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01호 여자 명주는 작업 중 얻은 다리 화상으로 직장을 잃고 병원비로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탕진한 후 홀로 지내시는 엄마와 같이 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기를 보이는 엄마와 한바탕 싸우고 외출 후 돌아온 어느 오후, 햇살처럼 바닥에 길게 엎드려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의 약을 복용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깊은 잠 이후 깨어난 허탈한 그녀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킨 것은 엄마 전화기로 날아든 연금 알림 메세지였다. 기초 연금과 유족 연금을 합쳐 백 만원 가량의 돈을 한번도 부모로부터 지원 받지 못한 인생에 대한 보상이라 자족하며 엄마의 죽음을 유예하기로 한다. 그런 그녀에게 몰랐던 엄마의 연애 상대인 진천 할배와 김장까지 함께 하며 친분을 쌓았던 옆집 총각은 불안 요소로 다가오는데....


702호 남자 준성은 아버지의 뇌졸증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진학한다. 군대를 제대한 하나 뿐인 형은 아버지를 떠넘기고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치매마저 앓고 있는 아버지를 간병하며 20대 중반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고 있다. 설상가상 아버지가 화상으로 자리 보전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격증 시험마저 떨어진 날, 대리 운전하던 외제차를 손상시켜 직장을 잃고 합의금까지 종용 받는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진다. 화장실에서 아버지를 목욕시키다 사망 사고를 일으킨 날 702호 여자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을 유예하고 아버지의 연금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그것이 아버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는데...


간병과 돌봄으로 무너져 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세주에 소주를 섞어 오십세주를 만들어 마시며 백 세라는 삶이 먼 미래의 꿈 같은 일임을 비웃던 것이 엊그제의 일인데, 이제 백 세는 별 고민 없이 내뱉은 상투적인 나이가 되어간다. 백 세의 삶에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그림자처럼 따라 붙고 얽히고 설키고 뒤엉킨다. 뉴스에 나왔더라면 천하의 패륜으로 치부 될 이야기가 무언의 동조와 응원까지 얻어내는 것은 작가가 끌어가는 스토리 자체의 힘도 있겠지만 패륜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 아무도 자유스럽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이유도 클 것이다. 글에 인용된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다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사회현상 이라고 부른다." 라는 문구처럼,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깊숙이 곪아가고 있는 감추어 지지 않는 치부이다. 그러기에 명주와 준성의 삶은 패륜일 망정 그래도 삶을 살아가라는 암묵적인 독자의 서글픈 지지를 얻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김서형 배우 주연의 <비닐하우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는 문정은 아들과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어느 노부부의 간병인 일을 한다. 노부부의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고 아내는 치매를 앓고 있다. 어느 날 치매를 앓던 노인과의 실랑이 중 사고로 노인이 죽게 되고 신고하려던 찰나 엄마와 살고 싶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노인이 죽은 자리에 치매를 앓는 자신의 엄마를 들이게 되고 시체는 비닐하우스에 유기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아내가 아니라는 의심을 하지만 결국에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도 치매가 왔다고 착각하여 문정의 엄마와 동반 자살을 한다. 엄마의 죽음을 알아챈 문정은 그녀가 숨긴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아들이 친구들과 숨어든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비극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가는 문정에 비해 명주와 준성은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지만 또 다른 삶의 탈출구를 찾아 떠난다. 명주를 괴롭히던 원수같은 딸과 준성에게 모든 걸 떠넘긴 형이 그렇듯 정통적인 가족은 점점 해체되어 간다. 간병과 돌봄의 문제에서 이제 가족마저 튕겨져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롭게 공범이 된 701과 702, 그리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그들의 트럭에 몰래 올라탄 버림받은 치매 노인이 새롭게 가족을 구성하게 된다. 비루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이어진다.

       

- 어떡해요. 이 할머니?

준성은 명주 아줌마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우리 엄마 삼지 뭐.     -p245-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08-14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그맨 안성영이 자녀 교육때문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보낸고 캐나다로 간다는 기사가 나자 많은 이들이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간다고 분기탱천 했는데 이런 사람들은 아마도 집에서 노인 병수발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 일 겁니다.
치매나 건강상의 이유로 거동 못하는 노인들을 집에서 간병한다는 것은 웬만한 지극정성이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집에서 24시간 노인 간병을 한다는 것은 힘든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시간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죠.그래서 집에서 노인을 돌보는 개인 간병사의 월급이 3~4백만원을 하는 이유입니다(이분들도 주 6일만 근무함)
요양원 그중에서도 요양병원에 노인들은 모시는 경우는 대게는 집안 형편이 가능하기 떄문이지 가난하면 비용부담으로 요양원(보통 한달 백만원내외)에 모시는 것을 꿈도 못꾸는 사람이 많지요.
노인들의 간병과 돌봄은 개개인에게 맞길 일이 아니라 이제는 복지차원에서 국가가 떠 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잉크냄새 2025-08-14 20:44   좋아요 0 | URL
지금 그 개그맨의 일화가 소개된다면 아마 그렇게 분기탱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십여년 전만 해도 요양병원으로 보낸다는 것은 합법적인 유기나 현대판 고려장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지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죠. 그런 의미에서 간병과 돌봄의 문제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 복지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간병과 돌봄의 문제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안락사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감은빛 2025-08-1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네요. 사회현상이 되어버렸군요. 돌아가신 엄마의 연금으로 살았던 사람 이야기는 실제 뉴스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도 생각나고요.

[비닐하우스]라는 영화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사실 저도 가장 무서운 일이 바로 아픈 가족의 간병과 돌봄입니다. 제 주위에 부모님 돌봄 때문에 꼼짝도 못하는 지인들이 몇 분 계시거든요. 이거 거의 감옥이나 다름 없는 것 같아요. 몇 년째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렵더라구요.

잉크냄새 2025-08-17 11:22   좋아요 0 | URL
요즘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간병과 돌봄의 문제이고 그들이 겪는 우울증 등 정신의학적 측면도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더군요.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국가 복지 차원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비닐하우스>는 우울하면서도 안타깝고 서글프고, 좀 복합적입니다. 꼭 보시길...

페크pek0501 2025-08-18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다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사회현상 이라고 부른다.˝ 라는 문구. 이 문구를 보니 <플랜 75>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 75세 이상의 노인들을 죽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영화인데 저도 유튜브로 설명만 들었는데도 섬뜩하더군요. 우리의 미래, 일 것 같기도 하고요. 누구나 노인이 되고 누구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되는 날이 온다는 것, 기억해 놓을 일입니다.^^

잉크냄새 2025-08-18 21:46   좋아요 0 | URL
일본 영화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그런 영화의 출현이 영화적인 상상일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마주하게 될 세대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직면한 문제를 외면하고 무시하면 어떤 식으로든 분출되고 터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힐 2025-08-21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매, 노인, 돌봄, 요양원 같은 단어가 이제는 친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네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 했었는데... 저도 비루하지만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잉크냄새 2025-08-21 21:57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대면하기 싫었던 어떤 단어들과 정면으로 마주쳐야 할 시기가 되어간다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비루하다는 표현은 단어 그대로 참 비루한데, 어떤 문장에서는 주어만큼이나 빼버릴 수가 없어요. ㅎㅎ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 - 2020년 제16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펜하임 반디멘 재단 도서관은 클라우스 반디멘이 세운 156개의 도서관중 하나이다. 지역 문화의 보존과 교육 기회의 균등한 제공을 위해 전국에 세워진 도서관은 그 지역 밀착형 이미지를 감안하여 도서관 명칭을 지었다. 그림책 도서관, 영화 도서관, 아랍 문학작품 도서관에서 유추할 수 있듯 지역색과 맥을 같이 했다. 호펜하임 도서관은 153번째로 지어진 한계로 인하여 고심 끝에 결국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 Library For Nowhere Books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책들, 분류표에 들어가기 어려운 책들이 주로 선정되었는데 그 명칭에 타당한 수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형적인 운영에도 도서관은 재정적인 문제에 직면했고 장서량을 늘리기 위한 타개책으로 제안된 것이 도서 기증이었다. 빈센트 쿠프만이라는 한 남자에 의해 시작된 도서 기증은 말 그대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가 직접 타이프라이터로 친 뒤 직접 표지를 만들고 제본해서 묶은 원고, 흔히 사가본이라 부르는 책들이었다. 그렇게 모이기 시작한 지 30여년 도서관 폐관을 앞두고 정리된 빈센트 쿠프만의 컬렉션에 대한 카탈로그와 그 마지막을 같이 한 도서관 이용자들의 이야기이다.


카탈로그는 잘 씌여진 알라딘 리뷰라고 봐도 무방할 터인데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은 <프로스페로의 꿈>이다. 16장(32면)의 낱장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림의 전후는 어떤 연관성도 없어 보이고 페이지조차 적혀 있지 않다. 제본이 되어 있지 않아 부주의하면 와르르 도서관 바닥에 쏟아질 것이고 그것을 다시 끼워 넣을 독자는 16장의 그림을 이어 붙여 만들 수 있는 20조 개의 이야기 앞에 망연자실해 질 것이다. 75억 인구가 2500가지 순서로 읽어도 일치하지 않을 이야기이고 누군가 100년 동안 100가지 다른 방법으로 읽고, 그 생을 500만번 반복해도 헤아리지 못할 이야기이다.이리 다양하다 보니 우리가 하나의 책 앞에 선다는 것은 그 책의 운명과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책들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Habent sua fata libelli. -p63-


또 한 권의 책은 <당신이 읽을 수 없는 100권의 책>이다. 사라진 책이나 원고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단순한 목록과 책 표지와 서지 정보로만 구성된 책이다. 저자의 상상의 목록만 적혀 있을 뿐 아직 구체적으로 씌여지지 않은 책이니 아마존이나 구글에서 검색 불가능한 책들이다.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에 어디에도 없는 책들의 목록이 수서됨은 당연한 일일지도. 책 제목과 서지 정보를 읽고 관심을 가질 누군가에 의해 책의 운명은 정해진다. 결국은 쓰여질 운명이다. 


당신이 어떤 책을 찾고 있는데 그 책이 세상에 없다면 그 책을 써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 -p254-


이 도서관과 사가본의 운명은 알라딘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직접 타이핑하고 탈고하여 완성한 글들, 아무도 출판해주지 않는 우리 삶의 사가본, 서재 이웃외에 누구의 피드백도 없이 가만히 먼지가 쌓여가는 글들, 결국 어디에도 없는 글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는 곳. 알라딘.  언젠가 이 곳의 운명이 다하는 날 누군가에게 남겨질 익명의 글들에게 바치는 알라딘과 이웃 서재들의 헌사가 아닐까 하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25-06-25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제 페이지의 글들을 archive할 생각입니다. 갈수록 엉망이고 주절주절 개인적인 이야기를 쓴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기록을 보관했으면 하거든요. 나중에 다시 써볼만한 평도 있을지 모르니까요.ㅎ 이 책 꽤나 흥미가 갑니다.

잉크냄새 2025-06-25 21:01   좋아요 1 | URL
아마 그 마지막 날에는 알라딘도 어떤 식으로든 archive를 제공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책 관련 자료와 여행 사진 정리를 notion에 하고 있는데 내가 죽으면 이 자료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합니다. ㅎㅎ

감은빛 2025-07-28 13:49   좋아요 0 | URL
아, 잉크냄새님 노션을 쓰고 계시군요.
저도 최근에 노션 사용법을 배웠어요.
우선 읽은 책들을 한번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겨우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 정리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감은빛 2025-07-28 13:50   좋아요 0 | URL
게스트님. 저도 이 알라딘 서재에 가끔 두드려 놓은 개인적인 글들을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갈무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먼저 하시게 되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세요.

잉크냄새 2025-07-28 21:20   좋아요 0 | URL
네, 유튜브로 노션 배워서 책 관련 자료와 여행 사진을 정리중입니다.
엑셀과 파워포인트의 장점만을 극대화한 느낌이 들어요.

갈무리하는 방법은 저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ㅎㅎ

transient-guest 2025-07-29 04:12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는 막연하게 하나씩 보면서 다시 써볼까 싶은데 언젠가는 그냥 긁어서 다운로드 하는 옵션이 생기지 않을까요?ㅎㅎ
 
사로잡는 얼굴들 -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
이사 레슈코 지음, 김민주 옮김 / 가망서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사람의 인생을 축약한 줄임말로써 쓰여진 단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삶을 인간의 범주로 한정하고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게도 삶이 존재할 것이란 생각을 오래도록 하지 못했다. 인간이 동물에게 삶을 부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고통과 쾌락의 유무였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성의 시대에도 이성은 오히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고통을 느낀다.'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 대한 번민에서 비롯된 자기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벤담과 다윈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성과 별개로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동물권과 동물 복지 등 현대적 의미의 권리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인간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동물을 반려, 실험, 축산동물로 구분해보자. 반려 동물은 아직도 학대와 파양의 문제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삶을 보장받으며 권리와 복지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실험 동물도 부족하나마 고통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며 불필요한 실험의 근절과 인공 피부 등 대체 실험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느린 걸음이나마 그 첫 발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축산동물은 아직도 요원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앞에 그들의 권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제품으로서 인식되기에 그들에게 늙음은 사치고 낭비이며 비효율이다. 사료값으로 대변되는 재료비와 미식으로 포장된 식탐 앞에 그들은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저 단기간에 살찌우기가 목표인 제품으로 인식된다. 


이 책에 소개되는 동물들은 대부분 축산동물이다. 우연찮게 도살의 위기에서 벗어나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게 된 동물들의 초상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던 사진작가 이사 레슈코는 마침내 늙음을 맞이한 그들에게서 인간과 같은 삶의 존엄을 느끼고 카메라를 들었다. 그들의 삶을 존중해 그들이 삶의 안식처를 허락하기 전까지, 그들과 같은 눈 높이로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며 곁을 내어줄 때까지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들이 눈빛으로 곁을 허락한 순간 자연광에 의지하여 그들의 늙음을 카메라에 담아 내었다. 그들에게도 늙음은 삶의 축복이었다. 허락되지 않던 늙음을 간직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고통과 쾌락 외에 그들의 삶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늙음.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들도 늙어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 가진 것들은 늙어갈 권리가 있다.  


어떤 동물도 지각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우리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지각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개별성과 고유성이 있는 존재로서 지능과 감정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지능과 감정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p32-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5-04-23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동물들은 늙어 갈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죠. 동물 학대를 금지해야 한다면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어요...

잉크냄새 2025-04-24 19:28   좋아요 0 | URL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고기로 인식되기에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거죠.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앞으로도 어려운 문제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동물학대의 문제는 육식의 문제와 별개로 동물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지 싶습니다.

감은빛 2025-04-24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참 좋아요! 어제 아침에 읽고 뭐라고 남길까 하고 잠시 고민하는 틈에 갑자기 일이 몰아치기 시작해 밤 늦게까지 다시 알라딘에 들어올 틈을 주지 않더라구요.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새벽이 생츄어리를 비롯해 여러 생츄어리가 만들어지거나 준비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동물권이란 주제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과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잉크냄새 2025-04-24 19:25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도 새벽이 생추어리가 언급됩니다. 한국어판이 나올(22년 초판) 당시 한국에는 새벽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더 추가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 책을 읽으며 동물권과 동물 복지가 다른 의미라는 걸 알았어요. 성차별 이후 마지막 남은 차별이 종차별이라고 하네요. 종차별의 극복이 동물권의 완성이겠죠. 쉽지 않은 문제지만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네요.

transient-guest 2025-04-29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은 현실대로 개선해나가고 (사실 모두가 채식을 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다만 개인이 또는 단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골과 도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등 의식수준의 차이는 결국 현실에서 오는 것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갖추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잉크냄새 2025-04-29 21:52   좋아요 0 | URL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동물권과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전 그 조롱이 양비론이라고 생각해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고민하는 것은 채식이든 육식이든 어떤 경우에도 필요하니까요.

transient-guest 2025-04-30 10:00   좋아요 1 | URL
저는 그저 고기를 덜 먹고 동물을 아끼는 것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앞으로는 반려동물도 보호소에서 입양하지 않으면 키우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했네요. 제작년에 우연히 친해진 단지의 길고양이-키우다 버린 듯 - 가 우여곡절 끝에 작년 5월부터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다른 길고양이들 보면 얘네들도 어딘가에 입양되면 행복하게 살텐데 하는 생각을 해요. 얻어다 키울지는 모르겠찌만 강아지든 고양이든 상품으로 사올 생각은 이제 완전히 없어요.

잉크냄새 2025-04-30 21:33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사실 저도 실천의 범위가 그 정도일 겁니다. 육식 줄이기, 오리털 안 입기, 가죽 제품 안 쓰기...개인적으로 이런 작은 실천을 해 가고 있어요. 육식 줄이기는 처음에는 기후 온난화에 대한 개인 실천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동물 복지로 그 의미를 확대하게 되었네요. 저도 두 번째 고양이는 제 창문에 새앙쥐를 잡아다 주던 길고양이입니다. ㅎㅎ
 
사진, 잘 찍고 싶다 - 생각하며 찍는 사진
남규한 지음 / 혜지원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 찍기에 대한 많은 책들이 카메라 사용법에 방점을 찍는데 반하여 이 책은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하여 생각할 것들에 대하여 말한다. 일례로 일반적인 책들이 아웃포커싱 기법에 대하여 주로 설명한다면 이 책은 왜 아웃포커싱을 하려고 하는지 주제와 소재와 이미지에 대하여 스토리를 먼저 구성해 볼 것을 말한다. 물론 카메라 기술이 사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에 저자 또한 주제와 소재에 대한 개론을 소개한 도입부 이후의 대부분은 기타 서적과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부분에 할애하고 있다. 다만 그 장면 하나에도 '어떻게'가 아닌 '왜'를 먼저 생각한 후 기법을 적용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이 방법은 사진 찍기의 측면뿐 아니라 타인의 사진을 감상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사진의 기술을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의 축'으로 설명한다. 가로와 세로를 x,y축으로 보면 교차점에서 앞으로 나오는 부분은 z축이다. x,y,z축의 삼차원 공간을 흐르는 시간을 t축으로 삼는다. 그는 이 시공간의 개념에 사진의 기본 기술을 비유한다. 피사체를 얼마만큼 잘라내 사진에 담아낼지를 결정하는 프레이밍은 x,y축을 결정하는 것이다. 작가로부터 얼마나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를 사진에 담을지 결정하는 조리개의 조절은 z축을 정의하는 것이다. 프레이밍과 조리개에 의한 생성된 이미지를 얼마나 지켜볼 지를 결정하는 셔터 속도가 t축을 이룬다. 뷰파인더에 들어온 풍경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주제와 소재에 대한 이미지 선정, 이미지에 투영된 스토리, 3차원으로 구성되어 뷰파인더에 들어온 풍경이 만나면 꽤 괜찮은 사진이 나오지 않을까.


프레이밍을 할 때 피사체가 잘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 나와야 할 필요도 없고, 나무의 잎부터 뿌리까지 모두 나와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간결하게 잘라내는 프레이밍은 내용면에서는 주제를 부각하여 드러내는 효과가 있으며, 시각적으로는 선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p14-  


사진을 찍을 때 상상력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진은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는 장면을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석하여 촬영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를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p4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5-03-01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진을 잘 찍고 싶어 책 두 권을 사서 본 적이 있는데 어렵지만 몇 개의 팁은 얻었죠.
잘 모를 땐 (제 식으로 표현하면) 사물의 배치가 대각선이 느껴지도록 찍을 것. 이건 지금도 명심하는 것 중 하나예요.ㅋ

잉크냄새 2025-03-01 21:01   좋아요 1 | URL
저도 가끔 생각나면 한번씩 읽곤 하는데 금방 잊어버립니다. 읽으며 밖으로 나가 많이 찍어봐야 하는데 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요.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효과를 본 몇몇 기법에 대해서는 손이나 눈이 기억해내곤 합니다. 이 책에서는 프레이밍에 대한 정의가 그런건가 봐요.
 
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대 후반,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내 배낭 속에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범우사 문고판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다. 내 영혼 어딘가에 덕지덕지 달라 붙어있을 욕망의 덩어리를 떨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들고 다녔다. 지금 표지를 살펴보니 읽은 날짜가 연필로 적혀 있다. 한달 반의 여행 기간 동안 네 번을 읽은 모양이다. 그 당시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내 삶의 방향을 볼 때 스님의 무소유, 시절 인연, 본래무일물과 같은 사상이 은연중에 흔적을 남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법정, 나를 물들이다>는 그들의 삶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가서 함께 행복했던 열아홉 분의 인연을 담은 책이다. 그의 인연은 삶이 종교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주교, 목사, 스님, 원불교 교무 등 종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 사귐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화가, 조각가, 방송인, 도예가, 서예가 등 삶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근엄한 스님의 삶 뿐만 아니라 냉정한 겉모습과 달리 작은 인연에도 우주만큼 큰 의미를 두시는 또 다른 면모도 얼핏 보인다. 또한 조근조근 스님과의 인연을 풀어내는 그들의 삶도 스님과의 인연이 스미고 번지어 맑고 향기로운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창한 다비식이나 화장 의식 없이 스님의 평소 말씀 그대로 '비구 법정(比丘 法頂)' 위패 하나 드시고 불에 드신지 어느덧 열두해가 지났다. "살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시고 떠나셨다. 수필가로서, 문장가로서 그가 남기 숱한 글들은 그의 완전한 죽음 뒤에도 우리의 삶을 때론 보듬고 때론 질타하며 그의 생을 더 맑고 향기롭게 기억하게 한다. 

  

스승은 소유하러 들면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진다고 했다. 우리 필요는 대상이 아니라 쓰임새다. 의자를 가지려는 까닭은 ‘앉기 위함’ 이요, 사랑을 구하는 까닭은 ‘설렘과 끌림’때문이다. 우리 필요는 소유가 아니라, 쓸모이다. -p168-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2-03-1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요즘 넘 멋지신 거 아녜요?? 암튼, 우리 필요는 대상이 아니라 쓰임새라니!!! 고개 주억거리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나의 쓰임새는 뭔가? ^^;;
그리고 이 온라인에서의 인연도 생각하게 되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22-03-19 11:53   좋아요 0 | URL
대상의 본질에 충실하면 그 쓰임새가 보이지 않을까요?

프레이야 2022-03-1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 님 인도 페이퍼 기억납니다.
글도 사진도 그냥 좋았던 기억이요.
법정스님의 책은 거의 갖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인연 이야기로 엮인 이 책은 처음 봐요. 찜해갑니다. 오래전 나온 책이군요.
무소유의 참뜻을 다시 생각해 보며…

잉크냄새 2022-03-19 11:54   좋아요 1 | URL
인도 여행 떠난 지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네요.
요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다 보니 책들이 좀 오래된 감이 있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3-2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와 자유로와... 오늘 이 말이 마음에 박히네요 :)

잉크냄새 2022-03-22 13:21   좋아요 0 | URL
라임이 살아있다는 말씀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