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가 한국일보에서 주관하는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의 저술(교양) 부문 수장작으로 선정됐다. 수상 후보작으로 올랐다는 소식은 두 주 전에 접했고, 수상작 선정 소식은 며칠 전에 알았다. 저술상은 2003년부터 학술 부문과 교양 부문으로 나뉘어 시상되며, 2007년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 2008년엔 박태순의 <나의 국토 나의 산하>(한길사, 2008)가 수상작이었다. 뜻밖의 수상으로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 서재를 자주 찾는 분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수상자 인터뷰 기사와 심사평을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9. 12. 18) [한국출판문화상] 저술(교양) 부문, '로쟈의 인문학 서재'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이현우(41ㆍ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라는 이름은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 책깨나 읽고 영화깨나 본다는 사람치고 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동유럽의 털북숭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얼굴을 아바타 삼아,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쓰는 자칭 "곁다리 인문학자"가 바로 그다. 이 책은 그의 왕성하고도 분방한 인문적 주유를 보여주는 문화 비평집이다. 



그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 이 대학 대학원에서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신문' 등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고,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개설해 서평을 쓰고 있다.

"좁게는 러시아 문학이 전공이죠. 그 분야의 대학 강의도 하고 있고. 그런데 문학이 문체분석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삶을 깊이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자연스레 다방면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철학이나 역사에도 굳이 칸막이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경계 없는 인문지성'으로 부르는 그의 외연을 금 그어 보려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이씨에겐 영역의 경계뿐 아니라 문화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경계도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온라인 글쓰기 특유의 '제스처'(댓글 형태의 글 등)도 간간이 보이는 이 책을 통해, 이씨는 비평적 글쓰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시나 소설도 직접 써 보면 더 잘 읽을 수 있게 되고, 강의도 직접 해봐야 자신의 앎을 정확히 할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의 빈 틈을 보게 되는 거죠. 일종의 앎의 변증법이랄까요. 어떤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완성된다고 해도 될 겁니다."

비평서라는 책들이 쉬 두루뭉술한 칭찬으로 흐르기 쉬운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때로 무람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랄하다. 이씨는 "심성이 본래 그렇다"며 웃었다. 그리곤 "좋은 면만 보기엔(*보기에도) 인생이 짧지 않냐고도 하지만 비평은 분명한 가치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아이들도 좋은 면만 보면 다 천사 같지만, 야단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

'로쟈'라는 필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이름. 그런데 다소 험상한 지젝의 얼굴을 그 아바타로 사용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지젝은 코뮤니스트죠. 코뮤니스트는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는 개념(공산주의)으로 주로 쓰이는데,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함께 즐길 수도 있고요. 내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앎을 공유하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재화는 얼마든지 나눠 가질 수 있으니까요."(유상호기자)   

  

'대중지성'의 교양서 쓰기 새로운 지평 열어  

● 심사평

교양 부문 저술상 심사에서는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질문이 좌중을 선회했다. 시민의식과 상식의 최대공약수를 교양의 핵심으로 볼 것인가, 반짝이는 예지와 지적 정밀성에서 교양의 위안을 구할 것인가, 시선들이 엇갈렸다. 저자가 책의 단독 책임자인가, 편집자의 개입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가도 쉬운 결론을 허용치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갈래의 논의는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책들이 교양의 영역을 확장하는 길잡이로 떠올랐음을 말하는 것일 터. 그런데 길잡이라. 책에 대한 책이야말로 교양의 길잡이로는 제격이 아니겠는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우리 시대의 독서꾼 로쟈가 보여준 책 읽기의 황홀함 혹은 고통은 그가 일관성 있게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이 책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은 대중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그의 작업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한정숙ㆍ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09.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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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4 23:02 
    오후에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박사학위 수여식이 있던 날을 제외하면 가족들의 꽃다발을 받아본 게 처음이지 싶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몇 사람 언급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이 블로그를 아끼시는 분들과 <로쟈의 인문학 서재> 독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국일보(10. 01. 15) "안팎 어려움 속 출판계 격려… 사회적 자랑"  "제 56년 출판 인생의 고비마다 한국출판
 
 
다락방 2009-12-18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립니다, 로쟈님!! :)

hnine 2009-12-1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읽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하루 아침에 터진 '대박'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보람있으시겠어요.
위의 기사중 하이라이트 해놓으신,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과한 글을 씀으로써 완성된다'는 말씀이 눈에 특히 들어옵니다.

순오기 2009-12-1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합니다.
12월 첫주문으로 샀는데~ 깐깐한 독서본능 끝내고 읽으려고요.^^

2009-12-18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9-12-1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멋진 일이에요 ^^

토토랑 2009-12-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지금 읽고 있는데 ^^*

무해한모리군 2009-12-1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긴세월 곰삭여 뽑아낸 작품인데 상받으셔야죠
축하드립니다 으흣^^*
참 영상, 사진 이런거 잘받으시는거 같아용~~~

eleos 2009-12-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님의 작업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많은 도움을 받고도 늘 눈팅만 해서 정말 죄송했답니다.;;
바쁠수록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펠릭스 2009-12-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제와 애정이 있는 저서였습니다. 우리는 상호 독자의 입장인데요. 선택의 독립성과 원활한 균형감 그리고 지적 호환성을 잘 유지한 저서라 생각했습니다.(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 감사합니다 **.

나비80 2009-12-18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하십니다. 로쟈님의 글을 늘 갈무리해가며 보고 있는 저로서도 영광이네요. 축하드려요!^^

비로그인 2009-12-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인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읽을땐 소름돋는 공감을 느꼈습니다. 축하드려요^^*

쥬베이 2009-12-1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축하드려요!!

stella.K 2009-12-1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산체보고파 2009-12-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늘 눈도장만 찍었는데, 한줄 안 적을 수 없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계속 좋은 등대지기가 되어주시길 바라며
새해에도 건승하십시오.

mcjhu 2009-12-1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2권도 기대합니다.^^

폭설 2009-12-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축드립니다.^^

종횡무진 막힘이 없으시던데... ^^
아마, 님의 신도수는 순복음교회를 능가하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도 시베리아 원시림과도 같은
깊고, 넓고, 심오하고,
그리고 고독도 적당히 묻어나는 글 많이 쓰시기를~~~

게슴츠레 2009-12-1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로자의 저공비행"도 '무보수 중노동' 처지를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된 건가요?ㅎㅎ 앎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이래저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수상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네파벨 2009-12-1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마노아 2009-12-1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을 멋지게 마무리해주는 의미있는 수상이네요. 로쟈님 축하해요.^^

수유 2009-12-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Mephistopheles 2009-12-1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로쟈님..더불어 보내주신 책 잘 읽겠습니다..^^

L.SHIN 2009-12-1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 책을 보관함에 담고 말다니.

goghim 2009-12-1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받아 마땅합니다!!

딸기비누 2009-12-1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럴 것 알았어요~ 축하드려요!^^ 인문숲 강의도 기대할게요~~

무이 2009-12-1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 댓글 한번 잘 안다는데,
정말 축하할 소식이네요.
축하 드립니다.

leopard 2009-12-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9-12-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어떤 직함보다도 '우리시대의 독서꾼'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루체오페르 2009-12-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것도 다른 쟁쟁한 후보작들을 보니 수상이 더욱 빛나네요.^^

Joule 2009-12-1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명 저자 되시기 전에 로쟈 님 스튜디오나 사진 잘 찍는 친구 통해서 정말 로쟈 님 다운 사진 하나만 찍어두세요. 작가에게는 그 사람만의 사진이 한 장 있어야 해요. 수염이 안 난 에코와 프로이드, 지젝을 상상할 수 없잖아요. 그들은 아이 때도 젊었을 때도 항상 그런 모습이었을 것 같죠. 하루키의 최근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느끼한 중년 아저씨가 되어 버려서.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가 사진 찍은 스튜디오에서 자기도 프로필 사진 찍었다고 어느 수필집에서 자랑하던데 그 사진은 도대체 어디에 쓰이고 있는 건지.

카스피 2009-12-1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시페루스 2009-12-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로쟈의 인문학서재"책을 다읽지는 않았지만 좋은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정된것을 축하드립니다.^^ 참고로 저는 처음 댓글을 달았습니다.

kimji 2009-12-1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저도 괜히 제 일처럼 기쁩니다^^

PhEAV 2009-12-1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 이라고 쓰신 것을 읽고 사진을 보니 사진도 왠지 그런 표정이신 것 같은 느낌이 ^^;;
정말 축하드립니다~

2009-12-1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12-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우리들의 로쟈님인듯한 기분에 으쓱했는데...이젠 모두의 로쟈님이군여ㅎㅎ 넘넘 축하드립니다. 진짜 신나는 일이 많네요. 알라딘...여러가지 이슈도, 사건도 많고 올 한해 정말 근사한 소식도 많았슴다. 정점을 찍으신 것 거듭 축하요....제 수준에 안 맞는 거 같아 좀 미뤄두고 있는데...기어이 보긴 봐야겠군여 ㅎㅎㅎ

로쟈 2009-12-2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일이 답글을 달지 못하지만,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활약'까지는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2009-12-19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9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ti 2009-12-1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려요!!!!!

로쟈 2009-12-20 22:55   좋아요 0 | URL
감사.^^

stefanet 2009-12-1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축하드립니다.
기념(?)으로 사놓고 여지껏 시작하지 못한 로쟈님 책을 올해 안에 꼭 다 읽어야겠습니다.
다음달 한겨레 문화센터 강연때 뵙겠습니다. (제가 그 때 졸지 않기만을 바랄뿐...;;;;;;)

로쟈 2009-12-20 22:56   좋아요 0 | URL
흠, 졸지 않게 해드려야 할텐데요.^^;

jhokug 2009-12-2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9-12-21 20: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드립니다(솔직히 놀랐음ㅋ). 같은 블로거로서 기분좋은 일입니다. "지식이라는 재화는 얼마든지 나눠 가질 수 있으니까요."- 이 말 맞습니다. 누군에겐가 차 한 잔을 사준다면 내겐 재화의 손실이 생기지만 지식은 누구에게 아무리 나눠주어도 전혀 손실이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 )( )이다." 바로 (지)(식)입니다. 만약 전쟁이 난다고 해도 재산을 빼앗기고 건강을 빼앗길 수 있어도, 지식은 그대로 가질 수 있는 재산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 사람의 고유한 가치라고 할 수 있지요. 앞으로도 지식을 나눠주는 일에 애써 주시길...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로쟈 2009-12-24 17: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지식의 공유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대학 등록금도 낮아지지 않을까라는 게 바람이기도 하구요...

homania 2009-12-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사서 읽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었슴다..
어쨌든 독자는 독자. 축하날려요 ㅎㅎ

로쟈 2009-12-24 17:59   좋아요 0 | URL
어쨌든 감사는 감사.^^
 

한국일보의 2009년 출판계 결산 연재 가운데, 번역서에 관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엊그제 한 인터뷰에서 몇 마디 거든 게 인용돼 있다. '태반이 날림'이라고 한 표현은 과한데, 날림으로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 정도이다. '중국산 번역'이란 표현은 내가 곧잘 쓰는 것이다.   

한국일보(09. 12. 17) [책의 풍경, 2009] <8> 번역서,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

"번역서 비중? 글쎄, 한 20%쯤?"(장재용ㆍ직장인) "읽고 싶은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홍수완ㆍ한신대 경제학과 강사) "번역서 말고는 읽을 게 없다. 심지어 황우석 사건에 관한 것도 독일인이 쓴 게 제일 낫더라."(최성일ㆍ출판평론가)

책과 가까이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번역 도서에 대한 체감 비중은 높다. 올해 출판시장이 낳은 숫자 가운데 일반인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단연 '100만'(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부수)일 것이다.

그러나 출판의 생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다 무겁게 다가온 수치는 '31%'(발행종수 기준 2008년 국내 출판도서 중 번역서 비중)일 듯.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하면 번역서의 비중은 훌쩍 더 커지는데, 한국인의 서가는 번역자의 탈초와 윤문을 거친 외국인의 목소리에 차츰 점령돼 가고 있다. 

번역서 의존 갈수록 심화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대 중반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2000년 20%를 돌파한 후 꾸준히 확대, 2008년 드디어 30%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종수를 기준으로 한 단순 집계일 뿐이다. 판매량으로 따지면 학습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판 분야에서 번역서의 비중은 이미 50%를 넘어섰다는 것이 출판계의 중론이다.

특히 출판의 정수라 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의미있는 책은 십중팔구 번역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철학서의 경우 번역서 비중이 60%를 넘어섰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학문은 여전히 식민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돈다. 베스트셀러 목록도 마찬가지. 교보문고가 지난 15일 발표한 '2009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전체 종합 상위 30위(외국어학습서 제외) 가운데 번역서가 14권 포함돼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번역서가 범람하는 일차적 원인으로 "외국 저작물의 질적 비교우위"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출판계의 '단기 승부' 구조도 함께 지적했다.

▦상품성이나 판매량이 검증돼 최소한의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저렴한 번역비용으로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는 점 ▦저작권료 부담이 대체로 국내 인세나 원고료보다 저렴한 점 등이 그것이다. 결국 "사회의 지식ㆍ문화적 인프라 수준과 출판사들의 상업적 기동성이 결합, 출판 산업에 그대로 투영"돼 번역서 의존 심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 출판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766개 출판사 가운데 이전 3년(2004~2006년) 동안 번역 출판 경험이 있는 출판사는 55%에 달했고, 이들의 번역물 발행 비중은 46.2%였다. 번역 대상이 미국과 일본에 치중(2009년 67%)돼 있는 점과 저작권료의 급격한 상승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오염된 번역, 탁해지는 출판시장
번역서의 범람이라는 현상에 비해, 번역의 수준을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출판계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양보다 무분별한 번역이 해치고 있는 출판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서평 활동을 하는 이현우씨는 "번역의 질 자체는 태반이 '날림'"이라고 꼬집으며, 이를 유해 농산물에 빗대 '중국산 번역'이라 표현했다. 이씨는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이 더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듯, 독자도 품질 높은 번역서를 읽을 권리를 출판사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출판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에서 외국어 능력과 필력을 두루 갖춘 번역자는 양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정상급 번역자에게는 늘 1~2년씩 번역 물량이 몰려 있는데, 그들에게 번역을 맡기지 못할 경우 부실 번역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저작권 수입 비용이나 국내 저자의 인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번역료도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200자 원고지 1매당 3,000원 미만의 번역료를 받는 번역자의 비중이 3분의 1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꼭 필요한 분야의 책이 제때 번역돼 나올 수 있는 환경의 구축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자를 찾기 힘든 선진 담론을 소개하는 것이 번역 출판의 본래 의미. 그러나 기초학문 도서 등의 출간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거의 없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쟈넷 브라운 등의 훌륭한 다윈 관련 책들은 정작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 등 학계의 닫힌 현실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유상호기자) 

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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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산 번역?
    from 일방통행로 2009-12-17 19:52 
    로쟈의 저공비행은 내가 즐겨찾는 블로그다. 비평고원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름도 가물가물하고나..)일 때부터 그의 글을 봐 왔고, 특히 번역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혹은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에 마음으로나마 지지를 보내왔다.(지지를 꼭 드러나게 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그 지지의 한 방식으로 나도 중국쪽 원전이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조금씩 고쳐 두고는 했다. 천성이 게을러 눈에 띄게 하지는 못했지만. 양만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펠릭스 2009-12-1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지원사업이 정부나 민간기업차원에서 우선되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9-12-18 08:50   좋아요 0 | URL
도서관부터 먼저 잘 정비되면 좋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1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새책을 사면 운이 없어 그런지 오탈자, 잘못된 번역을 너무 자주 만나요. 참 이상하지요.. 틀림없이 세월가면 줄어야 될거 같은데 --

로쟈 2009-12-18 08:50   좋아요 0 | URL
그게 쉽게 달라질 것 같진 않구요, 출판문화 혹은 독서문화의 수준과 나란히 변화해가야 할 듯해요...

카스피 2009-12-1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같군요.독서인구 감소>출판사 경영 악화>부실 번역>독서인구 감소라고나 할까요.
개인적으론 정부가 쓸데없는 토목 공사에 비용 지출하지 말고 도서관에 책이라도 한권 더 넣어주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9-12-19 08:14   좋아요 0 | URL
그게 뭐 쥐귀에 경읽기가 돼서요...
 

오늘 택배로 받은 책의 하나는 도올 김용옥의 <대학 학기 한글역주>(통나무, 2009)이다. '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의 세번째 책이라고 하는데, <논어>와 <효경> 역주에 이어지는 모양이다(알라딘의 에러로 오늘 검색이 되지 않는다. '정전'인 셈치고 서재질도 쉬어야겠다!). 책은 생각보다 큰 판형의 하드카바. 이런 역주 작업이 도올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진작에 나섰어야 할 분야가 아닌가 싶다. 혹시나 싶어 관련기사를 찾으니 엉뚱하게도 지난 초가을에 있었던 그의 딸 김미루 작가의 사진 전시회에 관한 것만 잔뜩 뜬다. 뒷북이긴 하지만, 흥미를 끄는 작업이어서 관련기사와 몇 작품의 이미지를 옮겨놓는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기사(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5962)에서 가져왔다.    

  

여성신문(09. 09. 04) 김미루의 사진전시회 ‘나도(裸都)의 우수(憂愁)’ 

거물급들도 쉬이 전시를 하기 힘들다는 갤러리 현대 강남점에서 한 20대 신진 작가의 첫 개인전 ‘나도(裸都)의 우수(憂愁)’전이 열리고 있어 눈길이 쏠리고 있다. 그 주인공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전공한 김미루씨. 버려진 도시공간의 이면을 속속들이 잡아내어 과거로 침잠해 있던 시간을 끌어올리는 50점의 작품을 이달 13일까지 선보이는 중이다. 



작가는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사진작가로 변신하기까지 겪었을 그 감정의 위태로움처럼 까마득한 도심지의 교각, 버려진 설탕공장의 창고 등 방치된 도시구조물에 홀로 올라가 위험을 감수하며 거대도시의 황폐함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왜소함을 사진 속에 담았다.

황량한 도시풍경 속에 옷을 벗은 여성의 몸을 시각적 프리즘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일련의 사진작업들을 보면 ‘왜소함’을 통해 오히려 해방감과 안락감을 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차가운 철로를 걷고, 맨가슴으로 도시의 음습한 치부를 호흡하고 대화하는 젊은 여성으로 분한 작가의 발가벗은 몸은 지극히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연출된다. 그리고 이 취약함은 2007년 뉴욕타임스에서 포착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기사는, 작업이 인간의 나약함과 거대도시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데 그러한 효과는 “단지 에로티시즘이라기보다는 여자의 벗은 몸이 인간의 취약함(vulnerability)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신이 직접 작업의 누드모델이 된 경위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살아있는 생물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나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모델을 고용할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이런 곳을 들어가길 좋아하니까 가능하다. 누드는 문화적·시간적 요소를 모두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자, 전 세계적인 공통 언어가 인간의 몸이기에 자연스러웠다. 옷을 벗고 촬영하다 보면 공간이 변한다. 위험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편안하게 다가오며 나만의 공간으로 변한다.” 또 누드로 작업한 것에 대해서는 “나의 작업은 누드 그 자체에 초점을 두기보다 장소에 대한 느낌을 전하는 것이 더 크다”고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나 ‘개인적(private)’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유명인의 딸’(김씨는 도올 김용옥의 딸로 일찍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여자의 누드’(많은 언론이 여성인 작가 본인의 누드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에 대한 색안경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는 현실을 작업과정에서 좀 더 노련하게 다루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작품은 20대 젊은 여성이 나체 상태로 후미진 도시의 버려진 공간에 들어가, ‘누구라도 행여 들어올까’ 싶어 조마조마하게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이 ‘이 세상의 지배적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수많은 ‘다른 시선의 소유자’들에게 긴 여운이 남는 한 가닥의 떨림으로 다가서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 어쩌면 지금 한국에서 김미루씨의 작업은 사회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차단된 무균무떼의 예술이라는 진공관에서만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이자 사진 전문 트렁크갤러리 관장인 박영숙씨는 김미루의 작품세계에 대해 “사람들은 속은 안 보고 겉만 보는 데 익숙하다. 김미루씨는 이번 전시에서 사물의 속을 본 것”이라고 평한다. 그에 따르면, 김미루의 작업은 작가 자신의 말처럼 탐험이며, 한 명의 탐험가로 마치 위, 심장, 콩밭 등 우리 몸 내장을 들여다보듯 아무도 가지 않는 도시의 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박 작가는 “그가 옷을 벗고 도시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옷을 입고 도시의 원시림으로 들어가면 옷자락이 여기저기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며 향후 트렁크갤러리에서 김미루의 이러한 ‘탐험가로서의 측면’을 보다 상세하게 조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에게서 잊힌 도시의 공간에 잠시나마 내가 거함으로써 낯설기만 했던 곳은 친숙한 곳으로, 위험한 곳은 놀이터로, 거친 곳은 평화로운 곳으로 탈바꿈하였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러한 사회로의 탐험에 나침반이 필요하다면 작가의 작업노트와 작업설명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김미루 홈페이지 www.mirukim.com (정필주 객원기자/ 이화여대 예술사회학 박사과정)  

09.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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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12-16 21:52 
    [알라딘서재]김미루와 벌거벗은 도시의 우수
 
 
펠릭스 2009-12-1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문학을 전공하고 해부학을 공부하다 말고 사진작가의 길을 가군요. 미국 대학은 부전공 제도가 잘 된듯 합니다. 해부학은 몸의 내부를 해체하여 구조적인 면 등을 공부하는 것인데, 그 몸의 외형을 지상의 사물 사이에 배치하는 전환성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차가움과 따뜻함, 죽은 것과 산 것, 정지와 흐름 등을 연상케합니다. 또한 <도울 김용옥 비판/김상태/옛노을>과 MBC 여성 앵커모습도 생각납니다.

로쟈 2009-12-17 08:11   좋아요 0 | URL
꽤 화제가 됐던 듯한데,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sophie 2009-12-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옷을 모두 벗은 여자의 몸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드네요. 인간의 몸이 말랑말랑하기 때문인가 싶기도하고요.

알케 2009-12-1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열살인 아들 이름이 미루입니다 ^^ 두루 彌 새길 鏤 아이 이름을 짓고 보니 도올선생 아이 이름과 같더군요. 아이 낳기 전 언제부턴가부터 그 이름이 입에 맴돌더니...^^

저는 도올선생의 <논어한글역주>를 읽고 있습니다. 주희 역주 위에 沃案이라고 역주를 단 도올의 서지학, 고문학 지식과 도발적 역주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김화영 교수 번역의 카뮈 전집이 완간됐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1987년에 첫권이 나왔다. 그 여름에 내가 읽은 <결혼 여름>이 첫 권이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내년에 카뮈의 몇몇 작품을 강의할 기회가 있는데, 그 시간의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겠다. '레전드'가 될 만한 역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경향신문(09. 12. 16) “7년 예상 ‘카뮈 전집’번역 23년 씨름했어요” 

“이제 여기서 근 23년에 걸친 한국어판 ‘알베르 카뮈 전집’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지난 10일자로 발행된 카뮈(1913~60)의 책 <시사평론>(책세상) 번역자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987년 산문집 <결혼·여름>으로 시작된 카뮈 전집(총 20권) 번역을 끝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68)를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전집 번역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었다. “첫권인 <결혼·여름>은 너무나도 서정적인 산문집입니다. 일부만 번역돼 있었기에 ‘내가 한번 해볼까’ 하던 차에 책세상 주간이던 소설가 호영송씨가 86년 제안을 해서 이듬해에 출간했죠.” 출판사는 내친 김에 전집을 번역하자고 했다. 그래서 2권인 <이방인>부터 전집 23권의 목록이 책 뒷날개에 실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독점계약을 맺었는데 국내에서 카뮈의 작품이 정식계약을 맺고 번역되기는 이 전집이 처음이다. “독점계약이었기에 지금도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카뮈의 작품은 올라있지 않습니다.” 내년 1월4일은 카뮈가 죽은 지 50년째 되는 날이므로 2011년 사후 저작권이 풀린다. 



김 교수에게 오랫동안 자신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던 카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신명나는 일인 듯 보였다. 그 앞에 놓인 머그잔은 인터뷰 초반에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카페라테가 남긴 거품이 말라가고 있었다. 첫권을 번역할 당시 40대 교수였던 그는 1년에 3~4권씩 번역하면 7~8년이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에서 은퇴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나이”가 돼서야 끝났다. “해제를 쓰는 작업이 더 고역이었습니다. 마라톤을 막 끝냈는데 한바퀴 더 돌라는 격이죠.” 그래서 23권으로 계획됐던 전집은 한국 독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시사평론> 2권과 3권,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서한집을 제외시킨 채 20권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그동안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가 여러명 바뀌었고 번역문체도 변화를 겪었다. 언어환경 전반에 한자어 사용이 급격하게 줄면서 뒤로 갈수록 한글 구어체 비중이 높아졌다. “문자에 너무 얽매였던” 그의 번역 태도도 바뀌었다. “나이가 들수록 원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김 교수는 이 부분에서 걸핏하면 “어렵다”고 하는 독자들을 질타했다. “원문 자체가 어려운데 독자들이 아무 노력도 안하면서 쉽게만 번역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라는 것이다. 



카뮈는 1913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었던 42년 소설 <이방인>을 발표, 프랑스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카뮈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했다. 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카뮈는 6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은 책이 3권 있습니다. 이걸 보면 카뮈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작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기와 비슷한 사적 기록들인데 작품 계획과 변동사항을 세세하게 기록해 뒀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그는 항상 자기 문제와 시대의 문제로 씨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카뮈의 작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사이클’을 이루는 방식이다. 카뮈가 천착한 첫번째 사이클은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였는데 소설 <이방인>,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오해>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선택한 테마인 ‘반항’이 두번째 사이클이다.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정의의 사람들·계엄령> 등이다. “카뮈는 세번째 사이클인 ‘절도(節度)’에 대해 쓰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흔히 카뮈를 ‘실존주의자’로 부른다. 그러나 카뮈는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할 정도로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와 거리를 뒀다. “실존주의는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데 카뮈는 유의미할 수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이게 사르트르와의 차이점입니다.” 카뮈가 마지막으로 집중한 주제였던 ‘절도’가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중용’을 뜻하는 것처럼 카뮈의 사상 핵심은 ‘균형’이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카뮈는 절대로 낡은 고전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도 살아 펄떡거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가”라고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뮈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도 ‘모든 부정 속에 긍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히로시마 원폭을 비판했던 것도, 사형제를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죠. 이런 메시지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미를 지닙니다.”(김재중기자) 

09. 12. 16.  



P.S. 얼마전에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 2009)를 내고서 김화영 교수가 주간한국과 가진 인터뷰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http://weekly.hankooki.com/lpage/people/200911/wk20091109190120105610.htm) "선생은 <마담 보바르>나 <이방인>과 같은 작품은 수백 번을 읽었고 아직도 일 년에 한 번은 읽는다고 말했는데, 국내 문학 작품을 볼 때도 이 기준은 유효하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전부 시적인 작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은 내가 이해하는 불문학자이자 비평가 김화영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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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12-16 01:33 
    [알라딘서재]카뮈 전집과 씨름한 23년
  2. 김화영 교수, 카뮈전집 완간
    from 한사의 서재 2009-12-16 09:37 
      카뮈 타계 50주년 앞두고 한국어판 전집 완간           김화영 고대 명예교수         실존의 부조리(不條理)에 반항했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한국어판 전집(책세상 출판사)이 카뮈 타계 50주년(2010년 1월 4일)을 앞두고 완간됐다.    불문학
 
 
비연 2009-12-1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화영교수 번역의 카뮈 전집을 다 모으고 있는 입장에서, 정말 큰 일을 하셨다는 생각이.

로쟈 2009-12-17 08:07   좋아요 0 | URL
전집을 다 모으시는 것도 큰일인데요.^^

sophie 2009-12-16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라발도 헌 책 더미 속에서 사르트르와 카뮈를 꼽으면서 특히 카뮈가 글을 잘 썼다고 하더군요. 그건 글에 대한 얘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2-17 08:09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냐 카뮈냐란 물음이 한때 유행하긴 했었죠. 프랑수아즈 사강은 사르트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9-12-16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7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9-12-1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경의를 표해야겠군요. 작가수첩은 읽어보고 싶긴한데
까뮈하면 왠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말이죠.ㅜ

로쟈 2009-12-17 08:10   좋아요 0 | URL
설마 수첩까지도 어려울라구요.^^;

펠릭스 2009-12-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와 톨스토이는 치밀하며 용의주도한 작가인듯 합니다.

로쟈 2009-12-17 08:11   좋아요 0 | URL
창작에 대한 태도에는 그런 면도 있는 듯하네요...
 

유종호 교수의 시비평집 출간 소식을 전한 김에, 게다가 Sati님의 부추김에 힘입어 자작시 한 편을 옮겨놓는다. 예전에 마지막 '모스크바통신'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모두 비공개로 돌리면서 지금을 읽을 수 없게 된 듯하다. 말하자면 '리바이벌'이다.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란 제목이 여러 번 반복되는 이 시를 실제로 나는 흥얼거리며 여기저기 걸어다니곤 했다. 자작시로 그만한 쓰임새라면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잘 생긴 나무들과 눈이 동그랗던 꽃나무들과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던 삶의 품위와 가벼운 멜랑콜리와
그때마다 맛보던 가벼운 페이소스와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잘 익은 가지들과 울타리 덩굴장미들과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던 미래의 어느 풋풋한 오후와
그때마다 이마에 맺혀 오던 땀방울과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코스모스처럼 떠다니던 한 조각 사연들과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던 한때의 미련과 미련의 부피와
그때마다 붉게 물들어 떨어지던 낮은 탄식들과
또 어느새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마다에
소복소복 하얗게 쌓인 눈과 군데군데 뿌려진 연탄재와
그때마다 뽀얀 입김 속에 그려지던 추억들과
그때마다 눈물나게 아름답던 눈꽃들과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늙은 나무들과
비와 바람과 눈감으면 바람 속 숨죽인 먼지들과……  

 

09.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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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12-1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행가처럼 입에 짝짝 붙어요. <-와>가 이렇게 근사한 조사인 줄 몰랐어요. 어느 출판사에서 시집 내준다고 하면 군말하지 마시고 그냥 얼른 한 권 내세요. 아시죠. 시집은 한 권이면 일평생 충분하다는 거.

로쟈 2009-12-15 10:51   좋아요 0 | URL
네, 내주겠다는 출판사도 조만간 생길 거 같습니다.^^

starla 2009-12-15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리 내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아래 사진과 잘 어울리네요.
조금 스산하고 조금 쓸쓸하고...

로쟈 2009-12-15 10:50   좋아요 0 | URL
네, 가벼운 페이소스를 전달하고자 했지요...

비로그인 2009-12-1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의 사진은 이국적인 느낌인데요?...ㅎㅎ'눈물나게 아름답던 눈꽃들과....'^^*

로쟈 2009-12-15 10:50   좋아요 0 | URL
네, 분위기는 비슷한데, 우리 골목은 아닙니다.^^

NILNILIST 2009-12-1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오늘 아트앤스터디에서 러시아문학강의 신청 받더군요~
당장 수강신청했습니다^^ 1월달에 뵐게요~ㅋ

로쟈 2009-12-15 23:11   좋아요 0 | URL
네, 감사. 1월에 뵐게요.^^

펠릭스 2009-12-1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어다닌 골목에 구멍가게 있었죠. 외상으로 빵과 우유를 사먹고,,,상점 아줌마를 피해 다니던 중학시절의 골목,,,,골목 어귀에서 바라보던 저희 집 축대에 금이가 위험스러웠어요.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했죠...골목에는 많은 얘기가 숨어 있습니다. 장미와 아이가 유머스럽습니다. 송창식의 '한번쯤' 노래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제 기억을 되살린 시입니다.(15,11:21)

로쟈 2009-12-15 23:11   좋아요 0 | URL
네, 골목은 대로와는 또 다르죠. 골목도 점점 사라져가는 듯해요...

쉽싸리 2009-12-2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습니다. 며칠새 눈도 많이 오고, 골목에 대한 아련한 상념 같은게 있죠.
바삐 다니고 그러다 돌아오는 늦은 밤 쉴수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