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교수의 시비평집 출간 소식을 전한 김에, 게다가 Sati님의 부추김에 힘입어 자작시 한 편을 옮겨놓는다. 예전에 마지막 '모스크바통신'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모두 비공개로 돌리면서 지금을 읽을 수 없게 된 듯하다. 말하자면 '리바이벌'이다.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란 제목이 여러 번 반복되는 이 시를 실제로 나는 흥얼거리며 여기저기 걸어다니곤 했다. 자작시로 그만한 쓰임새라면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잘 생긴 나무들과 눈이 동그랗던 꽃나무들과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던 삶의 품위와 가벼운 멜랑콜리와
그때마다 맛보던 가벼운 페이소스와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잘 익은 가지들과 울타리 덩굴장미들과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던 미래의 어느 풋풋한 오후와
그때마다 이마에 맺혀 오던 땀방울과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과
코스모스처럼 떠다니던 한 조각 사연들과
그때마다 생각하곤 했던 한때의 미련과 미련의 부피와
그때마다 붉게 물들어 떨어지던 낮은 탄식들과
또 어느새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나무들마다에
소복소복 하얗게 쌓인 눈과 군데군데 뿌려진 연탄재와
그때마다 뽀얀 입김 속에 그려지던 추억들과
그때마다 눈물나게 아름답던 눈꽃들과 

내가 걸어다닌 골목들과 골목어귀의 늙은 나무들과
비와 바람과 눈감으면 바람 속 숨죽인 먼지들과……  

 

09.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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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12-1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행가처럼 입에 짝짝 붙어요. <-와>가 이렇게 근사한 조사인 줄 몰랐어요. 어느 출판사에서 시집 내준다고 하면 군말하지 마시고 그냥 얼른 한 권 내세요. 아시죠. 시집은 한 권이면 일평생 충분하다는 거.

로쟈 2009-12-15 10:51   좋아요 0 | URL
네, 내주겠다는 출판사도 조만간 생길 거 같습니다.^^

starla 2009-12-15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리 내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아래 사진과 잘 어울리네요.
조금 스산하고 조금 쓸쓸하고...

로쟈 2009-12-15 10:50   좋아요 0 | URL
네, 가벼운 페이소스를 전달하고자 했지요...

비로그인 2009-12-1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의 사진은 이국적인 느낌인데요?...ㅎㅎ'눈물나게 아름답던 눈꽃들과....'^^*

로쟈 2009-12-15 10:50   좋아요 0 | URL
네, 분위기는 비슷한데, 우리 골목은 아닙니다.^^

NILNILIST 2009-12-1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오늘 아트앤스터디에서 러시아문학강의 신청 받더군요~
당장 수강신청했습니다^^ 1월달에 뵐게요~ㅋ

로쟈 2009-12-15 23:11   좋아요 0 | URL
네, 감사. 1월에 뵐게요.^^

펠릭스 2009-12-1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어다닌 골목에 구멍가게 있었죠. 외상으로 빵과 우유를 사먹고,,,상점 아줌마를 피해 다니던 중학시절의 골목,,,,골목 어귀에서 바라보던 저희 집 축대에 금이가 위험스러웠어요.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했죠...골목에는 많은 얘기가 숨어 있습니다. 장미와 아이가 유머스럽습니다. 송창식의 '한번쯤' 노래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제 기억을 되살린 시입니다.(15,11:21)

로쟈 2009-12-15 23:11   좋아요 0 | URL
네, 골목은 대로와는 또 다르죠. 골목도 점점 사라져가는 듯해요...

쉽싸리 2009-12-2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습니다. 며칠새 눈도 많이 오고, 골목에 대한 아련한 상념 같은게 있죠.
바삐 다니고 그러다 돌아오는 늦은 밤 쉴수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