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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춤, 설령 몸치는 아닐지라도 춤이라는 행위 자체에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남자의 춤에 매료된 적이 한번 있다. <25시>에서 게르만인의 전형으로 뽑힌 두상을 가진 남자, 앤서니 퀸이 열연한 < 자유인 조르바 > 라는 영화속 그의 춤이다. 춤의 형태는 달랐지만 우리의 어깨춤이 문득 떠오르는 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그의 춤이 한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의 춤에서 한없는 자유를 보았다는 말은 지금에서야 붙이는 포장일뿐, 아직도 그 당시의 어린 나를 모를 일이다.
조르바, 그는 부지불식중에 관습이니 문명이니 하는 불문율에 의하여 억압된 감정을 말이 아닌 춤으로, 산투리 연주로, 몸으로 표현하는 사내이다. ( 사실 조르바는 지독한 수다장이다. 작가와 조르바 둘이 밤새 술마시고 떠든다. 부럽다. ) 질그릇을 만들고자 물레를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왼쪽 새끼 손가락을 자르는 기이하고도 황당한 사내이다. 작가인 동시에 작중화자인 책속의 내가 만나는 조르바는 신에 의하여, 문명에 의하여 잘 가꾸어진 인간이 아닌 오직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내이다. 조르바를 바라보는 일상의 눈은 어떠한가. 문명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 문명이 흘린 노폐물을 야만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줄 모른다. 그러니 잘 정돈되고 꾸며진 외향에 비하여 지독히도 혼란스러운 내면을 가진 보통의 인간이 만나는 조르바는 혼란스러울 밖에 없다.
자유, 그런 조르바에게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억압된 감정의 일탈을 통한 대리만족은 아니다.
류시화 시인 가라사대 "다른 사람들이 세워놓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나는 자유라 부른다." - 지구별 여행자 -
신영복 교수님 가라사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 더불어 숲-
자유는 결국 행동의 자유로움이라기보다는 자유 자체의 주체성에 있다고 할수 있다. 조르바의 방만하고 개념없이 느껴지는 행동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끼는 것은 그 안에 정립된 자신의 주체성과 질서를 발견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사상도, 신도, 문명도 거부한 조르바의 자유는 삶의 방향을 가진 자의 영혼의 자유로움이다. 혼란스러웠던 한때 지독히 인간적으로, 지독히 자유롭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불완전한 말보다는 춤으로 살다간 조르바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P.S ) 앤서니 퀸이 아니면 어느 배우도 조르바를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전부 성우가 아닌 이치우 라는 중견배우가 담당했다. 역시 그 배우의 목소리가 아니면 앤서니 퀸을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