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상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만남을 어색해하는 것은 서로에게 헐거워지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뒤축을 꺽어신는 놈은 변태다. 꺽어신으면 헐거워지기전 당연히 버리거나 버려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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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3-01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 좋네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 - 헌 신발 같은 편안함이 좋긴 하죠.
새 구두를 신고 발이 아팠던 경험이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25-03-01 20:59   좋아요 1 | URL
낡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 입어 몸에 편안한 옷이라든지, 오래 신어 발에 익숙한 신발이라든지, 오래 읽어 손 때가 묻어나는 책이라든지...우리도 자꾸만 낡아감을 받아들이면 편안하고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감은빛 2025-03-14 0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낡고 늙어가는 이 몸을 생각하면 왠지 서글퍼지는 시가 되고, 시에 나온 것처럼 신발을 생각하면 오래 써서 편안한 물건 이야기가 되네요. 저는 사람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오래 알고 지내서 편안한 관계는 그 자체로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되겠지만, 그래서 또 서로 함부로 대하거나,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라구요.

잉크냄새 2025-03-14 20:13   좋아요 0 | URL
낡아져서야 비로소 편안해지는 것은 비단 신발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영혼과 육체도 그 삐걱거리던 젊음을 달려온 뒤에야 겨우 낡아서 편안한 시절이 오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살림

오늘도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일일이 별들을 둘러보고 오느라구요


하늘 맨 꼭대기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면 

압정처럼 박아놓은 별의 뾰죽한 뒤통수만 보인다고 

내가 전에 말했던가요


오늘도 새벽에게 나를 업어다달라고 하여 

첫 별의 불꽃에서부터 끝 별의 생각까지 그어놓은 

큰 별의 가슴팍으로부터 작은 별의 멍까지 이어놓은 

헐렁해진 실들을 하나하나 매주었습니다


오늘은 별을 두개 묻었고 

별을 두개 캐냈다고 적어두려 합니다


참 돌아오던 길에는 

많이 자란 달의 손톱을 조금 바짝 깎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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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아직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아직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을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의 어둠의 온도도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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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문장

     

서늘하고 구름 없는 밤입니다 별을 보다가 문득 하늘에 돋은 별들이 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이들이 더듬어 저리 반짝이는 것이겠지요


사랑에 눈먼 나는 한참 동안 별자리를 더텼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읽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요


은행나무 잎새 사이로 별들은 또 자리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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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어둠과 별과 달이 남아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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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1-28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께서 소개해주는 시들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잉크냄새 2024-11-29 09:53   좋아요 0 | URL
시와 제목과 댓글의 라임이 잘 맞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ㅎ
 

묵집에서 


-장석남-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진 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어떤 사물로부터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묵을 먹다 이 시의 일부가 떠올랐다. 아슬아슬한 수저질에서 사랑의 위태로움이, 깨저 버린 묵에서 지나간 사랑의 눈빛이 떠오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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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길동무 되어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저승길 떠나셨네요.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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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시인은 그의 다른 시를 통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라고 적고 있다. 사물이 품고자 하는 원초적 본질과 드러내고자 하는 언어의 본성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시인이다. 그래서 그들이 들려주는 언어 속에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사물의 신비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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