음, 문은실 옮김 / 바다출판사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신이 만드신 자연은 아주 험하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신은 가장 강한 인간도 창조해 냈다는 말씀이지!” 열 살의 누주드가 결혼하여 살 오지 카르지의 집으로 가는 차, 그 차의 운전기사가 한 말이다. 카르지는 '세상의 저쪽 끝'이라는 뜻이다. 한껏 인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할 소녀가 세상의 저쪽으로 밀려가는 암담한 여정에서 누주드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가 맞다면 신은 나를 잊으신 거야.’

 누주드Nojoud가 틀렸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증명된다. 누주드는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에 강인하고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어떤 사명감으로 행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찾기 위한, 살기 위한 일이었다. 열 살 이혼녀 누주드의 구술을 바탕으로 중동전문기자 델핀 미누이가 엮은 이 책은 누주드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탄생하였다. 2008년 4월, 법원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악몽같은 결혼생활의 기억까지 누주드의 가족과 그녀 자신의 경험을 전해 듣게 된다. 그녀가 본 이해할 수 없었던 더 어린시절의 일들, 가족들의 알 수 없던 일, 무서운 기억과 따뜻한 기억, 초등학교 친구 말라크 외에 누구에게도 말 못한 꿈과 소망. 그런 기억의 편린들이 실타래를 풀듯 풀려나온다. 이 책은 호기심 많고 질문이 많았던 한 소녀의 용기로 발아한 희망의 메시지이자 참담한 증언이다. 한편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의 반성을 촉구하고 오랜 관습과 종교적 계율에 대한 반기와 함께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할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각성제다. 

 예멘은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그것이 헛된 이름일 뿐이라는 건 책장을 넘기며 오래지않아 느끼게된다. 한 소녀가 회고하는 순수한 기억과 불순한 조짐들이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듯 선명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비로소 누군가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누주드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누주드의 엄청난 일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이다. 누주드는 초등학교 2학년, 수학과 코란을 좋아하고 그림그리기를 특히 즐긴다. 책 속에 누주드가 그린 아이다운 그림이 몇 실려있다. 캔디와 초콜릿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기를 더없이 좋아한다. 누주드의 꿈은 물과 닿아있다. 강이거나 바다. 특히 바다를 한 번 보는 게 소원이고 거북이가 되어 모래 속에 고개를 넣었다뺐다 해보면 재미있겠단 생각을 하는 순진하고 평범한, 그러나 총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이다.

 엄마와 엄마의 엄마, 언니들이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 들여왔던 그 모든 관습과 폭력, 남성중심의 명예- 샤라프(Sharaf)- 에 그녀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그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남자들만을 위하는 계율에 반항하거나 불복종하면 가족과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도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그런 과감한 결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혼을 원해요” 라고 법원의 판사 앞에서 소리쳤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을 가두는 세상의 벽에 돌을 던져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굴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녀와 유사한 경험의, 아니 더 작은 나이의 소녀들에게 그녀의 이혼소송 승리는 전례없이 커다란 힘이 된다.

 남자들간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급작스런 결혼은 누주드가 결혼이라고 하면 어렴풋이 상상했던 그 모든 화사한 꿈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축제와는 더욱 멀었다. 엄마가 입혀주는 니캅(기혼녀가 입는, 눈만 보이고 온몸을 덮는 길고 검은 옷)을 걸치고 머리를 틀어올리며 어른들의 세상, 더이상 꿈을 꿀 수도 없는 암흑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 잔인한 기운이 현실로 체감되는 순간 그녀는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공포감을 온몸으로 감당해야했다. 사춘기가 되기까지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던 ‘괴물’(누주드는 남편을 이렇게 회상한다)의 말은 헛된 약속이었고 그녀는 폭행과 끔찍한 고통 속에서 두 달을 버텼다. 그녀의 영리한 작전으로 악마의 소굴에서 탈출을 감행하여 승소한 이 사건은 그동안 예멘의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조혼방지법, 여성이 만 17세가 되기까지는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안이 의회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2009년 3월, 누주드가 이혼소송에서 승소한 후 11개월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한 사람의 작은 영웅이 큰 일을 해낸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오늘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16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을 태운 여객기가 인도양에 추락한 뉴스가 들린다. 2주 전 쯤에는 자원봉사자로 예멘에 갔던 한국인 엄씨가 테러집단에 의해 희생되었던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예멘의 최대 영문 일간지 예멘 타임즈는 최근 기고문을 통해, 인간은 범법을 행하지 않는 한 누구나 순결한 영혼을 갖고 있으며, 종교의 힘을 빌어 테러행위를 정당화하는 일부 단체들의 소행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였다. 예멘 타임즈는, 이슬람 세계에서 "어느 한 개인을 이유 없이 죽이는 자는 인류 전체를 파멸하는 죄를 짓게 되며, 한 개인을 구원하는 자는 인류 전부를 구원하는 덕을 베푸는 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하는 이슬람의 교리를 함께 역설했다. 누주드를 구원한 아름다운 여성 인권변호사 샤다, 예멘 타임즈 기자, 판사, 그리고 가엾은 두 번째 엄마 도올라. 그들은 진정한 이슬람 교리에 의한 덕을 베풀었다.

 그러나 예멘은 내게 이렇게 좋지 않은 뉴스로 기억된다. 아라비아의 남서쪽 모서리 사우디아라비아 아래쪽에 위치한 이 나라는 여성문맹율이 70%를 넘고 어린이 강간과 납치가 흔하며 영아사망율도 세계최고라고 한다. 벗어나기 힘든 도시빈민의 궁핍함 속에서 가족의 입을 덜고 강간을 피하고 부족 간의 모종의 거래와 평화를 위해 여자아이의 조혼이, 더구나 남자들의 선택과 결정으로만 이루어진다니 얼마나 놀랍고 암담한가.

 공화국 예멘은 아직 지역 족장의 힘이 강하고 까트(일종의 마약) 문화가 성행하는 나라다. 물을 많이 먹는 까트 재배가 물이 부족한 이 나라의 물을 더 말라가게 한다. 이 땅의 비극이라고 표현된다. 즐거움을 주는 것이 동시에 나쁜 짓이 되기도 한다는 걸 깨달은 누주드는 이미 세상에 눈을 크게 뜨고 사는 아이다. 이혼 후 그녀는 이전에 어렴풋이 느꼈지만 베일에 가려져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일련의 가족사와 가족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누주드가 정신적인 풍요함과 유머를 겸비한 강인함을 지녔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꿈과 비교한다면, 현실은 때로 정말로 잔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또한 아름다운 놀라움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나는 ‘축제’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만약 축제가 단 과자라면, 설탕이고, 비스킷이고, 안을 부드럽게 만든 쿠키일 것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코넛 사탕처럼 말입니다.

“이혼식, 결혼 가운데 정말로 가장 좋은 축제에요.” 커다란 곰 인형을 품에 끌어안으며 내가 말했습니다. (146-147쪽)

 
   

 

 실제로 태어난 날을 잘 모르는 누주드는 아마 여덟 살일 수도 아홉 살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혼이 법적으로 성립된 날을 누주드는 생일로 맞이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혼 덕분에 나는 많은 일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지금은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169쪽) 이렇게 말하는 누주드는 미래에 자기처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다시 학교에 간다. 똘망한 눈망울로 손을 번쩍 들고 발표를 하는 누주드(책뒷표지에 사진으로 있다)의 미래가 밝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슬람교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에 예멘의 나쁜 인상을 퍼트렸다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는 세력이 있고 후원자로 나선 변호사 샤다 또한 위험으로부터 몸을 숨겨야하는 처지라 하니 안타깝다.  

  

 이들이 밝은 미래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 고난이 가득할 것만 같다. 그래도 국제 구호 단체인 옥스팜Oxfam은 예멘 남부에 문제의 심각성을 알릴 워크숍을 만들겠다고 압박하고 '법적인 결혼 가능 연령'에 대한 의식을 고양하며 ‘안전한 결혼 연령’이라는 말을 더 즐겨쓴다고 한다. 조혼의 위험성은 심리적인 트라우마, 잠자리에서의 치사율, 학교 중도 포기 등이다. 하지만 옥스팜의 임무 또한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지역 족장들의 입에 거론되어 표적이 되고 있다고 하니 누주드의 불투명한 미래가 안타깝기만 하다.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는 자들이 너무 많은 가운데 누주드의 용기있는 행동이 바람직한 혁명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길 기대한다.   

 

 



<2008년 올해의 여성에 선정된 누주드, 니캅을 벗은 소녀의 얼굴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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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7-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안타깝다는 말 밖에는...
누주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래요...

프레이야 2009-07-02 08:55   좋아요 0 | URL
하늘아래 저런 일도 있다는 게 놀랍지요.
같은하늘님의 바람처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누주드에게 오면 좋겠어요.

카스피 2009-07-0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들이 신의 이름을 빌어 하는 만행이 이거 하나만은 아니지요 ㅜ.ㅜ

프레이야 2009-07-02 10:57   좋아요 0 | URL
너무 안타까운 일이에요. 종교적계율이나 저들이 말하는 명예라는 게
진정한 의미로 행해지고 있지 않으니..

비로그인 2009-07-0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신과 관습과 본능적 폭압과 이념과.. 기타등등이
여전히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 같습니다.

인권에 관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지구상 모든 곳에 통용되기를..
누주드와 같은 아이들이 아이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프레이야 2009-07-02 23:42   좋아요 0 | URL
어떤 것이든 폭압적인 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요.
아이다운 삶, 그게 허용되지 않는다니 정말 안타까운 내용이었어요.

라로 2009-07-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남편과 메신저 끝내고 컴을 끄려다 혹시 리뷰를 을라나 하면서 보고 추천만 누르고 잤는데 지금 읽어보니 참 뭐라 말하기 그렇네요,,,,세상에나,,,,,

프레이야 2009-07-02 23:43   좋아요 0 | URL
추천 ㅎㅎ
메신저는 날마다 잘 하고 있군요. 역시 최강 다정한 커플이야요.
정말 끔찍한 일이 세상에.. 말에요.

꿈꾸는섬 2009-07-0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런 일이...네요.
누주드의 용감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이런 아름다운 이혼식은 꼭 이루어져야해요.
리뷰를 보는 내 속이 다 아프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실제로 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못 볼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9-07-03 01:34   좋아요 0 | URL
그 어린 아이가 당했을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요.
담담하게 적혀있지만 구술할 때 다시한번 상기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순오기 2009-07-0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호~ 베스트 특종이네요. 축하~~ ^^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자들이 겪는 고통을 다룬 소설로 여럿 있더라고요.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누주드같은 용기있는 여성들이 많이 나와야 돼요.

프레이야 2009-07-05 13:34   좋아요 0 | URL
헤헤 고맙슴다.^^
어린 여자아이가 정말 용기를 발휘했어요. 진정 살기위해서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