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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카페
크리스토퍼 필립스 지음, 안시열 옮김 / 김영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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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은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라는 글귀는 이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말이다. 삶을 혀끝에 놓고 굴려보고 뒤집어보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맛을 보라고? 이 책은 사둔지 좀 된 책인데 이제야 손이 갔다. 게으른 천성에 몇년동안 한가지 일에 매달려 나름대로 바쁘게 사느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일상의 난제들을 음미해보는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 카페'는 한 젊은 저자가 여는 철학카페 이름이다. 높은 상아탑 안으로 국한되는 철학이 아니라 세상의 어느 곳, 어떤 사람들(연령, 학력, 직업이 어떻든)이 모이는 곳에서도 이루어지는 보통 사람들의 철학이다. 한결같이 그 목소리에는 자신의 삶에서 묻어나는 진실과 통찰 그리고 끊임없는 질문이 내재되어있다.

'질문이란 무엇인가?'를 1장으로 2장의'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에서는 '내 집'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한다. 또한 우리의 정신과 육신을 옥죄는 감방은 역설적으로 지혜와 발전의 산실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저자는 어린 초등학생 철학자들과의 만남에서도 자신이 얻는 것이 더 많은 것을 기뻐한다. 우리는 늘 탐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앙드레 지드의 세계관에 대한 말을 인용하며, 비인간적이고 편협한 세계관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다.

저자가 왜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인가는, 이외에도 책의 구석구석에서 알 수 있다.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상대로 하려금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게 한 소크라테스처럼, 저자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질문을 던져,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있던 사람까지 열띤 소통의 장으로 끌어낸다. 진정한 의사소통의 장이 참 부럽다. 헛된 이야기, 오해, 선입견, 무조건적 순응, 이런 것들은 진정한 소통을 막는 높은 벽으로 작용한다.

소크라테스 카페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이다. 우리 자신, 나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문답법의 목적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질과 가능성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저자 자신도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생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찾은 것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그동안 열었던 카페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주제에 따라 이리저리 찾아 떠올리며 자신의 철학적인 지식과 철학가들의 이론을 함께 사유하고 비판한다. 딱딱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무엇으로, 일상에서 '왜?'또는 '어떻게?'하고 고민했던 것들을 짧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카페에 참석한 한 사람의 말은, 우리의 삶 자체가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숙제를 하는 과정이라고 들린다. 그런 우리를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 '우리 자신이란 우리의 누구됨이며,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의 관점이고 접근법이며 경향입니다. 우리 자신은 완성된 것이 아닌 만들어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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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리자 라이스
안토니아 펠릭스 지음, 오영숙 외 옮김 / 일송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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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감동이 없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어느 정도의 예상과 기대를 가지고 책장을 넘기는데, 가도가도 빛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터널 속처럼, 그저 삭막하고 답답하다.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당차보이는 흑인여성 자체에 관심이 생겨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읽고 나니 오히려 가슴을 누르는 바윗덩어리만 생긴 것 같다.

그녀는 백인남성이 지배권을 휘두르는 사회에서 성공한 전형이다. 그것도 강대국의 권력권 중심에서 명품 구두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말이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집착은 그 뿌리를 타고 거슬러가자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녀는 든든한 부모 덕택에 인종차별정책에도 희생되지 않고 아주 '영특하게' 세상을 산 것 같다. 이 책으로 보면 그녀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다. 개인의 성공담으로만 보면 점수를 주어야할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없고 '힘의 논리'만 강하게 믿는 머리만 있는 사람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힘의 논리. 그렇다. 힘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그 핵심에서 안보보좌관으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발휘하고 있는 그녀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한 사람의 인간적인 고뇌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그런 것이 없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이 전기작가는 그런 것에는 아예 눈도 주지 않는 식이다.
오히려 그런대로 잘 닦여져있는 길을 훨훨 날 듯이 달려온 한 흑인여성의 자랑거리들만 지루하게 늘어놓고 있다. 주위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코멘트는 하나같이 극찬에 가깝다. 이 책은 철저히 미국인의 시각에서 쓴, 너무 이르다싶은 전기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각에 그저 박수치며 맞다고 할 수 없는 마음들이다. 구성 또한 엉성하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는 힘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믿고 휘두를 앞으로의 콘디를 기대한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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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세설 - 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고종석 지음 / 열림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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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내 감옥이다'라는 부제에 끌려 책을 폈다. 우리의 생각에 틀도 주고 자유도 주는 우리말을, 저자는 오래도록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자 자신도 어디로 발길이 향할지 모르는 그 어슬렁거림의 흔적을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정리 기록한 것이 이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목차는 마치 우리말 사전 식이다. 국어학 적인 지식들이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사유의 날개에 잘 실려있다. 철학적인 부분도 있고 통속적인 부분도 있다. 다소 엎치라뒤치락하지만, 저자는 아마도 감옥에 갇히기에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인 것 같다. 기억을 더듬는 손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일정하지 않다. 김수영의 시를 떠올리기도 하고 고려속요를 떠올리기도 하고 첫사랑 여학생을 떠올리기도 한다.

저자가 곱고 낭랑한 우리말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 반가웠다. 니은이나 리을 같은 자음을 사유하며 건져올린 우리 흉내말들이 마알간 아기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날마다 쓰고 말하는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와 잘못된 표현들에 너무 너그러운 점도 꼬집고 있다. 또 옛말 사전을 뒤져 찾은 듯한 우리말과 북한말에 남아있는 우리말 사랑 흔적을 밟는 것도 재미있다.

주관적 내용, 객관적 내용, 다시 주관적 내용에 이어 각 장의 마지막에서는 좀더 총제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우리말 한 자 한 자를 정리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일정한 규칙이 뒤로 갈수록 다소 지리한 느낌을 준다. 그런 틀을 만들지 말았으면 오히려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원래 어슬렁거림에는 계획이 없는 것이니, 이렇게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주지않았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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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나의 세계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음, 구자현 외 옮김 / 중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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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너무나 유명한 과학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단면만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지, 늘 뭔가 부족했었다. 과학이론이라면 잘 모른다. 상대성이론이니 통일장이론이니, 함축된 이름 앞에서 일단 기가 죽는다. 유대인이며 학교 부적응아, 그러나 수학과 물리 과목에서만은 독보적이었으며, 미국으로 망명 후 핵무기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가 그것이 현실로 엄청난 폐해를 드러내자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후회하며 반전 반핵 운동을 버트란드 러셀과 함께 했다는 정도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있다. 아인슈타인은 전문 바이얼리니스트 못지않은 바이얼린 연주 실력을 갖고 있어, 어느 강연에서는 강연을 뒤로 하고 바이얼린 연주부터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대단한 노력과 집중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시오니즘 운동의 공로로 이스라엘 대통령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끝까지 사양했다고도 한다.

글은 사람을 말해 준다. 세상을, 사람을, 현상을 바라보는 글쓴이의 눈을 말해 준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최소한의 양심을 말해준다. 또한 글은 사람의 성품을 말해주기도 한다. 물론 글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단정하려면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속일 수 없는 실마리를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세계관>은 아인슈타인 자신이 1950년대 초까지 여기저기 기고하였던 글과 갖가지 공식석상에서 하였던 연설문을 싣고 있는 책이다. 제 3자의 왜곡될 수 있는 관점이 아니라, 한 위대한 과학자가 쓴 글을 통해 그의 성찰을 듣고 싶었다.

아인슈타인은 본질적으로 모든 형태의 억압과 권위로부터의 자유주의자였다. 이런 '~ism'은 우선 그의 교육관에 잘 나타난다. 암기위주의 학교교육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며 인간의 교육은 독자적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지나치게 많은 학과과목에 짓눌려 아이들의 창의성이 말살되고 있음을 말하는 대목은 마치 그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느끼게 했다. 그런 착각은 의무병역제에 대한 견해에서도 일어났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그는 주장하고 있었다. 군대사열 같은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경멸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강대국은 군비축소를 위한 초국가적 세계정부를 하루빨리 만드는 일에 마음을 합해야 한다고 했다. 실현되기에는 강대국들의 이기적인 욕심과 경제논리가 너무 크지만, 그는 여러 연설과 편지에서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의무병역제는 이런 대업에 걸림돌이므로 용병제를 내세웠다. 군사력 공동 운용으로 각국의 안전보장이 크게 강화될 것이고, 불신과 긴장 대신 평화에 대한 확신이 점증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력를 공동으로 부여할 수 있는 참된 세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기복신앙이 아닌, 전우주적 종교관을 지닌 신실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을 이루는 모든 것의 기저에는 고매한 도덕관이 있었다. 인간의 가치는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얼마만큼 줄 수 있는가로 판단해야 한다고 하며, 개인의 사회의식 마비를 지적했다. 사회에 대한 헌신으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개인의 책임의식을 길러주는 교육이 근본적으로 되어야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개인의 사회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폐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게 과도한 경쟁의식을 주입시켜 물질적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의 목표는 안락과 행복이 아니라, '친절과 아름다움 그리고 진실'이라는 말이 그의 도덕관을 잘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가 영웅은 많지만 본 받을 만한 위인은 보기 어렵다고 했던가. 정치 경제 교육 종교 과학 다방면에서 빛나는 도덕관으로 대단한 통찰력을 보이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세계관을 보고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과학이론에 대한 장은 보류해 두고라도, 책장을 넘기며 참 기쁜 시간이었고 머릿 속이 깨끗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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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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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여년쯤 후면 돌아가고픈 곳은 어디일까? 유년의 기억이 묻어있는 곳은 아파트가 들어서 완전히 몰라보게 되었고 무주구천동 계곡물 못지않게 하얀 물거품을 뱉으며 쏟아져내리던 그 물도 이젠 다 메말라버렸다. 열두살 때 두 동생과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의 배경은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별로 자상하지 못했던 아빠가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소풍을 가서 징검다리도 손잡아 건네주시고 옹기종이 사진도 함께 찍었던 유일한 기억의 장소이다. 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제는 고희를 넘기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가슴 한 구석이 무겁다. 아버지는 내 '존재의 씨앗'이며, 잠깐의 단란했던 그 시간만으로도 아버지의 다른 부정적인 부분이 거의 묻혀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 똥깅이처럼 나는, '아버지'로 시작하여 '귀향연습'으로 끝맺는 이 책을 읽으며 줄곧 아버지를 생각했다

<변방에 우짖는 새>로 이름을 들었던 현기영 작가를 책으로 처음 만났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유년과 사춘기 적 기억을 더듬어 쓴 자전적 소설이다. 독자에게 찻잔을 앞에 두고 들려주듯한 어투와 양해를 구하고 샛길로 잠시 갔다가 양해를 구하고 돌아오는 이야기 방식도, 그저 개인의 역사를 마주하고 듣는 것 같다. 해 묵은 기억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미화되기도, 과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하며, 예를 들어 일상의 대화까지 소상히 건져올릴 수는 없을 정도로 모호한 안개와도 같은 것일 게다. 그런 면에서 안개가 구체적인 활자로 탄생하려면 작가의 소설적 기법이 활용되어야 될 것이다.

이 소설은 현재에서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적 구성을 하고 있다. 세상과 불화한 아버지의 육신을 손수 만지며 이제는 자신에게 돌아올 죽음이라는 손님을 차분히 맞으려는 황혼의 영혼이 작가이자 주인공이다. 정신적으로 늘 가까이 있지 못한 아버지의 존재가 이제 빈껍데기만으로 남아, 그러나 자신의 영혼에 벗어버릴 수 없는 생의 그림자로 따라 붙은 채,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그 길은 밥먹듯이 찾아온 배고픔과 역사적 폭력이 짓누르고 치유될 수 없을 지도 모를 상처를 남기고 간 흔적이다. 제주의 고통스런 과거와 그때마다 굴하지 않고 버티는 민초들, 제주의 비상한 신화와 신비로운 자연의 풍광이 펼쳐진다. 내가 용두암을 가 본지 14년이 되었다. 그곳에서 발가벗고 놀았던 유년의 아이들 모습, 처음으로 여체를 보고 흥분했던 사춘기의 기억이, 시커멓고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처럼 생생하다.

작가는 자신을 성장시킨 것들에 감사하며 그런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 자신에게 묻고 있다. 아픈 역사에 대한 책임을, 변해버린 자연의 모습과 친구의 모습을, 문학과 독서의 영향, 그리고 변화무쌍한 성장의 길에서도 변하지 않고 내부에 존재하는 '인간 성장의 방정식'에 있는 '항수(恒數)'에 대해서 말이다. 이것을 작가는 '생성 최초의 것,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라 했다.

뜨거운 불씨같기도 하고 안온한 모태같기도 한, 나를 내보낸 품으로 돌아가려는 주인공이 제주도로 명명한 '자연'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작가는 성장소설 -그래서 중학생 때까지로 기억은 멈추어있다- 을 통해 유독 심했던 열병과 격정으로 아버지를 상처입게 한 것을 슬퍼하고 있다. 불안정한 생의 고개를 넘어 담담하게 귀향을(혹은 죽음을) 연습하는 주인공의 흰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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