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끔은....아줌마가 되고 싶다.

가끔...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前회사에 맨날 붙어 다니고, 주말까지 만나 수다를 떨고,
수많은 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온갖 감정을 나누던
사랑하는 친구 J가 있었다.

우리는 동갑이었고,
서로가 하는 말에 절절히 공감했으며,
점심시간에 여의도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수다를 떠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우리는 치열하게 일했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아 자주 술을 마셨으며,
마주 앉아 일과 사랑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사랑에 빠졌다.
J는 열정적인 연애를 했다.

J가 사랑한 남자는 곧 아프리카로 발령이 날 예정이었다.
즉, J가 그 남자와 결혼하면 J도 아프리카로 가야 했다.

난 J에게 물었다.
" 너....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
너..... 아프리카에 5년 있다 오면 그냥 아줌마 될지도 몰라."

J는 고개를 끄덕였다.

J는 만만치 않은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번듯한 대기업 명함을 미련 없이 버리고,
(J는 인정 받는, 잘 나가는 다크호스였다.)
5년 후 다시 한국에 오면 어떻게 될까...하는 불안함도 싹뚝 잘라 버리고
그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J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로 떠난지 몇달 후,
J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껏 행복해하며....

" 야, 있쟎아... 나 요리에 재능을 발견했어.
내가 요리를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어."

J는 라면 밖에 끓일 줄 모르는 애였다.
(물론...나도 마찬가지지만...)
우린 이리저리 출장 다니며 일하기만도 벅차고 바빴다.
집에서 이쁜 앞치마를 두르고 깜찍한 케익을 만들어
발렌타인데이에 남친한테 선물하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아프리카에서 J는 요리에 재능을 발견한 것이었다.

낮에 달리 할 일이 없었던 J는
요리책을 보며 이것 저것 만들어 봤다고 한다.
그런데....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단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 생각났다.)

남편이 맛있다고 환호하면 신이 나서 다음날 또 만들고 또 만들고...
J는 요리의 달인이 되었다.

이제 J는 두 아이의 엄마다.
애들...정말 천사같이 이쁘다.
J의 미니홈피에서 너무도 이쁘게 활짝 웃는 아기 사진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국어사전 "행복"이란 단어 옆에 사진을 넣는다면
바로 이 사진이 아닐까?

작년 여름에 잠시 한국에 온 J를 만났을 때,
J의 달라진 모습에 너무도 놀랐다.
J에게서 "평화로움"을 느꼈다.
난 여전히 불안한 반면...

J가 나를 보며 약간은 안쓰러워 하며 언니처럼 말했다.
" 너도 좋은 사람 만나야 할텐데..."

그 날, J와 헤어지고 버스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래서....쩍 팔리게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큰길을 걸었다.

내게...결혼은 참으로....두려운 거였다.
결혼을 하면....인생이 고만고만해질 것 같았다.
고만고만한 인생.
크게 잘될 것도, 잘못될 것도 없는 흑백사진 같은 일상.

어제 아침.
늦잠을 자고 지각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이힐을 신은 채로 전력질주, 파란 등이 깜빡이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했다.
" 도대체 내가 원하는 건 뭐지? "

맨날 온갖 고민과 오만 걱정을 혼자 다하며,
수많은 선택과 갈등 속에 조마조마해 하며,
피 튀기는 경쟁 속에 아둥바둥 하며,
난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가끔은....아줌마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약간은....포기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살이 좀 쪄도.....아줌마니까...
회사에서 된통 깨지고 힘들어도....그래도 내 남자 하나는 있으니까...
내가 선택한 남자가 다소 부족해 보여도.....그래도 어쩌겠냐, 남편인데...하면서...

가끔은....아줌마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약간은.....느슨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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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3-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분 정말 행복한 삶을 사시는군요. 쉽지 않은 선택인데...

코마개 2006-03-23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이거, 곧 결혼하시려나 왜 이러셔. 제가 자신있게 말하건데 그 친구분은 결혼하고 두분이 아프리카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편안한 표정이 묻어나는 겁니다. 하이힐 신고 지각 안하려고 죽어라 달리는 모습이 더 멋집니다. 불안함은 결혼으로 해소되는게 아닌것 같습니다.

드팀전 2006-03-27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의 평화로움'... 또 어떤 아줌마들은 그 위장된,거세된,암시된,포장된 아름다움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답니다.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부족한 것,아쉬운 것들에 대해 막연하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일종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같은 것이겠네요.'욕망은 늘 결핍상태'일 수 밖에 없습니다.나이가 조금 드니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것을 애써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남의 것도 그 나름대로 봐 줄 수 도 있구요 .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no matter what they think......님께도 어떤 변화의 시간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또 그때의 모습이 주어질 것입니다.그게 아줌마든 할머니든...중요한 것은 당신이 당신임을 놓치지 않는것.

이리스 2006-03-2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락은 좀 다르지만 저 역시 피튀기는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대끼다 못해 기절할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그런 상상을 합니다. 아이 없는 전업주부가 되어 딱 삼년만 살아보고 싶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청소하기 적당한 아담한 집에서 살며 오로지 남편과 나만 챙기면 되는 삶. 주부들이 워킹 우먼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부분이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그리고 강쥐님 말마따나 아프리카라서 가능한 일인듯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저렇게 살면 아둥바둥 스트레스 잔뜩 받았을 거라는데 동의합니다.

아울러 드팀전님의 말씀 중 마지막 한마디가 정말,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수선님, 곱창~~~ 곱차앙~~~~ ㅎㅎ

mannerist 2006-03-2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스팅이다 스팅!! Be your self~ No matter what they say~~~(Englishman in NY였던가요. Gentleman will walk naver run~ 어쩌구 하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던. 드팀전님이 운 띄워주시니 또 꼴깝떠는 매너놈-_-v) 뭐 상상해보니깐 "수선아줌마"도 아름답기 그지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성과장님' 혹은 '수선누나'더 좋아할래요. 푸힛.

그나저나. 나도 구듀님 따라서 외쳐야지. 영문은 모르지만 곱창미튜~~


2006-03-23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6-03-2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아내'라는 책을 봤습니다. 역시나 결혼에 두려움과 여성해방을 외치던 많은 여자들도, 처음 몇 년간 놀랄만큼 사랑의 기쁨과 집안일의 즐거움을 맛봤다는 것에서 조금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벗어날 길 없이 강요되는 순간만 아니라면, 결혼 후 몇 년간은 좋은 것도 같아요.. 다만 벗어날 길 없이 허우적 댄다면, 그 어느쪽이든 힘들겠죠..

kleinsusun 2006-03-23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네....왠만한 용기 없이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강쥐님, 글쿤요....그럼 저도....아프리카로 떠나야 겠어요.ㅎㅎㅎ

드팀전님, " be myself " 이게 정말...어렵네요. 헛갈려요....Who am I???
근데 드팀전님, 저랑 몇살 차이 안나시는 것 같은데...저는 왜 내것이 아닌 것이 마구 부러울까요? ㅎㅎㅎ

kleinsusun 2006-03-2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님도 그런 생각해보셨군요. 아....동지의식^^
곱창 언제 먹죠? 아....야근하는데 배고프당.... 곱~~~창....miss you!!!

매너,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 "누나"라 불러주렴.ㅎㅎ
서울 오면 곱창 사줄께^^

숨어계신님, 아...제게 더 자세히 가르켜 주세요.
님의 가르침이 필요해요^^

클리오님, 아...."몇년간"은 좋군요. 그럼....그 후 "몇십년간" 은 아닌가요? 헉....
클리오님, 제게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리옵니다.^^

세벌식자판 2006-03-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각한(?) 이야기 하시는데... 제 눈에는 이것만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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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행복"이란 단어 옆에 사진을 넣는다면
바로 이 사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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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멋진 표현, 깔쌈한 구절~~~!
외웠다가 써먹어야지~~~ (^-^;)a


서로 서로 장단점이 있는 생활들이잖아요.
맘 편히 생각하세요. 안 좋은 점만 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수선님 모습을 보며 부러워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걸요~ 장담합니다 ^^;

icaru 2006-03-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위치의 막중함을 느끼고 계신가 봐요~
님의 글이 제가 읽는 문맥으로 그렇게 읽히다니~
느긋하고 평화로워지고 싶으신 거죠?

문득... 지금 내가 정신 없이 어디로 달려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자주 들 적마다...
아냐아냐.... 잘 가고 있는거야... 아무렴~ 가다보면... 내가 찾아 헤매던 그 길이 어귀가 보일거라고...위로합니다. 위로가 아니라 정말 그래질 거 같아요...

지금 모습도 충분히 멋지셔요..

kleinsusun 2006-03-2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벌식 자판님, 오.....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분 up되는데요.ㅎㅎ
근데...정말 그 사진을 보면 "행복"을 이미지로 불러내면 이런걸꺼야...하는 생각이 들어요.퍼뜩! 그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icaru님, 아....큰 위안을 주셨어요. 가다 보면....보이겠죠?^^
직장에서의 부담감 보다....수많은 선택과 갈등을 겪어내는 그런 생활들에 좀 지친다고나 할까요. 가끔 힘들 때 있쟎아요.
icaru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moonnight 2006-03-28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도 더욱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수선님을 부러워할 거에요. ^^ 누구나 가끔은 흔들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불안해하는 거 아니겠어요. 천사같은 두 아이와 좋은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평화로이 살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좌우지간 전 수선님이 좋아욧. 홧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