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토록 잊히지 않는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있다. <대탈주>에서 스티브 맥퀸이 오토바이를 타고 철조망을 뛰어 넘는 장면이라든지, 감옥을 탈출한 후 쏟아지는 비를 두 팔을 벌려 맞는 <쇼생크 탈출> 팀 로빈스의 클로즈 업 장면이 그러하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뛰어 나오며 총을 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나는 <내일을 향해 쏴라>가 또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그들 중 한 분이 오늘 세상을 떠났다. 어떤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누군가가 이렇게 떠나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명화극장, 토요명화의 단골이었던 그가 한 동안 잊고 있던 기억 저편의 추억을 어루만지고 떠나간다. 폴 뉴먼과 함께 <스팅>,<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명콤비를 이룬 그는 저 먼 곳에서 낡은 영사기 속 그들 젊은 날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지 않을까. 로버트 레드포드.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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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9-17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스팅>도요^^

잉크냄새 2025-09-18 22:37   좋아요 1 | URL
저 마지막 장면과 폴 뉴먼의 자전거 타는 장면이 가장 멋진 장면이었죠.

마힐 2025-09-17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렇게도 유명한 <내일을 향해 쏴라>는 보지 못했지만, 잉크냄새님의 글을 유추해 보면 이소룡의 <정무문>이 떠오르네요. 정무문의 마지막 엔딩 장면, 일본 군경들의 총탄을 향해 괴함을 지르며 날아차기를 하는 이소룡의 장면도 제게는 충격적이었거든요. 아마 이소룡이 <내일을 향해 쏴라>를 오마주 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09-18 22:40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 <정무문>이 72년이고 <내일을 향해 쏴라> 가 69년이니 시기상으로도 설명이 되네요. 생각지 못했는데 오마주....라고 하시니 와우....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면입니다.

카스피 2025-09-18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로버트 레드포드가 오늘 돌아가셨네요.로버트 레드포드가 과거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나이가 89세로 많으실 줄은 몰랐네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잉크냄새 2025-09-18 22:42   좋아요 0 | URL
전형적인 미국 백인 배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해리슨 포드처럼 말년까지 꾸준히 활동하시지 않았는지 이렇게 부고를 통해서야 알게 되네요.

바람돌이 2025-09-18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입니다. 저 영화 봤을 때가 너무 어릴 때라 왜 해피엔딩이 아니냐며 엉엉 울었다는.... 인상적이고 슬픈 장면이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어졌던 로버트 레드포드 굿바이!!!

잉크냄새 2025-09-18 22:45   좋아요 1 | URL
전 슬픔보다는 어떤 족쇄로부터의 해방감 비슷한 걸 느낀 것 같아요. 페이퍼에 적은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다들 뭔가로부터 탈출하는 장면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네요. ㅎㅎ

바람돌이 2025-09-18 22:54   좋아요 1 | URL
어 그걸 느낄 수 있었다니 멋진데요. 저는 그냥 주인공이 왜 죽어하면서 통곡하는 꼬꼬마... ㅎㅎ

잉크냄새 2025-09-18 23:04   좋아요 1 | URL
아마 기억의 왜곡일지도 몰라요. 어릴 때는 그냥 슬프고 괜히 멋진 장면인데, 철 들고 나서 그런 의미를 기억에 덮어씌워 버린 것이겠죠. ㅎㅎ

icaru 2025-09-18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오늘 라디오에서 바바라스트라이샌드가 부르는 영화 추억의 주제가가 나오더라고요 가을이라선가 그랬는데.. 그 이유가 아하 이제야

잉크냄새 2025-09-18 22:48   좋아요 1 | URL
the way we were...노래를 전부는 모르지만 저 가사가 나오는 부분만큼은 저절로 따라부르게 되는 명곡이죠. ㅎㅎ 제가 아는 가사의 전부이지만 그 선율만큼은 평생토록 각인되어 있을 듯 해요.
 

뭄바이에서 테러가 터졌다. 수 많은 사상자를 낸 테러의 다음 목적지로 델리가 지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델리 입국 칠일 전이었다. 당시 첫 배낭 여행에 대한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인도방랑기' 라는 다음 카페에 가입해 여행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인도는 남미와 더불어 배낭 여행 최악의 난이도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여행자가 여성인 인도 여행의 특성상 청일점이었던 난 일정과 루트가 비슷한 많은 이들에게 동행을 요청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들 모두가 여행을 취소했다. 미안함을 표시하는 그들의 쪽지가 왠지 명복을 빌어주는 쪽지 같았다. 하루 정도 고민했다. 배낭 여행을 위해 회사를 퇴사하고 잡은 일정이었다. 테러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냥 내가 부정당해 버린다는 기분에 화가 났다. 그냥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왠지 어줍잖은 비장함도 가슴 한 켠에 자리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여행 전날 카페 글을 확인하다 도움 요청글 하나를 보았다. 델리에 있는 '서울 식당'에서 급하게 핸드캐리를 요청한 사항이었다. 댓가는 하루 숙박과 아침밥 제공이었다.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식당 여주인을 만나니 고추장 등속이 담긴 라면 박스 하나를 넘겨줬다. 뒤돌아서던 그녀는 내 짐을 힐끗 보더니 배낭은 들고 타고 고추장 박스 하나를 더 전달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번잡함을 싫어하던 내 성격이 배낭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인데 보부상 개나리 봇짐 정도의 짐을 메고 있었다. 더구나 배낭 유명 브랜드인 columbia는 침낭이 배낭 위에 묶이는 구조인데 반하여 국산 travel mate는 침낭이 배낭 아래에 메여지는 구조였다. 그리하여 이 개나리 봇짐처럼 아래로 푹 꺼진 배낭에 고추장 박스 두 개를 들고 인생 첫 배낭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 복장은 델리 공항에서 검문을 자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마 전도연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이 먼저 상영되었다면 이 제안을 분명 거절했을 것이다.

  

<국산 travel mate는 침낭이 배낭 아래에 메여지는 구조이다. 저 보부상 스타일에 양 손에 고추장이 든 라면 상자를 들고 테러가 예고된 델리에 도착했다>


홍콩을 경유한 비행기가 델리 공항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내세관이 남다른 인도인들은 테러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북적북적 하였다. 여행자는 남녀 두 쌍이 팀을 이룬 서양인 한 팀만 보였다. 여행 베테랑으로 보이는 그들을 따라가면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들 뒤를 따랐는데 입국 심사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주소지 불명. 그러니까 델리에서 머물 숙박 업소도 없이 들어온 것이다. 출장만 다니고 여행이 처음이니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디로 가느냐는 그들의 물음에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주소는 '서울 레스토랑'이었다. 심지어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엉성한 영어의 추궁과 답변이 지리하게 이어졌다. 나의 막무가내와 부탁에도 불구하고 폭탄 테러 위협으로 강화된 심사에 그들도 만만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서울 레스토랑'이 공항에 무료 광고를 때리고 있을 즈음 나타난 상사인 듯한 관리가 나타났다. 그가 귀찮은 듯 간단한 질문만으로 이 상황을 끝내준 것은 자정 두 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심사대를 지나니 테러 지목에 난리난 공항의 상황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꽁무니를 쫓던 서양 여행자는 물론 인도인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나 혼자 덩그러니 넓은 공항에 버려졌다. 다음 비행기조차 입국하는 기색이 없었다. 황토색 군복에 총을 든 군인들이 공항 곳곳을 물샐 틈 없이 경계하고 있었고 폭탄 탐지견들이 꼬리를 흔들면 재기발랄하게 오가고 있었다. 고추장 두 박스를 들고 개나리 봇짐을 멘 모습은 지나가는 군인들의 의심의 눈초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폭탄 탐지견들도 고추장 냄새를 처음 맡아본 것일까. 폭탄을 탐지해야 할 탐지견들이 관심을 보였다. 박스를 열어 볼 것을 요청하는 군인들에게 고추장을 보이며 korean red pepper sauce 라고 친절히 설명해도 잠시후 또 다른 군인들이 검문하는 식으로 몇 번을 반복했다.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very spicy 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주기도 했다.


<다음날 찾아간 델리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는 공항만큼 어수선했다>


공항 전체는 중동에서 축구 중계를 할 때 들리던 부부젤라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입국장으로 나와도 군인 외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안전을 위해 공항 자체를 통제한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나오려고 유리창으로 다가서다 움찔 놀라 뒷걸음질 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항 유리창에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약간 검은톤의 피부에 사기처럼 불투명한 백색의 눈동자를 가진 인도 사람들. 그들이 유리창에 일렬로 늘어서 양손으로 손가리개를 하고 일제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평소처럼 많은 여행자를 예상하고 곳곳에서 몰려든 호객꾼들이 영업에 실패하고 마지막 남은 먹잇감으로 날 찜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사리 입은 여인, 터번 두른 아저씨, 붉은 색 점을 찍은 사두...그 수많은 안광은 내 영혼을 집중적으로 구타해 바닥에서 감히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아, 출국 비행기표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입국 한 시간 만에 들었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류시화씨, 당신이 말한 인도, 이건 아니잖아.'


시인을 잘근잘근 씹고 출국 비행기표를 고민하며 한참을 보내니 가출했던 영혼이 다시 돌아왔다. 서울 식당에서 픽업 나오기로 한 것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입국장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아마도 공항 밖에 있지 않을까 창문으로 다가가니 다시 호객꾼들이 손가리개를 하며 창문으로 몰려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어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던 출입문으로 이동하여 상반신만 내놓은채 소리쳤다. "서울 레스토랑, 서울 레스토랑~~~" 무상 광고의 메아리가 길게 울려퍼질 때쯤 불을 피워 놓은 드럼통 근처에서 한기를 녹이던 한 청년이 서울 식당이 적힌 A4 용지를 흔들며 인도인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기를 머금고 등장했다. "당신, 픽업하려 나와서 이렇게 하고 있으면 무슨 수로 찾아, 최소한 종이는 들고 있어야지" 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너무 반갑고 영어가 짧아 "땡큐, 렛츠 고"라고 짧게 말하며 공항을 탈출했다. 공항을 벗어나며 뒤돌아보니 공항은 여전히 부부젤라 소리로 가득했고 그들은 아쉬운 눈길을 돌려 다시 유리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루프탑에서 바라보며 과연 인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틀 고민했다. 델리 여행자 거리가 이 정도면....>


다행히 델리에 테러는 발생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어떤 테러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korean red pepper sauce가 very spicy하다는 사실은 알아냈다고 한다. 테러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테러는 두려움보다는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생뚱맞은 호기심이 더 적절했다. 내가 실제 마주한 공포는 막연한 테러보다는 유리창에 붙어 있던 사람들이 내뿜던 안광이었다. 피부색과 완벽히 대비되던 그들의 불투명한 백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던 안광은 그 이후로도 델리 기차역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테러로 여행자 발길이 끊긴 기차역에서 CCTV 돌아가듯 얼굴을 180도 돌리며 따라오던 무표정한 백색의 불투명한 눈동자들. 기차역을 한가로이 거닐던 소의 눈망울마저 나를 따라오는 듯 했다. 세렝케티 초원에 남겨진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 두려움이 사라지기까지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튼 델리 도착 후 이틀을 더 고민했으나 출국 비행기표는 결국 끊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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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4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다른 사람 물건 대행 핸드캐리는 절대 하면 안되는 주의사항 1번이죠. 오래전 여행기같은데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셨으니 나머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될거같네요.

잉크냄새 2025-09-05 21:10   좋아요 1 | URL
네, 전도연의 영화를 보고 실감하게 되었죠. 다만, 여행 전 저의 업무가 핸드캐리의 도움을 받았던 부분이 있어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도움이 필요할때 선뜻 손을 내밀게 된 거죠. ㅎㅎ
오래된 여행기를 다시 정리해 보는 중입니다.

2025-09-05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5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25-09-05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최고의 여행이 시작되었다,로 끝나다니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셔야지요.
언제적일까 싶어 뭄바이테러,로 검색하니 08년과 11년이 나오네요. ^^

잉크냄새 2025-09-05 21:14   좋아요 1 | URL
인생 최고 여행이 뭐 특별한 것 없고 그냥 자신에게는 어떤 여행도 최고가 아닌가 싶어요.
뭄바이 테러는 2008년 11월말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에서 발생했죠. 제가 들어간 건 정확히 일주일후 그들이 델리를 공개 타겟으로 지정한 날이어서 좀 삼엄했죠.

Forgettable. 2025-09-05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08년에 갔던 것 같은데..!! ㅎㅎ 고추장 때문에 아래로 축 늘어진 배낭 너무 웃긴데요 ㅋㅋㅋㅋㅋㅋ 오래전 여행을 엄청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것이 신기하네요. 저는 이제 정말 가물가물..

잉크냄새 2025-09-05 21:16   좋아요 0 | URL
08년이면 저보다 먼저 여행하고 나오셨겠네요. 제가 입국한 건 12월초였거든요. 어쩌면 델리 빠하르간지 인도방랑기에서 보았을 수도....ㅎㅎ
전 다른 기억은 연기처럼 사라지는데 여행 기억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아마 여행이 인생에서 의미가 있기는 했나 봅니다.

마힐 2025-09-07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상 광고. 서울 레스토랑, 아직도 있을라나요?
잉크 냄새님, 사투리 어린왕자, 이달의 당선작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
베리 베리 스파이스! ㅎㅎ

잉크냄새 2025-09-07 20:23   좋아요 1 | URL
요즘은 여행지에서 생업을 유지하는 일이 예전과 많이 달라 아마도 지금은 없지 않을까 싶군요. K푸드의 원조는 제가 델리 공항에서 전파한 ˝베리 스파이시˝ 가 아닐까요.ㅎㅎ
당선은 근 20년만입니다. ㅎㅎ 열심히 책 사 읽으라는 계시같아요.

transient-guest 2025-09-13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난이도 최상으로 알려진 곳. 저는 아마 못 갈 듯.ㅎㅎㅎ

잉크냄새 2025-09-14 09:58   좋아요 1 | URL
인도는 남미와 더불어 최상위 경쟁중입니다.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전 난이도도 최상이지만 여행의 매력 또한 최상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한 코믹북 수준의 책으로 생각했는데 의미심장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도서출판 이팝은 어린왕자 사투리 단행본을 전세계 언어를 수집하는 독일 출판사 Tintenfass(www.verlag-tintenfass.de)와 협업으로 2020년 6월 해외에서 먼저 선보였다. 어린왕자 사투리 시리즈는 Tintenfass사가 제공한 프랑스어 원문과 원문에 충실한 영역본을 녹여낸 사투리 원문과 오리지널 삽화, 이국적인 표지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강원도, 경상도, 전라북도 판본이 출판되었으며 충청도 판본도 준비중이라 한다.


1. 어린 왕자 정식판본

2. 언나 왕자 (강원도)

3. 애린 왕자 (갱상도)

4. 에린 왕자 (전라북도)


1. 하지만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멋질 거야! 금빛으로 무르익은 밀을 보면 네 생각이 날테니까.

2. 근데 시상두! 니 머리깽이 새까리가 금색이잖나! 니가 날 질들이면 인재부터는 밀밭은 내인태 음층나게 특별해지는 기야! 저 뉘런 금빛 밀밭으 보민 니는 황금빛이지.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참 기막힐 거란 말이지. 황금빛이 도는 밀을 보면 네 거 생각날 끼야

3. 그란데 니 머리카락은 금색이네. 그래가 니가 내를 질 들이모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날 끼다. 밀도 금빛이 나이까 니를 떠올릴 거 아이긋나.

4. 근디 니 머리털이 금색 아닌가 말이여. 그런게 니:가 날 질 들이믄 그건 특벨헌 것이 되는 것이여. 보리란 놈은, 금빛깔인게잉, 니: 생각을 나게 해 줄 거 아닌가 그 말이여.


1.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2. 만역에 니가 오후 네 시에 온다고 하잖아. 그래믄 난 하머 세 시부텀 기분이 좋워진다니.

3. 예를 들모, 오후 네 시에 니가 온다 카믄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끼라.

4. 에를 들어 니가 오후 네: 시에 온다 허믄 난 세: 시부텀 기분이 좋:아질 것이여. 


1.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마음으루 바야 진짜가 베케. 진짜 중한건 내 두 눈으루는 볼 수 웂사.

3. 맘으로 바야 잘 빈다카는 거.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쿠네.

4. 맴:으로 볼 적에만 지대로 볼 수 있는 벱이여 잉. 중요헌 건 눈에 안 뵈아.


1.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2. 사막으 이래 아름답게 맨드는 근요 여개서 물이 솟아 나는 데를 숨키고 있기 때문이라니요.

3. 사막이 아름다븐 기는 어딘가 응굴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데이.

4. 사막이 이:쁜 건요 고 안에다 시암을 슁키고 있은게 그런 거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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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여행을 다닐 때 머무는 도시마다 서점을 찾아보곤 했다. 한국에 출간된 책을 그 나라 언어로 만날 때의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 책을 하나 둘 사 보곤 했다. 가장 보편적으로 번역되었다고 여긴 책이 어린왕자 였다.


더 자세히 보려면 https://blog.aladin.co.kr/ink/12552836


 

한국판 기준 시계 방향으로 한국-터키-홍콩-중국-네팔-이집트 순이다. 중국판은 중국어 독학용으로 어린이 문고판을 사서 디자인이 유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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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26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출판사의 이런 번역 노력이 넘 좋아 보인네요.매번 지적 재산권이 풀린 유명 작품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우후죽순 나오는데 이런 새로움이 역시 판매에도 큰 도움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잉크냄새 2025-08-28 20:33   좋아요 0 | URL
사투리의 영역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북한지역까지 확대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마힐 2025-08-26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왕자에게 지구 별의 스승은 사막의 여우였어요. 여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린 왕자는 과연 자신이 꽃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꽃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우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갑자기 여우가 그립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08-27 17:28   좋아요 1 | URL
여우님은 길 잃은 또 다른 어린 왕자들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문득 황금빛 밀밭을 보고 그의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를 그리워하곤 한다는 소문입니다.

icaru 2025-08-29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원도는 ‘얼라‘에서 나온 언나 왕자인갑네요.. 오디오 막 재생시키면서 읽습니다! 모두 구입하신 걸 찍은 것이지요? 히야 말씀처럼 중국어판은 유난히 ㅎㅎㅎ

잉크냄새 2025-08-30 20:27   좋아요 1 | URL
아니 얼라를 아시다니. 맞아요 주로 얼라라고 합니다. 고향 사람이라면 오디오가 재생되는 듯한 착각에 충분히 빠질만 합니다.
아래 얼라왕자들 책표지는 여행길에 사 모은 겁니다.

transient-guest 2025-09-13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어떤 분 서재였나 블로그 title이 ‘여린 왕자‘였던 것이 뜬금포로 떠오르네요.ㅎㅎ 축하 드립니다

잉크냄새 2025-09-14 09:56   좋아요 0 | URL
서재 제목이 센스가 있네요. 허접한 페이퍼에 상금이라니...책 사야겠어요.
 

< 아카바는 국경 도시라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해 반대편 불빛은 이집트의 카바 항구로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다>


이집트로 넘어가는 국경도시인 아카바에 도착한 것은 해질녘이었다. 하루만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대충 숙소를 잡고 밖으로 나섰다. 국경의 밤은 뭔가 화려했다. 휘황찬란한 화려함이 아닌 자유로운 화려함이랄까. 다른 중동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면서도 뭔가 자유로움이 선사하는 발랄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주류판매점에서 양주를 두 병씩 샀다. 이집트에는 술을 사기 힘들다는 정보(나중에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를 듣고 두 명의 일행과 함께 총 여섯 병을 샀다. 숙소에 도착하니 숙소 주인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당 한병이라기에 버릴 수는 없고 3층 베란다에서 각자 한병씩을 마셨다. 동행한 두 명은 세계 여행이 삼년째 접어든 여행 고수 청년과 영국 유학후 육로로 귀국길을 선택한 여대생이었다. 배낭여행 삼개월차인 내가 제일 초보였는데 셋이 합이 잘 맞아 다마스커스부터 이 곳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도심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가지 자리는 이어졌다.


<숙소 베란다에서 술 마시며 바라본 아랍 거리, 술 문화가 없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이다>


아카바를 떠나 홍해를 건너 이집트 뉴웨이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늦잠 때문에 서둘러 떠난 택시에서 바라본 에머랄드빛 바다와 푸르다 못해 멍든 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쾌속선을 기다리는 시간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살 속에 아직 가지지 않은 숙취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따리 장수를 연상케하는 수 많은 이집트인들 뒤로 페리에 올라타니 홍해의 푸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람도 쐬고 술도 깰 겸 두 팔 벌려 타이타닉의 My heary will go on을 하러 뱃머리로 나가니 운행중 갑판에 있을 수 없다고 객실로 모두를 밀어 넣었다. 갑갑한 객실은 만원이었는데 숙취와 객실 가득 피어오르던 향신료 향에 없던 배멀미도 올라올 지경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덧 뉴웨이바에 도착해 있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니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이집트인이 새우깡 비슷한 걸 건네주어 먹었는데 향신료 범벅이었다. 


뉴웨이바 입국 관리소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외국 여행객이 많지 않아 수속 순서는 금방 찾아왔다. 일행이 먼저 수속을 마치고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비자 발급 심사원 앞에 서서 여권을 건넸다. 여권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고 나도 최대한 미소를 짓기 위해 입고리를 올리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큰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배낭을 둘러멘 채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출입문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고 달려나갔다. 폼으로 배낭에 매단 스테인레스 커피잔과 호신용 호루라기가 부딪혀 비명 소리보다 날카로운 금속음을 질렀고 "형님, 뛰지 마"라는 일행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어도 내 눈에는 출입구의 창문을 통해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햇살만이 보였다. 롱테이크 샷을 찍듯 어지러이 흔들리던 햇살이 열리며 드디어 그 햇살 속으로 전속력으로 뛰어들었고 파전 한 조각을 급하게 토해내었다.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의 절묘한 콜라보이다. 눈물로 촉촉해진 충혈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총을 멘 채 뒤따라온 군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다른 이유로 놀라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과 얼마전 고란 고원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지역이었다.

<이집트 다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이다.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18m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서 장롱에 처박아 두고 있다>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눈물을 훔치며 다시 그 앞에 섰다. 사실 비자 거부 사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러운 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뭐라 하겠는가. 후회가 밀려왔다. 왜 하필 당신 앞에서인가. 반성하는 의미로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으니 한참을 바라보다 여권에 비자를 붙여주었다. 아, 그는 개인의 자존심보다 국가의 관광 수입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이었다! 왠지 같은 나라 국적임을 밝히기 싫어하는 것 같은 동행들과 다합으로 향했다. 뉴웨이바에서 승합차에 오른 순간부터 다음 날 잠에서 깰 때까지 기억이 없다. 기억이 돌아온 건 다음날 다합의 게스트하우스였다. 악몽을 꾼 듯 시트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행후 처음 찾아든 몸의 아우성이었는지 단순한 숙취였는지 지독한 배멀미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뇌가 쪽팔림에 스스로를 봉인해버린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는 여전히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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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5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날 먹은 술과 배멀미와 향신료 냄새들이 합쳐진 결과겠죠. 어쨌든 진짜 당황하셨을듯.... 뒤따라온 군인이 더 섬뜩합니다. 그래도 하루의 기억과 무사함을 바꿨으니 다행이지요.

잉크냄새 2025-08-07 20:43   좋아요 1 | URL
뒤따라온 군인은 그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떠올려보니 제가 동양인이 아니라 아랍인이였으면 위태로운 상황까지도 발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화약고니까요.

transient-guest 2025-08-06 0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대생에서 뭔가 훈훈한 이야기를 기댔고 가슴속에서 뭔가 차올라왔다는 부분에서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땅에 들어가는 벅찬 감동을 기대했는데 말입니다.ㅎㅎㅎ 89년 냉전이 끝나고부터 2001년 9-11 이전까지의 10년 정도가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았던 시기라고 지금 와서 보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도 뭔가 90년대스러움이 느껴져서 갑자기 생각해봤습니다.ㅎㅎ 양주 한병을 다 마셨다는 건 일단 꽤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해서요.

잉크냄새 2025-08-07 20:51   좋아요 1 | URL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그 여대생은 저를 오라버니라고 깍듯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ㅎㅎ
여행도 시절마다 제각각의 장단과 매력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과거가 여행으로서는 더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불편함,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인간미, 정보의 부재로 획일화되지 않은 여행 루트 등... 요즘 여행은 뭔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느낌입니다.
양주 한병을 나발불던 저때는 2009년 금융위기때입니다. 덕분에 퇴직금을 시원하게 날렸죠. ㅎㅎ30대에 배낭여행을 하고자 퇴사하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25-08-08 01:59   좋아요 1 | URL
30대라면 양주 한병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네요.ㅎㅎ 2009년이면 한창 남의 밑에서 고생하던 시절이네요.. 그때만 가능했을텐데 전 여행을 거의 못한 것에 대한 후회아닌 후회가 있어 제 soft FIRE이후 10년은 여행을 많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5-08-08 18:45   좋아요 1 | URL
soft FIRE이후의 여행 이야기는 길손님이 올려지시면 되겠네요. ㅎㅎ 기대합니다.

마힐 2025-08-08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날, 자유로운 화려함이... 다음 날, 자유로운 부교감 신경으로 다채롭게 활동하게 했군요. ㅎㅎ
너무 재미 있어요. 여행기 계속 연재 부탁드립니다. _()_

잉크냄새 2025-08-08 18:48   좋아요 1 | URL
아주 창자까지 속속들이 내보인 기분입니다. ㅎㅎ
여행기는 느리지만 꾸준한 발걸음으로 하나 하나 채워가볼까 합니다. 마힐님의 응원이 필요해요. ㅎㅎ

카스피 2025-08-09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르단 여행을 가셨다니 넘 부럽습니당.제 친척분도 현재 이집트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데 요즘같은 더위면 그냥 회사 때려치고 한국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가족 생각하면 그럴수 없다고 한탄하시더군요.사진을 보니 요르단도 무척 더워 보이네요^^

잉크냄새 2025-08-10 14:09   좋아요 0 | URL
오래전 이야기를 지금에야 풀고 있습니다. 요르단은 사막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전 새벽녘에 추웠던 기억만 나네요. ㅎㅎ

감은빛 2025-08-17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큰일날 뻔 했네요.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까지. 글 읽으면서 술도 안 마신 저까지 숙취가 느껴질만큼 공감했습니다. 총까지 들고 따라온 군인의 인내심이 고맙네요. 어휴!

잉크냄새님의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네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합니다.

잉크냄새 2025-08-17 11:17   좋아요 0 | URL
총 이야기도 언젠가 한 번 정리해봐야겠어요. ㅎㅎ 군대에 예비군 7년까지 꽉꽉 채운 한국 여행자가 총에 대하여 얼마나 무던한지를... 일례로 인도 파키스탄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 가장 많이 가는 여행자가 한국과 이스라엘 국적이라고 합니다. 군대가 의무인 두 나라...

여행 이야기는 응원에 힘입어 한 달에 한 번은 정리하려고 노력중입니다. ㅎㅎ

2025-08-30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8-30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기가 돌다. 윤기가 흐르다. 윤이 나다. 윤은 가만히 정체하는 빛이 아니라 흐르고-돌고-드러나는 ‘활동성의 빛’이다. 또한 반드시 물체의 표면에 나타나기에 ‘의존적인 빛’이기도 하다. 즉 빛 자체가 윤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 윤은 ‘존재를 떠받치는 밝음’이란 것. 일반적으로 빛이 (전구나 노을, 혹은 영사기처럼) 특정한 중심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데 비해, 윤은 사물의 표면에 고루 퍼진 채 공평하게 드러나는 ‘안온한 빛’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툇마루처림. -p175-






국민학교 6학년 교실은 오래된 목조 건물 3층이었다. 양쪽으로 목조 계단이 있었고 2층은 교무실로 3층은 6학년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실은 2층 복도 바로 옆에 자리해 있었다. 교실 바닥과 복도는 오랜 세월 세대를 이어 닦고 닦아 반짝반짝 윤이 났고 김연아의 트리플 엑셀이 가능할 만큼 미끄러웠다. 목재 바닥의 윤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동 노동(?)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준비물로는 실과 시간에 직접 바느질해 만든 내복 재질의 걸레, 방앗간에서 얻어온 바카스 병에 담긴 들기름 찌꺼기, 그리고 새하얀 양초가 필요했다. 줄을 맞춰 앉아 바닥에 초를 칠하고 걸레에 기름을 묻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닦아 나간다. 1조가 가면 2조가 뒤를 잇고 걸레가 놓친 부분은 무릎팍이 다시 한번 닦아내어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고 지나간다. 어느새 교실과 복도는 들기름의 향긋한 내음과 걸레의 꼬릿한 냄새가 환상적으로 섞인 신비스러운(?) 향으로 가득 찬다.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숙제 검사라도 하듯 바닥 검사를 실시하면 은은한 바닥에서 끄물거리던 눈부심과 햇살 속에 가볍게 피어오른던 먼지의 은하수 길이 시작되곤 했다. 하교길에는 계단에 앉아 엉덩이 미끄럼을 타며 내려갔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엉덩이를 견뎌냈는지 계단 목재의 모서리는 둥글게 둥글게 변형되고 엉덩이 골을 따라 움푹 파여 있었다. 교장실에서 소리를 치며 나온 교장 선생님이 대머리였던 건 윤기로 떠오른 이 기억의 화룡점정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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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따뜻한 글. 읽으며 입에 절로 웃음이 맺히네요.

잉크냄새 2025-07-29 21:4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도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계신 듯 싶네요.
가끔은 이리 낡고 희미한 기억들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카스피 2025-07-28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국민학교 시절 학생들은 청소시간에 왁스나 양초로 바닥이 윤이나게 닦았다고 하더군요.만일 요즘 그랬다간 민원이다 뭐다 생 난리가 났을 겁니다ㅡ,.ㅡ

잉크냄새 2025-07-29 21:47   좋아요 0 | URL
네 그 아동 노동의 산 증인이 접니다. ㅎㅎ

감은빛 2025-07-29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덧이름 감은빛은 반질반질 윤이나는 검은 색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뜨다 감다의 그 감은 빛으로 빛을 감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이 덧이름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한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어느날 실명으로 감은빛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연락을 해와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그분은 아마 저도 실명일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을 했을텐데, 저는 실명이 아니라고 밝혀서 실망을 안겨드려 안타까웠습니다.

잉크냄새 2025-07-29 21:51   좋아요 0 | URL
가끔 감은빛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그런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었군요. 그래서 님의 글이 윤이 나는 것들처럼 평안해 보이는가 봅니다.

transient-guest 2025-07-29 23:38   좋아요 1 | URL
순우리말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을 뜻하는 우리말이 ‘미르-남자‘ ‘미리-여자‘라고 알고 있는데 혀에 착착 감기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25-07-31 22:30   좋아요 1 | URL
미르가 용의 순우리말이군요. 그럼 미르의 전설이 수컷용의 전설인거죠?

transient-guest 2025-08-01 06:27   좋아요 0 | URL
그 미르는 어떤 의미로 사용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용‘의 전설에 아마 남자격을 넣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 그것도 해본 적이 없네요. ㅎㅎㅎ

마힐 2025-07-30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시절, 유리창 청소도 있었잖아요. 창 틀에 앉아 메리야스로 만든 걸레로 빡빡 닦았었는데... 걸레 없는 친구는 자기 양말 한 쪽 벗어서 닦고 그랬어요. ㅎㅎ 이제는 아동 노동 했던 시간도 그리워 지네요.

잉크냄새 2025-07-31 22:32   좋아요 0 | URL
아, 메리야스...ㅎㅎ 역시 유리창은 내복보다 메리야스가 잘 닦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