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를 스페어 타이어처럼 묶어 두고 다니지는 않는가?

벌써 몇 년 전이다.
모 방송국 PD와 소개팅을 하고 몇 번 만났다. 좋은 느낌으로...
그 좋은 느낌이 "세상에...이런 사람이...."로 변질된 건 마이콜 사건
때문이었다.
지금도 얼굴이 또렷이 기억 나는 마이콜.

가을이었다. 아마도 9월이었던 것 같다. 곧 추석이 되었으니까....
그 남자는 서울에 혼자 살고 있었다.
2번인가, 3번 만났을 때 추석연휴가 다가왔다.
그 남자가 추석연휴 동안 강아지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지방에 내려가야 하는데 강아지를 데려 가기고 힘들다고...

난 내심 좋아했다.
왜? 동생들이 강아지를 넘넘 좋아하니까... 물론 나도.
우린 열렬하게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으나,
너네 셋도 키우기 힘들다는 엄마의 강력한 반대에 못 이겨
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없다.
'추석 연휴동안은 우리가 다 집에 있으니까 강아지 데려가도 뭐라고 안 하겠지...'.
난 냉큼 "강아지 데려와요!"하고 싶었으나,
잠시 망설이는 척 하다가 ".... 그러죠 뭐."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마이콜"을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강아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름 : 마이콜 ( 까만색 푸들. 둘리에 나오는 가수 마이콜과 헤어스타일이 닮아서 마이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성별 : boy
성격 : 온순

추석 연휴 전전날, 난 마이콜을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갔다.
동생들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마이콜은 오랜만에 사람 많은 곳에 오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랜만의 자유를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1초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였다.
( 바쁘고 게다가 혼자 사는 주인 덕에 마이콜은 몇 개월 동안 하루 종일 혼자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주인을 기다리다가 밤늦게 주인이 오면 하루에 한번 보는 생활. 물론 주인이 외박하면 이틀 동안 혼자 있는 생활을 했다.)
이상한건....
마이콜이 몸을 너무 심하게 긁는다는 거였다.
발톱도 무진장 길었는데 그 긴 발톱으로 몸을 빡빡 긁었다.
피가 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반복적으로 너무 자주 긁으니까 아빠가 마이콜을 안으시더니 유심히 보셨다.

" 염증 같구나. 내일 동물병원에 데려가 봐."

그랬다. 마이콜은 염증을 앓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그렇게 간지러웠을 텐데,
긁고 긁고 또 긁고 피가 나게 긁었을 텐데,
무심한 주인이 몰랐던 거다.

다음날 아침 일찍,
동생과 나는 마이콜을 태우고 동물병원으로 달렸다.

의사가 마이콜을 보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의사 : 아가씨 강아지예요?
수선 : (의사의 잡아먹을 듯한 기세에 놀라며) 아니요.
의사 : 누구 개예요?
수선 : ...친.구.
의사 : 이건 동물학대예요. 동물학대.
지금 이 강아지의 피부질환이 얼마나 심한지 알아요?
여기 고름 나는 거 안 보여요? 여기 고름 딱지들 보여요?
수선 : (너무 놀라 침묵)
의사 : 정서적으로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어린 강아지를 돌보지 않았으니...
이 강아지 입원시키세요. 치료를 받아야 해요.
수선 : 네.....

그렇게 해서 나는 마이콜을 입원시키고 그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보는 마이콜을 뒤로 하고 나왔다.

더 놀라운 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다 싶은 건....
마이콜은 "girl"이었다.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의 성별도 몰랐던 무심한 남자.
혼자 사는 건 외로운 일이다.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불이 꺼진, 인기척 없는 빈집에 들어가는 건 싫은 일이다.
누가 기다려 주고 반겨 주면 기쁘다.
그래서 그 남자는 강아지를 키웠다.
돌보지는 않으면서,
자기 강아지가 그렇게 심하게 몸을 긁는지도 모르면서,
집에 들어갈 때 강아지가 자기를 반겨 주는 거 하나 때문에 강아지를 키웠고
결국 마이콜을 불행하게 했다. 마이콜은....아팠다.

그 남자를 많이 욕했었다.
정말 책임감 없고 나쁜 사람이라고....
어떻게 강아지를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냐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강아지를 맡겨 버린 덕분에 들켜 버린 것 뿐이라고...
자기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스페어 타이어처럼 묶어 두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자기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박진영은 에세이집 <미안해>에서 "희망고문"이라는 표현을 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희망고문"을 하지 말라고....
쓸데 없이 술 먹고 한번씩 전화하고,
"좋은 친구" 같은 밋밋한 태도를 보이며
다른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묶어 두지 말라고....

자기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외로울 땐, 그냥 외로워야 한다.
치열하게, 처절하게 외로워 보자.

날이 정말 춥다.
이 추운 날에 나는 시리도록 외로워 보려 한다.
그리고.....내가 겪어야 할 외로움을 다 겪고 사랑을 하려 한다.
외로워서 하는, 혼자임이 두려워서 하는 사랑 말고
진짜 사랑을...

외로움에 정면으로 맞서겠다. 덤.벼.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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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1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수선님이 더욱 마음에 들어부렸어요.

한 줄도 버릴 말이 없네요.^^

kleinsusun 2005-01-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칭찬해 주시니까 기분이 "up" 되요. ㅋㅋ

어제의 숙취로 힘들게 버티고 있었는데, 기분 up! up! 랄랄라.

marine 2005-01-1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어 타이어, 압권!! 예전에 박진영 책 읽었을 때 그 희망고문이란 말에 반대했어요 당시 저는 누군가를 해바라기 할 때라 그 사람이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했거든요 어차피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일순간 돌릴 수 있는 게 아닌데, 냉정하게 끊는 것 보다는 친구로라도 있어 주길 바랬거든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생각해 보니까 (또 제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입장이 되니까) 상대가 빨리 마음 정리할 수 있도록 끊어 주는 것도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야말로 나 외로울 때 예비로 갖고 있을려는 이기적인 태도거든요 친구라 하면서도 정작 상대가 다른 사람 만나면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드는, 그 이중적인 태도 있잖아요

kleinsusun 2005-01-1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보험회사에 전화하면 10분만에 와서 타이어 바람 넣어 주쟎아요.ㅋㅋ

불안한 마음에 스페어 타이어 챙기느라 상대방을 꽁꽁 묶어 두는건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일인 것 같아요. 상대방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하구요. 저도...이렇게 말하면서도 찔리는게 많아요.쩝.

icaru 2005-01-12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ㅠ.ㅜ 제가 왜 무엇 땜에 울고 있는거죠.....(누구에게 묻는거야!!)

드팀전 2005-01-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돌본다는 건 역시 쉬운일이 아니야.... 어쩌겠어요.희망고문이든 스페어 타이어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많을 텐데...사람의 욕심이란게 그렇게 흑백 나누듯 나누어지지 않는거니까.다 사람의 일이라....다들 조심조심하세요.어흥......^^

2005-01-12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1-12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5-01-1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강아지가 부모님께 사랑 받고, 또 효도해서 다행이네요.

전 10월에 열대어 2마리를 선물 받았는데 그 중 한마리가 며칠 전 죽었어요.무심한 주인 탓에...선물만 받고 돌보는 일은 동생에게 미렀는데 미안해요.먼저간 열대어에게도,남은 열대어에게도, 동생에게도... 혼자된 열대어를 위해 한마리를 더 살까 아님 그 한마리를 놓아줄까 고민중이예요.근데...열대어를 강에 방생할 수도 없고...어쩌죠? 함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kleinsusun 2005-01-1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조심도 하고 또 그 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안 주도록 저도 노력할래요.드팀전님, 감사합니다.

야클 2005-01-1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마이콜이 너무 불쌍하고 그 주인이 아주 밉네요. 동물은 "놀이감"이 아닌 생명체입니다. 봄이 되면 길거리에서 장난감 삼아 병아리를 사서 철부지들에게 쥐어주는 엄마들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리고 수선님 글의 주제부분... 수선님 홈피에 있는 "Sex할 수 있는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글이네요. 약간은 도발적인(?) 글 제목에 이끌려 한번 봤는데 한참 동안 생각을 하게 했던 글이랍니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마냐 2005-01-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지론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희망고문 않기...임다. 스페어타이어라니...좋은 글 잘 읽었슴다.

바람돌이 2005-01-1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당해서 끙끙거리는 강아지 한마리를 주워온적이 있는데요. 며칠씩 방을 붙이고 해도 주인이 안나타나더라구요. 다리를 다쳐서 병원 수술하고 집에서 한 2주간 길렀는데요. 나름대로 정이 들어 계속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리가 직장 나가고 돌아올 때까지 혼자서 집을 헤메고 다니다가 돌아오면 반가워서 어쩔줄 모르는 강아지를 보니 이게 아니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새주인을 찾아 보냈는데 지금은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붙인 이름이 삼돌이였는데....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는거죠.

파란여우 2005-01-1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명작을 왜 이제 읽을까요. 수선님! 글 너무 잘 쓰십니다. 저 이런말 왠만하면 자주 안하는 짠순이인데요, 정말 명작이에요^^

kleinsusun 2005-01-14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감사합니다.덕분에 오늘 하루 "happy" 할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님 처럼 따뜻하신 분들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마이콜도 바람돌이님 처럼 좋은 주인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이런 생각이 들어요. 마이콜이 지금은 어딘가에서 행복하기를 바래요.

kleinsusun 2005-01-14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노숙 고양이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야클님 가족들 처럼 동물을 사랑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무료 급식소 얘긴 정말정말 감동적이예요.

마냐님, 부끄부끄. 저도 스페어 타이어를 챙겼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더 맘이 아팠어요. 마이콜이 꼭 행복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