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사용자들은 문장 하나를 말할 때마다 그렇게 상대와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 너는 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나는 너에게 존댓말밖에 쓰지 못할 때 나는 금방 무력해진다. 순종적인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런 때 존댓말은 어떤 내용을 제대로 실어나르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리 안에 갇혀 사라진다. 나의 자존을 지키지 못하는 언어, 틀렸다고 꾸중 듣기 좋은 말을 자주 쓰고 싶을 리 없다. 단기적인 대책은 상사, 선생님, 윗세대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장기적인 대책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한국의 세대 구분이 그렇게 촘촘하고 계층 간 단절이 심한 것, 이 사회가 그토록 출세 지향적인 것은 언어 탓이 꽤 크다고 생각한다. ‘존댓말 쓰고 반말 듣는 상황’을 다들 피하고 싶지 않나. 오래도록 그런 처지에 내몰려 억울함이 쌓이고 묵으면 한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p282-


처음 중국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일 중 하나가 중국 직원들의 억양과 말투였다. 직원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쓰는 언어는 동등했다. 그들 사이의 언어와 나에 대한 언어가 다르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그들과 나 사이의 나이와 직책과 서열을 언어와 관련 짓고 있었다. 동등한 언어의 사용, 그들 사이의 말이 나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때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데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해외 고객의 공정 감사에 대응할 일이 많았다. 영어와 중국어권 고객과의 협상 자리의 언어는 평이하고 동등했다. 대화에 높낮이가 없었고 조심스런 격식만이 느껴졌다. 반면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분위기상) 일본과 한국 고객과의 언어는 나를 얼마나 낮추고 있는지, 그리하여 당신이 얼마나 높아지고 있는지는 보여주려는 무의식적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사용할 때 나의 언어 습관은 무척 달랐고 행동의 양태도 달랐다. 스스로 느낄 뿐 아니라 제삼자도 흥미롭고 의아하게 지켜보던 모습이었다. 한국어가 훌륭한 언어인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존댓말이 갑질의 언어로 변질될 때 존대는 굴종을 요구한다. 훌륭한 한글이 존댓말로 대표되는 동방예의지국의 언어가 아니라 반말이 사라진 평등한 나라의 언어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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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6-09-18 0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커피숍 직원이 고객이 아니라 상품을 높이는 것을 희화화 해서 보여주는 코메디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높임말이 참 어렵죠. 나보다 상관이 대화 상대 앞에서 그보다 직급이 낮지만, 나보다는 더 높은 분을 언급할 때 호칭을 높여야 하나? 아님 낮춰야 하나? 이게 참 애매하더라구요.

그래서 아예 아무생각없이 다 높이면, 저 가게 직원 말투가 되는 거죠. 고객님 주문하신 커피가 나오셨어요. 만오천원 되십니다.

잉크냄새 2026-09-19 10:02   좋아요 0 | URL
제가 느낀 바가 있어서 중국에서 복귀한 이후 다시 회사에서 임원직을 수행하면서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어요. 나중에 퇴사할 때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존댓말을 사용한 것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하더군요. 전 사실 일 잘했다는 말을 기대했는데...ㅎㅎ 그만큼 한국 사회 생활에서 연공 서열에 따른 언어의 사용이 경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페크pek0501 2026-09-1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댓말이 갑질의 언어로 변질될 때 존대는 굴종을 요구한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예요.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 좋은 글이 많더라고요.^^

잉크냄새 2026-09-19 10:10   좋아요 0 | URL
성급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전 한국 사회 갑질의 주요 원인중 하나가 존댓말의 변질이라고 생각해요. 말이 의식을 결정하는 언어결정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 갑과 을을 구분하게 만듭니다. 을이 갑에게 하는 존대에는 굴종이, 갑이 을에게 하는 존대에는 비꼼과 무시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마힐 2026-09-20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중국어도 한국과 같은 존댓말은 없지만 호칭으로 상대방을 윗사람으로 보느냐, 나랑 동등 혹은 나보다 아래로 보느냐로 나뉘어 집니다. 다만 그 구분이 한국처럼 확실하지 않고 모호하긴 합니다. 대신 어투나 감정을 통해 이해해야 하죠. 한자어의 특성인가 봅니다. 뜻으로만 해석해야 하니. 아무튼 존대든 하대든 상대를 배려하지 않으면 언어적 폭력이 되는 건 한국이나 중국이든 같은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26-09-20 19:28   좋아요 1 | URL
‘您닌‘과 ‘你니‘의 구분이라든지, 나이를 묻는 예의있는 표현이라든지...하는 것을 ‘조심스런 격식‘ 이라는 문구에 포함해 보았어요. 세상 어디나 언어적 폭력이 존재하는 건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 언어가 존댓말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갑과 을의 언어로 변질될 때 그 폭력의 상흔은 훨씬 크고 잔혹합니다. 말이 의식을 제한한다는 언어결정론에 가장 부합하는 하나의 예시가 존대말과 반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갑질은 어느 사회나 존재하지만 ‘갑질‘이란 단어가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건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죠.
 

지금 살고 있는 방 두 칸짜리 이 집에는 허리까지 오는 낮은 책장이 각 방과 거실에 놓여 있다. 천장까지 높게 올라가는 책장은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아무래도 싫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작업방 책장의 책들은 색깔별로 구분해 꽂아두었다. 이렇게 색깔별로 책을 꽂으면 책 장르가 마구 뒤섞여 의외의 조합이 생기는 게 재미있다. 시집 옆에 과학책, 페미니즘 책 옆에 경제학 책. 색별로 정리하면서 내 책 중에는 흰색 표지 책이 가장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른 색에 비해 흰 책이 4~5배 이상 수가 많다. 다 꽂아놓고 보니 발견한 사실인데 그 이유가 뭔지 무척 궁금하다. 누군가 책표지 색에 대해 쓴 논문이 있을 것도 같다. -p73-





책장을 정리해야 할 때가 생긴다. 여유 공간을 두고 정리한 책들의 틈새에 하나 둘 신간이 자리하면서 드디어 더 이상 꽂을 공간이 생기지 않을 때 다시금 배치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마다 책을 분류하고 꽂는 방식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분류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장르-작가-제목순 등 탐색의 편이성을 염두에 둔 분류법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랑 작가의 책 분류법은 독특하다. 그녀는 책의 겉표지 색깔에 따라 정리한다. 아,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역시 아티스트는 다른가 보다. 나중에 책을 찾을 때의 불편함이야 어쩔 수 없을 테지만 왠지 책장에서 다양한 색깔의 무지개를 볼 수도 있겠구나 싶다. 방 한구석의 책장을 바라본다. 아쉽게도 무지개는 피지 않을 것 같다. 다만 흰색과 검은색, 무채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중간중간 노랗고 파랗고 빨간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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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20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정리하는 경우 보통 도서관 분류법으로 책장에 넣거나 박스에 넣는 편인데 문제는 책 크기가 제 각각이라 정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출판사별로 개성과 색깔을 나타나기 위해 책 크기를 a4,a5등표준 규격으로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책 크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독자입장에서는 책 정리하기가 매우 난감하네요.

잉크냄새 2026-08-21 21:0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책 크기도 천차만별이네요. 특히 정사각형의 큰 책들이 분류하기가 애매할 듯 합니다. 색깔별로, 책 크기별로, 책장에 꽂아보면 특색 있고 재미있을 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6-08-21 0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구매를 자제하는데도 시간이 지나면 책이 늘어나 있더라고요.
책이 다른 가족들의 공간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저는 최대한 높이 쌓으려고 해요.
저는 출판사별로 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26-08-21 21:03   좋아요 1 | URL
저도 일단은 높이 쌓아 공간 점유를 줄이는 방법을 사용중입니다.
출판사별로 정리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뭔가 출판사만의 특색이 드러난 듯 하네요.

감은빛 2026-09-18 03:14   좋아요 1 | URL
오! 출판사 별로 정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잉크냄새 2026-09-19 09:36   좋아요 1 | URL
저도 리스트에는 출판사를 구분하는데 책장은 아직 적용해보지 않았네요. 다음에 한번 도전해 볼랍니다.

마힐 2026-08-26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공간을 차지하니 이제는 전자책으로 구매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전자책도 책이라고 불러줘야 할지는 아직 고민이에요. 책이라고 생각하는 모양도 사라지고 책장을 넘기는 감각도 사라지고,무게감도 사라지고. 그냥 내용만 눈 앞에 나타나게 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 같아서 책이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아요. 책도 인공지능과 결합되면 피지컬은 유지하되 즉 책 두께나 종이 질감은 그대로 유지하되 책장안의 내용들이 독자가 원하는 책에 따라 글자가 바뀌는 시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ㅎㅎ

잉크냄새 2026-08-26 20:4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외국에서 책을 사려면 보관이나 이동의 문제로 인해 전자책도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네요. 그래도 책만이 가질 수 있는 촉감이라든지, 냄새라든지 하는 부분들은 대체할 수 없겠네요. 그리고 또 하나 전 전자책은 조금 읽으면 금방 질리고 머릿 속도 뭔가 아른아른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라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감은빛 2026-09-18 0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이 늘어나면 어떻게 정리하느냐가 늘 고민이죠. 색깔별로 정리하는 건 예전에 생각해본 적이 있었고 실제로 잠시 일부 책들만 해봤는데, 다시 책을 찾기가 어려워서 그만두었던 방법이예요. 저는 저만의 분류법이 있어요. 제 기준 호감도를 중심으로 좋아하는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입니다.

잉크냄새 2026-09-19 13:00   좋아요 0 | URL
호감도 기준이라니...책장을 정리하는 것이 도서관 기준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는데 개인에 따라 참 다양하군요.
 

어릴 적 나는 인생을 선불제로 생각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죽어라 공부만 하며 현재를 ‘지불’하면 그만큼의 괜찮은 미래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밤을 새워 소설을 쓰고 몸을 축내면 그 대가로 편안한 미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덕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편하듯이, 고생과 노력은 초반에, 그 과실은 생의 후반에 따먹는 것이려니 했다.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내 인생은 후불제인 것 같다. 어린 날이 오히려 ‘공짜’였고 지금은 계산을 치르는 중이고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만 같다. -p156-







여행을 목적으로 처음 회사를 퇴직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계속 '왜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관두는지'에 대하여 지겹도록 질문을 받았다. 실질적인 이유는 사십을 넘기면 다시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이대로 삶이 굳어버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대로 말해 버리면 뭔가 바보스러울 것 같아 스스로 '왜'에 대한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었다. 그때 변명처럼 떠오른 생각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살짝 비튼 '가치 보존의 법칙'과 김중식의 '이탈한 자가 문득' 이라는 시였다. 질량처럼 가치 또한 형태를 달리할 뿐 세상 어딘가 온전하게 존재하리라는 믿음,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알려준 시인의 위로는 내 선택을 잘 포장해 주었었다. 인생은 후불제란 작가의 글을 읽다 내 인생은 직불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얻기 위해 버려야 함을 인정하는 등가 교환의 법칙이 직불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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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5-14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6-05-14 22:56   좋아요 1 | URL
오, 감사합니다^^

감은빛 2026-05-15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여행을 목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걸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요. 잉크냄새님의 여행 이야기가 아직 엄청 많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 하나씩 하나씩 꺼내주세요. ㅎㅎㅎㅎ

저는 선불제도 후불제도 별로 공감이 가지 않네요. 그냥 그때 그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이 인생 아닌가 싶어요.

잉크냄새 2026-05-17 09:50   좋아요 1 | URL
여행 시간에 비하면 그리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지는 못했어요. 보통 한 도시에 일주일 이상 머물다 떠나다 보니 많은 것을 보되 또 많은 기회를 잃어버린 것도 있을 것 같아요.

감은빛님이 말씀하신 그때 그때의 삶을 사는 것이 제가 말한 직불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언제부터 우리는 ‘햇빛’과 ‘햇볕’과 ‘햇살’을 구분하여 말하기 시작했을까. 빛과 볕과 살로 변주되는 그 말들은 미세하지만 분명 다른 질감을 지닌 듯하다. ‘햇빛’이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지닌다면 ‘햇볕’은 촉각을 환기하며 감각의 주체에게 보다 가까이 있고 ‘햇살’에 이르면 통각이라고 할, 보다 종합적인 어떤 몸섞임의 상태에 가까워진다. 햇빛이 아직 대상화된 거리 속에 있다면 햇살은 피부와 혀에 감기고 마침내 무언가 부드러운 살점을 나의 내부로 밀어 넣는 듯한 교합의 친밀감 속에 있다. 계절로 치자면 봄과 가을에 그것은 햇볕에 가깝고 여름의 그것은 햇빛에 가깝고 늦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초봄에 이르는 그것은 햇살에 가까운 듯하다. 봄가을에 촉각으로 먼저 느끼는 그것은 햇볕이라는 말이 지닌 적당한 따뜻함을 즐기게 한다. 여름날의 햇빛은 그 앞에 살갗을 봉헌하기가 쉽지 않은, 일단은 피해야 할 거리를 유지하기 십상이고, 쌀쌀하거나 몹시 시려운 겨울날을 지나면서 햇살을 그 살의 거처인 양지로 나를 불러들인다. 겨울에 나는 창가나 마당가로 햇살을 찾아다니고 햇살과의 통음을 즐긴다. 겨울 햇살은 내 속에 숨어있던 적극적인 소통의 열망을 드러내게 한다. -p118-


<시와 사막의 햇빛>


햇빛은 공간 속에서 빛난다. 시각에 공간이 더해져야 그 빛이 비로소 선명해지고 배가 된다. 고립무원의 공간만이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바다나 사막 혹은 도시의 빌딩 위 피사체가 햇빛과 하늘과 대상으로 명확히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 조각 구름마저도 배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작열하듯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려와야 한다. 발 제껴 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한 치도 허용되지 않는 그 곳만이 햇빛을 안을 수 있다.


<옥수수 마르는 마당의 햇볕>


햇볕은 시간의 궤와 축을 같이 한다. 눈이 녹기 시작한 골목길 흙 담벼락에 드리워져 하루 종일 시간의 궤적을 그리며 벽을 어루만진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햇볕의 모든 색감을 담는다. 흙의 모든 질감을 어루만지며 젖은 공간이 말라가듯 그렇게 서서히 스며들어 품어 든다. 은은하게 품고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햇볕이 어루만진 자리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아늑함을 품는다.   


<고향 창가의 햇살>


햇살은 사물과의 실랑이 속에 살며시 드리워진다. 베란다에 걸린 빨래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기어코 방바닥 한 뼘의 공간에 누워 버린다. 누워서도 흔들린다. 때론 힘에 겨워 커튼에 슬며시 드리워져도 좋다. 그런 날은 바람에 실려와도 좋다. 흔들림 만으로도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눈꺼풀 위 한 뼘의 공간에 자리한 햇살의 어른거림은 때론 말라서 매미 날개처럼 바스락 거린다. 두 손 저어 보내기 전까지 햇살은 그렇게 실랑이 하다 문득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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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3-19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햇살이란 말을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어요.

잉크냄새 2026-03-20 16:43   좋아요 0 | URL
저도 찾아본 기억이 나는데 그리 살갑지 않은 해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냥 따스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것이 좋아보이네요. ㅎㅎ

마힐 2026-03-20 0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잉크냄새님 글도 좋지만 올리신 사진도 너무 좋네요. 직접 찍으신 작품 맞으시죠? ^^ 사진에 햇빛, 햇살, 햇볕이 이쁘게 드러났네요. 신기합니다. 저는 진짜 똥손이라 우리 아내를 찍으면 키가 작아지고 얼굴도 커지는 신기한 사진만을 찍어대 언제나 욕을 먹습니다. ㅎㅎ 그래서 사진 잘 찍는 분이 부러워요… 어떻게 찍어야 합니까? ㅜㅜ

잉크냄새 2026-03-20 16:48   좋아요 1 | URL
네, 여행중 직접 찍은 사진들인데 페이퍼 준비하며 사진들을 다시 한번 쭉 살펴보았어요. 그 중 햇빛, 햇볕, 햇살에 가장 가까운 사진을 골라보았거든요.ㅎㅎ

키 작아지고 얼굴 커지게 나오는 사진에 대한 개선안은 인터넷 조회만 해봐도 금방 나옵니다. 아래에서 무릎 구부리고 찍기, 사진에서 발 아래 일정 공간 남기기 등 몇가지가 있는데 구도 등 시간이 필요한 것과 달리 금방 개선할 수 있습니다.

단, 원래 작고 크면 뽀샾외에 방법이 없습니다.ㅎㅎ

페넬로페 2026-03-20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전을 찾아보지는 않지만 세 단어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뉘앙스가 다 다른 것 같아요.
인용해주신 문장이 참 좋아요.
올려주신 사진도요.
사막 사진속의 흔적은 발자국인가요?
오늘 산책하며
햇볕, 햇빛, 햇살을 잘 살펴보겠습니다.

잉크냄새 2026-03-20 16:50   좋아요 1 | URL
네 이집트 시와 사막을 다른 여행자와 같이 반나절 정도 걸어서 들어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문득 돌아본 사구에 남겨진 저와 동행의 발자국입니다.

오늘 햇빛,햇볕,햇살을 충분히 느끼셨는지요?

차트랑 2026-03-20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잉크냄새님,

세 단어에 대한 발췌문도 아주 좋았습니다만
각 단어의 의미를 사진과 함께 읽으니
세 단어의 뜻을 시각으로 각인시킬 수 있을듯 합니다.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잉크냄새님의 글, 태권도 9단의 아크로바틱를 보는듯
예술성 9단 드립니다!!




잉크냄새 2026-03-20 16:53   좋아요 1 | URL
가끔 작가들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동승하여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보는 시간은 즐겁고 흥미롭습니다.
태권도 9단은 작가인 김선우 시인이고 전 흰띠 잉크냄새입니다. ㅎㅎ

stella.K 2026-03-20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좋고, 특히 저 고양이 그림자 사진 정말 좋으네요. 어떻게 저걸 포착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잉크냄새 2026-03-20 16:55   좋아요 1 | URL
제가 기르는 고양이인데 햇살 좋은 날 창가에서 오수를 즐기곤 합니다. 그날 우연히 커튼이 내려와 있었고 낮잠 깬 고양이가 움찔 하는 모습에 바로 핸드폰을 들이댄 거죠. ㅎㅎ

책읽는나무 2026-03-20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후에 산책을 하며 햇빛이 강해졌구나. 생각하며 피하다가도 음지에 가면 또 서늘하여 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잉크냄새 님의 글을 읽다보니 제가 오늘 만난 것은 햇빛이 아니라 햇볕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그래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했었나 봅니다.^^
글과 사진이 또 하나의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잉크냄새 2026-03-21 19:41   좋아요 1 | URL
네, 봄은 햇볕이 가장 어울리네요. 길을 걷다 내가 지금 만난 것이 햇빛인지, 햇볕인지, 햇살인지 가늠해보는 것으로도 즐거운 산책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설픈 글에서 햇님의 여러 모습을 읽고 가셨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ㅎㅎ

감은빛 2026-03-29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들이 정말 멋지네요.
제가 태양광발전 관련 일을 주로 하다보니 ‘햇빛‘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가끔 ‘햇볕‘이란 단어도 사용해요. 그런데 ‘햇살‘은 거의 쓰지 않았었네요.
그냥 단어의 어감으로는 햇살이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는 강의나 발표할 때 햇살을 써봐야겠어요.

해외여행을 거의 가보지 않았지만, 살면서 자랑할만한 것 중 하나가
몽골 고비사막을 아주 짧게 다녀왔다는 것인데요.
생각해보니 사진도 하나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서
이젠 내가 정말 고비사막에 다녀왔다는 증거가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잉크냄새 2026-03-30 20:28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빛에 관한 단어들이 직업적 맥락으로 접근하니 또 새롭게 보입니다. 말씀처럼 에너지쪽으로는 역시 햇빛만큼 강렬한 이미지가 없겠군요. 햇살을 정서적인 접근, 재생에너지의 비유적 표현으로 하면 좀 따스한 느낌일 것 같기도 합니다. ㅎㅎ

전 시간이 지니고 나니 여행에서 남는 것은 기억과 사진이더군요. 이상하게도 여행에 대한 기억은 세월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고 사진은 그 구체적 이미지를 더 각인하게 되는 요소가 되더군요.
 

나는 서평이 이 소중한 공동체(읽고 쓰는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주 짧은 서평이라도, 그리고 악평이라도 그렇다. 

 ”우선 서평은 작가들에게 ‘당신 책을 읽은 독자가 있다’는 신호가 됩니다. 한국의 많은 젊은 소설가들이 응답 없는 벽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거든요. ‘출판사 편집자들 말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긴 있나?’라는 막막함에 시달리다 좌절하는 소설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서평은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고, 움직일 힘을 줍니다.”

 서평은 다른 독자에게도 용기를 준다. 읽고 쓰는 공동체의 시민들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모일 일이 잘 없다. ‘문학하는 하루’ 같은 행사나 독서 모임은 예외적이다. 우리들은 평소에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지낸다. 읽고 쓰는 일은 대개 몹시 개인적인 일인 데다, 단기적으로는 상당히 쓸모가 없다.(회사나 학교에 내야 하는 보고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이때 서평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직 누군가는 치열하게 읽고 있다는 큰 격려가 되지 않을까. 지하철에서 성경이나 수험서가 아닌 책 들고 있는 사람 보면 반가운데, 나만 그런가. -p372-


77편, 현재까지 내가 작성한 리뷰의 수이다. 첫 번째 리뷰가 2003년이니 20여년의 기간에 비하며 참 적은 수치이다. 그것도 대부분 2000년대 중반에 몰려있으니 근 20년 가량 쓴 리뷰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리뷰가 줄어든 이유는 명확히 알고 있다. 비교적 편하게 감상문 수준의 리뷰를 올리던 시절을 지나 전문성을 갖춘 깊이 있는 리뷰가 등장하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에 대한 자기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잘 쓰고 싶다는 열망과 명확한 한계를 느끼는 절망 사이 작가도 아닌 것이 거창하게 절필(?)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올해 들어 다시금 써 보고 있지만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리뷰는 주관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주관적이라는 입장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지만 작가의 서평에 대한 단상이 마음에 와 닿는다. 당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응원이 될테고,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있고 공감하고 있다는 연대가 될테니 말이다. 100자평이라도 꾸준히 올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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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2-19 1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글을 읽고
최근 읽었지만 제게는 난이도가 높았던 책의 리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고수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 있는 경우인지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거창하게 절필˝하려다 생각을 살짝 바꾸어봅니다^^

좋은 하루되십시요~!!

yamoo 2025-12-19 11:32   좋아요 2 | URL
난이도 높은 책이라도 내 느낌을 그대로 쓰는 게 중요하죠. 지금 내 느낌이니까요. 저는 난이도 높은 책을 읽고 용감하게(?) 느낌을 마구 씁니다.ㅎㅎ 이 책이 상찬받을만하다고?! 내가 보기엔 형편없는데...라고 말이죠...무식하면 용감하니까요..ㅎㅎ
그래도 이런 글이 쌓이다보면 난이도 높았던 책도 비판할 수 있게 되더군요. 뭐, 그렇다는 겁니다..^^;;

잉크냄새 2025-12-19 20:23   좋아요 1 | URL
전문 서평가가 아닌 다음에야 책을 읽고 그냥 편하게 자기가 느낀 점을 써 내려가면 될 것인데 뭔가 잘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항상 앞에 나서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신경 안쓰면 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죠. 자꾸 눈에 거슬리게 되죠. ㅎㅎ
어쨌든 리뷰에 좀 더 집중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stella.K 2025-12-19 11: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걸 또 출판사나 서점이 부추기고 있는 분위기라 씁쓸하죠. 저도 갈수록 리뷰를 안 쓰게 되네요. 작가에게도 그런 애로사항이 있군요. 근데 제가 보면 작가가들이 독자와의 만남 같은 것이 아니면 독자와 소통하는 걸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놓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 책 읽어 본다고 하곤 여태 못 읽고 있네요. 잘 지내시죠?

잉크냄새 2025-12-19 20:26   좋아요 2 | URL
작가들에게 또 그런 면이 있군요. 이 책은 문학계의 메이저급 문학상 당선 외에 올라갈 사다리가 없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다보니 응원의, 연대의 내용을 좀 더 부각한 면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스텔라님도 잘 지내시죠?

yamoo 2025-12-19 11: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 달에 한 두 권 정도는 리뷰를 꾸준히 쓰려고 노력합니다. 작년까지는 리뷰 보다는 페이퍼를 주로 썼는데...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얼마 지나면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더라구요. 리뷰를 남기면 다시 신기하게도 복기가 됩니다. 그런 용도로 리뷰를 쓰죠. 올해 목표가 리뷰 20개 였는데 얼추 목표를 채웠습니다..^^

잉크냄새 2025-12-19 20:28   좋아요 2 | URL
개인 입장에서는 리뷰를 쓰면서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복기하는 것이 리뷰의 진정한 순기능이라 생각해요.
저도 올해는 한 달 한 권으로 목표를 잡았는데 절반 정도 달성했네요. 내년에도 리뷰에 좀 더 시간 투자를 해 볼까 합니다.

카스피 2025-12-19 14: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아무래도 각 잡고 진중하게 써야하기에 부담이 크죠.그래서 가벼운 맘으로 휘리릭 쓰는 페이퍼가 편한것 같아요.

잉크냄새 2025-12-19 20:30   좋아요 2 | URL
리뷰가 사실 각 잡을 일도 아닌데 말이죠. 각은 군대 관물대에서나 잡으면 되는데 말씀처럼 리뷰 앞에만 서면 각을 잡게 됩니다. ㅎㅎ 리뷰 쓸 때도 페이퍼처럼... 기억할 만한 문구입니다.

카스피 2025-12-27 00:44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잉크냄새 2025-12-28 11:1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달인 기준이 뭔지 뭔가 모호하긴 하지만요. ㅎㅎ

페크pek0501 2025-12-28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새해에는 리뷰를 꼭 쓰는 걸로... 한 달에 한 권이라도 꾸준히 쓰는 계획을 실천해 보겠습니다. ^^

잉크냄새 2025-12-28 11:16   좋아요 1 | URL
저도 새해에는 뭔가 목표를 잡아볼까 합니다. 100자평이라도 남겨보려고요.

마힐 2025-12-29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먼저 서재의 달인에 오르신 것 축하드립니다!!!
리뷰쓰기 쉽지 않아요. 리류를 쓴다고 생각하면 안 써지더락구요.
그래서 전 내년에는 잉크냄새님같은 달인의 서재에 부지런히 방문해서 댓글이라도 달아 볼려구요... ㅎㅎ
내년에도 잉크냄새님의 좋은 글을 기대해 봅니다.

잉크냄새 2025-12-29 19:4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제가 올린 리뷰나 페이퍼의 수로 볼 때 선정될만한 이유가 있나 하는 의문은 계속 듭니다. 저도 마힐님 서재 자주 방문해 열심히 읽고 댓글로 소통도 자주 하겠습니다.

감은빛 2026-01-26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부터 서평 혹은 리뷰를 쓰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잘 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재밌게 읽은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좀 더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스스로의 기준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는 책에 대한 수다 같은 가벼운 느낌으로 글을 잘 썼는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는 어려운 느낌이네요.
저도 올해는 책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써야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잉크냄새 2026-01-26 21:47   좋아요 1 | URL
아마 전문 서평가가 아닌 다음에야 서평 혹은 리뷰에 대하여 가지는 부담감은 다 비슷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올해는 100자평부터 시작해서 리뷰도 좀 꾸준히 올려보려 생각중입니다.
그래도 알라딘은 서점이니, 눈치도 좀 봐야겠고요.ㅎㅎㅎ