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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ㅣ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반 년 만에 완독한 소설이다. ‘무진기행’ 과 ‘1964년 겨울’ 등 몇 편은 줄거리는 진작에 알고 있었고, 읽어보기도 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알려지지 않은 단편들을 묶어 낸 ‘무진기행’은 기실 그리 달갑진 않았었다.
이는 김승옥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를 차치하고서도 그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싸그리 책에 실릴 이유는 부족해 보인단 개인적인 편견 때문이었는데, 작품을 확인해 보니 아주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면 지나치게 오만방자할까. 그러나 뭐, 천재적인 감수성을 지닌 작가라도 하나같이 고른 역작을 써 내긴 힘든 법이라 위안해도 좋겠다. 그의 천재성은 일부 노작에서 주머니 속 송곳처럼 푸릇한 빛을 유감 없이 번득이고 있으니.
고백하건대 찔리기도 여러 번 찔렸다. 언제나 읽어봐도 그렇다. 그것은 소스라치게 강렬한 통증은 아닐지라도 소리 없이 번지는 통증에 가까웠다. 아픔이 무언지도 모르게 방치되어온 삶을 그는 언제든 기꺼이 생채기를 내 주었었다. 이쯤에서 ‘무진기행’에 수록된 단편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것이 비록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일 것이고, 결국 만져지는 것이 없다 해도 읽은 자로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시도는 해 볼 일이다.
우선 인물들을 살펴보려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나와 ‘1964년 겨울’의 나와 안은 제3자로서 현상을 관찰하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개입은 꺼린다. 우연한 계기로 획득한 회사 임원이 되는 ‘무진기행’의 나와 ‘1964년 겨울’의 구청에서 고만고만한 일을 하던 나가 선술집에서 사내들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봐서도 그렇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의 나는 도시로 갔다가 말을 잃어버린 누이를 의아해 하지만 안타까이 바라보기만 하는 나이며, 이 점은 ‘건’의 나 또한 마찬가지다. 관찰자 시점을 수용한 이유는 사건을 좀 더 명료히 보는 데 효과적이며, 방관자적 분위기를 풍김으로써 근대를 거쳐 현대에 불거져 나온 문제 상황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승옥 소설이 현대 모더니즘의 귀감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는 지독한 사실주의 작가로도 생각될 수 있는 이유라고 본다. 또한 방관자를 둘러싼 인물군이 보이는데, 이들은 평면적이며 따라서 지나치게 인간 본연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건’에서 형을 비롯한 동네 형들, ‘무진기행’에서 경찰 서장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인물들과 대립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을 통해 작가는 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걸까. 이 부분에서는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나는 작가가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는 느낌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와 개인에게 있어 소통은 그만큼 분화되어지고 여러 통로(채널)가 다양해졌으나, 상대적으로 그만큼 그 입지는 상대적으로 얕아지고 작아졌는지 모르겠다. 주인공들은 소통의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명료한 말을 내뱉다가도 곧 엉뚱한 말로 불투명하게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964년 겨울'의 안이 내게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냐고 묻자 나는 버스에서 여자 승객의 복부를 보고 신선한 꿈틀거림을 경험했다는 식의 말을 한다. 독자와 안이 보기엔 나는 우스꽝스러운 답을 한 것처럼 보이나 나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며, 안과 나는 곧 타협점을 찾고 화해하기도 한다.
또한 ‘무진기행’에서 내가 하인숙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무진의 따분함에 공감하며 이것을 빌미로 서로에게 좀 더 다가선다.
"밤엔 정말 멋있는 고장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내가 말했다.
"왜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는 줄 짐작하겠어요."
여자가 말했다.
"어느 정도까지 짐작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사실은 멋이 없는 고장이니까요. 제 대답이 맞았어요?"
"거의."
우리는 다리를 다 건넜다. 거리서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그 여자는 냇물을 따라서 뻗어 나간 길로 가야 했고 나는 곧장 난 길로 가야 했다.
"아, 글루 가세요. 그럼..."
내가 말했다.
"조금만 바래다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워요."
여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대화를 포함한)이 무의미하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모든 현상을 보며 주인공들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갈등(내적이든, 외적이든)으로 인한 괴로움이 시발점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쉬이 무기력해진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무진의 농밀한 안개처럼 감추려 그들은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인가. 아니, 우리들은 그러고 있는 것인가.
"저 오늘 박 선생님께 선생님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물어봤어요."
"그래요?"
"무얼 제일 중요하게 물어보았을 것 같아요?"
나는 전연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잠시 동안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님의 혈액형을 물어봤어요."
"내 혈액형을요?"
"전 혈액형에 대해서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꼭 자기의 혈액형이 나타내주는... 그, 생물책에 씌어 있지 않아요? 꼭 그 성격대로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성격밖에 없을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믿음입니까? 희망이지."
"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대로 믿어버리는 성격이에요."
"그건 무슨 혈액형입니까?"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에요."
우리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괴롭게 웃었다.
공범의식이 주는 쾌감은 역설적이게도 괴로움이 아닐까. 편안한 동질감과 그에 반하여 고개를 드는 반대급부의 괴로움이 주는 쾌감으로 주인공들은 유대 된다. ‘건’에서 내가 형들의 불미한 요구를 별 망설임 없이 들어주는 장면이나, ‘무진기행’에서 내가‘전보를 속여 가며’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개인주의에 대한 환상과 그와 충돌하는 자아의 모습은 흥미를 자아낸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주인공의 뒤에서 새끼손가락을 걸었으며, 그로 인해 ‘괴로운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주인공이 무진에서 이방인이었듯이,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때때로 불유쾌한 과거를 되짚어보기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진은 내 삶 언저리에서 싸아한 안개처럼 머무르고는 언젠가 또 사라지겠지만 필요할 때마다 회오어린 감정조차도 동조해 줄 아무렇지도 않은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쯤 무진을 떠나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