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 박성우-


깜박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 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엔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 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시를 적고 무언가를 끄적이려고 하다 그 무언가를 잊어버렸다. 시인과 완벽한 몰아일체의 경지가 되는 순간이다. 무언가를 잊은 듯 돌아서고 나서도 그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무언가를 잊은 것보다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올 때가 더 서글픈 법이다. 가끔 어딘가 나를 놓고 자꾸 뛰쳐나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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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11-20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건망증이 치매 증세로 의심 될 때가 요즘들어 자주 있어요. 그것보다 더 서글픈 것은 잉크냄새님 걱정처럼 나를 놓고 자꾸 뛰쳐 나간다는 것에 공감이 된다는 겁니다. 우산 잃어 버릴 때가 더 좋았네요..ㅜㅜ.

잉크냄새 2025-11-20 21:47   좋아요 1 | URL
건망증은 모세혈관 감소로 인한 것이라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반면 치매는 뇌세포의 죽음 문제라 기억 저장소가 망가진 상태라 하네요. 아직은 건망증 단계인가 봅니다. ㅎㅎ
우산을 어디 놓고 왔는지 모르는 것은 만인의 공통 사항인가 봅니다. 하도 잘 잃어버려서 비가 어지간히 내리기 전에는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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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된다고 안치환은 노래하였다. 굴하지 않고 비껴서지 않으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은 말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근데, 외로움에 우뚝 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에게 더 애착이 갈 때가 있다. 열흘 남짓 열리지 않던 옆방 문소리에 머뭇머뭇 다이얼을 돌렸을 사내의 손떨림이라든지, 그 손떨림을 너무 잘 알면서도 외로움이 들켜버릴까 살며시 이불을 끌어 덥는 사내의 미안함이라든지, 두 사내 누구에게도 선뜻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냥 외로움에 전염되어 버리는 독자라든지....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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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병률 시인의 시집을 갖고 있는데 이 시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시가 많이 담겼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잉크냄새 2025-05-05 23:28   좋아요 0 | URL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률 시인의 시집중 <바람의 사생활>이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5-05-0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행이 좋네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다는 느낌은 저도 가끔 느낍니다.

그리고 잉크냄새님의 마지막 말씀도 인상적이예요.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다니.

어느 출장지의 허름한 여관 방에 머물렀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25-05-08 20:13   좋아요 0 | URL
시에서 여관을 모텔로 바꾸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요. 여관만이 지니는 낡고 어둡고 눅눅한 감성이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예전에 묵었던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 떠올랐어요. 지저분한 이불을 덥고 누우면 천장에 쓰리쿠션으로 떠오른던 상념들...아마 외로움도 한 쿠션 했을 겁니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상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만남을 어색해하는 것은 서로에게 헐거워지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뒤축을 꺽어신는 놈은 변태다. 꺽어신으면 헐거워지기전 당연히 버리거나 버려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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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3-01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 좋네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 - 헌 신발 같은 편안함이 좋긴 하죠.
새 구두를 신고 발이 아팠던 경험이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25-03-01 20:59   좋아요 1 | URL
낡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 입어 몸에 편안한 옷이라든지, 오래 신어 발에 익숙한 신발이라든지, 오래 읽어 손 때가 묻어나는 책이라든지...우리도 자꾸만 낡아감을 받아들이면 편안하고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감은빛 2025-03-14 0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낡고 늙어가는 이 몸을 생각하면 왠지 서글퍼지는 시가 되고, 시에 나온 것처럼 신발을 생각하면 오래 써서 편안한 물건 이야기가 되네요. 저는 사람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오래 알고 지내서 편안한 관계는 그 자체로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되겠지만, 그래서 또 서로 함부로 대하거나,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라구요.

잉크냄새 2025-03-14 20:13   좋아요 0 | URL
낡아져서야 비로소 편안해지는 것은 비단 신발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영혼과 육체도 그 삐걱거리던 젊음을 달려온 뒤에야 겨우 낡아서 편안한 시절이 오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살림

오늘도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일일이 별들을 둘러보고 오느라구요


하늘 맨 꼭대기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면 

압정처럼 박아놓은 별의 뾰죽한 뒤통수만 보인다고 

내가 전에 말했던가요


오늘도 새벽에게 나를 업어다달라고 하여 

첫 별의 불꽃에서부터 끝 별의 생각까지 그어놓은 

큰 별의 가슴팍으로부터 작은 별의 멍까지 이어놓은 

헐렁해진 실들을 하나하나 매주었습니다


오늘은 별을 두개 묻었고 

별을 두개 캐냈다고 적어두려 합니다


참 돌아오던 길에는 

많이 자란 달의 손톱을 조금 바짝 깎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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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아직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아직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을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의 어둠의 온도도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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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문장

     

서늘하고 구름 없는 밤입니다 별을 보다가 문득 하늘에 돋은 별들이 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이들이 더듬어 저리 반짝이는 것이겠지요


사랑에 눈먼 나는 한참 동안 별자리를 더텼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읽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요


은행나무 잎새 사이로 별들은 또 자리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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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어둠과 별과 달이 남아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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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1-28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께서 소개해주는 시들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잉크냄새 2024-11-29 09:53   좋아요 0 | URL
시와 제목과 댓글의 라임이 잘 맞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ㅎ
 

묵집에서 


-장석남-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진 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어떤 사물로부터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묵을 먹다 이 시의 일부가 떠올랐다. 아슬아슬한 수저질에서 사랑의 위태로움이, 깨저 버린 묵에서 지나간 사랑의 눈빛이 떠오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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