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주행가능거리 기능에 나도 지분이 있다!

당연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기능들이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 존재마저 부정당해 버리기도 한다. 차량 운전석이나 센터페이샤에 보이는 주행가능거리도 그 중 하나이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기능이 한국 차량에 최초로 적용된 것은 그랜저XG (1998년)부터이다. 그랜저XG나 에쿠스(1999년) 등 주로 기함급 대형세단에 선행 적용된 것이 밀레니엄(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으니 이 간단한 기능이 최초 구현된 것은 불과 25년 전이란 것이다. 전자 기능의 함축적 의미인 TRIP COMPUTER 란 명칭으로 공급되던 ECU를 생산 납품하였는데 개발 초기 여러 어려움은 물론 양산시까기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험생산부터 양산 적용 단계가 나의 주요 업무였으니 한국 최초의 주행가능거리 구현에는 꽤나 지분이 있는 셈이다.


삼각대 들고 일단 뛰어!

차량 부품은 안전에 관한 특성상 제품에 대한 신뢰성 확보가 가장 엄격한 편이다. 최고 안전 부품에 해당하는 AIR BAG이나 ABS는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인 안전 부품은 아니더라도 자동차 실부하 상태에서의 전기전자적 성능을 검사하기 위하여 차량 출시전까기 엄격한 실차 테스트가 진행된다. 주행가능거리에 대한 실차테스트는 어떠했을까. 그냥 물리적이고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이었다. 테스트팀은 연구소, 신뢰성, 생산기술팀으로 구성된다. 평가팀은 운전, 기록, 예비로 역할 분담되며 교대로 한다. 뒷자석과 트렁크에는 휘발유가 든 흰색 통이 가득 실린다. 그리고 전국 곳곳을 달리며 기록하는 것이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등등 몇달에 걸쳐 달린다. 리터당 주행가능거리를 측정하기 위하여 휘발유가 떨어져 차량이 쿨럭쿨럭 요동을 치며 정지하기 직전까지 기록을 정리하며 달린다. 차량이 정지하면 안전 삼각대를 들고 전력질주하여 세우고 차량에 측정할 리터수만큼의 휘발유를 주유하고 또 정지할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는 쿨럭쿨럭 요동칠 때 먼저 갓길로 피해야 하는데 가끔 차선에 그냥 정지해버리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주행가능거리는 구현되어졌다. COMPUTER이란 세련된 명칭 뒤에 감춰진 무식한 방법으로.


에쿠스, 너의 본적은 전남 나주여! 

아마 이 시기는 주행가능거리 기능이 점진적으로 전체 차종으로 확대되던 시기일 것이다. 그때 실차 테스트가 진행된 모델은 에쿠스 페이스리프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차테스트엔 자동차 회사에서 시험차를 제공하는데 신차의 경우 차량 디자인 유출을 막기 위하여 검은색 위장막으로 차량을 감싸고 테스트를 진행하게 된다. 에쿠스가 출시될 당시에는 소형차가 대세였고 대형 SUV가 출시되기 전이라 당시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위장막으로 둘러싸인 모습의 이질감은 차량이 아닌 장갑차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 당시 실차테스트 기간에 직장 동료의 부친상이 있었다. 장지는 전남 나주의 시골집이었다. 교통비도 아끼고 월차도 아낄겸 전남 나주 방향으로 테스트 진행 방향을 정하였다. 평소 테스트팀이 아니었던 난 삼각대를 들고 뛴다는 조건으로 테스트팀에 합류하였다. 몇십 킬로 단위로 삼각대로 들고 뛰며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조금씩 취기가 오른 우리는 장주인 친구의 위신을 세워주자는데 뜻을 같이 하였고 시험차의 위장막을 벗겨버리고 장례행렬 선두차로 시험차를 사용하기로 결정해버렸다. 사실 시험차 위장막 제거는 차량 디자인 정보 유출로 징계감이었다. 장례식장이 사람이 많은 병원이었다면 그런 결정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리는 전남 나주의 어느 장지길에 황금빛 에쿠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저 집 아들 성공했나봐...사장이라고 부르던데...' 동네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과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에쿠스는 당당하게 진흙탕 길을 8기통의 위력을 발휘하며 가뿐히 넘어갔다. 부친상을 치르고 온 동료의 말에 따르면 나주 고향 마을에서 에쿠스는 대통령이나 타는 한국에 몇 대 없는 차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거기다 방탄 기능까지 있다고...그리고 얼마뒤 에쿠스가 정식 출시되었다. 제네바, 파리, 도쿄, 디트로이트, 뮌헨 등 세계 5대 모터쇼에 첫 선을 보였을 것이다. 모터쇼에 참석한 MK회장은 알고 있었을까. 회심의 역작인 에쿠스가 그 위용을 처음 드러낸 곳은 제네바도, 파리도 아닌 전남 나주의 황톳빛 장지길이었음을... 화려한 모터걸이 아닌 상복입은 아낙들에 둘러싸여 한국형 대형 세단의 그 황톳빛 태동을 맞이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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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5-05-14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역시 글을 잘 쓰세요.

잉크냄새 2025-05-14 18:32   좋아요 0 | URL
포겟터블님, 오랫만이네요.
그냥 오래된 기억들 주절주절 펼치고 있습니다. 여행기도 주절거려 보려는데, 이건 영 신통치 않네요. 자주 뵈요....

감은빛 2025-05-14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글 너무 재미있어요.
주행가능거리 기능에 이런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더니!
삼각대 들고 뛰어다니시는 잉크냄새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세계 최초의 자동주차 기능도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기술을 큰 자동차 회사에 팔았는데, 여러 이유로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고.

차량 디자인을 잘 알지 못해 에쿠스가 어떤 차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장갑차로 오해를 받을 만한 차였군요.
동네에 오래 회자될 이야기 거리 하나 남겼군요.

잉크냄새 2025-05-14 18:42   좋아요 1 | URL
장갑차 오해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경찰서에 신고된 적이 꽤 있었던 사건입니다. 도로에서 시험차를 목격한 운전자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시커먼 커버를 씌우고 차를 탄다고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어 경찰차가 출동한 경우도 있어요. 고속도로 순찰대가 오면 거의 검문당했고요. ㅎㅎ 아마 차가 어떻게 생겼냐는 경찰 질문에 대부분 장갑차 같다고 답변한 모양입니다.

지금은 SUV도 많이 나오고 대형차가 많아서 그리 커 보이지 않는데 출시 초기에는 꽤나 육중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페크pek0501 2025-05-18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본인이 일하는 분야에서의 경험담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확보합니다!!!
에쿠스는 한때 부의 상징이었죠.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잉크냄새 2025-05-18 20:39   좋아요 0 | URL
ECU 라고 하는 현장 아니면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렇지 내용은 별로 전문성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ㅎㅎ 경험은 일하는 분야에서나 가능한 것이지만요.

에쿠스 초창기에는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크기에 압도되곤 했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된다고 안치환은 노래하였다. 굴하지 않고 비껴서지 않으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은 말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근데, 외로움에 우뚝 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에게 더 애착이 갈 때가 있다. 열흘 남짓 열리지 않던 옆방 문소리에 머뭇머뭇 다이얼을 돌렸을 사내의 손떨림이라든지, 그 손떨림을 너무 잘 알면서도 외로움이 들켜버릴까 살며시 이불을 끌어 덥는 사내의 미안함이라든지, 두 사내 누구에게도 선뜻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냥 외로움에 전염되어 버리는 독자라든지....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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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병률 시인의 시집을 갖고 있는데 이 시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시가 많이 담겼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잉크냄새 2025-05-05 23:28   좋아요 0 | URL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률 시인의 시집중 <바람의 사생활>이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5-05-0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행이 좋네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다는 느낌은 저도 가끔 느낍니다.

그리고 잉크냄새님의 마지막 말씀도 인상적이예요.
외로움의 쓰리쿠션이 천장을 맴돌다니.

어느 출장지의 허름한 여관 방에 머물렀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잉크냄새 2025-05-08 20:13   좋아요 0 | URL
시에서 여관을 모텔로 바꾸면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요. 여관만이 지니는 낡고 어둡고 눅눅한 감성이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예전에 묵었던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 떠올랐어요. 지저분한 이불을 덥고 누우면 천장에 쓰리쿠션으로 떠오른던 상념들...아마 외로움도 한 쿠션 했을 겁니다.
 

재작년부터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집에서 동쪽 바다를 제외한 세 방향으로 네 가지 루트를 잡아 왕복 30km의 코스를 기분과 바람에 따라 번갈아 가며 주행중이다. 같은 코스를 일 년 이상 다니다보니 주변 풍경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익숙해진 만큼 또 세세한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의 계절이 되풀이되던 작년에는 유독 국도변에 핀 꽃들에게 눈이 가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꽃의 생멸이 빈번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빈번함 만큼이나 많은 꽃들이 생멸 주기를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눈맞춤을 이어가던 중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다소 미안함을 느꼈고 작년 늦여름부터 눈맞춤하던 이들의 이름을 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망막에 맺힌 상을 되살려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하나하나 기록하다보니 꽤 많은 꽃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왜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는지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나의 의미가 된다는지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올해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나선다. 작년에 미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초봄에서 한여름까지의 꽃들에게 다시 이름을 불러줄 시간이다.


<작년 한해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국도변에서 만난 꽃들의 이름 -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꽃들도 아직 꽤 많다>


<들국화라 통칭되는 가을 국도변의 국화 종류가 이리도 많더라. 실제 들국화란 명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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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4-12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쁜 꽃이 아주 다양하군요. 관찰력만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지요. 글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관찰력을 갖고 세세히 기록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 저도 배우겠습니다.^^

잉크냄새 2025-04-13 10:33   좋아요 1 | URL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던 꽃들이 이름을 불러주니 제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봄 날의 꽃들도 그 의미를 되찾아 볼까 합니다.

transient-guest 2025-04-15 0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에는 차를 타고 다니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시절엔 하루에 6-7마일씩 아침에 걷고 달리고 했었는데 정말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감도 좋아지는 걸 느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살던 동네는 10마일 반경 잡고 속속들이 길을 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잉크냄새 2025-04-15 17:08   좋아요 1 | URL
꽃이 북상하는 속도가 4킬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꽃의 북상 속도가 아닌 자연과 리듬을 맞춰 걸어가야 하는 사람의 속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속도에서만 자연은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사람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 번 속도를 맞춘 길은 오래도록 그 길을 보여주더군요.

감은빛 2025-04-15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자전거를 언젠가는 꼭 배워야지 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재작년에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해 잠깐씩 연습하다가 며칠 만에 그만뒀고,
작년에도 또 시도하다가 며칠 만에 그만둬 버렸네요.
올해는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꽃들이 참 예쁘네요.
주말에 달리기 할 때 양쪽 천 변에 벚꽃이 멋지게 피어 있었어요.
힘든 몸 상태를 잊으려고 일부러 꽃을 보면서 달렸는데,
그 자리에 그렇게 어여쁘게 피어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잉크냄새 2025-04-15 17:12   좋아요 0 | URL
사실 자전거를 못 타신다는 예전 글에 잠시 의심(?)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ㅎㅎ

걷기도, 달리기도, 자전거도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잠깐만 눈을 돌리고 허리를 숙이면 수줍은 듯 펼쳐진 작은 세상들이 보이게 되더군요. 저도 자전거 페달링이 힘에 부치면 도로변의 꽃들에 눈 맞추며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감은빛 2025-04-23 12:56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의 의심을 받았군요. ㅎㅎ

며칠 전에 저에게 잠깐씩 자전거를 가르쳐줬던 친구들이
저는 자전거를 아직 ‘못‘타는 것이 아니라
탈 수 있는데 아직은 조금 서툴러서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상태
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주더군요.

저는 제가 혼자서 언제든 원할 때 탈 수 없으니 ‘못‘타는 것이 맞다고
우겼습니다만, 그 녀석들이 아니라고 해서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5-04-23 20:24   좋아요 0 | URL
자전거 처음 배울 때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스름 저녁녘 학교 운동장에서 몇 번이고 넘어지며 배우던 때가 그립네요. 그때 뒤에서 잡아주던 친구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참 행복했던 기억중 하나입니다. ㅎㅎ
 

그 곳은 쯔마지에(깨거리)라는 도로변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부터 살펴보면 먼저 꽤 큰 중국 음식점이 있었고 그 옆에 한국 음식점 대장금이 모서리를 끼고 위치해 있었다. 꺽인 모서리를 돌면 토속적인 이름을 붙인 조선족 식당이 있었고 다시 모서리를 끼고 북한 음식점인 대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 도로변에 이어진 다시 중국 가게는 정확히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이 중국에 의해 꽉 막힌 지정학적 위치와 세 국가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조선족의 심리학적 상황를 반영하듯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 음식점 상호는 인기 드라마였던 대장금이 주류를 이루고 궁이나 한성같은 약간은 고전적인 명칭을 고수하고 있었고 조선족은 무지개, 진달래, 해당화 같은 유독 삼음절에 집착한 듯한 토속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북한은 대동관, 칠보산 등 국가는 곧 영토임을 반영하듯 지역명을 주로 사용했다.  


<굴뚝 산업이 제거되기 전 텐진은 세계 2위 오염도시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도 퇴근후 쯔마지에로 가끔 타고 다니던 세냥 짜리 전철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대북 제재가 이루어지기 전 북한 식당은 출장자들이 으레 한번쯤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질적인 그들의 폐쇄된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저녁 한 끼 정도는 꼭 하는 편이었으나 그 호기심은 한두 번 만에 가라앉곤 했다. 먼저 음식이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평양, 함흥 등 지역명을 달고 나오긴 하나 남쪽에 비해 아주 담백하다는 약간의 맛의 차이만 있을 뿐 이국적인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술 또한 솔잎주 등 명칭이나 맛에 대한 호기심에 마셔보긴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싸구려 소주 맛에 금방 잔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북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인지 유독 한국인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몇 번 말을 붙여보다 머쓱하게 말을 거두어 들이곤 했다. 그들은 주로 20대 초중반 평양 출신으로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으며 출신 성분이 꽤나 높은 여성들이었다. 고위층 자녀로서 볼모라는 설도 있었다. 미에 대한 평가도 세월을 타는 것인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그녀들은 곱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이지는 분위기였다. 홀서빙과 저녁 공연 시간에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주고객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 노래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북한 노래는 처음과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 같은 의미로 몇 곡 불려지곤 했다. 한국 노래는 김정일이 좋아했다는 이선희의 'J에게' 와 어떤 이유로 해금되었는지 모르는 노사연의 '만남'이 가끔 연주되곤 했다.  


<악기는 주로 가야금과 전자 기타였고 가끔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도 등장했다>


이런 호기심의 단계를 넘어서 마니아의 단계에 접어든 분이 계셨으니 천진 공장에 근무하는 총경리였다. 그는 출장자 식사도, 고객 접대도, 주재원 회식도, 점심 식사도 모두 대동관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연령대로 보아 북한이 고향일리는 없고 아마 부모님이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잠시 돌았으나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년말 망년회조차 대동관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 동안 올려준 매출을 이유로 VIP로서의 위상을 쯔마지에 만방에 휘날린 쾌거(?)였다고나 할까. 2층 제일 큰 홀에서 진행했는데 북한 여종업원 두 명이 밴드로 참석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술도 몇 순배 돌면서 난 어떤 모습을 쭈욱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석한 형수님들(주재원 아내) 대여섯분이 여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좀 흘렀었고, 상대방의 대화에 호응을 해주는 여성 특유의 감탄사도 들렸었고, 또 다시 중간중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고, 가벼운 건배 제의도 이루어졌고,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리곤 했다. 술기운인지 어떤 미묘한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은 김정일이 좋아하던 'J에게' 와 왜 해금인지 알 수 없는 노사연의 '만남'을 같이 부르기도 했다. 마치고 나오는 길 못내 아쉬운 듯 가볍게 마주 잡은 손을 쉽게 놓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만남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평화는 저런 섬세한 감수성과 친화력에서 올 것이라고.


두달여의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총경리는 역시 대동관으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두운 홀 구석에 모여 눈물을 훔치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VIP급 총경리가 매니저급 남자 복무원을 닦달하여 물어보니 텐진 지역의 대동관을 폐쇄하고 북한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은 영업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여 남은 시간 영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미지수였다. 돌아오는 길 총경리는 마지막 송별회라도 해야겠다고 굳센 의지를 불태웠다. 난 송별회가 진행되기전 귀국하였고 그 이후 진행 여부는 알 수 없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업무로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대동관이 있던 자리는 기념품을 파는 중국가게로 변해있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대장금과 무지개,진달래,해당화는 여전히 영업중이었으나 왠지 지정학적 심리학적 긴장감이 무너진듯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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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0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직 친구가 아니었어요?? 😱

잉크냄새 2025-04-04 21:23   좋아요 0 | URL
네, 변방 아웃사이더라 아직....ㅎㅎ

transient-guest 2025-04-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 대한 글을 올리신 걸 보면 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도 배워보고 싶고, 현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구경도 하면 좋겠다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04-08 20:07   좋아요 1 | URL
땅덩이 넓은 나라는 그 넓이만큼이나 좋던 나쁘던 별의별일이 다 있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다양한 삶과 문화가 존재하더군요. 중국에서의 생과 여행이 저에게는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게스트님의 아이디가 여행과 너무 잘 어울리네요.ㅎㅎ

transient-guest 2025-04-09 03:20   좋아요 1 | URL
ID가 길손이죠.ㅎㅎ 반은퇴를 기점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번 해부터 근처라도 열심히 다니려고 합니다. SV에 있으니 Napa Valley가 조금 무리하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서 한두 달에 한번은 유명한 와이너리 하나씩 가보려고 해요.ㅎ

잉크냄새 2025-04-09 20:06   좋아요 1 | URL
경험상 여행을 멀리 장기적 계획으로 보면 참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 일단 한 걸음 내딪는 걸음으로 여행은 시작됩니다. 좋은 여행 되시길...

감은빛 2025-04-15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한 음식점, 궁금하네요.
말씀처럼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도 북한 사람이 제일 궁금할 것 같아요.

2002년 아시안 게임 당시에 자원활동을 하면서 북한 선수들을 가끔 마주쳤었어요.
키가 엄청 큰 농구선수도 만났었고, 여러 종목의 다양한 선수들을 보았고,
응원단으로 온 여성들도 보고 했었죠.
동포라는 생각, 언젠가는 그들과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잉크냄새 2025-04-15 17:05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끈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금강산도 그렇고, 개성공단도 그렇고 정치적 판단의 압박용 카드로만 활용되고 말아 아쉽습니다. 더 세월이 흐른다면 한민족이란 단어도 아득해지는 시절이 올까 막연해집니다.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작가들의 한 줄 성명


https://drive.google.com/file/d/16mSC2T0fRUyLH6jZDcoww3_dTiOdxYWg/view?fbclid=IwY2xjawJPMkRleHRuA2FlbQIxMAABHVzybVN0xBXI77WUUMFtERz3PY9kM_9zB4UECaTiiqvsSL25AhLVT2Q-ww_aem_-tUMf_ISwjPxefxDmwSUoQ&pli=1



기억하고 연대하고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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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3-26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 톡방에 공유되었길래 이동 중에 조금씩 봤어요. 어제 밤에 큰 아이는 여기서 자신을 가르쳤고 지금 가르치고 있는 예고 문창과 선생님들과 현재 대학교 문창과 교수들을 다 찾아서 그 분들이 쓴 글을 공유해줬어요.

잉크냄새 2025-03-26 19:52   좋아요 1 | URL
여기저기서 누군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의미있는 것 같아요. 직접 동참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기억하고 연대해주는 것이 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한 줄 보태고 싶어도 순 욕만 나올것 같아 신영복 선생님의 글로 한 줄 성명을 대신해 봅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페크pek0501 2025-03-27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인가 신문에서 한강 작가가 파면 촉구에 대한 한 줄 성명을 내놓은 것을 봤네요. 작가 수백 명이 모여 추진하는 것인데 한강 작가한테 연락했더니 메시지를 보내왔대요.

잉크냄새 2025-03-27 20:05   좋아요 1 | URL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학쪽에서 움직였다는 부분도 의미심장하네요. 용기는 몸뚱아리가 아닌 심장임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