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2009년 출판계 결산 연재 가운데, 번역서에 관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엊그제 한 인터뷰에서 몇 마디 거든 게 인용돼 있다. '태반이 날림'이라고 한 표현은 과한데, 날림으로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 정도이다. '중국산 번역'이란 표현은 내가 곧잘 쓰는 것이다.   

한국일보(09. 12. 17) [책의 풍경, 2009] <8> 번역서,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

"번역서 비중? 글쎄, 한 20%쯤?"(장재용ㆍ직장인) "읽고 싶은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홍수완ㆍ한신대 경제학과 강사) "번역서 말고는 읽을 게 없다. 심지어 황우석 사건에 관한 것도 독일인이 쓴 게 제일 낫더라."(최성일ㆍ출판평론가)

책과 가까이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번역 도서에 대한 체감 비중은 높다. 올해 출판시장이 낳은 숫자 가운데 일반인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단연 '100만'(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부수)일 것이다.

그러나 출판의 생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다 무겁게 다가온 수치는 '31%'(발행종수 기준 2008년 국내 출판도서 중 번역서 비중)일 듯.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하면 번역서의 비중은 훌쩍 더 커지는데, 한국인의 서가는 번역자의 탈초와 윤문을 거친 외국인의 목소리에 차츰 점령돼 가고 있다. 

번역서 의존 갈수록 심화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대 중반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2000년 20%를 돌파한 후 꾸준히 확대, 2008년 드디어 30%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종수를 기준으로 한 단순 집계일 뿐이다. 판매량으로 따지면 학습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판 분야에서 번역서의 비중은 이미 50%를 넘어섰다는 것이 출판계의 중론이다.

특히 출판의 정수라 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의미있는 책은 십중팔구 번역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철학서의 경우 번역서 비중이 60%를 넘어섰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학문은 여전히 식민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돈다. 베스트셀러 목록도 마찬가지. 교보문고가 지난 15일 발표한 '2009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전체 종합 상위 30위(외국어학습서 제외) 가운데 번역서가 14권 포함돼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번역서가 범람하는 일차적 원인으로 "외국 저작물의 질적 비교우위"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출판계의 '단기 승부' 구조도 함께 지적했다.

▦상품성이나 판매량이 검증돼 최소한의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저렴한 번역비용으로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는 점 ▦저작권료 부담이 대체로 국내 인세나 원고료보다 저렴한 점 등이 그것이다. 결국 "사회의 지식ㆍ문화적 인프라 수준과 출판사들의 상업적 기동성이 결합, 출판 산업에 그대로 투영"돼 번역서 의존 심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 출판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766개 출판사 가운데 이전 3년(2004~2006년) 동안 번역 출판 경험이 있는 출판사는 55%에 달했고, 이들의 번역물 발행 비중은 46.2%였다. 번역 대상이 미국과 일본에 치중(2009년 67%)돼 있는 점과 저작권료의 급격한 상승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오염된 번역, 탁해지는 출판시장
번역서의 범람이라는 현상에 비해, 번역의 수준을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출판계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양보다 무분별한 번역이 해치고 있는 출판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서평 활동을 하는 이현우씨는 "번역의 질 자체는 태반이 '날림'"이라고 꼬집으며, 이를 유해 농산물에 빗대 '중국산 번역'이라 표현했다. 이씨는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이 더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듯, 독자도 품질 높은 번역서를 읽을 권리를 출판사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출판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에서 외국어 능력과 필력을 두루 갖춘 번역자는 양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정상급 번역자에게는 늘 1~2년씩 번역 물량이 몰려 있는데, 그들에게 번역을 맡기지 못할 경우 부실 번역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저작권 수입 비용이나 국내 저자의 인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번역료도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200자 원고지 1매당 3,000원 미만의 번역료를 받는 번역자의 비중이 3분의 1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꼭 필요한 분야의 책이 제때 번역돼 나올 수 있는 환경의 구축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자를 찾기 힘든 선진 담론을 소개하는 것이 번역 출판의 본래 의미. 그러나 기초학문 도서 등의 출간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거의 없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쟈넷 브라운 등의 훌륭한 다윈 관련 책들은 정작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 등 학계의 닫힌 현실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유상호기자) 

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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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산 번역?
    from 일방통행로 2009-12-17 19:52 
    로쟈의 저공비행은 내가 즐겨찾는 블로그다. 비평고원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름도 가물가물하고나..)일 때부터 그의 글을 봐 왔고, 특히 번역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혹은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에 마음으로나마 지지를 보내왔다.(지지를 꼭 드러나게 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그 지지의 한 방식으로 나도 중국쪽 원전이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조금씩 고쳐 두고는 했다. 천성이 게을러 눈에 띄게 하지는 못했지만. 양만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펠릭스 2009-12-1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지원사업이 정부나 민간기업차원에서 우선되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9-12-18 08:50   좋아요 0 | URL
도서관부터 먼저 잘 정비되면 좋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1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새책을 사면 운이 없어 그런지 오탈자, 잘못된 번역을 너무 자주 만나요. 참 이상하지요.. 틀림없이 세월가면 줄어야 될거 같은데 --

로쟈 2009-12-18 08:50   좋아요 0 | URL
그게 쉽게 달라질 것 같진 않구요, 출판문화 혹은 독서문화의 수준과 나란히 변화해가야 할 듯해요...

카스피 2009-12-1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같군요.독서인구 감소>출판사 경영 악화>부실 번역>독서인구 감소라고나 할까요.
개인적으론 정부가 쓸데없는 토목 공사에 비용 지출하지 말고 도서관에 책이라도 한권 더 넣어주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9-12-19 08:14   좋아요 0 | URL
그게 뭐 쥐귀에 경읽기가 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