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교수 번역의 카뮈 전집이 완간됐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1987년에 첫권이 나왔다. 그 여름에 내가 읽은 <결혼 여름>이 첫 권이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내년에 카뮈의 몇몇 작품을 강의할 기회가 있는데, 그 시간의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겠다. '레전드'가 될 만한 역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경향신문(09. 12. 16) “7년 예상 ‘카뮈 전집’번역 23년 씨름했어요”
“이제 여기서 근 23년에 걸친 한국어판 ‘알베르 카뮈 전집’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지난 10일자로 발행된 카뮈(1913~60)의 책 <시사평론>(책세상) 번역자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987년 산문집 <결혼·여름>으로 시작된 카뮈 전집(총 20권) 번역을 끝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68)를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전집 번역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었다. “첫권인 <결혼·여름>은 너무나도 서정적인 산문집입니다. 일부만 번역돼 있었기에 ‘내가 한번 해볼까’ 하던 차에 책세상 주간이던 소설가 호영송씨가 86년 제안을 해서 이듬해에 출간했죠.” 출판사는 내친 김에 전집을 번역하자고 했다. 그래서 2권인 <이방인>부터 전집 23권의 목록이 책 뒷날개에 실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독점계약을 맺었는데 국내에서 카뮈의 작품이 정식계약을 맺고 번역되기는 이 전집이 처음이다. “독점계약이었기에 지금도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카뮈의 작품은 올라있지 않습니다.” 내년 1월4일은 카뮈가 죽은 지 50년째 되는 날이므로 2011년 사후 저작권이 풀린다.
김 교수에게 오랫동안 자신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던 카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신명나는 일인 듯 보였다. 그 앞에 놓인 머그잔은 인터뷰 초반에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카페라테가 남긴 거품이 말라가고 있었다. 첫권을 번역할 당시 40대 교수였던 그는 1년에 3~4권씩 번역하면 7~8년이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에서 은퇴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나이”가 돼서야 끝났다. “해제를 쓰는 작업이 더 고역이었습니다. 마라톤을 막 끝냈는데 한바퀴 더 돌라는 격이죠.” 그래서 23권으로 계획됐던 전집은 한국 독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시사평론> 2권과 3권,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서한집을 제외시킨 채 20권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그동안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가 여러명 바뀌었고 번역문체도 변화를 겪었다. 언어환경 전반에 한자어 사용이 급격하게 줄면서 뒤로 갈수록 한글 구어체 비중이 높아졌다. “문자에 너무 얽매였던” 그의 번역 태도도 바뀌었다. “나이가 들수록 원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김 교수는 이 부분에서 걸핏하면 “어렵다”고 하는 독자들을 질타했다. “원문 자체가 어려운데 독자들이 아무 노력도 안하면서 쉽게만 번역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라는 것이다.
카뮈는 1913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었던 42년 소설 <이방인>을 발표, 프랑스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카뮈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했다. 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카뮈는 6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은 책이 3권 있습니다. 이걸 보면 카뮈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작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기와 비슷한 사적 기록들인데 작품 계획과 변동사항을 세세하게 기록해 뒀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그는 항상 자기 문제와 시대의 문제로 씨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카뮈의 작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사이클’을 이루는 방식이다. 카뮈가 천착한 첫번째 사이클은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였는데 소설 <이방인>,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오해>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선택한 테마인 ‘반항’이 두번째 사이클이다.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정의의 사람들·계엄령> 등이다. “카뮈는 세번째 사이클인 ‘절도(節度)’에 대해 쓰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흔히 카뮈를 ‘실존주의자’로 부른다. 그러나 카뮈는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할 정도로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와 거리를 뒀다. “실존주의는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데 카뮈는 유의미할 수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이게 사르트르와의 차이점입니다.” 카뮈가 마지막으로 집중한 주제였던 ‘절도’가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중용’을 뜻하는 것처럼 카뮈의 사상 핵심은 ‘균형’이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카뮈는 절대로 낡은 고전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도 살아 펄떡거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가”라고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뮈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도 ‘모든 부정 속에 긍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히로시마 원폭을 비판했던 것도, 사형제를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죠. 이런 메시지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미를 지닙니다.”(김재중기자)
09. 12. 16.
P.S. 얼마전에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 2009)를 내고서 김화영 교수가 주간한국과 가진 인터뷰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http://weekly.hankooki.com/lpage/people/200911/wk20091109190120105610.htm) "선생은 <마담 보바르>나 <이방인>과 같은 작품은 수백 번을 읽었고 아직도 일 년에 한 번은 읽는다고 말했는데, 국내 문학 작품을 볼 때도 이 기준은 유효하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전부 시적인 작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은 내가 이해하는 불문학자이자 비평가 김화영과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