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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음악 - 2024 볼로냐 국제 아동 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Dear 그림책
미란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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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듣는 음악! 책을 덮은 후 세상은 음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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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과 나 그림책향 30
미란 지음 / 향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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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구멍이 꼭 내 인생의 오점처럼 느껴졌어요. 오점을 덮고, 깨고, 불화하다가 결국 그 구멍이 필연적인 나의 세계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더군요. 마지막 페이지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구멍 하나로 집요한 상상을 펼쳐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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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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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라는 생각을 염두에 둔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 내 상상 속 이미지는 이렇다. 이삿짐을 하나하나 싸며 그 짐에 맞는 추억들을 떠올리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박스에 집어넣어 청테이프를 찌익 찢어 붙여 마무리하고는 허리를 펴 한숨 한 번 휴. 박스가 늘어갈수록 집에 대한 추억과 생각들이 머리와 가슴에 쟁여지고 정리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에게 대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자!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원래 인생이든 뭐든 마무리의 백미는 정리 아니겠나? 그래서 노문학가의 글들을 보기 전에는 늘 경건한 마음자세를 하게 된다. 어떤 정갈함. 그리고 삶의 정답을 엿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역시도 같은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정리된 집이 아닌 모든 물건들이 그 자체로 흐드러져 있는 곳에 초대받은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 책표지가 아닌 작가가 제시한 어떤 미지의 통로로 연결되어 계속 덤덤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마지막임에도 마무리된 것 같지 않은 마지막. 정리하고 보기 좋게 다듬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닫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청테이프 같은 것을 거부하는 미학을 나는 이 소설집에서 읽었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의 소설을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함께. (노벨상이 땡큐다)

 

나는 서평가 크리스천 로렌첸이 먼로에 대해 “평생 같은 주제만 반복하는 ‘변주의 대가’”라고 말한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비아냥이 아닌 텍스트의 의미 그대로다. 대가가 흘리는 변주의 선율에 취해 내뱉는 감탄 섞인 동의로서 말이다.『디어 라이프』속 열 개의 단편과 네 개의 자전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촌스럽게도 자꾸만 몇 가지 키워드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먼로가 어떤 주제에 대해서 반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단편들을 읽어나갈 때마다 키워드를 중심으로 생각들이 응집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안개처럼 퍼지고 번져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떠올린 키워드를 끝내 언어로 잡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또 손에 잡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파열선

 

신형철 평론가는 단편소설의 최소조건을 ‘파열선’이라고 했다. 사건이 일어나고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파열선.『디어 라이프』의 열 네 편의 소설에도 각각의 파열선들이 있다. 삶의 지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최초의 작은 선. 그 작은 선에서 촉발되는 상상은 독자의 몫이라는 게 단편소설의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먼로가 어쩜 장편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결말(아닌 결말)을 독자들에게 주었다고 생각(착각)한다.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삶은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다’이다. 이 말은 ‘끝내 극복하리라’라는 극기의 메시지가 아니다. 극복되지 않았다면 또한 그것대로 완성되는 것이 삶이라는 요상한 메시지이다.

 

 

대담한 사랑

 

소설 속에서 여러 파열선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나는 단순하게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이저벨이 말한 ‘대담한 사랑’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일별하게 된다. ‘대담한 사랑’은 사람들이 쉽게 표현하는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담한 사랑은 단순히 ‘윤리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만으로 포획되지 않는다. 물론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죄’라고 불리기도 하고, ‘불법’이라고 여겨지며 그 행위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대담한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인간 삶의 최소요건이라 할 수 있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중에 말하길 그때 어머니도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고 했다. 아마도 살면서 처음으로,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고.” (자갈)

 

그러므로 문학은 누군가의 삶의 이유를 단순하게 불륜이라는 시선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것을 정당화 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디어 라이프』에서 먼로가 알게 모르게 ‘대담한 사랑’에 대한 여러 변주를 했고, 불륜, 대담한 사랑, 죄 등으로 포착해낼 수 없는 잉여의 조각들을 다채롭게 펼쳤다고 생각한다.

 

 

불평할 권리

 

대담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고난의 주체가 되는 인물과 달리 그로 인해 남겨지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소설에서 불평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로서 조명된다. 그리고 대담한 사랑을 위해 떠난 이들의 인력(引力) 또는 죄로서 작용한다. 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고난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끊임없는 연쇄가 시작되는 것이다.

 

죄, 그녀는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결연하고 탐닉적인 관심을 아이가 아닌 다른 것에 기울였었다. 죄. (39쪽, <일본에 가 닿기를>)

 

묘하게 표정이 없는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 그러다 아이는 자기가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기 시작한다. 그제야 아이는 자기 세상을 되찾는다. 괴로워하고 불평할 권리를 되찾는다. (37쪽, <일본에 가 닿기를>)

 

주체와 객체로서의 이분법이 아닌 누구나 주체가 되고 또 객체가 될 잠재성을 갖는다. 대담한 사랑으로 얻은 연인을 다른 대담한 사랑으로 잃는다. 또 대담한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죽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느끼는 ‘살아있음’은 다른 누군가에게 ‘절망’ 또는 ‘죽음’이 된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한 사람의 절망에 혹은 살아있음에 포커스를 맞추어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플롯

 

자발적 고난의 주체는 떠난다. 혹은 떠나진다.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아문센에서 토론토로, 시골에서 타운으로, 타운에서 시골로.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새로운 풍경, 새로운 기온에 자신을 맞춰 새로운 시간을 산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그리고 지금은 죽은 마거릿 로즈가 겁먹은 잭슨을 향해 뿔을 들이댄 우스운 사건이 일어났던 때를 그녀는 전혀 구분하지 않는 듯 했다. (248쪽, <기차>)

 

남은 자 혹은 남으려는 자들은 딱히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기억은 편년체라기보다는 기전체에 가깝다. 또는 자기중심적으로 구성하는 플롯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메이벌리를 떠나며>에서 레이는 리아에게 영화를 토막토막 봐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플롯이란 작가의 의도에 맞게 시간을 토막 낸 단위다. 재미있게도 남은 자 레이는 리아의 삶과 그녀의 변화를 토막토막 목격하고 쉽사리 그 변화의 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소설에서는 떠난 자를 모험가 혹은 변화의 주체로, 남은 자를 고립된 자 변화를 거부하는 자의 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다만 서로 자기가 설정한 상대방의 플롯 이면을 보지 못할 뿐이다. 각자는 각자대로 시간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때로 다시 만난다. 기차를 타고 떠난 사람은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온다. 삶을 끝낸다 해도 결국 기차 레일에서다. 떠나봤자 기차레일이 닿는 어떤 곳에서 삶은 이루어진다.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 안에서 인물들 간의 플롯은 언젠가 다시 겹쳐진다. 물질적 세계에서 겹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신적 세계에서 남은 자와 떠난 자는 끝내 서로를 감당해야 할 몫으로 작용한다.

 

 

시선

 

소설 속 시대에서 여성은 사회로부터 합당하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그리고 행여 여성이 대담한 사랑이나 여타 기대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매춘부나 죄인 또는 죽어도 싼 사람이 된다. 여성을 시선으로 옥죄는 것은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종교, 사회에까지 광범위하다. 또는 돈 이모처럼 남편에게 최고의 안식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만의 특별하고 독특한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과 한계는 꼭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기준에서 영웅적 인물인 <시선>의 세이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춤에 빠져들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죽는다. 어떤 이는 고정관념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힐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도덕과 규율의 한계를 넘어 주체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결과가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재밌는 것은 그 결과가 더 나쁠 수도 있었고, 더 좋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에서 어떤 종류로서의 완전함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디어 라이프』는 나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구성의 묘미들이 있다. 반전이나 복선의 실현들이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단순히 재미에만 복무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측 못했던 결말이나 긴장이 해소되고, 뜻밖의 인물들이 만나는 사건들은 형식의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반전의 결과는 인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상태로 회귀할 수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나빠질 수도 있다. 독자는 그 자체로 한 번 놀라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인물이 반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소설 속 대개의 인물은 큰 반전이나 변화를 겪은 후 그 현상 자체를 자체로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단순히 <자갈>에서의 닐처럼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 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지기 위해 망각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카로의 ‘첨벙’소리를 기다린다. 나는 마치 이것이 상처를 흉터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선연한 상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소설집을 통해 어설픈 행복보다는 현실 속 완전함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상태. 모든 환상이나 생각이나 꿈을 걷어낸 후 남는 선명한 현실. 그런 선명한 현실만 냉정히 인식한다면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는 말에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어떤 기만도 틈입하지 않는 삶을 추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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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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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멘토를 찾고 싶어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이가 멘토를 자처하며 삶의 이정표와 매뉴얼을 고급레스토랑의 코스요리처럼 포장해 내놓는 상황에서 나는 왜 더이상 마음을 잡아끄는 메뉴를 고르지 못할까? 가까이는 좋은 세계를 짓는 예술가부터 멀리는 좋은 회사를 경영하는 CEO까지. 각종 '좋음'이 제작되기 위해 어떤 방법과 노력이 투입되었는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삶의 동력을 얻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계기, 어느 지점이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삶에 표류하게 됐을 때, 누군가를 찾거나 어떤 책을 뒤적거려도 그간의 방식으로는 '삶 에너지'가 차오르지 않음을 느꼈다. 휴대폰 배터리는 바닥을 보이는데 충전기를 꽂을 데가 없는 사람처럼 나는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멘토없이 길고 힘든 방황을 마친 후 나는 더 이상 멘토를 찾지 않아도 좋았다. 왜였을까? 굳이 알지 않아도 좋았던 이유,  <데미안>을 읽고 나니 이제야 겨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것이다." (8쪽)


 

세계들...
 
<데미안>에는 여러 세계가 공존한다. 세계들은 공존하되 주인공 싱클레어가 경험하기 좋은형태로 분절되어 있다. 싱클레어는 이 세계들을 횡단하며, 종국에는 자신만의 통합된 감성을 완성하고자 한다. 싱클레어의 모든 세계-내-존재-되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 두려운 프란츠 크로머와의 이질성을 없애기 위해 그가 포함되어 있는 '어두운 세계'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었듯 말이다. 또한 각각의 세계는 헤세의 낭만끼 가득한 단어들로 표상된다. '밝은 세계'가 성경, 거울, 용서, 사랑, 존경 등으로 표현되며 모든 불순물을 깎아 투명함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처럼, '어두운 세계'는 사납고, 잔인한, 자살, 부랑, 노파, 젊은 아가씨등으로 모든 정수를 걷어간 후 남은 건더기들만이 간단없이 흩어져있는 느낌이다. 싱클레어는 각 세계를 대표하는 언어들을 타고 세계를 부유하며 체험하지만 언어의 양탄자 아래. 본질로는 쉬이 침잠하지는 못한다. 방황이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으로 가득 찬 두려워하는 영혼이 팔랑거렸다." (90쪽)


 

해석만이 내 세상

 

아마 데미안은 멘토계의 최연소 전설로 남을 것이다. 또래집단의 구성원임에도 그에게 풍기는 아우라는 어른의 그것이다. 그러나 이후 싱클레어도 깨달았겠지만 데미안의 '자신만의 공기'는 보편 어른의 본질은 아니다. 데미안은 그저 자신이 해석한 세계 즉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카인'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해석한다. 신성성을 찌르고 그 피로 새로운 관점을 써내려간다. 믿음을 제 1전제로 삼는 성서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명한 언어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 이것은 선악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세상구도에 얽매이지 않은채 '카인의 표'를 얻는 방법이다. '다른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이 유일한 표식은 면밀한 관찰과 사색 그리고 해석의 담금질을 거친 후 '개성'이라는 실체로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 무엇도 영원히 '금지된' 것은 없어" (77쪽)


 

무의식, 나보다 더 '나' 인...

 

쉽게 해석되지 않는 것이 있다. '무의식'이다. 꿈을 꾸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무의식에는 선도 악도 도덕도 없다. 세상의 질서를 한꺼풀 벗겨내고 날비린내 나는 욕망만이 에너지형태로 잔존하는 것, 프로이트는 이를 '무의식'이라 불렀다. 베아트리체를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문장을 삼킨 새가 내 안에서 나를 쪼아먹는 꿈, 어머니이자 애인이며 창녀, 갈보인 그것, 그것은 싱클레어 '자신'이었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인 '아프락사스'는 해석의 대상이 아닌 듯 하다. 그저 제단을 쌓아 질문하고 비난하며 애무하고 기도해야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 숭배는 감각적이거나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새가 알을 깨듯 제단은 끊임없이 깨어져야 한다. 그것은 숙명이다. 운명의 생김새를 한 에바부인이 "그 어떤 꿈도 꼭 붙잡으려 해서는 안 돼요."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무의식이 패거리에 집착할 때, 거대한 나르시시즘이 형성될 때, 세계의 종말은 다가온다.

 

"꿈이 나타나기 전까진 어려웠죠." (171쪽)


 

모든 멘토를 죽이고...

 

"지독히 고리타분해요!"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에게 한 말이다. 피스토리우스는 '한 인간이 하늘과 지옥을 흔들어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영혼의 목소리가 옳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게 하는'음악으로 싱클레어를 '내면 세계'로 인도했다. 이는 ''어두운 세계'를 열어주는 프란츠의 휘파람 소리, 비판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미안의 눈길과도 같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어떤 신호나 문장만으로 다른 차원으로 바꿔주는 것. 멘토에게는 그런 주술적인 힘이 있다. 그러나 멘토의 역할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도록 돕는 일'까지다. 멘토는 신전 앞에서 아프락사스의 일갈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그 이후에는 모두 혼자다. 고독. "난 못해. 그러면 난 벌벌 떨려. 나는 그렇게 완전히 벌거벗고 고독하게 서 있을 수가 없다네." 이후에는 '우리 모두의 돼지'로 돌아가든지 '깨어난 인간'이 되든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분명 '깨어난 인간'은 아니지만 멘토와는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신전 앞에서는 멘토를 죽이거나, 그가 깨어난 자라면 꿈 속의 새처럼 그를 안에서부터 쪼아먹어 그가 되어야 한다. 깨어난 사람들은 깨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나는 깨어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인상깊었던 데미안이 자신에게 침잠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진짜 데미안은 지금의 모습, 돌로 된, 태고를 간직한, 짐승과 같은, 돌과 같은, 아름답고 차가운,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본 적 없는 생명으로 은밀히 가득 차 있는 저런 모습이었다. 그를 에워싼 이 고요한 공허, 이런 에테르와 별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 (80쪽)

 

그리고 싱클레어

 

"데미안에게 그랬듯이 나는 그가 없어도 그에게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었다. 그냥 그를 강력하게 상상하면서 내 질문이 집약적인 생각의 형태로 그를 향하게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질문 안에 담긴 온갖 영혼의 힘이 대답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다만 그럴 때 내가 상상하는 것은 피스토리우스나 막스 데미안 개인이 아니라 꿈에 나타나는, 내가 그림으로 그린 모습이었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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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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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으로만 접하던 성석제의 소설을 드디어 읽다. 가벼운 듯 풍자의 미(美)를 솔솔 피워 올렸다가 문득 날카롭게 핵심을 향해 내달리는 통찰을 보고 있자니 절로 박민규가 연상되었다.『왕을 찾아서』가 96년에 출간되었고 성석제가 박민규에게는 까마득한 선배라지만 독자인 내가 박민규를 먼저 접했으니 이 부조리한 인과관계는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대고 있다.


『왕을 찾아서』는 화자인 장원두가 친구 재천의 전화를 받고 고향을 찾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문득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의례 귀향길에 오른 누군가는 어렴풋한 상념에 젖어 습한 상태이기가 쉽다.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밀려드는 안개에 파묻혀 고향의 이미지를 뿜어냈다면, 장원두는 ‘마사오’라는 절대적인 힘에 짓눌려 과거의 추억을 토해낸다. 귀향길의 추억은 기분이 나쁜 것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식은 비빔밥 같은 맛이다.



마사오에 대한 추억


‘인간에게 빠르기만큼 느리기도 있고 느리기가 어떤 선물을 준다면 그 중 하나는 추억이다.’ 장원두는 늘어지는 차량행렬 속에서 마사오를 추억한다. 왜 굳이 마사오인가? 마사오라는 인물은 싫든 좋든 장원두의 유년시절을 건설한 창조주와도 같다. 대개의 창조주가 그렇듯 창조주 자체가 무슨 큰 일, 적극적인 작용을 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창조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그 존재 자체가 유의미한 세계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비록 도시인 장원두에게 미치지 않는 영향력일지 몰라도 고향으로 내려가는 지역인 장원두에게 마사오는 일상 이면의 원초적인 무엇으로 다가옴이 분명하다. 윤희중에게 있어 무진의 안개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두가 짐작했듯이『왕을 찾아서』의 왕은 ‘마사오’이다. 이 전설의 싸움꾼이자 지역의 절대 권력인 마사오라는 인물은 ‘나’ 장원두의 서술에만 의지해서는 도무지 그 정확한 특성을 포착할 수가 없다. 그가 싸움꾼에 절대 권력을 쥔 비범한 인물인지는 알겠다만, 때로는 의리와 뛰어난 판단력, 통찰력을 갖춘 직감적 인물인 것 같다가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는 그저 개망나니에 불과한 동네 건달로 묘사된다. ‘박정두’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마사오는 그 이름에서부터 일정한 거리감을 형성하는데, 믿을 수 없는 화자 장원두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마사오’는 이 소설의 기준점과 같은 역할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를 중심으로 사건이 형성되고 지역권력의 대류현상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마사오의 그런 모습은 그 후 갖가지 신화를 낳기에 충분했다. 사실은 효모 들어간 밀가루처럼 부풀어올랐다가 적당히 첨삭이 되고 장식이 된 다음 잘 구워진 빵과 같은 신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신화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지워질 수 없이 되풀이되고 공고하게 되었을 때에 마사오는 완전히 돌아왔다. 지역 전체의 신화와 기억이 그를 위해 미리 마련해둔 왕좌에 올라가 앉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36쪽)


화자는 마사오가 상당부분 만들어진 인물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그저 관찰자로서 마사오가 왕으로 군림하는 순서도를 자신의 내러티브에 맞게 정확하게 끼워 맞춰 정합성 있는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장원두에게 그랬듯이 마사오는 모두의 왕이었지만 모두에게 저마다 ‘다른’ 왕이었음에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나 어렸을 적에도 학교의 짱은 대개 마사오와 같은 전설 아닌 전설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학교 짱의 주먹에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두 동강이 나는 건 나무젓가락 부러지는 것만큼 쉬운 일이더라’라는 초등학생들의 입을 거치면서 덧입혀진 전설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다시 그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짱에게 덤비지는 못할 것 같다. 이야기로 만들어진 짱에 대한 공포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그 이미지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재천, 언어로 쌓아올린 왕좌


생각해보면 실제 인간의 힘이란 우리의 생각보다 미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에게 아주 작은 힘만 있으면 그 힘을 증폭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육체보다는 언어가 실재에 더욱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언어가 입력되고 그 언어가 인간의 상상에 펌프질을 가할 때 객관적인 한 사람이 존경하는 인물, 매력적인 인물, 증오하는 인물로 변모하는 것이다. 마사오는 순수하게 물리적 힘만으로 단순한 삶을 살았지만 타인의 입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설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단순 언어의 힘만으로 왕의 자리를 꿰찬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재천’이다.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평범한 기질에 평범한 성적을 유지하고 평범한 것에 만족하는 평범한 어린애였다. 비범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재천 역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평범한환경에서 자랐다. 평범한 성적을 유지하고 평범한 자질을 가진 것도 나와 같다. 다만 평범한 것에는 만족을 하지 않는 것이 나와 다른 점이었다. (144쪽)


재천은 언어를 부릴 줄 알며 낯의 근육을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배열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똥 방귀에 섞여 나오는 똥찌꺼기처럼 생겼다”라는 평가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한 아이를 울게 만들었을 만큼 화려한 언어구사자인 재천은 마사오와는 다른 방식으로 왕좌를 쌓아올렸다.



어디에나 역사는 있다


마사오는 죽었다. 그의 초상집에는 전설의 싸움꾼들과 신흥 지역권력층 그리고 소싯적 청년들의 가슴을 달달하게 만든 연정관계가 뒤섞인다. 비록 자그마한 지역으로 표현되었더라도 여기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옆 나라 대륙의 영웅호걸이 난립하던 삼국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온갖 권모술수와 무력, 또 남자들을 움직여 큰 사건을 만들어내는 팜므파탈의 등장까지 이 자그마한 지역을 소설의 배경으로 한정지었음에도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성석제는 자그마한 지역에서 삼국지 못지 않은 대서사시를 만들어 냈다.


장원두는 스스로 역사가를 자처한다. 대개 역사라 함은 권력의 변화를 감지해내는 것을 말한다. 모든 역사가 그랬다. 아무리 미시역사, 민중의 역사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역사의 중심은 늘 정치사가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치사를 중심으로 문화, 예술, 경제사 등이 뒤따라 오는 것이다. 심히 중국의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진시황제와 비견될만한 마사오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왕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동네 건달들이 그토록 앉고 싶은 자리는 바로 이 ‘왕의 자리’이며 이 ‘왕의 자리’는 곧 ‘마사오’와 등치된다. 마사오로 인해 지역에는 역사와 계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그가 위대한 만큼, 그의 몰락도 장엄해야 했다. 죽음은 특별해야 했다. 그게 그렇지 않다면 세상 이치는 엉터리고 내가 믿는 신념과 가치와 신화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103쪽)



왕의 빈자리


마사오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더 이상 육체적 힘만으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지역의 다음 세대들은 왕의 빈자리를 차지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이 차지하려 하는 것은 왕이 아닌 마사오 자체였다. 조창용이 서울의 조직을 등에 업고 지역의 권력을 차지했지만 그가 지향한 것은 마사오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미지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실패였다. 혁명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입담의 왕자 재천은 그와 다른 권력을 지향했다. 재천은 ‘혀와 어휘와 문장과 상상력과 집착을 총동원해서’ 마사오 그리고 희안의 그림자를 껴안으려 애썼다. 한 마디로 기존의 모든 이미지를 통합하려 한 것이다. 마사오가 원초적인 권력이었다면 재천은 아무 연고도 공통점도 없음에도 기어코 그 이미지를 이어받으려 했다. 우리는 그것을 정통성이라 부른다. 지역이나 왕국은 그런 식으로 묶여왔고 그런 식으로만 크든 작든 지역통합이 가능했다.


‘진정 왕이 되려는 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 없고 도움이 필요 없으면 도와주는 사람도 필요 없게 된다.’ (289쪽)



흰 팔뚝의 검고 큰 그림자


장원두는 마사오라는 지역의 왕이 군림하는 곳에서 어린 시절 자의식을 성립해갔다. 우리는 이 소설의 한 축을 자리하고 있는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뜨뜻미지근한 연애사를 발견할 수 있다. 장원두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여자는 마사오의 뒤 겨드랑이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흰 팔뚝으로 묘사되는 마사오의 여인이다. 장원두의 꿈에 나올 정도로 큰 임팩트를 준 흰 팔뚝(말 그대로 흰 팔뚝)은 장원두의 첫 성적 대상이었다. 마사오라는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에서 솟아나온 듯한 ‘흰’팔뚝은 또 한 번 장원두의 마사오 월드를 더욱 견고하게 구축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사오의 누나. ‘광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느낄 때마다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돌연히 튀어나오는 금빛 화살 같은 것이다. 광자는 바로 그런 눈길로 나를 보고 있다.’ 흰 팔뚝이 마사오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성적인 프레임 안으로 담아냈다면 광자는 포용력과 따뜻함 모성애와 같은 매력으로 장원두를 끌어들인다.


세희의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 자신을 우습게 본 남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하지만 직접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영부인이 되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앞세워 지역의 가장 큰 권력자의 연인이 된다.

장원두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장원두가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 마사오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나온 흰 팔뚝은 세희가 되어 결국 잡히지 않는 권력의 손아귀에 흘러들어간다. 이것은 장원두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지지 못한 모든 이들의 콤플렉스다.



망원경을 세우는 일


성석제식 농담에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놓치고 웃다보면 그가 하려는 이야기의 정수를 놓치기 쉽다. 장원두는 왕을 찾아 지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진정 왕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왕의 빈자리는 태풍의 눈과 같아 늘 그 주변이 복작댄다. 그것은 작은 지역뿐만 아니라 큰 지역을 한정지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아량이 헤아릴 길 없던 사단장이 결국 나중에 친구들과 짜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휘어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 왕의 자리는 아직도 비어있다. 그리고 대개 많은 이들의 삶은 그 비어있는, 실체 없는 공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게 되어 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그 빈자리를 똑바로 직시하기 위해 여러 지점에 망원경을 세워놓는 것이다.


지역은 여전히 회오리바람과 함께 피어오르는 비안개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은 눈부시도록 화창하다. (...) 망원경만이라도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 공평하게 설치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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