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는 얼굴들 -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
이사 레슈코 지음, 김민주 옮김 / 가망서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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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람의 인생을 축약한 줄임말로써 쓰여진 단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삶을 인간의 범주로 한정하고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게도 삶이 존재할 것이란 생각을 오래도록 하지 못했다. 인간이 동물에게 삶을 부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고통과 쾌락의 유무였다.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성의 시대에도 이성은 오히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고통을 느낀다.'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 대한 번민에서 비롯된 자기 합리화였을 수도 있다. 벤담과 다윈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성과 별개로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각인되기 시작했고 동물권과 동물 복지 등 현대적 의미의 권리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인간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동물을 반려, 실험, 축산동물로 구분해보자. 반려 동물은 아직도 학대와 파양의 문제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삶을 보장받으며 권리와 복지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실험 동물도 부족하나마 고통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며 불필요한 실험의 근절과 인공 피부 등 대체 실험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느린 걸음이나마 그 첫 발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축산동물은 아직도 요원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앞에 그들의 권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제품으로서 인식되기에 그들에게 늙음은 사치고 낭비이며 비효율이다. 사료값으로 대변되는 재료비와 미식으로 포장된 식탐 앞에 그들은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저 단기간에 살찌우기가 목표인 제품으로 인식된다. 


이 책에 소개되는 동물들은 대부분 축산동물이다. 우연찮게 도살의 위기에서 벗어나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게 된 동물들의 초상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던 사진작가 이사 레슈코는 마침내 늙음을 맞이한 그들에게서 인간과 같은 삶의 존엄을 느끼고 카메라를 들었다. 그들의 삶을 존중해 그들이 삶의 안식처를 허락하기 전까지, 그들과 같은 눈 높이로 같은 장소에서 생활하며 곁을 내어줄 때까지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들이 눈빛으로 곁을 허락한 순간 자연광에 의지하여 그들의 늙음을 카메라에 담아 내었다. 그들에게도 늙음은 삶의 축복이었다. 허락되지 않던 늙음을 간직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고통과 쾌락 외에 그들의 삶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늙음.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들도 늙어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 가진 것들은 늙어갈 권리가 있다.  


어떤 동물도 지각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우리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지각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개별성과 고유성이 있는 존재로서 지능과 감정을 발휘하기 위해 반드시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지능과 감정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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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23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동물들은 늙어 갈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죠. 동물 학대를 금지해야 한다면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어요...

잉크냄새 2025-04-24 19:28   좋아요 0 | URL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고기로 인식되기에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거죠.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앞으로도 어려운 문제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동물학대의 문제는 육식의 문제와 별개로 동물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지 싶습니다.

감은빛 2025-04-24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참 좋아요! 어제 아침에 읽고 뭐라고 남길까 하고 잠시 고민하는 틈에 갑자기 일이 몰아치기 시작해 밤 늦게까지 다시 알라딘에 들어올 틈을 주지 않더라구요.

최근에 우리나라에도 새벽이 생츄어리를 비롯해 여러 생츄어리가 만들어지거나 준비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동물권이란 주제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과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잉크냄새 2025-04-24 19:25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도 새벽이 생추어리가 언급됩니다. 한국어판이 나올(22년 초판) 당시 한국에는 새벽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더 추가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 책을 읽으며 동물권과 동물 복지가 다른 의미라는 걸 알았어요. 성차별 이후 마지막 남은 차별이 종차별이라고 하네요. 종차별의 극복이 동물권의 완성이겠죠. 쉽지 않은 문제지만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네요.

transient-guest 2025-04-29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은 현실대로 개선해나가고 (사실 모두가 채식을 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다만 개인이 또는 단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골과 도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등 의식수준의 차이는 결국 현실에서 오는 것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을 갖추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잉크냄새 2025-04-29 21:52   좋아요 0 | URL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동물권과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전 그 조롱이 양비론이라고 생각해요.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고민하는 것은 채식이든 육식이든 어떤 경우에도 필요하니까요.

transient-guest 2025-04-30 10:00   좋아요 1 | URL
저는 그저 고기를 덜 먹고 동물을 아끼는 것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앞으로는 반려동물도 보호소에서 입양하지 않으면 키우지 않을 것이란 다짐을 했네요. 제작년에 우연히 친해진 단지의 길고양이-키우다 버린 듯 - 가 우여곡절 끝에 작년 5월부터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다른 길고양이들 보면 얘네들도 어딘가에 입양되면 행복하게 살텐데 하는 생각을 해요. 얻어다 키울지는 모르겠찌만 강아지든 고양이든 상품으로 사올 생각은 이제 완전히 없어요.

잉크냄새 2025-04-30 21:33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사실 저도 실천의 범위가 그 정도일 겁니다. 육식 줄이기, 오리털 안 입기, 가죽 제품 안 쓰기...개인적으로 이런 작은 실천을 해 가고 있어요. 육식 줄이기는 처음에는 기후 온난화에 대한 개인 실천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동물 복지로 그 의미를 확대하게 되었네요. 저도 두 번째 고양이는 제 창문에 새앙쥐를 잡아다 주던 길고양이입니다. ㅎㅎ
 
사진, 잘 찍고 싶다 - 생각하며 찍는 사진
남규한 지음 / 혜지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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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기에 대한 많은 책들이 카메라 사용법에 방점을 찍는데 반하여 이 책은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하여 생각할 것들에 대하여 말한다. 일례로 일반적인 책들이 아웃포커싱 기법에 대하여 주로 설명한다면 이 책은 왜 아웃포커싱을 하려고 하는지 주제와 소재와 이미지에 대하여 스토리를 먼저 구성해 볼 것을 말한다. 물론 카메라 기술이 사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에 저자 또한 주제와 소재에 대한 개론을 소개한 도입부 이후의 대부분은 기타 서적과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부분에 할애하고 있다. 다만 그 장면 하나에도 '어떻게'가 아닌 '왜'를 먼저 생각한 후 기법을 적용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이 방법은 사진 찍기의 측면뿐 아니라 타인의 사진을 감상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사진의 기술을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의 축'으로 설명한다. 가로와 세로를 x,y축으로 보면 교차점에서 앞으로 나오는 부분은 z축이다. x,y,z축의 삼차원 공간을 흐르는 시간을 t축으로 삼는다. 그는 이 시공간의 개념에 사진의 기본 기술을 비유한다. 피사체를 얼마만큼 잘라내 사진에 담아낼지를 결정하는 프레이밍은 x,y축을 결정하는 것이다. 작가로부터 얼마나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를 사진에 담을지 결정하는 조리개의 조절은 z축을 정의하는 것이다. 프레이밍과 조리개에 의한 생성된 이미지를 얼마나 지켜볼 지를 결정하는 셔터 속도가 t축을 이룬다. 뷰파인더에 들어온 풍경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주제와 소재에 대한 이미지 선정, 이미지에 투영된 스토리, 3차원으로 구성되어 뷰파인더에 들어온 풍경이 만나면 꽤 괜찮은 사진이 나오지 않을까.


프레이밍을 할 때 피사체가 잘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 나와야 할 필요도 없고, 나무의 잎부터 뿌리까지 모두 나와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간결하게 잘라내는 프레이밍은 내용면에서는 주제를 부각하여 드러내는 효과가 있으며, 시각적으로는 선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p14-  


사진을 찍을 때 상상력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진은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는 장면을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석하여 촬영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를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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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3-01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진을 잘 찍고 싶어 책 두 권을 사서 본 적이 있는데 어렵지만 몇 개의 팁은 얻었죠.
잘 모를 땐 (제 식으로 표현하면) 사물의 배치가 대각선이 느껴지도록 찍을 것. 이건 지금도 명심하는 것 중 하나예요.ㅋ

잉크냄새 2025-03-01 21:01   좋아요 1 | URL
저도 가끔 생각나면 한번씩 읽곤 하는데 금방 잊어버립니다. 읽으며 밖으로 나가 많이 찍어봐야 하는데 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요.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효과를 본 몇몇 기법에 대해서는 손이나 눈이 기억해내곤 합니다. 이 책에서는 프레이밍에 대한 정의가 그런건가 봐요.
 
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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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내 배낭 속에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범우사 문고판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다. 내 영혼 어딘가에 덕지덕지 달라 붙어있을 욕망의 덩어리를 떨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들고 다녔다. 지금 표지를 살펴보니 읽은 날짜가 연필로 적혀 있다. 한달 반의 여행 기간 동안 네 번을 읽은 모양이다. 그 당시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내 삶의 방향을 볼 때 스님의 무소유, 시절 인연, 본래무일물과 같은 사상이 은연중에 흔적을 남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법정, 나를 물들이다>는 그들의 삶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가서 함께 행복했던 열아홉 분의 인연을 담은 책이다. 그의 인연은 삶이 종교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주교, 목사, 스님, 원불교 교무 등 종교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 사귐의 경계에서 자유로와 화가, 조각가, 방송인, 도예가, 서예가 등 삶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근엄한 스님의 삶 뿐만 아니라 냉정한 겉모습과 달리 작은 인연에도 우주만큼 큰 의미를 두시는 또 다른 면모도 얼핏 보인다. 또한 조근조근 스님과의 인연을 풀어내는 그들의 삶도 스님과의 인연이 스미고 번지어 맑고 향기로운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거창한 다비식이나 화장 의식 없이 스님의 평소 말씀 그대로 '비구 법정(比丘 法頂)' 위패 하나 드시고 불에 드신지 어느덧 열두해가 지났다. "살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시고 떠나셨다. 수필가로서, 문장가로서 그가 남기 숱한 글들은 그의 완전한 죽음 뒤에도 우리의 삶을 때론 보듬고 때론 질타하며 그의 생을 더 맑고 향기롭게 기억하게 한다. 

  

스승은 소유하러 들면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진다고 했다. 우리 필요는 대상이 아니라 쓰임새다. 의자를 가지려는 까닭은 ‘앉기 위함’ 이요, 사랑을 구하는 까닭은 ‘설렘과 끌림’때문이다. 우리 필요는 소유가 아니라, 쓸모이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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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1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요즘 넘 멋지신 거 아녜요?? 암튼, 우리 필요는 대상이 아니라 쓰임새라니!!! 고개 주억거리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나의 쓰임새는 뭔가? ^^;;
그리고 이 온라인에서의 인연도 생각하게 되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22-03-19 11:53   좋아요 0 | URL
대상의 본질에 충실하면 그 쓰임새가 보이지 않을까요?

프레이야 2022-03-1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 님 인도 페이퍼 기억납니다.
글도 사진도 그냥 좋았던 기억이요.
법정스님의 책은 거의 갖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인연 이야기로 엮인 이 책은 처음 봐요. 찜해갑니다. 오래전 나온 책이군요.
무소유의 참뜻을 다시 생각해 보며…

잉크냄새 2022-03-19 11:54   좋아요 1 | URL
인도 여행 떠난 지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네요.
요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다 보니 책들이 좀 오래된 감이 있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3-2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와 자유로와... 오늘 이 말이 마음에 박히네요 :)

잉크냄새 2022-03-22 13:21   좋아요 0 | URL
라임이 살아있다는 말씀이렸다!!!
 
아Q정전.광인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5
루쉰 지음, 정석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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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견해일지는 모르지만 루쉰과 체게바라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둘 모두 의학을 전공한 공통점이 있지만 진정 치유해야할것은 육체가 아닌 영혼임을, 개인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임을 깨달은 순간 루쉰은 중국 사회의 암흑적 현실과 싸우는 문학가로, 체는 남미의 부조리와 싸우는 혁명가로의 길을 찾아 떠난 모습이 그렇다. 혁명의 진정성은 같았다.

아Q, 힘없고 가난한 최하층민이며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전형적으로 비겁하고 비굴한 부류이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시대의 흐름에 표류하며 혁명당이 되고 혁명이 실패하자 살해당하는 허무한 인물이다. 아Q는 중국민중의 무지와 의식 결여에 절망하던 루쉰이 그들을 향해 뱉어낸 인물이다.  자아의식과 목적의식이 결여된, 그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민중에 의한 혁명의 허구와 허무에 절망하며 피 토하듯 그려낸 인물이다. 루쉰의 희망이 절박한 반면 민중의 희망은 그저 아득하고 막연할 뿐이니 그 간극에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희망이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다는 그의 글에서 살짝 절망이 엿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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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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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감사드리고 싶군요. 한가족의 생명을 짊어지고 닭장 같은 방제공장으로 내몰려 청춘의 모든 감정을 철저히 외면당한채 살아온 젊은 여직공들의 삶을 그리도 안쓰럽게 바라본 당신의 마음에 감사드리고 싶군요. 밤새 새벽길을 걸으며 아낀 버스비로 빵 하나를 건네던 당신의 손길이나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런지요. 당신이 분신한 후 십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형공장으로 구두공장으로 먼 길을 떠난 내 누이들의 삶도 그러했을가 싶은 마음에 가슴 한켠이 울컥하더군요. 철없던 시절의 일이라 누이들의 마음 하나 보듬지 못한 어리석은 나를 대신해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을 어루만진 당신의 손길에 감사드리고 싶군요.

마음이 아팠던 것은 비단 당신의 분신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노동 환경의 부조리로 인하여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성찰에 눈뜨기 시작하던 시기의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했던가요. 인간이 희망인 세상을 꿈꾸던 당신의 가슴은 또 얼마나 희망으로 벅차 올랐던가요. 그런 당신의 순수성의 한계를 알기에 서글펐고 결국 삶의 부조리란 인간 자체의 부조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의 억압과 폭력구조라는 사실에 좌절하던 모습이 아직도 가슴 아프게 남아있네요. 어쩌면 당신의 분신은 절망의 마지막 표출이고 항거였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절망의 끝자락에 남은 희망을 바라보는 시각을 우리들에게 던져주었죠. 그러나 진정으로 서글픈 것은 당신이 떠난 지 삼십 년이 훌쩍 넘은 이 사회가 그런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농민의, 노동자의 분신이 단순히 개인의 이기적이고 비겁한 선택으로 비춰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당신이 던져준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부끄러운 우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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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0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부끄러워요. 저분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는데.. 현실은 변한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요.

파란여우 2008-03-0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목만 보고 제 얘긴줄 알았어요.
(진지한 리뷰에 펑 폭발하는 댓글)

암흑의 시절, 등불을 밝히신 분들에게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살지요.
최소한 지금이라도 의도적 방관자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잉크냄새 2008-03-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차장님 /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세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여우님 / 예전에 제 선배가 숫자로 인간을 분석하는 저의 전공에 치를 떨 날이 올것이라는 말에 지금은 공감하고 삽니다. 그저 살아가는 한 방편이라고 말하기에는 스스로의 일이 참 거시기한때도 많네요.의도적 방관자,수동적 방관자...모두 같은 의미일것 같습니다.

icaru 2008-03-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슴다~~!

2008-03-06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08-03-0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얼마만의 잉작가님표 리뷰래요?^^
한자한자 눌러쓰신듯한, 진한 잉크향이 묻어나는 묵직한 리뷰 고개숙여 잘 읽고갑니다.

털짱 2008-03-0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추천 한방 날리고...
모처럼 잉크냄새님의 리뷰를 읽으니 좋군요.^-^

제가 제 친구 하얀마녀님을 "몇 살 더 어린 잉크냄새님"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잉크냄새님도 제 친구 하얀마녀님을 닮았을 것 같아요.
다른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이 아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잉크냄새 2008-03-1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언제던가 님의 리뷰에서 조영래 선생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가물 가물.

속삭님 / 하하, 별말씀을 좋은 음악 잘 듣겠습니다. 내 마음이 빚진 것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춤인생님 / 요즘은 리뷰 쓰기가 쉽지 않아요. 예전처럼 슥삭슥삭 쓰고 싶은데, 요즘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자꾸 부여하려고 하나봐요.

살청님 / ^^

털짱님 / 오랫만에 복귀하신 하얀마녀님이 친구이시군요. 두분을 생각하니 예전 밤새 릴레이 달리던 댓글이 떠오르네요. 누군가 절 닮았다는 사람, 문득 궁금해집니다.

하얀마녀 2008-03-14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힛... 저에겐 칭찬이지만 잉크냄새님껜 별로 아닌 듯...
같은 책을 읽었는데 결과물은 많이 다르네요.
이 리뷰를 읽으니 책을 한 번 더 읽은 느낌입니다.

잉크냄새 2008-03-18 09:00   좋아요 0 | URL
ㅎㅎ 전태일 평전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님께서 쓰신 짧은 리뷰 읽어보았답니다.

털짱 2008-03-2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을 감히 제 친구라 했지만, 사실 저보다 연장자세요)과 잉크냄새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두 분다 알라딘마을사람들이 사랑하는 서재주인이라는 점이겠지요? ^-^

아주 가끔씩 게으르게 들어오지만, 두 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 참 반갑습니다.
마음에 온돌을 깐 느낌이랄까...ㅋㅋㅋ (에구, 촌스러...)

잉크냄새 2008-03-24 13:08   좋아요 0 | URL
비주류 서재에 그런 찬사를 해주시다니요.
<마음에 온돌을 깐 느낌> 이런 따스한 표현이 또 어디있다고 촌스럽다니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