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 미틱(프랑스 인터넷 만남 사이트) 의 광고
24. 극단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관점은 사랑에서 주관적 경험의 최상의 단계들 가운데 하나를 고안해내는 철학자들인데, 아마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를 들어 쇠렌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를 꼽ㅇ르 수 있겠지요.
심미적 단계 – 사랑의 경험은 헛된 유혹과 반복을 경험하는 것, 모차르트의 동 쥐앙.
윤리적 단계 – 불변을 향하는 영원한 맹세.
종교적 단계 -
“자아가 사랑 고유의 투명성을 거쳐서 자아를 상정한 그 힘 안으로 빠져들게 될 때”, 사랑의 궁극적인 변모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 덕분에 자아가 제 신성한 기원에 뿌리내리게 될 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유혹을 초월하여 그리고 결혼이라는 신실한 매개를 통하여, 인류의 이상에까지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27.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플라톤은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직관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보편적인 영향력을 지니며, 실현 가능한 보편성의 개인적 경험이자 철학적으로 매우 근본적이라고 말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8. 물론 타자의 몸이라는 매개가 존재하지만, 결국 쾌락이란 언제나 제 자신의 쾌락일 것입니다. 성적인 것은 결합하지 않으며, 분리할 따름입니다. 홀딱 벗었건 타인과 한 몸으로 들러붙어 있건 간에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 즉 상상적 표상에 불과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쾌락이 당신을 타자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떠에놓는다는 겁니다.
실재는 나르키소스적이며, 관계는 상상적입니다. 따라서 성관계는 없다, 라캉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만약 섹슈얼리티에서 성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사랑은 성관계의 결핍을 보충하러 도래하는 무엇이됩니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으로 하여금 사랑에서 주체가 ‘타자의 존재’에 접근하려 시도한다고 말하게 해 줍니다. 결국 주체가 제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것, 나르시시즘을 넘어 서게 되는 게 바로 사랑 안에서라는 것이지요.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만남입니다.
32. 그리고 사랑은, 예컨대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3. 레비나스의 관점은 타인의 얼굴과 결부된 환원 불가능한 경험, 이를테면 그 매개가 결국에는 “전체 – 타자”로서의 신이 되는 그런 출현에서 출발합니다. 이타성의 경험은 핵심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윤리의 근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따라서 사랑이 가장 전형적인 윤리적 감정이라는 결론을 위대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빚어내게 됩니다.
41.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패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의 시작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성과 그 과정에 대한 물음들에 늘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사랑의 낭만적인 개념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며, 다소간 이 개념은 만남에다 사랑을 소진시켜버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만남에서,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바로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하나의 만남이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사랑이 이렇게 전개될 때 우리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사랑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의 연인이 만났고,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와 같은 무언가가 세계에 맞서 생겨납니다.
....이 개념에는 놀라운 예술적 매력이 존재하지만, 제 생각에 이 개념은 심각한 실존적 위험을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개념을 사랑에 대한 진정한 하나의 철학으로 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예술적 신화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44. 이 “지속성”이라는 표현에서, 사랑이 지속되고 서로가 항상 사랑하며 또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각자라는 존재는 사랑의 시련 속에서 새로운 시간성과 직면하게 됩니다. 물론, 시인의 어투로 말하자면 사랑은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사랑은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입니다.
51. 저는 사랑이, 예컨대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제가 “진리의 절차”라고 일컫는 무엇,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단순히 말해서 이 진리는 둘에 관한 진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차이의 진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사랑은 바로 이것에 대한 경험입니다.
52. 이 사랑 이야기들이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는 이유는 사랑에 보편적인 무엇이 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보편적인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랑이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 것과 연관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독한 의식에 의한 것과는 상이하게, 사람들은 서로 대면하고 서로가 서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랑이라 해도 새로운 증거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 아우수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런 한편,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우리 역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제 모든 의미를 철학에 부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55. 사랑을 선언하는 것은 ‘만남-사건’에서 진리 구축의 시작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만남의 우연을 시작이라는 형식 안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더 이상 처음 시작되던 때처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닌, 실제로 하나의 필연처럼 등장하는 세계의 경험과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연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고,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랑의 선언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며, 일종의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57. 말라르메는 시를 “낱말에 의한 낱말로 극복된 우연”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58. 우연의 고정, 그것은 바로 영원의 통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합니다.
59. 사랑은 주관적인 어떤 힘입니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60. “사랑이라? 그래, 그것은 둘의 시련이지. 사랑은 둘의 선언이고, 영원이야. 하지만 하나라는 질서 속에서 그 증거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어떤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문제로 되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모습이 바로 아이입니다.
67.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지, 종의 재생산을 확보하는데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71.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입니다.
72. 순전히 형식적인 방법으로 사랑에서 드러나는 변증법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두 가지 정치적 또는 철학적 – 정치적 개념이 있습니다. 먼저 “코뮤니즘”이라는 낱말 속에는, 공동체가 극단적인 모든 차이를 통합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런 사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박애”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용어는 분명 차이들에 관한 물음, 즉 적과 근본적인 경계를 긋는 그런 대면을 동반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벌어지는 차이의 우호적인 공존에 관한 물음에 관여할 것입니다.
74. 기독교는 사랑을 초월성에다 곧바로 투사해버린 것입니다. ....타자는 분명 존재합니다만, “전체 – 타자”나 초월성의 “대타자” 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종교가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77. 예컨대 “멀리 떨어져서, 그러나 여전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와 같은 표현에서 잘 드러나지요. 말하자면 사랑은 가능성은 아닌 것이며, 오히려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78 사랑을 지상에 도래하게 하는,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이행하게 하려는 이 의지는 바로 역사 속에 존재해왔던 코뮤니즘의 의지이기도 하였습니다.
82. 사랑과 혁명적 참여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사유의 영향을 받아 차츰 참여로 변해가는 삶이 획득하게 될 강렬함 그리고 사랑에서 차이의 작업을 삶에 부여하는 질적으로 상이한 강렬함, 이 둘 사이에, 주체들의 가장 은밀한 수준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은밀한 반향을 명확하게 보여주자는 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제가 역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89. 초현실주의는 법을 벗어난 사건적인 힘으로서의 이 미친 사랑에 열광하였습니다. 사랑에 관한 사유, 그것은 모든 질서에, 법질서의 힘에 대항하여 만들어지는 사유에 다름 아닙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바로 여기서 언어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 속에서 하나의 시적 혁명을 전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살찌워나갈 무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 모퉁이에 있는 미친 사랑이 될 <나자>는 우리에게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만남의 시학을 눈이 부시도록 빼어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92. ‘이제 그만 Assez’이라는 제목의, 매우 찬란한 짤막한 텍스트에서 베케트는 산과 사막이 조금씩 뒤섞인 풍경을 배경 삼아 아주 늙은 커플의 방황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이야기는 사랑과 이 늙은 커플의 지속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은 육체의 참담함, 존재의 단조로움, 나날이 증가하는 섹스의 어려움 따위를 조금도 감추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한편, 결국에는 빛을 발하는 사랑의 힘과 사랑을 구축하도록 지속시키는 끈질김의 체제 아래에 이야기를 위치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95. 포르투칼 시인 페소아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옳다고 믿습니다. 저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이며, 앙투안 비테즈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사유와 몸 사이의 관계는 아주 특이하며, 필연적인 어떤 폭력으로 늘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 이런 사랑에 넋 나간 젊은 녀석들하고는! 너희들은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한 “사랑이 하나의 사유”라는 걸 알아차릴 능력이 없는 놈들이로구나 내 이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을 젊은 너희들에게 직접 이르노니,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뜻이노라.
108. 차이를 만들어내고, 고유하며, 반복을 전혀 동반하지 않고서, 고정되지 않고 낯선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반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숭배와 대립시켜야만 합니다. 저는 1982년 <주체이론>에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109.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반면, 저는 사랑과 관련된 것을 포함하여 이 주관적인 채색에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113.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원천에 담겨 있는 물속에서 저는 우리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의 기쁨을 봅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처럼
물결 속에서 발가벗은
네 기쁨에 이른 너를
저는 봅니다.
121.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163.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의 과정을 다리 절기 (boiterie)라고 부른다. 다리 절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걷기”이다. 다시 말해 “다리 절기란 그 자체로 걸음인 동시에 걷기를 금지하는 것이다.” 완전한 걷기라는 것은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다. 수렴/발산의 조화는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다. 사랑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항상 절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