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엣말 같은 봄바람 탓에 오랜만에 치마를 입고 나섰다. 흰색 레이스치마에 흰색 아사 블라우스 그 위에 청자켓을 걸치고 발이 좀 불편해도 굽 있는 구두를 신고서 또각또각... 오전에는 글벗들을 만난 후 오늘 내가 데이트하기로 한 사람은 헤르만 헤세다. 탄생 130주년 기념 전시회를 하고 있는 가까운 박물관이 데이트 장소다. 몇 해 전 <정원일의 즐거움>을 읽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노인의 혜안과 흙냄새 깊게 패인 주름의 미덕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나는 그를 만나는 일이 어느 좋은 서재지기님의 말씀처럼 인연이라 생각한다. 성인 9000원의 좀 과하다 싶은 입장료를 냈지만 평일이라 조용하고 느긋하게 이것저것 볼 수 있어서 흡족했다.

 



전시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전기를 읽는 기분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조숙하였고 구속이나 권위를 못 견뎌하여 네 살 때 유치원 생활도 적응하지 못한 그는 12세 때 벌써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14세 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15세 때 연애를 하고 16세 때 술집에 드나들며 금기된 책을 읽었다.” 칸슈타트 김나지움 7학급 당시(15세) 학우들과 찍은 사진 속의 그는 안경을 끼고 고집스런 입매와 침울하지만 강렬한 눈매, 그리고 조금은 작은 키를 하고 있었다. 14세 때 신학교에 입학하여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권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탈퇴를 하고 자살미수와 가출을 반복하였다. 김나지움에서는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예민한 자신과 자애로운 어머니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것 같다. 그 후, 시계수리공, 서점 점원 등의 일을 하면서도 오로지 문학을 향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칼 융의 제자로부터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받고 난 후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쓴 게 1919년의 일이었다. 알을 깨고 태어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간 새의 이야기는 청춘의 표상과도 같다. 제도권에 억눌린 한 생명이 성장의 고통을 겪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젊은날의 정신적, 육체적 고뇌가 담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와 사랑’이란 제목으로 읽었던 게 참 오래 전 일이다. 오늘 내가 알게 된 헤세는 노년에 매달린 정원일과 40세 이후 시작한 붓질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은 완고하고 순정한, 세상일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위대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수채화에는 사람이 나오지 않고 대체로 호숫가의 풍경만이 담담한 선과 투명한 색으로 그려지고 있다. 유일하게 사람이 나오는 그림은 자신이 물뿌리개를 들고 꽃에 물을 주고 있는 뒷모습인데 난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지구를 떠나기 전 기우뚱하니 서있는 ‘어린왕자’를 닮았다. 꽃을 정성껏 돌본다는 점에서도 그런 연상을 불러왔다. 헤세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혐오감을 사람을 그리지 않는 것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헤세를 화가라고 부르진 않지만 '화가의 눈을 가진 시인'으로 부르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화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숲과 포도나무와 마을들을 너무 사랑하여서 늘 자꾸 그것들을 그려야 할 지경이네. 그리고 조금은 진전이 있다네. 지금은 아주 단순한 모티브에 머물러 있는데 그 이상 더 앞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네.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나 물체 같은 다른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인데, 나는 사람을 그릴 수 없다네.”  애틋한 연민이 물씬 일어나는 이 글귀에 자연과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 온건한 감수성이 묻어난다.


그가 사람을 증오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헤세는 1914년 이후 군국주의와 지나친 민족주의에 반발했고 나치를 비판한 글로 인해 조국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이후 나치의 박해로 독일 국적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1923년 스위스 시민권을 얻었다. 당시 히틀러는 그의 작품을 몰수하고 출판금지령까지 내렸다. 그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해 잡지를 편집하고, 그림을 팔아 책과 구호품을 보내는 등,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지극한 평화주의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나치의 탄압 속에서 그는 <유리알 유희>를 쓰기 시작했고 10년의 집필 끝에 194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1946년 프랑크푸르트 괴테상과 동시에 노벨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인간의 도리와 정신문화에 대한 헌사로 순수한 정신의 이상향을 구축하고자 했던 대작이라는 평이다. 읽어봐야겠다.


헤세의 수채화는 화가로서의 그림이라기보다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삽화 같은 것이었다. 그가 타이프라이팅 하여 보낸 아기자기한 편지들마다 마음에 평화를 주는 그림들이 소박하고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1962년 사망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는데 그림을 그리며 숨통을 짓눌렀던 많은 일들(아내의 정신병, 막내아들의 중병, 부친의 사망, 순조롭지 못한 결혼생활, 조국과의 마찰)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자 했다. 두번의 결혼생활 위기를 맞고 50세쯤에야 양처를 만나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 부부의 사진이 행복해보였다. 말년에는 주치의에게 끊임없이 보낸, 약을 구하는 편지들이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평생의 고통을 그림과 문학으로 승화한 그는 문호였다.

 

“그림 그리는 일은 나의 마술도구이며 파우스트 외투다.” 라는 글귀와 함께 이런 글귀가 마음에 깊이 박혔다. “어느 날,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나는 이제 40세가 된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화가로 간주했다거나 화가가 되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그리기는 아주 멋진 일이다. 그것은 사람을 더 유쾌하고 더 참을성 있게 만든다. 나중에는 글을 쓸 때와는 달리 검은 손가락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빨갛고 파란 손가락을 갖게 된다.”

 

전부터 가끔 생각했던 것이지만 난 오늘로 죽기 전에 배워보고 싶은 게 또 하나 늘었다. 빨갛고 파란 손가락이라니! 글에도 색채를 부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벅찬 생각이 들었다. 헤세를 만나며 난 어떤 얼굴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노년에 그림을 그리며 불치병으로 죽음을 준비하시는 칠순 넘은 그 문우를 위해 헤세의 수채화가 담긴 액자 하나를 샀다. 다음주에 드리면 기뻐하실 화사한 얼굴에 기쁘다. 선생님이 오늘 내게만 특별히 갖다주신 수선화가 지금 거실에서 노오란 향기를 피우고 있다. 수선화는 특히 수채화로 그리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꽃이란 생각이 든다.


헤세는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 났다. 평생 음악을 좋아하고 대위법을 숭배했는데 음악이 가져다주는 조화와 균형의 미를 최고로 여겨 이를 문학에도 반영하였다. 그의 시가 수백 편의 음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음반이 몇몇 전시되어있어 멋진 재킷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초판책들이 여럿 있었는데 책마다 자신의 그림이나 사진을 앞장 속지에 붙이고 자필 서명을 해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그중 1927년에 출간된 책이 눈길을 끌었다. 1960년대 전쟁을 반대하고 자유를 구하려고 데모하던 히피족들의 손에 일제히 책이 들려있어서 보니 이 책이었다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60년대 히피족들에게는 바이블 같은 책이었다니! 이 책은 영화로도 나왔던지 비디오테잎이 전시되어 있었다. ‘늑대인간’ 또는 ‘황야의 이리’로 번역되어 있었다.

 


미국산 Smith Premier No.46


마지막 코너에는 그의 무덤과 데드마스크 사진 그리고 묘비명이 적혀있었다. 

“오래도록 무거운 짐을 진 자,

 그 짐을 부리도록 허락이 내린다.

 그것은 감미롭고 근사한 일이다.“

<유리알 유희> 중의 한 구절인가 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따라가보는 것은 분명 두근거리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그림과 문학으로 승화한 일생을 통해 얻은, 동그란 안경 너머 번득이는 혜안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썼던 동그란 테의 안경과 손때 묻었을 타이프라이터도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수채그림 아래로 따박따박 박혀있는 타자기 글자들이 시공을 건너 사람의 말을 건네오는 것 같았다. 전시실을 나오니 화단 옆에 노인들이 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봄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노인들의 눈이 밝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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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술가의 진정한 눈
    from 처녀자리의 책방 2009-07-03 01:29 
    2년 전 헤르만헤세展에서 보았던 오래된 수동타자기 생각이 난다. 헤세가 사용했던 것으로 유리상자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책의 표지에도 수동 타자기 한 대가 덩그러니 그려져있다. 그 때 전시장에서 본 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수동타자기 특유의 묘한 향수를 불러준다. 폴 오스터의 타자기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타닥타닥 타다닥.. 한 자 한 자 글자를 불러오며 자신만의 언어를 조합, 재생산해 내는 작업. 작가로 산다는 것, 나아가 예술가로 산다는 것, 그 정
 
 
hnine 2007-04-11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쓰신 것을 읽고나니 마치 직접 다녀온것 같습니다. 과연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보낸 사람이군요. 데미안, 지와 사랑...그들을 읽으며 보낸 시간들이 아련합니다.

마늘빵 2007-04-1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자세히 쓰셨어요. 저도 출연하는군요. ^^

비로그인 2007-04-1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좋아라 :)
헤르만 헤세보다 혜경님의 소개글이 더 좋네요.
요즘 어지간한 전시회는 다 만원 수준인가 요.
전 내일 앤디워홀 전시회 보러 간답니다 :)

달팽이 2007-04-1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내 마음에 담아봅니다.
때로는 세상의 잘못된 일을 고치려하기보다는 이렇게
따뜻한 마음내어 사람들을 감전(??)시키는
인간애가 더욱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생각합니다.

소나무집 2007-04-1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헤세전 다녀온 기분입니다.
글이 좋아 안 담아갈 수가 없네요.

네꼬 2007-04-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뭉클.

stella.K 2007-04-1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헷세전이 분산으로 옮겨갔군요. 그런 이제 서울에선 안 하는가 봅니다. 혼자 갔다오셨나요? 좋은 글이었슴다!^^

프레이야 2007-04-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몰라서 생겼던 편견이 좀 깨어졌어요. <정원일의 즐거움>에서도 헤세
가 손수 그린 수채화와 꽃 스케치들을 눈요기 할 수 있었는데 물론 프린트이긴
하지만 전시회에서도 엽서를 팔더군요. 데미안, 지와사랑.. 다시 읽어야겠어요.^^

아프락사스님, 그럼요. 출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체셔님, 미국 팝아트작가라고 하더군요. 모택동의 스케치를 이용해 한 벽면을
꾸민 작품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어요. 전시회 입장료가 좀 비싸긴 해도 가끔은
나쁘지 않지요^^ 아이, 좋아라~ 고맙습니다.

달팽이님, 그 문우님은 꽃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쓰며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매주 기르는 꽃을 가져오셔서 나눠주시고 우리들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세요. 굳이 30년후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작별을 준비하고
있는지 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날이 흐리고 바람이 심하네요^^

소나무집님,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 장애물은 선입견이나 편견보다 무지함이
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저를 보며 했습니다.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사람은
단순하지도 않고 단선적이지도 않은 것 같아요.

우주고양이님, 노년에 서재에서 명상에 잠긴 사진이나 책을 읽는 사진, 애완동물과
장난을 치는 사진들이 뭉클했어요.^^


프레이야 2007-04-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대구에서도 했던 걸로 알고있어요.
네, 둘만의 데이트였지요. 다들 시간이 안 맞아서리...
전시회는 혼자 조용히 가야겠다는 생각을 이 기회에 하게 되었어요. 좋았어요.^^

하늘바람 2007-04-1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만헷세전도 하는군요

향기로운 2007-04-1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즐거운 나들이셨겠네요^^ '흰색 레이스치마에 흰색 아사 블라우스 그 위에 청자켓을 걸치고 발이 좀 불편해도 굽 있는 구두를 신고서 또각또각...' 예쁘신 모습이 상상되요^^ 멋진 데이트도요^^

2007-04-1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뽀송이 2007-04-1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님 덕분에 항상 눈과 귀와 마음이 다~ 즐겁습니다.^^
전... 하얀 레이스 치마 자락 날리며 전시회를 조용히 누비는 님이 자꾸 떠오르네요.^^

다솜 2007-04-1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도 잠깐 짬이 생겨 가려고 했던 전시회군요. 그런데 잠깐으론 안 될 것 같아서 다음 주에 님처럼 데이트 가기로 했습니다. 참 꼼꼼하게 잘 쓰셨네요.덕분에 무엇이 전시되고 있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집니다. 잘 봤어요

프레이야 2007-04-1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작년엔 대구에서 했다고 해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향기로운님, 호호~ 6월 3일까지 하더군요. 부산시립박물관에서요^^
속삭인님, 어머나 놀랐어요. 6학년님도 잘 있지요? 역시!! 님의 서재로 갑니다.
섬사이님, 부끄~ 고맙습니다.^^
뽀송이님, 처음엔 저랑 2명이었는데, 나중에 아줌쟁이 세명이 들어와 좀 떠들더군요.
그래도 데이트 좋았습니다.^
다솜님, 반갑습니다. 잠깐은 안 되더군요. 전 덜 꼼꼼히 봤는데 한 시간 걸렸어요.
님의 후기도 보고싶어요^^ 담주에 데이트 잘 하시기 바래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4-12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고싶은데 부산이군요;;; 나중을 기약해야되는 건가요.... 하여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