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쯔마지에(깨거리)라는 도로변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부터 살펴보면 먼저 꽤 큰 중국 음식점이 있었고 그 옆에 한국 음식점 대장금이 모서리를 끼고 위치해 있었다. 꺽인 모서리를 돌면 토속적인 이름을 붙인 조선족 식당이 있었고 다시 모서리를 끼고 북한 음식점인 대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 도로변에 이어진 다시 중국 가게는 정확히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이 중국에 의해 꽉 막힌 지정학적 위치와 세 국가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조선족의 심리학적 상황를 반영하듯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 음식점 상호는 인기 드라마였던 대장금이 주류를 이루고 궁이나 한성같은 약간은 고전적인 명칭을 고수하고 있었고 조선족은 무지개, 진달래, 해당화 같은 유독 삼음절에 집착한 듯한 토속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북한은 대동관, 칠보산 등 국가는 곧 영토임을 반영하듯 지역명을 주로 사용했다.

<굴뚝 산업이 제거되기 전 텐진은 세계 2위 오염도시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도 퇴근후 쯔마지에로 가끔 타고 다니던 세냥 짜리 전철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대북 제재가 이루어지기 전 북한 식당은 출장자들이 으레 한번쯤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질적인 그들의 폐쇄된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저녁 한 끼 정도는 꼭 하는 편이었으나 그 호기심은 한두 번 만에 가라앉곤 했다. 먼저 음식이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평양, 함흥 등 지역명을 달고 나오긴 하나 남쪽에 비해 아주 담백하다는 약간의 맛의 차이만 있을 뿐 이국적인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술 또한 솔잎주 등 명칭이나 맛에 대한 호기심에 마셔보긴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싸구려 소주 맛에 금방 잔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북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인지 유독 한국인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몇 번 말을 붙여보다 머쓱하게 말을 거두어 들이곤 했다. 그들은 주로 20대 초중반 평양 출신으로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으며 출신 성분이 꽤나 높은 여성들이었다. 고위층 자녀로서 볼모라는 설도 있었다. 미에 대한 평가도 세월을 타는 것인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그녀들은 곱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이지는 분위기였다. 홀서빙과 저녁 공연 시간에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주고객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 노래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북한 노래는 처음과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 같은 의미로 몇 곡 불려지곤 했다. 한국 노래는 김정일이 좋아했다는 이선희의 'J에게' 와 어떤 이유로 해금되었는지 모르는 노사연의 '만남'이 가끔 연주되곤 했다.

<악기는 주로 가야금과 전자 기타였고 가끔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도 등장했다>
이런 호기심의 단계를 넘어서 마니아의 단계에 접어든 분이 계셨으니 천진 공장에 근무하는 총경리였다. 그는 출장자 식사도, 고객 접대도, 주재원 회식도, 점심 식사도 모두 대동관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연령대로 보아 북한이 고향일리는 없고 아마 부모님이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잠시 돌았으나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년말 망년회조차 대동관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 동안 올려준 매출을 이유로 VIP로서의 위상을 쯔마지에 만방에 휘날린 쾌거(?)였다고나 할까. 2층 제일 큰 홀에서 진행했는데 북한 여종업원 두 명이 밴드로 참석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술도 몇 순배 돌면서 난 어떤 모습을 쭈욱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석한 형수님들(주재원 아내) 대여섯분이 여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좀 흘렀었고, 상대방의 대화에 호응을 해주는 여성 특유의 감탄사도 들렸었고, 또 다시 중간중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고, 가벼운 건배 제의도 이루어졌고,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리곤 했다. 술기운인지 어떤 미묘한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은 김정일이 좋아하던 'J에게' 와 왜 해금인지 알 수 없는 노사연의 '만남'을 같이 부르기도 했다. 마치고 나오는 길 못내 아쉬운 듯 가볍게 마주 잡은 손을 쉽게 놓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만남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평화는 저런 섬세한 감수성과 친화력에서 올 것이라고.
두달여의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총경리는 역시 대동관으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두운 홀 구석에 모여 눈물을 훔치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VIP급 총경리가 매니저급 남자 복무원을 닦달하여 물어보니 텐진 지역의 대동관을 폐쇄하고 북한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은 영업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여 남은 시간 영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미지수였다. 돌아오는 길 총경리는 마지막 송별회라도 해야겠다고 굳센 의지를 불태웠다. 난 송별회가 진행되기전 귀국하였고 그 이후 진행 여부는 알 수 없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업무로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대동관이 있던 자리는 기념품을 파는 중국가게로 변해있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대장금과 무지개,진달래,해당화는 여전히 영업중이었으나 왠지 지정학적 심리학적 긴장감이 무너진듯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